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역사탐방(18)
落葉과 함께하는 공주. 논산지역 역사탐방 일정 및 해설요점
*탐방일정
계룡산 신원사(新元寺) -논산 관촉사(灌燭寺) -돈암서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묘역 -계백(階伯)장군 유적지
*계룡산 신원사(新元寺)
공주 신원사는 동학사, 갑사와 함께 계룡산 3대 사찰이다 신원사는 백제 의자왕 11년(651)에 보덕화상이 창건하고 그 뒤 도선국사, 무학대사 등의 중창을 거쳐 1946년 만허화상이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신원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지금의 위치로 옮겨 중건하였으며 원래의 건물 지는 신원사와 중악단 남쪽에 전개된 넓은 밭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금당지로 추정되는 지역을 중심으로 5층 석탑이 세워져 있어 이곳이 본래의 절터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원래 금당 지를 중심으로 석탑이 있는 이외의 현재 신원사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독성각, 영원정등이 있다 대웅전에는 아미타불을 주존 불로 하여 우측에 대세지보살, 좌측에 관음보살을 모시고 있다
*신원사를 창건한 보덕화상은 고구려말 보장왕(643)의 국사로서 정치의 부패를 상소하였으나 관철되지 않아 백제로 망명하여 현재의 신원사 자리에 사찰을 짓고 열반경을 강설하니 신라 고승 원효와 의상도 그 명성을 듣고 와서 청법하였다 하며 “대각국사문집”에 의하면 보덕화상이 원효의 스승이라 하였다
*신원사의 유적과 유물
대웅전, 5층석탑, 계룡산 중악단(보물1293호) 그밖에 고왕암, 등운암, 신광원, 소림원, 불이암, 금용암등이 있다 특히 여름철이면 수령 600년인 무욕의 상징 배롱나무 꽃이 구례 화엄사의 흑매화처럼 홀로 붉게 피어 있다
(1)신원사 중악단(中嶽壇) 보물 1293호
계룡산 중악단은 국가에서 계룡 산신에게 제사 지내기 위해 마련한 조선시대 건축물이다 태조 3년(1394) 무학대사의 꿈에 산신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신원사에 산신각을 짓고 처음 제사를 지냈다 구릉지에 동남서 남을 중심축으로 하여 대문간채, 중문간채, 중악단을 일직선상에 대칭으로 배치하고 둘레에는 담장을 둘렀다 건물 배치와 공간 구성에 단묘(壇廟) 건축의 격식과 기법을 엄격히 적용하고 있다 중악단의 현판은 조선후기 문신 이중하(1846-1917)가 쓴 것이다 내부 중앙 뒤쪽에 단을 마련하고 단위에 나무상자를 설치하여 그 안에 계룡산신의 신위와 영정을 모셔 두었다 1.5m의 높은 돌 기단 위에 앞면 3칸의 규모에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다포양식인데 조선후기의 특징적인 수법으로 조각 장식하여 화려하고 위엄 있게 하였다 또한 각 지붕 위에는 각각7개씩 잡상(雜像)을 배치하여 궁궐의 전각이나 문루 또는 도성의 문루에서 사용하던 기법을 쓴 점도 특이하다 중악단 대문간채 낙은재(樂隱齋 )현판은 흥선 대원군 글씨이며 이대문간채에 붙어있는 방은 명성황후가 중악단을 재건하고 머무르며 기도했던 곳으로 이 곳에서 기도를 해 순종을 회임했다한다
(2)신원사 고왕암(古王庵)
신원사의 부속 암자이며 660년(의자왕20)에 의자왕의 명으로 창건하였다 “공주읍지”에 따르면 의자왕이 이 암자를 창건토록 명하였으나 미처 완성하지 못했다한다 당시 당나라 소정방과 신라 김유신이 백제를 침공하였을 때 백제의 왕자 부여융(隆)이 이곳에 피난하였다가 붙잡혔기 때문에 암자 이름을 “古王”이라 한 것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삼국사기에서는 부여융을 고왕자(古王子)라 기록하고 있다) 그밖에 고왕암 주변에는 부여융이 피난했었다는 용피굴과 융이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충마(忠馬)가 슬피 울다 떨어져 죽었다는 마명암(馬鳴庵) 터가 있다 이외에도 신원사를 창건한 보덕화상의 열반경을 청강하기 위해 원효가 머물며 수행했었다는 최초의 자연굴 법당 “원효굴” 정도령의 비서에도 등장하는 우물인 “계룡 석정” 등이 있다
*논산 관촉사(灌燭寺) 석조미륵보살입상
보물 제218호 우리나라 석조 불상 중에서 가장 큰 불상으로 크기가 17.8m이다 일명 은진미륵(恩津彌勒)이라한다 조선후기에 찬술된 “관촉사 사적기”에 의하면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고려 광종 때인 970년부터 목종 때인 1006년 까지 혜명스님이 장인 100여명을 거느리고 관촉사와 함께 조성하였다한다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목에 비해 머리와 손발이 상당히 큰 편이다 전체적인 비례도 잘 맞지 않다 또한 얼굴에 꽉 차게 표현된 이목구비, 부풀어 오를듯한 양 볼과 이중 턱, 원통형의 짧은 목, 얼굴에 비해 좁은 어깨 특히 얼굴과 손이 강조된 표현은 고려시대 977년에 조성된 고령 개포동 마애보살좌상과 981년 이천 장암리 마애보살좌상등 10세기후반에 조성된 보살상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석조 미륵 보살입상은 부여 대조사 석조 미륵보살입상(보물 217호) 등 고려 초기에 충청지방에서 조성된 석불 입상의 모델이 되었다
*관촉사 석등(石燈)
보물232호. 높이 5.45m 관촉사 앞뜰의 큰 석불 앞에 놓여 있으며 조성연대는 968년(광종19)으로 추정된다 3단의 받침돌 위에 화사석을 두고 위로 지붕돌과 머리 장식을 얹었다 정사각형의 아래 받침돌 윗면에 8장의 큼직한 연꽃무늬를 새기고 그 위로 2단의 굄을 새겨 둥그런 기둥을 받치고 있다 옥개석 정상에는 한 개의 돌로 조성한 보주가 놓였는데 그 조각 수법은 둔중한 편이며 각부에 비하여 간주도 둔중하다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고려의 석등으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관촉사 배례석(拜禮石)
관촉사 5층 석탑 앞에 있는 고려시대 석조물이다 배례석은 일반적으로 사찰의 탑이나 불상 앞에 있는데 예배 때 예를 올리거나 의식 집행 혹은 의식에 사용되는 향로나 촛대 등의 용구를 놓기 위해 조성한 석물이다 관촉사 배례석은 장방형으로 상면에 연화문이 조각되어 있다 장방형의 대석으로 바닥에 2단의 직각 괴임을 마련하였고 그 위의 면석에 안상(眼象)을 조각하였다 안상은 긴 변에 3개, 짧은 변에 2개를 조식하였고 그 안에 고사리 무늬 같은 것을 양각 하였다 배례석의 길이는 204cm 너비 104cm 높이 40cm이다 우리나라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고려시대의 배례석으로 연화문의 장식등 원형이 비교적 잘 보전되어 있다
*논산 돈암서원
돈암 서원은 사계 김장생을 제사 지내고 그의 학문을 이어 받고자 설립한 조선후기 사립교육 기관으로 김장생이 타계한지 3년 후인 1634년(인조 12) 에 그의 제자와 지역의 사람들이 김장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하였다 1659년(효종10)에 돈암의 액호를 받아 사액서원으로서 면모를 갖추었으며 김집(1658)과 송준길(1688), 송시열(1695)을 추배하여 네 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처음 서원은 논산시 연산면 부황역 연산천 가까이에 위치하였으나 1880년(고종17) 침수피해로 인하여 현재 위치로 이건하였다 이 때 돈암 서원은 건축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돈암서원 응도당(凝道堂)
보물 제1569호 조선시대 유생이 공부하던 곳이다 서원이나 향교에서 강학 공간으로 사용하는 강당이 사당방향과 직각으로 배치되는 예는 드문 편인데 사용하는 강당이 사당방향과 직각방향으로 틀어서 배치되어 있다 응도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누마루 식 건물로 겹처마에 맞배지붕의 주심포계통의 건물이며 박공 널 밑에 비바람을 막기 위한 방풍판을 설치하고 풍판아래에는 눈썹지붕을 툇칸처럼 달았다 응도당은 기와에 쓰여 있는 명문으로 보아 1633년(인조 11)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응도당은 현존하는 서원 강당 건물로는 거의 유일하게 고대 예서에서 말하는 하옥제도(廈屋制度)를 본받아지어진 건물이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묘역
조선중기 대학자 사계 김장생(1548-1631)선생과 광산 김씨의 중흥을 이룬 허씨 부인과 김철산, 김겸광, 김공휘등의 묘지이다 김장생은 송익필과 이이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명나라 군대의 군량 조달에 공을 세우기도 했다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였고 과거 시험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중요한 벼슬을 맡지 않았으나 인조반정 이후로는 서인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중심인물이 되어 영향력이 매우 컸다 그는 주로 학문과 교육에 시간을 보내면서 조선예학의 한줄기를 형성했고 제자 송시열과 송준길등의 대학자를 배출했다 묘역 주변이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김씨일가의 묘소와 사당, 비석 등이 한곳에 모여 있는데 김장생의 묘는 7대 조모 허씨와 증조부, 조부 등 선조(先祖)보다 위쪽에 묘를 쓰는 역장(逆葬)을 하였다
*계백(階伯)장군 유적지
계백(階伯 : ?-660)은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했을 때 5천 군사를 이끌고 논산 황산벌에서 5만 여명의 신라군을 맞아 네 차례의 전투를 벌인 끝에 장렬하게 전사했다 “삼국사기”에 남겨진 기록으로는 계백의 직위가 달솔에 이르렀다한다 달솔이란 백제의 16관등 중 두 번째 높은 벼슬로 은 꽃을 꽂은 관을 쓰고 자주색 관복을 입었으며 도성을 다스리는 우두머리의 역할을 했다 계백이 어떠한 배경을 가지고 어떠한 과정을 거쳐 달솔까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달솔이라는 직위가 주로 왕족들에게 주어졌던 점으로 볼 때 계백 역시 왕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계백 장군 묘는 1966년 발견 당시 봉분이 반 이상 붕괴되어 내광이 노출되었으며 광 벽까지 일부 파손된 채 방치되어 있었는데 부적면 사람들아 지석(支石)을 안치하고 내광 회벽을 완봉한 후 봉분둘레 47.6m 지름 15.15m 높이 6.5m 로 복묘하였다 1976년 5월 19일에는 봉토를 만들고 비석을 세웠다 비석에는 “전백제계백장군지묘(傳百濟階伯將軍之墓) 라고 씌어있다
첫댓글 늘 감사드림니다
선배님,오래 간만에 뵙겠습니다..건강 하시죠?
늘 변함없이 격려를 해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매년 11월초면 늦단풍과 낙엽이 어우러지는
색다른 계절의 낭만이 우리 마음을 더욱 설레게 합니다
올해는 유난히 단풍이 곱게 물 들었다 합니다..탐방날 뵙겠습니다
로드경고문님!
오랜만이심니다.
滿山紅葉이 물들어 가는 계절에 역사탐방에 참석치 못하여 미안합니다.
병원 예약을 미룰수 없기에 그러하옴니다.
잘 다녀 오시기를...
늘 아껴주시고 격려 해주시는 선배님 마음이 있기에 가끔씩 나태(?)해진 마음을 다잡게 됩니다
이모든것이 보이지 않는 선배님의 힘입니다..그리고 탐방때면 알게 모르게 저를 챙겨주셨던
예쁜 잔나비 선배님들 생각이 간절합니다..특히 저를 초빙해준 민들레지기님 생각이 문득문득 납니다
선배님...선배님을 비롯해 잔나비 선배님들과의 인연은 너무나 소중합니다
좋은 역사탐방날 모두들 뵙고 싶습니다...건강들 하십시요
항상 역사방을 사랑하시고 멋진 해설을 사전에 숙지하도록하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항상 말씀없이 먼발치에서 해설을 경청하시는 선배님 모습을 뵈면서
역사에 관심이 많은 분 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미리보기 해설요점이 역사탐방에 도움이 되신다니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깊은 관심과 격려가 있기를 바랍니다..탐방날 뵙겠습니다
올려주신 해설문 잘 읽었습니다..
소상하고 알기쉽게 올려주신 해설문은 탐방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그냥 눈으로 보는 것과, 읽어 보고 현장에 가서 보는 것은 차이가 있거든요..
공부하는 역사탐방을 위해 수고하시는 로드경고문님.. 항상 감사합니다.
언제나 제가 올린 글을 애독 하시고 프린트하여 스크랩 하셔서 이젠 한권의 책이 됐다는
말씀에 나름 보람을 느끼며 선배님께 고개숙여 감사드립니다
이번 탐방에서 계룡산 신원사 중악단 꽃담이 선배님 사진작품 활동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늦단풍과 어우러지는 꽃담은 깊어가는 가을을 한층 아름답게 수 놓을것 입니다
탐방날 뵙겠습니다...수술하신 눈...이젠 불편함없이 완쾌 돼셧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