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news.naver.com%2Fimage%2F227%2F2008%2F07%2F08%2F185559_PG1_101.jpg) |
전성기의 이대진은 당시 가장 위력적인 직구를 던졌다. 하지만 어깨 부상으로 2군으로 내려갔다. 부상은 이대진의 선수 경력을 끝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시 투수 이대진이 돌아왔다.(사진 김수홍) |
통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직구를 던질 때 공이 손에서 자연스레 빠져나갔다. 힘들이지 않고 공을 던지는 느낌이었다. 마음속에서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어. 다시 강속구를 던질 수 있어. 다시 한번 거물 투수가 될 수 있어’라는 속삭임이 들려 왔다. 그러나 머리에서는 경보음이 울렸다. 나는 지난 4년 동안 14승밖에 거두지 못한 투수다. 그래서 지금 너클볼에 매달리고 있다. 아마 앞으로 투구의 90%는 너클볼이 될 것이다. 그나마 너클볼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뉴저지에서 닭 장사나 하고 있을 것이다. 빠른 공이 잘 나간다고? 바보 같으니, 기억해, 넌 늙어 빠진 너클볼 투수야.” -짐 부튼, “아직 이어지고 있는 자신과의 오랜 싸움. 이대진은 새롭게 구상하는 투구법에 대해 말했다. 전성기에 이대진은 지나칠 정도로 어깨의 힘에 의존하는 피칭을 했다. 지금은 엄지발가락에서 무릎, 엉덩이, 허리, 어깨, 팔꿈치, 손목으로 이어지는 회전을 강조한다. 변화구와 체인지업으로 타자를 아웃시키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한다. 과거의 닥터 K 이대진은 아마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투수 이대진’은 돌아올 것이다. 그는 ‘닥터K 이대진’의 환영에 사로잡히지도 도망치지도 않았다.” - SPORTS2.0 10호 -
“요즘 애들은 잘 모르지.”
이대진(34, KIA)의 전성기 위력에 대한 질문에 한화 유격수 김민재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김민재는 1991년 롯데에서 데뷔해 올해 18번째 시즌을 맞은 베테랑이다.
“직구가 어느 정도였냐면, 쳐도 배트가 밀렸지. 돌덩어리였어. 완전히. 그렇게 묵직한 직구를 던지는 투수는 지금 없어. 파워커브도 일품이었고 가끔씩 던지던 포크볼도 기가 막혔지.”
현역 투수들 가운데 가장 위력적인 직구를 던지는 투수는 삼성 오승환이다. 김민재는 “
오승환의 직구도 전성기 이대진에게는 못 미친다. 게다가 승환이는 마무리 아닌가. 이대진은 선발 투수로 경기 내내 무거운 강속구를 뿌렸다”고 회상했다.
어느 경기에서인가 김민재는 이대진의 몸쪽 직구를 때리다 배트가 ‘먹혔다’는 느낌을 받았다. ‘먹혔다’는 야구인들이 스윙 타이밍이 늦어 공이 배트를 밀어낼 때 쓰는 표현이다. 타격을 한 뒤 장갑을 벗자 김민재의 오른손 바닥에는 시커멓게 멍이 들어있었다.
김민재는 “한 달 동안 손바닥에 멍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타격 훈련용 철망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6월 25일 청주구장. 이날 김민재의 소속팀 한화는 KIA와 시즌 14차전을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3루 쪽 원정 구단 더그아웃에는 이대진이 원정팀 훈련을 위해 몸을 풀려는 참이었다. 이대진은 다음날 KIA의 선발 투수였다.
파워 피처 이대진이대진은 6월 15일 문학구장 SK전에서 2⅓이닝 동안 홈런 두 개를 얻어맞으며 6실점했다. 이 경기 뒤 이대진은 2군으로 내려갔다. 어깨가 아팠기 때문이다.
한화 장종훈 타격 코치는 이대진을 “한국프로야구의 모든 기록을 깰 수 있었던 투수”로 평가한다. 어깨는 이대진의 선수 경력을 끝장낼 뻔한 부상이 찾아온 곳이다.
김민재가 프로 3번째 시즌이던 1993년 광주진흥고를 졸업한 신인 이대진이 해태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 데뷔했다.
그해 5월 26일 광주구장에서 프로에 데뷔한 뒤 두 번째 선발 등판이자 롯데전에 처음 나섰다. 겁 없는 19살 투수는 9이닝 동안 삼진 7개를 잡아 내며 프로 1호 완투승을 따 냈다.
이대진이 입단하기 전에도 해태 선발진은 최강이었다. 선동열이 불펜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쌍두마차 격인 조계현과 이강철에 왼손 김정수, 오른손 문희수 신동수 송유석 등 10승급 투수만 여섯 명이었다. 신인 이대진은 뛰어난 선배들을 제치고 첫해부터 10승 투수가 됐다.
이듬해에는 7승으로 다소 부진했지만 1995년에는 14승을 거두며 탈삼진 타이틀(163개)까지 거머쥐었다.
1996년에는 16승, 1997년에는 17승이었다. 1996년 이대진의 피안타율 2할1리는 100이닝 이상 던진 역대 선발 투수 가운데 아홉 번째로 뛰어난 성적이다.
1990년대 이후로 한정한다면 그해 이대진보다 낮은 피안타율을 기록한 투수는
선동열(1990,1991년), 이상훈(1995년), 정민철(1994년) 밖에 없다. 선배 이종범은 “그때쯤부터 선수들이 이대진을 에이스로 여기기 시작했다. 해태 에이스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1998년 5월 14일에는 프로야구 사상 유일무이한 대기록을 세웠다. 상대는 그해 한국시리즈 우승팀이자 정규시즌 81승을 기록한 현대 유니콘스였다. 이대진은 1회말 2사 2루에서 최고의 외국인선수로 꼽히던 스캇 쿨바를 쳐다보는 삼진으로 더그아웃으로 돌려보냈다.
2회말에는 김경기, 박경완, 이명수가 공 13개로 삼진으로 물러났고 3회말에는 장정석, 박진만, 전준호가 삼진의 제물이 됐다. 4회말 2번 김광림은 파울 세 개를 쳐 내며 끈질기게 달라붙었지만 볼카운트 2-2에서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다.
3번 이숭용은 초구 볼을 골랐지만 다음 공 세 개에 역시 삼진이었다. 이숭용의 삼진으로 이대진은 선배 선동열이 두 차례 세운 9타자 연속 탈삼진 기록과 타이를 이뤘다.
다음 타자 쿨바가 국내 프로야구 연속 탈삼진 기록을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과 동료들의 삼진 행렬에 화가 나 있는 건 분명했다.
초구 헛스윙, 2구 볼, 3구 헛스윙. 쿨바는 이대진의 4구째에 다시 배트를 휘둘렀지만 공은 해태 포수 최해식의 미트에 박혔다.
최근 들어 삼진을 많이 잡는 선발 투수가 줄어드는 추세다. 이대진의 10타자 연속 탈삼진 기록은 당분간 깨지지 않을 것이다.
이날 이대진에게 3타수 무안타로 물러난 이명수 전 현대 코치는 “공이 워낙 좋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배트에 제대로 맞추기 어려웠다”고 기억했다.
당시를 주름잡았던 오른손 선발 투수로는 해태 조계현, 한화 정민철, 현대 정민태 등이 있다. 이 전 코치는 “공이 무거운 데다 워낙 빨라 타자 앞에서 떠오르는 느낌이었다”며 직구 위력에서는 이대진을 첫 손가락에 꼽았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news.naver.com%2Fimage%2F227%2F2008%2F07%2F08%2F185559_PG1_102.jpg) |
부상에서 재기한 이대진은 스스로 아직도 성장 중이라고 말한다.(사진 김수홍) |
그러나 이때 이대진의 어깨는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전년도 IMF 외환위기 사태가 터진 뒤 관중 급락을 예상한 한국야구위원회(KBO)는 1998년 시즌을 앞두고 잠실구장에서 슈퍼토너먼트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에서 해태는 LG, 롯데를 꺾은 뒤 결승전에서 OB마저 2-1로 누르고 우승했다. 이 대회에서 이대진은 처음으로 어깨에 이상을 느꼈다. 병원을 여러 차례 찾았지만 뚜렷한 증상이 나오지 않았다.
이대진은 통증을 참아가며 그해 연속 타자 탈삼진 기록과 함께 12승을 따 냈다. 그러나 통증은 점점 심해졌다. 결국 1999년 1경기 출전에 그쳤다.
이듬해에는 주로 구원투수로 37경기에 등판하며 재기하는 듯 했지만 2001년 2월 미국 LA에 있는 조브클리닉에서 충돌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충돌증후군이란 어깨 회전근육이 뼈와 부딪히는 증상이다. 처음에는 근육을 싸고 있는 점막이 상해 통증이 온다. 이 상태에서 무리하게 운동을 계속하면 회전근 가운데 팔을 들어 올리는 일을 하는 극상건이 상한다.
어깨에 힘이 많이 들어가는 ‘엎어 던지는’ 투구를 할 때 나타나는 증상이다. 처음에는 가벼운 어깨 결림이나 어깨에서 소리가 나는 듯하다가 심하면 근육 파열로 이어진다.
이 증상을 막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발로 고무줄을 밟은 채 손으로 들어 올리는 튜빙이나 누운 자세로 덤벨을 들어 올리며 근상근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대진은 요즘 매일 이런 훈련을 하고 있다. 그러나 1990년대까지만 해도 트레이닝 기법은 초보 단계였다. 어깨가 아프면 뜨거운 물속에 들어가는 게 고작이었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여섯 시즌 동안 이대진은 1군에서 8경기, 2군에서 10경기에 등판하는 데 그쳤다.
그 기간 세 차례의 수술과 지루한 재활 운동이 이어졌다. KIA 장세홍 트레이너는 재활이 길었던 이유에 대해 “한 군데가 아니라 연골, 근육막, 회전근 등 전체적으로 어깨가 닳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친 나머지 2002년에는 타자로 전향해 봤다. 그러나 타석은 그가 설 곳이 아니었다.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스의 조 지라르디 감독은 올해 6월 젊은 투수 조바 체임벌린을 선발로 마운드에 올리며 투구 수를 단계적으로 끌어올렸다. 지라르디 감독은 “야구 역사는 스물두서너 살에 선발로 던지다 쓸쓸히 사라져 간 투수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대진은 젊은 시절 혹사에 대해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내가 원해서 던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때는 지라르디와 같은 생각을 한 감독들이 적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대진은 23살까지 770이닝을 던졌고 24살 때 처음으로 어깨 통증을 느꼈다.
변화구 투수 이대진6월 25일 현재 이대진은 방어율 4.55에 2승8패를 기록하고 있다. 삼성 윤성환, LG 정찬헌과 함께 최다 패전 부문 1위다. 한계 투구수가 90개 정도라 많은 이닝을 던지기도 어렵다.
기록으로 볼 때 이대진은 평균 이하의 선발 투수다. 그러나 이종범은 다르게 생각한다. 해태 시절 이종범은 유격수로 상대 타자들이 마운드에 선 투수를 어떻게 상대하는지 지켜봤다. 전성기 이대진은 “한눈에 타자들이 쩔쩔매는 게 보이는” 투수였다. 지금은 어떨까. “그때 공과는 다르지만 위기를 풀어 가는 능력이나 야수들에게 주는 안정감은 젊은 투수들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게 이종범의 말이다.
한 경기 한 경기를 따져 보면 이대진의 투구 내용은 나쁘지 않다. 11차례 등판 가운데 아홉 번 3자책점 이하 투구를 했다.
선발 투수로서 자기 임무는 해 내고 있다. 방어율은 10번째 등판 때까지는 3.74로 좋았다. 갑자기 방어율이 뛰어오른 건 어깨에 통증을 느낀 6월 15일 SK전에서 2⅓이닝 6실점으로 무너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대진은 선발 등판 평균 5.1이닝 밖에 던지지 못하는 투수다. 그러나 불펜의 중요성이 커진 최근 프로야구에서는 많은 이닝을 던지는 투수가 드물다.
올 시즌 선발 등판 평균 7이닝을 넘긴 투수는 롯데 손민한 뿐이다. 6이닝을 넘긴 투수는 손민한을 포함해 6명밖에 없다. 이대진의 5.1이닝은 SK, 두산, 삼성, LG의 팀 평균보다 길다.
2008년 현재 이대진은 더 이상 시속 153km를 던지는 강속구 투수가 아니다. 청주 경기 전까지 10경기 선발 등판에서 이대진의 직구 평균 스피드는 KIA의 스피드건에 시속 133~134km로 측정됐다.
시속 145km를 던진 날도 있다. 5월 1일 잠실 두산전이었다. 그러나 10경기 가운데 최고구속이 140km를 넘긴 경기는 세 번 뿐이었다.
직구의 비율도 줄어들었다. 전성기 이대진은 전체 투구의 60~70%가 강력한 직구였다. 올 시즌 직구 평균 비율은 30.3%다. 이제 이대진은 변화구 투수다. 커브와 슬라이더를 직구보다 많이 던진다.
그보다는 포크볼과 투심패스트볼이 더 많다. 커브는 전성기의 파워커브와는 달리 느리고 낙차가 크다. 포크볼은 1990년대에는 거의 던지지 않았던 구종이다. 투심패스트볼은 2002년에야 처음 익혔다.
LG 원정 기록원인 임승규 차장은 청주 3연전 동안 두 팀 선수들의 플레이를 지켜봤다. 임차장은 이대진의 공에 대해 “같은 변화구라도 속도와 각도를 달리 해 던진다. 타자로서는 ‘이게 무슨 공이야’라고 생각하게 된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변화구만으로는 타자와 승부할 수 없다. 임차장은 “이대진은 삼성 이상목과 비슷하다. 변화구는 뛰어나다. 그러나 가끔 직구를 던질 수 있다는 걸 보여 주지 않으면 안 된다. 바깥쪽 변화구를 집중적으로 노리면 당할 재간이 없다”고 말했다.
강속구 투수들은 몸쪽으로 공을 붙여 타자를 물러서게 한 뒤 바깥쪽 코스를 차지할 수 있다. 시속 134km짜리 직구를 던지는 이대진은 어떨까.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news.naver.com%2Fimage%2F227%2F2008%2F07%2F08%2F185559_PG1_103.jpg) |
(SPORTS2.0) |
김민재의 말에 따르면 ‘요즘 애들’에 속하는 한화 김태완은 전성기 이대진이 어느 정도 투수였는지 잘 모른다.
김태완은 “이대진이 오승환 같은 직구를 던졌다”는 말에 질린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면서 “지금 직구도 치기 어렵다”고 답했다. 변화구를 노리는 타이밍에 직구가 몸쪽으로 들어온다는 말이다. 김태완은 “지금 직구는 스피드가 느리지만 치기 어렵긴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투 스트라이크 투 볼은 투수가 타자와 승부를 걸어야 할 볼카운트다. 과거 이대진은 이 볼카운트에서 대개 몸쪽으로 붙는 강속구를 던졌다.
지금의 이대진도 이 카운트에서 몸쪽 직구를 던지겠다고 한다. 구속은 줄었지만 그는 언제, 어떻게, 무슨 공 다음에 자기의 직구를 던져야 하는지 알고 있다.
강속구 투수가 변화구 투수로 변신하는 게 드문 일은 아니다. 투수는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기교파 투수로 변하려고 한다.
SK 김상진 투수 코치도 그랬다. 김코치는 1991년 OB 베어스에서 데뷔한 뒤 고졸 신인으로 5년 연속 10승 이상을 기록했다. OB에서 8시즌 동안 통산 승수는 88승이다.
당시 김상진은 가장 위력적인 직구를 던지는 오른손 투수 랭킹에서 늘 다섯 손가락 안에 꼽혔다. 그러나 1999년 삼성으로 이적한 뒤 직구의 위력이 떨어졌다. 당시 나이는 29살로 요즘으로 치면 한창이다.
그러나 젊은 시절 지나치게 많은 투구가 문제였다. 김코치는 변화구 투수로 다섯 시즌을 더 뛰며 34승을 더했다.
김코치는 “투수에게 변화는 순리다. 나이가 들면 스피드가 줄고 공의 회전수가 떨어진다”며 “물론 이대진은 부상에 따른 공백이라는 점에서 약간 다르다. 하지만 어차피 겪어야 할 과정”이라고 말했다.
요즘 이대진은 강속구도 눈에 번쩍 띄는 커브도 없다. 기교파 투수지만 컨트롤도 기막히다고는 볼 수 없다.
스트라이크존에 공을 찌르면 됐던 예전과 공 하나를 스트라이크존 안에 넣었다 빼야 하는 지금은 요구되는 컨트롤의 수준이 다르다. 그러나 자신감은 여전하다.
김코치는 “이대진은 요즘도 필요할 때는 과감하게 몸쪽으로 승부한다. 투구의 기본이지만 여기에 능숙하지 않은 투수도 많다. 과거 최고의 투수였기에 변신 과정에서 더 잘 적응하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한화
장종훈 코치는 당대의 대타자와 대형 투수로 이대진을 여러 차례 상대했다. 장코치는 “야구사에 한 획을 그을 투수가 부상을 당해 안타깝다”며 “하지만 프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결국 변화해야 한다. 지금 이대진이 그렇다”고 말했다.
95승, 그리고 더다음날인 6월 26일 한화와의 청주 3연전 2차전에서 이대진은 11일 만에 선발로 마운드에 올랐다.
오랫동안 어깨가 아팠던 투수 그리고 다시 어깨에 통증이 왔던 투수다. 그러나 이대진은 두려움이 없었다. 공 하나하나에는 전술이 있었고 자신감이 있었다.
0-0으로 맞선 4회말 한화 공격은 3번 더그 클락, 4번 김태균, 5번 이범호, 6번 김태완으로 이어졌다.
선취점을 막아야 할 상황에서 8개 구단 최고의 슬러거들을 상대해야 했다. 게다가 청주구장은 펜스거리가 짧다. 하루 전에 이대진은 “상대가 누구든 구장이 어디든 관계없다. 내 공을 던지고 타이밍을 빼앗는 데 집중하겠다”고 했다.
3번 클락을 2구에 좌익수 플라이로 잡은 이대진은 4번 김태균을 맞이했다. 볼카운트 2-1에서 이대진은 변화구 볼을 두 개 던졌다. 볼카운트 2-3에서 7구째에 김태균의 배트가 돌았다.
직구를 예상한 듯한 빠른 스윙이었다. 그러나 공은 몸쪽으로 붙는 커브였고 타구는 1루수 플라이가 됐다.
이날 경기를 중계한 이효봉 〈KBSn〉 해설위원은 “투 스트라이크 스리 볼에서 김태균에게 몸쪽으로 커브를 붙이는 투수는 처음 봤다”고 말했다.
투 스트라이크 뒤 타자들은 대개 직구에 타이밍을 맞춘다. 이때 커브가 들어오면 움찔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칫 커브가 가운데로 몰리면 슬러거들에게는 홈런을 맞기 딱 좋은 공이 된다.
웬만한 자신감이 없다면 던지기 어렵다. 이위원은 “이대진이 기교파 투수로 완벽하게 변신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한 경기”라며 “아주 재미있는 투구였다”고 평했다.
5번 이범호는 초구에 스윙을 했지만 유격수 직선타로 물러났다. 변화구를 잘 받아쳤지만 가장 안타를 치기 어려운 바깥쪽 낮은 코스로 들어가는 공이었다.
KIA는 5회초 두 점을 내며 2-0 리드를 잡았다. 이어진 5회말 이대진은 선두 타자 김태완과 다시 볼카운트 2-3으로 접전을 펼쳤다.
7구째 낮은 직구에 김태완의 배트는 허공을 갈랐다. 스윙이 늦었다. 변화구 타이밍에 직구였다. 김태완은 ‘이대진은 변화구 타이밍에 직구를 던지는 투수’라는 자기만의 스카우팅 리포트를 갖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이대진이 이겼다.
강속구 투수가 기교파로 변신하는 게 드문 일은 아니다. 그러나 쉬운 일도 아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news.naver.com%2Fimage%2F227%2F2008%2F07%2F08%2F185559_PG1_104.jpg) |
해태의 이대진은 강속구 투수였다. 그러나 KIA의 이대진은 기교파 투수다.(사진 제공=KIA 타이거즈) |
서른세 살에 체인지업을 익혀 그 뒤 100승을 더 올린 송진우와 지금은 모든 공을 체인지업으로 던진다는 정민철 정도가 성공 사례다.
게다가 이대진은 어깨 부상 전력에 대한 부담도 있다. 2005, 2006년 재기에 성공한 문동환은 지난해 허리 부상에 다시 발목을 잡혔다.
재활 훈련에 매달리던 시절 이대진의 목표는 마운드에 올라 공을 던지는 것이었다. 이제 목표는 더 잘 던지는 것이다. 그는 승리를 원한다. 그리고 승리를 따 내는 방법을 찾았다.
이효봉 위원은 “기교파 투수로 성공적으로 변신하기 위해서는 노력과 근성 외에 투구 밸런스가 중요하다. 그런데 이대진은 요즘 하체 밸런스가 좋다”고 평가했다.
스피드를 앞세웠던 투수가 컨트롤과 로케이션을 중요하게 여기는 투구폼에 적응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대진은 “지난해에는 더 강한 직구를 던지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나이를 생각하지 못했다. 이제는 스피드에 대한 집착을 버렸다”고 말했다.
많은 팬은 ‘닥터 K 이대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닥터 K’의 환영에서 가장 자유로운 이가 바로 이대진이다.
그는 지금의 공과 투구폼이 자연스럽다고 말한다. 34살 이대진은 “아직도 성장하고 있는 중”이라고 믿는다. 6월 26일 경기로 이대진은 프로 통산 95승째를 기록했다.
부상에서 재기한 선수들KIA 이대진(34)은 2000년 어깨 수술을 했다. 투수에겐 전성기인 26살 때였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수술은 2001, 2004년에도 이어졌다. 재활에는 7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길고 지루한 과정이었다.
이대진은 20대 초반 강속구를 주무기로 하는 투수였다. 삼진왕을 1995, 1998년 두 차례나 차지한 것으로 전성기의 위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잦은 수술은 그의 강속구를 빼앗아 갔다.
재활을 거친 30대의 이대진은 과거와 전혀 다른 선수가 됐다. 최근에는 직구 평균구속이 133~134km에 그치고 있다. 스스로도 “공의 위력이 떨어지다 보니 제구력과 완급 조절에 힘쓴다”고 말한다. 강속구 없이도 승부하는 법을 깨닫고 있다.
‘불사조’ 박철순(52)은 재기와 떼어놓을 수 없는 선수다. 프로 원년인 1982년 두산 베어스의 전신인 OB에서 24승4패 방어율 1.84의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4월 10일 전주 해태전을 시작으로 9월 18일 대전 롯데전까지 무패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이때 세운 22연승은 아직까지 한국프로야구의 대기록으로 남아 있다.
박철순은 고질적인 허리 통증과 아킬레스건 부상을 이겨 내고 40살까지 선수생활을 했다. 39살이던 1995년에는 9승으로 원년 이후 가장 많은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롯데의 베테랑 투수 염종석(35)은 이대진과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염종석은 팔꿈치 수술을 세 차례 했다. 긴 공백기는 없었다. 대신 많은 이닝은 던질 수 없는 투수가 됐다.
2006년까지는 매 시즌 20번가량 선발 등판을 하면서 꾸준한 활약을 했다. 그러나 지난해 14번 선발 등판에서 방어율 4.94로 부진했다. 투구수가 100개를 넘은 경기가 3차례 있었지만 경기당 평균 투구수는 82개밖에 되지 않았다.
SK 최상덕(37)도 팔꿈치 부상을 극복한 선수다. 1994년 태평양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 데뷔해 그해 13승7패 방어율 2.51의 수준급 투구를 했다.
그해 태평양은 최상덕을 비롯해 김홍집과 최창호가 12승, 안병원이 11승을 거두며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프로 첫해 한국시리즈에도 등판하면서 무리를 한 최상덕은 이듬해 팔꿈치가 좋지 않아 부진했다.
1996년 해태로 팀을 옮긴 뒤 그해 9월 미국 LA에서 팔꿈치에 칼을 댔다. 수술 결과가 좋아 회복은 빨랐지만 공은 예전 같지 않았다.
최상덕은 2000년이 돼서야 12승을 거두며 6년 만에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했다. 2004년 이후에는 잦은 부상과 떨어진 구위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롯데 이용훈(31)은 불과 얼마 전까지 만해도 재활에 매달리고 있었다. 팔에 심한 통증을 느낀 2005년 오른쪽 어깨 관절경 수술을 했다. 재활로 2년 동안 단 한 경기도 뛸 수 없었다.
이용훈은 “다시 한번 재활을 하자고 하면 야구를 포기할 것이다. 동료들이 경기에 나갈 때 혼자서 재활 훈련을 한 기억이 생생하다. 공을 던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쁘다”고 말했다.
3년 만에 1군에 복귀한 이용훈은 6월 25일 현재 11차례 등판에서 2승5패, 방어율 3.96을 기록 중이다.
첫댓글 한국시리즈에서 V10의 마지막 투수가 이대진선수였으면 합니다.....-_-;;
느끼는 바가 많습니다. Ace of Ace~! 이대진 화이팅 ^^
국내 유일의 에이스 오브 에이스란 호칭으로 불려졌던 사나이!!!
타이거즈 전설들 중 1인 = 이대진 .... 올시즌 잘해서 경기후 인터뷰 하는 모습을 보면... 꼭 표정이 인생 다 산 사람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는데.. 무언가 통달한... 그리고 자신감에서 오는 담담함.. 머 이런 것들... 솔직히 올시즌 초 이대진 선발 나올때 그렇게 던질 놈들이 없나 싶었음..그런데.. 한경기.. 한경기 지날수록... 선발예고 보면서.. 이대진써있으면..흠..오늘은 타자들이 잘해주면 이기겠구나.. 하고..생각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됨...
글만으로도 사람을 찡하게 만들어주는 대진성님..부활이 아니여도 좋으니 ..원하는 야구 좋아하는 야구 멋지게 하고 타이거즈의 리젠드로 남아주시길..ㅠ
솔직히 이대진선수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 10타자 연속삼진도 그렇고.. 작년 시즌 첫경기 잠실에서 했는데.. 이대진선수가 나오셔서 전화통화하시더군요;; 생각보다 체격이 작으시던데 ㅋ 그체격으로 150을 ㅎㄷㄷㄷ 통화끊으시자마자 달려가서 사인받고 ㅋ 내일 올테니 꼭승리하세요 ㅋㅋ 하니깐 정말 무실점으로 승리투수 ㅠㅠ
이대진 선수 -- 중 3때 까지 공부도 잘했다고 들었습니다 투수가 아닌 타자로 야구 했어도 충분히 족적을 남겼을 듯 -- 그냥 마운드 있는 것 만으로 -- 그냥 선발 축을 담당 하여 주는 것 만으로도 팬들은 행복합니다
멋지당 ^^ 대진성~~~~
이잡지 사서 소장중 ㅋㅋㅋ 이런기사나오면 빨랑빨랑 사둬야해요 품절되기전에 ㅋㅋ 종범신 이번달에 나온 잡지도 있는뎅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