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7주간 토요일
야고보 5,13-20 마르코 10,13-16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코 10,15)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외적 태도와 내적 마음가짐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첫 부분(10,13-14)에서 그분께서는 쓰다듬어 달라고
어린이를 데리고 온 이들을 꾸짖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10,14)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거나 소외받는 이들을 대하는 태도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권세 있고 부요한 이들의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힘없으며,
굶주리고 슬퍼하는 이들의 차지라 하십니다.
따라서 어린이처럼 그렇게 힘없고 누구에겐가 의지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이들이
예수님과 만나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축복과 정의와 자비로 가는 길목을 막는 것이 불의요 폭력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사랑스러운 어린이 몇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보잘것 없고 가난한 이들 또한 그 어떤 차별도 없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복음의 기쁨을
맛보도록 초대되었음을 상기시켜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든 하느님과의 친교, 예수님과의 거룩한 교제를 이루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을 살리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사회적 사랑’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각자의 마음자세를 다음과 같이 알려주십니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10,15)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인간에서 거저 주시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선물이니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는 ‘어린이와 같은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온전히 신뢰하고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마음, 주어진 것에 기뻐하는 마음, 겸손하게 순종하는 마음,
계산하고 판단하지 않고 순수한 눈으로 바라보는 마음,
사랑을 받기 위해 행동하고 사랑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마음 등을 말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이런 어린이의 마음을 지녀야 한다 하십니다.
믿지 않고 의심하고, 자신에게 얼마나 이로울지를 따지며,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며 보상을 바란다면
참 행복의 나라에 들어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물질주의가 극도로 팽창하고 돈의 힘이 막강해진 오늘날 현세적 성공을 찾는 소경이 되어선 안되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한사람 한사람을 극진히 사랑하시기에 끊임없이 은총의 선물을 주심을 압니다.
따라서 마음의 문을 열고, 내 기준으로 이것저것 가려서 받겠다는 마음을 버리고,
믿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겠습니다.
심지어 감당하기 힘든 고통과 시련이 다가온다 하여도,
주님께서는 그것을 통해서도 가늠할 수 없는 은총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어떤 처지에서든 하느님을 갈망합시다.
육화의 겸손과 수난의 사랑을 통해 행복의 나라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신 예수님을 기쁜 마음으로 따라갑시다.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하느님의 마음으로 소중히 여겨 더불어 사랑의 나라에 머물게 하고,
전적인 신뢰와 단순한 수용과 순수한 눈길로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며...
작은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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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7주간 토요일
야고보 5,13-20 마르코 10,13-16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오늘 복음은 어린이를 데리고 와서 축복해주기를 청하는 사람들을 제자들이 꾸짖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해줍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앞 장(9장)에서 제자들에게 ‘가장 큰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코 9,37)
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것을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을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코 10,14-15)
‘어린이’는 성경에서 무력하고 힘없는 사람,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 수 없어 돌보아주지 않으면
곧 죽게 되는 무능하고 약한 이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어린이’는 사회에서 스스로 살 수 있는
힘이 없는 무력하고 무능한 이, 미천하고 버려진 이, 천대받고 소외된 이를 대변합니다.
또한 율법을 모르는 이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가 ‘어린이와 같이 받아들이는 이들이 들어가는 곳’이라 함은
‘하느님 나라’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들어가는 이에게 열려있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와 같이 받아들이는 이에게 열려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 나라’는 은총으로 말미암아 선물로 주어지는 나라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율법을 잘 지켜온 부자청년과의 대화’에서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10,23) 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10,27)
오늘 우리는 우리의 처신들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약하고 무력하고 가난한 이들, 사회적 약자들을 업신여기고 있지는 않는지,
그들이 예수님께 다가가고 축복받는 것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는지,
그들이 성당에 오는 것을 반겨 맞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꺼리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사실 교종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에게 우리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우리에게 그들이 꼭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다가가면 그들이 오히려 우리를 복음화 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자 되게 하고, ‘회개하여 어린이 같이’ 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종께서는 가난한 이들과의 유대와 연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넘어서
가난한 교회가 되라고 하십니다.
마태오의 병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오 18,3)
<오늘의 샘 기도>
주님! 아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놀라워하고 경배하게 하소서.
이해하지 못해도 신뢰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어린이같이 아래에 있어 모두를 받아들이는 바다가 되게 하소서.
아래에 있기에 떠받들고 존경하게 하소서. 약하기에 당신께 속해 있게 하소서.
아멘.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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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7주간 토요일
야고보 5,13-20 마르코 10,13-16
여러분은 ‘나’ 아닌 ‘남’을 위해서도 자주 기도를 바치십니까?
주변에 “당신을 위하여 기도하겠습니다!”라고 스치듯 인사하기는 쉬워도,
나와 별 인연이 없는 누군가를 특별히 기억하고 기도한다는 것이 생각만큼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나를 위하여 기도할 시간도 부족한데 남까지 신경 쓸 여유는 더더욱 없다.’라며 속으로 단념해 버리곤 하지요.
오늘 제1독서는 기도에 관한 여러 권고를 들려줍니다.
그런데 특별히 ‘남’을 위한 기도가 큰 힘을 발휘한다는 내용이 눈에 들어옵니다.
야고보 서간의 저자는 교회 원로들이 병자를 찾아가 기도해 주면
그 믿음의 기도가 그를 구원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범위를 확대해서 이제 신앙인 모두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
누군가를 위하여 기도할 때 발휘되는 효력이 이토록 큰 것이라면,
그런 놀라운 힘을 그냥 묵혀 두기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변에 기도가 필요한 이웃들을 하나둘 떠올려 보고, 시간을 내서 이들을 위하여 기도해 봅시다.
별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섣부르게 예단하지 말고 정성을 다하여 기도합시다.
주님께서는 ‘남’을 위하여 바치는 우리의 정성을 꼭 기억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분명 누군가에게 실현되는 구원의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 구원이 어떤 이에게는 육체 또는 마음이 겪는 고통에서의 해방일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게는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서 하느님을 향하게 하는 회개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듯 보이는 우리의 작은 기도가 주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의 놀라운 도구로 쓰인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