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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음력 7월 11일)~1949년 6월 26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1927년부터 1933년까지, 1940년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제6대, 8대, 10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과 주석을 지냈다. 아호는 창암(昌巖)이고, 호는 백범(白凡)이다.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다.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7세(1912년)에 거북 구(龜)였던 이름을 아홉 구(九)로 바꾸었다. 2007년 11월 5일, 2009년 상반기 중 발행될 10만원권의 도안 인물로 선정되었다.
김구는 1876년 8월 29일(음력 7월 11일)에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김순영, 곽낙원 부부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초명은 김창암(金昌巖)이었다. 유년기에 천연두를 앓았다. 이때 그의 모친이 예사 부스럼을 다스리듯이 죽침으로 고름을 짜 얼굴에 얽은 자국이 생겼다고 한다. 5세 때 그의 집안은 강령으로로 이사하였다가 그가 7세때 해주 본향으로 되돌아왔다. 아버지 숟가락을 부러뜨려 엿을 사 먹는 등 개구쟁이 행동으로 부모님의 꾸중을 들었다.[1][2] 가난한 집안이었지만 김구는 9세 때부터 한글과 한문을 배웠으므로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서당에서 한학을 배워 통감과 사략 등을 이해할 수 있었으며[3] 통감, 사략, 병서, 대학, 당시(唐詩) 등을 두루 습득하였다. 1888년 4월 할아버지 김만묵(金萬默)이 사망했다. 이무렵 김구의 아버지 김순영은 뇌졸중에 걸려 전신불수가 되었다. 그의 부모는 문전걸식하면서 아버지의 병치료를 위한 고명한 의원을 찾아 떠돌아다녔는데 이때 큰어머니 댁·장연 재종조 누이 댁 등을 전전하였다.[1] 아버지의 병은 차도를 보여 좀 불편하기는 해도 혼자서 걸을 수 있을 만큼 서서히 좋아졌고, 부모가 돌아오면서 그의 학업은 계속되어 17세에는 임진년 경과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였다. 과거시험시 매관매직의 타락상을 보고 분노한 그는 서당 공부를 그만두고 3개월간 집안에서 두문불출하고 관상 공부를 하였는데, 당시 자신이 타고난 복은 없지만, 스스로 인생을 개척할 수는 있다는 신념을 가졌다고 한다.[4] 병서를 탐독하며 집안 아이들을 모아 1년간 훈장도 하였다.
1893년 1월초, 그는 포동의 동학교도 오응선(吳膺善)을 찾아가 동학에 입도하였다. 동학에 입도한 후 이름을 김창암(昌巖)에서 김창수(昌洙)로 개명하였고 입도 수개월 후 그의 휘하 연비(신도)가 수천 명이 되어 '아기 접주'라는 별명을 얻었다. [1] 그 이듬해에는 조직이 급속하게 커져감에 따라 18세의 나이로 수백명의 수하를 거느리는 팔봉 접주로 임명되었다. 1894년 가을 해월 최시형을 찾아가는 대표자로 선발되어 연비 명단 보고차 보은에 가서 접주 첩지를 받아왔다. 같은해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동학군을 지휘했다. 지도자 최시형의 지시를 받고 황해도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습격하였으나 끝내는 관군에게 패퇴하였다. 이후 조직내 세력싸움에서 같은 동학군인 이동엽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그해 12월 홍역을 치르는 와중에 이동엽일파의 기습공격으로 패하고, 몽금포로 피신하여 3개월간 잠적해 있었다.[1] 동학군 장수로 있을때 안태훈으로부터 귀순을 권유하는 편지를 받기도 했다. 이후 그는 1895년(19세), 동학군을 토벌하기 위해 의려소(義旅所)를 세워 경성의 김홍집 내각에 참여한 김종한의 원조와 황해 감사의 지도 아래 군대를 조직해 1894년 12월 접주 원용일의 부대 2,000여 명을 대파한 적이 있을 정도로 동학 토벌에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던 지역 유력자 안태훈에게 몸을 의탁한다. 안태훈이 김구의 인품을 사랑하여 동학이 패멸당하게 되면 인재가 아깝다고 생각하여 비밀리에 밀사를 보내 불가침협정과 공동원조계획을 세웠다가, 동학이 패퇴하자 안태훈에게 의탁하게 된 것이다.[5] 1895년 2월부터 안태훈의 배려로 안태훈의 신천군 청계동 산채에 몸을 의탁하였다. 이곳에서 유학자 고능선(高能善)을 만나 감화받았다. 김구는 그 뒤에도 고능선 선생의 가르침을 추억하기도 하였다. 20세에는 김형진을 만나 백두산까지 기행하였으며 압록강 근방에서 만난 청나라 사람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에 가입하여 그와함께 청나라군의 원조를 받아 강계성의 관군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역시 실패하고 몸을 숨겼다. 이후 귀향하였는데 그의 스승인 고능선의 장손녀와 약혼을 결정하였으나, 김치경의 훼방으로 파혼하고 말았다. 1896년 2월 22일 안태훈은 해주군의 집사로추정되는 인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순검들이 산포를 모아 청계동을 습격하려던 김창수(김구)를 추적했으나 김창수는 도망하고 말았으니 자신도 김창수의 발자취를 사방으로 추적하고 있다' 고 보고하였다. 오영섭은 안태훈 자신이 청계동에서 김구를 일시적으로 보호했던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 논란이 일어나가 신천군수의 징계를 피하기 위한 보신적 조치로 보았다.[6]
21세였던 1896년 2월 청나라로 향했다가 단발정지령 시행과 삼남 의병 봉기 소식을 듣고 안주에서 귀환하던 중 김구는 황해도 치하포구의 한 여관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여관방에는 한복을 입고 성이 정씨이고 장연에 산다는 사람도 있었다. 김구는 그 사람이 장연 출신이면서 경성말을 하고 흰 두루마기 밑에 칼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굳이 일본인이 조선인으로 위장한 것은 평범한 상인이나 기술자가 아니라 을미사변의 공범이라 도피 중이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김구는 아침 식사 시간에 밥값을 치르던 그를 습격하여 칼을 빼앗아 살해했다. 김구는 살인 이유로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자신의 거처를 적은 포고문을 길거리 벽에 붙이고 집으로 돌아가 체포되기를 기다렸다.[7] 한편 자서전인 《백범일지》에는 쓰치다가 일본군 중위라고 쓰여 있으나 일본 외무성 자료엔 쓰치다는 대마도 이즈하라 출신의 상인라고 기록되어 있다.[8]
석달후 자택에서 체포된 김구는 해주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이감되어 인천으로 압송되었다. 이어 11월 법부에서 김창수의 교수형 건의로 강도살인죄로 사형선고를 받으나, 고종은 판결을 보류하였다. 당시 국민들의 반일감정과 명성황후에 대한 원수를 갚아야한다는 "국모보수"(國母報讐)의 민심[9]을 의식한 조선 법부는 고종 황제가 전화로 인천감옥장에게 내린 형집행 보류지시를 근거로 사형 집행 예정일 하루전날 형 집행을 보류시켰다. 감옥 속에서 간수가 준 <대학>, <세계역사>, <태서신사> , <세계지리>를 읽고 개화사상과 신학문에도 눈을 뜨게 되었으며, 감옥안의 재소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1897년 강화 사람 김주경(金周卿)이 그의 구명운동을 벌이지만 실패하였는데, 가산을 탕진한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으로 잠복하였다.[10]
1898년 3월 동료죄수들과 탈옥에 성공한다. 그가 탈옥하자 그 대신 부모가 붙잡혀 투옥되었다. 탈옥 후 삼남지방에서 도피하던 중 그해 가을께에 공주 마곡사의 승려가 되고 법명을 원종(圓宗)이라 하였다. 이듬해인 1899년 봄 금강산으로 공부하러 간다며 마곡사를 떠났다. 4월 부모와 상봉하여 방랑중 5월 평양 영천암에 방장이 되어 방장으로 장발승려 생활을 하다가 환속한다. 그해 가을 해주 본향으로 돌아왔다. 그의 작은아버지 김준영은 농사일을 권유하였다.[10]
1900년 지인을 찾아 내려갔던 강화도에서 3개월간 훈장일을 한 것을 계기로, 고향인 황해도 각지에 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 및 계몽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02년 1월 할머니뻘 되는 일가의 소개로 그의 친정조카뻘인 최여옥(如玉)을 만나 맞선을 보고 약혼하였다. 이때 만난 우종서의 권유로 그는 탈상 후 자신의 일지에서 '예수의 도'로 묘사한 기독교를 믿기로 결심하였다. 1903년 1월 약혼녀 여옥이 병사하였다. 2월에는 부친 탈상 후 감리교에 입교하였으며, 평양 예수교 주최 사범강습소에서 최광옥(崔光玉)을 만났다. 그의 권유로 안신호(安信浩, 안창호의 누이)와 약혼했으나 곧 파혼하였다.[10] 1905년에는 을사조약 무효투쟁을 벌이는 등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에는 국권회복운동의 국내 최대 조직이었던 신민회에 가입하여 황해도 총감으로 활동하다가 1909년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를 맡았고, 1904년 29세 때 최준례(崔遵禮)와 혼인하였다.[3] 그는 최준례를 곧 경성 경신여학교에 입학시켰다.
1910년 경성의 양기탁의 집에서 신민회 회의가 열릴때 신민회 대표자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그해 12월 안정근을 만났다가 1911년 안악사건, 105인 사건 등으로 연루, 체포되어 이에 종신형 선고 받고 수감되었다. 1912년에는 이름을 김창수에서 김구로 재개명하고 호를 백범이라 정하였다. "구(龜)를 구(九)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호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호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라고 《백범일지》에서 술회했다.[11] 1915년 8월 가출옥하였다. 가출옥 직전 둘째딸 화경이 죽었다. 가출옥후 그는 아내가 교원으로 있는 안신학교(安新學校)로 갔다. 1917년 2월 동산평 농장 농감(農監)이 되어 소작인들을 계몽하고 학교를 세우는 등 농민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12]
1918년 상하이에서 여운형을 당수로 하여 조직된 신한청년당에 간여하였다.[13]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1운동 직후 김구는 경의선 열차편을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 이어 안동(지금의 단둥)에서 이륭양행(怡隆洋行) 소속의 선박을 타고 1919년 4월 중순경 상하이에 도착하였다.[11] 이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 정보 및 감찰, 경찰 업무를 담당하는 경무국장(警務局長) 직을 맡고 이후 내무총장을 맡았다. 1920년 공산 혁명에 참가하자는 제안이 들어오자 제3국 공산당의 지시를 받는다는 것을 들어 거절하였다.[14][15] 이후 임시정부가 임시정부를 새로 창조하자는 창조파와 구조만 수정하자는 개조파의 논쟁장으로 변하자 김구는 내무부령 제1호를 내려 국민대표회의를 해산시킨다.[16] 이때 레닌에게 지원받은 독립운동 자금을 임시정부에 제출하지 않은 고려공산당원 김립 등을 살해하였다.[16] 그러나 자금을 횡령했다는 주장은 공산당을 적대시하던 정적들의 모함이라는 견해도 있다.[17] 1923년 6월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자격으로 국민대표회의 해산령을 내렸다. 12월 상해 교민단에서 의경대를 설치할때, 고문에 추대됐다. 1924년 1월 아내 최준례가 상해 홍구 폐병원에서 사망하여 불란서 조계의 숭산로 공동묘지에 장사하였다.[18]
1924년 6월 내무총장으로 노동국총판을 겸임하였다. 1925년 이승만이 사임한 후, 박은식, 이상룡 등 잇단 사퇴와 사망 등으로 임시정부는 내각 구성에 실패하였다. 1926년 말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으로부터 국무령에 취임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그는 자신이 '김존위의 아들'이라는 미천한 출신 배경을 이유로 사양했다.[11] 그러나 임시정부는 1927년 김구를 국무령에 선출하였다. 국무령이 된 김구는 국무령제를 폐지하고 국무위원제로 제도를 고치고 주석을 맞았다. 1928년 이시영(李始榮), 이동녕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 총재가 되었다.
1931년 임시정부 내에 일본요인암살을 목적으로 하는 한인애국단을 만들어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의 일왕 암살 미수 및 윤봉길의 훙커우공원 폭탄투척을 지휘하였다. 1933년 5월 박찬익을 통해 장개석과 면담하였다. 면담에서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인훈련반 설치에 합의하여 한국인 92명을 입교시켜 훈련에 들어갔다. 이듬해 2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洛陽分校)에도 한인특별반을 설치하게 하였다. 4월, 가흥에서 어머니와 아들 김인, 김신을 만났다. 1934년 12월 난징에서 중앙군관학교 소속 한인 학생을 중심으로 한국특무대독립군(韓國特務隊獨立軍)을 조직했다.[19]
1935년 5월 임시정부 해소론이 나오자 임정 해소의 부당성을 지적한 임시의정원 제공 경고문을 발표했다. 10월 가흥 남호의 선상에서 열린 임정의정원 의원의 비상회의에서 국무위원으로 보선되었다. 11월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엄항섭, 안공근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옹호하기 위하여 임시정부의 여당격인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다.[19] 1937년 안공근을 상하이에 파견하여 안중근의 유족을 모셔오게 했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20] 1938년 남목청에서 지청천 등과 함께 민족주의 진영 3당의 통합 문제로 논의하던중 조선혁명당 당원 이운한의 총격을 받았다. 현익철은 즉사하고 김구는 병원으로 실려갔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병원에 가료후 퇴원하였으나 이후 가슴에 남아있는 총알로 인해 거동의 불편을 느끼게 되었다.
1940년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하였고, 그해에 중국 국민당 정부에 자금지원을 요청하여 임시정부 최초의 정식군대인 대한민국 광복군을 조직하고, 광복 직전에는 미군 특수사령부(OSS)와 합동 훈련으로 조선에 잠수함으로 광복군을 침투시킬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1941년 6월 임시정부 주석의 자격으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는 서신을 발송했다. 그해 10월 임시정부의 승인에 관련된 문제로 중국 외교총장과 회동하였다. 그해 11월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제정 공표하는 한편 12월 일본에 선전포고를 발표하였다.[20] 1943년 7월 장개석 총통과 회담하여 전후 한국독립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8월 주석직 사임을 발표하였다가 9월 주석에 복직하였다.[20] 1944년 4월 임시정부에서 제5차 개헌을 단행하여 주석의 권한을 강화하자 김구는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출되어 취임하였다. 9월 그는 장개석을 만나서 면담하고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였다. 1942년 10월에는 김원봉 등 좌파들이 임시의정원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중국내 독립운동은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들과 민족주의계 독립운동가, 무정부주의자 등으로 분열된 이념 및 파벌 대립으로 인해 내부적 갈등이 많았다.
1945년 4월 광복군의 OSS 훈련을 승인하였고, 미육군 중국전구 사령관 웨드마이어 중장을 방문하였다. 8월 섬서성에서 광복 소식을 접하였고 11월 상하이를 거쳐 임시정부 환국 제1진으로 귀국하였다. 같은해 초, 장남 김인이 중국에서 병사하였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자 김구는 1945년 9월 3일 임정 국무회의 명의로 발표된 ‘당면정책 14개조’를 발표하였다. 당면과제에 의하면 ‘임정 입국→각계각층 대표자회의 소집→과도정부 수립→전국적 보통선거 실시→정식정부 수립’등 임시정부에서 정규 정부수립 방안을 제시하였다.[11] 11월에 개인자격으로 임시정부 1진으로 귀국하여 죽첨정(경교장)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1945년 12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영회 참석하였다. 12월말 신탁통치가 발표되자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반대하여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관하고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조직했다.[20]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하고 의장에 선출되었다. 이어 남조선국민대표민주의원 총리에 선임되었다. 2월 14일부터 17일 김구는 비상국민회의를 개최하여 민족통일총본부, 비상국민회의, 독립촉성국민회 등을 통합하여 '국민의회'를 결성하였다.[21] 원래 김구는 이승만이 빠른 시일내에 미국으로부터 정부수립에 대한 확약을 받지 못한다면 자신의 계획을 실천에 옮길 것을 전제하에 이승만의 도미에 찬성하였다. 그러나 김구와 임정 계열 일부 인사들이 이승만의 생각과는 달리 3.1절을 전후하여 정부수립을 추진하려던 계획이 알려지고 말았다. 신문에서는 아이들 장난으로 조소하였고 이승만, 한국민주당 등은 국제정세를 모르는 미숙한 자살행위라고 비판했다.[21] 3월 5일과 3월 6일 미군정에 의해 이시영, 조완구, 유림, 조소앙 등과 함께 주한미군 사령관실로 불려가 잡아넣겠다는 협박을 받고 굴복, 계획은 불발로 끝나게 됐다.[21]그해 4월 한독당·국민당·신한민족당이 한독당으로 통합되자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됐다.[22] 1946년 6월 이승만이 단독정부론을 말할때 김구는 탈장증으로 용산 성모병원에 입원중이었다. 김구의 제자인 강익하가 찾아와 3백만원의 수표를 정치자금으로 건넸으나 국사에 쓰일 돈이라면 이박사(이승만)에게 드려서 쓰게 하라며 돈이 필요하면 이박사에게 얻어쓸 것이라며 사양하였다.[23] 6월 11일 독립촉성중앙회 국민회가 정동교회에서 개최될때 참석하여 이승만의 연설에 대하여 답사를 발표하였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가 설치되자 부총재에 선출됐다.[24] 1947년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947년 6월 19일 미소공위 참석 문제를 놓고 여러 단체간 이견이 존재하자 한민당은 '참여하여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공위 협의에 참가할 것을 주장하면서 6월 19일 74개 정당 사회단체로 구성된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를 구성했다. 한국독립당에서도 미소 공위의 참석에 찬성하는 혁신파와 민주파는 한독당을 이탈하여 신한민족당과 민주한독당을 결성하였다. 이로 인해 이승만과 김구만 고립되었고, 한민당의 변화에 분노한 이승만과 김구는 공위 협의 청원서 제출 마감일인 1947년 6월 23일 여러 곳에서 반탁 시위가 벌어지게끔 주도하였다.[25][26] 서울 시위를 주도한 전국학련의 반탁시위대는 소련측 공위 대표단에게 돌을 던지는 등의 맹활약을 하였으며[25] 김구는 6.23 반탁데모에 장군 남이가 지은 '남아 이십세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한다면/후에 누가 대장부라 이르리'라는 시를 선사하여 격려하였다.[27][28] 그러나 6.23 반탁시위는 대규모 군중을 동원하는 데는 실패했다.
1947년 11월 24일 남한 단독선거는 국토 양분의 비극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11월 30일 이화장의 이승만을 방문하여 한시간을 회동, 자신과 이승만의 근본의사의 차이를 보지 못하였다고 발표하였다.[29] 성명서 발표후 서북청년회 창립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훈화를 하였다.[29][30][31] 1947년 12월 장덕수가 피살되자 그 배후로 지목되었다. 12월 4일 미군정 경찰은 박광옥과 배희범을 체포하였다. 용의자 6명은 장덕수를 암살할 목적으로 1947년 8월 창단된 대한혁명단을 조직하였는데 이들은 임정을 절대지지하는 대한학생총연맹의 간부 또는 맹원들이기도 했다. 대한학생총연맹은 47년 6월 운현궁에서 발족되었는데 김구를 총재, 조소앙과 엄항섭을 명예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32]
군정청 경찰은 김구가 이끄는 국민회의 간부 10여명을 연행하는 등 김구를 배후로 지목하였다. 우파정당 통합에서 한민당은 빠졌는데 그 중 한국독립당과의 통합을 가장 반대하던 사람이 장덕수였다. 이 점이 김구를 배후로 지목하는 시각에 무게를 더해주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한민당의 김성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을 찬성하였으나 장덕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은 당을 임정 요인들에게 헌납하는 것이라며 주장하였다. 미소공위 참여에 대해서도 공위참가에 반대하던 김구와 찬성하던 장덕수사이에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32][33] 용의자들은 재판에서 장덕수가 정권을 잡기 위해서 신탁을 시인하는 미소공위에 참가할것과 해방전 공산당은 민족주의자들로 조직되었는데 장덕수는 그때 공산당의 이론가였다는 것, 일본헌병대의 촉탁인 국민총연맹의 고문으로 학생들을 격려하여 학병을 장려하는 등 친일적 행동을 한 것이 암살 동기라고 주장하였다.[34][35][36]
김구는 자신이 법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고 이승만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이승만이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국민회의를 방관하면서 한민당과 연대하며 독자적으로 '한국민족대표단'을 구성하자 김구는 크게 분노하였다. 1947년 12월 22일 김구는 단독정부 절대반대와 '한국민족대표단'의 해산을 주장하였다. 이승만과 김구의 연대에 비판적이던 한민당은 이 사건을 정치적인 호재로 이용하고자 하였다.[37] 김구의 항의로 한국민족대표자회와의 합동작업이 재개되었지만 한민당의 강한 반대에 부딛쳐 무산되었다. 장덕수가 암살되었을 때 이승만은 김구를 배후로 지목했고 그후 김구는 검찰에 연행되어 수모를 당한 후로 이승만과의 결별을 결심했다.[37]
1948년 1월 UN 한국위원단에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발송하였다. 1월 28일 유엔위원단에게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남북지도자회의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보냈다. 2월 10일 통일정부 수립을 절규하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소함>이란 제목으로 남한 단독정부의 수립반대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어 김규식과 공동으로 남북협상을 제안하는 서신을 북한에 보냈다. 3월 김규식, 김창숙,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홍명희 등과 함께 7인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남한총선거 불참을 표명하였다.[38] 1948년 3월 김구가 장덕수 암살사건의 배후 혐의로 미군정의 재판을 받게 되자, 건국실천원양성소 소원 50여 명은 혈서를 써서 군정청에 항의하였다.[39] 1948년 4월 김구는 김규식 등과 함께 북행을 결정하고 4월 19일 북행길에 올랐다. 이어 남북 연석회의에 참여하고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38] 1948년 4월 30일 평양의 김두봉의 집에서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과 함께 열린 '4김 회동'에 참석하였 다. 이 자리에서 김구와 김규식은 이승만의 단선·단정 반대를 주장하면서도 김일성 등에게도 북한의 단독정부 건설을 중단해 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남측만의 단독선거를 주장하는 이승만에 반대하면서 북측의 공산주의에도 비판적인 입장을 보여 김일성의 단독정부 수립에도 역시 반대하였다. 1948년 5월 다시 돌아왔다. 김구의 노선변경과 함께 그를 지지하던 세력이 떨어져 나갔고 조선일보도 김구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나 김구와의 결별이 괴로웠던지 조선일보 사장이 직접 나서서 <김구선생의 의견에 대한 우리의 취할바 태도>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40]
1949년 1월 서울에서 조국의 통일을 위한 남북협상을 희망한다고 발언하였다. 같은달 서울 금호동에 '백범학원'을 세웠고, 3월 마포구 염리동에 창암학교를 세웠다.[38] 1949년 6월 26일, 12시 36분, 서울의 자택인 경교장에서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였다. 안두희가 한국전쟁 이후 사면을 받고 군납업체를 운영했기 때문에 권력층의 보호를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만 될 뿐, 그 배후가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같은해 7월 5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사망 당시 김구의 나이는 만 74세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뒤에 대한민국장)에 추서됐다. 저서로 《백범일지》《도왜실기》 등이 있다.
김구가 이념을 내세워 분열시키는 냉전세력을 비판함과 함께 민족통합을 통한 완전독립국가를 모색했다는 점, 민족과 인류의 현실을 고려하여 문화국가가 되기를 주장했다는 점 등을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41] 1999년 한겨레21이 실시한 '20세기 정신사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는 설문조사에서 백범은 가장 많은 사람이 꼽은 인물이었다. "사상가라기보다 정치지도자에 가까운 백범은 역사 속에서 민족자주를 위한 실천을 치열하게 전개한 점에서, 많은 응답자들로부터 한국 민족주의의 정화"라는 평가를 받았다.[42] 1946년 초 김일성을 살해하려 할 만큼 극단적이었다는 평가도 있다.[43][44]
강준만과 도진순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자기 정체감이 약하였으며, 유학·동학·불교·기독교 등을 두루 편력하는 사상적 방황을 경험하긴 했지만 전통적 가치인 유학적 또는 의병적 신의를 중시하는 완고함을 지닌 행동지향형의 인물이었다고 평가하였다.[45][46]
최상천은 김구가 점령국가의 상황을 제대로 읽지 못한 채 대책없이 반탁운동에 뛰어들었다가 허송세월을 했다고 비판하였다. [47] 뉴라이트 대안교과서를 지은 이영훈 교수는 "김구는 독립운동에 족적을 남겼지만 ‘민족’만 주창했을 뿐 건국에 대한 비전은 없었다"라는 비판을 하기도 했다.[48]
이승만의 양자 대학교수 이인수는 박정희 정부가 이승만의 권위를 약화시키려는 목적으로 추앙했으며 김구는 '해방 정국에서 미아가 된 저항민족주의자'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49]
박갑동은 "경교장에 가서 만나면 언제나 김구 선생은 한복차림으로 있었다. 내가 김구선생과 얘기하고 있을 때 비서가 와서 외출하자고 하니까, 바지저고리 차림의 김구 선생이 일어섰다. 그러면 비서가 두루마기도 입혀 주고, 모자도 씌워 주면서 문도 열어주는데, 손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 그의 비서가 구두도 신겨 주고, 손에다 지팡이를 쥐어 주는 모습이 영락없는 조선왕과 다를 것이 없었다."고 주장하였다.[45][59]
이승만과 김구 모두 구한말에 과거에 응시해 낙방한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었다. 낙방 후 이승만은 개신교, 김구는 동학과 인연을 맺었다. 이승만은 친미국 노선으로 갔고, 김구는 친중국(여기서의 중국은 대만) 노선으로 갔다. 장개석의 중국은 몰락한 반면, 미국의 세계적 패권은 더욱 강화되어 갔다. 미국은 비교적 다원체제 였던 만큼 이승만과 미국의 갈등은 미국의 어느 한 부분과의 갈등이었을 뿐, 큰 흐름은 친미노선을 선택한 이승만에게 유리하였다. 강준만은 이점을 이승만의 승리와 김구의 패배 요인으로 보았다.[60]
김구의 자서전《백범일지》에 따르면 김자점의 후손인 아버지 김순영은 중풍으로 몸이 불편했으며, 잘못을 저지르면 엄하게 교육하는 아버지였다고 한다. 어머니 곽낙원은 중국 중경 거주시, 아들이 독립운동가로 활동할 때 권총을 구입하여 줄 만큼 열심히 아들을 지원했다.
1901. 8. 10 서울~1932. 10. 10.
![]() 양 손에 폭탄을 들고 태극기 앞에서 절명사를 가슴에 붙인 채 촬영한 그의 마지막 사진. | |
출생 | 1908년 6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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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2년 12월 19일![]() 총살형 |
거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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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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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23세에 학교 자퇴 |
직업 | 독립운동가, 교육자, 시인 |
배우자 | 배용순 |
자녀 | 장남 윤종, 차남 윤담 |
부모 | 윤황(부), 김원상(모) |
윤봉길(尹奉吉, 1908년 6월 21일 ~ 1932년 12월 19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시인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본명은 윤우의(尹禹儀), 호는 매헌(梅軒)이고,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났다.
윤봉길은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78번지 광현당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려의 명장 윤관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윤황(尹璜)이며, 어머니는 경주 김씨 김원상(金元祥)이다. 1911년 3월 4세때 광현당에서 저한당으로 옮겨와 23세까지 생활하였다. [1] 1918년 덕산보통학교(德山普通學校)에 입학하였으나 다음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받아 식민지 노예교육을 배격하면서 학교를 자퇴하였다. 이어 최병대(崔秉大) 문하에서 동생 윤성의(尹聖儀)와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1921년 유학자인 매곡 성주록(成周錄)의 서당 오치서숙(烏峙書塾)에 들어가 그의 문하생이 되었다. 오치서숙에서 윤봉길은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두루 익혔다.[1] 1922년 15세에 성주배씨 배용순(裵用順)과 결혼하였다. 학업 성적이 우수하여 1923년 16세에 오치서숙 춘추 시회에서 장원하기도 했다. 1928년 18세 되던 해에는 시집 <오추>(嗚推), <옥수>(玉睡), <임추>(壬椎) 등을 발간하였다. 1929년 오치서숙을 졸업, 한학수업을 마쳤다. 이때 윤봉길은 매헌(梅軒)이라는 아호를 얻었다.[1]
청년 시절에는 농민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1929년 오치서숙을 졸업한 윤봉길은 농촌계몽활동, 농촌부흥운동, 야학 활동, 독서회운동 등을 시작하였다. 1927년 농민독본 3권을 저술하였다. 1928년 부흥원 설립을 기념하는 공연인 우화 「토끼와 여우」의 공연과 월례강연회를 개최하였으며 <기사년(己巳年) 일기>(日記)를 지었다. 이어 위친계(爲親契) 조직, 월진회(月進會), 수암 체육회 등을 조직하였다.[1] 1930년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글귀를 남기고 집을 떠나 중국으로 건너갔다.
중국 상하이에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야채장사를 하던 그는 1931년 겨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인 김구를 찾아, 독립운동에 몸바칠 각오임을 호소해 그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김구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의 훙커우 공원에서 열리는 일본 천황의 생일연(천장절(天長節))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를 폭탄으로 공격할 계획을 세웠으며[2], 협의 끝에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하기로 결의하였다.[3][4] 당시 폭탄은 폭발물 전문가인 김웅에 의해 폭탄 투척에 적합한 도시락 모양과 물통모양으로 제작되었는데, 두번의 실험을 거쳐 완성하였다. 당시 첫번째 실험에서 폭탄이 터지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실험을 한 것이다. 윤봉길은 스프링코트를 말쑥하게 차려입고 오른손에는 일장기, 왼손에는 물통과 도시락으로 위장한 폭탄을 들고 삼엄한 경계망을 뚫으면서 훙커우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11시가 되자 중국주둔 일본군(천진군) 총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 義則) 대장이 등장했고 상하이에 있는 외교관과 내빈이 자리를 잡았다. 군악이 울려퍼지고 열병식이 이어졌다. 천장절 행사가 끝나자 외교관과 내빈은 돌아가고, 일본인들만 남아 일본 상하이교민회가 준비한 축하연을 열였다.
11시 50분 일본 국가가 울려퍼지는 순간 윤봉길은 물통폭탄을 단상으로 힘차게 던졌다.[5] 경축대 위에 폭탄이 명중한 것을 확인한 윤봉길이 다시 바닥에 놓아둔 도시락폭탄을 집어들려는 순간 일본 헌병이 덮쳤다. 윤봉길은 팔목이 잡힌 채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고 외쳤다.[6]
훙커우공원에서의 폭탄 투척을 실행한 윤봉길은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7], 상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등을 죽이고,총영사 무라이,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제9사단장 우에다, 주 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에게 중상을 입혔다.
폭탄 투척 직후 체포, 곧바로 헌병으로 넘겨지면서 보다 가혹한 심문과 고문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8]
1932년 5월 28일 상해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1932년 11월 18일 일제 대양환으로 일본 오사카로 후송되어 20일 오사카 육군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金澤陸軍刑務所)에서 총살 당했다.[1]
당시 국민당 총통이었던 장제스는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에서의 폭탄 투척 소식을 전해 듣고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니 정말 대단하다."라며 감탄하였고, 이것은 장제스가 조선에 관심을 갖고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1932년 12월 18일 가나자와 육군구금소로 이감되었다.[1]
“ |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는가?”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므로 하등 말할 바 없다.” |
” |
1932년 12월 19일 새벽 7시 27분 일본 이시카와 현 가나자와 시 형무소. 요란한 총성이 음침한 겨울안개를 뚫고 작업장에 울려퍼졌다. 형틀에 묶인 사형수는 미간에 총알을 맞고 13분 뒤에 숨졌다. 시신은 아무렇게나 수습돼 가나자와 노다산 공동묘지 관리소로 가는 길 한복판에 표식도 없이 암매장되었다.[9]
1946년 3월 6일 이봉창·백정기 의 유해와 함께 발굴, 같은해 6월 16일 경성에 도착하여 6월 30일 국민장으로 안장되었으며 장지는 효창공원이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윤봉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965년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준비위가 구성되고 같은해 6월 29일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으며 1965년 12월 19일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준위를 서울 조계사에서 발족되었다.[10]
만보산 사건으로 일본에게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중국의 주석 장제스는 이후 윤봉길의 상해 의거를 높이 평가하여 중국의 백만 대군이 이루지 못한 것을 윤봉길이 해냈다며 극찬하고, 이후 임시정부의 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11]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장건상의 증언에 의하면 윤봉길의 의거가 임시정부 지원을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임시정부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1932년 이봉창, 윤봉길의 의거, 특히 윤봉길의 의거가 있기 전에 임시정부는 참 외로웠다. 장개석이 임시정부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알고 동전 한푼도 도우지 않았으며, 윤봉길 의거를 보고서야 장개석이 전적으로 도왔던 것이다”고 회고 하였다.[12] 반면 박헌영은 민중의 계급적 각성과 연대가 없는 극소수의 활동이라며 윤봉길 의거를 부정적으로 평가절하하였다.[13]
1999년, 강효백 경희대학교 국제법무대학원 교수는 현재 널리 알려진 훙커우 의거 이후 체포사진(오른쪽 사진)이 가짜라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오른쪽 사진과 표제 사진의 인물 모습이 확연하게 다른 것은 물론, 윤봉길은 중절모를 쓴 적이 없으며, 바바리 코트를 입지 않았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이에 관해 대한민국 정부는 오랫동안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그러던 2008년 10월 8일, 국가보훈처는 독립기념관의 주장에 근거하여 이 사진 속 인물이 윤봉길이 확실하다고 답변하였으며, 강효백 교수는 이에 대해 재반박을 하는 한편, SBS스페셜에서 이와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다고 밝혔다.[14]
윤봉길의 유족들 중 6촌 동생인 윤명의는 "윤 의사가 생전에 입지 않았던 바바리코트를 입고 있다"며 윤봉길의 실제 모습과 닮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한편 윤봉길의 부인 배용순과 동생 윤남의는 1976년대에 위 사진의 인물이 윤봉길이 맞다고 증언한 바 있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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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mb와 뉴라이트와 한나라의 정체 그참~ 10만원권 무한정 보류라며~
테러리스트 맞네요~뉴또라이들과 MB와 딴나라당이 보기엔 테러리스트 맞을껍니다 헌법에 임시정부를 계승한다고 분명 명시 되어 있음에도 이를 부정하고 우리 국민들은 더 당해도 쌉니다~잃어버린 10년 운운 지랄병 해대며 찍은게 고작 전두환 2세와 딴나라 수구꼴통들입니까? 이래도 또 선거때 전라도 사람들은 개판 민주당과 경상도 사람들은 우리가 남이가~하면서 딴나라당 찍을꺼 아닙니까??(참고로 전 광주사람임..)
정말 기존의 경제 시스템과 정치제도를 수정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합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운 분들이 테러리스트라면 일본놈들은 도대체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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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놈들이 보기엔 테러리스트가 맞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