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주 안에 굳게 서라(빌4장4-7)
성경본문: 빌립보서4:4-7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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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하여 바울의 명령의 말씀, “그러므로 주 안에서 굳게 서라!”는 1 절의 말씀 하에 주어진 권면들을 살펴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 드린 대로 이 표현, “굳게 서라(stekete, stand firm)”라는 말은 군대에서 명령할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전쟁에 임한 병사에게 자리를 이탈하지 말고 그 위치에서 부여받은 사명을 의연하게 감당하라는 뜻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 본대로 성도가 주안에 굳게 서는 행동 양식으로 첫 번째, 서로 협력하는 것입니다. 오늘 그 두 번째 시간으로 살펴볼 주제는 “항상 기뻐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봅니다.
어떻게 하면 성도가 주 안에서 굳게 설 수 있을까요? 주 안에서 굳게 서기 위해서는 두 번째 기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본문 4-7절의 말씀을 다시 읽어 봅니다.
* 빌 4:4-7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여기서 다른 명령들도 있습니다. 관용을 보여라, 염려하지 말라, 모든 일을 하나님께 아뢰라, 등의 명령들은 사실 기뻐하면 따라오는 행위들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기뻐하라는 말씀 하에서 이들의 명령들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1. 전천후 기쁨(Always rejoice)을 나타내라
이 편지를 빌립보교회에 보내고 있는 바울이 처지를 생각해 봅시다. 그는 지금 로마(가이사랴)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언제 자신의 생명이 끝이 날지 알 수 없는 그런 상황 속에서 “기뻐하라!”고 두 번씩이나 강조하며 명령하고 있습니다(4절).
그것도 항상(pantote, always), 현재 직설적 명령어로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기뻐하라는 명령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면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불림을 받아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면서 수도 없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항상 기뻐하며 복음을 전파했던 것을 안다면 이 말이 실언이 아니고 실성한 가운데서 한 말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 행 16:19-25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갔다가,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바로 빌립보교회가 세워질 때 있었던 이 놀라운 사건을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바울이 전도할 때 귀신들려 점치는 소녀를 고쳐 준 사건으로 고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고문을 받고 투옥된 바울와 실라는 옥중에서 찬송할 때 옥문이 열렸습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간수가 죄수들이 도망간 줄 알고 자결하려는 것을 막아 그 간수장과 그 집안이 구원받게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이 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을 것은 당연합니다.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을까요? 고난 중에서, 고통 중에서 기뻐할 수 있을까요? 심지어 죽음을 앞두고도 어떻게 기뻐할 수 있을까요?
성도의 이러한 자세는 그 심각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순간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실한 자녀를 도우시고 역사하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예도 그렇고 기독교 역사적으로 이러한 예는 얼마든 지 있습니다. 그 일례로 구약의 다니엘의 세친구들이 겪은 사건이 그러했습니다.
* 단 3:16-18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또한 기독교 근대사에 독일의 모라비안(Moravian)이라는 경건파 성도들의 예를 들수 있씁니다. 감리교회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John Wesley가 대서양을 건너는 배를 타고 미국으로 선교여행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이 여행 중에서 겪은 일을 기록에 남겼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영국 옥스퍼드에서 미국 선교를 위하여 가던 중 대서양 한 복판에서 큰 폭풍우를 만났다. 당시 영국인들은 누구도 하지 못할 일을 겪었다. ---예배가 시작되고 시편의 찬양이 진행되는 중 마치 위대한 깊음이 우리를 이미 삼켜버린 듯 파도가 주 돛대를 조각으로 부수고 배를 온통 뒤덮어 두 갑판 사이에 쏟아 부어졌다. 영국인들 사이에 두려움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독일인들은 조용히 찬양을 계속했다. 나는 나중에 그들 중 한 사람에게 물었다. ‘당신은 두렵지 않았습니까?’ ‘나는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여인들이나 아이들은 두렵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여인들과 아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이 사건은 요한 웨슬레에게 큰 영적 경험이었다.
미국 선교여행을 마치고 귀국하여 그는 다음의 찬송시를 지어 불렀다.
찬송가 441장 “비바람이 칠 때와” 함께 찬양해 봅니다.
1. 비바람이 칠 때와 물결 높이 일 때에 사랑 많은 우리 주 나를 품어 주소서
풍파 지나가도록 나를 숨겨 주시고 안식 얻는 곳으로 주여 인도하소서
2. 나의 영혼 피할데 예수 밖에 없으니 혼자 있게 마시고 위로하여 주소서
구주 의지 하옵고 도와 주심 비오니 할 수 없는 죄인을 주여 보호하소서
항상 기뻐하는 것,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전천후(全天候) 기쁨을 유지하는 것! 이러한 성도의 삶의 원칙과 지혜와 자세는 주 안에서 굳게 서는 신실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2. 관용을 보이는 것입니다.
여기서 관용(epieikes, gentleness)이란 말은 단순히 젊잖은(gentleness) 정도가 아닙니다. 이는 완전히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 있고 또한 권리를 주장해야 하는 그 시점과 상황 속에서도, 불의와 불합리한 상황 속에서도 상대의 입장과 처지를 생각하고 참고 기다리고 상대와 다투지 않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관용적인 모습을 긍휼이 가득한 자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 관용의 미덕은 하늘로부터 주어진 아름다운 덕목임을 알게 됩니다. 야고보 선생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 약 3:16-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성도는 관용을 보이는 자들입니다. 타인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고 살피며 배려하여 그에게 관용을 보임으로써 후에 자기의 권리와 주장을 억지하지 못하게 하는 고도의 성품인 것입니다. 이러한 성품이 영적 지도자의 성품입니다.
구약의 지도자 모세의 성품이 그러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온유함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 민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신약에서 우리 예수님의 성품이 그러했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자신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네, 그렇습니다. 참고 인내하고 온유한 성품을 가질 때 남에게 관용을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항상 기뻐할 때 가져다 주는 삶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겪는 온갖 Stress는 바로 이 온유함, 관용을 베풀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정신적, 병적 증상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관용을 보일 수 있을까요? 도저히 참을 수 없고, 재판을 해서라도 그 결과를 보게 하여 복수를 해야 할 상황 속에서라도 관용의 미를 나타내게 되는 삶의 원칙은 어떤 근거에서 그러할까요?
그것은 바로 이런 신앙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종말론적 믿음(eschatological faith)”때문입니다. 다윗은 바로 그런 생각과 믿음으로 세상을 살았습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온갖 계략을 꾸며 압박하는 장인 사울을 결코 복수하거나 원수를 갚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시 9:8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단을 행하시리로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 시 7:8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내게 있는 성실함을 따라 나를 판단하소서.
* 시 9:16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 이여 악인은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
* 시 50:6 하늘이 그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 전 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욥도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 욥 9:15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감히 대답하지 못하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하였을 뿐이며
저 역시 이러한 믿음과 생각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죄악된 세상 속에 얼마나 간교하고 사악한 자들이 많이 있습니까?
심지어 잘 믿는 다고 하는 자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교회의 이름으로 세상 물욕에 이끌려 사악한 계략과 생각을 가지고 간교하게 살아가는 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세상 법정에 호소하고 선악간에 판단을 받고 싶지만, 그러나 선악을 판단하시는 하나님께 맡겨 판단하시도록 의뢰하는 것이 옳은 신앙적 자세라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하나님께 맡기고 관용을 보이도록 불림을 받는 성도들임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3.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6a).
여기서 염려(merimnate)라는 단어는 마음이 갈라져 조각(partial mind)아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상황이 너무도 좋지 않아 걱정과 염려와 불안으로 초조하여 자기를 통제할 수 없을 정도의 불안한 상태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6절 상반 절에서 명령합니다.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는 “어떤 것도 걱정하는 것을 중단하고”입니다. NIV 번역은 “Do not be anxious about anything” 어떤 것에서도 불안해하며 걱정하지 말라“고 되어있습니다. 진정한 기쁨은 걱정하지 않게 합니다.
사실 현재 바울이 처해 있는 상황이 이런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무 염려하지 말라!” 명합니다. 그리고 기뻐하라고 명합니다. 어떻게 이런 마음이 가능할까요? 다윗의 고백에 그 답이 있습니다.
* 시 54:4-5 하나님은 나의 돕는 자시라 주께서 내 생명을 붙드는 자와 함께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저희를 멸하소서.
그렇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도우시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께서 우리의 문제를 아시고 책임지시고 해결해 주십니다. 그러기에 사도 베드로는 환란과 핍박의 시대에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악전고투하는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하며 위로했습니다.
* 벧전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베드로는 ‘주님께 우리의 염려는 맡겨 버리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이 말을 NIV에서는 “cast all your anxiety on Him”으로 번역했습니다. 강한 표현입니다. 주님께 던져버려 이젠 더 이상 그 염려가 내 것이 되지 않게 하라는 뜻인 줄 알아야겠습니다.
사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걱정과 근심이 없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죄가 관영한 세상에서 신실한 성도들이 살아가는 데 왜 근심이 없겠습니까? 이런 걱정과 근심이 쌓여 고통스러운 때에 성도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기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기도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권면하며 명령합니다.
* 빌 4:6b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성도 여러분, 기도! 최고의 해결책입니다. 기도에 관한 말씀은 다음 시간에 상세하게 살펴보도록 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는 온갖 염려와 걱정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에게는 크고 작은 정도의 문제이지 정신적인 질환은 어느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래서 온갖 질병과 문제로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는 놀라운 특권이 주어져 있음을 잊지 마십시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 분께 모든 것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무시로 기도에 힘쓰시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주 안에서 굳게 서는 비결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살전 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그리고 이렇게 우리를 성도로 부르신 아버지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우리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종말론적 신앙 살아가는 주 안에 굳게 선 성도입니다.
* 살전 5:23-24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