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고 :
중국 진(秦)나라의 환관. 시황제를 따라 여행하던 중 시황제가 병사하자, 승상 이사와 짜고 조서를 거짓 꾸며, 시황제의 맏아들 부소와 장군 몽염을 자결하게 만들었다. 또 시황제의 우둔한 막내 아들 호해를 2세 황제로 삼아 마음대로 조종했다.
조고는 시황제를 따라 여행하던 중 시황제가 평대(平臺:河北省 鉅鹿縣)에서 병사하자, 승상 이사(李斯)와 짜고 조서(詔書)를 거짓 꾸며, 시황제의 맏아들 부소(扶蘇)와 장군 몽염(蒙恬)을 자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시황제의 우둔한 막내아들 호해(胡奚)를 2세 황제로 삼아 마음대로 조종하였다. 이어 진나라의 공자(公子)·공녀(公女) 24명을 죽이고, 2세 황제에게 참소하여 BC 208년 이사를 처형시킨 뒤, 각지에 반란이 일어난 와중에서 승상이 되어 모든 권력을 한손에 쥐었다.
그러나 천하의 군웅(群雄)이 쳐들어와 진나라의 형세가 위태롭게 되자, BC 209년 2세 황제마저 모살(謀殺)하고 부소의 아들 자영(子嬰)을 옹립하여 진왕이라 부르게 하였으나, 곧 자영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의 3족도 함께 처벌되었다. 자영도 겨우 재위 46일 만에 유방(劉邦)에게 항복함으로써 진나라는 3대 15년 만에 멸망하고, 뒤이어 쳐들어온 항우(項羽)에게 잡혀 죽었다.
진나라를 무너뜨린 허세, 환관 조고
boolingoo 2006.10.13 00:47
힘이 있으면 거짓도 통하게 만들어라!
- 한 나라를 혼자 망친 환관, 조고
오정윤(꿈나무미래학교 교장, 한국역사문화연구소 소장)
그릇이 작은 권력자는 항시 두려움에 눌려서 큰 일을 이룰 수가 없다. 또한 개인적인 한(恨)과 야욕이 강한 사람은 천하의 대세를 엉망으로 만든다. 진정한 권력자는 인내와 관용과 이해가 풍부해야 한다.
도량이 부족한 조고(趙高)는 최고의 권력자가 되자 강대한 통일왕조를 뿌리채 흔들었다. 황제를 죽이고, 왕자, 공주, 승상, 장군은 물론이고 숱환 공신과 귀족을 살상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줄 알았고, 타인의 약점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기지를 올바른 방향에 사용하였다면 현상(賢相)이 되었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
중국의 역사에서 환관(宦官)은 특수한 계층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본래부터 야만스런 사회제도의 희생물이다. 사실 가정이 빈곤하여 살기에 힘들다거나, 죄를 진 사람이아니라면 누구라도 환관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궁중에서 환관은 노예나 다름없는 신분이었고, 어떠한 권력도 보장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전제정치 아래서 임금과 신하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예절과 상하의 간격이 있다. 이에 비해 환관은 가노(家奴)처럼 늘 제왕의 곁에서 시중을 들며 일거수 일투족을 함께하는게 임무이다. 따라서 어떤때는 쉽게 제왕의 신임을 받기도 한다.
호랑이의 위세를 빌린 여우처럼, 그러한 거짓의 권세도 오래되면 실제의 권력으로 변하는게 인간사이다. 특히 궁중 내부에서 심까한 충돌이 발생하면 환관의작용은 매우 미묘한 작용을 한다. 환관이 마음을 굳게 먹고 과감하게 어떤 음모를 꾸민다면 세상을 뒤엎는 결과를 만들기도 한다. 역사상 환관이 폐(廢)하거니 내세운 제왕이 어디 한 두명에 그쳤던가.
환관의 권력탈취와 권력행사에는 대체로 3가지 기본적인 관점이 있다. 첫째, 환관은 정상적인 권력구조의 구성원이 아니다. 그들은 제왕의 위세를 빌어 권력을 탈취하고 제왕을 조종하여 권력을 행사한다. 그들의 권력에는 당연히 음모가 따를 수 밖에 없다. 둘째, 환관의 권력탈취는 기본적으로 봉건통치질서의 파괴를 가져오고, 궁극적으로 황족(皇族)이나 사대부들의 용인(容忍)을 받을 수가 없다. 다시 말하면 환관은 자손대대로 그들의 권력과 재산을 계승시킬 수가 없기 때문에 장기적인 안목에서 국가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일신에 관련한 쾌락만을 찾는 경향이 많다. 셋째, 환관의 심리는 거의가 정상적이지 못하고 변태적이다. 그들은 남성으로서 성기능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천성에 바탕한 만족을 얻지 못한다. 또한 비천한 신분에서 출발하여 고귀한 신분의 대신들 사이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정신적인 압박감과 열등감이 심하다. 때문에 그들은 권세를 얻으면 오랫동안 눌렸던 원한과 비굴감과 열등감이 보복행위로 변질되기가 십상이고, 유혈을 오락으로 즐기는 잔인한 결과를 만들기도 한다.
이 세가지 기본적인 관점에서 살펴보았듯이, 환관의 권력탈취는 봉건국가에 대한 강렬한 파귀성을 결정한다. 하지만 이것도 야만적인 사회제도가 스스로 불러들인 징벌의 하나에 불과하다.
이제까지 줄곧 사대부들은 환관을 멸시하면서, 어떻게 해서라도 환관들의 권력행사를 막으려는 시도를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남성의 성기능을 제거하고 궁중에서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비참한 환관제도를 없애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이 또한 전통적인 사대부문화의 비열한 면모의 하나이다.
환관들이 나라를 망친 역사는 봉건통치가 시작되고 끝날때까지 있어왔다. 그러나 첫번째로 천지를 진동시키고 불같은 유혈극을 불러일으킨 재난은 진나라의 조고(趙高)를 들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진나라는 조고라는 인물때문에 전국(戰國)시대의 경쟁과 혼란을 극복하고 중국 최초의 통일 왕국을 세우고도 자신의 손에 그 운명을 마치는 비극을 연출하였다.
진시황 37년(기원전 210년) 7월, 사구(沙丘;지금의 하북성 광종현 경내)에서 서쪽으로 통하는 대도상에는 위세가 당당하고, 가는 실처럼 수리에 걸쳐 늘어진 일단의 대열이 힘차게 이동하고 있었다. 대열의 앞에는 각양각색의 깃발을 앞세운 의장대가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고, 그 뒤로 질서있게 대열을 갖춘 기병과 보병이 보무도 당당하게 행진하는 중이다. 10여대의 마차가 바로 기병의 뒤를 따르고 양 옆으로 위사(衛士)들이 창을 꼬나들고 마차를 보호한다. 행렬의 뒤로 대오를 갖춘 보병이 방진(方陣)을 형성하고 행진을 한다.
먼지가 자욱하게 하늘로 솟아 오르고 햇빛에 반사된 창날이 무시무시하게 번득인다. 마차 행렬의 제일 앞에 가는 수레는 금벽(金碧)으로 휘장하고 수레를 끄는 말도 화려한 비단을 몸에 걸쳤다. 또한 수레의 크기도 나머지 수레와는 비교가 되지않을 정도로 컸다. 뒤를 따르는 마차는 하늘에 덮개만 씌우고 사방은 훤히 뚫려있지만, 제일 앞선 수레는 사면이 휘장으로 둘러쳐져 있어 마치 작은 방 같았다.
양 옆으로 창이 있고, 앞쪽에는 문이 있엇다. 창에는 주렴이 늘어지고 주렴의 끝에 달린 구슬이 바람에 서로 부딫히면서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정말로 이상한 것은 이렇게 무더운 여름에 주렴이 내려지고 문이 닫혀 있다는 사실이다. 폭염이 내리쬐는 여름에 수레의 창문과 앞 문을 모두 닫는 아리석은 사람은 사실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수레는 황제의 전용수레이다. 진시황제는 천하를 평정하고 늘상 사방으로 순행(巡行)을 하면서 전국에 대한 통치권을 더욱 강화해 나갔다. 이번의 행차는 양자강의 남북을 시찰한 다음에 동쪽으로 대해(大海)를 관망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진시황제는 오지(吳地;지금의 강소성 남부)를 거쳐 북상하여 평원진(平原津;지금의 산동성 평원현 경내)에 이르렀을때 갑자기 병을 얻어 순행을 끝마치고 급히 서쪽의 함양성으로 돌아가즌 중이었다.
진시황제의 순행을 뒤따르는 관원은 수를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로 많았다. 대신들 중에서 관직이 제일 높은 사람은 좌승상(左丞相) 이사(李斯)였다.
이사는 본래 진나라 사람이 아니지만, 진나라가 통치체제를 강화하고, 6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숱한 건의와 정책을 내었고, 진시황제가 제왕에 오르는데 중요한 작용을 미친 사람이다. 현재 그의 아들들은 모두 진나라의 공주를 정부인으로 삼았고, 그의 딸들은 모두 진나라의 공자(公子)에게 시집을 갔다. 진나라에서 존귀를 비교한다면 그를 따를 사람이 몇이 되지 않았다.
이번 순행에서 진나라의 장군인 몽의(蒙毅)도 따라 나섰다. 하지만 진시황이 잡병으로 고생하자, 산천에 제사를 지내고 신령에게 기원을 하는 임무를 맡아 대열에서 먼저 떠났다. 몽의의 가문도 이사와 비교가 될만했다.
몽의의 조부인 몽오(蒙오)는 제(齊)나라에서 진나라로 옮긴 이래 3대에 걸쳐 혁혁한 공을 세웠다. 몽오가 한(韓), 조(趙), 위(魏) 3국으로 탈취한 성채만도 100여채가 넘었다. 몽오의 아들인 몽무(蒙武)는 초(楚)나라를 멸망시키는데 공로를 세운 장수의 하나로, 바로 초왕이 그에게 포로로 잡혔다.
몽무의 두아들이 바로 몽염과 몽의이다. 장자인 몽염(蒙염)은 지금 30만 대군을 이끌고 장성을 수비하고 있는 중이며, 차자인 몽의는 상경(上卿)의 직위에 있으면서 진시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어, 승상도 그에게는 양보를 하는 편이다.
황제의 열여덞번째 아들인 호해(胡亥)는 이번의 순행에도 따라 나섰다. 호해는 사방을 주유하며 산천을 감상하기를 좋아했다. 약관 스물로 황제의 스무명이 넘는 아들중에서 가장 총애를 받고 있었다. 그는 성격이 온순하고 정신이 산만하며 결단력이 부족한 유약한 사내였다.
그는 본래부터 황제의 자리를 계승하는 서열에 있지 않았다. 또한 자신도 황제의 자리를 생각지도 않았다. 더욱이 진시황은 중앙집권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여러 아들에게 토지를 분봉(分封)하지 않았기에 그는 그저 세상을 돌아다니며 즐거움을 탐닉하는데 만족하였다.
당시에 황제의 곁에서 시중을 드는 환관중에서 가장 으뜸은 중거부령(中車府令)에 있는 조고(趙高)였다. 그는 궁중비서에 해당하는 직책을 갖고 있었으며, 황제의 문서를 기초하는 막중한 임무를 담당했다. 또한 황제의 옥새(玉璽)를 보관하고 있었다.
마차의 행렬은 서녘에 황혼이 밀려오자 가던 길을 멈추었다. 대오가 멈추자 관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제일 앞의 수레로 급히 달려와 이곳에서 밤을 새우는지 여부를 물어왔다. 수레 안에서 환관의 목소리가 흘러나와 황제께서 유숙을 허락하는 성지를 내렸다는 말을 전하였다.
사구를 떠난 이래 황제는 한번도 사람들 앞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시종이 음식과 물을 수레 앞에 대령하면, 수레에 타고 있는 환관이 가져갔으며, 대신들이 수레 앞에서 주청을 하면, 바로 그 환관이 황제의 인가를 전하였다. 진시황제를 수행하는 문무백관들은 매우 불안한 감정을 털치지 못하였다. 직접 신하들의 주청을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황제의 병이 위중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금 황제의 병세로 보아서 죽을지 살지 판단이 서지않는 상황에서, 태자마저 책봉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문부백관들의 걱정은 더했다. 만일 후사를 정하지 않고 죽게된다면 뒤에 벌어질 일은 누구도 예측을 할 수 없다.
중국역사상 처음으로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였고, 수년간 각지에 사람을 보내 장생불사(長生不死)의 선약(仙藥)을 구하려던 진시황제는 사실 사구에서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는 이미 수레 안에 안치된 관속에 누워있었다. 황제가 죽은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사와 호해, 그리고 환관 조고와 측근에 해당하는 몇몇의 시종들 뿐이었다.
진시황제의 죽음을 잠시 비밀에 붙이자고 처음에 제안을 한 사람은 이사였다. 이사는 진시황제가 생전에 태자를 정하지 않았지만, 임종에 이르렀을때 진시황제는 유조(遺詔)를 내려, 장성을 지키는 몽염(蒙염; ? - 서기전 210)의 군중에서 감군(監軍)으로 활동하는 장자 부소(扶蘇; ? - 서기전 210)를 함양성으로 불러들여 장례를 주관하고, 대통을 잇게하라는 뜻을 전달했다.
이사는 부소가 비록 진시황제의 유조를 받아 태자에 내정은 되었지만 정식으로 태자가 아닌 이상에는, 대통을 잇기전에 진시황제의 죽음이 알려지면 스무명이 넘는 공자중에 어느 누가 병력을 동원해 난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사는 함양성으로 돌아와서 부소가 친히 장례를 치루어야 안심이 된다고 여겼다. 부소는 어차피 진시황의 장자이고, 또한 선황의 유조가 있기 때문에, 그 이후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날 저녁, 조고는 편안하게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뜨거운 철판 위에 놓여진 개미처럼 안절부절 하면서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는 지금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었다. 진시황제가 부소에게 내린 유조(遺詔)는 여전히 그의 수중에 있었지만 발송을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판단이 서지않았다.
이 일은 조고의 영욕(榮辱)과 생사(生死)에 깊은 관련이 있는 문제였다. 왜냐하면 그는 비록 궁중에서 높은 지위에 있고, 공자 호해와 매우 친근한 사이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황실의 노예인 환관일 뿐이다.
만일 유조를 보내지 않고 계획을 추진하였다가 실패하면 곧바로 죽음이다. 또한 유조를 보내 부소가 황제가 되어 친정(親政)을 강화하면 조정의 권력은 몽염과 몽의 형제에게 돌아갈 것이다.
일찌기 몽의(蒙毅; ? - 서기전 210)는 조고가 저지른 죄를 심리할때 그를 처형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당시에 진시황제가 조고를 총애했기 때문에 간신히 사면을 받았다. 조고가 걱정하는건 사실상 몽의에게 원한이 있는것은 사소한 일에 불과하다. 진정 두려운 것은 부소가 2세 황제가 되었을때 궁중에서 자신의 지위가 보장을 받을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그저 묵묵히 세월만 지키는 환관으로 일생을 보내야한다. 이를 어떻게 감당해 낼 수가 있단 말인가.
조고(趙高; ? - 서기전 207)는 출생이래 인생이 매우 불행하였다. 그의 부친이 죄를 범해서, 그의 어머니는 관부(官府)에 넘겨져 관노(官奴)가 되었다. 이일로 인해서 그는 태어나자마자 노예의 신분이 되었다. 얼마후 그와 그의 형제들은 모두 남근을 거세당하고 궁중에 들어갔다. 다행히 조고는 총명하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재빨리 알아차렸다. 그는 비천한 잡무를 하는 처지에서 문서를 처리하는 환관으로 발탁되었다.
조고는 이때부터 독서에 게으르지 않았고, 복잡하고 까다로운 궁중의 예법을 익혀나가는 한편 혹독한 진나라의 법률에도 정통하였다. 진시황은 이런 조고를 한눈에 알아보고 그를 중거부령(中車府令)에 중용하였다.
조고는 어린 시절에 귀인을 만나면 허리를 굽혀서 예를 다해야 했으며, 모든 일에 조심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남이 웃으면 억지라도 따라 웃어야 했다. 갖은 수모와 치욕을 당해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귀족문벌의 사람에 대해 깊은 원한을 가졌다.
조고는 반드시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일을 저질러 귀족문벌의 사람들이 자신의 면전에 머리를 조아리게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마치 주인 앞에서 꼬리를 흔드는 개처럼 만들겠다고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하여 그는 모험을 겁내지 않았다.
조고는 모든 사람에게 두려움이나 바램이나 약점이 있는데, 바로 그 목줄기를 잡고 있으면 그런 사람은 쉽게 상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서 호해는 사실 두려운 상대가 아니지만 이사는 누구보다도 판단력이 뛰어나고 냉철한 사람으로 쉽게 상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사(李斯; ? - 서기전 208)에 관해서는 널리 알려진 소문이 있었다. 이사는 젊었을때 초나라의 상채(上蔡)라는 작은 마을에서 창고를 관리하는 작은 벼슬아치로 있었다. 어느날 측간(厠間)에 갔을때 비쩍마른 서너마리의 쥐들이 더러운 똥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쥐들은 사람이 들어오자 구멍으로 피하기가 바빴다. 후에 창고에 들른 이사는 퉁퉁하게 살이 오른 쥐가 쌀가마 위에 앉아 사람이 와도 피하지 않고 찍찍거리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는 길게 탄식을 하면서 중얼거렸다.
“사람이 쥐와 다른게 무엇인가? 쥐와 다를바가 하나도 없다. 문제는 측간에서 사느냐, 창고에서 사느냐의 차이일뿐......”
조고는 이사에 얽힌 이야기를 생각하고, 주먹을 불끈쥐며 결심을 굳혔다. 기회는 서서히 자신에게 오고 있다. 이때에 다른 사람을 제압해야 한다. 조고에게는 가장 긴박하고 초조한 선택의 기로에 있었다.
이때 호해는 마침 어떤 궁녀와 히히덕 거리며 놀고 있었다. 그는 조고가 들어오자 얼른 일어나 자리를 잡았다. 호해는 어려서부터 늘상 진시황제의 곁에 붙어 다녔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조고와 친해질 수가 있었다. 조고는 어린 호해에게 글을 가르치고, 호해가 성장한 이후에는 법률을 가르쳤다. 호해에게 있어 조고는 사부와 다를바가 없는 환관이었다. 조고는 눈을 부릅뜨고 궁녀를 밖으로 나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궁녀가 밖으로 나가자 조고는 호해에게 다가가 직설적으로 물었다.
“황제께서 돌아가시면서 오로지 유조 하나만을 장자에게 남기고, 여러 공자에게는 분봉을 한다는 어떠한 명령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장자가 함양에 돌아오면 곧바로 황제가 되실텐데, 그렇게 된다면 한뼘의 토지도 없는 공자께서는 이후에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호해는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요? 아바마마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그렇게 해야죠, 다른 방법이 있나요.”
조고가 목청을 높이며 말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천하의 대세는 공자와 이 몸 조고, 그리고 승상, 이렇게 세사람의 수중에 놓여 있습니다. 공자께서는 다시한번 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호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입을 열었다.
“형을 페하고 동생을 세우는 일은 불의(不義)이며, 부조(父詔)를 어기는 일은 불효(不孝)에 해당됩니다. 또한 재주와 지혜가 박약하면서 앉아서 공을 이루려는 행동은 무능입니다. 불의, 불효, 무능, 이 세가지는 도덕에 어긋나는 패역한 짓으로 반드시 천하사람들의 질책과 비웃음을 사게 되며, 결국에는 위험을 자초하는 꼴이 될 것입니다.”
조고는 호해의 말에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성공은 바로 덕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과감한 결단만 있으면 귀신마저도 자리를 피하고 양보하는 법입니다. 무슨 천하인의 질책과 비웃음이 걱정이 되겠습니까? 공자! 상을 세운 탕왕(湯王)이나 주(周)의 무왕(武王)은 모두 신하의 자리에서 임금을 멸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들을 모두 성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위(衛)나라에는 아버지를 죽인 임금이 있었지만 위나라 사람들은 오히려 그의 은덕에 감사를 드렸습니다.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찾아오지 않습니다. 하루 아침에 잘못하면 후회해도 늦습니다.”
조고의 논리정연한 설득에 호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례가 끝나기 전에 이 일을 승상과 상의하는게 어떻습니까??"
조고가 자리에서 일어나 물러가면서 말했다.
“승상한테는 나름대로의 방법을 강구해 놓았습니다.”
조고가 승상이 머물고 있는 곳에 들어섰을때, 이사는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탁자에 놓여있는 술잔을 혼자 기울이고 있었다. 이사는 조고가 안으로 들어오자 먼저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의 유조는 보냈소이까?”
조고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황제께서 붕어하신 일과 임종시 유조를 장자에게 내렸다는 일은 지금 우리 이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옥새는 지금 호해 공자의 수중에 있는데, 다른 유조를 보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정말 어려운 것은 태자를 내세우는 일입니다. 우리 두 사람이 그 문제를 다시 얘기하는게 어떻습니까?”
이사는 조고의 말에 화를 벌컥내며 소리쳤다.
“어떻게 감히 망국(亡國)의 언사(言辭)를 할 수 있단 말이오? 신하된 도리로서 어떻게 그런 논의를 할 수 있겠소?”
조고는 이사의 호통소리에도 여전히 개의치 않은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승상 대인은 몽염 장군과 비교해서 어떻습니까? 공로가 그보다 많습니까? 재능이 그보다 뛰어납니까? 지혜가 낫습니까, 아니면 위엄이 그보다 출중합니까?”
이사가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모두 몽염 장군에 미치지 못하오. 그런데 지금 그런 말을 하려는 의도는 무엇이오?”
이사의 눈치를 살피던 조고의 표정이 점점 평온을 찾아갔다.
“저는 단지 내궁부(內宮府)에 속한 환관일 따름입니다만 궁중에서 이십여년간 사무를 처리했습니다. 이제까지 저는 어떤 승상이나 공신도 일단 파면을 당하면 자신은 물론이고 후손들이 편안하게 여생을 마친 사례를 구경하지 못햇습니다. 모두들 끝내는 피살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승상께서도 이런 일은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이사는 진나라의 혹독한 법률을 잘알고 있었다. 이제까지 보아온 예에 의하면 지위가 높고 공로가 많은 대신일수록 한번 총애를 잃으면 위험은 더욱 가중되었다. 이사는 짐짓 무슨 뜻인지 모른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그 일과 내가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이오?”
조고가 크게 웃기 시작했다.
“장자인 부소 공자가 즉위하면 승상은 반드시 몽염 장군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승상께서는 고향으로 돌아가 한가롭게 후생을 보내야 하는데, 그게 그리 쉬운 일이겠습니까?”
조고는 이사에게 부소가 황제가 되었을때 벌어질 수 있는 변수를 늘어놓으며 간간히 호해를 들먹였다. 그의 의도는 무능한 호해는 조종하기 쉽다는 뜻을 넌지시 이사에게 암시한 것이다.
이사는 갑자기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를 억제하는 힘이 그의 머리를 강타했다.
“그대는 빨리 돌아가 그대의 일이나 보시오. 나는 그저 천명에 따를 수 밖에 없소. 나 이사는 본래가 상채에서 곳간지기로 있었던 비천한 출신으로, 다행히 황제의 총애를 받아 승상의 지위까지 올랐소. 그런데 어찌 자손들의 부귀영화마저 황제의 은덕에 맡길 수가 있겠소? 충신은 진정 죽음을 피하지 않는 법, 그저 천명을 따르겠소.”
조고는 이사의 입에서 상채라는 말을 듣자 곧바로 측간의 고사가 생각났다.
“천명을 따랐다면 어떻게 오늘의 승상이 있을수가 있겠습니까? 듣자하니 성인은 변화를 따르고 무상(無常)하며, 때를 보아 움직인다고 들었습니다. 승상께서 천명을 따랐다면 오늘 이 자리에 서 있을 수가 있습니까?”
화제가 갑자기 바뀌자 이사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옛날에 진헌공(晉獻公)이 태자를 바꾸어 세웠다가, 난리가 일어나 진국(晉國)은 3대를 이어가면서 난리를 겪었고, 진문공이 들어서서야 겨우 안정을 찾았소. 역대 이래로 이런 일이 어디 한 두건이겠소. 내가 걱정하는건 바로 이것이오.”
조고는 이사의 말을 들으며 자신의 계획이 이미 성공했다는 자신을 얻었다. 그는 기쁨을 억누르며 매우 공경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중요한 것은 상하(上下)가 한마음이 되고 안팎이 일치단결하는 일입니다. 승상께서 저의 계획을 들으신다면 자연히 세세토록 부귀를 누릴 수가 있으며 오랫동안 봉후(封侯)의 권세를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만일 듣지 않는다면 화가 자손에게까지 미치게 됩니다. 진정 지혜로운 자는 화를 복으로 바꾼다고 하였습니다. 승상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길게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아, 난세를 만나니 죽음도 달갑게 받지 못하는구나. 내가 더이상 무얼 어떻게 하겠는가?”
상군(上郡;지금의 섬서성 유림 부근)의 감군부(監軍府)에는 거짓으로 만들어진 진시황제의 유조(遺詔)를 휴대한 수 명의 시종들이 말을 몰고 달려왔다. 부소와 몽염은 소식을 듣고 급히 대청으로 나왔다.
조서(詔書)는 부소와 몽염이 수십만의 대군을 이끌고 변방에서 쓸데없이 양식을 소모하고 사졸들을 손상시키며 할 일없이 국력을 소진하고 있다는 가혹한 질책이 앞부분을 장식하였다. 조서는 계속해서 부소가 수차례 부황을 비방하고, 함양으로 돌아와 태자가 되지못하고 있음을 원망하고 있으니, 불효한 부소는 자진해서 목숨을 끊으라는 명령이었다. 아울러 몽염도 부소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하고 부화뇌동하여 불충을 저질렀으니 역시 자진해서 목숨을 끊으라는 명령으로 끝을 맺었다.
몽염은 대경실색한 표정을 지으며 부소를 지켜보았다. 부소는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장검을 지닌채 방으로 돌아갔다. 부소는 일찌기 진시황에게 몇차례 간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럴때마다 진시황은 얼굴을 찡그리며 대꾸조차 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상소문을 내던지기까지 하였다. 진시황의 성격을 잘알고 있는 부소는 조서의 내용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몽염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부소의 뒤를 따르며 잠시만 행동을 멈추어 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효성이 지극한 부소는 방으로 돌아오자 곧바로 검을 들어 자신의 목을 찔렀다.
몽염은 끝까지 사실을 증명하려고 두번째 조서를 기다렸으나 결과는 함양으로 압송하라는 조서만이 다시 내려왔다. 얼마후 그도 끝내는 옥중에서 피살되고 말았다.
몽염과 부소를 제거하는 동안에 호해와 조고, 이사 일행은 대오를 이끌고 밤낮으로 함양성으로 달렸다. 진시황은 이미 숨이 멎은지 오래되었고, 날씨가 폭염이라 시체 썩는 냄새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조고는 냄새가 진한 소금에 절인 바닷고기를 수레에 가득실어 시체썩는 냄새와 구별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도중에 세사람은 부소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회신을 받고 더욱 기고만장하여 승리의 확신을 다졌다.
함양성에 도착하자 세사람은 국상을 공고하고, 한편으로 위조된 진시황의 유조를 발표하였다. 태자에 책봉된 호해는 진시황의 장례가 끝나고 곧바로 2세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호해는 황제가 되자 너무나 기뻐 어쩔줄 몰라했다. 궁중에 있는 아름다운 궁녀들과 맘대로 어울려 놀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날, 호해는 낭중령(郞中令)으로 승진된 조고를 불러 말했다.
“사람이 한 세상을 사는 일은 눈깜짝할만큼 짧은 시간에 불과하오. 나는 황제가 되었으니 이제 정말로 통쾌하고 시원한 즐거움을 누리고 싶을뿐, 무슨 정사(政事)는 논하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소. 경도 나와 함께 그 즐거움에 동참하는게 어떻소?”
조고는 무거운 얼굴빛을 한 채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현명한 군주는 정사를 대신에게 맡기고 즐거움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유념하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사구에서 발생한 일에 대해서 많은 공자와 대신들이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 공자들은 대부분 황제 페하의 형장(兄長)들입니다. 대신들도 선황의 유조때문에 복종을 하고 있을뿐 내심으로는 따르지않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틀림없이 변고가 발생할 것입니다. 더욱이 몽염 장군이 죽었지만 몽의 장군은 변방에서 병마를 거느리고 있어 항시 불안한 정세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지금 폐하께서는 편안하게 즐거움만 추구하실 수 있겠습니까?”
호해는 갑자기 두려움에 온 몸을 떨면서 말했다.
“어떻게 하면 좋겠소?”
조고가 시원스레 입을 열었다.
“사실은 폐하께서 걱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단지 법률을 더욱 엄하게 바꾸고, 형벌을 가혹하게 다스리며, 죄인에게는 연좌제를 실시하여 화근을 아예 뿌리채 뽑아 버리면 문제는 쉽게 해결됩니다. 조정의 일에 공자(公子)들을 멀리하게 만들고, 선제(先帝)의 대신들은 서서히 하나씩 제거하고, 가세가 빈궁한 사람들을 등용하면 그들은 성은에 감격하여 폐하께 충성을 다 바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천하는 안정을 찾게되고 폐하께서는 오로지 즐거움만 찾으실 수 있습니다.”
호해는 조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모든 업무를 조고에게 맡겼다. 이날 이후 함양성은 조고에 의해 도살장(屠殺場)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약간의 상금을 타기 위하여 사람들은 너도나도 할것없이 공자들과 대신들의 죄상을 내궁부(內宮府)에 고발하였다. 조고는 고발을 접수하면 곧바로 체포하여 감옥에 넣고 가혹하게 고문을 하여 없는 죄상도 스스로 불게 만들었다.
이때 몽의 장군을 비롯하여 수십명에 해당하는 선황제의 대신들과 호해의 12명 형제들이 피살되었고, 연루되어 함께 피살된 사람들은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더욱 공포스러운 일은 10명의 공주(公主)들이 죄명도 모른채 동시에 사지를 찢어죽이는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졌다.
거열형은 여섯대의 수레에 각각 사지와 목과 몸통을 묶고 말을 힘차게 몰아 갈기갈기 찢어 죽이는 잔혹한 형벌이었다. 조고는 고귀한 신분의 공주들이 동시에 목이 땅에 떨어지고, 하늘하늘한 몸통이 네쪽으로 갈라져 하늘에 선홍색의 피를 뿌리는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무척이나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생리적인 결함과 오랜 억압으로 조성된 야수(野獸)보다 더한 잔인성과 동물적 포악성이 한데 어우러져 그의 가슴에 극도의 만족감과 쾌락을 안겨주었다.
법령은 날이갈수록 가혹해져 갔고, 형벌은 더욱 끔직해졌다. 여러 대신들은 점점 위기의 벼랑에 몰려 전전긍긍 하였고, 백성들의 시신은 산처럼 쌓여갔다.
2세황제 호해는 조고가 정적을 제거하는 동안에 토목공사를 더욱 강화하였다. 그는 진시황이 조성하려다 미완으로 남겨둔 아방궁(阿房宮)의 공사를 넓고 화려하게 다시 수축하기 시작하였고, 노역(奴役)으로 수만명의 백성을 징발하였다.
백성들은 생존을 위하여 가래나 삽을 어깨에 메고 산으로 도망가 초적(草賊)이 되었다. 서기전 209년에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라는 사람은 대택향(大澤鄕)에서 대나무창을 높이들고 봉기를 하였고, 뒤이어 옛 6국의 귀족후예들도 여기저기에서 병사를 일으켰다. 반진(反秦)의 봉화는 벌판을 태우는 불처럼 사방에서 일어나 진나라의 운명을 바람 앞의 촛불로 만들었다.
조고는 개인적인 은원으로 너무나도 많은 사람을 살상하였기 때문에, 원한에 쌓인 대신들이 직접 호해에게 자신의 죄상을 폭로하는 주청을 하지 못하도록 호해에게 협박조로 권고하였다.
“폐하! 천자(天子)가 늘상 대신과 얼굴을 맞대면 고귀함이 드러나지 않는 법입니다. 하물며 폐하는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대신들의 비판 쉽게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천자의 권위와 신명(神明)을 드러내는 방법이 아니옵니다. 폐하께서는 심궁(深宮)으로 물러나 편안하게 계시옵고, 조정의 잡다한 사무는 소신과 법령에 익숙한 시종들이 맡아도 충분합니다. 그렇게 하면 천하의 사람들은 폐하를 현명한 군주라고 칭송을 할 것입니다.”
조고의 말은 호해의 생각에 꼭 들어맞았다. 호해는 모든 정사를 조고에게 맡기고 궁중 깊숙이 몸을 감추고 주연과 오락에 심취하였다. 조고는 지위만 환관이었지 사실상 임금과 같은 권력을 행사하였다.
황제가 일체 몸을 나타내지 않게되니 대신들은 조고를 어떻게 해볼 방법을 찾지 못하였다. 승상 이사는 더욱 몸과 마음이 탔다. 그는 승상이면서도 환관 하나를 어쩌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진나라의 위기가 눈 앞에 닥쳤는데도 어떤 조치도 내리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조고는 이사가 황제의 알현을 여러번 신청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잇었다. 그는 진나라에서 이사의 공로가 지대하고, 지위도 자기보다 높기에 알현을 공개적으로 막을 수가 없었다.
어느날 조고는 이사를 찾아가 황제께서 바쁘지 않는날에 알현을 하려는 의사를 전달하겠다고 말해놓고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얼마 후, 조고는 궁중에 주연을 베풀고 황제를 모셔왔다. 호해는 품안에 궁녀를 끌어안고, 술잔을 기울이며 무희들의 춤을 감상하였다. 즐거움이 극에 달하자 황제도 흥에 겨워 자리에서 일어나 덩달아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때 어린 환관이 들어와 승상 이사가 황제를 알현코자 한다는 보고를 올렸다. 호햬는 역정을 내며 소리쳤다.
“보지 않는다고 전하라. 궁중에 일이 많아 바쁘다고 전하라.”
조고의 농간을 알면서도 이사는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한번, 두번, 세번, 횟수가 거듭되자 호해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아 조고에게 소리쳤다.
“내가 한가할때 승상은 오지 않고, 매번 즐거울때만 찾아오니 이게 도대체 어인 일이오? 승상은 내가 어리다고 깔보는게 아니오?”
조고는 매우 긴장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사구에서 있었던 밀약에 승상의 공이 컸습니다. 폐하가 황제의 보위에 오른후, 승상은 최고의 관직에 올라 더이상 오를곳이 없습니다. 아마 승상 대인은 나라의 땅을 일부 식읍으로 받는 봉후(封侯)를 원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조고는 말을 하다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한가지 중대한 사건이 있었는데 소신이 감히 말씀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듣자하니 승상의 장자 이유(李由)가 삼천(三川;현재의 사천성)태수로 있는데, 그곳의 도적떼 진승과 예부터 교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초지(楚地)에서 도적떼가 들끓겠습니까? 승상과 도적떼들은 모두 동향(同鄕)사람들 입니다. 지금 승상은 궁외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는데, 언제 폐하의 권력을 누를지 모르는 일이옵니다.”
호해는 이전부터 정사에는 관여하지 않아 도통 세상 돌아가는 일에는 깜깜했다. 그는 조고가 무어라 말하면 무조건 믿었다. 조고의 말을 듣고 호해는 처음에 이사를 당장에 잡아 들이고 싶었지만 자칫 잘못하다가는 실패할까 두려워 먼저 이사의 죄상을 조사하라고 조고에게 지시했다.
이사는 이사대로 사정이 촉박해서 연일 상서를 올려, 조고는 소인배로 천한 환관의 직위에 있으면서 권력을 독점하고 황제의 눈을 더럽히고 있다고 성토하였다. 그러나 이사의 대응은 조고보다 한발 늦었다.
더욱이 호해는 이사의 말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상서가 오면 모두 조고에게 넘겨주었다. 조고는 조고대로 이사가 자신을 제거하고 끝내는 황제의 자리까지 탐한다고 호해를 세뇌하였다.
호해는 드디어 결심을 굳히고 조고에게 명령했다.
“이사를 낭중령(郞中令)에게 넘겨 반역 음모가 있는지 여부를 철저히 심리토록 하시오.”
서기전 208년, 2세황제 2년에 이사는 반역죄로 체포되었다. 그때 이사의 나이는 60을 약간 넘긴 때였다. 중국역사에서 걸출한 정치가이며, 책략가이며, 경세가였던 이사도 음모와 술수가 뛰어난 조고를 이기지 못하고 끝내는 싸움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조고는 이사 이외에도 그의 모든 가족과 문객을 감옥에 가두었다. 신문이 얼마나 혹독하였는지 이사는 감옥에서 반역음모를 어거지로 실토하였다. 하지만 이사는 약간의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자살만 하지 않는다면 결백을 입증할 기회가 반드시 온다고 믿었다.
그는 옥중에서 호해에게 상서를 올려, 진나라에서 자신의 공로와 충성심을 일일이 나열하고 관용을 베풀어 사면을 해달라고 주청하였다. 하지만 상서문은 호해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조고에게 매수된 관리들이 상서를 올리면 곧바로 그것을 조고에게 건네주었다.
조고는 모반죄와 같은 중죄는 한차례 심리를 거쳐 죄가 확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관리들을 시켜 혹독하게 이사를 재차 고문하여 죄를 번복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황제가 직접 중죄인을 심문하는 차례가 왔어도 이사는 죄를 번복할 힘과 용기조차 없었다. 호해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띄운채 조고에게 말했다.
“만일 조군(趙君;조고를 높인 말)이 없었다면, 하마터면 승상에게 내가 당할뻔 했소.”
이 해 7월, 이사는 함양성의 저자거리에서 허리를 잘라 죽이는 요참(腰斬)이라는 형벌에 처해졌고, 그의 3족이 동시에 살해되었다.
옥문을 나설때 이사는 형장으로 끌려가는 아들의 손목을 잡으며 울먹였다.
“옛날 상채에 있을때 너는 누렁이를 끌고 상채성의 동문을 나가 토끼 사냥을 했었지. 지금 생각하니 그때의 즐거움이 가장 좋았구나.”
이사는 형장의 이슬에 사라지면서 측간에서 똥을 먹으며 두려움에 몸을 피하는 늙은 죄의 신세가 호의호식하다 처참하게 죽고마는 살찐 쥐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사가 죽은 후, 호해는 환관 조고를 승상에 임명했다. 진나라의 권력은 이제 완전하게 조고의 수중에 떨어졌다.
조고는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하여 어느날, 호해에게 사슴 한마리를 바치면서 좋은 말이라고 하였다. 호해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조고에게 물었다.
“저건 사슴이 분명한대 어째서 승상은 말이라고 하는 것이오?”
승상 조고는 매우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건 분명히 말입니다. 페하께서만 어찌하여 사슴이라고 하십니까?”
호해는 그저 신기한 표정을 지으며 좌우의 대신들에게 모두 물었다. 대신들은 조고의 눈치를 보면서 모두 말이라고 대답했다. 이것이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였다는 고사성어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유래이다. 이후 호해는 자신에게 귀신이 씌였다고 생각해서 곧바로 무당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푸닥거리를 벌였다.
2세 황제 호해가 사리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바보처럼 국정을 운영하자 진나라는 이제 수습할 수 없는 막바지 위기에 몰렸다.
2세 황제 3년(기원전 207년) 봄, 초나라의 항우(項羽)가 기병하여 장한(章邯)이 이끄는 진나라의 주력군을 거록(鋸鹿)에서 대파하였고, 그 해 7월 장한은 20여만 병력을 이끌고 항우에게 투항했다.
또한 한중에서 일어난 유방(劉邦)의 군대가 함양성으로 급속하게 진군하였고, 지방의 관리들은 너도나도 할것없이 그에게 투항하였다. 그 해 8월, 유방은 함양으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인 무관(武關)을 깨고 물밀듯이 함양성으로 돌진하였다.
무관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호해는 경수(涇水)의 신에게 제사를 지낼 준비를 하고 함양성의 교외에 있는 망이궁(望夷宮)에서 목욕재계를 하다가 진나라의 천하가 도적들에게 반이 넘게 점령을 당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는 급히 궁중으로 돌아와 조서를 내려, 천하의 난리를 평정하지 못한 조고를 나무라면서, 황제의 고민을 빠른 시일내에 제거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음모에는 뛰어났을지라도 나라를 다스리고 병마를 이끄는데는 능력이 없는 조고인들 무슨 방법과 수단으로 천하의 난리를 평정할 수가 있겠는가? 조고에게 방법이 있다면 호해를 시켜 유방과 타협하게 만드는 방법 뿐이었다.
호해가 조고를 질책한지 며칠이 지나지않아 천여명의 병사들이 망이궁에 쳐들어와 궁인들을 살상하기 시작했다.
궁중 시위들과 환관들은 모두 사방으로 달아나기에 바빴다. 무리를 이끌고 달려온 사람은 조고의 사위인 염락(閻樂;수양딸의 사위임)이었다.
호해는 신변의 시위(侍衛)와 환관들이 자신을 보호하지 않고 모두 달아나자 대노하였다. 그의 곁에는 오로지 한 명의 환관만이 지키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 지경이 되도록 너는 어째서 나에게 이런 상황을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는가?”
“감히 말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일찍 그런 사실을 말했다면 오늘의 저는 없었을 것입니다.”
호해는 굵은 눈물을 떨구며 탄식을 내벹었다.
호해가 탄식을 하고 있는 사이에 조고의 사위인 염락이 들이닥쳤다. 그는 호해의 앞에 서서 큰 소리로 호해의 죄상을 들추었다.
“귀하는 방자하고 교만하게 많은 사람들을 마음대로 죽였다. 천하는 이에 모두 귀하에게 등을 돌렸다. 귀하는 이제 스스로 결단을 내려라.”
염락은 호해를 이제 더이상 황제로 보지않고 그저 귀하라고 호칭하였다. 호해가 고개를 들면서 말했다.
“승상을 만나 보고 싶소.”
염락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럴 수 없다.”
호해는 염락에게 삶을 구걸하기 시작했다. 왕이라도 좋으니 살려달라, 염락에게 거절을 당하자 이제는 봉후(封侯), 그것도 거절을 당하자 최후에는 일반 백성이라도 좋으니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호해의 요구는 모두 거절당했다.
염락은 두려움에 떨고있는 호해에게 소리쳤다.
“나는 승상 대인의 명을 받고, 천하의 백성을 위하여 귀하를 죽이려하니 더이상 말하지말라.”
염락은 좌우의 병사들에게 호해를 꼼짝 못하게 잡으라고 손짓했다. 호해는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패검(佩劍)을 빼어들고 자신의 배를 찔러 자살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스물 셋이었다.
호해를 핍박하여 죽인 조고는 황제병에 걸려 옥새를 가지고 대전(大殿)에 올라 군신들을 소집하였다. 하지만 한명도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사실 환관이 황제가 되자 사람들은 모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식을 낳지 못하는 환관이 어떻게 황제의 자리를 후대에 물려줄 수가 있겠는가. 대신들은 비록 조고가 무서웠지만 결국에는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조고는 대전에서 반나절이나 사람들을 기다리다가, 황제의 자리에 흥미를 잃고, 사람들을 불러모아 호해의 조카인 자영(子嬰)을 바꾸어 세운다고 공표했다. 자영은 황장자였던 부소(扶蘇)의 아들이다.
“시황제는 천하에 군림하였기에 호칭을 시황제라고 하였다. 지금 옛날의 6국이 다시 일어나서 진나라의 땅은 과거보다 작아졌다. 따라서 이제는 황제를 칭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저 진왕(秦王)이라고 부르면 된다.”
조고의 의도는 항우나 유방의 세력을 인정하고, 그들과 타협을 시도하여 진나라의 옛땅만 차지하겠다는 뜻이다.
새로운 임금으로 즉위하게된 자영은 예에 따라서 수 일간 목욕재계하고 태묘(太廟)에 나가 옥새를 받고 정식으로 왕위에 올라야했다.
자영은 진나라 왕실자제 중에서 드믈게 살아남은 후예이다. 하지만 그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두려움에 매일 밤잠을 설쳤다. 그가 어떻게 조고를 믿을 수가 있단 말인가.
목욕재계가 끝나고 태묘에 나아가 옥새를 받아야 하는 그 날, 자영은 병을 핑계로 궁에 머물고 밖에 나가지를 않았다. 조고는 사람을 보내 수차례 재촉하였지만 자영은 요지부동이었다.
화가 난 조고가 참지못하고 직접 자영을 찾아와 그를 질책했다.
“이렇게 중대한 일을 어째서 하지 않으려 하오?”
조고가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나가려는 순간에 장검이 그의 등을 뚫고 나왔다. 사방으로 선혈이 뿌려지고 조고의 참혹한 비명소리가 대전을 진동하였다.
조고는 바닥에 쓰러지면서도 안간힘을 다해 고개를 들어 원한이 가득한 눈빛으로 자영을 ㅆ아보았다. 그는 뜻밖에도 유약하고 무능한 자영이 과감하게 자신을 장검으로 찌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죽어가는 순간에도 조고는 진시황의 혈육을 모조리 죽이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였다.
3개월 후, 유방의 대군이 함양성을 포위하자, 자영은 46일동안에 누린 임금의 자리를 포기하고 스스로 성문을 열고 나가 항복했다. 얼마 후 항우의 대군이 밀려오자 유방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판단하여 함양성을 물러났고, 자영은 항우의 군중에서 피살되었다.
진나라의 멸망은 진시황이 죽으면서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조고는 3년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한 나라를 멸망시키고, 황장자 1인과 황제 한 명을 죽였으며, 유능한 정치가이자 경세가인 승상 이사를 죽였으며, 진나라의 대들보인 장군 몽염과 몽의 형제를 죽였다.
아울러 진시황의 공자와 공주 30-40여명을 죽였으며 수 십명에 달하는 대신과 수 백명이 넘는 그들의 가족을 죽였고,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백성을 죽였다.
조고, 그는 정치권력의 제일 꼭대기에 올라 한 일이라고는 사람을 죽인 일 뿐이었다. 오로지 비천한 신분의 굴욕과 열등감을 복수하기 위하여 그는 희대의 살인광으로 역사에 등재되는 인물이 되었다.
출처 : [기타] 중국의 역대 황제-오정윤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