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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剛山 神仙臺에서 찾은 天下第一明堂
1. 우리나라의 지형(地形) 개관(槪觀)
(1) 옛 사람들이 본 조선의 地形
우리나라 지형에 관하여 옛 사람들이 생각하고 논(論)한 것을 살펴보면, 먼저 사대부가 살만한 가거지(可居地)를 논(論)하고 있는 지리학의 명저(名著) 『택리지(擇里地)』의 저자 청화산인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온 나라의 물을 살펴보면 철령 너머 동쪽은 북쪽 함흥에서 남쪽 동래까지 모두 동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고, 경상도의 물과 섬진강은 남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철령 남쪽에서 나주까지는 물이 모두 서쪽으로 흘러서 광양 앞바다로 들어가는데 이때 크면 강이요, 작으면 포구와 항구가 되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산수의 대략이다”라고 하였다.
실제로 두만강과 인접한 서수라까지 이어진 장백정간과 백두대간에서 낙동정맥이 마무리되는 부산의 몰운대까지 동쪽으로 흐르는 강 중에서 넓고 큰 강은 그리 많지 않은데, 강릉의 남대천, 포항의 형산강, 울산의 태화강 등 크고 작은 강들은 모두 동해로 들어간다.
『택리지』는 또 “옛사람들은 우리나라의 지세를 노인형(老人形)이고, 해좌사향(亥坐巳向:註1)이어서 서쪽으로 향한 얼굴이 중국에게 절을 하는 형상이므로 예로부터 중국과 친하고 가까이 지냈다”라고 썼다. 그런 연유에 기인한 탓인지 이를 받아서 왜인(倭人) 지리학자 고토 분지로는 한 술 더 뜨서 조선의 형세를 두고 ‘토끼 꼬리 형국론’을 펴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이태리는 외형이 장화(長靴)와 같고, 조선은 토끼가 서 있는 것과 같다. 전라도는 뒷다리에, 충청도는 앞다리에, 황해도에서 평안도는 머리에, 함경도는 어울리지 않게 큰 귀에, 강원도에서 경상도는 어깨와 등에 각각 해당된다. 조선인들은 자기 나라의 외형에 대해 ‘형태는 노인의 모습이며, 나이가 많아서 허리는 굽고 양손은 팔짱을 끼고 지나(支那: 중국)에 인사하는 모습과 같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조선은 당연히 지나에 의존하는 게 마땅한 일이다’라고 여기는데, 이 같은 생각은 지식인 계급인 사대부들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라고.
왜인(倭人) 지리학자 고토 분지로가 이렇게 말한 것을 두고 한민족의 열등성을 강변하기 위한 술수라고 파악한 최남선은 조선 중엽에 그려진 「근역강산맹호기상도(槿域江山猛虎氣象圖)」를 원용하여 우리나라의 모양을 ‘호랑이’라고 표현하였다. 최남선은 잡지 『소년』 창간호에 “한반도는 마치 맹호가 발을 들고 동아 대륙을 향하여 나는 듯 뛰는 듯 생기 있게 할퀴며 달려드는 모양을 하고 있는데, 더욱이 그 모양이 내포하는 의미 또한 심장하여 한반도의 진취적이면서도 무한한 팽창 발전과 아울러 생생하고 왕성한 원기의 무량한 것을 남김없이 보여주는 것이니 소년들은 굳고 단단하게 마음을 가지라”라는 글을 실어 우리나라 지세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한반도는 마치 맹호(猛虎)가 발을 들고 동아 대륙을 항하여 달려드는 모양새라고 보고, 진취적이고 원기가 무량하다고 평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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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모양(낙동강)최남선은 한반도를 두고 마치 맹호가 발을 들고 동아 대륙을 항하여 달려드는 모양새라고 보고, 진취적이고 원기가 무량하다고 평하였다.
한편 최남선의 주장에 앞서 조선 중엽에 그려진 「근역강산맹호기상도(槿域江山猛虎氣象圖)」를 보면 우리 국토가 마치 포효하는 호랑이가 대륙을 향해 뛰어나갈 듯이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호랑이의 꼬리 부분은 경북 영일군 구룡포읍 대보리인데, 이 지역은 예로부터 호미등(虎尾嶝) 또는 호미곶으로 알려진 곳이다.
『택리지』에는 “또 1000리 되는 물과 100리 되는 들판이 없는 까닭에 큰 인물이 나지 못한다. 그리하여 서융(西戎)과 북적(北狄) 동호여진(東胡女眞, 동쪽의 여진족)이 중국에 들어가서 한 차례씩 황제 노릇을 하였지만 우리나라만 그런 일이 없었다. 오직 우리 국토만 조심하며 지켜서 다른 뜻을 품지 못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양성지가 세종의 명에 따라 편찬한 『팔도지리지』에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우리나라의 국경선이라고 여기지 않고 멀리 요동땅의 옛 고구려 영토까지를 우리의 국경선이라고 여겼다. 그는 우리 영토를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이 육지와 연결되어 있지만 우리나라의 크기는 거의 만 리다”라고 하였다. 노사신 역시 『동국여지승람』 전문에서 우리 국토를 만 리라고 했으며, 서거정도 “고려는 서북 지방 압록강을 못 넘었지만 동북 지방은 선춘령을 경계로 고구려 지역을 다 넘었다”라고 하였다.
이중환과 김정호가 살았던 당시에 10리는 5.4km였지만 현대적 개념인 4km를 10리로 측정할 때 한반도에는 1000리가 넘는 물길이 여섯 개가 있다. 압록강(790km), 두만강(521km), 낙동강(517km), 한강(514km), 대동강(439km), 금강(401km)이 그 강들인데 국토 면적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큰 일본이 1000리 되는 강이 없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그뿐만 아니라 호남평야는 200여 리에 걸쳐 펼쳐진다. 논강평야라고 불리는 논산, 강경을 지나 익산, 정읍, 부안, 고창으로 이어지는 호남평야가 바로 그 땅이다. 그뿐인가. 황해도의 연백평야와 경기도의 평택평야, 평안도의 안주평야 등도 얼마나 넓은가.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사실에 가슴 아파했던 사람이 ‘천하의 임백호’라고 일컬어졌던 백호 임제였다.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에서 태어나 성운에게 배운 그는 서도병마사로 임지로 가던 길에 개성의 황진이 무덤을 찾아가서 무덤 앞에서 아래의 시조 한 수를 읊고 제사를 지내주었는데, 호걸 임제는 이 일로 인하여 그만 파직되고 술과 여인과 친구, 피리와 벗하며 방랑을 거듭하였다.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晝夜)에 흐르거든 옛 물이 있을쏘냐
인걸도 물과 같아야 가고 아니 오노매라
임제는 고향인 회진리에 돌아와서 서른아홉 살에 죽었다. 운명하기 전 그는 아들들에게 “천하의 여러 나라가 제왕을 일컫지 않은 나라가 없었는데, 오직 우리나라만은 끝내 제왕을 일컫지 못하였으니, 이같이 못난 나라에 태어나서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느냐! 너희들은 내가 죽어도 조금도 슬퍼할 것이 없다. 그러니 내가 죽거든 곡을 하지 마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민속학자 김화진이 쓴 『오백 년 기담일화』에는 백호 임제에 대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작은 나라에 태어난 것을 늘 한스럽게 생각해오던 임제는 어느 날 지리산에 올라가 “사이팔만(四夷八蠻, 사면팔방의 오랑캐들이란 뜻으로 조선조의 선비들이 제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와 이민족을 미개한 야만인으로 여겨 이르던 말)이 모두 한 번씩 중원을 차지해 황제 노릇을 했는데 우리 조선은 몇천 년 동안 이 짓 한 번 못해보고 중국을 섬기기만 하면서도 서로 당쟁이나 일삼으니 이런 종놈의 나라에 태어나 살면 무엇 하겠느냐” 하면서 “천하의 임백호가 소국에 태어난 것이 한스러워서 이곳에서 죽는다” 하고 소리치고는 산 밑으로 떼굴떼굴 굴렀으나 때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나무꾼이 그를 발견하고 업어다가 살렸다고 전한다.
(2) 우리나라의 지형(地形) 개관(槪觀)
그럼, 우리나라의 지형은 과연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는가? 과연, 왜인(倭人) 지리학자 고토 분지로의 말처럼 토끼모양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조선 중엽에 그려진 근역강산맹호기상도(槿域江山猛虎氣象圖)를 인용한 육당 최남선의 말처럼 중국을 향해 달려드는 맹호형상을 하고 있는가?, 그도 아니면 조선조 사대부들이 생각했던것처럼 팔짱을 끼고 중국을 향해 읍(揖)을 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가?
한국이 낳은 조선조 최고의 지리학자 김정호가 1861년에 발로 뛰어 그린 대동여지전도와 18세기 방대한 자료의 집성과 이의 과학적 분류 및 구성으로 백두대간(白頭大幹)이란 새로운 지리적 개념을 도입했던 여암(旅庵) 신경준(申景濬, 1712 ~ 1781)의 산경표(山經表)를 보면 우리나라는 백두산을 정점으로 1대간(大幹), 1정간(正幹), 13정맥(正脈), 16강수(江水)가 웅웅자자(雄雄雌雌)하게 흘러 마치 선인(仙人)이 단(丹)을 연단(煉丹)하는 듯한 모습인 선인연단형(仙人煉丹形. 註2)의 모습을 하고 있는 바, 전체적으로 보면 북방 자미원국(紫微垣局)을 형성한 대도인(大道人)이 양팔을 모아서 한반도에서 단(丹)을 만들고 있는 형상으로 한반도 땅은 단(丹)을 연단하는 삼족(三足)의 솥이고 강화도,울릉도,제주도는 이 솥을 지탱시켜주는 세개의 솥발(鼎足)이다,
그러니, 솥 안에 해당하는 한반도 땅은 마치 무쇠솥 안에서 단(丹)이 연단(煉丹)되듯이 단 한 시도 영일(寧日)의 쉬는 날이 없이 지지고 볶이면서 연단(煉丹)되고 있는 것이다. 즉 북방 자미원국을 형성한 대도인(大道人)이 강화도, 울릉도, 제주도가 세개의 솥발(鼎足)이 된 반도(半島)라는 솥(鼎) 안에서 단을 연단하는 모습이다. 이같은 연유로 한국인(韓國人)들은 외침과 환란 등으로 끊임없이 담금질을 당하여 오면서 더욱 더 굳세고 강하게 발전되어 왔던 것이다.
곤륜으로 대표되는 히말라야에서 동쪽으로 가는 동출맥(東出脈)은 상생(相生)의 방향으로 가고, 서쪽으로 가는 서출맥(西出脈)은 상극(相剋)으로 가서 선.후천(先後天)을 완성하고 있는데, 극(剋)이 생(生)을 이기는 시대인 선천(先天)은 서방금기(西方金氣)가 동방목기(東方木氣)를 금극목(金剋木)으로 제압했기에 세계의 패권을 잡게되므로 서방금기(西方金氣)의 대표주자인 미국이 결국 전세계를 통치하게 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풍수학상 금(金)은 곧 무기이자 돈을 나타낸다. 따라서 무기로 세계를 통치함과 동시에 돈으로로도 세계를 통치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선천(先天)의 운기(運氣)가 다하고(盡) 후천(後天)이 새로이 열리므로 이에 따른 천지개벽(天地開闢)으로 선.후천이 새로이 개벽하게되면 생(生)이 극(剋)을 이기는 시대인 후천(後天)이 도래하게 된다. 후천에서는 생(生)이 극(剋)을 이기므로 동방목기(東方木氣)가 서방금기(西方金氣))를 목극금(木剋金)으로 제압하게 되니 동방목기(東方木氣)의 대표주자인 우리나라가 결국 전세계를 이끌어 가게 될 것이다. 풍수학상으로 목(木)은 곧 올바름과 정신이니 정신적으로 전 세계를 통치하고 이끌어 가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때가 오면, 한반도가 그 주인공이 되어 세계를 이끌어 나가게 될 것이다. 이는 당(唐)의 양균송이라는 천하의 풍수지리가가 세계 종교의 발상과 발흥지를 거론하면서 우리니라의 금강산에 대해서 언급했는데서도 알 수가 있다. 우리나라 서산의 자미원에도 다녀갔다는 설이 있는 그는 후천개벽(後天開闢)으로 한반도에서 일만이천(一萬二千)의 도통군자( 道通君子)가 나온다고 했다.
그는 말했다.
" 곤륜 동출맥(東出脈)의 한 가지(一枝)가 동(東)쪽으로 가서(出脈) 노추산을 만들고 72기봉(起峰)하여 그 기운(氣運)을 받아 공자(孔子)와 그의 72제자를 낳았고,서쪽으로 출맥하여 감람산을 만들고 10기봉(起峰)하여 그 기운(氣運)을 받아 야소(耶蘇: 예수)와 그의 10대 제자를 낳았으며, 서남방(西南方)으로 출맥하여 영취산을 만들고 499기봉(起峰)하여 그 기운(氣運)을 받아 석가모니(釋迦牟尼)와 그의 499명 제자(소위 500羅漢)를 낳았다. 이 곤륜산에서 동북(東北) 간향(艮向)으로 출맥(出脈)한 용맥(龍脈)이 장백산(長白山 즉 우리의 白頭山)를 솟아올린 후 남쪽으로 행룡(行龍)하여 금강산 12,000봉을 기봉(起峰)시켰는데, 이 기운(氣運)을 받아서 후천 세계에 해동(海東)에서 12,000 명의 도덕군자(道德君子)가 나오리라."라고.
* 註1, 해좌사향(亥坐巳向): 방위를 표시하는 풍수용어로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향한 것을 말함
* 註2, 선인연단형(仙人煉丹形): 한반도는 인간이 살수있도록 조성되어진 비옥한 땅이 아니라, 마치 좋은 쇠를 만들려면 불에 굽고 망치로 제련한 후에 식히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도를 닦는 이들이 혹독한 자기 수련을 반복할 수 있게끔 만들어진 환경이 아주 열악하고 척박한 땅이다. 때문에 이 땅은 도(道)를 닦는 이들을 위해서 마련되어진 땅이지 일반인들이 마음놓고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조성되어진 비옥하고 편안한 땅이 아니다. 그래서 전체의 70%가 쓸모없는 산악(山岳)으로 덮혀있는데도 불구하고, 새족(鳥族)인 한족(漢族)에게 밀린 용족(龍族)인 환인(桓人)들이 남(南)으로 남으로 밀려와서 이 산들 사이에 마치 도(道)를 닦듯이 둥지를 틀고 살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韓半島)의 하늘을 날고 있는 비행기 안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마치 소털처럼 빽빽하게 끝도 없이 둘러 싸여 있는 소털같은 산들 사이에 버짐 먹어서 털 빠진것 처럼 군데 군데 산을 파헤지고 모여 살고 있는 도시와 마을을 볼 수가 있다. 그러므로 이 땅에는 마치 무쇠를 단근질 하듯이 한시도 시련이 없는 날이 없이 계속 연단(煉丹)되고 있는 것이고, 신기(神奇)하게도 환족(桓族)들은 이 시련을 위태 위태하지만 아슬아슬하게도 아주 잘 피하면서 견디어 오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한반도를 형성한 풍수적 형국이 선인연단형(仙人煉丹形:신선이 단을 연단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3) 龍과 鳳의 먹이 쟁탈전으로 서로의 수호 상징물로 자리잡다.
한반도는 산동반도로 대변되는 중국의 봉황(鳳凰)과 요동과 연해주.시베리아로 대표되는 옛 환(桓)국의 청룡(靑龍) 사이에서 청룡의 발톱에 잡혀있는 청룡의 먹이감이다.그래서 봉황이 청룡으로 부터 이 먹이감을 빼았기 위해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형상이다. 이해가 않되시면 저녁 9시 뉴스시간에 방송되는 오늘의 날씨 모두에 나오는 오늘의 기상도 상의 극동지역 지도를 보시라. 지도상에서 봉황과 용이 먹이감을 사이에 두고 처절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 보일 것이다. 이 두세력은 서로가 서로에게 아주 무서운 세력으로서 한 때는 용이, 또 한 때는 봉황이 패권을 잡으면서 패권을 잡은자가 패권을 빼았간 쪽의 통치자를 임명하고 자기가 통치자로 봉했든 상대방을 신하로 봉군시켜서 다스렸다. 그래서 이 양자는 서로에게 적대하는 민족이 신성시되면서 가장 무서웠던 것이고, 그들이 침략하지 않고 가만이만 있어준다면 만사가 화평했던 것이였기에, 그 상징물을 통치권의 징표로 삼았던 것이다. 그같은 연유로 중국에서는 왕권의 상징이 환족(桓族)을 뜻하는 청룡으로, 환족(桓族)은 한족(漢族)을 뜻하는 봉황으로 왕권의 상징을 삼았던 것이다.중국의 왕이 용손(龍孫)으로 천자(天子)라고 불리우는 이유는 용(龍)을 상징하는 환족(桓族)의 왕인 천황(天皇:환인.환웅.자오지천황 등)이 임명한 자손이라는 뜻인 바, 이는 고조선 이전에는 환족(桓族)의 천황(天皇)이 중국을 포함한 극동지역을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의 오행을 따라 오분(五分)하고,그 책임자를 각각 청제.적제.황제.백제.흑제(黑帝)라는 벼슬을 주어 다스리게 하면서 각지역의 책임자는 천황이 임명한 사람으로 천황(天皇)의 아들 즉 천자(天子)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의 전설상의 임금인 헌원이 황제라고 불리우는 이유는 그 당시 이 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천황인 자오지천황(치우천황이라고도 함)이 환족(桓族)인 헌원을 중앙 토(土)를 다스리는 책임자인 황제(黃帝)로 봉(封)했기 때문이다. 이 후 이 황제 헌원이 중국인들 즉 한족(漢族)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킨 후 그들의 통치자가 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중국에서 임금을 황제라고 부르는 이유는 전체를 총괄 통치하는 천황(天皇)과 그의 신하로서 분국(分國)을 통치하는 목화토금수의 오제(五帝)를 합하여 황제(皇帝)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2, 한민족(韓民族)의 성산(聖山) 백두산(白頭山)
(1) 韓民族의 聖山 白頭山
북한 평안도(현 양강도) 삼지연군과 중국 지린성(吉林省)의 경계에 있는 산인 백두산은 높이 2,750m로 북위 41˚01´, 동경 128˚05´에 있으며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한반도 모든 산의 어머니산(祖宗山)이기에 성산(聖山)이라 불리는데, 지금부터 약 100만 년 전에 화산 작용으로 땅속 깊은 곳에서 용암이 솟아나와 이루어졌다. 본래 이 지역은 화강편마암과 화강암으로 된 흔히 볼 수 있는 산지였으나 화산이 용암을 분출했을 때 처음에는 현무암 용암이 솟구쳐나와 수 많은 골짜기들을 메우면서 넓게 퍼져서 현무암 지대를 이루어놓았다. 그 다음 알칼리조면암과 흐름무늬암 등의 용암이 흘러나왔는데 그 흐름이 약해져 멀리 흘러내리지 못하고 식어 덧쌓이면서 오늘날과 같은 백두산의 형태를 이루었다. 백두산 꼭대기 가운데 분화구에 물이 고여 생긴 산중(山中)자연 호수인 칼데라호(caldera 湖)를 천지(天池)라고 부른다. 천지는 용왕담(龍王潭)이라고도 하는데, 면적 9.165㎢, 둘레 14.4km, 최대너비 3.6km, 평균 깊이 213.3m, 최대 깊이 384.05m, 물의 부피 19억 5500만 세제곱미터, 수면 고도는 2,257m로 둘레에는 장군봉(將軍峰)을 비롯한 절벽으로 된 화구벽 오봉(火口壁五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이 화구벽에서는 남쪽의 불목(火項)이라고 하는 파극(破隙)을 통해서만 호반으로 내려갈 수 있으며, 호반 일대에 약간의 평탄한 땅이 있을 뿐 그 밖에는 깎아세운 듯한 절벽뿐이다. 여름철에는 사슴·곰 등의 짐승이 물을 마시기 위해 이곳으로 모여드는데, 호수의 수온은 9.4℃ 내외(연중 물 아래쪽은 4℃)이고 빗물과 눈 녹은 물로 채워지는 천지의 물은 짙은 푸른색이며 대단히 맑은 빈영양호(貧營養湖)이므로 식물성 부유생물·작은 곤충류·물속 이끼류가 살고 있으나 어류나 파충류는 서식하지 않는다. 하지만 1984년 북한에서 김일성의 지시로 송어를 비롯한 수많은 산천어 치어를 백두산 천지에 넣어서 현재는 천지산천어가 서식한다고도 하며 가끔 천지 속의 괴물 출현 보도가 있기는 한데 실재여부는 알 수가 없다. 호수 북쪽의 한 곳이 터져서 천지의 물이 흘러나가는, 달문(闥門)이라고 하는 화구뢰(火口瀨)를 이루고 있는 바, 호수는 여기서부터 흘러내려 650m 북류하다가 용암벽에 막혀 높이 67m의 장백폭포(長白瀑布)가 되어 협곡을 만들며 얼다오바이강(二道白河)으로 떨어져 쑹화강(松花江)으로 흐른다. 천지에 시원을 둔 폭포는 백두폭포·사기문폭포·형제폭포·백두밀영폭포 등이며 압록강 상류, 두만강 상류, 산다오바이강(三道白河)으로 흘러들어간다. 호반의 동안과 남쪽 산기슭의 쑹화강 상류인 탕수평(湯水坪)에서 온천이 솟아나서 백암온천과 새로 개발된 백두온천이 있으며, 주변에 장백온천과 제운온천이 있다. 백두산이란 이름은 산 정상 부위에 흰 눈과 백색(白色)의 부석(浮石)이 얹혀 있어 일년 내내 흰색이였으므로 마치 흰 머리와 같다 하여 백두산(白頭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백두산에서부터 지리산에 이르는 백두대간은 한국의 기본 산줄기로서 모든 산들이 여기서 뻗어내렸다 하여 예로부터 성산(聖山)으로 숭배하였으며, 또 단군(檀君)이 탄강(誕降)한 성지로 신성시해왔다. 중국 금대(金代)인 1172년에는 영응산(靈應山)이라 하여 제사를 지냈으며, 청대(淸代)에는 태조(太祖) 누루하치가 이곳 왕지(王池)의 물로 치료를 하였다 하여 이산을 청왕조(淸王祖)인 애신각라(愛新覺羅)의 발상지라 하여 숭배하였다.
북동에서 서남서 방향으로 뻗은 백두산맥(白頭山脈)의 주봉(主峰)인 백두산의 최고봉은 장군봉(將軍峰: 2,750m)이다. 장군봉은 일제강점기에는 병사봉이라 불리며 해발 2,744m로 측량되었으나, 북한에 의하여 2,750m로 다시 측량되었다. 2,500m 이상의 봉우리는 모두 16개로 향도봉(2,712m), 쌍무지개봉(2,626m), 청석봉(2,662m), 백운봉(2,691m), 차일봉(2,596m) 등이 있다. 남동쪽으로 마천령산맥(摩天嶺山脈)이 뻗어 있다.
이 산은 활화산으로 고생대부터 신생대까지 여러 시대의 지층들이 발달하였으며, 특히 중생대와 신생대의 구조운동에 의해 형성된 단열구조, 파열구조 단층이 발달하였다. 화산분출은 쥬라기(약 6억 년 전)에서 신생대 제4기까지 지속되었는데 특히 신생대 제3기 부터 활발히 진행된 화산활동으로 현무암질 용암이 대량 유출되어 약 5,350㎢의 넓은 백두용암대지가 만들어으며,
약 200만 년 전부터 화산활동이 약화되어 지금의 산세를 형성하였다. 화산활동 후기에는 대연지봉, 소연지봉, 대각봉, 무두봉, 베개봉, 청봉 등 부속화산들이 형성하였으며 이들은 적갈색 다공질 현무암 용암의 분출로 생겼다.
최근의 분출은 1597년·1668년·1702년에 있었다고 문헌에 전하고 현재는 백두산 주변 50km 내외에 진도 2∼3의 약한 지진이 발생하고 있다. 화산폭발시 용암이 잘게 부서져 쌓인 부석층이 곳곳에 남아 있는데 천지 부근의 부석층은 두께가 20m 가량 된다. 화산재, 화산탄, 화산모래 등의 층도 남아 있다.
토양은 여러 해 동안 동결층의 영향과 한냉한 기후에서 형성된 토양, 평탄한 현무암대지에서 형성된 토양과 수평대성을 띤 포드졸성 갈색산림토 등이 다양하게 이루어져 있다.
기후는 찬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전형적인 고산기후이며, 한국에서 기후변화가 가장 심하다. 연평균 기온은 6∼8℃, 최고기온 18∼20℃, 1월 평균기온 -23℃(최저 -47℃), 1월의 평균 일교차는 7.5℃, 7월의 평균 일교차는 4.8℃이다.
백두산 정상 부근에서 봄철이 시작되는 시기는 5월 말이며, 5월 하순에야 0도가 된다. 이때부터 50일이 지난 7월 중순에야 영상 10도가 된다. 한여름에도 산정(山頂)의 기온은 영상 20도를 넘지 못한다. 하루 평균 영상 15~22도 이상 되는 날이 3~4일인데 이는 7월 하순에서 8월 상순 사이다. 남쪽의 더운 공기와 몽골지방에서 오는 찬 공기가 마주치면서 안개가 많이 끼는데 7~8월에 안개가 끼는 날수는 33일 가량 되며, 구름이 많고 천둥현상이 잦으며 주로 눈·비를 동반한다. 벼락회수는 연간 약 50회이고 그중 60∼70%는 6∼7월에 있고, 겨울 날씨가 연중 230일 정도 계속된다.
백두산에는 검은담비, 수달, 표범, 호랑이, 사향노루, 사슴, 백두산사슴, 산양, 큰곰 등의 희귀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또한 204종의 조류가 서식하는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삼지연메닭(348호)·신무성세가락딱따구리(353호) 등이 있으며, 특별보호대상 조류로 메닭, 세가락메추리, 북올빼미, 긴꼬리올빼미, 흰두루미, 재두루미, 원앙, 청둥오리, 붉은허리제비, 숲새 등이 있다. 북살모사와 긴꼬리도마뱀 등의 파충류와 무당개구리·합수도룡뇽 등의 양서류가 있으며, 천지에는 천지산천어가 살고 있다.
300과 2,700여 종의 식물이 분포하는데 분비나무, 가문비나무, 종비나무, 잎갈나무, 좀잎갈나무, 백두산자작나무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비교적 분포속도가 빠른 식물종이 다른 지역보다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화산 분출에 의해 피해를 받기 전의 식물종들이 정일봉을 비롯한 일부 지역에 자란다. 이 지역에서는 백두산의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흰병꽃나무·구름꽃다지·백리향·만삼·왜당귀 등이 자란다. 빙하기 이후 고산조건에 적응한 담자리꽃나무, 시로미, 물싸리, 두메김의털, 장군풀, 산할미꽃, 두메아편꽃, 큰산싱아, 각씨투구꽃, 끈끈이주걱, 두루미꽃, 눈사버들, 구름국화, 바위구절초, 만병초 등 한대성 식물들이 자란다.
또 매저지나무·들쭉나무·백산차 등의 냉대성 관목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금방망이·삼잎방망이·자주꽃방망이·무수해·황기·부채붓꽃·손바닥란·동의나물·분홍노루발풀·왕바꽃·메바꽃·구름범의귀풀·물매화 등 냉대성 초본식물들이 있다.
허항령에서 북쪽으로 2km 떨어진 지점에 있는 삼지연(三池淵)은 대소 4개의 얕은 호수로 이루어져 있는데 주위 길이가 4.5km, 수심 3m인 천연호수로서 주변 경관이 뛰어난 휴양지이다. 문화재로는 1712년(숙종 38)에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세운 백두산정계비가 있다.
『세종실록지리지』「길주목」 ‘경원도호부’조에는 백두산에 대하여 "영가사오리(英哥沙吾里)에서 서쪽으로 60리를 가면 백두산이 있는데, 산이 3층으로 되어 있다. 정수리에 큰 못이 있으니 동쪽으로 흘러 두만강이 되고, 북쪽으로 흘러 송화강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이 되고, 서쪽으로 흘러 흑룡강이 된다. 그 산에 사는 새와 짐승은 모두 흰빛이며, 산허리 이상은 모두 속돌로 되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신비롭게 여겨져 왔던 우리 민족의 조종산(祖宗山)이자 성산(聖山)으로 역사 속에 나타나는 기록들을 살펴 보면, 먼저 『삼국유사』에서는 백두산의 옛 이름을 개마산(蓋馬山)으로 기록하고 있다. ‘개마’는 천마(天馬)를 가리킨다. 『산해경』에는 백두산이 불함산(不咸山)으로 실려 있다. “넓은 평야 가운데 산이 있으니 ‘불함’이라 이름 한다. 숙신 땅에 속한다”라고 기록된 불함을 두고 육당 최남선은 ‘붉은’의 역음(譯音)으로 천주, 즉 신명(神明)을 뜻한다고 하였다.
김정호의 『대동여지전도』 서문에는 “백두산은 조선 산맥의 조산이니 3층으로 된 높이가 200리요, 가로로 퍼져 1000리에 걸쳐 있고, 그 정수리에 못이 있어 달문이라 일컫는데 둘레가 800리라,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이 되고 동쪽으로는 두만강으로 나뉜다. 그 분수령에서 구불거려서는 연지봉, 소백산, 설한등령, 철령을 일구고, 그 한 갈래가 동남으로 뻗어 도봉산, 삼각산이 되었다”라고 실려 있다.
이어서 『택리지』에 실린 백두산을 보자.
"백두산은 여진(女眞)과 조선의 경계에 있으며 온 나라의 지붕 역할을 하고 있다. 산 위에는 큰 못이 있는데 둘레가 800리가 되고, 그 못에서 서쪽으로 흐른 물이 압록강이 되고, 동쪽으로 흐른 물이 두만강이 되었으며, 북쪽으로 흐른 물은 혼동강(混同江)인데 두만강과 압록강 안쪽이 곧 우리나라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조선 후기 조선의 국토 상황을 기록한 『만기요람(萬機要覽)』(서영보, 심상규 등이 1808년 왕명으로 지은 책)에 보면 “백두산이 서북쪽에서 시작하여 황막한 들로 내려와 솟아올랐는데, 몇천만 길이 되는지 알 수가 없다. 꼭대기의 못은 사람의 숨구멍 같고 빛깔이 검어서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다. 때는 첫여름인데도 얼음과 눈이 쌓였고 바라보면 아득한 은바다를 이루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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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에 만발한 두메양귀비백두산 꼭대기 가운데 분화구에 물이 고여 생긴 자연 호수를 천지라고 부른다. 천지는 절벽으로 된 화구벽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천지를 중심으로 병사봉(2744m)을 비롯하여 망천후(2712m), 백암봉(2741m), 차일봉(2596m), 백운봉(2691m), 청석봉(2662m) 등 해발 2500m 이상의 날카로운 산봉우리들이 수없이 솟아 있다. 백두산의 산마루는 급한 비탈을 이루면서 급격히 높아졌으나 그 기슭에는 넓고 평탄한 용암 지대가 펼쳐진다. 이렇게 큰 현무암 지대는 세계적으로도 그리 많지 않다. 백두산 둘레에는 대연지봉, 소백산, 무두봉, 대로은산, 청봉 등 백두산의 기생화산들이 있다.
백두산 천지 주위의 기후는 여름철에는 안개가 많이 끼고 그 지속 시간이 길고 바람이 세게 부는 것이 특징이다. 백두산 마루에는 낮과 밤 할 것 없이 주로 겨울철에는 북서풍이, 여름철에는 남서풍이 분다. 평균 바람 속도는 초당 6.3미터, 최대 속도는 초당 59.8미터다. 이곳의 날씨는 신기할 정도로 변화가 극심하다. 난데없이 구름이 몰려와 비가 억수로 쏟아지다가도 갑자기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개기도 하며 다시 순식간에 비구름에 휩싸이기도 한다. 때로는 구름이 산꼭대기까지 닿지 못하고 산중턱에서 빗방울이 되어 떨어지거나, 산중턱에서 우레가 울리고 번개가 치며 벼락이 내려 바위를 무너뜨리기도 한다.
필자가 풍수답사차 찾아갔었던 지난 2013년 9월2일에도 아침에 호텔을 출발할 때는 비가 내렸는데, 천지에 도착하니 눈으로 바뀌었고, 천지에 잠시 머무는 그 짧은 시간에도 운무가 뒤덮혔다가 개였다 하기를 수차례나 반복했다. 잠시 한 때 천지를 뒤덮었던 짙은 구름과 운무가 불현듯 한쪽으로 밀리면서 햇빛에 반짝이는 백두산 봉우리들이 맑은 천지 물에 그대로 찬란하게 비치었는데, 다른 어떤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 절경으로 다가왔다. 특히 산마루에 서린 새벽안개가 산기슭으로 내려와 어둠을 거두어가고 눈부신 햇빛이 부챗살처럼 퍼지기 시작할 때면 천지의 모든 것이 영롱하게 천만 가지 빛을 발하는데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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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천지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조종산이자 성산이라 불린다. 지금부터 약 100만 년 전에 화산 작용으로 땅속 깊은 곳에서 용암이 솟아나와 이루어졌다.
우리 민족의 성산인 백두산에는 수많은 신화와 전설이 서려 있는데, 삼지연 부근에 단군이 처음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터전을 잡았던 신시(神市), 즉 천평[천리천평(千里千坪)]이 있다고 한다. ‘하늘처럼 높은 곳에 있는 광활한 땅’이라는 뜻을 지닌 천리천평이 육당 최남선의 『백두산근참기(註3)』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백두산이 오지랖을 벌리고 북포태산이 오른쪽 깃이 되고 증산이 왼쪽 깃이 된다. 둘레 몇백, 몇천 리가 실상 커다란 한 벌판을 이루어, 백두산으로 하여금 높음과 한가지로 크고 넓음이 임자가 되게 하니, 이것이 예로부터 천평이라 하여 신비로운 곳으로 이름 높은 곳이다. 어떤 책에 말한 대로 백두산 둘레의 기슭을 다 천평이라 한다면 시방 서간도, 북간도도 다 여기 들 것이니 그 넓이를 다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말처럼 삼지연에서 백두산으로 오르는 길은 끝없이 펼쳐진 잎갈나무 숲으로 장관이다. 그리고 잎갈나무 숲이 끝나면서 나무 한 그루 없는 광활한 벌판이 펼쳐지는데 바라만 보아도 가슴이 서늘해지면서 후련해짐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천생 나라 하나 만들게 생긴 땅이다”, “그 벌 하나만 해도 나라 하나를 만들기에는 너무 넓겠다”라는 말을 들었던 곳이 천리천평이다.
허항령(虛項嶺, 함경남도 보천군과 함경북도 무산군ㆍ삼장면 경계에 있는 고개)에 올라서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가 없는 천리천평이 끝도 없이 펼쳐지는데 하루 종일 가도 막막하기 그지없는 그 평원도 전해내려오는 천평의 한 자락 귀퉁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조선 선조 때인 1597년 8월 26일에는 “백두산 부근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묽은 흙불이 솟아올랐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1668년과 1702년에는 정상인 천지 부근에서 지진이 일어났으며 그 뒤에도 여러 사건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 백두산 주변에서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분쟁 사건도 자주 일어났다.
1685년(숙종 11)에는 백두산 부근을 답사하던 청나라 관원들이 압록강 건너 삼도구(三道溝)에서 조선의 산삼을 캐는 사람들의 습격을 받아 외교 문제가 일어났으며 1690년과 1704년, 1710년에도 두만강과 압록강 건너에서 우리나라 사람에게 중국인이 살해된 일이 생겨 청나라 정부의 항의가 있었다. 따라서 1711년에는 청나라의 오라총관(烏喇摠管)인 목극등이 압록강 대안 현지에 와서 조선의 참핵사(參覈使, 죄인을 공동 심사하는 사절)와 함께 범법 월경 현장을 검핵(檢覈)한 일도 있었다. 그런데 이듬해에는 청나라에서 이러한 월경 사건을 문제 삼아 백두산에 올라가 국경을 정하려는 계획이 진행되었다. 거기에는 청나라 왕실의 발상지로 여기는 백두산을 청나라의 영역 안에 넣으려는 저의가 깔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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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룡폭포 가는 길백두산에서부터 지리산에 이르는 백두대간은 한국의 기본 산줄기로서 모든 산들이 여기서 뻗어내렸다 하여 예로부터 백두산을 민족의 성산으로 숭배하였다.
청나라에서는 그해 2월에 목극등을 장백산(백두산)에 보내 변경을 사정(査定)하려 하니 협조해달라는 공문을 조선에 보냈으며, 4월에는 목극등 일행이 두도구(頭道溝)에서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와 후주(厚州)에 도착하였다. 청국의 공문을 받은 조선은 접반사(接伴使, 외국 대표를 맞는 조정의 대표) 박권을 보내 함경감사 이선부와 함께 부근에 가서 맞이하여 혜산진에서부터 산간 험지를 10일간이나 강행군하여 5월 15일 백두산 천지 가에 이르게 되었으며, 일행은 거기서 내려와 동남쪽으로 4킬로미터 지점인 해발 2200m 고지 분수령에 정계비를 세웠다.
그 백두산 바로 아래에 대연지봉(2360m)과 소연지봉(2123m)이 있고 소백산(2174m)이 있으며 허항령 아래에 삼지연군이 있다. 삼지연에는 15미터쯤 되는 김일성의 대형 동상이 소백산을 등지고 서 있다고 하는데 가볼 수가 없어서 확인할 길이 없다. 한 폭의 그림같이 펼쳐지는 삼지연을 최남선은 『백두산근참기』에서 "여기는 삼지라 하여 옛날부터 이름이 들린 곳이니 크고 작은 여러 늪이 느런히 놓인 가운데 셋이 가장 뚜렷한 고로 삼지라 일컫는 것이라 하는데 옛날에는 더 많았을 것이 분명하니 혹 칠성지라는 이름이 있음은 필시 일곱으로 보이던 시절에 생긴 이름일 것이다"라고 찬탄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 있어서 백두산은 단순한 산의 이름이 아니라, 우리 배달겨레의 가슴마다 깊숙히 아로새겨 존재하는 민족의 영산이요, 국토의 성역(聖域)이요, 통일된 신앙이다. 단군왕검으로 줄잇는 민족의 생명이 이곳에서 시원하고, 바다 멀리 제주도 · 울릉도까지도 국토의 맥이 이곳으로 줄닿고, 민족 역사의 뿌리가 이곳에 터잡고 있음을 믿어왔기 때문에, 반만년 애환의 역사 속에서도 우리 민족이면 누구나 면면히 동경의 성산(聖山)으로 숭상하여 온 것이다. 우리의 개국신화로부터 시작하여, 전설 · 설화 · 시 · 소설 · 수필 등 우리민족의 전통문학과 관련지어지지 않은 작품이 없을 만큼 유구한 역사의 맥을 잇기 때문에 우리 한민족을 '백두산족', 혹은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고 자처할 정도로 우리 민족이면 누구나의 가슴속에 백두산의 혼이 잠재되어 있다.
최남선은 <조선의 산수>에서 "비유컨대 조선 사람이 백두산 속에 있음을 잊어버린 것은 물속에 고기가 물을 잊어버린 것 같다." 라고 언급한 바 있다.
지금 우리가 부르고 있는 국가(國歌)의 가사는 아직도 확실한 작사자가 밝혀져 있지 않지만, 민족이 고난에 처하여 있을 때 누군가의 입에서 볼리어진 것이 지금까지 불려지고 있는 것이다. 곧 민족이 수난을 당하던 때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닿도록….'이라고 가사를 지은 것은 단순히 조국의 영원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우리의 민족혼을 잃지 말자고 피를 토하듯 외친 것이다. 백두산은 일찍이 그 명칭이 '불함(不咸)' 곧 신(神)의 산으로 일컬어온 것처럼 한결같이 우리 민족 누구에게나 신성시되어있는 점이 세계 어떤 산과도 다른 점이다. 그 실증으로 『북사)』와 『봉천통지(奉天通志))』에 예로부터 백두산에 오르는 사람은 신성한 백두산을 더럽힐 수 없다 하여 자신이 배설한 일체의 오물을 준비해간 그릇에 담아온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처럼 외경(畏敬)한 산은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또한 당나라 때 편찬된 『괄지지(括地志))』에는 백두산의 조수초목(鳥獸草木)은 모두 백색이라고 기록할 만큼 상서로운 산으로 추앙하였다. 또한 예로부터 백두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산에 오르기 전에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백두산 신령께 제사를 지냈다.
서명응의 『유백두산기』에 실려 있는 제문을 보면 "높다란 백두산은 우리나라의 진산으로 온 백성들이 우러러봅니다. 진작부터 전모를 근참하려고 벼르다가 이제야 왔으니, 이는 실로 하늘이 준 기회입니다. 찬 바람 찬 이슬 맞으며 갖은 고초를 겪고 왔습니다. 산신령께서는 이런 정성을 살피셔서 구름과 안개를 거두시어 마음대로 근참하게 하소서. 하늘에는 해와 별이 환하여 감추는게 없사온데, 산만이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하늘의 뜻을 어기면야 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백두산을 등정해 본 사람은 누구나 이 제문에 공감할 것이다. 백두산 일대에는 천변만화로 삽시간에 변모하는 가공할 날씨에 누구나 인간의 나약함을 긍정하고, 하늘에 의지하여 빌 수밖에 없음을 체험하게 된다. 한마디로 백두산은 우리 민족역사와 더불어 존재하였고, 우리 민족에게 수난의 역사 속에서도 불굴의 정신을 잃지 않도록 민족혼을 고취하였고, 언제나 백두산을 중심으로 화합 단결하고, 미래의 밝음으로 지향하는 우리 한민족의 내일을 있게 하였으며. 하늘과 조상을 받들어 모시는 신앙심을 낳게 하였다.
백두산 정상에 서면 저 멀리 요동벌판이 발 아래 엎드리면서 머리를 조아리고 천하가 부복(俯伏)하면서 나에게 복종하는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누구나 이곳에서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마음껏 느낄 수가 있다. 이같은 연유로 이 산은 우리 한민족들의 성산(聖山)이자 이곳을 토대로 살아왔던 여진족들의 성산이 되었고, 이 산의 기운을 받아서 여진족 출신인 청태조 누루하치가 청나라를 건국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정상에 서서 발 아래 엎드려 있는 만주벌판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하루 빨리 옛 환족의 고토를 수복하고, 김일성이가 6.25 전쟁 당시 중공군의 참전 댓가로 중국측에 할당(割當)하여 주였다는 백두산의 반쪽(현 중국측 경계지역)을 되찾아서 본래의 웅원(雄遠)하고 웅혼(雄渾)했던 백두산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註3, 백두산근참기 : 육당 최남선이 지은 백두산 기행문이다. 1926년 박한영과 함께 조선교육회에서 주최하는 백두산 일대의 박물탐사단에 참가한 뒤 쓴 것으로, 동아일보에 연재되었고 1927년 단행본으로 발행되었다.
(2) 조선조 이전의 백두산 遊山錄
고려시대 이전의 백두산 기행문은 찾아볼 수 없고, 1764년(영조 40)에 함경도의 실학파 선비인 박종(朴琮)이 직접 백두산을 탐승하여 순한문 기행으로 남긴 <백두산유록(白頭山遊錄)>이 처음이다. 이 유산록은 그의 유저(遺著)인 《당주집(鐺洲集)》속에 실려 있다. 그 내용이 사실적으로 매우 소상하게 기록되어, 200여년 전의 백두산의 실황을 살피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 1764년(영조 40) 여름, 5월 14일 경성군(鏡城郡)에 살던 박종이 자기 집을 떠나, 부령(富寧) · 무산(茂山) · 임강대(臨江臺) · 풍파(豊坡) · 천평(天坪) · 천동(泉洞)을 거쳐 23일에 최고봉에 오른 뒤 하산하여 6월 2일에 집에 돌아왔다. 18일이 걸렸고 비록 말을 이용하였으나, 왕복 1,322리를 다녀서 백두산을 탐승하였으니, 그 당시로서는 대단한 모험이었다. <백두산유록>의 내용에 의하면, 박종에 앞서 2년 전인 1762년 조영순(趙榮順)이라는 사람이 백두산을 등정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 여행기를 찾아볼 수 없음은 애석한 일이다. 또한 이 유록 중에, 홍계희(洪啓禧)가 이미 1742년에 어명을 받들어 갑산 · 무산으로 들어오면서 백두산을 편람한 기록이 있다고 하였다. 이밖에 영조 때 서명응(徐命膺)의 《보만재집(保晩齋集)》속에도 <유백두산기(遊白頭山記)>가 있다.
(3) 근래의 백두산 유산록
근래의 자료로는1927년에 간행된 육당 최남선의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가 있고, 1931년에 간행된 안재홍(安在鴻)의 <백두산등척기(白頭山登陟記)》가 있다. 두 저자가 모두 백두산을 직접 등반하면서 백두산의 실경을 매우 소상하게 적었을 뿐만 아니라, 백두산에 얽힌 전설과 역사적인 사실들을 문학적으로 표현하여 민족 정기를 고취하고자 노력하였다. 백두산에 대한 기행문학으로서는 최남선의 《백두산근참기》가 처음이 될 것이다.
(4) 외국인의 백두산 탐사기록
근래 외국인의 백두산에 대한 탐사기록으로는 우선 1900년에 러시아에서 간행된 《한국지(韓國誌)》를 들 수 있다. <한국의 지리> 속에 인용된 스트렐비츠키의 백두산 등정기에서는 "6일 동안 우리는 빽빽한 타이가를 통과하였다. 드디어 탄바이에서 60㎞ 떨어진 부르토파라고 불리는 자연경계선 뒤에서부터 숲은 듬성듬성해지기 시작하였고, 점차 그 도를 더하여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우리 앞에는 8~10㎞ 정도 떨어진 곳에 백두산의 거대한 모습이 드러났다. 화산은 넓은 기저 위에 홀로 우뚝 솟아 있었다. 그 기저는 커다란 그러나 완만히 상승되는 지반으로 형성되어 있었고, 산기슭에는 몇 개의 작은 둥그런 언덕들이 있었는데 그 언덕들은 주봉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대한 백두산과 비교하여 볼 때 크기가 매우 작기 때문에, 더욱 더 선명하게 백두산의 높이를 부각시켜 주었다.
우리들이 그곳에서 보기에 백두산은 바위가 많고 외떨어져 있는 산이었다. 백두산 기슭에서 약2,000피트 솟아 있었으며 평평한 책상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윗 부분이 약간 잘려져 있었다. 우리가 있었던 지점에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분명 화구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힘들지 않았다. 대체로 산의 빛깔은 회색빛이 나는 희뿌연 색이었으나 햇빛이 미치지 않은 깊은 골짜기에는 벌써 눈이 쌓여 있어서 멀리서 보기에는 옆면의 경사를 따라 가늘고 밝은 하얀 산들이 미끄러져 내리는 것 같았다."고 하여 백두산의 정경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또 일본의 백두산 탐구등행대 대장인 시로야마(城山正三)의 《비경백두산천지(祕境白頭山天池)》라는 탐행기록이 1970년 6월, 동경에서 발행되었다.
이 책의 내용을 보면, 실제로 백두산을 등반한 것은 제1차 탐행이 1942년 여름이었고, 제2차 탐행이 1943년 여름이었다. 제1차에는 총 75명의 대원으로 혜산(惠山)에서 출발하였고, 제2차에는 총 85명의 대원으로 주대(主隊)는 무산에서 출발하고, 지대(支隊)는 혜산에서 출발하여 신무성(神武城)에서 합류하여 백두산에 등반하였다. 이 책의 제1부는 해설과 탐행기록, 제2부는 사진, 부록에는 대만 · 천도(千島: 쿠릴열도) · 캄차카의 산들로 나누어 편찬되어 있다. 비록 일본제국주의 참략자들이 영토확장의 목적으로 탐행한 기록이지만, 광복 전에 백두산을 탐사하여 상세하게 기록하여 놓았기 때문에 백두산 연구에 참고자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산의 높이, 폭포의 높이 등 부정확한 기록이 발견되며, 기행문학으로서의 가치가 있다고는 볼 수 없다. 1982년 북경에서 간행한 정흥왕(丁興旺)의 《백두산천지》는 백두산에 대하여 가장 과학적으로 조사, 연구한 기록으로서 백두산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5) 백두산 항찰기행록
백두산에 대한 특이한 기행문으로는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기자였던 이관구(李寬求)가 비행기로 관찰한 백두산의 비경을 <백두산탐험비행기(白頭山探險飛行記)>라는 제목으로 《조선중앙일보》에 1935년 10월 11일부터 그해 11월 10일까지 연재하였다. 비록 이관구의 표현대로 주마간산도 아닌 비행간산(飛行看山)이지만, 이기자의 유려한 필치로 과거 어떤 백두산 기행보다도 기행문학으로서 손꼽을 만한 작품이다. 역시 시 속에 나타난 백두산을 모두 열거할 수는 없으나 몇 작품만 보면 고려시대 이색(字穡)의 '송동북면한만호득월자(送東北面韓萬戶得月字)' 라는 시제 속에 "솟아오른 장백산과 험준한 철령관이 수천리에 가로놓여 있으니 하늘이 만든 험한 땅이라 가히 넘나들 수 없다…(長白山穹窿鐵嶺關峰山岏橫亘幾千里天險不可越‥‥‥"라는 한시가 있다.
(6) 기티 백두산 관련 기록들
생략
(7) 백두산 관련 전설
백두산은 민족 발상의 성지로서 이에 대한 전설도 적지 않다. 백두산에 대한 전설은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는 탓이겠지만, 특히 만주에 사는 우리 동포들에게 많이 전래하고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사는 우리 동포들에게서 수집하여 발간한 전설고사집 속에 백두산에 관한 전설로 <백두산의 목동과 선녀> · <백두산의 사냥군과 호랑이> · <오늘날 왜 호랑이가 보기드문가? > · <백두산의 화마> 등이 있다. 이중에서도 <백두산의 목동과 선녀>는 우리 민족의 발상과 재미있게 연관을 시켰으며, 우리 민족이 백두산을 마치 신앙처럼 숭상하고 좋아하는 이유를 잘 말해주고 있다. 백두산은 단군의 개국신화 외에도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탄생설화와 관계가 있다. 이 설화의 줄거리는 왕건의 육대조 호경이 백두산 기슭에 살고 있었는데, 당시 유명한 승려 도선(道詵)을 만나 성자를 낳을 집터를 얻음으로써 왕건을 낳고, 그 성자가 자라서 고려의 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백두산 근처에 단군의 자손인 우리 민족을 수시로 괴롭히던 이민족의 집단이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모래비가 내리어 그 지역을 덮어 버렸다. 그리하여 지금도 백두산 밑 무산땅 최가령 동쪽에 표면은 흙이지만, 파보면 5~6척이나 모래가 덮여 있고 그 속에는 또 흙이 있다는 설화도 있다.
(8) 백두산과 청태조 누루하치의 설화
백두산은 우리 민족뿐 아니라, 북방의 여러 민족의 발상설화도 얽혀 있다. 청나라에서는 자기들의 조상인 애친각라(愛親覺羅)의 발상지라 하여 숭상하여, 1677년에는 대신 각라식목눌(覺羅式穆訥)을 파견하여 백두산을 탐사하였으며, 1684년에는 장백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옹정제(雍正帝) 이후는 길림장군(吉林將軍)의 관리하에 춘추로 중월(仲月)에 제사를 지냈다.
《개국방략(開國方略)》이라는 책에 청제(淸帝)의 탄생설화가 있다. 곧 백두산에 포륵호리지(布勒湖哩池)라는 천지가 있는데, 선녀 세 자매가 이곳에 내려와 목욕을 하고 있을 때 신작(神鵲)이 붉은 열매를 물고 와서 셋째 선녀의 우의(羽衣)위에 놓았다. 셋째 선녀는 이 열매를 먹고 잉태하여 한 아들을 낳았다. 이 아이의 이름을 포고리옹순(布庫哩雍順), 성을 애친각라라 하였으니, 곧 청제실(淸帝室)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는 다른 형태로, 두만강변에 지암이라는 바위근처에 이좌수가 살았는데, 지암 물가에 사는 수달의 일종인 노라치라는 짐승이 좌수의 딸과 관계를 하여 아이를 낳았다. 이 아이가 커서 청나라 태조인 누르하치(奴兒哈赤)가 되었다는 설화도 있다. 백두산은 높이 2,155m의 고원에, 곧 이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바다처럼 깊고도 넓은 호수로서 천지를 가지고 있으며, 주기적으로 거듭 폭발한 화산의 분화구로 만들어진 산세 또한 기승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 발상의 성지이기 때문에 그 실경 자체가 미술인 것이다.
그러므로 근대의 많은 화가들이 백두산의 신비를 화폭에 담았다.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서는 동양화가 김기창(金基昶) · 민경찬(閔庚燦) 등의 대작이 있다. 사진작품으로서는 진태하가 1985년 3월에 《조선일보》에 보도하면서 전국에 백두산의 천연색사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백두산에 대한 음악은 우리의 애국가(愛國歌)로부터 적지않은 노래가 있다. 이 가운데 <조선유람가>는 1947년에 최남선이 작사하고 김영환이 작곡한 것으로 당시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에서도 애창하였던 노래다. "대지의 거룩한 힘 기둥이 되어/한울을 버틔고선 백두의 성산/맹호의 수파람이 울리는 거기/성인이 나셨고나 영웅 길럿네/…." 박영만이 작사하고, 한유한이 작곡한 <압록강 행진곡>은 제목과는 달리 주로 백두산을 노래하였다. 또한 1985년 진태하가 작사하고 황문평이 작곡한 <아! 백두산>이라는 노래가 있다. "흥익인간 터잡은 백두산 이지구의 정수리/단군왕검 태나신 천지연 오색으로 넘치고/바위마다 새겨진 배달의 민족역사 드높다/아 아 민족의 성역 백두산에 모여서/남북의 아들딸아 민족의 정기를 높이자/…."
3, 새로 찾은 천하대명당(天下大明堂)
백두(白頭)에서 길을 떠난 대간룡(大幹龍)이 금강산 12,000봉을 솟구친 후 남행(南行)하다가 고성군 간성면 향로봉(香爐峰, 1296m)을 기봉(起峰)시킨 후 토성면 신선대(神仙臺)에서 동해를 바라보면서 다시 한 번 더 응축(凝蓄) 기봉(起峰)시키니 바로 금강산 신선대(金剛山 神仙臺)다. 마치 신선이 도포자락을 휘날리면서 구름을 타고 표표히 날아가는 듯한 이곳에 이 거대간 대간룡의 웅휘한 기(氣)를 응축시킨 곳이 있으니 바로 동해를 바라보면서 거대한 후광(後光) 광배(光背)과 같은 모습을 한 공기돌처럼 생긴 바위와 그 밑단에 조성되어 있는 큰 마당 바위로 가히 운중선좌형(雲中仙坐形)의 천하제일명당이며, 도(道)를 닦기에 더 없이 좋은 자리다.
1150年 前 唐나라 휘종의 國師로 '감룡경(撼龍經)', '의룡경(疑龍經)', '청낭오어(靑囊奧語)', ' 천옥경(天玉經)', '옥척경(玉尺經)' 등을 지은 당대 풍수대가로 오느날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보편적인 풍수향법인 '88향법(向法)'의 연원이 된다는 '十四進神水法'과 '十退神法'을 주창(註4, 十二倒杖法)한 구빈(救貧, 註5) 楊筠松이 서산 紫微垣을 왔다 간 후 "곤륜 동출맥(東出脈)의 한 가지(一枝)가 동(東)쪽으로 가서(出脈) 노추산을 만들고 72기봉(起峰)하여 그 기운(氣運)을 받아 공자(孔子)와 그의 72제자를 낳았고, 서쪽으로 출맥하여 감람산을 만들고 10기봉(起峰)하여 그 기운(氣運)을 받아 야소(耶蘇: 예수)와 그의 10대 제자를 낳았으며, 서남방(西南方)으로 출맥하여 영취산을 만들고 499기봉(起峰)하여 그 기운(氣運)을 받아 석가모니(釋迦牟尼)와 그의 499명 제자(소위 500羅漢)를 낳았다. 이 곤륜산에서 동북(東北) 간향(艮向)으로 출맥(出脈)한 용맥(龍脈)이 장백산(長白山 즉 우리의 白頭山)를 솟아올린 후 남쪽으로 행룡(行龍)하여 금강산 12,000봉을 기봉(起峰)시켰는데, 이 기운(氣運)을 받아서 후천 세계에 해동(海東)에서 12,000 명의 도덕군자(道德君子)가 나오리라."라고 한 바로 그자리다.
*註4, 十二倒杖法: 현재 우리나라에서 풍수향법으로 주로 사용하는 風水理法인 88向葬法은 양균송의 소위 십이도장법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註5, 救貧이란 호는 양균송이 이같은 풍수이법을 사용해서 가난한 자들을 많이 구제해 주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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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 結跏趺坐한체 앉으면 정수리 百會穴이 저절로 열리면서 백두대간룡의 웅휘하면서도 굳건하고도 강건한 기운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온 몸을 周天한 후 丹田으로 내려가 蓄氣된다. 때문에 온 몸이 부르르 떨리면서 순식간에 宇我一體가 되면서 宇宙의 기운과 合一이 일어난다. 우리나라에서 이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곳은 단 세군데 밖에 없다. 즉 五臺山 中臺 寂滅寶宮과 雪嶽山 鳳頂庵, 그리고 바로 이곳 金剛山 神仙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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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불교가 조선조 500년의 그 기나긴 抑佛崇儒政策의 暗黑期에서도 끝끝내 사라지지 않고 현재와 같이 명맥을 유지하면서 번성할 수있었던 것은 모두 佛祖의 뼈 즉 眞身舍利를 한반도 백두대간룡의 氣가 모두 응축된 이같은 천하명당에 묻었기 때문이다.
해마다 매년 정월 초하루에는 北風寒雪의 매섭고도 세찬 칼바람을 맞아가면서도 신년 해돋이를 보기 위해서 이곳을 올랐지만, 여태까지 바로 옆에 두고도 이 곳을 찾지 못했는데, 참으로 우연하게 찾게 되었으니 奇緣도 이런 奇緣이 따로 없다. 이는 마치 심마니들이 자기 발 바로 앞에 眞種蔘이 있는지도 모른체 온 산속을 헤매다가 문득 바로 발 아래서 진종삼을 본 것과 같은 희열과 기분이리라.
明堂의 기본이 藏風得水이기에 이곳은 매년 겨울이면 북서쪽에서 불어오는 北風寒雪의 매섭고도 세찬 편서풍의 칼바람을 後光光背처럼 빛나는 둥근 바위가 막아주고 白頭에서 흘러오는 대간룡의 웅휘한 氣를 갈무리해서 凝聚시킨 곳이기에 춥지 않고 따뜻하다. 해서 진즉에 알았으면, 그동안 北風寒雪의 매섭고 혹독한 칼바람 때문에 新年 日出을 제대로 즐기지도 못한체 번개불에 콩구워먹듯이 떠오르는 해만 본 후 후딱 내려가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이리라.
하지만, 이제 때가 되어 因緣이 다았으니 이 또한 자연의 案配가 아니겠는가.
이 땅은 오래 道를 닦은 修行者이거나, 이제 막 道에 入門하는 初步者이거나 가리지 않고, 이들 모두에게 煉丹하기 좋은 곳으로 참으로 공부하기 좋은 곳이며 速成할 수 있는 천하대명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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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소중한 내용 감사 합니다
정독하여 읽어봐도 머리에 각인 시키지 못하엿네요
두고 두고 읽어 봐야 겟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 드립니다
풍수를 모르는 저에게는 어려운 글이지만 의미있는 글 인 거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풍요로운 한가위 되세요
덕분에 배움니다
추석명절 잘 보내시고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풍요로운 한가위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