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의 불빛/이준관
부엌의 불빛은
어머니의 무릎처럼 따듯하다.
저녁은 팥죽 한 그릇처럼
조용히 끓고,
접시에 놓인 불빛을
고양이는 다정히 핥는다.
수돗물을 틀면
쏴아 불빛이 쏟아진다.
부엌의 불빛아래 엎드려
아이는 오늘의 숙제를 끝내고,
때로는 어머니의 눈물,
그 눈물이 등유가 되어
부엌의 불빛을 꺼지지 않게 한다.
불빛을 삼킨 개가
하늘을 향해 짖어대면
하늘엔
올해의 가장 아름다운 첫별이
태어난다.
묵뫼/신경림
여든까지 살다 죽은 팔자 험한 요령잡이가 묻혀있다
북도가 고향인 어린 인민군 간호군관이 누워 있고
다리 하나를 잃은 소년병이 누워 있다
등너머 장터에 물거리를 대던 나무꾼이 묻혀 있고 그의
말더듬던 처를 꼬여 새벽차를 탄 등짐장수가 뭍혀 있다
청년단장이 누워 있고 그 손에 죽은 말강구가 묻혀 있다
생전에는 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이들도 있다
부드득 이를 갈던 철천지원수였던 이들도 있다
지금은 서로 하얀 이마를 맞댄 채 누워
묵외 위에 쑥부쟁이 비비추 수리취 말나리를 키우지만
철 따라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으면서
뜸부기 찌르레기 박새 후투새를 불러 모으고
함께 숲을 만들고 산을 만들고
세상을 만들면서서로 하얀 이마를 맞댄 채 누워
참외 저녁/고형렬
시계저울을 한쪽에 올리고 해가 지는 거리를 뛰어가는 순수레 여자들이 낳은 듯한 노란 아기참외들이 소복히 쌓여 있는 손수레, 바퀴 옆으로 판자를 붙인 손수레는, 팔자걸음으로 뛴다. 해지기 전, 시장 길목으로 달려가는 부부, 어떤 우주시대가 와도 저 과일장수를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선선해지는 늦여름 저녁도 같으리라고, 시계바늘 어둠쪽에 조금 기운 유리창 밖, 새빨간 노을 한마리 . 푸드덕 날아간다
누에/나희덕
세 자매가 손을 잡고 걸어온다
이제 보니 자매가 아니다
꼽추인 어머니를 가운데 두고
두 딸은 키가 훌쩍 크다
어미는 얼마나 작은지 누에 같다
제 몸의 이천 배나 되는 실을
뽑아낸다는 누에,
저 등에 짊어진 혹에서
비단실 두 가닥 풀려 나온 걸까
비단실 두 가닥이
이제 빈 누에고치를 감싸고 있다
그 비단실에
내 몸도 휘감겨 따라가면서
나는 만삭의 배를 가만히 쓸어안는다.
깃털하나/안도현
거무스름한 깃털 하나 땅에 떨어져 있기에
주워 들어보니 너무나 가볍다
들비둘기가 떨어뜨리고 간 것이라 한다
한때 이것은 숨을 쉴 때마다 발랑거리던
존재의 빨간 알몸을 감싸고 있었을 것이다
깃털 하나의 무게로 가슴이 쿵쿵 뛴다
綿綿(면면)함에 대하여/고재중
너 들어 보았니
저 동구밖 느티나무의
푸르른 울음소리
날이면 날마다 삭풍 되게는 치고
우듬지 끝에 별 하나 매달지 못하던
지난 겨울
온몸 상처투성이인 저 나무
제 상처마다에서 뽑아내던
푸르른 울움소리
너 들어 보았니
다 청산하고 떠나버리는 마을에
잔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그래도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고
소리 죽여 흐느끼던 소리
가지 팽팽히 후리던 소리
오늘은 그 푸르른 울음
모두 이파리 이파리에 내주어
저렇게 생생한 초록의 광휘를
저렇게 생생히 내뿜는데
앞들에서 모를 내다
허리 펴는 사람들
왜 저 나무 한참씩이나 쳐다보겠니
어디선가 북소리는
왜 둥둥둥둥 올리나겠지
어떤 풍경/황동규
성긴 눈발 속에 주춤주춤 바다로 가던 길이
모퉁이를 돌며 멈춘다.
돌 몇 개를 층으로 박아
좁은 층계 만든 길
그대 마지막으로 지나간
잎 진 나무 하나
앙상한 팔을 들어 눈을 맞고 있다.
팔들에 새파랗게 얼어 있는 겨우살이도.
그 옆에는 마른 우물
들여다보면
가랑잎 얼굴들이 모여 있다.
가장자리가 온통 톱날인 얼굴도,
나무 하나
마른 우물
모퉁이를 돌다 문득 멈춘 길
돌기 전엔 성긴 눈
돌고 나면 밴 눈
앞길이 온통 하향게 질려 ------
오디와 전화/오규원
바람이 불고 전화가 왔다
바람이 부는데도 수화기를 드는 순간
전화가 뚝 끓어졌다
바람이 불고 전화가 오지 않았다
집이 혼자 서 있다
울카리 너머 바람이 뽕나무에서 불고
오디가 까맣게 익는다
인각사/박태일
인각사 아침 법문은
뻐꾸기 뻐꾹 제 전생 얘기
소복 단장 나비는 기왓골만 남실거리고
비 실러 떠나나
물밥같이 말간 저 구름
고려 적 일연스님
잔기침 소리
석류/류수안
먼 산, 가까운 산
올리던 우레 소리 멎어
문 열어보니
빈 뜰
저만큼
함께 선정에 들었던 중은 어디로 가고
붉은 촛불빛만 외로이 남아
선방 벽 뚫고 나가려 사방찬 벽에 온통
실금을 내가고 있었네
그나무/임선기
박수근의 나무는
금바다 속에서
말이 없다
몇 조각은 나무에 스미고
헤엄치는 시늉을 하며
저녁 속을 살아간다
겨울 강가에서/안도현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을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제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엄음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새벽/이시영
이 고요 속에 어디서 붕어 뛰는 소리
붕어의 아가미가 카 하고 먹빛을 토하는 소리
넓고 넓은 호숫가에 먼통 트는 소리
강화도 시첩3 / 임영조
산문 밖 물소리로 귀를 헹구고
사람 대신 나무와 들꽃에 눈맞추며
호적한 구절양장 언덕길을 오른다
하늘은 또, 왜 언짢으신가
온하루 비구름만 자욱이 풀어
산색을 지우고 길을 감춘다
오르기 전의 산은 은유였으나
오를수록 가파른 관념이었다
안 보이는 길을 더듬어 오르는
초행은 더러 설레고 불안했으나
내 마음의 외딴 성지에 닿기까지
나는 무려 쉰 해 남짓 까먹고 왔다
숨이 가빠 잠시 너럭바위에 앉아
오던 길을 뒤돌아 보면 그 끝머리는
빈 낚시 같은 물음표로 휘어져 있다
안개비에 젖어 더욱 조신한 숲이
천상으로 가는 길만 층층으로 터줄 뿐
청정한 향기로 산을 치켜세우는
강화도 마니산에 오른다. 말을 버리고
나무와 들꽃과 새 이름을 외우며
오르노라면 저절로 입안까지 싸하다
머리 속 온통 초록 물들고 귀도 순해져
바람의 농지거리쯤 예사롭게 듣는다
저 안개 속 방파제를 넘보는 파랑
끝내 넘치지 않는 소리까지 보인다
그럼에도 나는 왜 이 높은 산을
힘겹게 오르는가? 스스로 자문하면
답은 궁한데 더 멀어진 봉우리여
그대 깊고 푸른 중심을 사를
필생의 불씨 하나 얻으러
나는 지금 하늘 가장 가까운
마니산 참성단에 오른다.
사진들을 찢어며/정진규
모조리 찢어비리자는 처음의 생각대로는 하지 못하고 찢는 동안 다시 살아난 욕망들을 달래가며, 이게 무슨 무덤 속에 묻어둘 나의 지석일 수 있을까를 의심하며, 혹은 그간의 내 슬픈 자존들을 혹은 어쩌다가는 내 부끄러운 사랑의 온기들을 가만히 만져보기도 하였다 부연히 먼통이 트고 있었다 밤을 밝혔다. 그 중에 하나는 이러했다 분명히 내가 직접 셔터를 눌렀을 것이다. 내가 홀로 서 있는 아득한 제주 들판, 왜그랬을까 불어가다 멈추어버린 바람, 서풍이었까 모든 풀들이 모두 누워 있는 그 풀들의 침묵이 찍혀져 있었다 우리들의 그날이 그렇게 멈추어 있었다. 그렇게 오늘까지 멈추어져 있는 그날의 풀밭 한 장은 찢어버리지 못했다.
바위 / 이문길
산밑에서
비 맞은 늙은 바위의
얼굴을 본다
너무 수척하여
눈이 안 보인다
가까이 가서 보니
입도 없고 코도 없다
얼마나 청천이
보고 싶었으랴
땅속에서 나와
할 일 없이 늙었다
비 다 젖었다
저승버짐 검다
오래된 우물 / 안도현
아, 하고 소리치면
아, 하고 소리를 받아주는
우물 바닥까지 언젠가 한 번은 내려가보리라고
혼자서 상상하던 시절이 있었다
우물의 깊이를 알 수 없었기에 나는 행복하였다
빈집을 수리하는데
어린것들이 빗방울처럼 통통하며 뛰어다닌다
우물의 깊이를 알고 있기에
나는 슬그머니 불안해지기 시작하였다
오래된 우물은
땅속의 쓸모 없는 허공인 것
나는 그 입구를 아예 막아버리기로 작정하였다
우물을 막고 나서는
나, 방안에서 안심하고 시를 읽으리라
인부를 불러 메우지 않을 바에야 미룰 것도 없었다
눈꺼풀을 쓸어내리듯 함석으로 덮고
쓰다 만 베니어 함판을 덧쒸우고
그 위에다 끙끙대며 돌덩이를 몇개 얹어 놀렀다
그리하여
우물은 죽었다
우물이 죽었다고 생각하자
나는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한때 찰박찰박 두레박이 내로올 때마다
넘치도록 젖을 짜주던 저 우물은
이 집의 어머니,
별똥별이 지는 밤하늘을 밤새도록 오려다보다가
더러는 눈물 글썽이기도 하였을
저 우물은
이 집의 눈동자였는지 모른다
나는 우물의 눈알을 파먹은 몹쓸 인간이 되어
소리친다
아, 하고 소리쳐도
아, 하고 소리를 받아주지 않는
우물에다 대고
장작을 패며 / 양은창
며칠 몸이나 누이며 법화사 행자로 쉬어 가겠다는 게으른 늦잠에 이순의 스님은 밥값이나 하라며 도끼를 냈다. 마른 팔을 걷어붙이고 운동삼아 달려든 도끼질이 번번이 빗나가 마당을 찍어댈수록 오기에 힘을 실어 무거운 신음과 함께 나이테를 겨냥하지만 마냥 찍어댈수록 토막은 상처만 남긴 채 도무지 속이 드러나지 않는다. 무딘 날을 나무라며 손바닥에 침을 뱉고 용도 써 보지만 만신창이 토막이 남기는 건 끈끈한 향기로 뭉쳐진 송진뿐이다. 분에 못 이긴 도끼날이 허공을 가를수록 온뭄은 땀에 절어 숨조차 제대로 가누지 멋할 즈음 어깨 너머 스님의 도끼날에서 튕겨 나가는 나무의 속살이 봄 햇살에 유난히 밝다. 여태 젊다는 믿음으로 산 세상 이젠 그것도 잃었구나. 어디 세상을 힘으로만 살까만은 한낱 도끼질에도 도가 있음을 보란듯이 보란듯이 스님은 나무를 가른다. 정교한 리듬으로 난무하는 폭과 깊이를 알 수 없는 살생의 법도가 엄숙한 절도의 매듭에서 풀려 나오는 산사의 뒷마당에 주저않아 우주가 물리적 법칙으로만 존재하지 않음을 본다. 오직 정신의 한 가닥 줄에 매달려 세상을 조율하는 경이로운 힘을 본다.
겨울 精緻 / 최하림 緻 밸(치)
큰 나무들이 넘어진다 산과 산 새에서
강과 강 새에서 마을 새에서
길을 벗어난 사람이 어디로인지 달리고
길러진 개들이 일어서서
추운 겨울을 항하여 짓는다
한 방향으로 흐르는 작은 강을 따라
우리들은 입을 다물고 걸어간다
저녁 그림자처럼 걸어간다 마을도
나루터도 사라지고 과거도 현재도
보이지 않는다 날아가는 새들의
불길한 울음만 공중에 떠돌며
얼어붙은 겨울을 슬퍼하고
언덕도 상점도 폭설에 막히고
거리마다 바리케이트 쳐져
사람들이
어이이이이이 울부짖고
갈색 옷을 입은 사내 몇, 들리지 않는 소리로
진정하라고 말하고 또 다른 소리로
진정하라고 말하고 그 소리들이 모여
겨울나무를 넘어뜨린다
꽁꽁 언 새벽 여섯 시, 地靈처럼 걷는
사람들 새로 우리들은 걸어간다
살얼음의 아픔이 여울마다 일어나고
흰 말의 무리가 하늘의 회오리 속으로
경천동지하며 뛰어올라 갈기를 날리고,
우리와는 다른 방향으로 일단의 사내들이
사냥개를 끌고 온다 개들이 짓는다
이제는 얼어붙은 우리들의 꿈이여
눈과 같은 결정체로 三韓의 삼림에 내리어오라
아침 유대 / 최하림
숲속에서 아이들이 온다
아이들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포르릉포르릉
날며 이른 아침 들판으로
햇빛을 몰고 온다
아이들은 두 손으로 가지를
휘어잡고 가지들이 튀어오르는
탄력으로 공중에 무지개 뿌리며
저 하늘은 무엇일까? 저 나무들은?
꽃들은? 벌레들은? 이라고
의문 부호를 붙이면서
아이들은 떼지어 온다
푸른 숲으로부터 온다
사립문 새로 속살이 희게 드러난
길이 열리고 어머니가 가리마 탄
머리를 들고 온다
어머니와 아이들의 눈이 마주친다
어머니와 아이들이 입을 벌리고 웃는다
어머니와 아이들은 무어라고 감정을
소리 높여 표현하지만 햇살의 강도
때문에 소리들은 날아가버리고
우리에게는 미소밖에 보이지 않는다
미소 속으로 아버지가 쇠스랑을 메고
온다 이슬 젓은 잠방이 바람으로 온다
(오오 고통스런 세상으로 오시는 아버지!)
노동으로 빛난 얼굴을 하고 아버지는
사립으로 온다 우리 가족은 모두
아침의 유대 속에서 아침의 빛을 뿌리며
온다 새로운 아이들이 따뜻한 유대 속으로
온다 무성한 시간의 숲을 헤치고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포르릉포르릉 날며
葉篇 二題 / 김춘수
늪
眉壽지난 이무기는 죽어서
용이 되어 하늘로 가고
놋쇠 항아리 하나
물먹고 가라앉았다. 지금
개밥 순채 물달개비 따위
서로 삿대질도 하고 정도 나누는
그 위 아래.
眉 눈썹(미)
산
그가 그려준 산은
짙은 옻빛이다.
그런 산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데
볼 때마다 지긋이 내 어깨를 누른다.
없는 것의 무게다.
썩은 풀 / 천양희
썩은 흙에서 풀이 돋고
썩은 풀이 반딧불을 키운다
썩은 것이 저렇게 살다니
썩은 풀의 소신공양!
썩고 썩은 풀이여, 마음은
너무 빨리 거름이 되는구나
나는 아직
속 썩은 인간으로 냄새를 풍긴다
풀밭은 또 저만치서
썩은 풀을 피운다
나에게 썩은 것이 있다면
썩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대관령 자작나무를 괜찮은 듯이 서 있다 / 박용하
시계 불명의 대관령을 오른다, 안개는 구름보다 낮게 흘러서
더 육체적인 황홀감을 가져다 준다
백 미터 이백 미터------ 팔백 미터의, 해발의 나무들은
덜 먹고 자란 아이들처럼 키가 작다, 몸집이 작다
하지만 산의 정상에 서 있는 나무와 풀들은 그 가냘픔으로도
산의 정상을 지킨다
작은 것의 엄청남, 나는 그런 것들을 사랑하다 망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런 것을을 열심히 즐거워하다가 취해버릴 수 있을까
새들은 죽은 휴지처럼 나무에 가끔 걸리고 이곳은 구름이 가깝고
도시는 먼 곳,ㅡ 나는 거기서 오래 호흡하여도 좋았다
하지만 산의 정상은 사람들을 오래 허용하지 않는 곳
이 고개를 드나드는 차들처럼 점점이 이동하여 점점이 흩어지고
대관련의 자작나무는 더 강한 폭풍에 시달릴수록
더 청수한 얼굴을 보여준다
햇살은 안개를 투과해 내려올 것이다
그리고 여긴 스스로를 견디는 시간이 오래 추억이 될
나무들 풀들, 사람들이 금세 여기를 떠나듯이 쉽게
대관령의 자작나무는 표정을 바꾸지 않는다
견딤의 눈물을 바꾸지 않는다
우리가 정상을 향해 오른다고 하는 이 열망은
바람을 헤치며 안개를 통과하며 폭설 속에서 걸어 나와
하나의 햇살과 마주치는 일
하나의 흔적과 마주치는 일
대관령의 자작나무는 괜찮은 듯이 서 있다
그러나 이 나무들은 전육체의 중심을 다해
산정상에 눈물 보이지 않게 서 있다
나는 오래 죽어갈 것이다.
미시령 큰바람/
아 바람!
땅가죽 어디에 붙잡을 주름 하나
나무 하나 덩굴 하나 풀포기 하나
경전(經典)의 글귀 하나 없이
미시령에서 흔들렸다.
풍경 전체가 바람 속에
바람이 되어 흔들리고
설악산이 흔들리고
내 등뼈가 흔들리고
나는 나를 놓칠까봐
나를 품에 안고 마냥 허덕였다.
風笛 / 장석남
네 눈동자 속 마른 나뭇잎
네 눈동자 속 때 절은 내
청춘의 숙박부
네 눈동자 속
느닷없는 우박떼
허공 가득 한꺼번에 두리번두리번, 토란잎들
구절초 / 이영진
회순 적벽 가는 길 가에 구절초 피고 수몰지 물그림자 단풍져 붉다. 낡은 자전거에 도시락을 얹고 폐달에 힘을 주며 폐광이 다 된 광산을 향해 광부 하나 하향게 가고 있다. 불이었던 옛 사내, 어둔 땅 속으로 불을 캐러 간다. 푸른 하늘가. 농창 익은 연시가 불송이보다 더 맑은 대낮, 화순 적벽 가는 길가에 구절초 피어 저 홀로 한세상 깊어만 가고
원피스 / 오규원
여자가 간다 비유는 낡아도
낡을 수 없는 生처럼 윈피스를 입고
여자가 간다 옷 사이로 간다
밑에도 입고 TV 광고에 나오는
논노가 간다 가고 난 자리는
한 物物이 지워지고 혼자 남은
땅이 온몸으로 부푼다 뱅뱅이
간다 뿅뿅이 간다 동그랗게 부풀어
오르는 땅을 제자리로 내리며
길표양말이 간다 아랫도리가
아랫도라와 같이 간다
윗도리가 흔들 간다 차가 식식대며
간다 빈혈성 오후가 말갛게 깔리고
여자가 간다 그 사이를 헤집고 원피스를 입고
낡은 비유처럼
밤의 주유소 / 김명인
밤 두시의 주유소는 몇 개 가등으로
제가 잠들지 않았음을 알린다. 검은 고요가
이미 오래 전에 길을 끊었는데 가끔씩은
졸음에 겨운 주인을 흔들어 깨우는 목마른 고객이 있다
도대체 새벽 두시란 어떤 식욕이 피곤을 이기는
밤참의 시간이란 말인가.
다만, 잠긴 가겟문을 두드리는 늙은 주정꾼
처럼 그렁거리며 차가 멈춰 설 때
열대여섯, 그쯤일까, 하품을 가득 문 사내아이가
주유구 깊숙이 남성을 들이민다
미로의 자궁까지 석유가 가 닿는 동안 차는 여성성이다
그가 나를 채웠으므로 기관은 이내
작동을 시작하리라
하지만 너무 먼 길을 돌아왔으므로 저 경광
표지등 아래 잠시 동안 속도를 부리고 선
쇠의, 노곤한 피로, 검은 몰약으로 닦아내는
적막을 깨드리며 밤의 주유소는 있다
그러므로 어떤 속도로도 아직 경험되지 않은
캄캄한 시간을 향해
낡은 차는 다시 기운을 차려 떠나야 한다
흑암의 심연을 파먹는 흡반, 헤드라이트 꺼지기 전
나는 노래한다. 모든 문명의 운명인
검은 석유의 꿈을, 그 정거장인 밤의 주유소조차!
저 흐릿한 이정표가
잠시 잊었던 너의 방향을 이끌리라
멈추기 전까지는 가야 하므로 누구도
이 밤의 미아는 아니다, 이곳 또한
종착역이 아니었으므로 .
장수산 1 / 정지용
伐木丁丁 이랬거니 아람도리 큰솔이 베혀짐즉도 하이 골이 울어 맹아리 소리 찌르렁 돌아옴즉도 하이 다람쥐도 좃지 않고 뫼새도 울지 않어 깊은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데 눈과 밤이 조희보담 희고녀! 달도 보름을 기달려 흰 뜻은 한밤 이골을 걸음이란다? 옷절중이 여섯판에 여섯번 지고 웃고 올라 간뒤 조찰히 늙은 사나히의 남긴 내음새를 줏는다? 시름은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우노리 오오 견디란다 차고 凡然히 슬픔도 꿈도 없이 長壽山속 겨울 한밤내-
공장지대 / 최승호
무뇌아를 낳고 보니 산모는
몸 안에 공장지대가 들어선 느낌이다.
젖을 짜면 흘러내리는 허연 폐수와
아이 배꼽에 매달린 비닐끈들,
저 굴뚝과 나는 간통한 게 분명해!
자궁 속에 고무인형 키워온 듯
무뇌아를 낳고 산모는
머릿속에 뇌가 있는지 의심스러워
정수리 털을 하루종일 뽑아낸다.
애린 2 / 김지하
흰 벽 위에서 더는 붉게 타지 않고
하늘은
흰 손수건에 이젠 푸르게 물들지 않는다
정이월 뜨락에
하우스에서 옮겨온
활짝 핀 튜립꽃을 보다
소름끼쳐 너무 무서워
문 닫아버리고
문고리 걸어 몇 번이나 다시 잠그고
솜이불 속에 숨어 식은 땀 흘리며
몇 날 며칠을 앓았던가
거리로부터 지축 울리는 쇳소리 경음악 소리
프라스틱이 플라스틱 스치는 서쪽 바람 소리
싸우고 헤어진 그 젊 애 그 번들대던 눈
입 속에서 콧 속에서 퍼지는 사리돈 약내
시퍼런 동백잎 위에 파열하는 은빛 강철의 햇살
아아
여린 살갗으로 이제
공기 속에마저 더는 설 수 없구나
애린
애린
너는 지금 어디 있느냐
봄언덕 / 곽재구
냉이꽃들이 바람에 하염없이 흩날리네
황톳길 칠십리 하룻길이 아직 멀었는데
눈에 부딪는 산과 강 다 그리워
버리지 못하고 가슴에 안고 가네
사랑하는 사람아
냉이꽃밭 위 찢긴 몸 그대로 누워라
조선의 사월의 가장 맑은 바람
이 꽃밭 속에 숨어사나니
엘리베이트 속의 파리 / 최승호
썩어서도 거드름 피우는
그 놈들 코에 가 붙지 않고
하필 파리가 내 뺨에 붙었을 때
나는 죽은 꽁치들이 빽빽한 통조림 속에
머리를 내밀고 있는 느낌이었다
불쾌했다
내 안에서 부패가 진행되고 있는 느낌이랄까
나는 손을 들어 파리를 쫓았다
그 동작이 늪수렁에 빠져 살려고 버둥거리는
허우적거림으로 비쳤을지 모르겠다 죽음에 둘러싸여
무력했지만 파리 쫓을 힘은 있었다
빌딩을 오르내르는 날개 없는 요일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고 있었다
올라가도 거대한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듯
함몰과 큰 추락에 대한 공포에 나는 떨고 있었다
비디오/천국 / 하재봉
OFF LIMT
차단기가 내려지고 몇 겹으로 둘러쳐진 전기철조망
체격 좋은 위병들이 착검을 하고
부동자세로 서 있는 문 앞에서
나는 거절당했다
주민등록증이나 크레디트 카드, 공무원 신분증
혹은 운전면허증이나 지하철 정기할인권도 없으므로
나는 증명할 수 없다
내가 그들 제국의 착한 시민이라는 것을,
얼굴 없는 배후 조종자들 찾아야만 한다
이름과 주소, 생년월일도 생각나지 않는
나의 죄를 허위로 날조하여
전동타자기 앞에 앉아 껌을 씹으며
보고서를 작성하는
여자의 다리를 훔쳐보며 나는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해가 졌다
그리고 평생이 흘러갔다.
벽지 / 이수명
집에 돌아와 손을 벗었다. 열쇠 꾸러미 같은 손이 소파 위에 덜여졌다. 한올 한올 올이 풀리는 손가락들, 손가락들은 집 안의 벽지를 뜯어냈다. 벽지에 잠들어 있던 물고기들을 깨웠다. 거꾸로 자라는 빛, 발톱이 없어 바닥에 서지도 못하는 빛을 빛의 어깨를 나는 밟고 올라섰다. 불은 움지이지 않았다. 물고기들이 눈을 뜬 채 모래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모든 실을 풀어 버렸다.
허공의 뼈 / 문인수
산문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이 바위 능선에 소나무 고사목 한 그루가 바람 매서운 쪽으로 힘껏 두 팔을 내지르고 있다.
선각의 몸은 깡말라 있다.
저 흰 뼈가 그려내는 오랜 수형, 그 카랑카랑한 말씀이 후른 허공을 한껏 피워올리고 있다.
그 높이 뛰어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