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에 도착한 다음날인 1월 6일 오후 3시 홍콩의 상징인 구룡 반도의 스타 페리(Star Ferry) 부두 근처 ‘홍콩 최고의 호텔’인 페닌술라 호텔(Peninsula Hotel)에서 오우삼 감독을 만났다. 오우삼이라고 한다면 1980~90년대 <영웅본색> 1, 2편과 <첩혈쌍웅> 등 한국을 홍콩 느와르의 열혈 팬들로 감염시킨 홍콩 느와르의 거장이 아니던가. 이틀 전인 1월 4일 홍콩을 찾은 그는 이날도 홍콩 현지에서 쇄도하는 릴레이 인터뷰를 소화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12월 미국 로스 엔젤레스에서 진행된 <페이첵>의 월드 프리미어에서 오우삼은 하루에 40건의 인터뷰를 소화해 내는 괴력을 발휘했다. 관계자에 따르면 오우삼 감독은 이번 홍콩 인터뷰 일정은 너무 ‘느슨하다(loose)’는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고 한다. 앞 인터뷰가 지연되어 약속된 시간인 3시에서 약 20분이 지나서야 오우삼 감독이 인터뷰 룸으로 들어왔다. 오우삼이 중국 사람 특유의 무뚝뚝함이 두드러지는 '마초(macho)' 스타일의 감독일 것이라는 기자의 판단은 보기 좋게 틀렸다. 그는 의자에서 일제히 일어난 한국 기자단에게 일일이 악수를 청하며, 따뜻한 미소와 서툰 한국말로 농을 건넸다.
<페이첵>은 <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 <토탈 리콜 Total Recall>, <마이너리티 리포트 Minority Report>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필립 K. 딕의 공상 과학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핏빛 미학의 대가’ 혹은 ‘홍콩의 헤모글로빈의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액션 감독 오우삼이 SF에 도전하다니 다소 궁합이 맞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기자의 두 번째 판단 역시 여지 없이 틀렸다. 오우삼이라는 이름 대신 ‘존 우(John Woo)’라는 이름을 세계 관객들에게 각인시킨 <페이스 오프 Face/Off> 역시 SF적인 느낌이 강했던 액션 영화가 아니었던가. <페이스 오프>의 니콜라스 케이지와 존 트래볼타, <미션 임파서블 2 Mission: Impossible II>의 탐 크루즈에 이어 <페이첵>에서 오우삼과 합류한 할리우드 스타는 벤 애플렉. 미라맥스의 저예산 드라마 <굿 윌 헌팅 Good Will Hunting>으로 미국 아카데미에서 각본상을 수상했던 벤 애플렉은 마이클 베이의 1998년작 <아마겟돈 Armageddon>을 기점으로, 이후 <진주만 Pearl Harbor>과 <데어데블 Daredevil> 등 액션 블록버스터의 히어로로 연기의 장을 넓힌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남자 배우다. <영웅본색>과 <첩혈쌍웅>의 포스터를 자신의 방에 걸어두고 있을 정도로 오우삼의 열혈팬을 자처하는 벤 애플렉은 <페이첵>의 감독으로 오우삼을 일순위로 추천했으며, 결국 그의 꿈!은 이루어 진 것이다.
<페이첵>은 오우삼이 전작 <윈드토커 Windtalkers>의 재앙과도 같았던 흥행 실패 이후 1년 만에 내놓은 권토중래작. 지난 12월 24일 미국에서 개봉된 <페이첵>은 그다지 좋은 흥행을 기록하고 있지는 못하고 있으며, 평단의 반응도 차가운 편이다. 그러나 오우삼은 중국인 특유의 낙관론자 답게 이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다. 2002년에 나온 스티븐 스필버그의 <마이너리티 리포트>처럼 미끈한 CG로 한껏 멋을 낸 환상적인 비주얼이 인상적인 최근의 SF 영화들의 트렌드와는 달리 <페이첵>은 기본적으로 SF의 요소가 강한 액션 영화다. 또한 곤경에 처한 주인공이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탈출한다는 식의 설정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를 떠올리게 하며, 그 결과 고전(classic)의 냄새가 많이 나는 스릴러물이 되었다. 오우삼은 <페이첵>에서 특수 효과를 가능한 배제하고, 주인공들의 순수한 ‘액션’을 부각시켰다. 주연인 마이클 제닝스로 분한 벤 애플렉은 여느 할리우드 영화에서라면 스턴트 맨으로 대체했을 위험한 장면들에서 직접 실연을 펼치는 객기로 감독을 만족시켰다. 오우삼은 <페이첵>의 주인공 제닝스를 해석하는 데 있어 히치콕의 <서스피션 Suspicion>과 <오명 Notorious>의 캐리 그랜트를 염두에 두었다고 말한다. 캐리 그랜트와 벤 애플렉이라. 어느 정도는 그럴듯한 궁합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오우삼은 그다지 SF를 좋아하는 감독이 아니다. SF 특유의 묵시록이고 암울한 느낌 때문에 연출은 커녕 관객의 입장에서도 SF 영화는 그다지 즐겨보지 않는다고 한다. 오우삼에게 <페이첵>의 연출을 제의한 파라마운트는 오우삼을 할리우드로 모셔온 장본인일뿐 아니라 <하드 타겟 Hard Target>부터 <미션 임파서블 2>까지 오우삼이 할리우드에서 줄곧 함께 작업해 온 스튜디오다. 오우삼은 <툼 레이더 2 Tomb Raider : The Cradle of Life>의 각본가 출신인 딘 조가리스의 각본을 읽은 후, 필립 K. 딕의 단편을 접했다. 그 결과 오우삼은 소설의 암울한 분위기를 최대한 걷어내고 인간적인 이야기가 있는 희망적인 결론으로 방향 전환했다. 원작에서는 나타나 있지 않은 남, 녀의 로맨스를 부각시킨 것 또한 그의 이런 의도가 들어간 부분이다.
이런 점에서 <페이첵>에서 우마 서먼이 연기한 레이첼은 그로서는 일종의 ‘파격’이다. 오우삼의 이전 영화들에서 표현되는 여성은 순수하고 나약하고 수동적인 그런 이미지가 대부분이었다. 오우삼이 교과서로 삼았던 알프레드 히치콕 영화의 여주인공들이야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그러나 <페이첵>의 헤로인인 레이첼은 오토바이에 탄 채로 그녀가 쓰고 있던 헬멧을 던져 뒷차 운전자를 기절시키기도 하고, 멋진 발차기로 상대를 완전히 무장 해제시키기도 한다. 데자-뷰! 미국에서 <페이첵>보다 두 달 먼저 개봉된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 Kill Bill>의 우마 서먼이 퍼뜩 떠오른다. 그러나 액션 영화의 거장답게 오우삼은 <킬 빌>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는 자신의 이전 영화에서는 표현해 보지 않았던 강력한 여성 캐릭터를 창조하고 싶었던 것. 공교롭게도 <킬 빌>로 기초 트레이닝을 마친 우마 서먼이 오우삼의 이런 의도에 걸맞는 연기력을 선보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다음 작품 계획을 묻자 오우삼은 <영웅본색>처럼 비극적이고 인간미가 넘치는 누아르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물론 그의 페르소나인 주윤발과 함께. 현재 오우삼의 앞에는 1930년대 중국 상하이를 무대로 한 액션 뮤지컬과 갱스터 영화, 이렇게 두 가지의 프로젝트가 놓여져 있다. 뮤지컬이라고? 기자의 귀를 한 번 더 의심하는 순간이다. 이미 영화의 시나리오가 완성된 제목이 결정되지 않은 액션 뮤지컬은 갱의 조직원이면서 춤을 잘 추는 남자를 중심으로 그의 언저리를 맴도는 두 여자가 등장하는 삼각 관계의 이야기다. 춤과 노래 그리고 액션을 절묘하게 혼합하여 우정, 의리, 형제와 친구 사이의 감정의 충돌 등 홍콩 시절의 오우삼 영화 식으로 풀어낼 예정이라고 한다. 오우삼이 만드는 뮤지컬이라, 기대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1시간으로 예정된 그와의 인터뷰 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 2003년 타계한 홍콩의 대표적인 영화인들인 장국영과 매염방에 대한 추억을 짧게 언급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통역자를 통해 이 두 이름을 전해 듣는 순간, 그는 무려 30분 동안이나 주저리 주저리 이야기를 해나갔다. 특히 장국영에 대해서는 약속된 시간을 훌쩍 넘겨가면서까지 그에 대한 추억을 회상했다. <패왕별희 Farewell, My Concubine>의 홍보를 위해 미국에 온 장국영이 오우삼 부부와 저녁을 먹던 날 지진이 났던 해프닝 등을 말해주는 오우삼에게 장국영은 동료이자 친구이자 영혼의 동반자였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장국영이 홍콩 만다린 호텔에서 투신한 2003년 4월 1일은 <페이첵>의 촬영이 시작된 날이었다. 그날 저녁에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된 오우삼은 집에 돌아와 가족들과 함께 오열했다고 덧붙힌다. 오우삼의 마지막 한 마디가 여전히 귀를 울린다. “장국영은 자신의 아픔은 속에 묻고, 그의 즐거움만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갔다” 오우삼은 이 말을 하며 눈물을 내비쳤다.
오우삼과의 유쾌한 인터뷰를 끝낸 후 <페이첵>의 VIP 시사회 참관을 위해 해저 터널 너머 홍콩 섬 최고 번화가로 손꼽히는 코즈웨이 베이(Causeway Bay)의 한 멀티플렉스로 향했다. 이미 한국에서도 익숙한 행사인 VIP 시사회는 감독이나 제작사와 친분이 있는 유명 연예인들을 위한 시사회로, 관객들에게는 영화와 유명 연예인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일석이조의 행사다. 오우삼의 등장에 환호하는 현지 관객들의 열화 같은 반응에서 홍콩 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노감독에 대한 이들의 존경심이 강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현장에 모여든 관객들의 호응과는 달리 행사를 빛내줄 스타들이 많이 이 곳을 찾지 않아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주윤발, 장만옥, 양자경 등 많은 홍콩 출신의 특급스타들의 참석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정작 이곳을 찾은 명사는 <할리우드 홍콩>의 프루트 첸 감독, <친니친니>의 곽부성, <무간도 2>의 오진우 정도뿐이었다. 최근 부쩍 침체된 홍콩 영화계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 같아, 다소 씁쓸하게 느껴졌다. 홍콩에서의 짧았던 2박 3일 동안의 일정은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