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륙 여행기
설악산에서 가야산까지, 그리고 라이딩
퇴직하면 꼭 해보고 싶었던 전국 라이딩. 제주도 해안도로를 시작으로, 남해안, 동해안, 서해안의 해안길과 내륙, 5 개의 코스로 나누어 라이딩을 했다. 명소의 탐방과 관광도 하고, 특별한 사람을 만나 취재도 했다. 40 kg의 짐을 자전거에 싣고 달리느라 상당히 힘이 들었고 무릎과 어깨에 통증이 있어 치료받으며 다녔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부터 무릎에 이상이 있었는데 자전거 여행과 농삿일까지 하느라 무리했나보다. 약을 먹고 주사를 맞으며 라이딩을 했다.
그런데 이번 내륙 여행은 설악산으로 갔다가 해인사까지 내려간 후, 충주를 경유하여 상경하는 약 2 주일의 계획으로 출발했다. 북쪽 설악산에서 남쪽 합천 가야산까지 다녀오려니 아무래도 자전거만으로는 무리였다. 할 수 없이 라이딩이 가능한 곳만 자전거로 달리기로 하고, 지역 이동은 자동차로 하고자 SUV 승용차에 자전거를 싣고 출발했다,
침식은 텐트와 차에서 해결했다. SUV 자동차였기 때문에 뒤 의자를 앞으로 꺾으면 충분히 누울 수 있었다. 침낭에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잤는데, 더러는 전기장판을 사용했다. 식사는 거의 해 먹었고, 점심은 빵, 떡, 과일 등 간식으로 해결했다. 음식점에서 매식을 한 적은 없다.
여행 경비를 최소화하는 요령을 익히기 위하여 불편을 극복하는 여행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0일 이상의 5 차례 여행에 준비물품의 구입을 제외하면 총 60일의 여행에 경비는 150 만원쯤 들었나 보다.
여 정
17일 : 수원에서 10시에 출발, 16시 설악산 야영장 도착
18일 : 오색약수터에서 용소폭포 왕복, 평화의 댐 도착
19일 : 화천 딴산유원지, 토속어류 생태체험관, 파라호 전망대
화천 100리 산소길 라이딩, 감성마을 도착
20일 : 이외수 문학관 관람, 이외수 강의 수강, 천체망원경으로 달 관찰
21일 : 정선군청 옆에서 아우라지까지 동강 라이딩, 하이원 리조트 숙박
22일 : 민둥산 억새밭 등산, 안동 마애솔밭공원경유, 하회마을 도착
23일 : 하회마을 탐방, 남명자 야생화 연구가 탐방, 청량산 경유 월영공원 산책
24일 : 마애솔숲공원 왕복 라이딩, 마애선사 유적전시관 관람. 가야산 도착
25일 : 해인사 관람, 가야산 등정, 단양 새한서점 도착
26일 ; 새한서점 취재, 이오덕학교 탐방, 박기양 선배님댁 방문, 귀가
설악산 오색약수터에서 용소폭포 가는 길
1. 설악산 산행
출발한 시기가 설악산 단풍이 절정일 때다. 설악산 단풍도 보고 공릉능선을 가 보고 싶었다. 설악산 대청봉을 올라간 적이 있지만 공릉능선을 가보지 못해 출발 전, 설악산에서 하루 자기 위해 대피소를 알아보았다. 희운각대피소와 소청대피소는 정원이 차서 예약할 수 없었고, 중청대피소에 자리가 있어 18일 밤의 숙박을 예약했다.
높은 산에 단풍이 곱게 물드는 걸 보며 양양고속도로를 달리는데 단풍이 곱고 햇빛도 맑았다. 이번 여행을 끝으로 국내 라이딩을 마칠 예정이다. 양양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날씨도 화창하여 기분이 매우 상쾌했다. 퇴직 이후 계획했던 대로 이렇게 여행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강원도로 접어들자 많은 터널이 나왔다. 옛날엔 산을 뚫기보다는 휘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설악산까지 가는 길이 꽤나 멀었지만 이제는 산이 나오면 터널을 뚫어 버리기 때문에 거리가 단축되었다. 그래서 설악산이 더 가까워진 것이다.
설악산에 다다랐을 무렵, 날씨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설악산에 왔을 때는 결국 비가 내렸다. 오후 4시쯤 설악산 야영장에 도착하니 비가 제법 내렸다. 야영장 관리소에 들러 예약한 야영장 자리, B1을 배정 받아 텐트를 치려니 불편하기도 했고 약간 걱정도 되었다. 더구나 야영장 관리인은 나의 태도가 좋지 않다는 듯 못마땅하게 대했다. 전형적인 공무원 스타일이었다. 어떻게 지금의 시대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까. 다음날 아침에 만난 관리인은 상당히 친절하여 너무나 비교되었다.
내가 배정받은 자리는 전기를 쓸 수 없는 곳이었다. 전기를 쓰는 곳은 맞은편에 따로 있었다. 그곳에는 몇 개의 텐트가 있었지만 내가 예약한 B1 야영장은 전기를 쓸 수 없기 때문인지 텐트를 친 게 보이지 않았다. 먼저 텐트를 쳐야 다음 일을 볼 수 있는데 비가 내려 주저했다. 자전거에 싣고 다니는 작은 텐트는 플라이가 없어 비가 많이 내리면 비에 젖을 수 있어 상당히 불안했다.
잠시 기다리니 비가 멈추다 내리다 심하지 않아 텐트를 치고 가까운 마트에 가서 반찬거리를 구해왔다. 어둡기 전에 내일 등산할 길을 알아보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설악산 입구의 탐방 안내소까지 갔다.
개천 건너 높은 바위산 산등성이에 하얀 구름이 걸쳐 있는데 단풍과 어우러져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탐방안내소에 들어가 중청대피소로 가는 등산로와 오색약수터로 가는 버스 편을 알아보고 야영장으로 돌아왔다.
야영장에 돌아오니 B1 야영장에도 세 개의 텐트가 쳐져 있다. 건너편의 전기가 들어오는 곳은 야영객이 많고, 고기를 구워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걸 볼 수 있는데 전기를 쓰지 못하는 우리 구역은 캄캄했다. 텐트도 닫혀 있어 어둠이 깊었다. 전기를 쓸 수 있는 곳은 4,000원을 추가로 내기 때문인지 분위기가 달랐다. 빈부의 차이처럼….
밤이 깊어지며 비가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해 새벽까지 줄기차게 내렸다. 텐트 안이 서늘하여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새벽 5시. 폭우로 입산이 금지되었다는 문자가 왔다. 대피소의 예약금은 환불한다는 것이다. 참 아쉬운 일이다.
아침을 지어먹고 텐트를 걷었다. 텐트는 흠뻑 빗물이 젖었고, 바닥에 깐 여러 겹의 비닐 깔개도 물에 넣었다 건진 것처럼 물이 흘렀다. 텐트 안으로 물이 들어오지 않은게 천만 다행이다. 텐트와 깔개의 물을 대충 털고 짐을 꾸렸다.
10시에 오색약수터로 출발, 약수터 입구, 가게의 주차장에 세워놓고 우비를 입은 후 밖으로 나왔다. 많은 사람들의 뒤를 따라 용소폭포를 향해 계곡으로 들어갔다. 오색의 단풍이 소나무와 바위, 계곡 물과 어우러져 곳곳이 아름다워 단풍 보랴 사진 찍으랴 걷는 속도가 나질 않았다. 단풍 자체만으로도 탄성을 지를 만큼 아름답지만 기암괴석의 바위와 나무가 함께 어울렸을 때 최고의 절정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구나 비도 멎고 이따금 쏟아지는 햇빛이 나뭇잎을 비추니 단풍은 조명을 받은 것처럼 찬란하게 빛났다.
3년 전에 가보고 경탄했던 장가계, 그 경치 못지않은 장면들이 설악산에도 많았다. 예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아름다움이었다. 용소폭포까지가 정말 아름다웠다. 이렇게 설악산의 단풍이 절정일 때 와 볼 수 있었던 것은 퇴직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재직 중에는 휴일에 와야 하는데, 휴일에는 길이 막혀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설악산에 올 용기를 내지 못했다.
설악산 산행은 공룡능선을 타야 제대로 산행을 하는 거라 하여 대피소를 어렵게 예약했다. 그런데 비가 많이 와서 오르지 못하고 오색약수터에서 용소폭포까지만 다녀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안타까웠다.
화천 평화의 댐으로 가기 위하여 차를 타고 설악산을 휘도는데 골짜기 다리 주변에 여러 대의 자동차가 서 있다. 여심폭포와 등선대로 오르는 계곡, 흘림골 입구다. 많은 사람들이 휴대폰을 들고 사진촬영에 열중이었다. 나도 차에서 내렸다. 감격스런 단풍이어서 여러 장의 사진을 촬영했다.
산 고개를 넘어 내려오는데, 설악산국립공원 장수대분소가 나왔다. 역시 이 계곡도 단풍이 화려하여 주차하고 사진을 촬영했다. 비가 부슬거렸지만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진 찍기를 정말 좋아한다. 나도 역시 그렇다.
2. 평화의 댐으로
평화의댐, 높이 125 m, 길이 601 m. 국내 세번째 담수량 26억톤
점심을 차에서 떡으로 해결하고 화천 평화의 댐을 향하여 달렸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 북한의 수공(水攻)에 대비하기 위해 평화의 댐을 건설한다고 꽤나 많은 성금을 걷었다. 당시에 여러 명목으로 성금을 걷어 직장, 집, 단체에서 성금을 거듭 냈다. 너무 심하게 성금을 걷어 부정 축재하는 건 아닌가 하여, ‘정말 필요한 댐일까’ 하는 의구심을 가졌었다. 김정일이 서울을 물바다로 쓸어버리겠다고 위협을 한 적도 있는데, 이 댐 건설 이후에는 그런 말이 다시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정권이 바뀐 뒤에 더 높이 쌓으며 보강을 했다. 1989년에 80 m 높이로 1단계 완공했으나, 2002년에 댐 높이를 높여 2단계 공사를 했다. 그리고, 2005년에 증축 공사를 마쳐 높이 125 m, 길이 601 m로 만들어 국내에서는 가장 높은 댐이 되었다. 그리고. 29억톤의 소양강댐과 27억톤의 충주댐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26억톤의 물을 담아놓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이후 물 문화관, 세계종공원, 비목공원, 안보관, 상설전시장과 공연장을 더 갖추었다. 이 댐이 전두환 정권 때는 정권 안보에 필요했는지 모르지만 지금에는 물 확보와 치수에 아주 중요한 댐이 되었다. 그리고, 주변에 공원과 휴게 시설을 많이 갖추어 놓았다. 지금도 댐 하류 주변에 공원과 캠핑장을 만들고 있어 내년부터는 야영도 가능하다 한다.
중국의 만리장성을 쌓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외적의 침입을 막은 적도 없다. 그러나, 지금은 그 만리장성을 보기 위해 외국 관광객이 한 해에 1억 명쯤 온다니 얼마나 많은 관광 수입을 올리는가? 역사의 아이러니다.
댐 위에 올라와 보니, 댐의 폭이 넓고 육중하여 웬만한 폭격에는 끄떡도 하지 않을 만큼 견고해 보였다. 댐 옆에는 평화광장이라는 공원과 주차장, 여러 가지의 조형물을 만들어 놓았다. 에밀레종을 본떠 만든 ‘세계 평화의 종’과 ‘노벨 평화의 종’이 종각 안에 있다. ‘평화의 종’은 평화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탄피를 사용해 만들었다 한다.
댐의 아래에서 보면 수문처럼 보이는 게 있어 댐 하류와 상류가 연결된 것 같다. 그러나, 그건 Tric art 그림이다. 감쪽같다.
댐 하류와 상류가 연결된 것 같은 그림. Tric art
댐의 아래 공원에는 특이하게도 커다란 목종(木鐘)이 있다. 댐 주변과 댐 아래에는 평화공원, 비목공원이 있고 전망대도 있어 볼거리가 많다. 조경도 잘 해 놓아 경관이 수려하다. 댐 하류에는 새로 만드는 선착장, 공원, 캠핑장도 있다. 수도권에 이런 댐이 있다면 무척 많은 관광객이 몰려왔을 것이다.
해가 산등성이로 넘어가는 일몰, 그야말로 평화가 깃드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어둠이 몰려오기 전에 잠자리를 찾아야 했다. 지도에는 이 댐 주변에 캠핑장이 나와 있어 건물의 식당에 들어가 위치를 물어보았다. 그런데 지금 공사를 하고 있어 내년에나 이용이 가능할 거라 했다. 내 자동차는 캠핑카처럼 차 안에서 잘 수 있다고 했더니, 이 물 문화관은 24시간 화장실 이용이 가능하여 이 주차장에서 지내도 된다고 했다.
댐 경비실에 가, 여기서 밤을 지내도 되느냐고 확인해 보았다. 괜찮지만 여기서 2~3 km 내려가면 무료 야영장이 있다고 알려 주었다. 자동차로 내려가 평화쉼터에 문의하면 된다하여 가보았다. 개인이 운영하는 허름한 간이식당이 그 쉼터였다. 들어가 문의하니 야영장을 알려주었다. 수돗물과 이동식 화장실이 있어 야영을 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개울로 지나가는 골바람이 싸늘하고 음산하여 텐트를 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지내기가 마음 내키지 않았다. 그 쉼터 가게에 들어가 반찬을 살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김치를 판다고 하여 2,000원 값을 샀다. 고맙게도 많이 주었다. 다시 평화의 댐 주차장으로 올라왔다.
밥을 지어먹고 차 안의 운전석에 앉아 실내 등을 켜고 일기를 썼다. 졸음이 밀려올 즈음에 잠자리를 마련했다. 조수석 의자를 앞으로 꺾어 눕히고 자동차 뒤편에 요를 깐 후, 침낭 속으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잤다. 혼자 눕기에는 공간이 충분했다. 어제의 좁은 텐트보다는 차 안의 잠자리가 한결 나았다.
3. 화천 100리 산소길 라이딩
화천 산소100리길, 라이더들의 명소 칠석교(다리 중간의 조형물이 반지 모양이라 반지교로도 함)
평화의 댐 위에서 맞는 아침. 햇살이 눈부셨다. 단풍은 더 화사한 빛깔로 반짝였다. 자동차를 타고 높은 산들을 비켜 내려오며 단풍을 보느라 눈이 호사를 했다. 대붕터널, 재안터널, 해산터널을 차례로 통과하며 산 아래로 내려오니 북한강 옆 딴산유원지가 나왔다. 물길이 얕아 개울 같은 북한강을 건너 조금 오르니 토속어류생태체험관이 있다. 체험관 입구에서 딴산유원지 위의 능선 우측으로 산등성이가 길게 늘어져 있다. 능선의 높낮이가 비교적 고르게 이어져 산 위로 보이는 하늘이 무척 파랬다. 하늘이 너무 파래서 눈이 시릴 정도였다. 아! 이 맑은 가을 하늘. 파란 하늘이 눈이 부시어 눈시울이 뜨거웠다. 아! 이 감동을 누구와 나누나?
아무도 없는 체험관에 혼자 들어가 수족관에 있는 물고기들을 보았다. 쏘가리, 가시고기, 쉬리, 열목어를 보았다. 암컷이 알을 낳아놓고 가버린 알에 수컷이 수정한 후 부화할 때까지 지키고 보살핀다는 가시고기의 설명을 읽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희생적으로 살아가는 내용의 소설, ‘가시고기’가 생각났다. 아, 그래서 그 제목을 썼구나 싶었다.
체험관을 나와 파로호 전망대로 갔다. 안보전시관을 지나 산 위에 오르니 파로호 전망대인 팔각정이 나왔다. 정자에 오르니 왼쪽으로 화천댐이 있고 오른쪽으로 파로호가 길게 늘어졌는데 청남빛 호수가 참으로 잔잔하다. 우측으로 산이 가로막아 강의 꼬리가 보이지 않았다. 내려가 보트를 타고 그 수면 위로 달리면 얼마나 좋을까!
일본이 패망하기 전에 대륙 침략을 위해 이 댐과 수력발전소를 만들었단다. 6.25 때 이곳에서 국군이 중국군을 크게 무찌른 승전을 기념하여 이승만 대통령이 파로호(破虜湖)로 휘호한 후부터 그 이름을 쓰게 되었다 한다. 하늘을 담아 놓은 듯한 파란 물이 하늘 보다 짙다. 그야말로 청출어람(靑出於藍)이다.
전망대를 내려와 안보전시관에 들어가 진열된 물품과 사진, 게시 글을 보았다. 6.25 때의 무기들과 복장, 6.25 전쟁의 발발과 진행에 관한 내용을 읽고 나왔다.
북한강을 따라가 화천읍을 지나 하남면사무소까지 갔다. 주차장에 차를 두고 라이딩을 출발 하려 했다. 그러나, 이곳에 주차 후 자전거를 꺼내 라이딩 복장으로 출발하기가 민망했다. 다시 차를 몰고 북한강 가까이 다가갔다. 계성천과 북한강이 만나는 지점이었다.
이곳에 주차 공간이 있었다. 차에서 내려 그제 밤에 비에 젖었던 텐트와 비닐 깔개, 우비 등을 꺼내 천변에 널었다. 점심을 지어 먹고 라이딩 복장을 갖춘 후 자전거에 올랐다. 국내 ‘아름다운 자전거 여행길 30선’에 소개된 ‘화천 100리 산소길’이다.
전형적인 가을 날씨. 맑고 푸른 하늘과 강변 양쪽으로 펼쳐지는 단풍 숲. 정말 신명나는 라이딩이었다. 풍광이 아름다워 사진촬영을 하느라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30분쯤 지났을 때, 물과 간식을 넣은 배낭을 가져 오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아뿔싸!”, 배낭에는 자동차 키도 들어있는데, 배낭을 차 안에 두고 문을 잠그고 온 거였다. 걱정이었다. 차 밖에 배낭이 있다면 누군가 가져갔을 지도 모르고, 차 안에 있다면 열쇠 수리공을 불러야 한다.
불안한 마음으로 서둘러 돌아 와보니 차 안에 배낭이 있다. 아내에게 어찌하면 좋으냐고 전화로 물으니 자동차보험사로 연락하면 해결해 줄 거라고 알려주었다. 전화하고 10분쯤 지나자 보험사 직원이 왔다. 간단한 도구 두 가지로 금세 문을 열었다. 너무나 고마워서 “하나 드세요. 고맙습니다.” 하고 감을 하나 건네주었다. 보험사의 놀라운 시스템이다.
다시 북한강을 20분쯤 달려가니 강을 가로 질러 건너는 칠석교가 보였다. 연중 가을 강이 으뜸이라는데, 역시 오색 찬연한 단풍을 보며 완만한 강변길을 달리는 기분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붕어섬으로 들어가니 유원지로 조성되어 관리인도 있고, 자전거 대여점과 화장실, 여가 활용 시설이 있었다. 안쪽에는 축구장과 테니스장이 있었다. 야영이나 취사가 가능한지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어려운 곳이었다. 그저 여유롭게 산책을 하거나 여럿이 놀기에 좋은 섬이었다.
화천대교와 대붕교, 구만교를 지나는데 아늑한 숲길이 나왔다. 양쪽으로 나무가 우거졌는데 그 사이로 자전거길이 있다. 중년의 한 커플이 나란히 걸어가는데 그 광경이 매우 보기 좋았다. 부러웠다. 연인처럼 보이는 저들은 이 가을이 얼마나 즐거울까. 맞은편에 화천수력발전소가 보였다.
꺼먹다리 옆에 잠시 내려 사진을 촬영하다가 맞은편에 오는 라이더에게 강 건너 맞은편에도 자전거길이 있느냐고 물었다. 일부 있지만 불편하니 다시 이 길로 돌아오는 게 좋다고 했다. 그리고 화천댐까지 가면 볼거리가 여러 가지 많으니 꼭 가보라고 권유했다.
잠시 더 달리니 오전에 지나갔던 딴산유원지가 나왔다. 강을 건너니 가게가 있는데 사람이 보이지 않아 더 이상 길을 묻지 못하고 오르막을 달렸다. 2 km 쯤 달리니 화천댐이 보이는데 출입 제한 표지판이 나왔다. 그 표지판 때문에 화천댐으로 가는 길을 두고 댐 아래쪽으로 갔다. 자전거 인증센터 부스가 있는데 관광객이 별로 오지 않는지 허술하고 쓸쓸한 모습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송어 양식 발상지라는 표지석이 있다. 1965년에 이곳에서 처음으로 송어를 양식했다니 53년 전이다. 2015년에 만들어 놓은 송어 양식 50주년 기념비도 있다. 그 당시에 시멘트로 만든 교실 한 칸 정도의 초라한 수족관이 있다. 지금은 물조차 말라붙어 썰렁했다.
그 수족관 왼쪽에 철골 구조물이 있고, 실내 수족관으로 보이는 건물이 있는데 지금도 송어를 양식하는 것 같았다. 조금 더 앞쪽으로 들어가니 공원처럼 조성해 놓은 공간이 있다. 송어 양식 기념비도 있고, 여러 가지 조형물이 있다. 벤치도 만들어 놓고 간이 휴게소로 조성했는데 관리를 안 하는지 풀들이 우거져 황량한 폐허 같았다. 벤치에 앉아 오후의 따뜻한 햇빛을 쪼이며 잠시 머물다 돌아 나왔다.
자전거로 나오다가, 출입제한 구역이지만 아무도 단속하지 않아 화천댐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올라갔다. 댐의 입구가 나왔다. 경비 복장의 두 사람이 자전거를 한 쪽에 잘 두고 가라는 주의만 했다. 초소 같은 사무실 옆으로 팔각정이 단풍에 둘러싸여 경관이 아름다웠다. 댐 쪽으로 가니 문이 잠겨 있다. 실제 출입 금지 구역은 거기부터다. 만약 500 m 전방에 있던 출입제한 표지판을 보고 순진하게 돌아갔으면 화천댐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 것이다. 여행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출입을 막은 댐의 시작 부근에서 파라호를 보았다. 휘어져 돌아간 강이라서 댐에서 볼 수 있는 파라호는 약 1 km 정도였다. 강은 꼬리를 사리고 모습을 감추어 신비롭기도 했다.
산그늘이 길어졌다. 해질 시간이 가까워졌나 보다. 딴산유원지로 되돌아 나오며 북한강 하류 우측으로 달리다 보니 강 건너 왼쪽 산 가장자리로 나무 데크길이 있다. 둑길 아래 강 가까이 내려가 폰툰다리(상륙과 도하시 사용하는 부교)를 건넜다. 산 가장자리의 데크 길로 들어가는 입구에 ‘숲으로 다리’가 나왔다. 이 이름은 소설가 김훈이 지었다는 설명이 씌어 있다.
산 가장자리에서 5 m쯤 떨어진 물 위에 만들어 놓은 데크길을 자전거로 달렸다. 나무판을 묶어 걸친 다리라서 판자 쪽을 하나하나 지날 때마다 덜컹거렸다. 그러나 물 위를 달리는 기분이 좋아서 그 소음을 기차의 덜컹거림처럼 즐거운 박자로 삼았다.
그렇게 약 2 km쯤 달리니 데크 길이 끝나고 폭이 1 m 내외인 비포장 산길로 이어졌다. 산악자전거 길이다. 그 산길을 2 km쯤 달리니 시멘트 포장길이 나왔다. 그 길을 70세 전후의 노부부가 앞에서 나란히 걸어가는데 매우 정겨운 장면이었다. 지나쳐 가며 “두 분, 걷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하고 인사를 했다. 키가 큰 반백의 노신사가 여유롭게 인사를 받았다. 서울 대학로에 살았는데 2년 전에 내려왔다가 이곳이 좋아 아주 눌러 살게 되었다고 했다. 매일 한두 시간 이렇게 아내와 산책을 하는데 공기가 좋아서 건강이 좋아진 것 같다는 것이다. 그 부부를 따라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렇지만 어둡기 전에 화천의 이외수 문학관에 가야 좋을 것 같아 아쉽지만 작별 인사를 하고 앞서 달렸다.
공원처럼 조성한 곳을 지나 강변길을 10 분쯤 달리니 칠석교가 나왔다. 견우직녀가 만나는 칠석날을 연상하고 붙인 이름일까? 강을 건너는 다리 중간에 동그란 조형물까지 만들어 놓아 디자인이 아름다웠다. 반지 모양이었다. 그래서 반지교, 반지다리라 한다. 아까 이 다리 옆을 지나갈 때 건너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늦을 것 같아 지나쳤는데 잘 되었다.
표지판에는 자전거에서 내려 끌고 건너가라고 씌어 있지만 통행하는 사람이 없어 자전거를 타고 다리를 건넜다. 다리 중간 지점에 넓은 휴식처가 있어 잠시 서서 셀카로 사진을 촬영했다. 해가 기울고 어둠이 내려와 사진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다리 중간 지점에서 가장자리로 내려오는 길목에 릴낚시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 고기가 잘 잡히느냐고 물으니 안 잡힌단다. 어망조차 없이 낚싯대만 들고 있다.
다시 출발 지점인 계성천가로 오니 대지에 어둠이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등불이 들의 꽃처럼, 밤의 별처럼 하나 둘 피어나고 있었다. 저녁을 해결하고 그릇을 개울물에 씻었다. 여기서 하룻밤을 지낼까 했으나 화장실이 없고, 강바람과 골바람이 지나가는 길목이라 추위가 걱정 되었다. 그래서 밤길이지만 이외수 문학관으로 가다가 잘 만한 곳을 찾아보려고 출발했다.
화천 100리 자전거길의 '숲으로 다리', 소설가 김 훈이 지은 이름
4. 이외수문학관으로
이외수 문학관의 시비들. 같은 석재, 같은 글씨(목저체)의 단순한 문구
단풍든 산하를 보지 못하고 캄캄한 어둠을 헤치고 어두운 밤길을 달리자니 쓸쓸한 감회가 밀려왔다. 1시간쯤 달렸을 때, 서창리의 상가가 나왔다. 마트에서 식품을 사고 야영장을 물으니 두 군데를 알려주었다. 캠핑장에 가서 야영하는 이에게 물으니 하루 이용료가 3~4만원이라고 했다. 차에서 혼자 잠이나 잘 건데 그만한 이용료를 내고 잘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감성마을로 가서 잠자리를 찾고자 다시 츨발했다.
도회지를 벗어나 산길로 접어들어 20분쯤 달리니 감성마을 주차장이 나왔다. 그러나 문학관을 먼저 확인하고 하루 쉴 곳을 결정하고자 산길로 더 올라가 보았다. 네비가 목적지로 알려주는 이외수 문학관이었다. 살림집으로 보이는데 방 안에 불이 켜져 있다. 아마도 저 불빛 아래에서 이외수 작가가 글을 쓰고 있을 것이다. 자동차 엔진소리도 그분에게 방해가 될 것 같아 차를 돌려 감성마을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주차장 한쪽에 화장실이 있다. 외등을 밝혀 놓아 이곳이면 지낼 만할 것 같다. 화장실 옆에 차를 세우고 화장실에 들어가 보았다. 대변기가 고장이 나 똥물이 그대로 있다. 옆의 여자 화장실에 가보니 역시 마찬가지다. 밤에 등불은 켜 놓으면서 막힌 변기는 왜 고쳐 놓지 않았을까. 산 속으로 들어가 일을 보고 흙과 나뭇잎으로 곱게 덮어 주었다. ‘미안하지만 이 숲에 좋은 거름이 돼주라’ 주문했다.
차 안에서 일기를 쓰려는데 졸음이 밀려왔다. 차 안에 잠자리를 마련하고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보름달에 가까운 달빛이 산 계곡에 내려오고 산등성이 너머로 별들이 총총 빛났다.
다음날 아침. 새벽 공기가 차가워 일찍 일어나 조반을 지어 먹었다. 8시 30분에 산책을 나섰다. 주차장에서 숲길로 들어서는 곳에 감성장터 건물이 있고, 그 앞에 커다란 입석비가 있는데, “길이 있어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감으로써 길이 생기는 것이다.” 라고 씌어 있다. 그렇다. 이 길로 들어가도 된다는 표시라 생각하고 비석 옆길로 올라서 이외수문학관으로 걸어갔다.
문학관으로 올라가는 길. 터널 같은 곳을 지나 개울물 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마당처럼 펼쳐진 곳에 많은 시비가 서 있다. 의미가 담긴 시구와 문구들. 이외수 작가의 문체인 목저체로 또렷하게 씌어있다. 잠언이나 경구에 가까운 구절들이 까만 돌에 단순하게 새겨져 있다. 명상록 같은 문구들이 매우 강렬하여 머릿속에 또렸이 박히는 것 같다. 그 중 가장 나에게 강렬하게 꽂힌 문구는 이거다
“쓰는 일의 고통이 읽는 이의 행복이 될 때까지”
문구의 생략 부분을 이어 문장을 완성한다면 아마도 “쓰는 일의 고통이 읽는 이의 행복이 될 때까지 나는 글을 쓸 것이다.” 라고 완성될 문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술어가 생략된 문구가 더 함축적이고 생명력이 있는 것 같다. 뒷말을 붙여 놓으니 긴장이 풀어져 평범한 글이 돼 힘이 빠진다.
글의 행간을 짚어본다는 말이 있다. 글에서 찾아보는 속뜻일 것이다. 글을 쓰는 일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다. 그러나 ‘글을 읽는 이가 행복스럽게 여긴다면 고통을 감내하고 글을 쓰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여겨진다. 그렇다. 읽는 이의 행복을 위해 글 쓰는 고통을 감내하고 좋은 글을 쓰려 심혈을 기울여겠다는 작가의 다짐을 나타낸 말일 거라 여겨진다.
이외수 작가가 자기 방의 문을 가족이 밖에서 잠그도록 하고 글쓰기에 집중했다는 일화가 있다. 소설 '벽오금학도'가 그렇게 탄생되었다고 한다. 글쓰는 치열성의 한 일화일 것이다. 글쓰기가 중노동은 아니지만 그만큼 집중하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는 정말 글쓰기에 치열한 작가였다. 그가 세수와 목욕도 피했던 것 역시 글쓰기에 몰입하고자 한 집념의 결과일거라고 나는 짐작한다.
주차장에서 산기슭으로 오르는 산책로가 문학관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나무가 울창한 산길, 낙엽이 떨어져 쌓인 길, 옆으로는 개울물이 흐르는 운치 있는 길이다. 이 깊은 계곡에 문학관을 만든 것은 바로 이런 풍광이어야 어울리기 때문이었으리라.
화천군에서 생존해 있는 이외수 작가의 문학관을 만든 것이 2012년인데 당시에는 국내 최초였다. 그의 인기가 좋기 때문인지 많은 관람객이 몰려와, 화천군의 명소가 되었다. 그 이후 생존 작가의 문학관이 전국에 많이 생겼다. 해설사의 말에 의하면 국내에 문학관이 450개가 넘고, 생존 작가의 문학관도 무려 140 개쯤 된다 한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참 많다. 문학비나 문학관은 작가 사후에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는데 지금은 그런 경향도 파괴되었다.
10시에 문학관이 개관하여 해설사가 왔다. 이곳엔 입장료를 내야 했다. 들어가 해설사에게 이외수 작가님을 뵙고 싶은데 만나 뵐 수 있는지 문의했다. 이외수 선생님은 문학관 위의 살림집에서 생활하시는데 오후에 잠시 문학관에 들린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만나보려고 오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만나지 못하고 돌아간다고 했다. 다행이 오늘 오후 5시에 연수생들에게 강의하는 날인데 그 시간에 청강할 수는 있을 거라 했다.
강의를 들으면 되겠다 싶어 그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문학관을 둘러보았다. 그의 저서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고, 연보와 중요 기사가 게시 되어 있다. 천상병 시인과 형제의 인연을 맺어 오랫동안 교분을 나눈 사실이 기사로 게시되어 있다. 두 분의 문학적 존중심과 우애를 엿볼 수 있는 일화였다.
그가 그린 그림, 나무젓가락을 이용한 미술 작품도 게시되어 있는데 그는 소설, 시, 그림에도 탁월한 재능과 개성을 발휘했다. 그가 쓴 육필 원고를 보면 글씨도 또박또박 정확히 썼고 원고가 깨끗하다. 정성들여 쓴 결과물일 것이다. 그 개성과 균형미를 갖춘 글씨체가 목저체로 등록되었다. 목저란 나무젓가락으로 쓴 글이라는 뜻이다. 마치 나무젓가락으로 쓴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이 작가가 처음에는 분명히 나무젓가락에 잉크를 묻혀서 썼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유성펜으로 써도 그 글씨체가 나온다. 글씨의 각도가 오른쪽으로 약간 기울었지만 폭이 약간 넓어 안정감을 유지하면서도 긴장을 잃지 않는 개성적인 서체다. 그리고 곧게 뻗은 글씨라 힘이 팽팽하다. 창조란 어려운 일이다. 추사체를 만든 김정희가 생각났다. 이외수도 그렇게 하나의 문체를 개발했기에 역사의 한 페이지에 오래 남을지도 모른다.
이외수의 소설 ‘칼’을 읽다가 정오가 되어 문학관을 나와 주차장으로 내려가 점심을 해결했다. 그룻을 씻고, 양말과 수건을 빨기 위해 개울가로 내려갔다. 빨래 자리를 찾다가 바위에 미끄러져 개울에 풍덩 빠졌다. 얼른 나왔지만 이미 운동화는 물이 가득 들어차고 말았다.
빨래와 젖은 운동화를 차 안의 볕드는 곳에 널어놓고 문학관으로 가니 오후 3시. 해설사님이 방금 이외수 작가님이 문학관에 오셨다가 다실로 가셨다고 알려주었다. 다실에 들어가니 이 작가님은 식사하러 외출하셨고, 전영자 여사님이 계셨다. 작가님을 뵙고 싶어 왔다고 말씀드리고 몇 가지 여쭌 후 다실에서 글을 쓰며 이 작가님을 기다렸다. 4시쯤 돌아오셨다. 인사드리고 선생님과 문학관에 대해 탐방 기사를 쓰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그의 시집, 『그대 이름 내 가슴에 숨쉴때까지』에 사인을 해주실 때에 유성펜을 사용했는데 목저체로 정성을 기울여 써 주셨다. 글씨나 글이나 그렇게 정성을 기울이기 때문에 작품이 되는가 싶었다. 아름다운 모습이다.
잠시 후 문하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과 함께 이동하는 작가님을 따라 전시관의 한쪽에 있는 무대로 갔다. 그분은 반주기에 맞추어 진지하게 노래를 불렀다. 음정 박자가 잘 맞고, 목소리는 나이를 20년은 낮추어야 할 만큼 젊었다. 감정이 담겨 느낌이 좋았다. ‘가을비 우산 속에’로 시작해서 가을 분위기에 어울리는 노래들을 내리 여섯 곡이나 불렀다. 노래를 그렇게 부를 수 있는 것도 풍부한 감성 때문일까? 그의 노래부르기는 일상의 취미요 또 다른 특기인 것 같다.
5시가 거의 되어 강의실인 도서관 2층, 모월당으로 갔다. 연수생 10여 명이 와 있다. 청강을 위해 왔다니 대표 되는 분이 회비를 걷었다. 회비를 내고 가까이 있는 분과 인사를 나누었다. 조치원에서 왔다는 침 강의를 하는 침술 전문가도 글쓰기 공부를 하기 위해 매월 출석한다고 했다.
잠시 후 연수생 열댓 명이 모였고, 강의가 시작되었다. 이 작가님은 시 쓰기에 대한 강의를 1시간 반쯤 했다. 적절한 단어로 표현하려면 어휘력을 길러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오늘은 특별히 아마추어 천문학자를 초대했다고 이상철 씨를 소개했다. 그는 천문관측을 위한 안내를 한 후 천체망원경이 있는 곳으로 일행을 데리고 갔다. 하늘에 구름이 없어 산등성이 위로 뜬 달이 아주 선명했다. 날씨가 아주 좋은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그분은 기류 상태가 매우 불안정하여 별을 관측하기 어려운 날이라 날씨가 좋지 않은 날이라고 했다.
연수생 20여 명이 천체망원경 두 대를 번갈아 보았다. 구름이 없어 달의 표면이 깨끗해 보이는데 망원경으로 보니 분화구 같은 원형 모양이 여러 개 보였다. 운석이 떨어진 자리라 했다. 지구에 오는 운석은 가까이 오면 대부분 타버리는데, 달에 떨어진 운석은 그렇게 달의 표면에 물방울이 떨어진 듯 자국이 원형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강의실로 돌아와 뒷풀이를 했다. 준비한 음식을 먹으면서 그룹을 지어 대화를 나누었다. 음식은 보쌈고기, 족발, 맥주와 막걸리, 귤 등을 먹으며 이외수 작가의 노래를 들었다. 7곡을 이어서 불렀다. 다른 사람 두어 명이 부른 후에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없었다. 나도 나서서 ‘푸르른 날’을 불렀다. 몇 명이 박수를 쳐주었지만 흥겨움이 살아나지는 않았고 대부분 담소에 열중이었다.
자정 무렵, 조치원에서 온 분이 1층 도서관으로 자러 간다기에 침낭을 가지고 따라가 몸을 씻고 잠을 청했다. 2층 모월당에서는 뒷풀이 하는 노래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왼쪽이 이외수 문학관, 오른쪽은 모월당(다목적 강당)과 도서관
5. 정선 동강으로. 사북으로
정선 아우라지에서
아침을 지어 먹고 정선으로 차를 몰았다. 산길을 벗어나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정선 군청 주변, 동강의 공영주차장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 차에서 라이딩 복장을 갖춘 후, 자전거를 타고 아우라지를 향하여 달렸다.
정선 시내를 벗어나 동강을 따라 달리는데 강을 사이에 두고 오롯이 솟은 산줄기에 단풍이 곱다. 정말 ‘아름다운 자전거길 30선’에 뽑힐 만 했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동강을 따라 1시간 30분을 달려 아우라지에 도착했다.
동강과 지천이 만나는 곳에 다리가 두 개 놓이고 정자, 기념 조형물이 만들어져 있다. 학생들을 인솔하고 왔던 15년 전에 보지 못했던 다리가 두 개나 있다. 산기슭을 돌아갈 수 있는 데크 길과 정자가 있어 운치가 있다. 강 위에 다리와 조형물들이 있어 시야를 가리기는 하지만 자연과 인공이 만나서 절경을 이룬 것 같다.
사진을 몇 장 촬영하고, 갔던 길을 되돌아 왔다. 산을 넘어가는 지름길로 네비를 따라가면 조금 빨리 정선으로 가는 것 같은데, 오르막이 싫어 네비 안내를 벗어나니 오던 길을 다시 달리게 되었다. 어둠이 내려와 라이트를 켜고 강변길을 달려 정선에 도착한 것은 어둠이 완전히 내린 밤 8시경이었다.
차에 자전거를 싣고 사북으로 달렸다. 사북은 예전에 석탄을 채굴하는 탄광촌이었지만 카지노가 들어선 지금은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마치 미국 라스베가스처럼 화려한 밤의 도시로 변모한 것이다.
하이원 마운틴 콘도에 짐을 풀고 밖을 보니 불빛이 화려하여 밖으로 나왔다. 빠징꼬, 슬롯머신으로 패가망신한 사람들의 이야기 때문에 화려함도 조심스러웠다. 정원에 돋아난 수많은 실등불을 보니 역시 밤의 꽃이다. 잠시 후에 허전한 방으로 들어왔다.
소주를 꺼내어 마시면서 아내와 지인들에게 안부 전화를 하다 보니 한 병을 금세 다 마셨다. 취기 덕택이었을까 편안한 잠자리였기 때문일까 세상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5. 민둥산 억새밭으로
민둥산 정상에서 남쪽을 바라보며
나무가 없어 민둥민둥한 산을 일반적으로 민둥산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정선의 이 민둥산에는 나무가 자라지 못한 대신 억새가 무성히 자랐다. 하얀 억새꽃이 피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명산이 되었다. 억새꽃 하나야 예쁘다고 하기 어려운 키 큰 풀에 불과하지만 억새꽃이 산 전체를 덮고 나면 그런 생각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별로 볼 게 없는 개망초나 갈대도 무수히 자라면 놀라우리만치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해 놓는다. 많으면 자원이 된다는 말이 맞다.
오래 전부터 한번 가고 싶었던 정선의 민둥산. 이 부근을 지나가면서도 해발 1,118 m나 되는 산이라서 올라가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엔 잘 되었다. 퇴직한 내가 시간 밖에 가진 게 더 있으랴. 이번 내륙 여행에 꼭 들릴 곳으로 정해 놓아 사북에서 아침을 일찍 먹고 8시에 출발한 것이다.
9시쯤 증산초교 옆으로 오르는데 등산로 입구를 보지 못해 Z자 모양의 자동차도로를 15분이나 올라갔다. 계속 굽이굽이 올라가다보니 등산객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잘못 올라온 게 분명하여 다시 내려오니 등산객들이 증산초교 맞으면 산길로 가는 게 보였다. 증산초교 아래까지 내려가더라도 다시 오를 거라 자동차 도로에서 옆 산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길이 나오지 않아 험한 계곡을 뛰어 넘고 가시덤불을 헤치느라 고생 좀 했다.
길을 찾아 들어가니 등산객들을 만나 반가웠다. 단체로 온 등산객들의 뒤를 따라 갔다. 오르막을 조금 오르니 금세 더워져 잠시 쉬면서 잠바를 벗어 배낭에 넣었다. 앞서 가는 내 또래의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분도 혼자 온 등산객이었지만 산악회 버스로 온 사람이었다. 36명이 왔다는데 산악회에 가입하여 단체로 온 것이다. 둘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가는데 앞서 가는 여자도 우리 이야기를 다 들었다고 했다. 혼자 왔다는데 까만 바지와 조끼에 빨간 티를 입고, 까만 헌팅캡을 맵시 있게 쓴 중년의 여자였다. 셋이서 이야기를 나누며 지름길로 올라갔다. 경사가 심해 약간 힘이 들었다.
소나무와 잡목 숲을 지나니 정상이 가까워지면서 억새가 나타났다. 사진 촬영을 품앗이 하며 올라갔다. 햇빛을 등지고 사진을 촬영하면 억새의 하얀빛이 나타나지 않았다. 햇빛을 안고 억새를 보면 하얀 빛이 살아나는데 휴대폰이나 디카의 카메라는 역광 때문에 사람이 까맣게 보여 사진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 그래서 빛의 조절 기능이 있는 고급 카메라를 쓰는 가보다. 억새꽃의 하얀빛을 잡고 싶은데 휴대폰으로는 그 빛을 잡을 수가 없었다.
석회암이 녹아 움푹꺼진 돌리네 밭구덕에서
정상에서 사진을 촬영하며 조망을 하다 보니 세 사람은 각기 흩어졌고, 그 뒤에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정상에서 능선을 타고 아래의 봉우리로 가서 빵과 과일로 점심을 해결했다.
돌아오는 길은 코스를 달리했다. 지나온 정상으로 올라가기보다는 왼쪽으로 내려가다 오른쪽으로 가는 길이 있어 그 길을 택했다. 그리 가도 올라온 곳으로 갈 수 있을 거라 예상한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다른 곳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트럭을 타고와 일하는 사람에게 길을 물으니, 잘못 왔지만 내려가다 우측으로 가는 방법이 있다고 알려 주었다.
우측으로 가다 보니 다시 좌측으로 길이 꺾여, 길이 아닌 산으로 곧장 들어갔다. 길이 없어 잡목을 헤치며 찔레나무나 가시덤불을 뚫고 가느라 옷을 뜯기고 고생했다. 나뭇잎이 쌓여 있어 발을 디뎠더니 경사진 바위라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넘어지며 팔을 짚어 어깨가 아팠다. 어깨뼈에 통증이 있어 부러진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가다보면 길이 나오겠지 하는 만용으로 선택해 생고생을 한 것이다.
길이 아닌 나무숲을 헤쳐 가느라 20분쯤 고생하다가 길을 찾아 내려왔다. 멀리서 손수레를 끌고 가는 중년의 여자가 있었다. 빨리 가서 길을 묻고자 서둘러 쫒아갔더니 조그만 외딴 집으로 들어갔다. 그 집으로 가니 ‘거북이 쉼터’라고 씌어 있다. 70세 전후의 남자들이 술을 마시며 앉아 있다. 나도 잠시 앉아 길을 묻고 운동화를 턴 후, 쉬다가 일어섰다.
내려오는데 포크레인으로 밭을 파고 호미를 든 농부 둘이 밭에서 뿌리 채소를 캐고 있었다. 뭐냐고 물으니 포크레인 기사에게 물어보라는 손짓을 했다. 포크레인 기사는 포크레인 안에서 기계를 작동하고 있고, 엔진소리가 커서 물어 볼 수가 없어 그만두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도라지였다.
계곡 옆으로 난 호젓한 길에 50세쯤의 여자가 혼자서 올라왔다. 저 여자는 어떻게 이런 오솔길을 알고 왔을까? 길을 못 찾아 헤매기는 했지만 이렇게 아늑한 길도 있어 좋았다. 민둥산을 내려와 주차장에서 차를 몰고 안동으로 달렸다.
6. 안동 하회마을과 하회별신굿탈놀이
하회별신굿탈놀이의 한 장면
네비에 안동 마애솔밭공원을 찍고 달렸다. 안동에 가면 날이 어두워질 시간이라서 잠자리를 찾기 위해 야영장으로 목적지를 정했다.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 식사를 지어먹기 위해서는 음식물을 준비해야 하는데 마땅한 마트를 찾지 못했다. 먼저 야영장부터 찾고자 마애솔밭공원으로 갔다. 화장실은 있는데 야영장이 없었다. 오히려 취사금지 안내판이 보였다. 공원 안쪽에 마애선사유적전시관이 있었다. 야영할 수 있는 곳이 아니어서 다른 야영장을 찾아 출발했다.
다른 야영장을 찾아가는데 네비가 시골 마을길로 안내하더니 마을을 한 바퀴 돌게 했다. 무려 3km 정도를 갔다가 마애솔밭공원으로 되돌아 왔다. 도로의 중앙선을 침범하지 않고 U턴 시키느라 마을을 돌게 했던가 보다. 그러나, 캠핑장을 찾아가더라도 적절치 않을 바에야 차라리 하회마을 주차장이 나을 것 같아 목적지를 하회마을로 바꾸었다.
풍산읍을 지나게 되어 마트에 들러 음식물을 사고, 하회마을 주차장에 도착했다. 밤이 깊었지만 가로등이 있고 공중화장실이 있어 차에서 하룻밤 지내는데 큰 어려움은 없겠다 싶어 주차하고 저녁을 지어 먹었다. 밤 10시가 되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밥을 지어먹고 자전거로 하회마을에 들어갔다. 낙동강이 휘둘러 지나가는 강변 둑으로 서서히 자전거를 타고 갔다. 평화로운 강마을이다. 왼쪽 하회마을에 초가집들이 민속촌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고 우측으로는 소나무 숲이 나왔다. 만송정 숲이다. 나루터에는 나룻배가 두어 척 있고, 강 건너 산 바위 벽의 부용대 주변으로는 소나무와 기와집이 고풍스러웠다.
원형 교차로 같은, 혹 같은 땅을 휘돌아 흐르는 강물, 그 원형의 강둑을 따라 달리니 마을이 끝나고 논밭으로 이어졌다. 좌측으로 꺾어 예배당 종각을 향하여 갔다. 오래된 예배당, 높은 종루에 종이 매달려 있다. 예배당 입구에는 고풍스런 옛 종이 전시되어 있다.
서애의 종택
마을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에 가니 70대 후반의 노인이 마당을 쓸고 있어 인사를 하고 몇 가지를 여쭈었다. ‘민박’이라고 대문 옆에 씌어 있어 하루 요금을 물으니 5만원이란다. 이런 시골 마을의 초가집에 방 한 칸 쓰는 요금 5만원은 조금 과하다 싶었다. 담 옆으로 목화밭이 있어, 지금도 솜을 얻기 위해 목화를 재배하느냐고 물었다. 그렇단다. 목화의 솜을 따서 실을 잣고, 이불 솜으로 쓴단다.
서애 류성룡의 고향이냐고 물으니 그렇단다. 류 씨 집성촌이라 했다. 임진왜란 이후 징비록을 써서 임진왜란과 같은 비참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게 하려는 그 충정이 존경스러운 선비요, 전란에 대비해 이순신을 천거한 안목 높은 대신이며 임진왜란에 나라를 지키고자 심혈을 기울인 충신이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 서애의 종택인 충효당으로 들어갔다. 고관대작의 집이라서인지 기품 있는 기와집에 명품 소나무가 있고 유물 전시관도 있다. 이어서 북촌댁, 남촌댁, 양진당을 보았다. 마을 중심, 와가(瓦家)에 둘러싸인 삼신당 신목도 보았다. 수령이 600년이라는데 나무의 둥치가 그렇게 큰 건 처음 보았다. 나무 둘레에 울타리 같은 줄이 둘러쳐져 있는데 그 줄에 하얀 종이의 리본 수백 개가 끼워져 있다. 소원을 적은 쪽지다.
수령이 600년의느티나무. 삼신당 신목과 새끼줄에 매달린 소망들
이 마을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기 때문인지 유럽인들도 눈에 띄었다. 혼자 걷는 어느 유럽 여인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스위치랜드란다. 영어 실력이 모자라 더 자세히 묻거나 대화를 나누지 못해 아쉬웠다.
마을을 살펴보고 나오다 하회별신굿탈놀이 전승교육관에 들어갔다. 공연이 한창이었다. 탈을 쓰고 공연하는 한 마당을 보았다. 100여 명의 관객 앞에서 풍물 연주에 맞추어 춤을 추고 연기를 하며 해학적인 내용으로 웃음을 자아내는 기지와 연기에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인들도 진지하게 관람했다.
아쉽게도 야생화 연구가와의 취재 약속이 있어 공연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중간에 나왔다. 하회세계탈박물관을 관람하려 했지만 약속 시간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고 사진만 몇 장 촬영하고 차를 몰아 온혜리로 출발했다.
7. 야생화 연구가를 찾아서
조선일보에 ‘꽃 이야기’를 연재하는 김민철 씨가 올 3월에 ‘야생화 고수들에게 한 수 배우며’란 글을 발표했다. 그 글에, 야생화에 대해 검색하다 보면 ‘여왕벌이 사는 집’ 블로그에 들어가게 된다는 글을 읽었다.
그 블로그에는 무려 15,000 건 이상의 식물자료의 사진과 특징을 기록해 놓았다. 그 블로그의 운영자인 남명자 교장선생님을 찾아뵙고 싶었다. 안동에서 가까운 학교에 근무하시기 때문에 찾아뵙고자 연락을 드리고 학교로 찾아갔다.
학교에 재직하기 때문에 휴일이나 방학을 이용하여 야생화를 탐사하느라 대부분의 휴일을 식물 관찰로 보냈을 것이다. 또 사진을 촬영하여 분류하고 특징을 정리하느라 15년 이상 많은 투자를 했다.
전교생이 유치원생 3명을 포함하여 18명인 소규모 학교. 선생님은 안동 시내의 교장으로 재직하다 3년 전에 이 학교에 초빙교장으로 오게 되었다. 학교의 역사가 오래 되어 졸업생 수도 많았으나 농촌에 학생이 줄어 학생수와 교직원이 적은 학교다. 학생이 적어서 그런지 매우 조용하고 아늑했다.
교장선생님은 녹차 한 잔을 들며 필자의 질문에 차분하게 말씀해 주셨다. 아이들에게 꽃 이름을 알려주다가 어릴 때 알던 꽃 이름이 실제와 다른 것도 있음을 알고 야생화의 관찰과 공부를 하게 되었다. 많은 사진 자료를 정리하여 같은 종의 야생화도 각기 다름을 비교할 수 있도록 정리했는데 대단한 노력의 산물이다.
여왕벌로 닉네임을 쓰게 된 건, 담임할 때의 학급 이름이 꿀벌반인데 학생들이 자신을 여왕벌이라 부르면서 그리 되었다. 그 이름으로 야생화 블로그를 운영하여 대외적으로는 실제의 이름보다 더 유명해진 닉네임이 된 것이다. 그의 블로그에는 야생초와 수목류의 사진이 1만장이나 수록, 분류되어 있다. 꽃 이름, 촬영 날짜, 특징을 간략히 기록해 놓아 누구라도 참고하기 좋게 정리하여 개방해 놓았다. 참 고마운 일이다.
여왕벌님은 출판사의 요청으로 야생화 관련 서적을 출판하려고 원고 정리 중인데 고칠 게 많아 언제 출간이 될지는 확답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럴 것이다. 글 한 편 제대로 발표하려면 수없이 고치게 된다. 시 한 편을 3년이나 고쳐서 발표한 시인도 있으니 1만 종의 식물에 대해 소개하려면 얼마나 많이 다듬어야 마음이 놓이겠는가. 일생에 저서를 한 권만이라도 제대로 내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이다.
한 시간쯤 말씀을 여쭙고 작별 인사를 드리고 교장실을 나왔다. 청량산이 가까이 있어 청량산의 단풍을 보고자 청량산으로 달렸다. 청량산 입구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 등산을 하기에는 좀 늦었다. 자동차로 청량산 입구에서 고개를 넘어 갔다가 되돌아 나오며 단풍을 보았다. 적당한 곳에 차를 두고 간식을 먹고 싶었는데 마땅치가 않아 고개 넘어 정자 옆에 주차했다. 고개 위로 올라가 앞뒤의 전망을 살펴보았으나 산이 가로막아 보이는 건 산 뿐이었다.
월영공원으로 달리는데 강변 마을의 단풍이 아름다워 강변으로 내려갔다. 안동선비군례길 중의 선성수상길이었다. 모터 보트를 탈 수 있는 나루도 있는데 아무도 없다. 단풍은 바위에도 잘 어울리지만 호수 주변의 단풍도 한결 아름답다. 화사함과 고요가 절묘하게 어울린다.
8. 보름달이 뜬 월영공원에서의 데이트
뒤쪽에 보이는 안동댐과 북한강을 가로지른 월영교
댐 쪽으로 가니 우측에 작은 못이 있고, 못 위의 산기슭엔 멋진 정자가 있다. 정자 위 계곡에는 기와로 지은 한옥 몇 채가 이어져 있다. 안동민속촌이었다. 민속촌을 지나 광장으로 내려오니 안동시립민속박물관이 있는데 시간이 6시가 넘어 들어가지 못하고 다시 안동물문화관이 있는 곳으로 월영교를 건너 왔다.
월영교 입구에서 분수쇼룰 6시 30분에 한다는 표지판을 보았다. 그런데 분수가 보이지 않았다. 지나가는 여자에게 어디서 분수쇼를 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다리에 분수가 있다 했다. 그러면 물문화관의 전망대로 올라가 보면 더 멋진 장면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시계를 보니 6시 15분, 15분이 남았다.
차에 가서 소지품을 정리하고 분수쇼 시작 5분 전에 전망대에 올라가니 아까 분수쇼에 대해 이야기 나눈 여자가 혼자 와 있다. 하얀 털조끼가 가녀린 여인에게 잘 어울렸다. 반갑게 인사하고 분수쇼를 기다렸다. 보름달도 안동 댐 위로 동두렷이 떠올랐다. 마침 보름달이 맑은 하늘의 산 능산 위로 노랗게 떠 더 예뻤다. 물에 비친 불빛들과 어울려 아름다운 밤이다.
그런데, 6시 40분이 지났는데 분수쇼를 하지 않았다. 전망대 옆 사무실에 사람들이 있어 들어가 분수쇼를 왜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사무실에는 서너 명이 있는데 그들 중 분수쇼를 아는 이가 없었다. 내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옆에서 분수쇼를 기다리는 여자에게 미안했다. 내려가 표지판을 보고 내가 잘못 알았으면 커피 한잔 사겠다고 했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표지판을 자세히 보니 토․일요일만 분수쇼를 한다고 씌어 있다. 오늘은 화요일. 그 여자가 씩 웃었다.
커피 전문점을 가면서 나는 저녁을 먹지 않았으니 식사부터 하자고 했다. 식사는 집에서 하고 왔으니 차를 먹자고 했다. 2층 찻집에서 월영교를 보며 카푸치노를 마시며 한 시간쯤 대화를 나누었다.
보름달이 뜬 월영교(月映橋 : 달이 비치는 다리)
그 여자는 학원에서 강의를 하다 지금은 중고생 수학을 그룹지도를 한다. 오늘도 지도하는 날이었는데 학생들이 사정이 있어 빨리 마쳐 달라고 하여 시간이 생겨 이곳으로 산책을 나왔다고 했다.
나이는 40쯤 되는 침착하고 고운 용모인데 딸 하나 데리고 사는 독신이었다. 사귀던 남자 친구와 헤어져 한 동안 매우 괴로웠는데 지금은 남자 친구가 새로 생겨 다행이라 했다. 술 한 잔 더 하고 싶었지만 나와 나이 차이가 심했다. 더 이상의 대화를 하기에는 무리다 싶었다. 우선 나는 저녁 식사를 해야 하고, 잠자리 할 주차장도 찾아야 하기 때문에 아쉽지만 작별 인사를 했다.
물 문화관 옆 주차장은 저녁을 지어 먹고 잠을 자는 장소로 적절치 않아서 댐 아래 민속박물관 앞의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거기에서 밥을 지어 먹고 하루를 마쳤다.
밤이 깊었다. 흰 옷 입은 여자의 전화번호를 물어볼 건데….
9. 마애솔숲공원과 마애선사 유적전시관으로
마애솔숲공원에 있는 마애선사 유적전시관
아침을 지어 먹고 차에서 내려놓은 짐을 차에 실어 놓았다. 자전거를 타고 월영공원 광장휴게소에서 출발했다. 안동 물문화관을 지나 안동교를 건넜다. 옆에 있는 영호대교의 하얀 난간이 아름다웠다. 사진을 찍고 낙동강 둔치의 자전거길로 강을 따라 달렸다. 널찍한 주차장을 지나니 많은 캐라반이 보였다. 여기에서도 야영이 가능할 것 같았다.
수하동 삼거리에서 강줄기를 벗어나 마을길로 산을 넘어 검암1리로 나와 검암교, 고하교를 지나 산길 오르막을 힘겹게 오르니 커다란 관광 안내판이 있다. 지도를 보며 숨을 돌리고 고개를 넘었다.
마을 옆 낙동강가의 자전거 길로 한적하게 달리게 되었다. 지나가는 사람이 없어 양손을 핸들에서 놓고 달리는 연습을 했다. 양손 놓고 잘 달릴 수 있었는데 몇 달을 해보지 않아 핸들에서 양손을 놓고 달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20분쯤 연습을 했더니 손을 놓고도 예전처럼 달릴 수 있게 되었다. 한번 익힌 기능은 잊어버리지 않는 것으로 여겼는데, 세 달 가량을 손 놓고 타는 주행을 못했더니 기능을 잊었던 것이다. 다행이 이번 길에서 잊은 기능을 찾았다.
단호교를 넘으니 마애솔밭유원지가 나왔다. 여기는 그저께 밤에 야영지를 찾다가 와 본 곳이다. 그날 저녁에 보았던 SUV 차량이 철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부부였다. 그제 밤에 왔을 때, 야영 가능 여부를 물어보려고 했는데 차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아 그냥 갔었다.
그 차에 다가가서, 추운데 여기서 어떻게 지냈느냐고 물었더니 아주 자세하게 대답해 주었다. 퇴직하고 이 차로 전국 여행을 다니고 있다. 차에 룸박스를 75만원에 부착했고, 어닝바(사각어닝룸)를 50만원, 침캠핑용 온수보일러 5만원, 온수매트 32,000원에 설치, 차 밖의 가스보일러를 켜면 온수 보일러가 작동되어 차 안이 따뜻해서 춥지 않다. 또 둘이 잘 수 있는 침낭은 겨울용이라 어려움 없이 캠핑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정보에 너무 어두워 준비가 소홀했던 것이다.
자세한 정보에 감사드리고 선사유적전시관으로 들어가 전시내용을 살펴보았다. 이 부근에서 구석기 유물이 발굴되어 이곳에 전시관을 마련했다. 마애솔숲문화공원조성사업을 하며 매장문화재 발굴조사를 했는데 3~4만 년 전, 후기구석기 시대의 유물들이 발견된 것이다. 이 강변에 수 만 년 묻혀 있던 유물, 주먹도끼와 긁개, 찍개 등이 출토된 것이다. 수십 미터나 흙이 덮여 있어 쉽게 찾을 수 없는 유물들이었다.
이 유서 깊은 선사 유적지를 뒤로 하고 다시 안동댐으로 돌아가기 위해 출발했다. 한번 지나온 길이기에 안동 시내까지 잘 왔다. 그래서 네비를 보지 않고도 찾아갈 수 있다고 판단하여 강물을 따라 달리다 보니 점점 낯선 곳으로 가고 있었다.
안동댐에 도착할 시간이 지나 불안했다. 더구나 일반도로를 달리게 되었는데 긴 다리를 건너야 했다. 일반 도로에서 다시 자전거길로 나갔는데 마침 마주 오는 라이더가 있어 손을 들고 길을 물었다. 아. 하필 그는 유럽인이었다.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여 영어 몇 마디를 곁들여 안동댐을 물어보았다. 그는 태블릿 PC를 켜서 나에게 보여주며 안동댐 가는 길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지도상의 그 길을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자신의 갈 길을 찾아가기 바쁠 외국인이 친절하게 영어로 알려주었다. 내가 잘 알아듣지 못하자 PC와 번역기까지 이용했다. 자기도 그 방향으로 가니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다. 따라가다 보니 앞에서 자전거 탄 어른이 와서 다시 질문을 했다. 그 사이 그 외국인은 그대로 달려갔다. 그런데 나에게 길을 알려주는 사람은 이곳 주민인데도 자전거길을 전혀 몰랐다. 제대로 알려주지 못해, 그 사람에게 길을 묻느라 외국인만 놓치고 말았다.
강물을 믿고 왔는데 안동댐으로 가는 강과 임하댐으로 가는 강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휴대폰의 네비를 켰지만 어찌된 일인지 인터넷이 작동되지 않았다. 시가지로 들어가 휴대폰 가게를 찾아갔다. 인터넷이 안 된다고 했더니 인터넷 제한 용량을 다 소모했기 때문이라며 제한 용량을 늘려 주었다. 그때서야 인터넷이 작동되었다. 가까스로 길을 찾아 안동댐 밑 월영공원에 온 것은 도착 예정 시간보다 2시간이나 늦어진 오후 3시경이었다.
간식으로 삶은 계란과 귤만 먹었기 때문에 배가 출출하여 라면을 끓여 밥을 말아 먹었다. 옷을 갈아입고 자전거를 차에 싣고 안동댐으로 올라갔다. 세계물문화관 주차장에 주차했다.
옆 산에 카페가 있고 카페 위로는 정자가 있어 올라가 보았다. 안동댐 위의 물길이 보였지만 안동댐에 가서 그 아래로 월영공원을 보고 싶어 카페에 들어가 저 앞 안동댐에 걸어갈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못 갈 거라 했다.
내려가니 외부차량 출입금지 표지판이 있어 차를 길 한쪽에 주차하고 댐으로 걸어갔다. 사람의 출입조차 제한되는 것인지 몰라 조심스레 두리번거리며 갔다. 들어가는 동안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다. 안동다목적댐 준공기념탑이 높게 세워져 있고 여러 조형물들이 배치되어 아름다운 곳이었다. 댐 건너편에도 정자가 있고 정자 뒤로는 자동차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그쪽에서 아주머니 서너 명이 내 쪽으로 건너왔다. 일반 차량의 통행을 제한하여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는 줄 알았는데 사람은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카페에서 못 갈 거라는 대답도 사실과 달랐다.
댐 위에서 월영교를 보고 싶었으나 섬처럼 가린 산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하고 차량으로 돌아와 차를 몰고 합천 해인사로 달렸다.
안동댐 위의 다목적댐 준공 기념탑
10. 해인사와 가야산으로
합천 가야산에 도착한 것은 날이 어두워진 밤 8시였다. 해인사 가까이 가려고 산 속으로 계속 들어갔지만 산만 깊어지고 해인사 주차장은 찾을 수 없었다. 어두운 산으로 깊이 들어왔는데 주차나 야영을 할 만한 곳이 보이지 않아 초조해졌다. 다행스럽게도 치인야영장 표지판을 보았다.
잘 되었다 싶어 들어갔다. 화장실도 있었다. 화장실에 불이 켜져 있는데 관리소는 문이 닫혔고 아무도 없다. 야영장에 차를 세우고 밥을 지어 먹는 동안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자동차만 두어 대가 야영장 앞을 지나 산 속으로 올라간 게 전부였다.
인적이 끊기고 계곡 물소리만 크게 들리는데 찬바람이 휘이 휘이 지나갔다. 음산한 분위기였지만 화장실의 외등이 켜져 다행이었다.
날이 밝아 일어나 아침밥을 지어먹고 짐을 정리하여 산길로 더 들어가니 해인사는 나타나지 않고 치안2리 마장동이 나왔다. 네비를 켜 해인사를 찍으니 돌아가야 했다. 돌아서 삼정야영장, 치인야영장을 지나 해인사 방향으로 들어갔다. 약초 파는 장사들이 더 내려가 성보박물관 주차장에 차를 두고 걸어가라고 알려주었다. 어느 아주머니는 내 차를 들여다보며 차 안의 짐이 뭐냐고 물었다. 산에서 약초라도 채취해 가는 게 아닌가 의심해서 하는 질문이다. 자전거 여행 중이라고 하니 자전거를 들여다보고서야 알았다는 표정이다.
주차 후 걸어서 해인사로 올라가는데 오른쪽으로 부도탑들이 보였다. 커다란 배구공 같은 성철 스님 사리 탑(?)이 가장 안쪽 중앙에 널찍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다가가서 그 탑에 합장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24세에 입산하여 82세로 열반에 들 때까지 세속을 떠나 수행정진에 진력하신 큰 스님이다. 스님의 고행과 수행정진에 나는 늘 경앙심을 가지고 있다.
성철 스님의 단아한 사리탑
해인사 경내와 삼층석탑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는데 숲이 울창하여 1시간 정도를 숲 속으로 걸어갔다. 오르는 중에 하산하는 등산객을 한 명만 지나쳤다. 휴일이 아니고 평일이었기 때문이리라. 경사는 완만하지만 계곡이 길었다. 정상의 칠불봉에 오른 것은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칠불봉을 비켜 다른 봉우리의 정상에서 도시락을 꺼내 먹었다. 내려오는 길은 백운동탐방센터로 가는 길을 택했다. 언제 다시 오랴 싶어 백운동 쪽도 보고 싶었다. 또 그리 내려가야 기암괴석의 바위들을 볼 수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역시 내려가다 기묘한 형상의 바위를 많이 보았다. 바위가 나무뿌리 때문에 깨어진 것도 보았고, 바위틈에서 굵게 자란 생명력이 강한 나무도 보았다.
백운동 탐방로에 내려가 전화로 택시를 부르니 2만원이었다. 좀 비싼 것 같아 카카오택시를 문자로 찍어보니 12,000원이었다. 택시를 취소하겠다고 전화를 했더니 이미 택시가 출발했다기에 할 수없이 그 택시를 기다려 탔다. 해인사 성보박물관으로 갔다. 빨리 충주로 이동하고 싶었지만 성보박물관에 전시된 불교 자료들을 대충이라도 보려고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20분쯤 관람했다.
관람하고 나와서 네비를 켜고 단양의 새한서점 도착 예정 시각을 보니 6시 50분이다. 서점이 몇 시까지 개관하느냐고 전화로 문의하니 7시까지란다. 잘하면 7시 이전에 도착하겠다 싶어 서둘러 출발했다. 그러나 가다가 차에 기름을 넣고 가니 6시 55분에 도착했다. 이미 날은 저물고 서점을 관리하는 주인의 아들이 퇴근한 후였다.
여명이 남아 있어 차를 서점 가까이 대고 심한 경사를 걸어 내려가 문을 두드리니 주인이 나왔다. 인사를 드리니 잘 알아듣지 못하셨다. 몇 말씀 여쭙고 싶은데 가능하냐고 물으니 대답이 없으셨다. 너무 늦은 시간인 것 같아 내일 아침에 다시 오겠다며 주인인 이금석 선생님께 내 책 한 권을 드리고 나왔다.
서점에서 나와 마을 어귀에 있는 주차장에서 저녁을 지어 먹었다. 내 차 옆에 있는 분도 등산 여행을 하는 데 오늘 여기서 자고 내일 문수산 산행을 할 거라 해서 인사를 나누었다.
열흘 전, 이번 여행을 출발할 때 집에서 가져온 양주를 먹을 기회가 없었다. 더구나 오늘 밤이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이번 여행에 대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내 차 옆에 있는 분에게 술 한 잔 하자고 제안했다. 많이는 못하지만 가볍게 한 잔은 할 수 있다 하여 내 차로 초대했다. 나 혼자서는 널찍하던 차 안에 키가 큰 사람이 앉으니 머리가 천정에 닿고 좁았다. 그렇지만 술 한 잔이야 할만 했다.
경기도 광명시에서 온 성백호라는 분이었다. 나보다 10년은 젊은 것 같다. 백두대간 봉우리를 모두 등정하고 낙동정맥에 도전하여 이미 8봉을 등정했다는 등산 매니아였다. 안주가 황태포와 라면 부스러기로 부실했지만 대화를 안주 삼아 양주 두어 잔을 마셨다. 이번 여행을 마무리하는 의미 있는 술자리였다.
11. 시들어가는 문화, 헌 책방 새한서점
5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차 안을 정리하다가 옆 차의 문을 여닫는 소리를 들었다. 6시에 아침을 지으려고 나와 보니 그 차가 떠난 뒤였다. 싱겁게 떠나갔다. 아마 내가 잠에서 일어나지 않은 줄 알고 깨우지 않으려 했나 보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짐을 정리하고 나니 8시 30분. 주변을 살피며 사진을 촬영하다가 도로 옆에서 작업하는 60대 부부가 있기에 인사를 한 후, 새한서점에 대해 질문을 했다. 새한서점에 대해 알아보러 왔으면 미리 이장을 먼저 찾아보는 게 옳지 않았겠느냐고 아낙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새한서점 주인을 만나려 하기 때문에 그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혹시 이장님이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했다.
새한서점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고 했다. 자신의 논밭이 그 주변에 있는데 휴일에는 많은 사람들이 와서 쓰레기를 버리고, 많은 차들이 주변에 주차를 해서 동네 사람들이 통행하는데 상당히 불편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단양 산마을의 새한서점
새한서점은 맹지에 있는 가건물로서 무허가 서점이며 불법으로 영업을 하고 있지만 주인이 가엾어서 민원을 제기 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많은 차량이 와서 자신의 땅을 점용하지만 차를 돌릴 수 있도록 자신이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고 했다. 이장의 말이 맞는지 자신의 주장일 뿐인지 모르지만 이장 내외는 새한서점에 대해 안타깝게 여기는 듯했다.
험난한 산길을 거쳐 새한서점으로 가, 어제처럼 서점 위 공지에 차를 세웠다. 주인이 서점 밖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개점을 위해 준비하는 걸 방해하지 않기 위해 사진을 촬영하고 내가 필요로 하는 책을 골랐다.
농사짓는데 도움 될만한 책을 찾았으나 마땅한 게 없었다. 소장하고 싶었던 이오덕 선생님의 『우리글 바로쓰기 1 ․ 2』, 김봉군 교수의 『문장 기술론』, 윤모촌의 『수필 쓰는 법』외 3 권을 더 골라 계산을 하니 52,000원이었다. 책값을 드리니 커피 한 잔을 주셨다.
영화 '내부자'를 촬영했던 서가와 책
어떻게 이곳에 와서 서점을 하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서울 고대 앞에서 새한서점을 운영할 때는 두 곳에서 했고, 수입이 괜찮았는데, 점점 헌 책방이 어려워져 폐교인 충주 적성초등학교로 오게 되었다. 원래는 고향인 제천으로 가려했는데 고향 떠난 지가 30년이 넘다보니 가까이 지내는 사람도 없고, 땅에 대한 정보도 없었다. 충주에 폐교가 있다는 걸 알게 되어 이 고장에 오게 되었다.
이금석 씨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고 발음도 수월하지 않았다. 2년 전 뇌경색이 와서 약간의 장애가 있다 했다. 가족을 물으니 아내와 16년 전 해어졌고, 아들이 2년 전에 여기에 와 서점을 주로 운영한다는 것이다.
영화 ‘내부자’ 에서 이 서점을 보았는데 여기서 촬영했느냐고 물으니 여기가 아니라 적성초등학교에 있을 때라 했다. 거기에서 이병헌이랑 스테프들이 와서 3일간이나 촬영했다 한다.
적성초등학교 자리에서 8년을 지냈는데 임대료가 연 1400만원이나 되어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자리의 300여 평을 평당 2만원에 구입하여, 이 가건물을 손수 지어 운영하고 있다.
현재 10만권 정도를 보유하고 있다는데, 보관 상태가 매우 열악했다. 맨땅 위에 서가를 놓아, 습도를 적정선으로 유지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곳곳에 모기향을 피운 흔적이 있었다. 그래도 서가가 비틀림이나 기울림은 없었다. 그 점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그러나 상당량의 서적이 비에 젖어 내버린 적도 있다 했다.
사무실로 쓰는 공간의 실내 벽으로 가느다란 물줄기가 흘러 조그만 바위 위로 지나갔다. 어떻게 이런 장치를 했느냐고 신기해서 물으니 계곡물을 호스로 끌어 만들었다는 것이다. 석굴암도 초기에는 물이 흐르게 하여 습도를 조절했다는 데 그런 원리를 적용한 거냐고 물으니 그건 아니란다.
문틀이나 창틀, 여기저기 목재를 이용하여 공사한 게 보통 솜씨가 아니다. 목재를 때는 난로가 따뜻해서 푸근했다. 이른 아침 그늘이 많은 이 허름한 서점에 따뜻한 화목 난로가 있어서 좋았다.
잠시 인터뷰 하는 동안에 고양이 두 마리가 앞에서 놀고 있는데, 자세히 보니 조그만 쥐새끼 한 마리를 놓고 재빠르게 잡는 연습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곳에 휴일에는 많은 사람들이 온다는데, 책을 좀 사 가느냐고 물으니 방문객의 일부는 사 간다고 했다. 그래야지 싶다. 책을 많이 읽지 않는 시대인데 새로운 책이 연 3만 종이나 쏟아진다니 이 책방은 이 시대 마지막 헌 책방이 될지도 모른다. 할 수 없는 일이다. 문화의 변화와 흐름은 결코 붙잡을 수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12. 학생이 없는 학교, 이오덕학교
비를 맞는 학교 표지석과 문 닫은 이오덕학교
이오덕학교 앞에 도착하니 비가 내렸다. 학교의 정문이 닫혀 있다. 정문 옆길에 주차하고 닫힌 정문 옆 샛문으로 들어가니 밖에서 일을 하던 70세쯤의 중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인사를 하고 보니 이오덕 선생님의 장남, 이정우 선생님이었다. 이오덕학교의 운영에 대해 알고 싶어 왔다니 들어오라 하였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니 넓은 실내에 서가가 빼곡하고 서가에는 많은 책이 꽂혀 있다. 이오덕 선생님의 일기책과 사진 등 이오덕 선생님의 저서나 관련이 깊은 책, 사무실 집기 등이 가득했다.
한국글쓰기연구회의 결성 때 사회를 보며 참여한 일, 그 모임의 초기에 활동했던 일, 교사로 근무하던 초기에 존경하는 마음으로 안동 대서초등학교로 이오덕 선생님을 찾아갔던 일 등을 말씀드리고 내가 쓴 수필집을 한 권 드렸다.
무엇보다 궁금한 건 이오덕학교의 운영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정우 선생님은 현재의 상황을 에둘러 말씀하셨다. 자신이 대안학교인 이오덕학교를 운영하며 사단법인체로 만들기 위해 기금을 내놓고 신청했지만 교육청에서는 승인해주지 않았다. 과거의 정권이나 지금의 정권이나 마찬가지로 허가해주지 않았다. 이오덕 이름만 빼면 가능하도록 해주겠다고 했지만 그건 만드나마나 싶어서 그만 두었다. 중국에서는 이오덕학교를 운영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인가를 해주지 않아서 운영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서민들에 대한 애정이 깊고, 어린이들을 지극히 사랑하셨던 이오덕 선생님은 잘못된 교육 현실을 보며 ‘참교육’을 주창하신 분이다. 우리나라의 잘못된 교육 관행과 교육 제도에 대해 힐난하게 비판했기에 많은 핍박을 받았고, 결국 전두환 정권 때 교육계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정우 선생님은 내가 쓴 책의 제목도 우리 말법에는 옳지 않다는 말씀을 하시며 글을 쉽게 쓰는 게 좋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런 말씀은 이오덕 선생님과 매우 비슷하였다. 또 교육계의 일부 인사나 글쓰기 회원 중에 자신의 뜻과 다른 사람에 대해서 지적을 잘 하셨다. 키나 얼굴, 어투나 지론도 이오덕 선생님과 너무나 닮았다. 부전자전이었다.
이순신 장군도 당 시대에는 선조와 조정 대신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역적 취급을 받은 적이 있지만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최고의 위인이라며, 이오덕 선생님도 훗날 그럴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도 이오덕 선생님은 교육과 우리말 연구에 지대한 공적을 남긴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래서 2002년에는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도 받으셨다.
이 선생님은 점심을 드시러 오라는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가시려다가, 내가 걸렸는지 함께 시내로 나가서 식사를 하자고 제안하셨다. 나는 갑작스레 찾아와서 인터뷰를 요청하여 미안하고 고마워 점심을 사 드리려고 따라 나섰다. 식사 후 화장실을 다녀오며 이 선생님 모르게 계산하려고 식당 주인에게 조용히 계산해 달라니 벌써 이 선생님께서 계산했다는 것이다. 한 발 늦었다. 시간 내주시고 따뜻이 대해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식비까지 내 송구스러웠다.
식당에서 나와 이 선생님 차를 뒤따라갔더니 정원수용 소나무가 있는 농장으로 가셨다. 내가 하고 싶다는 분재나 정원수를 기르는 일은 어렵고 그다지 전망이 밝지 않다며 나의 희망에 대해 만류하셨다. 퇴직하여 인생 2막을 시작하는 필자를 염려하시는 마음, 진정성이 담겨 있다. 고마웠다.
작별 인사를 드리니 이오덕 선생님께서 남긴 책 2권을 선물로 주시고 음성 방향으로 가는 길을 알려 주셨다. 이정우 선생님도 독학으로 많은 지식과 체험을 쌓아 고매한 인격을 지닌 분으로 알려진 대단한 분이셨다.
13. 전원생활을 시작하신 선배님을 찾아
박기양 선생님 전원주택 마루에서
충주시 신니면에서 출발하며 음성군 초천로에 계시는 박기양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박 선생님은 필자가 근무했던 학교의 선배 교장님이시다. 수원으로 가는 길에 잠시 들러 선배님 별채에서 차 한 잔 하고 싶어 들렀다니 반갑게 맞아주셨다. 500여 평의 밭에 농사를 짓는데 한쪽에 축대를 쌓아 집을 지었다. 집 아래 텃밭에는 배추와 여러 가지 채소를 잘 길러 놓으셨다.
박 선생님께서는 수원에 집이 있지만 퇴직 후 전원생활을 하기 위해 몇 년 전에 밭을 장만하셨고, 3년 년부터 가건물을 지어 놓고 농사를 짓다가 작년에 이 아담한 집을 새로 지으셨다.
길가에 주차를 하고 들어가니 사모님과 함께 계셨다. 인사를 드리고 차 한 잔 마시면서 전원생활의 즐거움을 여쭈었다. 언제 그렇게 주워다 놓으셨는지 한쪽 방에는 토종 밤들이 많았다. 창고에는 연장과 각종 농기구들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그림을 그리시는 사모님을 위해 그림 그리는 방도 마련했단다. 가장자리 방은 자연 경관을 보며 차를 마시기 좋게 꾸며 놓으셨다. 참 세심한 구상이다.
은퇴자의 절반 정도는 이런 전원생활을 꿈꾼다. 필자 역시 그런 기대 때문에 온양에 농막을 하나 만들어 놓았는데 우습기 짝이 없다. 농사도 서툴고 농삿일에 전적으로 매달리지 못해 몇 가지 길러 보았지만 신통치 않다. 그래서 박 선생님은 어떻게 하시는지 참고하고 싶었고, 사시는 모습을 보고 배우려고 왔다. 그래서 창고, 처마, 텃밭 등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한 시간쯤 말씀을 여쭙고 작별 인사를 드리고 나오니 사모님께서 밤을 주셨다. 박 선생님께서는 나물 몇 가지를 쇼핑백에 담아 주셨다. 많은 것은 아니지만 여름철에 풀매고 거름 주며 땀 흘려 가꾼 소중한 농산물이어서 받기가 여간 미안한 게 아니었다.
음성에서 나와 경부고속도로로 들어와 열흘 만에, ‘이제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는구나’하며 기분 좋게 운전을 했다. 그런데, 차가 밀려 가다서다를 반복하는데, 앞 차가 급정거를 하여 나도 따라서 브레이크를 밟았다. 뒷차를 보니 속도가 좀 과하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꽝” 하고 내 차를 들이받았다. 차에 외상은 없지만 안전벨트를 멘 어깨가 좀 아팠다. 다음날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다행이 뼈에 이상은 없었다.
집에 돌아와 선배님이 주신 밤을 쪄 먹었다. 산밤이라 크지 않지만 아주 달고 맛이 있었다. 밤을 먹으며 더욱 고마운 생각을 했다. 나도 농사를 지어 주위 사람들과 그렇게 나누어 먹고 싶다.
이번 여행으로 전국 국토 순례의 계획대로 라이딩을 마쳤다. 전국을 돌아보고 싶었지만 마치고 보니 극히 일부였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평화의 댐, 화천 100리 산소길, 이외수 문학관, 민둥산과 동강, 안동댐과 하회마을, 가야산과 해인사, 매스컴을 타 유명해진 헌책방 새한서점, 대안교육을 추구했던 이오덕학교 등을 다녀왔다.
그리고 이외수 소설가, 남명자 야생화 연구가, 이오덕 선생님의 장남 이정우 선생님, 우연히 만난 등산 매니아 성백호 씨도 만났다. 부상이나 사고 없이 무사히 여행을 마치게 되어 나를 염려해 준 사람들에게 ‘잘 다녀왔습니다’ 하고 인사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동안 염려와 격려를 해준 친구와 지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문자로 보냈다.
이제 여행과 탐방기를 잘 정리하여, 주위 사람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보여드리고 싶다. 이외수 문학관 시비 공원의 문간에 있던 문구. 아마도 이외수 작가가 가장 중시했기에 시비로도, 문학관 안에도 그 말이 눈에 잘 띄게 게시되었을 것이다. 내 수첩 첫장에 써 놓은 문구요, 내 가슴에 깊이 새겨 두고 싶은 명언이다.
“쓰는 이의 고통이 읽는 이의 행복이 될 때까지”
첫댓글 채찬석선생님의 멋진글 잘읽었습니다.
정말 읽는 내내 저까지 힐링이 되는 느낌이 들었네요^^
발길 가는대로, 가고싶은 곳으로 가는 여행이야말로 여행의 맛을 느낄수 있는 진정한 여행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외수 문학관 초입 비석의 문구가 가슴에 와닿네요. 과연 작가다운 명구라고 생각됩니다.
저도 더욱 분발해야겠다는 각오입니다. 건강하세요
저의 긴 글을 읽으시고 과분한 찬사를 주시어 감사합니다. 저의 잡다한 일기식 기행문이라 정제되지 못했습니다만 힐링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제 글을 항상 애정으로 봐주시어 감사합니다. 여행기를 정제하여 다음에 책으로 묶어내려 합니다. 지도 조언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