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이근안 경감을 싫어하는 남자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은 제7 체육공원에서 영원히 완공되지 않을 스포츠
영화 전용 극장으로부터 수리산 쪽으로 최교수를 따라 시문이 5분쯤 걸어갔더니
만남의 광장이 나왔다. 어떤 사람등이 무엇을 하려고 왜 만나기 위해서 만들어
놓았는지 몰라도 만남의광장은 고속도로변의 휴게소하고는 거리가 멀어서 노촌
구리 광산처럼 땅을 파내어 로마의 검투사들이 목숨을 걸고 써우던 콜로세움을
연상시키는 구조였고 가라앉은 2천 평규모의 격투기장에서는 5-60명의 젊고늙고
어린 남자여자아이들이 서커스라도 벌이는지 해괴한 광경을 연출했다.
만남의 광장에서는 모든 사람이 거꾸로 갔다.
뒤로 걸어가는 사람이야 아참 약수터 길에서 흔히 볼 수 있었지만, 여기에서
는 뒤로 뛰는 사람이 대여섯이었고, 젊은 남자둘이서는 물구나무를 서서 거꾸로
가는 운동에 열중했고, 거꾸로 가는 시민들의 모습이 재미있어 깔깔거리며 어
느 젊은 엄마는 유모차를 거꾸로 끌면서 뒷걸음질을 쳤고, 수염이 허연 할아버
지가 하얀 갓을 쓰고는 자전거를 타고 뒤로 갔으며, 할아버지를 흉내내어 어떤
어린 아이가 세발자전거를 뒤로 굴려 갔고, 안경을 쓴 스님이 명상에 잠겨 뒷걸
음 행보를 했고, 그래서 축소판 콜로세움은 온통 거꾸로 움직였다.
관중에서는 10여명이 흩어져 앉아 격투기장에서 거꾸로 가는 경연대회를 벌이
는 사람들을 구경했는데, 땡볕이 한여름 아스팔트 바닥처럼 뜨거웠어도 양산을
펼쳐든 여자가 하나도 없었다.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거꾸로 거꾸로 한 번 살아보고 싶어." 거꾸로 가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면서 몽고에서 태어나지 않은 노인이 말했다. "어려서 태어나
멋모르고 성장하면서 힘겨워 죽을 고생을 하다가 추하게 늙어서 죽느니보다는
늙어서 태어나 어려운 세상을 거친 후에 젊음을 한껏 누리고 어린아이가 되어
즐겁게 뛰놀다 어려서 죽으면 얼마나 좋을까? 언젠가 헨리 밀러는 다 늙어서 명
성을 얻고 보니 누릴 시간이 없더라고 한탄했는데, 인생인란 늙어서야 겨우 경
제적인 여유와 즐길 시간을 얻게 되니 얼마나 슬픈 현실이냐구. 공들여 집을 짓
다가 겨우 공사를 끝내고 나면 너무 늙고 지치고 병들어 죽어야 하는 게 인생이
지. 풋 과일처럼 싱싱하고 젊은 시절이 지나면 인간의 육신은 벌레가 끼어 썩어
버리고, 머리카락과 이빨이 빠진 초라한 모습으로 죽는 거야. 하지만 거꾸로 살
게 된다면 힘들고 허무한 노년기부터 보내고, 노인으로 태어나자마자 여태까지
평생 동안 터득한 지혜를 갖추었으니 길을 잘못 들 염려도 없고, 서투른 실수도
범하지 않겠지. 그러면 인생을 설계하기도 좋겠고. 안 그래? 어쩌면 저 사람들
은 그래서 모두 거꾸로 가는지도 몰라." 존재하면서도 존 聆舊 않는 시문을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공원에 들어와 거꾸로 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정
신나간 지식인과 콜로세움의 객석에 나란히 앉아 출구라고는 알루미눔쪽문 하
나밖에 없는 이곳에서라면 멀쩡히 존재하는 사람이라도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릴지 모르는데, 이미 존재가 사라져 버린 내가 또다시 사라진다면 누
가 겹으로 실종된 나를 찾아낼 것인가 알 길이 없었고, 이제 그의 존재를 확인
하러 가야 하는 다음 목적지로 떠나야 할 시간이 된 그는 거꾸로 사는 인생에
대한 잡담이나 나누면서 보낼 정신적인 여유가 없었고, 그래서 알아내야 할 정
보는 어서 알아내야 되겠다는 결심을 굳힌 정시문은 우선 최교수의 정체부터
밝혀야 되겠다고 작정했다.
"영감님은 도데체 뭘 하시는 분인가요?" 시문이 불쑥 물었다.
최교수는 플라스틱 인형처럼 생명이 없어진 눈으로 시문을 쳐다보면서도 시문
을 쳐다보지 않으며, 노인과 나 사이의 중간쯤되는 허공을 응시하며, 잠시 머리
속에서 무엇인지 계산해 보더니 말했다.
"사실은 나 공장에 다녀."
"무슨 공장요?" 시문이 무심코 던진 질문이었다.
최교수는 대답을 하기가 거북해서인지 격투기장에서 거꾸로 돌아 다니는 사람
들을 내려다보면서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시문은 얼굴과 피부가 찌릿 굳어버렸다. 놀라움의 경련 때문이었다.
최교수가 다니는 공장이 어디인지를 시문은 한 박자 뒤늦게, 이미 질문을 던
진 다음에야 깨달았고, 그러면서도 그는 그러면 그렇지, 어쩐지, 그럴 줄 알았
어, 생각했고, 순간적인 놀라움과 공포감이 슬그머니 주저앉았다. 무의식적으로
시문은 이미 아까부터, 은평구청 앞 장밋빛 인생에서 다시 자리를 같이 했을 때
부터, 어쩌면 장충동 뒷골목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와 비슷한 상황이 닥치
리라는 가능성을 예상했었는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그럼 영감님도 수사관이란 말인가요?" 지금 내가 처한 위기가 무엇인지를 부
지런히 따지기 시작하면서 시문이 물었다.
"그래." 정신나간 지식인이 말했다. "나도 공작원이야." "낙타하고 같은 공장
에 다니시는 거예요?" 다른 '공장' 소속이라면 노인은 나를 도와줄 수가 있겠구
나, 그러면 +가 하나로구나 하고 빨리빨리 속으로 계산하며 시문이 물었다.
"그래." 노인이 말했다. "낙타하고 나하고는 같은 공장에 다니고, 같은 공작반
소속이야." 그렇다면 -가 둘이라고 계산하며 시문이 물었다. "그런데 왜 영감
님은 아까 영감님이 낙타하고 같은 편이 아니라 나하고 한 편이라고 거짓말을
하셨어요?" "그야 난 낙타보다는 차라리 자네하고 한편이니까 그렇지." 노인이
말했다.
+와 -와 가 머리속에서 맹렬한 속도로 핵반응을 일으키며 시문이 물었다.
"공장에 다니는 수사관이라면서 어떻게 나를 쫓는 수사관하고가 아니라 쫓기는
나하고 한편이라는 말인가요?" "사실이 그러니까 그렇지." 몽고에서 태어나지
않은 노인이 다시 장난기가 엿보이는 표정으로 돌아가며 말했다.
"어째서 나하고 영감님이 한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시문이 물었다.
"난 낙타가 싫거든." 노인이 말했다.
"왜 싫어요?" 머리속에서 ++++ 양전자를 원자핵 주변으로 끌어모으며 시문이
물었다.
"싫으면 싫은 거지 싫은 데도 이유가 있어야 하는 줄 알아? 자네 키에르케고
르가 한 말 알지? 내가 어떤 여자를 사랑하는데 왜 사랑하는지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면 그건 벌써 절대적인 사랑이 아니라고 했어. 계산이 가능한 사랑은 사
랑이 아냐. 사랑하면 그냥 사랑하는 것이지. 무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도 마
찬가지야. 내가 라면 냄새를 싫어하고, 염소를 싫어하고, 부엉이를 싫어하고,
낙타를 싫어하는 건 라면 냄새와 염소와 부엉이와 낙타가 싫기 때문이야." 시문
은 정신나간 지식인의 궤변이 다시 미로를 엮기 시작한다고 생각했으며, 이번
에는 길을 잃지 말아야 되겠다고 작정했다.
"영감님은 지금 진짜 낙타를 싫어한다는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신 건가요?"
머리 속 칠판에서 +와 -를 모두 지워버리면서 시문이 물었다.
"진짜가 아니면, 가짜 낙타도 있나?" 최교수가 한심하다는 듯 물었다.
"전 지금 낙타 얼굴의 수사관을 얘기하는 거예요." 시문이 말했다. "오늘 아
침부터 나를 쫓아 다니는 수사관 말예요." "알아." 노인이 말했다. "몽고에서 태
어나지 않은 왼손잡이라도 알 건 다 안다고 그랬쟎아." "그럼 낙타를 정말로
싫어한다는 말이죠?" 시문이 물었다.
"싫어하고 말고." 노인이 말했다. "아무리 키에르케고르가 왜 사랑하는지 이
유를 설명할 수가 없어야 진짜 사랑이라는 소리를 했고 미워하는 이유도 설명할
필요가 없기는 하지만, 난 낙타만큼은 정말로 미워할 만한 이유가 여러 가지
야." "그게 어떤 이유들인가요?" 시문이 물었다.
"낙타는 너무 느려." 머리를 저으며 ㅊ교수가 말했다. "못생겨도 너무 못생긴
데다가 흐느적거리는 걸음걸이 좀 보라구. 여물을 씹는 입놀림은 또 얼마나 느
린데." "전 지금 동물원의 낙타가 아니라 낙타 얼굴의 수사관을 왜 싫어하시는
지 그 이유를 물었던 거예요." 쳇바퀴 궤변적인 대화에 또다시 조금씩 짜증이 나
기 시작하면서 시문이 말했다.
"알아." 노인이 말했다. "하지만 동물원의 낙타가 싫으면 낙타얼굴의 인간도
싫은 거야. 낙타를 싫어하니까 낙타를 싫어한다는데, 자넨 그래도 내 말을 못
알아 듣겠나? 낙타가 싫으니까난 이근안을 싫어한다구." "이근안이라뇨?" 미로
로 점점 빠져 들어가면서 시문이 물었다.
"도피중인 고문기술자 이근안 경감 말인가요?"
"그래 전기 고문을 아주 잘 하는 사람이지." 노인이 말했다.
"이근안 경감 얘기는 왜 또 갑자기 꺼내는 거에요?"
"낙타가 이근안이거든." 노인이 말했다.
"동물원의 낙타 말인가요 아니면 낙타 얼굴의 수사관 말인가요?" "누가 동물
원에서 낙타한테 사람 이름을 붙여준대?" 최교수가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
그런 미친 놈들도 있나?" "영감님 얘기를 듣고 있으면 나도 자꾸 헷갈려서
그래요." 시문이 말했다.
"그럼 나를 잡으러 쫓아 다니는 수사관의 이름이 이근안이란 말예요?" "이름
이 이근안이 아니라 이근안이라구." 최교수가 바로잡아 주었다.
"이근안이 아니라 이근안이라뇨?" 머리 속이 갈팡질핑하면서 시문이 물었다.
"이름이 이근안이 아니라 진짜 이근안이라구."
"그럴 리가 있어요?" 노인이 장난을 치는 것이나 아닌지 곁눈질로 표정을 살
피며 시문이 말했다. "이름만 이근안이겠죠." 최교수가 장난을 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름이 이근안이라면 이근안인 거야." 그가 말했다. "자넨 자네 이름이 정시
문이니까 정시문이라고 자꾸 고집하지 않나?" "전 이름만 정시문이 아니라 진
짜로 정시문예요." 정시문이 말했다.
"이근안도 이름이 이근안이라면 이름만 이근안이 아니고 진짜로 이근안인 거
야. 이근안이면 이근안이지 저 이근안이 따로 있는 줄 아나?" "하지만 술집 웨
이터들이 이름만 나훈아나 조용필이나 태진아라고 해서 진짜 나훈아나 조용필
이나 태진아는 아니쟎아요." 시문이 궤변의 수렁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으려고 갈
팡질팡 저항을 벌이며 말했다. " 전 이근안 경감의 얼굴을 신문에서 자주 봤기
때문에 잘 알아요. 이근안은 얼굴이 둥글 넓적한데 낙타는 낙타처럼 기다랗
쟎아요. 그런데 어떻게 낙타가 이근안이라는 말인가요?" "그까짓 얼굴쯤은 성형
수술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쟎아." "아무리 젊은 여자들과 연예인들이 걸핏하면
성형수술로 얼굴을 뜯어 고쳐 기계로 찍어내 대량으로 생산한 로봇처럼 똑같이
생겨서 누가 누구인지 구별이 잘 안 되는 세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성형수술
로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죠.
코를 높이거나 쌍꺼풀로 만드는 정도라면 몰라도 어떻게 얼굴 골격까지 뜯어 고
쳐요?" "그건 자네가 공장의 실력을 모르니까 하는 소리야." 몽고에서 태어나지
않은 노인이 말했다. "컴퓨터와 제휴한 대한민국의 정보 기관의 위력은 스필버
그의 환상 공장을 훨씬 능가하니까." 시문은 주춤했다. 그가 상상하고 예상했던
바가, 상상하고 예상하기는 했었지만 사실은 아니기를 바랐던 사실이 사실로 드
러나는 것 같아서였다. 오늘 아침부터 갑자기 흐트러진 그의 삶처럼 마구 헝클
어진 현실의 갈피를 잡으려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잠깐 침묵하던
시문이 물었다.
"그럼 아저씨가 얘기하던 '공장'이 정보기관인가요?" "그런 정도는 벌써 자네
도 눈치채지 않았어?"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최교수가 말했다.
"그렇다면 낙타하고 아저씨는 안전기획부 요원인가요?" 마음놓고 호흡조차 하
기가 힘들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면서 시문이 다시 물었다.
"안전기획부는 아냐." 노인이 말했다. "자넨 적어도 안전기획부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쟎아." "그럼요?" 시문이 질문을 계속했다.
"공장은 멀쩡히 존재하면서도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기관이거든." "이
공원처럼 말인가요?" 시문이 말했다.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정시문의 존
재처럼요?" "더 이상의 비밀을 알려주는 건 반칙이니까 그만 물어." 최교수가
단호하게 말했다. "어쨌든 대단한 공장이라는 것만 알면돼." "그리고 그 공장엔
성형수술을 해주는 병원까지 차려놓았단 말이죠?" "병원을 따로 지어놓은 건
아니지만 성형국(成形局)이라는 곳이 있지." 노인이 말했다. "88국이라는 명칭이
붙은 성형국은 개개의 공작원이 맡은 임무와 필요에 따라 성형 작업을 하는 곳
이야." "아무리 우리나라 정보기관이 군사 공화국 시절에 멀쩡한 사람을 빨갱
이로 만들어내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던 조작의 공장이었다고는 하지만, 현대
과학이나 의학 기술로는 살아 있는 사람의 두 개골 성형까지 할 수야 없을 텐
데요." 아무래도 최교수가 나한테 장난을 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시문이 물었
다.
"그건 자네가 공장 견학을 가 보지 못했으니까 하는 소리야." 노인이 자신만
만하게 말했다. "함렛이 호레이쇼한테 한 말 그대로라구. 이 세상엔 자네가 상상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불가사의가 존재한다니까." "하지만 어떻게 서류상이
아니라 신체적인 나이도 고치고, 사람의 키까지 고무 인간처럼 잡아 늘이나요?"
시문은 아직도 최교수의 황당무계한 얘기가 설마 믿어지지를 않아서 혹시 농담
이 아닌가 노인의 눈치를 살폈다. "낙타는 이근안보다 열 살은 아래인 것 같고,
키도 10cm는 더 커보이던데, 어떻게 두 사람이 한 사람일 수가 있느냔 말예
요." "그런 것들이 왜 가능한지, 그리고 또 불가능한 모든 것이 어ㅉ서 가능해
지는지를 자넨 낙타한테 붙잡혀 공장으로 끌려가면 저절로 알게 돼." 최교수가
말했다. "나로서는 자네가 잡혀가는 걸 원하지 않기는 하지만 말야." "그런데
얼굴과 키와 모든 신체 구조를 뜯어 고치기까지 하면서 왜 사람들에게서 의구
심을 일으키는 이근안이라는 이름은 그대로 끌고 다니나요?" 모든 질문에 대해
서 아무런 해답도 얻지 못해서 답답한 마음으로 시문이 물었다. "이근안 경감이
라면 지명수배가 내려졌다는 걸 천하가 다 아는데, 정작 숨겨야 할 알맹이는 그
대로 두고 껍질만 바꿔 쓴 셈이잖아요." "그건 자네가 몰라서 하는 소리야." 최
교수가 말했다. "알맹이는 속에 숨겨져 있어서 남들의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존
재하지 않는 반면에 껍질은 버젓하게 존재하잖아. 얼굴과 키 따위는 세상에 존
재하는 모든 인간의 눈에 존재로서 보이지만 이름은 글자의 형태로 말고는 아
무것도 안 보인다구. 그래서 이름은 존재와 신분을 전혀 증명하지 못하는 수단
이지. 돌맹이가 돌맹이라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증명이 되어도 돌맹이라는 개념
은 존재하지 않는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이야. 자네도 이름을 가지고는 자네가
자네라는 사실을 아무한테도 증명할 수가 없잖아." "하기야 그렇기도 하군요."
머리 속이 푸석푸석해질 정도로 혼미해진 시문은 더 이상 버틸 신념이 모자라
서 마침내 수긍하고 말았다. "헌데 전기 고문 기술자로 지명수배를 받았으면 경
찰한테 체포되진 않게 부지런히 도망이나 다녀야 할 몸인테, 쫓기기는커녕 오
히려 나를 잡으러 저렇게 부지런히 ㅉ아다니고 있으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가요?" "이근안이 지명수배를 받아 도망을 다니리라는 건 군중의 착각
이야." 최교수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근안 잡으러 쫓아 다니는 사람이 없
는데 이근안이 뭣하러 도망을 다니겠느냐구. 자넨 어떤가? 만일 자네를 쫓아오
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그러니까 오늘 아침부터 이근안이 자넬 추적하기 시
작하지를 않았다면, 그래도 자넨 추적하지 않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쓸데없이
도망을 다닐 거야?" "그렇다면 이근안을 숨겨주고 모든 추적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공장은 경찰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치외법권 지대인가요?" "치외법권 지
대이기 때문이 아니라 잡으러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서 이근안이 도망을 안 다
니는 거라니까." 최교수가 말했다.
"도대체 뭐가 뭔지 갈수록 점점 더 모르겠어요." 시문이 머리를 설레설레 흔
들면서 사람들이 거꾸로 돌아 다니는 격투기장을 내려다보았다. "쫓겨야 할 사
람이 추적자가 되고, 아무 죄도 없는 멀쩡한 나는 도망을 다녀야 하니까 말예
요." "그것이 바로 승부의 핵심이라구." 노인이 검지손가락을 치켜 보이며 말했
다.
"뭐가 핵심이란 말인가요?"
"자네한테 죄가 있는지 없는지를 증명하는 것 말야." 정신나간 노인이 말했
다."아무 죄도 없는 나한테 무슨 죄가 있다고 내 죄를 증명한다는 말예요?" 이
제는 무엇인가 구체적인 정보가 최교수에게서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했다는 느
낌을 받아 바싹 신경을 곤두세우고 시문이 물었다. "아무 죄도 없는 나의 죄를
증명하는 것이 낙타와 공장에서 오늘 벌이려는 공장의 목표인가요?" "자네한테
아무 죄도 없다는 걸 자네가 어떻게 증명하겠나?" 노인이 물었다.
"죄가 없으면 그냥 죄가 없는 것이지, 존재하지 않는 죄를 어떻게 증명해요?"
시문이 따졌다. "존재의 증거는 존재하지만 무존재의 증거는 존재하지 않게 마
련이쟎아요." "것 봐." 최교수가 다시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존재하지
않는 죄를 존재하지 않는다고 증명할 길이 없다 그 얘기지? 그러니까 자네한테
죄가 없으면 자넨 자네한테 죄가 없다는 사실은 증명할 수가 없어. 존재하지
않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증명할 수가 없기 때문이야." "그럼 존재하지 않는
걸 존재한다고 증명할 수는 있나요?" 시문이 도적적인 공격을 취했다. "나한테
없는 죄를 존재한다고 공장 사람들이 증명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냐고요." "
그건 가능한 일이야." 노인이 말했다. "죄가 없는 어떤 인간에게 죄가 있다고
증명하는 건 물론 가능하지. 우리나라 군인 정치인들이 그런 설득과 증명의 능
력을 고도의 정치적인 기술이라고 믿었다는 역사적인 현실을 자넨 몰랐나?" "
죄없는 사람에게 고문과 조작을 동원해서 죄를 뒤집어 씌우고는 감옥에 잡아넣
는 기술 얘기로군요. 그건 아마 공장 사람들이 갖춘 특별한 기술이겠죠." "그래,
죄가 없는 사람을 잡아넣는 것은 분명히 고차원적인 기술이지. 죄를 지은 사
람을 잡아 넣기란 너무 쉬운 일이라서 재미가 없잖아? 그리고 죄를 지은 사람이
죄를 안 지었다고 증명 하기도 쉬워. 전과 기록을 보유한 사람들더러 국민의 대
표 노릇을 하라면서 정당이 버젓하게 출마를 시키는 나라이니까 말야.
온갖 못된 짓을 저지르는 군부 독재자를 국가 차원에서 위대한 지도자로 둔갑시
키기도 했고. 그래서 죄를 지은 사람이 유죄임을 증명하기도 쉽고, 유죄인 사람
이 무죄라고 인간 세탁을 하기도 쉽고, 무죄인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기도
쉽지만, 무죄인 사람이 무죄라고 증명하는 것만큼은 쉽질 않아. 그러니까 자네
가 존재한다면서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보다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짓
을 증명하기가 훨씬 쉽듯이, 자네가 스스로 자네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보다는
공장에서 자네가 유죄라는 가상의 사실을 증명하기가 훨씬 쉽게 마련이지." "그
럼 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참으로 난감한 마음이 되어 시문이 물었다.
"나의 존재도 증명하지 못하고, 내가 죄를 짓지 않았다는 사실도 증명하지 못하
면 난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공장 사람들이 결정을 내
렸는지조차 알지를 못하니까 나는 무슨 죄를 안 짓고도 지었는지를 모르겠는데,
죄를 짓지 않은 내가 짓지 않은 죄애 대한 벌을 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
나요?" "자넨 무슨 방법으로든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려는 시도를 아예 벌이지
말아야 해." 노인이 말했다. "그건 시간 낭비일 따름이니까." "그럼 난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요." 시문이 다시 물었다.
"시한을 넘길 때까지 낙타한테 붙잡히지를 말아야지." 노인이 말했다. "낙타
한테 붙잡혀 끌려가서 자네가 짓지 않은 죄를 지었다는 사실이 증명되어 처벌되
지 않도록 무작정 도망을 다니는 것 말고는 어떤 다른 선택도 없어." 시문은 잠
깐 혼란스러운 머리를 쉬기 위해서, 지금짜지 머리에 입력된 잡다한 정보를 일
단 처리하고 넘어가기 위해서, 입을 다물기로 했다.
정신나간 지식인도 갑자기 잠잠해진 나를 곁눈질로 힐끗 쳐다보고는 상대방에
게 유예 기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눈치채였는지 시간적인 여유를 주려고 역시
입을 다물었다.
대화는 중단되었지만, 최교수가 횡설수설 뽑아내던 정보는 즉석에서 쉽게 정
리될 만한 그런 내용이 아니었다. 노인의 설명은 무작정 양(量)으로만 압도하려
는 엄청난 인터넷 쓰레기 정보처럼 두서(頭緖)도 없고 논리도 없이 시문의 뇌세
포를 빨아들여 고갈시켰고, 뇌세포가 정보를 빨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정보가 뇌
세포를 빨아들여 말라죽을 때까지 마비시켜서, 정작 현실로부터는 시문의 뇌에
아무런 정보의 입력도 이루어지지를 않았고, 시문은 그나마 존재하는지도 확실
하지가 않은 자신의 존재에서 감각마저도 증발하여 사라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
다.
그렇게 시문의 존재는 무수한 회로의 선이 블량 접속으로 인해 내부로부터 파
삭파삭 타버려 물기가 하나도 남지 않았고, 시문은 저마다 따로따로 분리된 숫
자와 부호(符號)와 무의미한 어휘의 덩어리들을 소화가 덜 된 불량식품의 똥처
럼 뱃속에 가득담은 로봇이 되어 멍청하게 제7 체육 공원 만남의 광장 관중석에
앉아서 거꾸로 가는 격투기장의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몇 가지 기본적인 사실은 확실해졌다고 시문은 생각했다. 공장의 정체
는 그가 반쯤 건성으로 파악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위협의 잠재력을 지닌 모
양이었다. 그러니까 오늘 아침에 시작된 낙타의 추적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승
부일지도 모른다는 최교수의 암시도 장난삼아 해본 농담은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노인은 분명히 말했다. 도망치는 것 말고는 어떤 다른 선택도 나에게
주어지지 않으리라고. 나의 존재를 증명하기도 불가능하고 나의 결백을 증명하
기도 불가능할 테니까 무작장 도망쳐야 한다고.
나 정시문은 토끼의 신세였다. 지상의 맹수와 하늘의 맹금으로부터 쉴새없이
생명의 위협을 받아야 하는 토끼가 생각해낸 종족 보존의 방법은 토구(兎口)보
다 많은 숫자의 새끼를 낳는 것이었고, 그래서 부지런히 맹렬한 번식을 계속하
는 한편, 마음 놓고 풀을 뜯어먹고 소화시킬 여유도 없는 팔자인지라 우선 잔뜩
먹고 나서 굴로 들어가 오랫동안 새김질을 해서 소화액으로 덮인 풀덩이를 배설
하고, 그리고는 반쯤 소화해서 자신이 싸놓은 풀똥을 다시 먹는 것이었다.
오늘 시문이 살아가는 삶이란 반똥을 먹는 토끼의 정신없는 삶보다 조금도 나
을 바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머리 속에 쑤셔넣은 정보를 미처 소화할
겨를이 없이 어서 어디론가 반똥을 누러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어디로 어떻게 도망을 친다는 말인가?
어디로?
낚싯줄처럼 굵어도 눈에는 보이지 않는 속박의 거미줄에 엉켜, 뒤엉키고 겹엉
키고 헝클어진 운명의 가닥에 묶여 꼼짝도 할 수가 없어진 시문은 나를 추적하
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벗어나 도망칠 곳이 어디에도 없었고, 결국 나를 붙잡아
공장으로 끌어갈 때까지 끈질기게 쫓아올 낙타의 존재가 한없이 기다란 끈이 달
린 개목걸이처럼 여겨졌고, 낙타의 끈은 대한민국 모든 시민의 목에 걸린 주민
등록번호와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에서 노예에게 붙여 놓은 일련 번
호. 자연을 보호하는 연구를 하기 위해서라며 인간이 야생동물이나 철새의 목과
발목에 부착시켜 놓은 알루미눔 인식표 고리처럼, 노예의 소유권을 밝히기위해
손목이나 발복에 채웠던 고리를 본따서 결혼제도에 따라 남자의 노예가 되었음
을 증명하기 위해 여자의 손가락에 채워놓는 다이아몬드 반지처럼, 편리하기 위
해 가지고 다니다가 이제는 자의적인 실종을 막기 위한 감시의 도구로 사용되는
삐삐 호출기와 휴대용 전화기처럼, 행정상의 편의를 위해 만들었지만 이제는 거
대한 집단 사회에 소속된 한 마리 한 마리의 구성원을 추적하는 신원 조회와 모
든 뒷조사의 단서를 제공하는 꼬리표가 되어버린 주민등록번호처럼, 낙타 얼굴
의 수사관은 나에게서 떨어져 나갈 줄을 몰랐고, 그래서 시문은 자신의 세계가
자꾸만 좁아져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주민등록번호가 박힌 개목걸이를 차고,
수사관의 추적을 받으며, 시문은 이제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와 존재하지 않으면
서도 존재하는 공원으로 들어와 만남의 광장에 이르렀고, 대공 수사관의 미해와
군 첩보 기관의 감시를 국가 차원에서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했던 군사 공화국의
독재시대를 거치고 나서 대한국인은 번호로 컴퓨터에 입력되어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를 받고 추적을 당했으며, 이러다가 언젠가는 모든 인간이 멸종 위기를 맞
아 연구 대상에 오른 야생동물이나 철새처럼 목이나 손목이나 발목에다 나의 위
치를 알리는 발신기를 차고 다니도록 강요받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고 시문은
생각했다.
시문은 누가 혹시 몰래 발신기를 채워놓지나 않았는지 발목을 내려다보았고,
지상의 낙원이라고 알려진 나라 미국에서 어린아이가 유괴되는 경우에 소재를
파악하고 몇 분 안에 추적하여 범인을 체포하기 위해 발명해 놓은 소형 발신기
(micro transmitter)를 주민등록번호처럼 모든 시민이 차고 다녀야 하는 시대가
머지않아 닥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남북전쟁으로 노예제도를 폐지한 미국이
라는 지상의 낙원에서 새로 생겨난 노예제도를 생각했다. 이미 10년 전에 지상
의 낙원이라는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소재하는 레이크사이드 레미콘 회사에서는
모든 트럭에 부착된 무전기의 교신을 추적하여 옆길로 새거나 휴게소에 들어가
시간을 낭비하는 운전자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도로 현황판에 모든 회사 차량
의 이동을 나타내는 감시망을 만들었다는데,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도 아침
에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다시 집으로 돌아가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내가 발
목에 찬 송신기에서 삑삑거리며 보내는 신호음이 *** 깜박이는 빨간 전자 부호
로 바뀌어 인간 추적 중앙 통제소의 대형지도에서 한없이 느릿느릿 이동을 계속
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고, 그러면 내가 존재하는 공간은 * 이 나타났다가 ■으
로 사라지는 순간의 연속이 되겠고, 580325-1030733이라는 나의 번호가 * 하나
크기의 존재로 되면 나의 세계는 점점 줄어들고, 점점 줄어들고, 또 점점 줄어
들고, 또 줄어들어서, 그러다가 결국 나에게는 겨우 꼿꼿이 서서 제자리걸음을
할 만한 삶의 공간만이 용납되고, 그러다가 결국은 ·하나의 크기로 작아진 나
의 존재는 한낮에 가위가 눌리게 만드는 주민등록번호 ***의 악몽이었으며, 뜬
눈으로 한낮에 꿈꾸는 존재의 악몽이었으며, 시문은 까마득히 오래전 <<타
임>>지에 실렸던 일본 소니 회사의 트랜지스터 라디오 조립 공장 내부를 찍은
사진을 생각했다. 소니 공장에서는 직공들이 노예처럼 조립대 앞에 줄지어 앉
아서 일을 하다가 휴식 시간이 되어 구내 방송 시설을 통해 음악이 흘러나오면
일손을 멈추고 제자리에 앉아 단체로 맨손체조를 했고, 음악이 끝나면 다시 작
업을 계속 했는데, 그것은 기계를 만드는 기계 앞에 줄지어 앉아서 기계처럼
일하다가 기계처럼 동시에 작업을 멈추고 단체로 기계 같은 체조를 하고는 다
시 기계처럼 일하는 기계 같은 사람들의 단체 사진이었고, 시문은 지상의 낙
원이라고 알려진 미국에서 1980년대에 이미 보편화된 고용인 감시 체제를 생각
했다. 지상의 낙원이라는 메어릴랜드 주 실버 스프링에 소재하는 '거룩한 십자
가(聖十字, Holy Cross)'병원에서 약품 도둑을 적발하기 위해 의사와 간호사의
탈의실에까지 감시용 비밀 폐쇄회로 카메라를 설치했고, 유나이티드 항공사와
AT&T 전화회사와 샌디아고의 PSA 항공회사, 그리고 거의 모든 대회사에서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부릅뜬 채로 모든 고용인을 염탐하고 지켜보는 감시
체제를 갖추었는데, 그들의 숨겨진 눈은 시문을 추적하고 감시하는 비밀의 눈
만큼이나 집요해서, 유나이티드 항공사에서는 "예약계 직원들이 고객에게 얼마나
만족한 봉사를 제공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고용인들의 작업 실태를 감독한다
고 했지만, 지상의 낙원이라는 미국에서 근무하는 전화 교환수 가운데 1/3가량
이 근무 상태를 도청에 의해서 감시받으며, 고객과의 통화에서 교환수에게 실
수나 문제가 생기면 당장 '높은 사람'이 전화를 끊고 들어와 "뭐하는 거야?"라
며 야단을 쳤고, 그런가 하면 샌디아고 항공사에서는 '생산력을 증가시키기 위
해서' 하루 일곱 시간 근무중에 담배를 피우거나 화장실에 가서 생리대를 교환
하는 따위의 '개인적인 사무'를 보는 여유를 엄격히 12분 동안만 허락했으며, 항
공편 예약이나 취소나 변경을 하려는 고객 1명과의 통화 시간이 109초를 넘기
면 벌점 1을 주었고, 고객한테 불친절하게 대해서 항의를 받아도 물론 벌점을
받았지만, 한 통화를 끝내고 다음 통화까지의 공백시간이 11초를 넘길ㄸ마다 벌
점이 2점이나 되었고, 벌점 6이 모이면 경고가 한 번에, 경고가 6번에 으르러
6X6=36 벌점이면 해고를 당한다고 했으니, 언젠가는 벌점이 누적되어 36에 이르
러 모든 직원이 자연도태가 될 운명이었고, 아마도 36이 공포의 대상으로 떠
오르는 세상이 50년 후에 닥치리라고 경고하기 위해서였는지 챌리 찰플린은
(19)36년에 <모던 타임스>라는 영화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고 시문은 생각했
으며, 이미 군사 공화국 정권 시절에 합법적인 도청을 활용했던 대한민국에서
도 시민의 활동 상태를 추적하기 위한 전자 감시 체제(electronic surveillance
sustem)를 만들어 전자채찍으로 몰아댈 날이 눈앞에 닥쳤는지도 모르고, 나는
벌써 어떤 공장의 감시망에 포착되어 낙타 얼굴의 수사관한테 한없이 추적을
당하는 모양인테, 어디로 가야 해방이 기다리는지 알 길이 없기는 했어도 시문
은 뒤엉킨 낚싯줄에서 해방되도록 정신나간 지식인이 혹시 나를 구원해 줄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힐끗 곁눈질해 보았으며, 탈출이 불가능하다
는 알카트라즈 감옥을 1962년에 탈출한 죄수들이 샌프란시스코 만(灣)을 무사
히 헤엄쳐 건너 결국 탈오겡 성곡했는지, 그리고 탈출에 성공 했다면 지금쯤
어디에 숨어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지 궁금했고, 시문은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몽떼 크리스또 섬에서 탈출한 에드몽 당ㄸ스를 생각했고,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악마의 섬에서 탈출한 사람이 그렇게 많으니 어쩌면 내가 탈출에 성공할 가능성
을 최교수가 제공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1931년 코코넛 껍질을 넣은
자루로 ㄸ목을 만들어 타고 악마의 섬으로부터 아홉 번째 탈출에 성공하여 영
화의 주인공이 된 '빠삐용' 앙리 샤리에르(Henri Charriere)는 자유를 찾아서
좋았겠지만 샤리에르와 함께 탈출에 성공해서 기껏 영령 기아나에 도착한 다음
유사(流砂)에 빠져 허무하게 죽어버린 씰벵(Sylvain)의 종말은 참으로 불쌍하고
어처구니 없었으리라고 생각했고, 강에서나 타고 다니는 작은 배를 타고 1928
년 악마의 섬을 탈출하여 바다를 건너 브라질고 도망친 디유도네(Dieudonne)와,
목걸이를 훔친 죄 악마의 섬에 수감되었다가 1936년 배를 한 척 구해 바다를
건너 콜롬비아로 도망친 그네 벨베놔(Rene Bellbenoit)와, 찢어진 옷과 나뭇가
지를 엮어서 만든 뗏목을 타고 루이 르가르드(Louis Regarde)와 함께 악마의 섬
을 탈출한 열두 명 가운데 한없이 표류하는 동안 일곱 명이 상어에게 잡아 먹히
기는 했어도 나머니 다섯 명은 베네수엘라에 도착하여 탈출에 성공했다는데,
상상속에서 아직도 악마의 섬을 벗어나지 못한 시문은 1년 동안이나 문둥이와
같은 쇠사슬로 묶여 지낸 제라르댕(Gerardin)의 끔찍했던 나날을 상상했고, 그
래서 견디다 못해 제라르댕은 한쪽 귀와 손가락들을 잘라버리고는 문둥병에 걸
린 것처럼 속여 ㅆ 루이 문둥이섬에 격리 수용되었다가 다른 나환자들의 도움
을 받아 브라질로 탈출하여 상우파울로에서 치과의사 노릇을 하며 살았지만, 나
중에 알고 보니 진짜로 문둥병에 전염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문신으로 박힌 죄수 번호 때문에 악마의 섬에서 도망친 탈출범이라고
밝혀졌고, 문둥이 탈출범을 악마의 섬까지 실어다 주겠다는 배가 나서지를 않아
제라르댕은 결국 방역국에서 마련한 1인용 감옥에 갇혀 과일을 재배하고 닭과
돼지 키우며 답답한 일생을 보냈고, 시문은 탈출을 전문으로 하는 마법사
(escape artist) 해리 후디니가 결국 물탱크에서 빠져 나오지 못해 무대 위에서
목숨을 잃어야 했던 답답한 운명을 생각했고, 샤를로 뺑(Charlot Pain)의 답답
한 운명도 생각했는데, 1907년 5천원 짜리 군용 천막에 불을 질렀다고 해서 6
년의 중노동형을 받아 악마의 섬으로 끌려가 뺑은 1913년, 1917년, 1926년, 1931
년 네 차례나 탈출을 시도했다가 붙잡히는 바람에 형기가 자꾸만 늘어났고, 그
래서 1925년 그가 저지른 것과 비슷한 경범죄(輕犯罪)를 군에서 모두 폐지해썽
도 석방되지를 못하고 결국 32년 동안이나 복역을 했다니, 결국 죄는 없어져도
형기는 남아 평생을 보낸 뺑의 생애와 존재하면서도 사라져 존재하지 않는 시문
의 존재를 공통되 공식으로 풀기 위해서는 어떤 로제타(Rosetta) 비석이 필요할
지 알 길이 없었고, 막다른 골목 끝에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공원에서 만
남의 광장에서 낯선 거꾸로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탈출을 한답시고 나는
어쩌면 제 발로 함정을 찾아 들어왔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시문은 1천만
명이 눈에 띄지 않는 존재로서 살아가는 대도시 서울에는 숨을 만한 곳듕 한
없이 많을 텐데 나 하나쯤 '공장'의 음모로 부터 탈출할 방법이 왜 없는지 시문
은 도처히 알 길이 없었다.
나에게는, 내 몸의 어디엔가는, 나만이 알지 못하는 어느 부분엔가 눈에 보이
지 않는 발신기를 내가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 채워놓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나
는 쉴새없이 * * * * * * 신호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보내는 중이고, 공장의
중앙 추적 통제소 벽에 걸린 전자 지도에서는 아마도 나의 현재 위치가 6단위
디지털 좌표와 함께 빨간 불빛으로 계산되어 * * * * * * 반짝일텐데, 아무리
도망쳐도 소용이 없는 것을 도대체 어디로 어떻게 도망을 친다는 말인가? 내가
조금 아까 최교수로부터 받아 먹은 정보를 모두 소화하고 도망칠 길을 찾아내기
위해 새김질을 할 만한 토끼굴은 어디에 있을까? 시문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를 따라 토끼굴을 찾아서 땅 속으로 들어가면 내 몸에 부착된 발신기의 전파가
흙을 뚫고 밖으로 나오지를 못할 테니까 중앙 통제소가 깜박이는 빨간 불빛으
로는 나를 추적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지만, 캄캄한 땅 밑으로 구멍을 파고 돌
아다니며 평생을 살아가는 두더지의 생애가 너무나 답답하게 느껴졌고, 바닷물
이 들어온 다음에야 반경 1m안에 서만 취이 활동을 하고 돌아다니다가 썰물
이 되면 자신이 발라 놓은 점액의 흔적을 따라 다시 제자리로 >튼【 바위
에 달라 붙어 꼼짝도 않고 살아가는 삿갓조개의 한평생보다는 두더지의 세계과
훨씬 넓었지만, 그래도 그는 앞을 볼 필요가 없어서 눈까지 퇴화된 두더지가 되
어 땅 속에 파묻혀 숨어서 해방을 기다리고 싶은 마음이 털끝만큼도 내키지를
않았다.
시문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신나간 노인에게서도 아무 소리가 나지 않고,
그래서 소리없이 꼼짝 않고 둘이서 나란히 않아 있으려니까 어디에선가 아주 가
까운 곳에서, 송장이 썩는 냄새가 났다. 시문은 최교수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고
개를 돌리지 않고, 킁킁거리는 소리도 내지 않고, 눈알만 조금씩 좌우로 굴려
좌우를 살피면서, 송장이 썩는 냄새가 어디서 나는지를 살펴 보았다.
시체는 눈에 띄지 않았다.
다시 시문이 찬찬히 맡아보니 송장 냄새는 나 자신에게서 나는 것이었다.
나는 이미 시체였다.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를 않으니 죽은 시체나 마찬가지
였고, 그래서인지 내 몸에서는 벌써부터 시체의 썩은 냄새가 풍겼다. 여태까지
는 낙타에게 정신없이 쫓기느라고 시문이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모양이지만 아
침부터 영문도 모르는 채 쫓기느라고 흘린 땀에 온몽이 절어 ㅆ은 걸레처럼 썩
는 냄새가 났고, 그는 머리카락에서도 썩은 걸레처럼 썩은 악취가 풍긴다고 생
각했으며, 미사일은 열(熱)을 추적하고 육식 동물은 냄새를 추적하는데, 나는
전자 부호뿐 아니라 이제는 냄새로도 추적을 당하겠구나 하고 시문은 생각했
다.
내가 죽어서 벌써 시체의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으니까 낙타뿐 아니라 죽음으
로부터 바싹 추적을 당하리라고 그는 생각했으며, 죽음이 나의 자취를 어느만치
쫓아왔는지, 낙타가 어디에 잠복 해서 기다리는지 불안한 시문은 무엇부터 생각
하고 무슨 결정부터 내려야 할지 막막했고, 이리 얽히고 저리 설키고 나선형이
뭉개져 뒤엉키고 뒤죽박죽 미로처럼 갈팡질팡 갈피가 엉망인 현실에서 너무나
복잡하게 칭칭 감겨드는 난해한 정보를 하나도 풀지 못해 답답해진 시문은 차라
리 거대한 우주 진공 청소기를 가져다가, 블랙홀의 시커먼 구멍을 진공 청소기
처럼 하늘에서 들이대고 지구의 모든 현상을 빨아들여 없애버린 다음 낙타도 없
고 공장의 추적 통제소도 없고 정신나간 지식인도 없고 빨간 그랜저도 없고 남
궁진이라는 그림자 인간도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놓고 그곳 새로
운 세상에서 해방을 찾고 싶었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구원이었다.
결국 그는 몽고에서 태어나지 않은 노인의 충고를 받아들여 어디론가 도망을
치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지만, 그러나 어디로, 좁고 좁은 세상 어디로
도망을 친다는 말인가? 땅속 토끼글로 들어갈 수도 없고, 특급 열차 붉은 화살
이 붉은 광장을 향해서 달리는 붉은 별(Red Star)의 나라 러시아로 도망을 친다
고 해도 냉전(冷戰)이 녹아버린 지금은 이데올로기 철의 장벽까지 사라져 어떤
벽도 나를 막아주지 못하니, 어디론가 아무도 ㅉ아오지 못할 우주 공간으로 도
망을 쳐야 할 것만 같았다. 시문은 낙타와 공장의 추적을 피해 자신의 머리 속
으로 들어가 상상의 비행체를 타고 치구로부터 탈출했고, 새까만 우주 공간을
날아가면서 그는 찾아갈 만한 곳이 '붉은 별(Red Planet)' 화성밖에 없다고 생
각했는데,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관념적 존재이기는 해도 나의 존재는 생면
체이니 살아야 하고, 현재까지 우주에서 생명이 존재할 수 있다고 알려진 곳이
화성뿐이기 때문이었다. 1996년 8월 7일 NASA에서 발표한 "인류역사상 최대
의 뉴스"의 내용을 들어보면 소행성(小行星)과의 충돌이나 어떤 다른 비슷한
우주적인 사건으로 인해서 '붉은 별'의 표면으로 부터 떨어져 수백만 년 동안
태양계를 떠돌던 무수한 파편 가운데 하나가 1만 3천 년 전 지구의 남극에 떨어
졌고, 1984년에 발견된 문제의 운석을 스탠포드 대학교 잔슨 연구소에서 절개한
다음 전자현미경으로 100,000X 확대해서 살펴보니 35억년 전 지구에 존재했던
것과 비슷한 생명체가 30억 년 전 화성에도 존재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탄화수
소(hydrocarbon)의 흔적을 발견했다니, 그렇다면 인류의 조상이 탄화수소라는
뜻이겠지만, H.G.웰스의 <<우주전쟁(The War of the Worlds)>>이 발표된
이후 아이색 아시모프의 SF에 이르기까지 초록 피뷰의 문어대가리 화성인이라
면 언젠가는 지구를 침공할 흉측한 괴물로만 묘사되었던 탓으로 1938년 CBS 방
송극에서 오슨 웰스가 뉴저지에 화성인이 나타났다는 내용을 너무나 실감나게
묘사하여 지상의 낙원이라던 나라 미국 전체가 전율에 사로잡혀 대소동을 벌이
기도 했었는데, 결국 화성인의 정체가 탄화수소의 흔적이라니, 뉴저지에 화성인
이 출몰한 이후 50년이 흐르는 사이에 과학이 발달하면서 딱부리 눈알에 이마
에는 더듬이가 달리고 손가락마다 흡반이 붙은 그런 화성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 밝혀졌어도 인간은 아직도 악착같이 지구를 다른 별나라의 외계인을 상상해
내며 온갖 해과한 영화를 만들어 놓고 일부러 무서워하기를 즐기고, 이데올로
기 집단들 또한 다른 국가와 민족을 걸핏하면 외계인처럼 묘사해 왔는데, 그
토록 무섭기만 하던 '화성인'의 존재가 관형(管形)단세포 박테리아에 지나지 않
았으리라고 밝혀졌고, 오래전 바이킹 탐사선이 채취했던 정보의 내용처럼 화성
에는 어쩌면 바위속에서만 살아가는 박테리아가 존재할지도 모르고, 박테리아
밖에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라면 시문은 왕노릇을 해도 되겠지만, 화성에 간다
고 하더라도 도대체 무얼 먹고 어떻게 살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길이 없
었고, 결국 시문은 머리 속에서 비행체의 기수를 돌려 지구로 돌아왔다.
화성으로부터 지구를 쳐들어오는 박테리아 군대의 공포를 생각하면 격투기장
에서 거꾸로 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던 시문은 원형 관중석의 반대편엣 아까부터
만남의 광장 사진을 찍어대던 사냥복 차림의 남자가 자꾸만 눈에 거슬렸다. 사
진기자인지 아니면 사진작가인지 정체는 모르겠지만, 턱수염이 허연 60대의 키
다리 남자가 묵직한 가방을 메고 계단식 관중석을 오르락내리락거리면서 거꾸로
가는 격투기장의 사람들을 열심히 촬영했는데, 검정 안경을 써서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어도 체격이 낙타얼굴의 수사관과 무척 비슷한 건너편 남자는 우연히 그
러는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지는 모르겠어도 가끔 카메라의 렌즈를 올려
나를 향하는 기분이 들었고, 그래서 시문을 저 남자가 몰래 내 사진을 찍는 것
이나 아닌지 의심이 갔고, 내가 누구인지를 나만이 모르는 상황에서 나는 카메
라의 감시까지 받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쨌든 모든 추적자들로부
터 벗어나려면 지금으로서는 정신나간 지식인만이 나의 구원자가 아니겠는냐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시문을 내친김에 몽고에서 태어나지 않은 노인의 정체를 계속 밝혀보
기로 작정했다.
"아까 아침에 장충동에서 처음 만났을 때 영감님은 대학교수로 일한 적이 있
다고 그러신 것 같은데요." 시문이 청문회식으로 물었다. "사실인가요?" "10년
이 넘어." 최교수가 말했다. "대학교수 노릇한 것 말야." "그런데 공장엔 왜 들
어가셨어요? 아무래도 공작원이나 첩보원보다야 대학교수라면 훨씬 떳떳하고
존경도 받는 직업이 아닌가요?" "교수로 일하다가 공장에 들어간 게 아냐."최교
수가 말했다.
"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24살에 공작원으로 발탁되었고, 초급 훈련을 받은
다음 병역을 치르는 대신 미국으로 유학을 갔지. 영문학 박사 학위를 딴 다음
귀국하여 위장 교수로 대학에 침투 시키겠다는 공자의 계획에 따라서 말야." "
대학에 침투시켜서 뭘 하라고요?"시문이 물었다.
"대학생들이 먼 훗날 골칫거리 정치 세력으로 대두하게 되는 경우에 대비히서
그들의 활동을 감시하는 프락치 노릇을 하는 것이 내가 맡은 임무였어." "잠깐
만요." 시문이 말했다. "영감님이 대학을 졸업하신 건 한국전쟁 무렵이었으니까,
4.19 훨씬 전이어서 학원에서는 반정부 운동도 별로 없었고 운동권이라는 개념
도 생겨나기 전이었을텐데, 공장에서는 그때 벌써 학원 사찰을 위한 프락치를
양성할 계획까지 수립했었다는 뜻인가요?" "공장의 역사와 활동은 비밀 사항
이어서 더 이상 자세한 얘기는 못하겠어." 최교수가 말했다. "하지만 어쨌든 공
장에서는 모든 분야의 작전에 임할 땐 그정도로 긴 안목을 가지고 모든 준비를
완벽히 마친 다음에야 공작을 개시한다는 사실만큼은 밝혀두겠어." "그래 영감
님은 대학교수로 위장해 학원으로 침투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벌이셨나
요?" 시문이 물었다.
"난 공화국 정권의 체제 유지를 위협할 만한 정치 학생들을 비밀리에 적발하
여 당국에 알려주는 임무를 맡았지." 최교수가 말했다. "그냥 내버려뒀다가는
졸업후 정계에 투신하여 야권에 가담해서 체제를 붕괴시키겠다고 정면으로 도전
해올 만한 모든 학생의 계보를 파악하고 추적해서 경쟁 정치 세력을 싹부터 아
예 말살시키자는 정책에 따라서 말야." "그렇다면 교수님이 가르치던 학생들을
감시하고 당국에 밀고 했다는 뜻이쟎아요." 시문이 말했다. "그러면서 전혀 양
심의 가책 같은 거 안 느끼셨어요?" "내가 만든 명단에 오른 학생들이 무슨 일
을 당할까 생각하면 좀 미안하기는 하더구만. 한창 자라는 아이들의 신세를 망
쳐 놓는 것 같아서 말야." 최교수가 킬킬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내가 양심의
가책을 안 느껴도 되는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 냈어." "그게 어떤 방법인데
요?"'기발'하다는 표현에 대해서 불길한 예감을 느껴 다시 정신적인 경계의 날
을 세우며 시문이 물었다.
"내가 감시하고 성분 분석을 하도록 할당받은 학생들의 이름을 하나씩 쪽지에
적어 차곡차곡 접어서 어항에 넣고는 잘 흔든 다음에 제비뽑기를 했지." 몽고에
서 태어나지 않은 노인이 킬킬 웃으며 말했다. "내가 할당받은 고발 인원만큼
쪽지를 꺼내 거기 적힌 이름으로 명단을 만들어 제출한 거야." "제비뽑길을 해
요?" 시문이 놀라서 물었다. "앞날이 창창한 아이들의 운명을 어항에 담을 쪽지
로 아무렇게나 결정했다는 말인가요?" "희랍 로마 시대에 이미 실시되던 10인
처형을 흉내낸 거야." 정신나간 지식인이 다시 히죽 웃으면서 설명했다. "10인
처형이 뭔지는 알겠지? 영어로 decimation이라는 건데, 겁을 주거나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제비르 뽑아 10명 가운데 1명을 죽이던 처형이었어." "그럼 아무
죄가 없는 아이들이 잡혀가기도 했을 거 아녜요."시문이 놀라서 물었다. "제비
를 뽑아서 명단을 만들었다면 말예요." "1950년대 말이나 1960년대 초에는 뭐
잡아다가 혼을 내줘야할 만큼 심각한 죄를 지은 아이들이 없었으니까 명단에
오른 학생을 따지고 보면 거의 모두가 억울한 경우였어." 최교수가 말했다. "장
면 부통령이 야당 소속이어서 눈에 박힌 가시처럼 여긴 공화국 정권의 졸개들
이 민주당 전당대회장으로 들어가는 그를 저격하고, 대통령 입후보를 했던 야
당 당수 조봉암을 적색분자로 몰아 고속재판을 거쳐 처형하던 시절이었으니까
죄없는 학생 몇 명 끌어다 두들겨 패고 감옥에 처넣는 것쯤이야 야과였지. 그
러니 이왕 죄없는 아이들을 잡아가야 한다면 제비뽑기가 오히려 공평한 방법이
었는지도 몰라. 그리고 70년대를 거쳐 무법시대의 절정기인 80년대에 이르러서
도 내가 고발해야 하는 할당 인원의 머릿수를 채우려면 제비를 뽑지 않고 아무
리 객관적으로 심사를 하더라도 죄없는 아이들이 한둘은 명단에 오를 수 밖에
없었어. 목적은 딴 데 있으면서도 엉뚱한 죄목을 씌워 학생이나 야당 정치인
과 반정부 인사들을 잡아들여야 했으니까 말야." "그렇다고 해서 무책임하게
제비를 뽑아도 되는 건가요?"시문이 따졌다.
"바로 그거야."다시 히죽 웃으며 최교수가 말했다. "제비뽑기는 무책임하다는
거. 그래, 책임이 없는 거지. 나한테는 책임이 없는 거야. 나는 무책임이니까." "
내 얘긴 책임이 없다는게 아니라 책임감이 없다는 뜻이었어요." "책임이 없으니
까 당여히 책임감도 없지." 정신나간 지식인의 궤변이 계속되었다. "내가 관찰
하고 평가한 자료를 가지고 판단해서 나 자신의 결정에 따라 골라낸 아이들의
명단에 대해서는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무작위로 만
든 명단에 대해서는 난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않아도 되거든." "무슨 논리가 그
래요?" 시문이 따졌다. "애들 장난도 아니고, 제비뽑기로 죄없는 학생들을 정치
범으로 만들어 놓고는 미안하지도 않다뇨." "제비뽑기에는 내 의지가 전혀 반영
되지 않았으니까 그렇지." 최교수가 말했다. "국가 차원에서 정책으로 삼아 공
식적인 기준에 따라서 경찰이 체포하여 삼청교육대로 보낸 사람들은 그럼 나한
테 제비뽑기를 당한 학생들보다 뭐가 나았어? 죄없이 삼청교육을 받은 사람들
의 입장을 생각해 보라구." "삼청교육이야 군부를 등에 업은 독재자의 소행이니
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영감님은 대학교수라는 지식인 아 晏었나욋 어떻게 대
학교수이면서도 영감님은 폭압을 일삼는 무법정권처럼 행동하셨나요?" "그래도
나한테는 전혀 악의가 없었어." 최교수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의식적으로 희
생자를 선발하여 명단을 만들었다면 나의 개인적인 악의가 개입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우발적으로 제비에 뽑힌 대상자들의 불운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을 질
수가 없는 거 아냐? 제비에 뽑힌 학생을 재수가 나빴던 것이지 나의 악의에 희
생된 건 아니니까." "그래도 어쨌든 제비뽑기라는 행위가 영감님의 의사에 따
라 이루어진 거쟎아요." 시문이 따졌다. "그러니까 영감님은 자의에 따라서 결
정한 행위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셔야죠." "배정된 숫자의 인원을 처벌 대상으로
선발해야 하는 것은 내의무였으니까 어떤 방법으로 뽑느냐 하는 건 문제가 되
질 않아." 최교수가 설명했다. "의무는 책임을 면제해 주기 때문이지."목적이 항
상 수단을 정당화하지는 않잖아요."시문이 따졌다. "모든 수단은 적어도 그 수단
을 행하는 사람의 목적에 의해서만큼은 정당화되는 거야." 최교수가 반박했다. "
내가 먹고 살아야 하는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소를 죽이면서 인간이 소
에게 죄의식을 느낄 필요가 있겠어? 죄의식 때문에 소를 살려주고 인간이 굶어
죽는 게 과연 자연법을 따르는 거냐구." "영감님이 가르치던 학생들은 소가
아니었어요." 시문이 따졌다. "소였다면 잡아가지도 않았어." 노인이 반박했다.
"우리 공화국을 다스려온 군부 독재자들은 가끔 인간과 소의 차이를 잘 모르
는 것처럼 행동한 경우가 많았어요." 시문이 따졌다. "광주에서 벌어진 학살만
해도 그렇잖아요." "광주는 정권 장악이라는 목적이 이루어지면 수단의 정당
성을 따지려고 덤빌 적이 통째로 사라지리라는 집단적인 착각 때문에 발생한 사
건이었어."노인이 반박했다.
"동족의 학살처럼 심각한 사건을 어떻게 착각이라는 개념으로 간단히 설명하
려고 그러세요?"시문이 따졌다.
"살인이라는 행위 자체가 착각을 일으키는 개념이니까 그렇지." 노인이 반박
했다. "생명을 죽이는 건 물로 나쁜 일이고 살인은 범죄 행위이니까 우린 사람
을 죽여선 안 되겠지. 하지만 군대는 살인을 위해서 조직된 집단이고, 적을 많
이 죽인 살인자는 영웅이 된다구. 그래서 어떤 군인들은 12.12 때처럼 상관의
명령이라면 다른 상관을 죽이고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받지 낳아. 명령을 받으
면 그 명령이 옳고 그른지를 따질 권리도 없이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것이 군인
의 본분이요 의무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광주에서 총을 쏜 사람들은 폭도를
진압하라는 상관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그들이 동원한 수단과 방법 때문에 발
생한 희생자에 대해서 전혀 개인적인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지." "
어항에서 뽑아낸 제비에 대해서 영감님이 전혀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것
처럼 말인가요?" 시문이 따졌다.
"난 제비를 뽑아내는 행위뿐이 아니라 선발 행위 자체에 대해서도 책임감을
느낄 이유가 없다니까." 노인이 반박했다.
"그럼 영감님 말씀대로 선발의 방법이 문제가 아니었다면 왜 제비뽑기를 했어
요?"시문이 따졌다. "아무리 실수가 생기고 오차가 날 가능성이 있더라도 객관적
으로 판단하여 그나마 조금이라도 벌을 받아야 마땅한 아이들을 골라서 명단을
만들지 않고 말예요." "그야 제비뽑기는 무책임한 것이니까 나한테는 책임이 없
어지고, 책임이 없어지니까 당연히 책임감도 없어지고,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
도 덩달아 없어지고, 그리고 또 제비뽑기에는 내 의지가 전혀 반영되지 않았으
니까 나한테는 전혀 악의가 없는 셈이고, 그래서 우발적으로 제비에 뽑힌 대상
자의 불운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어." 시문은 이
런 쳇바퀴 대화는 아무리 오래 계속하더라도 별다른 소득이 없으리라는 절망감
을 느꼈지만, 그래도 무책임하게 포기 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다시 따졌다.
"어항에서 제비뽑기로 골라낸 학생들의 명단을 영감님한테서 받으면 공장에서
는 그들을 어떠헥 처리했나요?" 격투기장 건너편에서 열심히 사진을 찍어대는
남자의 거동을 유심히 살피면서 시문이 물었다.
"위협이 될 만큼 커지기 전에 도태시켰지." 정신나간 지식인이 설명했다.
"1950년대만 해도 아직 순진한 시대여서 문제 학생을 제거하기는 간단했더. 학
점을 나쁘게 줘서 성적불량으로 낙제나 퇴학을 시키기도 했고, 학교 기물 파괴
나 스승에대한 폭력이나 여학생 추행 따위 사건을 조작해서 불이익을 주고 다른
학생들로부터 격리시키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러다가 나중에는 용공 조작도 했
겠죠?" 시문이 따졌다.
"물론이지." 노인이 설명했다. "용공 조작이라는 새로운 전략이 처음 등장한
것은 4.19를 거치고 대학이 차츰 본격적인 정치 세력으로 커지기 시작하던 무렵
이었어." "그렇다면 영감님이 일하는 공장이라는 곳은 사이비 빨갱이를 생산하
는 공장이었나 보군요." 시문이 물었다. "빨갱이만 생산한 게 아냐." 노인이 킬킬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 공장 해외 공작부에서 흰둥이와 깜둥이도 잘 만들어내.""헌테 애초에
하고 많은 직업 가운데 하필이면 이런 일을 영감님이 선택하게 된 동기는 무엇
이었나요?"시문이 물었다. "무고한 사람을 정치범으로 몰로 남들을 괴롭히는 직
업이 그렇게 대단하고 좋아 보이던가요? 없는 사실을 조작해 가면서까지 말예
요." "사람들은 조작조작하면서 뭐 대단한 죄라도 되는 것처럼 그러는데, 조작
이라는 게 뭐가 나쁘다고 그래?" 정신나간 지식인이 정말로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지극히 결백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조작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 제 2
의 현실을 창조하는 훌륭한 기술이라구. 어떤 재미없는 현실을 내가 원하는 대
로 바꾸거나 아예 내 마음에 드는 새로운 현실을 창조한다는 건 예술 행위야.
소설이나 연극도 조작이기는 마찬가지잖아? 진짜 현실을 능가할 정도로 완벽
한 가짜 현실을 만들어내는 조작처럼 신나는 일을 이 세상에 없어." "그래도 조
작은 거짓이잖아요." 시문이 따졌다. "인간 사회라면 논리와 질서에 바탕을 둔
진실을 추구해야죠." "질서니 논리니 진실이니 하는 그런게 도대채 뭔가?" 검지
손가락을 자동차 유리창 닦개처럼 좌우로 두어 번 흔들어 보이며 최교수가 반박
했다. "그리고 자넨 세상이 과연 얼마나 논리적이라고 생각하나?" 시문은 얼른
대답이 준비되지를 않았다.
"우리나라 예 장수들은 종이로 갑옷을 만들어 입었어." 최교수가 말했다. "종
이는 잘 찢어지지만 여러 겹일 때는 화살이 뚫지를 못하기 때문이야 . 그건 참
으로 비논리적인 얘기지만 진실이라구. 세상의 모든 개념은 장수의 종이 갑옷처
럼 이중 구조를 지녔어. 세상의 모든 개념이 종이의 본질처럼 상반되 모순을 함
께 지녔단 말야. 저기 저 나무를 봐." 최교수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
다. "나무를 하느님이 창조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무는 나무가
창조한다고 믿는 사람도 많아. 그것도 이중의 개념이지. 한 사람의 승리는 다른
사람의 패배라는 것도 이중의 진리이고 이렇듯 모든 개념은 보는 각도에 따라
장님이 만지는 코끼리처럼 달라져." 시문은 몽고에서 태어나지 않은 노인이 늘
어놓는 횡설수설을 들으며 다시 위기 의식을 느끼고 불안해졌다. 논리와 진실
을 부정하는 사람이라면 정신이상자나 마찬가지여서 언제 어떤 행동을 저지를
지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따. 시문은 논리적인 동기가 전혀 없는 행동만
계속하는 정신나간 지식인의 말이라면 아무것도 섣불리 믿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자 노인이 낙타와 사이가 나쁘다는 말도 이제는 믿어지지
가 않았고, 별다른 뚜렷한 이유도 없이 최교수가 지금은 공장에서 같이 일하는
낙타가 아니라 낙타에게 추적을 당하는 나를 그와 한편이라고 주장했지만, 어
느 순간부터 갑자기, 지금 당장이라도, 그는 별다른 뚜렷한 이유도 없이 낙타의
편으로 다시 돌아서서 나를 공격할지 모르겠고, 지식인에게서 도움을 받으려고
했다니 나도 정신이 나간 모양이라고 시문은 생각했으며, 그리고 시문은 거꾸로
가는 사람들을 격투기장 건너편에서 부지런히 사진기로 찍어대는 남자도 정체가
무엇인지, 혹시 최교수와 아는 사이인지, 혹시 최교수와 한편이어서 지금 무엇인
가 공작을 꾸미는 중인지, 아니면 혹시 낙타와 한패인지 자꾸만 신경에 거슬렸
다.
"그리고 저 사람들을 봐." 격투기장에서 거꾸로 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최교
수가 말했다. "종로 바닥에서 누가 저러고 지나가면 미친 놈이라고 모두들 신기
해서 구경을 했겠지? 하지만 이곳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공원 만남의 광
장에서는 뒷걸음질도 정상적이고 멀쩡한 이동 방법이야. 그러니까 이른바 조작
된 현실의 각도에서 보면 실재하는 현실을 존재하지 않아." "그렇다고 해서 조
작이 자랑스럽고 떳떳한 미덕 행위는 아니잖아요." 시문이 따졌다.
"어째서 미덕이 아냐?" 최교수가 반박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알맞는 이상
적인 현실을 원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려고 노력하잖아. 자네 <욕
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라는 영화에서 블랜치 뒤보아가 뭐라고 그랬는지 아
나? '난 진짜를 원하는 게 아ㅖ요. 난 마술을 원해요.' 라고 했어. 추하고 골치아
픈 현실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현실을 조작해낸 다음 스스로 조작한 현실 속에서
살겠다는 뜻이야. 그리고 국가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공작 정치라면 낡은 정치
현실을 새로운 현실로 개조하는 지름길이고, 인류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라구.
그렇기 때문에 난 인류의 발전을 위해서 수사관이 된 것야." "대단히 실례되는
말씀입니다만, 이렇게 같이 얘기를 나누다 보면 영감님이 제정신인지 판단하
기 어려워질 때가 가끔 생겨요." 시문이 물었다. "혹시 공장에서는 누가 영감님
더러 정신 감정을 받아보자고 그러지 않던가요?" "내가 미쳤나 해서 말이지?"
뜻밖에도 전혀 불쾌한 내색을 하지 않으며 최교수가 말했다.
시문은 그렇다는 뜻으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미쳤다는 개념도 역시 다른 모두 개념이나 마찬가지로 모순된 양면성을 지닌
거라구." 소리를 내지 않고 쿡쿡 웃으며 정신 나간 지식인이 말했다. "미친 사
람이 보기에는 안 미친 사람이 모두 미친 거니까. 옛날엔 종교 탄압이라면 종교
를 믿지 못하게 막는 걸 의미했지만 요즈음엔 믿는 자들이 안 믿는 자들을 범죄
자처럼 취급하고 괴롭히는 게 새로운 형태의 종교 탄압이야. 누가 미쳤느냐 하
는 것도 그렇게 주객이 전도되었는지도 몰라. 세상만사가 이중 구조를 지녔으니
까. 어항 속에 갇힌 금붕어가 바깥 세상을 구경거리로 삼는 것과 같은 이치라
구." "영감님은 세상만사가 모순된 이중 구조를 지녔다고 그러셨는데요, 그것은
영감님하고 낙타의 관계에도 적용되나요?" 시문이 물었다.
"낙타하고 내 관계라니?" 최교수가 물었다. "우리 관계가 어때서?" "영감님이
낙타를 싫어한다는 걸 낙타가 아나요?" 시문이 물었다.
"물론 알지."
"그렇다면 낙타도 영감님을 싫어하나요 아니면 영감님이 자기를 싫어하니까
역설적으로 영감님을 좋아하기라도 하나요?" "낙타는 날 싫어해." 미움을 받는
다는 사실이 흐뭇해서 미소를 지으며 정신나간 지식인이 말했다.
"그렇다면 낙타는 무슨 이유가 따로 있어서 영감님을 싫어하나요 아니면 아무
이유도 없이 싫어하나요?" "나를 싫어하는 확실한 이유가 있지." 아직도 흐뭇
해 하면서 최교수가 말했다.
"무슨 확실한 이유인데요?" 시문이 물었다.
"그 친구가 하는 일에 내가 훼방을 놓았거든." 미친 사람처럼 싱글벙글 웃으
며 최교수가 말했다.
"무슨 일에 훼방을 놓았는데요?" 시문이 물었다.
"아까 이곳 체육 공원으로 들어오기 전에, 골목이 끝나는 곳에 여관이 하나
있었지?" "진입로를 막아버려 제 7 공원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놓은 낙원여관
말이죠?" "그래." 짓궂은 미소를 눈가에 지으며 최교수가 말했다. "올림픽이
시작되기 전에 진입로를 만들도록 그 여관을 철거시키는 것이 공장에서 낙타에
게 떨어진 임무였는데, 그걸 내가 방해했어." "그래요?" 뜻밖이라는 듯 놀란
어조로 시문이 물었다. "하지만 아까는 여관 주인이 앞 공화국 대통령의 사돈의
팔촌의 당숙의 뭐에 뭐가 되는 관계여서 뒷공화국 관리들이 함부로 철거를 못
했다고 그랬잖아요?" "헌테 낙타가 그런 장애를 제거하는 공작을 벌여 앞공화
국 대통령과 여관주인의 인척 관계를 말살해 버렸거든." "어떻게요?"
"어떻겐, 그거야 간단한 일이었지. 앞공화국 대통령의 호적을 말소 시켜 버리
면 여관 주인의 인척 관계도 저절로 말소되잖아?" "하지만 전직 대통령의 호적
을 말소시킨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요?" "공장에선 가능하지." "그래서 호적
이 말소되었나요?"
"그럼. 호적이 말소되었고, 여관 철거가 다시 추진될 위기가 닥쳐왔어. 하지만
내가 역습을 개시했지." "어떻게요?"
"낙타가 동원한 것과 똑같은 전략을 구사했어. 흉내 바둑을 두듯이 말야." 몽
고에서 태어나지 않은 왼손잡이 정신나간 지식인이 천식 환자처럼 한참 키득키
득거리고 나서 말을 이었다.
"전직 대통령의 호적이 말소된 다음 철거를 위해 낙타가 낙원여관을 구입하러
나서기 직전에 내가 구청이니 등기소니 돌아다니면서 낙원여관 건물의 등기를
모조리 말소시켜 버렸걱든. 그러니까 낙타는 기록상으로 존재하지 않는 여관 건
물을 사들일 수가 없었고, 매입이 불가능하니까 철거를 못한 거야." "등기를 말
소시켜 버렸다면 낙타가 손을 써서 다시 복원시킬수가 없었나요? 공장의 막강
한 영향력을 동원하면 그까짓 등기소나 구청의 기록쯤이야 얼마든지 주무르고
조작할 수 있었을텐데요." "낙타가 등기를 복원시키려고 돌아다니며 관공서를
쑤셔대면 내가 몰래 뒤쫓아다니며 방해 공작을 계속했어." 최교수가 신이나서
설명했다."한번 기록이 말소되어 사라진 건물을 낙타가 되살려 존재하도록 복원
시키기보다는 존재하니 않는 건물을 내가 계속 존재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게 훨
씬 수월했던 건 당연한일 아니겠어?" "사라져버린 내 존재를 되찾기가 쉽지
않을 걸 보니 그렇기도 하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시문이 말했다. "하지만 기
록이 말소되어 사라진 건물이라면 존재하지도 않는 셈인데, 그럼 낙타는 왜 불
도저를 몇대 끌고 와서 그냥 밀어버리지를 않았을까요? 불도저 밀어 없애버리
더라도 이왕 존재하지 않았던 건물이 존재하지 않게 된 셈이니 뒤탈도 없었을
텐데 말예요." "밀어버리다니?" 최교수가 말했다. "존재하지도 않는 건물을 어
떻게 밀어버리고 철거를 시킨단 말야?" "밀어버릴 건물은 존재하잖아요."
"서류상으로 존재하지 않는 건물이 어떻게 건물로 존재하나? 자네가 호적상으
로 존재한다고 해서 지금 자네 생물학적으로 존재하는 건 아니잖아?" "우리 그
런 형이상학적 희롱은 그만하죠. 어쨌든 낙원여관을 철거하지 못하도록 영감님
이 훼방을 놓았다는 사실을 낙타가 알기는 아나요?" 시문이 물었다.
"알고 말고." 최교수가 다시 킬킬 웃으면서 말했다. "낙타가 체육공원을 무용
지물로 만들었다는 이유로 7개월 감봉 처분을 받은 다음에 약을 올리고 싶어서
내가 일부러 얘기를 해줬거든." "낙원여관 때문에 감봉까지 당했다면 그럼 낙타
는 이곳 제 7체육공원에 대해서 훤히 잘 알겠군요." 마음을 도사리며 시문이 물
었다.
"알고 말고." 최교수가 말했다. "체육 공원 때문에 공장에서의 승진길도 막혀
버렸는데." "그리고 영감님이나 마찬가지로 낙타는 만리안경점의 최원석과 나
의 관계도 알겠죠." "알고 말고."
"그렇다면 낙타는 내가 원석이를 만나러 오리라는 사실도 알았겠고, 그러니까
나를 잡기 위해 이곳으로 올지도 모르잖아요." 건너편에서 사진을 찍는 남자를
노려보면서 시문이 물었다.
"여긴 절대로 안 와." 최교수가 말했다.
"그걸 영감님이 어떻게 알아요." 아직도 건녀편 남자를 노려 보면서 시문이
물었다.
"마지막 잠복에 들어갔으니까." 최교수가 설명했다.
"마지막 잠복요?"
"그래 낙타는 이리저리 자넬 쫓아다니다가는 자칫 길이 어긋나면 어디에서도
자네를 잡지 못하니라는 가능성을 생각해서 틀림없이 오늘 안으로 자네가 틀림
없이 한 번은 나타날 만한 장소에 슴어서 끝까지 버티기로 했거든. 그러면 어차
피 자네와 한 번은 조우를 할 테니까." "그렇다면 낙타가 잡복한 곳이 어딘지
모르겠지만 난 시한을 넘길 때까니 그곳 한 군데만 피하면 되겠군요." 시문이
물었다.
"맞아."
"그게 어딘지는 가르쳐 주지 않으시겠죠? 지금 낙타가 잠복해서 나를 기다리
는 장소요." "비밀을 가르쳐 주는 건 반칙이니까." 최교수가 말했다.
시문이 잠시 생각해 보더니 가운뎃손가락을 튕겨 딱 소리를 냈다.
"알았어요." 시문이 말했다.
"뭘?"
"낙타가 잠복한 곳요."
"낙타가 어디 잠복했는데?"
"우리집 근처요." 시문이 말했다. "그렇죠? 언젠가는 내가 결국 집으로 돌아
갈 테니까 낙타는 일산 우리집 근처에 잠복해서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렇
죠?" "그건 비밀이어서 말 못해." 최교수가 말했다.
"아니면 혜미의 집일까요?" 몽고에서 태어나지 않는 노인의 표정에 무의식적
으로 나타나는 반응에서 단서를 잡으려고 열심히 살피면서 물었다. "혜미가 누
구인지는 아시죠?" "내가 왜 지금 같이 사는 마누라하고 결혼햇는지 아나?"
대답을 하기가 거북해서인지 아니며 싫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반칙이어서인지
는 몰라도 최교수가 느닷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모르겠는데요." 정보를 얻으려다가 오히려 앞으로 내가 어디로 가려고 하는
지를 공장 사람들에게 알려주기만 한 것이나 아닌지 은근히 걱정이 되기 시작하
면서 시문이 말했다.
"내 마누라는 발이 커." 히죽 웃으며 정신나간 지식인이 말했다.
"발이 크면 뭐가 좋은데요?" 시문이 건성으로 물었다.
"누가 좋다고 했어?" 최교수가 말했다. "발이 크댔지." "그냥 발이 크기 때문
에 사모님하고 결혼을 하셨다는 얘긴가요?" "그래." "내가 공원에 숨어서 나가
지 않으면 되겠군요." 엉뚱한 화제로 말머리를 돌리려는 노인에게서 결정적인 정
보를 캐내기 직전이라고 느끼면서, 열쇠에 손이 닿으려고 한다는 예감에 흥분한
시문은 다시 아까 하던 얘기로 돌아가려고 시도했다. "그럼 어딘가 다른 곳에서
잠복하고 한없이 기다리는 낙타를 난 시한을 넘길 때까지 만나지 않게 될 것
아녜요?" "자넨 여기서 밤을 보낼 수는 없어. 야간에는 이곳이 군 작전 지역이
되기 때문에 잘못 얼씬거리다가는 군인들한테 잡혀 곧장 낙타한테 끌겨라 군사
시설에 잠입한 죄 때문에 간첩으로 처형 될테니까."최교수가 말했고, 그는 다시
화제를 바꾸려고 했다.
"자넨 지금의 아내하고 왜 결혼했지?"
시문은 내가 왜 지금의 아내와 결혼했는지 얼른 생각이 나지를 않았다.
그리고 그는 학교에 간 아내가 지금쯤은 집으로 돌아와 있을지가 갑자기 궁금
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