隨筆/ 스님이 들려주신 여섯 번째 이야기 -극락에 길이 없는데 우왜 왔노?-
경봉대선사께서는 90노구(老軀)에도 시자(侍者)의 부축을 받아 법상(法床)에 으르셨습니다. 큰 스님의 생애(生涯)는 그대로가 무상(無常)의 법문(法問)입니다 못 찾겠다 꾀꼬리 조용필 씨가 큰 스님을 찾아와 인사를 하는데 네가 어디서 왔느냐? 뭐 하는 사람이냐? 물으니, 노래하는 사람입니다 라고 답(答)을 하자 큰 스님이 그러면 네가 꾀꼬리구나 하셨는데 그때 그 말씀을 새겨 조용필 씨는 노랫말을 만들었을 것이라 생각된다고 수안스님이 말씀하셨지요. 변소를 절에서는 예전부터 정란이라고 불렀는데 연전에 돌아가신 통도사 극락암 경봉 노스님께서 정랑을 해우소(解憂所)라 불렀는데 해우소란, 온갖 근심 걱정을 푸는 곳이라는 뜻이라서 유머감각이 뛰어난 노스님의 발상(發想)이 아닐 수 없습니다. 1953년 해우소와 휴급소를 정랑에 걸도록 하라는 ‘삼소굴 일지’ 경봉대선사 주석처의 의하면 해우소는 근심을 푸는 대변소 이고, 휴급소는 급한 마음을 쉬는 소변소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아무리 급한 일이 있다한들 화장실 가는 그것보다 급한 일이 있을까? 그래서 노장님이 급한 마음을 쉬어라! 급한 게 뭐 딴 게 있냐 말이여! 세상에... 경봉스님 말씀 ‘망두석과 화두(話頭)’ 중에 있습니다. 사바사계를 무대(舞臺)로 잡고 연극(演劇) 한바탕 잘하려면, 물질(物質)에 대한 애착(愛着)을 비워야 돼! 물질 아니면 사람. 사람 아니면 물질 두 가지 때문에 가슴이 아프고, 머리가 아프단 말이야! 우리가 이 사바세계 나올 적에 머리 아프고 가슴 아프고 그러려고 나온 게 아니야! 선(線)을 이라 하나 긋고 코로 내리 긋고 양쪽에 귀 두점 그리고 입을 이으면, 바를 정(正)자 아니가, 얼굴에 바를 正 자 써가지고 다니지만 마음을 바르게 못 쓰니까 나쁜 일이 생겨. 그 바를 正 자를 항상 생각하라고, 배를 타고 동(東)으로 동으로 가면 본래 떠났던 곳으로 돌아온다. 극락에 길이 없는데 오왜 왔노? 손바닥 내봐라! 이래요. 그래서 레비스트로스 박사가 손바닥을 이리 냈어요. 노스님이 그 때만해도 기골(奇骨)이 장대했어요. 당신 손바닥을 치켜들더니 레비스트로스 박사의 손바닥을 내밀라 해서 딱! 하고 때려요 두 분의 손바닥이 마주쳐 소리가 났습니다. 그래 놓고 노스님이 당신 손바닥하고 내 손바닥이 부딪쳐 소리가 났는데 이 소리가 당신 손 바닥에서 났느냐? 내 손바닥에서 났느냐? 이렇게 물으셨어요 옆에서 보니 레비스트로스 박사 얼굴이 상기 되더라구요. 그렇게 만나고 내려오면서 레비스트로스 박사가 고개를 갸우뚱 했다가 나중에 큰 절에 내려와서 오늘 참 인상적인 고승(高僧)을 만났다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지안스님 왈 돌 뿌리에 걸려 넘어지지도 말고, 물에 빠지지도 마라! 아주 자상하고 따스하고 친절하고 말씀을 보통 하시는 것 같아도 격(格)이 있어요. (1) 품위가 있는 그런 말씀하고..... 참 노스님은 훤칠하신 분이다. 장부(丈夫)다. 신지식(新知識)이다 그런 느낌이 확 드는 그런 분이었어요. 8.15해방 후 6.25사변 전후해서 종단(宗團)이 안정이 될 때까지의 혼란기에 참으로 위대하신 뱃사공 이셨지요. 모든 사람 차별하지 않고 그렇게 건져주시고 당겨주시고 밀어주신 어른은 지금 우리가 사회교육을 받고 공부하지만 실천은 그 노스님 밑에 따라가려고 하면 맨발 벗고도 못 따라가는 그런 어른이지요. 우룡스님 왈 경봉대선사 선문답 편지 ‘삼소굴 일지’ 경봉대선사 일기 그러니까 우리 큰 스님들은 대충 다 극락암에 한 철씩 나고 갔습니다. 내가 그때 살림을 살고 있었는데 최고 많이 있을 때는 65명까지 보통 50명 40명 수좌(首座)들이 그래서 예전 해인사에서 종정([宗正]하던 혜암스님도 극락에 와 계셨고, 수덕사 원담 스님도 몇 년 전 열반했습니다만. 그 스님도 경봉스님 밑에 와서 한 철 이라도 살고 간다 그런 생각하고 왔다 갔지요. 웜명스님 왈 그때 일타스님 종정하셨던 혜암스님 그런 분들이 다 수좌고, 경산스님이라 던지 이런 분들 또 월산스님도 수좌거든 그런 스님들도 경봉스님을 존경해서 참회상좌 (懺悔上座)로 이름을 붙여서 그래라도 인연을 걸어서 경봉스님께 감화를 받는 그런 걸 우리가 봤거든요 경산스님 같은 분도 1등 수좌거든 그 당시(當時) 1등 수좌들이 다 경봉스님 문하(門下)에서 공부하길 원했어요. 성파스님 왈 저의 은사(恩師) 일타스님이 거기 살았을 때를 회상하면서 참 그 어른은 덕인(德人)이셔, 덕이 너무 출중하셔 할 정도로 그 덕화로 저절로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그런 기풍이라 생각합니다. 그 어른 계신데 가보면 앉을 자리도 업거든요. 얼마나 어질러 놨는지..... 그런데 그게 향기소리가 나요. 그분은 정말 향기소리가 났던 분입니다 그걸 우리가 듣질 못해서 그렇지, 그분은 향기를 피운 게 아니라 소리를 내실 수 있는 분이었어요. 혜국스님 왈 경봉대선사 임종(臨終)을 앞두고 –1982년 7월 열반(涅槃) 스님 가시고 나면 스님 생각 날 거 아녀, 스님 뵙고 싶은데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까 웃으시면서 야반삼경에 문빗장을 만져 보거라! 그르셔.... 명정스님 왈 그 당시 만해스님이 월남망국사를 강의하시면서 우리도 정신 안 차리면 그렇게 된다고 막 우셨다고 그래- 명정스님 왈 선재종자처럼 도(道)를 구하고, 보현보살의 행원으로 중생(衆生)을 제도하라! 내가 이렇게 설법(說法)하는 것은 나의 원(願)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남의 보배를 아무리 세어도 나에게는 반 푼어치도 이익도 없다 날이 밝아지려면 더 캄캄했다가 밝아지듯이 수좌가 하는 것도 이와 같다 봄이 오는 가 싶지만, 지금 뼈가 시릴 만큼 고통스럽다면 길은 이미 멀지 않는 것이다 하늘도 비었지만 가득하고, 가듯해서 푸르러지고 바다 또한 작고 작은 물방울들이 모여 저리 된 것 아닌가, 뭐! 석가모니가 별다른 분인가? 자기도 장부요. 나 또한 그러하니 용기를 내야 한다. 용기를 내라! (2) 올 해가 정법사가 세워진지 100년이 됩니다. 일제 강점기(日帝强占期) 한국불교가 많아 움츠려져 있을 때 구하대종사께서 우리나라의 불교가 지금처럼 돼서는 안 된다 해서 불교를 선진화하기 위해 각 지역에 포교당을 건설하고 마산포교당도 당시에 세워졌습니다. 제가 주지(住持)로 오고서부터는 이 시대에 맞게끔 포교를 하려하는데 장소가 너무 협소해서 제2 중창불사를 하고 있습니다. 지태스님 왈 구하 노스님이 일제(日帝) 때 31곳에 포교당을 세우셨는데 그 포교당 개척의 처음 부임은 경봉스님이 젊은 시절에 가셔서 그 일선에서 실질적으로 활동하셨던 것은 우리 후학들이 배우고 익혀서 계승(繼承)하고 발전해가야 하는 그런 통도사의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우스님왈 구하스님이 극락 노스님을 모셔다가 큰 절 조실로 모시려고 했는데 한사코 그걸 만류하시고, 그걸 안하시고 어른스님께 미뤘던 좋은 모습을 저희들이 지켜봐 왔습니다. 서로 상호간에 신뢰하면서 의지하면서 지켜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현문스님 왈 내가 나락 50섬을 낼 테니 힘을 합쳐 염불당을 만들어보는 게 어떻겠소? 같이 하기로 했는데 한 스님이 그만 가버렸으니까, 그렇지만 같이 하기로 한 거는 공동책임이잖아요. 한 스님이 가더라도 자기도 그 일을 하기로 했으니까? 책임을 지신거지 혼자서...... 그래서 결국은 그걸 다 추자해내셨죠 그러니까 책임감이 아주 대단하시죠. 말씀을 했다고 하면 그걸 꼭 이행하셔야지, 이행 안하시는 것은 별로 없죠. 뭐든지 한다고 하면 꼭 하시는 거라, 5년여에 걸쳐 사중(寺中)의 남은 양식을 모으고 백방으로 모연(募緣)하여 나락 50섬과 제위답 1만2천 평을 마련하셨지요. 통도사 화엄산림법회는 화엄경을 일정기간동안 계속 설(說)하는 법회(法會) 신라시대 자장율사에 의해 시작. 1927년 경봉스님이 극락암에 법석을 세우면서 현제까지 계승되고 있지요 지금 화엄산림을 큰 절에서 매년 동짓달 한 달하고 있는데 큰 스님이 처음 시작했어요. 40년이 거의 다 되가는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 통도사 화엄산림법회가 완전히 전국화 되었습니다. 전국 신도가 다 와요. 그래서 통도사 화엄산림법회는 전국적인 법회기 됐고, 그로 인해서 많은 대중들이 불교(佛敎)를 접하게 되고, TV에서도 녹화방영 함으로써 전국의 불자들이 불교를 배우고 이해할 수 있는 일이 되었고 또, 통도사에 경제적 보탬도 되고 그래서 큰 불사를 할 수도 있고, 그런 면에서 끼친 영향이 크죠. 원산스님 왈 당신이 깨달음을 얻은 경지를 화엄이라는 글로 이렇게 어떤 노보살님께서 노스님이 열반하기 2년 전 쯤에, 노스님을 찾아뵈었는데 글을 주시면서 옛다! 이건 내가 평생 공부한 거니까 그리 알고 잘 받아 지녀라 해서 받으셨다면서 인연처를 찾다가 통도사에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소장하게 되었습니다. 현진스님 왈 시끄러운 가운데 공부를 해야 고요한 가운데서 공부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힘을 얻을 수가 있다 그래서 동정일여가 되고, 몽교일여가 되어야 그게 정말로 산 공부다 그렇게 가르치고 있듯이, 스님께서는 편안하게 공부하신 어른이 아니고, 가장 어렵고 힘들게 낮에는 사무(事務) 보시고 (3) 또 설법(說法) 하시고, 밤에는 밤잠 안 주무시고 정진하시고, 그래서 가장 어렵다는 요중(시끄러운 가운데 하는 공부) 가운데 참선(參禪)을 하신 그런 어른이셨고, 반산스님 왈 법문 끝내고 경내(境內)를 한 바퀴 돌았는데 몸이 갑자기 떨리는 그런 경계가 나타나서 오전 2시 30분 조사선의를 깨닫다 ‘삼소굴 일지 11월 13일’ 오도송(悟道頌) 내가 나를 온갖 것에서 찾았는데 눈앞에 바로 주인공이 나타났네. 허허 이제 만나 의혹 없으니, 우담발화 꽃빛이 온 누리에 흐르네. 그 당시 노장님 너무 좋아서 삼소굴 뒤에서 춤도 추고 막......그리고 화엄산림법회를 하셨는데 법문을 하시는데 화엄경 불자야! 보살마하살이......... 이게 아니고 당신 깨달은 그 경지 갖고 법문을 하시는 게여, 이 도리는... 놀래지 말어, 그 점잖던 분이 법상(法床)에 올라가서 화엄경 법문을 하시는데 이 도리는 X에도 있고 X에도 있고..... 아! 지금 해도 웃을 텐데 그러니까 법문 듣던 사람들이 저 얌전하던 경봉당이 미쳤구나 소문이 밀양까지 갔어. 그래서 동문수학하던 친구들이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있나, 미친 거 같으면 병원에 입원시키고, 그래 한 패거리 몰려와 갖고 법문만 실컷 듣고 갔다고 명정스님 왈 주인공 문답 시(問答 詩) 쯧쯧, 무정한 나의 주인공아 지금에야 만났으니, 어이 그리 늦었노. 하하 우습다. 내가 그대의 집 속에 있었건만 네 눈이 밝지 못해 이렇게 늦었을 뿐이네 그때는 사부대중이 같이 공부를 했어요. 극락암 큰방에 비구스님도 있고, 비구니까 있을 때도 있고 또 처사(處士)도 있고, 보살도 있고 4부대중이 같이 공부를 했는데 해제날 저녁에 스님이 나오셔서 소참법문을 하시고는 태평가를 부르시고 가시는 거라, 원산스님 왈 보내주신 글과 게송을 읽어보니 뛸 듯한 이 기쁨을 무어라 형언할 수 없구려, 그러나 깨달음은 후의 조심은 깨닫기 전보다 더 중요합니다. 한암스님 조계종 초대종정 왈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배의 창고를 발견하였구려, 부디 스님의 습기를 잘 헤아려서 보임하시오. 용성스님 33인 민족대표 중 불교대표 왈 그 막중한 일을 어찌 서신으로 다 할 수가 있겠는가? 스님께서 스스로 경지를 각찰(覺察)하시오. 만공스님 왈 해인사 정대우 선사가 찾아와 담화하고 법결의형제를 하셨다 ‘삼소굴 일지 1929년 9월 6일’ 구름 가에 바루 놓고 이 암자에 지내는데 우연히 그대 만나 현담을 털어놨네. 밤이 깊어 삼경이라 인적이 없는데 가을 물은 하늘에 닿고, 달은 못에 가득하네. 봄바람과 봄비가 때를 알아 오니, 물과 물 산과 산 온갖 것이 다 봄이더라! 꽃도 피고 잎도 피고, 새도 울고 영축산이여! 산은 층층하고 물은 잔잔히 흘러가는데 산꽃은 웃고, 들새는 노래하더라 이 말이야! 경봉대선사 열반 30주년 극락에 길이 없는데 우왜 왔노? -전문-
미천(微賤)한 내가 여기에 뭐라 또 글을 덧붙일 수가 있을까? 허지만 글을 옮겨 적으며 느끼고 생각한바가 있으니, 간략하게 몇 줄 덧붙일까합니다 사바세계에서 연극한번 멋지게 하고 가자하신 큰 스님의 말씀이 이글을 쓰는 내내 가슴 멍멍 (4) 하게 했습니다. 인간은 어디서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바람 같다고 옛 선사(禪師)들은 말씀하셨습니다. 어둠이 깊어지는 것은 깊어지는 어둠속에서 아침이 가까워오고 있음이라고, 옛 선사들은 말씀 하셨으니. 세상이치(理致)가 그러합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꽃이 피면 그 꽃은 져야하고, 그 어떤 목숨이라도 태어나면 죽어야 하고, 아침 해가 동녘에서 붉게 솟아오르면, 그 해는 산(山)을 넘고 강(江)을 건너 서쪽 산등성을 넘어가며 핏빛노을을 풀어놓고 저물 듯이, 우리네 인생도 울음으로 와 산전수전(山戰水戰)을 겪으며 늙어져 지는 해처럼, 마지막은 하고픈 말도 다 못하고 긴 한숨으로 가는 것이 세상 이치입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이 있던가요? 불변(不變)하는 것이 있던가요? 그렇다고 늙지 않는 몸이 있던가요? 죽지 않는 목숨이 있던가요? 아름다운 꽃도 뿌리가 없으면 향기를 가지지 못하기에, 꼬깃꼬깃 접은 종이꽃은 향기가 없고, 덧칠한 화폭(畫幅)속의 그림 꽃은 피면지지 못해, 생명력(生命力)이 없습니다. 빛과 어둠의 상식(常識) 그것이 옳고 그름이고, 참과 거짓이고, 가짜와 진짜입니다 세상의 말이 요지경(瑤池鏡)입니다. 어쩌면 뿌리가 가진 색깔처럼, 자기몸속의 유전인자(遺傳因子)를 유감없이 나타내는 말의 뿌리 그걸 사람들은 근본(根本)이라고 합니다. ‘근본도 없는 놈’ 이 말인즉 ‘싸가지가 없는 놈이란’ 말입니다 길 위에도 길이 있고, 물위에도 길이 있고, 하늘에도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을 허공(虛空)이라 하지만, 그 하늘도 해달별로 깍 채워져 있습니다. 미움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참 사랑을 가질 수 없습니다. 사랑은 애증(愛憎)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당(禮拜堂)에 가서 꿇어 엎디어 아무리 아멘을 외어도, 법당(法堂)에 가서 천배(千拜) 만배(萬拜)를 해도 내가 스스로 밝아지지 않고, 내가 스스로 깨우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도루아미타불입니다 구원(救援)의 신(神) 예수도 자비(慈悲)의 신 부처도 스스로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구원도 자비도 베풀지 않을 것입니다 법정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만족(滿足)은 이만하면 족하다는 마음을 가질 때 만족은 채워지고, 행복은 스스로 행복하다 느끼면 그게 행복이라고 하셨습니다. 청빈(淸貧)은 불필요한 걸 가지려는 욕심이 없음을 말합니다. 굶지 않고 비바람 피할 움막을 가졌다면, 그 사람은 행복의 조건과 만족의 조건을 다 갖춘 사람이란 게 청빈의 정신입니다 오늘 경봉대선사 열반 30주년 극락에 길이 없는데 우왜 왔노? 를 옮겨 쓰며, 많은 걸 깨우쳤습니다. 세상에는 먹지 말아야 할 것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고, 가지 말아야 할 길 가서는 안 되는 길이 있다고 했으며, 머리에 구름이고 다니지 않으면 어느 하늘 밑에 머물러도 비는 맞지 않는다고 했으니, 다시 한 번 새겨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블로그] 혜암의 시 향기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반추라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