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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은 그날 밤잠을 청할 노력마저 포기했다. 그는 나뭇가지를 몇 개 찾 아내 꺼져 가는 모닥불을 살리고 그 옆에 앉아 동이 트기를 기다렸다. 그리 고 케이시를 지켜봤다. 그 일은 그리 불쾌하지 않았다. 깨어있을 때와 달리 잠든 모습에서는 연연한 부드러움이 풍겼고, 그 때문에 성별이 더 확실하게 드러났다. 전에는 잠든 모습을 보지 못했던 터라 이번은 일종의 행운에 속했다. 소년 인 줄 알았을 때에도, 남자 아이치고 너무 예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섬 세한 부드러움과 은근한 관능미를 본 지금에 와서는 정신없이 매료되었다. 이런 젠장, 데미안은 속으로 신음을 내뱉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이 현실을 극복할 자신이 없었다. 아, 그녀의 입을 통해 말을 듣기 전에 미리 눈치를 했어야 했어. 항상 야릇한 감정이 들지 않았던 가. 하지만 총 솜씨와 수훈에만 현혹되었던 게 화근이었다. 치마를 두른 여 자치고 케이시와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이시는 어젯밤에 그 모든 논리와 이유를 철저하게 부숴놓았다. 여성이라..., 아니, 소녀야. 그 점을 명심하려고 애썼지만, 그런 마음이 오래 갈 것 같지 않았다. 우선 저기 누워 있는 여자는 소녀 같지 않았다. 어디를 보나 성숙한 처녀, 친밀한 관계를 맺기에 충분히 나이가 찬 젊은 여성처럼 보였다. 피부가 흠집 하나 없는 도자기처럼 매끄럽다는 사실을, 저 아랫입술이 꽉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도톰하다는 사실을, 이전에는 몰랐다. 쥐 파먹은 것처 럼 들쭉날쭉한 모양이 아니라 양어깨에 부드럽게 내려앉은 머리카락을 상상 해보았다. 하지만 지금 뒤로 넘긴 머리형은 그녀의 섬세한 얼굴형을 남김없 이 드러냈다. 너무 사랑스럽고... 너무 탐나는 존재였다. 소년으로서 케이시는 흥미진진했다. 하지만 소녀로서 케이시는 매혹적이었 다. 하고 싶은 질문이 수백 가지가 넘었지만. 단 한 가지에도 대답을 듣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케이시는 비밀과 감정을 혼자만 간직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비밀을 공개했다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리란 보장은 없었다. 지옥과도 같은 충격을 안겨준 후에도, 케이시는 여전히 그 속을 알 수 없는 불가해한 표정을 써먹었다. 그 특유의 버릇은 속을 타게 만들고 화를 유발하 기에 충분했다. 정말 그를 초조하게 만드는 여성... 하지만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신경을 긁는 요물은 아니었으므로, 마음 을 충분히 가라앉히면, 그런 버릇쯤이야 무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강하게 끌린다는 사실은 극복할 수 없었다. 함께 여행을 계속하면서 그녀에게 관심을 끊을 방법이 없다는 점은 명명백 백했다. 사실, 그녀가 남자를 모두 늑대 취급하는 전통적인 여성의 특권에 집착하지 않는 이 마당에 왜 그런 노력을 해야 하는지조차 의아스러웠다. 지 금 이렇게 단둘이 있다는 현실 자체가 그가 배워왔던 모든 규칙을 깨는 셈 이었다. 맑은 소리로 지저귀는 새소리와 붉게 타오르는 태양과 함께 케이시가 깨어 날 즈음, 데미안의 마음속에서는 아버지를 위해 정의를 실현하고야 말겠다는 결심이 솟아, 새로 불붙은 욕망을 겨우 진정시켰다. 케이시와 복잡하게 얽히 는 짓이야말로 현명하지 못하므로 가능한 거리를 두는 편이 최선책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녀는 계약한 일을 하면 그뿐이었다. 여하튼 그것이 데미안의 결심이었다. 제발 그 마음이 끝까지 갔으면 좋으련 만. 큰 뜻을 이루기 위해 거짓말로 케이시의 마음을 풀어주고 다시 데미안 자 신을 무시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그도 그녀를 무시하기가 한결 편 해질 테니까. 데미안은 케이시가 일어나자마자 행동을 개시했다. 내가 사과하마. 케이시는 힐끔 보고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여러 차례 눈을 깜박인 다음에 야 잠에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데미안, 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어요. 내가 기억하고 싶은 말을 하려거 든, 우선 커피부터 마시게 해줘요. 그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케이시는 눈치를 채지 못한 채 모닥불을 들쑤 시고 마음껏 기지개를 켰다. 젠장, 저런 고양이 같은 몸짓 좀 하지 말았으면... 그러고 나서 케이시는 덤 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때야 데미안은 이전에 케이시의 저런 습관을 눈치채 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데미안의 얼굴을 달궈놓은 홍조는 케이시가 돌아올 무렵에 거의 가라앉았 다. 수치심을 들키지 않을 만큼 주위가 밝지 않다는 점이 천만 다행이었다. 케이시는 그를 똑바로 보지 않고 아침 일과를 다 끝낸 후에야 김이 모락모 락 오르는 커피잔을 손에 들고 모닥불 옆에 앉아 특유의 무심한 표정을 지 었다. 아까 사과 어쩌고 했던가요? 데미안의 시선은 그녀의 다리로 떨어졌다. 케이시는 두 무릎을 활짝 벌리고 양반다리로 앉아 있었다. 그는 좀처럼 그 긴 다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어젯밤 홧김에 한 말은 사실이 아니었어. 가령 예를 들면? 그러니까..., 저기, 내가 너에게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다는 식의 암시 말이 야. 케이시의 몸이 바짝 긴장하는 것 같았다. 그 말이 진심이 아니었어요? 그럼, 당연히 진심이 아니었지. 그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너무 울화통이 터진 나머지 내가 네 깜짝 폭로에 충격을 받은 만큼 너도 놀라게 해줄 심산으로 그런 말을 한 거야. 케이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리고 시선을 돌려 무르익은 일출을 응시했 다. 하늘을 물들인 황금빛이 그녀의 얼굴에 매혹적인 후광을 그려놓았고 데 미안은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도 성질이 나면 진심이 아닌 말을 내뱉곤 했어요. 케이시는 그런 경우를 떠올리려는 사람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나 역시 당신에게 사과를 해야 할 것 같군요. 그럴 필요까지야... 하지만 우리 두 사람 사이에 남은 앙금을 말끔하게 씻어버리기 위해서는 그럴 필요가 있어요. 어젯밤에 나는 내 마음대로 당신이 억지 결혼을 걱정한 다는 식으로 결론을 내렸어요. 당신이 유부남일 수도 있는데... 내 생각이 짧 고 어리석었어요. 유부남이라니? 데미안은 얼굴을 찌푸렸다. 느닷없는 결혼 에 대한 언급은 위니프레드의 부친과의 마지막 만남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그 미래의 장인은 다른 곳도 아닌 장례식장에서 데미안에게 말을 걸었다. 이런 말을 하기에 적절한 때가 아니지만, 설마 결혼식을 미루지는 않겠 지? 적절한 때? 데미안은 미래 장인의 이기심에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그리고 콩 심은 데 콩 난다는 불멸의 진리에 따라 그 이후로 위니프레드나 그녀의 아버지를 상종도 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아내가 없어.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언제 물어봤어요? 난 그저 내 마음대로 결론을 내린 점에 대해 사과 하려는 것 뿐이라구요. 나야 당신이 결혼을 했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이 있겠 어요? 데미안은 케이시가 그 점을 누누이 강조하는 태도에 절로 흥이 났다. 말은 안 했지만, 데미안의 결혼에 관심 있다는 식으로 비칠까봐 걱정하는 눈치였 다. 심지어 부끄러워하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는 재빨리 케이시를 안심시켰다. 맞아, 나도 네가 상관하리라고 생각지 않아. 케이시는 그 화제가 끝났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숙면은 항상 사물에 대한 관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더군요. 정말 놀라운 일이에요. 데미안이야 그 말이 사실인지 어떤지 알 수 없었다. 아직까지는 뜬눈으로 밤을 새운 후유증을 느끼지 못했지만, 오후에도 똑같을지 심히 의심스러웠 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오후 다음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그는 피곤에 절어 있었다. 물릴 정도로 잘 테니까 다음날 보이지 않더라도 찾지 말라고 케이시 에게 무뚝뚝하게 통보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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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