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도 예년처럼 / 김잠출 인간도처유청산(人間到處有靑山)이고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라. 내가 가는 어느 곳이든 다 지낼 만한 곳이 있으며 살다 보면 곳곳에 나를 뛰어넘는 고수들이 항상 있다. 그러니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고 했다. 잘 난 척하지 말고 남을 가르쳐 들지 말라고 한다. 아집과 자만을 버리면 아무리 어려운 때를 만나도 어디에서나 도와주는 사람이 나타나는 법이다. 새해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약삭빠른 군상들이 일상에서 쓰지 않던 음력을 꺼내 10간 12지에 오행 오상을 덧칠해 ‘청룡의 해’가 돌아온다고 벌써 호들갑이다. 보통 사람들은 거기에 몰두하지 않는다. 그냥 내년에도 올해처럼, 예년처럼 지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다시 한 해를 마무리하며 새해를 맞는 나도 그렇다. 지금까지 차마 떨쳐 보내지 못했던 세 반려-견(犬이나 見이나) 가운데 편견과 선입견이란 두 개의 ‘견’과는 작별을 하고 싶다. 이제 몽이만 데리고 살 작정이다. 더 이상 함께 해서는 안 되는 두 반려 ‘견’은 잊어야겠다. 12월이라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술이부작(述而不作)을 되새기자 저널리즘이 사라졌다고 한다. 저널리즘의 위기라고 한다. 말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우리 언론은 온통 정치 이슈에 매몰되어 정치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중계하듯이 옮겨댄다. 개인 푸념이나 소소한 일상이 담긴 SNS를 보고 기사로 인용한다. 분석 기사나 논평을 봐도 허접하긴 매한가지다. 비판을 위한 비판만이 넘쳐나고 저주와 악의적 비난, 비아냥이 주를 이룬다. 원인은 언론의 정치 편향성 때문이다. 마치 전쟁이 끝난 뒤 많아진 묘목(眇目)의 무리를 보는 것 같다. 개인 의견이 사실로 둔갑하고 혼자 생각을 공론으로 포장하기도 한다. 언론 스스로 감시자 대신 정치행위자가 되었고 정치권력을 쥐고 행사하는가 하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애쓴다. 자신과 맞는 특정 정파의 이념과 주장만 확산하고 그들의 아젠다 전파에 온 힘을 쏟으며 진영에 복무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러니 많은 이들이 언론을 불신해 ‘기레기’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가 보다. 기레기는 우리나라 저널리즘의 위기를 상징하는 말로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환경감시 기능이나 권력 감시, watch dog이란 용어는 이미 무용지물이 되었고 무관의 제왕이라며 칭송받던 저널리스트, 언론인의 영광은 폐기됐다. 언론인, 기자도 그냥 하나의 직업인으로만 인정받는다. 그저 글 좀 쓰는 기술을 가진 단순 월급쟁이나 정보 유통상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언론의 공적 책임에 관한 기능을 기대할 수가 없게 됐으니, 사람들은 “기레기 대신 AI 기자로 대체하는 것이 낫겠다.”고 말한다. ‘팩트’에 더욱 충실하고 술이부작의 객관적 서술 정신을 복기해 봐야 할 때다. 최근 방송 신문마다 팩트체크란 말이 유행이다. 서로가 진실게임을 벌이듯이 팩트란 단어에 경쟁하고 있다. 헌데 말만 그렇지, 가짜뉴스는 더 기승을 부리고 피해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오죽하면 정부 차원에서 가짜뉴스 추방운동까지 벌이겠나?
사단은 언론 스스로가 불러온, 언론의 원죄, 자승자박이란 관점에서 찾는 게 옳겠다. 언필칭 언론인 또는 기자라는 자들이 너무 많아졌고 정식 언론조차 독립운동가나 혁명가를 자처하니 기사나 해설, 평론이 격정적이고 사생결단의 결기가 풍긴다. 그들에게 팩트는 중요하지 않다. 사감에 휘둘려 내보이는 기사에다 스스로 심판관이 되어 판결하고 결론 내리고 정의의 사자인 척 행세하니 시청자나 독자가 곧이곧대로 믿어 주겠는가. 사실인지 진실인지를 가리는 것은 오로지 미디어 수용자의 몫이라며 책임을 떠넘겼다. 하지만 수용자 역시 정파와 정치 성향에 따라 양극단으로 갈렸고 자신만의 시선에 갇혀 언론을 취사선택하니 내 편이 아니면 죽여야 하는 대상으로 폄하해 버린다. 그러다 보니 확증편향을 신념이라고 믿는 이들이 널리 퍼졌다. 믿고 싶은 정보에만 경도되어 진실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기도 한다. 결국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저널리즘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진다. 공자의 역사기록 정신인 ‘述而不作’의 정신을 취재기자의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있는 그대로, 사실을 보도하며 내 맘대로 창작하지 않는다는 정신이다. 이를 역사서술의 측면에서 보면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 하는데 이는 사사로운 이해관계나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기술하되 공(功)은 공대로 과(過)는 과대로 정직하게 기록하는 방법이라고 배웠다. 춘추필법에는 세 가지 정신-기사(記事)와 정명(正名), 포폄(褒貶)이 포함된다. 기사는 팩트를 기록하는 일이다. 공자는 기사를 쓸 때 술이부작이란 원칙을 엄격하게 지켰다. 서술하되 없던 사실을 꾸며대거나 창작하고 비틀고 거짓으로 쓰지 않는다. 굳이 주석이나 해석을 달아서 주관을 버무린 기록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역사란 팩트이지 픽션(fiction)이 아니다. 픽션은 사실이 아닌 상상으로 쓰인 이야기나 소설이다. 실제에 근거를 두지 않고 만들거나 거짓으로 꾸며낸 것이다. 정명은 명분을 바로잡는 것이고 포폄은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일이다. 올바른 명분에 따른 것은 칭찬하고 장려하며 높이 평가하고(褒) 옳지 못한 것은 꾸짖고 깎아내리며 냉정하게 비판해야 한다(貶). 그래서 명분에 맞는 전쟁은 정벌(征伐)이라 해서 드높이고 그렇지 못한 전쟁은 침략(侵略)이라고 기록해야 한다. 기사의 가장 근본은 충실한 취재를 바탕으로 한 팩트이다. ‘팩트’라는 당연한 명제와 그 명제에 충실한 기사가 제대로 된 기사이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지금 반저널리즘의 나라, 미디어 수용자인 내가 스스로 팩트를 확인하기 위해 공부하고 애써야 하는 역설의 시대에 살고 있다. 오늘날 훌륭한 역사가는 언론인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매일 기록하고 포폄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니 말이다. 언론에 의해 선택되고 기록되어 전하는 ‘오늘의 사건, 사고와 현장’은 내일엔 역사가 된다. 술이부작의 정신을 회복해야 하는 이유이다. 술(述)이라는 글자에 창작이나 왜곡을 뜻하는 내용이 들어 있지 않다. 다만 팩트에 충실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석하고 설명하고 토를 달아 글로 적는다는 뜻이 있다. 젠장! 언론인이라면 자기가 잘 먹고 잘살기 위해 일해서는 안 된다. 세상이 조금 더 나아지고 한 발 더 진화하는 데 보탬이 되는 사람이어야 한다. 방송 블랙리스트
1985년 방송에 입문해 천방지축 뛰며 펜과 마이크를 사용한 지 38년여가 지났다. 돌아보니 그리 대단한 성과도 큰 실수도 없어서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지난 온 길이 늘 탄탄대로는 아니었으되 가시밭길도 아니었다. 유별난 특종기자가 아니어도 그리 별스러운 낙종도 없어 살아남았고 흔한 방송 대상이나 지역방송인 상도 받지 못했다. PD와 기자, 데스크와 라디오 진행, 심의와 홍보, 정책기획과 시청자미디어센터를 돌고 돌면서도 매번 꼴찌는 면했어도 늘 선두에 서진 못했다. 나날이 세파를 헤치며 현상을 본다고는 했지만 정작 그 안에 든 원인을 파악하고 대안을 제시하는데는 서툴렀다. 하늘을 쳐다보며 위를 선망하며 꿈을 꾸면서도 바닷속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파악하지를 못했다. 언제나 파도를 보면서 바람을 보지 못한 것은 가장 큰 나의 약점이었다. 파도를 만드는 건 바람인데 말이다. 지역 문인의 출판 기념회에 갔다가 초면의 문인들을 만났다. 처음 본 두어 분과 인사하는데 목소리가 기억난다고 해 금세 친해졌다. 사람의 목소리는 사람마다 달라 제2의 지문이라고 한다더니 생면부지 상대와 나눈 첫인사에 바로 공통점을 찾았다. 소리의 무늬, 성문 덕분이다.
한 사람은 시사교양 방송과 지역 공헌, 뉴스 보도 등 인상적인 몇 부분을 환기해 줬고 한 분은 자신의 공모전 수상 소식을 전해 함께 축하하며 기뻐했다. 그러다가 지역 문단의 상금 나눠 먹기와 해마다 공모전에 등장하는 단골 문인들을 거명하기에 이르렀다. 다들 기성 문인들의 공모전 쇼핑이 민망하다는 비판에 나섰다.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지적이었지만 듣고 보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상금을 목적으로 하는지 이름을 알리기 위해선지 모르지만, 추태는 추태라는 의견에 맞장구를 쳤다. 이미 여러 매체를 통해 등단했거나 수상한 경력이 있는 기성 작가들. 그들은 신춘문예에 다시 응모하는 일도 있고 복수의 신춘문예 경력을 자랑스레 공개하기도 한다. 아무리 ‘지줌 잘난 맛에 사는 세상’이라지만 새내기 문인들에게 양보할 줄 모른다. 모두가 이기적이고 경쟁에서 살아남으려 애쓰는 세태라지만 문학판마저 죽기 살기로 다투는 건 미덕이 아니다. 방송 경력 중에 기억에 남는 여러 에피소드 중에 ‘꾼’을 막기 위한 ‘자체 블랙리스트’가 떠오른다. 유선 전화와 엽서로만 시청취자와 소통하던 시절, PD나 작가는 전문 꾼들을 골라내는 데 애를 먹었다. 꾼은 주유권이나 가족 식사권 등 소소한 상품은 물론 연말쯤이면 TV나 냉장고, 전자레인지 등 대형 상품을 싹쓸이하는 장본인이다. 주소를 전국으로 변경하거나 필체를 달리하기도 했고 목소리를 변조해 가면서 전화 참여를 일착으로 한다. 온갖 주소와 이름들을 모두 동원하는 전문가였다.
처음엔 잘 몰랐지만 게스트 DB까지 만들었던 내가 가만있을 리 없어 나섰다. ‘상습범’을 가려내고 전 프로그램 제작진들에게 회람시켜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 방송은 다양성이 중요하고 경품도 지역과 청취자들이 골고루 받아 가야 한다면서 설쳤던 것 같다. 아무리 뛰어난 전문가이고 엄지척인 게스트라도 타 방송에 출연하는 사람은 다시 쓰지 않고 새 인물을 발굴하거나 교육을 해서라도 A급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라고 후배들을 닦달하기도 했던 것 같다. 요즘은 이곳저곳 겹치기에 한 사람이 오전 오후 방송국을 순례하는 등 독식하는 경향이 많아 보인다. 그래도 PD들은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을까? 유모차가 아니라 유아차란다 한때 가장 빠른 연락 방식이었던 ’전보’가 완전히 사라졌다. 138년 만이다. 고향 집에 전화기를 놓기 전까지 가장 빠른 연락 수단이었다. 군대 간 아들이 소총 산다고 전보치고 포탄 잃어버렸다고 전보를 치던 시절도 있었다. 새 학기를 앞두고 등록금 빨리 보내라고 전보를 친 적도 있었다. 그러던 우리가 빛의 속도로 대화하고 모든 정보를 손바닥에서 찾는다. 자연스럽게 느린 것은 모두 사라져 간다. 속도전 시대엔 빠른 것만 살아남는다. 미디어도 그렇다. 언제나 뉴미디어가 있었지만, 지금은 유튜브가 가장 영향력 있는 매체로 자리매김했다. 이용자가 직접 콘텐츠를 만들어 판매까지 하니 ‘생비자 prosumer’ 시대를 맞았다. TV/R이 올드미디어로 밀려나 종언을 고할 판이다. 구체적인 숫자도 나왔다. 유튜브 이용자들의 하루 동영상 시청 시간이 5년 만에 10배 늘어 10억 시간을 기록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지난달에 보도했다. 시청률 조사기관 닐슨이 집계한 미국 국민의 하루 TV 시청 시간인 12억 5천만 시간에 육박하는 수치라 한다. 최근 시청한 유튜브 중에 ‘유아차(乳兒車)’ 논란과 ‘반말이=반마리?’ 영상이 기억난다. 유아차는 5년 전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이 ‘유모차’(乳母車) 대신 사용하라며 권장했다는데 나로선 처음 듣는 단어다. 유모차가 ‘엄마가 아이를 태우고 끌고 다니는 차’라는 의미라 부모의 역할을 한정 짓게 한다는 이유에서였다고 하는 데 아직 공감되지는 않는다. 발단은 한 유튜브 예능이었다. 유명 연예인 출연자가 유모차를 반복해 말하자 자막은 유아차로 수정돼 나왔다. 찬반 의견이 많아 조회수가 200만을 넘겼다는데 국립국어원은 “현재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유모차와 유아차가 모두 표준어로 등재되어 있으므로, 두 표현 모두 표준어로 볼 수는 있다.”라고 했다. 마구 웃었던 또 다른 유튜브는 ‘반말’을 소재로 한 설정이었다. 어느 식당에 진상 손님이 왔다. 알바는 그의 반말에 같이 반말로 응대한다. 505만 회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꼰대의 반말에 이렇게 대꾸한다. “니가 반말하니까 나도 반말하지?” “이거 왜 반말이야? 아냐 이거 한 마리야~” “말이 짧다. 그래? 그럼 길게 할게”
우리 어릴 때는 말에 대해 참 많은 걸 배웠다. 말조심 입조심하고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거기에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말로는 못 할 말이 없다. 말속에 뼈가 있다, 말이 씨가 된다. 입이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라. 세 번 생각한 다음에 말해라. 세 치 혀가 사람 잡는다. 말이가? 방구가? 등등 그래서 군자는 되도록 말을 어눌하게 하려 애쓴다고 했다. 어눌하게 말하라는 뜻이 아니라 이치에 맞는 말을 중시하라는 가르침인 것 같다. 이치에 맞는 말을 하려면 시비를 가리고 곡직(曲直)을 분별할 줄 알아야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얼마나 자주 하고 들었던가. ‘말’과 ‘소리’가 다르니 차이를 알아야 한다. 말처럼 실행하지 못하면 부끄러워해야 하고 말에 책임을 지고 소리가 아닌 말을 해야 한다. 지금 우리 방송을 보면 그렇지 못한 자들이 많다. 특히 정치인들은 사람의 말과 동물의 소리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잦다. 소리만 냅다 지르면 그때만큼은 그는 사람이 아닌 짐승이 되는데도 방송은 그걸 뉴스라고 내보낸다. 소리는 결국 소음이 되어 나로 하여금 귀를 막게 만든다. 내년에도 예년처럼
세상에는 볕이 내리던 때도 많았고 그것도 노곤하게 흐르는 봄볕이었다가 여름날의 뜨거운 뙤약볕이었다가 하늘이 높은 서늘한 가을 날씨로까지 이어져 오던 것이 오늘은 어느덧 가슴에 스미듯이 옥타브도 낮게 흐르네 (박재삼의 ‘가을비’ 중에서) 해가 저문다. 나이 한 살 더 먹는 게 그리 달갑지는 않다. “해마다 추위와 더위 반복되니, 내년에도 지난해와 같겠지.” 하던 옛사람의 글이 생각난다. 내년에도 예년처럼 지나길 기대한다.
지용 시인은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라고 노래했다. 지용에게 그런 옥천이 있었다면 내 곁에는 언제나 가지산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가는 태화강이 있다. 은유가 부족하고 문장을 더 다듬어야 한다는 어느 독자의 질책을 안고 연재를 마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