■루이비통의 역사-프랑스의 패션 제국 프랑스의 럭셔리 패션 브랜드인 루이비통은 1854년, 가방 제조사의 견습생이었던 루이 비통(Louis Vuitton)에 의해 설립되었다. 설립 초기 여행용 트렁크를 제작한 루이비통은 160여 년이 지난 지금 세계적인 패션 하우스로 자리 잡았다. -루이 비통의 유년기 (1821) 1821년, 루이 비통(Louis Vuitton)은 프랑스 동부의 프랑슈콩테(Franche-Comté)에서 태어났다. 목공소를 운영하는 집안에서 태어난 루이 비통은 어릴 때부터 자연스레 나무 다루는 법을 익힐 수 있었다. 그는 14살이 되던 해, 파리에 대한 동경으로 무작정 파리에 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루이 비통은 약 400km가 되는 거리를 무일푼으로 걸어가기 시작했고, 2년 후 파리에 도착했다. 시대의 변화를 목격하다 (1837) 파리에 도착한 루이 비통은 1837년, 한 가방 제조사의 견습생이 되었다. 그해, 파리에는 생제르맹(Saint-Germain) 철도선이 개통되면서 역마차에서 고속철도로 여행하는 시대로 변화했다.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귀부인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치마를 크게 부풀리는 속치마가 유행했기 때문에 짐을 싸는 것이 어려웠다. 이때 루이 비통은 하루에 13시간씩 귀족들의 여행 짐을 꾸리는 일을 했다. -루이비통의 시작 (1854) 많은 양의 짐을 싸는 데 탁월했던 루이 비통은 나폴레옹 3세의 부인인 외제니(Eugenie) 왕비와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1854년, 루이 비통은 외제니 왕비의 후원으로 뇌브 데 카푸신(Neuve des Capucines) 4번가에 자신의 이름을 건 포장 전문 회사 '루이비통'을 열었다. 당시 트렁크는 뚜껑이 볼록해서 차곡차곡 쌓기가 어려웠는데, 루이비통의 트렁크는 뚜껑이 평평하여 마차 위에 쌓기가 용이했다. 루이비통의 사업은 날로 번창해나갔다. 1859년, 루이비통은 주문량이 많아지자 아니에르(Asnieres) 지역에 첫 번째 작업장을 설립했다. 아니에르는 센 강변을 끼고 있어 원자재 수입과 제품 운송에 용이했다. 오늘날 아니에르에는 220여 명의 장인이 루이비통 제품을 만들고 있으며, 루이비통은 전 세계 14개의 작업장을 가지고 있다. 잠금장치의 개발 (1886) 1886년, 루이 비통의 아들인 조르주 비통(Georges Vuitton)은 트렁크에 사용하는 자물쇠를 개발했다. 5개의 날름쇠로 된 자물쇠는 원래의 열쇠가 아니면 절대로 열 수 없었고, 디자인적으로도 아름다웠다. 루이비통이 잠금장치를 개발하면서 여행 트렁크 안에 귀중품을 넣을 수 있게 되었다. - 다미에 캔버스 개발 (1888) 루이비통 트렁크가 큰 인기를 끌면서 점차 모조품이 등장했다. 1888년, 조르주 비통은 이를 막기 위해 베이지색과 갈색의 바둑판 무늬의 '다미에(Damier: 프랑스어로 체크무늬를 의미)' 캔버스를 개발하여 오리지널 루이비통임을 증명했다. 그 후 1998년, 다미에 에벤느(Damier Ebene)로 재탄생했으며, 다미에 아주르(Damier Azur) 등으로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있다. 모노그램 캔버스 개발 (1896) 1896년, 조르주 비통은 루이비통의 이니셜인 L과 V를 결합하고, 꽃과 별무늬를 반복한 디자인의 '모노그램(Monogram) 캔버스'를 만들었다. 모노그램 캔버스는 지금까지 루이비통의 전통을 대표하며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있다. 루이비통 부티크 (1914)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 위치한 루이비통 부티크는 1914년에 오픈했다. 당시 이곳은 세계적으로 여행 관련 제품을 판매하는 가장 큰 매장이었으며, 오늘날까지 같은 위치에 자리하여 루이비통 부티크를 대표하고 있다. 루이비통 부티크 건물 앞에는 '1854년에 설립된 파리의 트렁크 제조사, 루이비통'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루이 비통 3세, 가스통 비통 (1936) 1936년, 조르주 비통의 아들 가스통 비통(Gaston Vuitton)이 가업을 이어받았다. 그는 새로운 매장을 열기 위해 뉴욕, 런던 등을 정기적으로 여행하며 예술적 안목을 넓혔다. 가스통 비통은 대서양 횡단 정기선, 오리엔트 익스프레스, 골드 애로우 등의 열차 여행에서 받은 영감을 루이비통의 디자인에 반영했다.
- 루이비통의 위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루이비통은 오래된 단골 고객을 중심으로 가방을 제작하면서 시대에 뒤처진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 속에 가스통 비통의 사위인 앙리 라카미에(Henry Racamier)가 루이비통의 경영자로 나섰다. - 앙리 라카미에, 부활의 역사를 쓰다 앙리 라카미에는 루이비통을 취급하는 중간 상인들을 모두 정리하고 뉴욕 57번가와 아시아 전역에 루이비통 직영점을 열었다. 그는 '에피(Epi)'라는 이름의 가죽 라인을 새롭게 내놓으면서 신제품을 보강했고, 요트 대회 등을 후원하면서 브랜드 이미지 제고를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1984년, 앙리 라카미에가 경영을 맡은 지 7년 만에 루이비통의 매출은 15배로 성장했다. LVMH 그룹을 만들다 (1987) 1987년, 앙리 라카미에는 루이비통과 주류 기업인 모엣 헤네시(Moët Hennessy)의 합병을 진두지휘하여 LVMH 그룹을 만들었다. 1988년에는 지방시(Givenchy) 패션을 인수하며 규모를 키웠다. 이후 LVMH 그룹은 당시 크리스챤 디올을 운영하던 베르나르 아르노(Bernard Arnault) 회장에 의해 인수되었다. - 아르노 회장의 경영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은 루이비통에 판타지를 부여했다. 1933년, 자동차 경주 대회를 재조직하여 후원했고, 루이비통의 작업실인 아니에르 공방으로 기자들을 초대해 트렁크의 제작 과정을 공개했다. 모노그램 캔버스 가방의 탄생 100주년인 1996년에는 아르노 회장의 기획 아래 비비안 웨스트우드 등의 디자이너들이 루이비통 캔버스 가방을 재해석했다. -마크 제이콥스의 영입 (1997) 아르노 회장은 1997년, 루이비통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마크 제이콥스(Marc Jacobs)를 영입했다. 마크 제이콥스는 루이비통 패션 라인을 확장하고 슈즈 컬렉션을 선보이면서 루이비통을 토탈 브랜드로 성장시켰다. - 루이비통의 현재 -2002년, 루이비통은 시계 라인인 탕부르(Tambour) 컬렉션을 론칭했으며, 정통 무브먼트를 사용한 최고의 시계를 만들기 위해 스위스 라쇼드퐁(La Chaux-de-Fonds)에 시계 워크숍을 세웠다. 이 밖에도 하이 주얼리, 필기구 컬렉션까지 선보이면서 루이비통 라인을 확장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