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동과 면목동, 경기도 구리시에 걸쳐있는 망우산은 해발 281.7m이며 망우산 일대에는 서울시립장묘사업소 망우묘지가 있다. 이곳이 공동묘지로 지정된 것은 1933년 5월 27일 경기도의 임야 일부를 경성부에서 양도받아 공동묘지로 사용하게 되면서부터이다.
현재 서울시 안에 있는 유일한 공동묘지로 총면적 190,884평에 약 28,500기의 분묘가 있으며 1973년 3월 25일 봉분이 가득차서 더 이상 묘지 구하기가 어렵다.
망우리공원에서는 우리나라 어린이운동의 효시인 방정환, 독립운동가이며 민족대표 33인의 한부인 오세창, 한용운, 우두보급의 선구자로 의학자이며 국어학자인 지석영, 임시정부 내무부서기를 역임한 독립운동가 문명훤, 동일일보 주필과 한국민주당 창당을 주도했던 장덕수, 제헌국회의원이며 진보당 당수였던 조봉암 등의 묘소가 있으며, 이들 일곱분의 애국지사 및 유명인사 연보비가 공원내 산책로 조성과 함께 지난 '97년 2월에 설치되었으며 이어서 '98.2월에 시인 박인환, 독립운동가 문일평, 서병호, 서동일, 오재영, 서광조, 유상규, 교육가 오긍선 등 여덟분의 연보비가 추가로 설치되어 역사의 교육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또한 망우동 산57-1번지일대 망우리 공원 내의 순환도로 5.2㎞를 아스콘포장하여 산책로를 만들었으며 산책로의 이름을 공모하여 '98.5월 사색의 길로 정하고, 도시환경과 자연관찰로, 종합안내판, 나무정자, 약수터 등이 새로이 설치되어 구민의 휴식 및 자연공원으로 많은 시민들이 찾고 있다.
세계 일보 기사-기인열전..내 멋에 산다.
통속적인 것을 거부한 “댄디 보이”/여름에도 정장 즐긴 멋쟁이… 폭음으로 30세에 요절/명동 단골술집서 취기 오르면 즉석 詩 줄줄이…/낙원 동서 서점경영… 한국 모더니즘 시운동 본거지로/중학교 때 영화문학에 심취… 시집 열독에 밤 지새우기도
1956년 이른 봄. 전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어느 정도 복구되어 제 모습을 찾아가는 명동 한 모퉁이에 자리잡고 있는 「경상도집」에 몇 명의 문인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마침 그 자리에는 가수 羅愛心(나애심)도 함께 있었는데,몇 차례 술잔이 돌고 취기가 오르자 일행들은 나애심에게 노래를 청했다. 그러나 나애심은 노래를 하지 않았다. 朴寅換(박인환)이 호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더니 즉석에서 시를 써내려갔다. 그것을 넘겨다보고 있던 李眞燮(이진섭)이 그 시를 받아 단숨에 악보를 그려갔다. 그 악보를 들고 나애심이 노래를 불렀는데, 그 노래가 바로 「세월이 가면」이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의 눈동자 입술은/내 가슴에 있어//바람이 불고/비가 올 때도/나는 저 유리창 밖/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사랑은 가고/과거는 남는 것/여름날의 호숫가/가을의 공원/그 벤치 위에/나뭇잎은 떨어지고/나뭇잎은 흙이 되고/나뭇잎에 덮여서/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의 눈동자 입술은/내 가슴에 있어/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한 시간쯤 지나 宋志英(송지영)과 나애심이 자리를 뜨고, 테너 林萬燮(임만섭)과 명동 백작이라는 별명의 소설가 李鳳九(이봉구)가 새로 합석했다. 임만섭은 악보를 받아들고 정식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 소리를 듣고 명동거리를 지나던 행인들이 술집 문앞으로 몰려들었다.
해방 후 평양의학전문 대학을 중퇴하고 서울로 돌아온 박인환은 부친과 이모로부터 차입한 돈 5만원으로 시인 吳章煥(오장환)이 낙원동에서 경영하던 20평 남짓한 서점을 인수받아 초현실주의 화가 朴一英(박일영)의 도움을 받아 간판을 새로 달고 재개업한다.
이것이 한국 모더니즘 시운동의 본거지 역할을 했던 서점 「茉莉書舍(마리서사)」이다. 서점 명칭은 일본시인 安西冬衛(안서동위)의 시집 「軍艦茉莉(군함마리)」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고, 프랑스의 화가이자 시인인 마리 로랑생의 이름을 땄다는 설도 있지만 확인은 불가능하다. 「마리서사」의 서가에 진열된 책들 대부분은 박인환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책들이었는데, 문학인들과 예술인들을 위한 전문서점이었다. 앙드레 브르통, 폴 엘뤼아르, 마리 로랑생, 장 콕토와 같은 외국 현대시인들의 시집, 「오르페온」「판테온」「신영토」「황지」와 같은 일본의 유명한 시잡지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마리서사」에는 하루도 시인이나 소설가 화가들이 모여들지 않는 날이 없었다.
金光均(김광균) 이봉구 金起林(김기림) 오장환 張萬榮(장만영) 鄭之溶(정지용) 金光州(김광주) 등 시인 - 소설가들,「新詩論(신시론)」동인 金洙暎(김수영) 梁秉植(양병식) 金秉旭(김병욱) 金璟麟(김경린) 등, 조향 이봉래 등의 「후반기」 동인들, 화가 최재덕 길영주들이 「마리서사」의 단골손님들이었다. 특히 김수영은 박인환과 동년배로 동인활동을 함께 하며 「새로운 都市(도시)와 市民(시민)들의 合唱(합창)」이라는 앤솔로지를 내기도 하는 등 두터운 교분을 가졌다. 그러나 나중에 둘 사이는 소원해졌다. 김수영은 진보주의자이며 서구적인 새로운 것에 경도되었던 박인환의 취향을 경박하며 값싼 유행의 숭배자라고 몰아붙이며 경멸하고, 박인환은 김수영이 세속적인 눈치만 보는 속물이라고 비난했다.
박인환은 1926년 8월 15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에서 출생했다. 부친 朴光善(박광선)은 중등교육을 마친 사람으로 면사무소에 다니고 있었는데, 토지도 어느 정도 소유한 시골 살림으로는 비교적 부유한 편이었다. 인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박인환은 머리가 좋고 똑똑하여, 부친은 아들 교육을 위해 면사무소를 그만두고 서울로 생활터전을 옮기며 산판업을 시작한다. 가족들이 인제에서 서울 종로구 원서동 언덕배기로 이사를 하고, 그는 덕수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한다. 1939년 박인환은 경기공립중학교로 진학하는데, 이 무렵 영화와 문학의 세계로 빠져들어 공부 대신에 일어로 번역된 세계문학전집과 일본 상징파 시인들의 시집을 열독하느라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결국 교칙을 어기며 영화관을 출입한 것이 문제가 되어 경기중학을 중퇴한 그는 한성학교 야간부를 거쳐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에 편입하여 그곳을 졸업한다. 졸업 뒤 부친의 강요로 3년제 관립학교인 평양의전에 진학하지만, 해방이 되자마자 학업을 중단하고 서울로 내려온다.
훤칠한 키에 수려한 얼굴을 한 미남자 박인환은 당대 문인 중에서 최고의 멋쟁이, 「댄디보이」였다. 여름에도 정장을 하곤 했던 그는 『여름은 통속이고 거지야. 겨울이 와야 두툼한 홈스펀 양복도 입고 바바리도 걸치고 머플러도 날리고 모자도 쓸 게 아니냐?』고 말했다. 어느날 그는 친구들 앞에 땅끝까지 내려오는 긴 외투를 입고 나타나 『이게 바로 에세닌이 입었던 외투란 말이야』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에세닌이 자살하기 직전 입었던 외투 사진을 본떠 미군용 담요로 지어 입은 것이. 그와 가까이 지냈던 시인 金次榮(김차영)은 말한다.
『그가 입고 다닌 양복은 외국 고급천에 일류 양복점의 라벨이 붙어 있었다. 거기에 흐린 날은 손잡이가 묘한 박쥐우산, 봄가을엔 우유빛 레인코트, 또 겨울엔 러시아 사람들처럼 깃이 넓고 기장이 긴 진회색도 검정도 아닌 중간색의 헐렁한 외투를 입고 다녔다』
박인환은 통속적인 것을 혐오하고, 원고 쓸 때는 구두점 하나에도 신경질적으로 까다롭게 굴고, 싫어하는 사람과는 차도 한 잔 함께 마시지 않는 결벽증을 드러내 보이곤 했다. 수주 변영로가 금주를 선언하자 그를 찾아가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 자격이 없다며 앞으로는 「선생」자를 떼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문인 선후배들이 함께 모여 있던 한 영화의 시사회장에서 느닷없이 일어나 선배 평론가 백철을 향해 『어이,백철씨 저걸 알아야 돼. 저걸 모르고 무슨 평론을 한단 말이오!』라고 일갈했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그가 생애 동안 가장 사랑했던 것 중의 하나가 책이었다. 『그는 보기 드문 愛書家(애서가)였다. 양으로는 대단치 않았으나 책을 다루는 폼이 이만저만한 애서가가 아니었다. 이 회고담이 실릴 「현대문학」만 하더라도 손때가 묻지 않도록 유산지나 셀로판지에 씌워 가지고 다녔다』라는 장만영의 회고대로 그는 보기 드문 애서가였다. 당시 한국일보에 다니던 시인 金奎東(김규동)의 사무실에 가끔 나타나 『 吳昔泉(오석천) 선생을 만나야 한다』고 우물쭈물 앉아 있다가 김규동이 자리를 비우면 그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경제나 정치서적까지 슬쩍 집어 들고가 수집하곤 했다.
『한잔의 술을 마시고/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木馬(목마)를 타고 떠난 淑女(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소리만 울리며/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傷心(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사랑의 진리마저 愛憎(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세월은 가고 오는 것/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고 노래했던 박인환은 1956년 3월 20일 오후 9시에 세상을 떠났다. 李箱(이상)을 좋아했던 그는 이상의 기일인 3월 17일 오후부터 주변 사람들과 함께 이상을 추모하며 폭음을 했다(그러나, 이상이 실제로 죽은 것은 1937년 4월 17일 새벽 4시경이었다). 그날 박인환은 옆자리에 있던 이진섭에게 「인간은 소모품. 그러나 끝까지 정신의 섭렵을 해야지」라고 메모한 것을 주었다.
『누가 알아? 이걸로 절필을 하게 될지…』
메모지를 건네며, 무슨 예감이라도 했던 사람처럼 박인환은 씩 웃었다. 20일 밤 만취상태로 세종로에 있던 집에 돌아온 그는 『생명수를 달라』는 부르짖음을 유언처럼 남기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우리 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靑春(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인생은 외롭지도 않고/그저 雜誌(잡지)의 표지처럼 通俗(통속)하거늘/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그는 「잡지 표지처럼 통속」적인 인생의 무엇을 끝까지 응시하려고 했던 것일까. 그의 갑작스런 부음에 놀라 21일 새벽 그의 집으로 모여든 친구들은 차디찬 방에 꼿꼿이 누워 천장을 향해 눈을 치뜨고 있는 그의 시신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 치뜬 눈을 송지영이 감겨주었고, 또 다른 친구가 그의 시신에게 조니워커를 따라주었다. 그의 시신이 시인장으로 망우리에 묻힐 때 그의 지인들은 그가 좋아했던 조니워커와 카멜 담배도 함께 묻어주었다.
<장석주 작가>..세계일보
박인환의 시세계
해방후 "신시론"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후반기" 동인을 주도하며 1950년대 전후문단의 총아로군림했던 박인환, 10년간의 문단 생활을 통하여 숱한 일화와 화제를 뿌리다가 비극적인 삶을 마감한 박인환에 대해서 우리는 그 풍문들에 갇혀 그의 시세계의 실상을 소홀히 해온 것이 사실이다. 1950녀대 풍운아, 앙팡테리블, 문단의 게릴라 명동 백작 등등 박인환에게 부여된 수많은 익명의 형상들에 의해서 시인으로서의 박인환의 참모습이 오히려 가려진 형국이다.
박인환은 가장 1950년대적인 삶을 산 사람이다. 그가 고백했듯이 어떤 시대보다 혼란하고 불안정한 연대에 살다가 31세의 짧은 나이로 비극적 생애를 마감했다. 젊은 나이에 청소년기를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보내고, 해방 후의 극심한 좌우익의 혼란 상황을 겪었으며, 동족상잔의 비극의 현장을 종군 기자로 생생하게 체험했다. 박인환의 30년간의 삶은 격동의 한국현대사를 압축해 놓은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박인환의 시세계는 격동의 현대사를 조망하는 하나의 관측구의 의미를 갖는다.
박인환의 시세계는 두 가지 베일로 가려져 있다. 하나는 문단사적인 베일이고, 또 하나는 모더니즘의 베일이다. 이러한 현상은 그가 문단의 풍운아였던 만큼 당연한 결과였는지 모르나 문단의 화제에 의해서 박인환의 시가 재단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문단인과 시인은 다르다는 점이다.
경박한 포즈로 문단 주변에 화제를 뿌렸을 망정 시세계 역시 경박하라는 법은 없다. 또 하나는 박인환의 시를 모더니즘의 자로만 평가하려는 경향이다. 이 역시 모더니스트의 기수로 자처했던만큼 자연스런 결과였는지 모르나 분명 또 다른 시세계가 그의 시에 자리 잡고 있다. 댄디한 풍모 뒤에 깊은 우수가 숨어 있었던 것처럼 암울한 리얼리즘의 시세계가 모더니즘의 이면에 펼쳐져 있다.
따라서 박인환의 시를 올바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가려진 이러한 두 가지 베일을 벗겨내야 한다. 그 동안 박인환에 대한 기존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 모더니즘 쪽에 관한 것이었다. 분명 후반기 동인을 중심으로 전개된 1950년대 모더니즘 문학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끝난 것은 사실이다. 심지어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은 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평이 나올 정도이다.
그러나 박인환은 모더니즘의 세계로만 매달린 것은 아니다. 박인환이 모더니즘의 기수로 자처했지만 실로 모더니즘의 정신과 기법에 훨씬 못 미치고 있다.
다시 말해 박인환 역시 모더니즘에는 실패한 시인이었다. 그러나 8,15 직후에 씌어진 비판적 리얼리즘 시나 6,25 체험을 바탕으로 한 현실 인식의 시에서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아울러 1950년대적인 한계 상황을 인식하고 절망과 좌절의 불안과 고독 등 실존적 포즈를 취함으로써 1950년대 전후문학의 당대성을 획득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박인환의 시세계는 도시 문명을 소재로 한 모더니즘 계열의 시, 해방 현실과 6,25 체험을 형상화한 리얼리즘 계열을 시로 나눌 수 있다 이 두 축이 박인환 시세계를 형성하는 기본 구도이다
목마와 숙녀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지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한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세월이 가면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혀서
우리들의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송촌 지석영선생님
송촌 지석영(松村 池錫永) 선생은 1855년 한성부중서훈동 (漢城府中署勳洞: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에서 지익룡(池翼龍)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1935년 8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의학자·행정가·어학자로서 많은 업적을남겼으며, 특히 우두법(牛痘法)의 보급에 결정적으로 공헌한 선각자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우두법은 천연두를 예방하는 일종의 예방 접종법입니다. 예전에는 두창, 마마, 손님이라고도 불리던 천연두는 유사이래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갔을 뿐아니라 다행히 생명을 구하더라도 곰보가 되는 경우가 많은 무서운 질병이었습니다.
'콩알(豆)같은 헌 데(瘡)'를 만든다해서 '두창(痘瘡)'이라 했는데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향약구급방] 하권 소아잡방 중에도 두창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지금도 30대 이상 거의 모든 남녀의 어깨에서 발견되는 도톰한 우두자국을 보면 천연두의 위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요즘은 미용을 생각해서 발바닥에 주사를 놓기 때문에 젊은이들에게서는 우두자국을 찾아보기가 쉽지않지요). 바로 이 우두법을 우리나라에 도입한 분이 지석영 선생입니다. 우두법(牛痘法)이라는 명칭은 천연두에 걸린 송아지에서 채취한 고름으로 예방 접종액을 만드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1798년 영국의 의사 에드워드 제너(Edward Jenner; 1749∼1823)가 소의 젖을 짜는 처녀들은 천연두에 잘 걸리지 않는다는 민간의 이야기를 듣고 고안한 방법입니다.
우두법 이전에는 천연두의 발원지인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들어온 인두법이 있었습니다. 인두법이란 천연두에 걸린 사람에게서 채취한 고름으로 예방접종을 하는 방법입니다. 원래는 장묘법(漿苗法; 고름을 따서 솜에 적셔 콧구멍에 넣는 방법), 의묘법(衣苗法; 고름이 생긴 아이의 속옷을 벗겨 건강한 아이에게 입히는 방법), 한묘법(旱苗法; 딱지 분말을 은관이나 거위깃털로 만든 관에 채워넣고 이것을 코로 들이마시는 방법), 수묘법(水苗法; 딱지분말을 물에 녹인 다음 솜에 적셔 콧구멍에 넣는 방법)의 네 가지 방법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사용된 방법은 네 번째의 수묘비강접종법(水苗鼻腔接種法)입니다. 인두법은 1790년 박제가가 연경을 다녀오면서 처음 소개한 것으로 알려져있으며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집(與猶堂全集)]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인두법은 완전한 방법이 아니어서 때로는 병독을 확산시킬 우려가 컸습니다.
한편 지석영 선생은 1876년 수신사 일행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스승 박영선(朴永善)으로부터 종두귀감(種痘龜鑑)을 받아 종두법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던 중, 1879년(고종 16년) 홀로 부산에 내려가 일본인이 운영하는 제생의원에서 두 달 동안 종두법을 익힌 뒤 두묘(송아지에 접종하여 접종액을 만들어낼 원액)와 종두침을 얻어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던 중 충주에 있는 처가에 들러 2살된 처남에게 최초로 종두를 실시하게 되는데, 그 일화는 지금도 전해집니다.
부산에서 배워 온 우두를 시술할 요량으로 장인에게 우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처남에게 시술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장인은 우두에 대한 지식이 전연 없어 우두를 정반대로 일본인이 조선 사람을 죽이기 위해 만든 위험한 약이라고 알고 있어 "이러한 독약을 어떻게 어린 처남에게 놓는단 말이야"고 펄펄 뛰며 단번에 거절하였다. 그리고는 지석영을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면서 다시는 우두에 대한 설명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지석영은 하는 수 없이 장인에게 "저는 바로 돌아가겠습니다"라고 인사를 하고 출발 차비를 하였다. 이 때에 장인이 "왜 떠나려고 하는가"라고 이유를 묻자 "믿지 못할 미친 사위가 어떻게 처가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더니 장인은 사위 지석영의 성의에 감탄하여 처남을 데려와 우두를 시술하게 하였다. 귀여운 처남에게 우두를 시술한 지석영은 혹 실패할까 초조하고 불안한 3일을 보냈다. 3일이 지나 우두가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의 감격을 '나의 평생을 통해 볼 때 과거를 했을 때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왔을 때가 크나큰 기쁨이었는데 그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였다'라고 후에 술회할 정도이다.
1798년 우두법을 처음 보고한 제너도 두 차례 이같은 실험을 했습니다. 그는 1789년 10개월된 장남 에드워드에게 돈두(豚痘; 돼지의 천연두)에 걸린 유모의 고름을 따서 인두법을 시험했고(에드워드는 불행하게도 지능장애로 고생하다가 21세에 사망했습니다), 1796년에는 제임스 픽스라는 이웃 소년에게 우두법을 실험했지요. 지석영 선생의 처남이 바로 한국의 제임스 픽스였던 셈입니다. 의학적 발명의 뒤에는 늘 이같이 위험한 실험이 있었던 것도 마음에 새겨볼 만 하지요.
1880년 5월 지석영 선생은 2차 수신사로 일본에 가는 김홍집을 따라가 직접 우두법을 익힌 뒤 우리나라에 돌아와 종두장(種痘場)을 차리고 시민들을 계몽하는 한편 본격적인 우두 접종사업을 실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그는 개화운동가로 몰려 충청도 덕산으로 피난을 해야 했습니다. 그해 8월 서울로 돌아온 선생은 난중의 방화로 불타버린 종두장을 부활시키고 전주와 충청도에서 우두국을 설치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종두를 실시하기에 이릅니다. 1889년 여름에는 사헌부장령이 되어 나날이 기울어져가는 시폐를 논하다가 조정의 미움을 받아 전라도 강진에 유배되기도 하였으나, 1892년 유배지에서 돌아와 다시 우두보영당을 설립하고 많은 어린이에게 종두를 실시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배지에서 지은 <신학신설>은 한글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읽어 이해할 수 있게 쓰여진 최초의 위생학이자 예방의학서라 할 수 있습니다. 백성들의 건강을 위해 우두법을 도입하려던 선생의 노력이 이렇게 순탄치 못했던 것은 천연두에 대한 잘못된 인식(천연두는 누구나 한번은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로 생각되었고 이것을 인위적으로 바꾸려는 우두법은 백성을 해치려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었습니다)과 당시 개화파와 수구파가 대립하고 있던 정국의 혼란 때문이었습니다.
일찍이 28세에 과거시험 을과에 합격한 지석영 선생은 그 후 형조참의와 승지를 거쳐 1896년에는 동래부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동래에서도 천연두가 유행할 때마다 우두법을 보급하는 데 힘썼습니다. 광무 3년인 1899년에는 그의 청원에 의해 최초의 관립 '의학교'가 설립되었고 그는 이 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1907년 의학교가 폐지되고 대한의원 의육부로 개편되면서 학감에 취임하였다가 1910년에 사직하였습니다. 현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의학교는 한의학에 조애가 깊은 선생들이 많아 역사적 변혁기에 옛 것과 새로운 것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한 지석영 선생의 철학에 어울리는 우리 나라 최초의 공식적인 서양의학 교육기관이었습니다.
그의 업적은 서양의학의 도입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1882년에 올린 상소에서는 급속한 개화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이를 위하여 일종의 훈련원을 세우자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훈련원에 당시의 세계 정세를 알 수 있는 책과 외국의 과학 기술에 관한 책들을 비치하고 여러 가지 문물을 수집하여 전국에서 뽑아온 젊은이들에게 가르치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이처럼 일찍이 개화에 눈을 뜬 그는 1890년대 후반에는 독립협회의 주요 회원으로도 활약하였습니다.
독립협회가 주최하는 갖가지 토론회에 참가하여 의견을 발표하면서 시야를 넓혀갔습니다. 다른 회원들이 대부분 서양 문물이라면 무조건 받아들이자는 태도로 쏠려있던 때 그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가졌던 듯합니다. 예컨대, 그는 음력을 주로 쓰되 그 옆에 양력을 아울러 표시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숩니다. 우리 민족에게 태음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종래 우리나라가 벼 재배에만 치중하고 보리나 밀 등 맥작을 경시해 온 것은 기후나 토질이 적합치 않아서가 아니라 보리나 밀에 비해 벼를 더 중요시하게 여긴 전통적인 관념에서 연유된 것이라 지적하면서, 밀 재배의 경제성을 설명하고 밀을 먹을 것을 주장하는 중맥설(重麥說)이라는 농서를 저술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개화가 늦어지는 이유가 어려운 한문을 쓰기 때문이라 보고 1905년에는 널리 교육을 펴기 위해 알기 쉬운 한글을 쓸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더욱이 그는 주시경 선생과 더불어 한글 가로쓰기를 주장한 선구자이기도 하였습니다. 1908년 국문연구소 위원으로 임명받고, 이듬해 한글로 한자를 해석한 자전석요(字典釋要)를 지었습니다. 한편 정약용의 저술인 아학편(兒學編)을 한자와 영어로 주석하여 각 한자에 음과 훈을 제시함으로써, 어린이 교육에도 상당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러한 그의 주장과 업적은 이후 국가의 정책에도 많이 수용되었고, 고종은 그의 공을 인정하여 태극장·팔괘장 등을 내렸습니다.
이처럼 송촌 지석영 선생은 우리나라 개화기에 나라와 국민의 근대화를 위하여 헌신한 학자였을 뿐 아니라 종두법을 보급하는 등 각종 전염병 퇴치에 앞장선 예방의학자였으며 의학교육자였습니다. 참으로 우리 개명기의 진정한 사상가요, 과학자요, 교육자라 할 것입니다.
1910년 8월에 굴욕적인 한일합방이 되자 일본측의 간곡한 간청을 뿌리치고 대한의원에서 물러났습니다. 1914년에는 의생(韓醫師) 등록을 하고 소아과(幼幼堂) 진료를 하였으며 1915년부터는 전선의사회(全鮮醫師會) 회장을 역임하는 등 일제 강압기에 있었던 우리 민족의 건강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이다가 1935년 2월 81세로 별세하였습니다. 일본인들도 우리 나라에 최초로 우두를 도입한 선생의 업적을 받들어 1928년 조선종두 50주년 기념식에서 지석영 선생에게 특별히 표창을 한 일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개화기 의학교육의 선구자인 지석영 선생의 뜻을 기리고 정신을 되새기고자 서울대학교의과대학과 서울대학교병원은 연건 캠퍼스의 중앙에 위치한 시계탑 건물(구 대한의원 본관) 옆에 지석영 선생의 동상을 세우고, 대학로에서 병원으로 들어가는 길을 '지석영길'로 명명하였습니다.
소파 방정환
방정환의 생애 *
소파 방정환은 33세로 생을 마치기까지 어린이를 위해 온갖 정성을 쏟은 애국지사로, 위대한 교육자인 동시에 아동 문학의 선구자이다. 짧은 생애였지만 그를 떠나서 한국의 아동 문화, 아동 문학의 출발을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는 어른의 소유물로만 취급 받아온 어린이를 인격적인 존재로 끌어올리기 위해 다양한 사회 운동을 전개하였고, 어린이들의 마음에 사랑, 눈물, 용기, 기쁨을 키워 주기 위한 동화, 소설, 시 등 아동 문학을 일으키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소파는 189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어머니와 누이를 잃고 새어머니가 들어왔으나 정을 못 붙이고, 그 대신 그림 그리기와 글짓기에 재미를 얻었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났지만 9세 때 종조부의 사업 실패로 그의 집이 파산을 맞게 되어 견디기 힘든 불행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소학교 학생인 10세 때 `소년 입지회`라는 소년회를 조직하여 토론, 연설의 수련을 쌓아 가기 시작했다. 1914년, 선린 상업 학교에 들어갔지만 2년 만에 그만두고 열여섯 나이에 벌써 `청춘` 지에 글을 투고했다.
19세에 천도교 교주이며 독립 운동가인 손병희의 사위가 되면서 비로소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그는 일본에 건너가 도요 대학 철학과에 다니며 아동 문제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1921년 서울에서 `천도교 소년회`를 조직하면서부터 어린이에게 존대말을 쓰기로 하는 등 본격적인 소년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전국을 두루 다니면서 강연을 하는 한편 세계 명작 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펴내기도 했다.
1923년에는 한국 최초의 아동 잡지인 <어린이>를 창간하였다. 그 해 5월 1일 어린이날을 제정하여 `어린이날` 운동을 범 사회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 `어린이`라는 단어가 언제부터 쓰였는가는 분명치 않지만 현재까지의 기록으로는 방정환 번역시의 장르 소개 명칭으로 처음 소개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는 각종 대회, 강연회, 강습회를 주관하면서도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기 위해 끊임없이 다양한 형태의 글을 발표하였다. 소년 운동이 좌익 세력에 의해 자기의 참뜻과 차츰 달라진 1928년부터 일선에서 물러나 오로지 잡지와 동화 순례 강연으로 자기 길을 걸었다. 당시 그의 동화는 전국적으로 유명하여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도 사방에서 몰려들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일화가 있는 데, 그의 이야기가 너무도 재미있어서 차마 그 자리를 뜨지 못하고 고무신을 벗어 오줌을 눈 어린이도 있었다고 한다.
1931년 서른 세 살의 나이로 그는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났다.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초지일관 어린이를 사랑하고 어린이의 미래를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다.
* 방정환의 활동 *
♧ 아동 잡지 < 어린이 >
-- 1923년 창간되어 1934년 7월에 통권 122호로 일단 중지된 아동 잡지였다.
-- 옛날 이야기식 동화나 창가조의 동요에서 탈피하여 창작 동화와 동요를 적극 보급하였다.
-- 방정환은 < 어린이 >를 통해 짓눌리고 가난하고 웃음을 잃은 어린이에게 슬픔을 달래 주고 슬픔을 함께 하며, 역경을 극복하는 슬기를 가르쳤다.
-- 이원수, 마해송 같은 아동 문학가들을 배출하였다.
♧ 외국 동화의 소개
-- 1922년〈안데르센 동화〉,〈그림 동화〉,〈아라비안나이트〉중에서 선정한 몇몇 작품들을 초역하여 세계 명작 동화집인 〈사랑의 선물〉을 번안, 출간하였다. 이 동화집이 우리말로 씌어진 첫 동화집이며 창작 동화의 실마리가 되었다.
* 방정환의 작품 세계 *
-- 그의 유명한 수필 〈어린이 찬미〉(1924)에서는 어린이를 "죄 많은 세상에서 죄를 모르고 더러운 세상에 나서 더러움을 모르고 부처보다도 예수보다도 하늘 뜻 그대로의 산 하느님"이라고 하였다. 소위 '동심천사주의문학'이라고 하는데 이는 당시 식민지하의 냉혹한 현실을 바로 보지 못했다는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형제별〉은 주권을 잃은 조국의 비운을 별 삼형제로 의인화하여 비극성을 더한 작품으로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동요이다. 이는 어린이에게 감성해방의 길을 열어 주려한 소파의 의도가 잘 나타나 있다.
-- 대표 동요 〈귀뚜라미〉,〈가을밤〉,〈늙은 잠자리〉 등에서는 뛰어난 시의식의 세계를 보여 주는데, 특히 〈가을밤〉은 현대 동요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 소설 〈만년 셔츠〉에서는 가난하면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주인공의 따뜻한 인간애를 보여 준 작품이다.
방정환 문학에 대해 `영웅주의'와 `눈물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작품이라고 비판들 하였지만 그는 우리 아동 문학의 어머니임에는 틀림없다. 방정환은 누구보다도 먼저 아동 문학의 밭을 갈고 씨를 뿌려 수많은 작가를 길러 내었다. 비록 33세의 짧은 나이에 요절을 하고 말았지만, 방정환과 깊은 인연을 맺고 방정환의 뒤를 이어 방정환 문학의 한계를 극복해 낸 작가들이 많이 나왔다.
오긍선(吳兢善)
1879(고종 16)∼1963. 의학자·사회사업가.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중극(重克), 호는 해관(海觀). 아버지 인묵(仁默)과 어머니 한산이씨(韓山李氏)사이의 장남으로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났다.
8세부터 한학을 공부하여, 상경 후 내부주사(內部主事)를 지냈으나 개화의 물결로 1896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협성회(協成會)·독립협회·만국공동회 간부로 활약하다가 일제에 의해 체포령이 내려져 피신하면서 공주·논산·군산 등지에서 선교사의 개인교사를 하였다.
1902년 미국유학을 하여 센트럴대학 교양학부를 수료하고, 켄터키주 루이빌의과대학에서 수학하고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07년 루이빌시립병원 인턴으로 들어가 6개월간 피부과를 전공하였고, 같은해 10월 미국남장로회선교부로부터 한국파견 선교사자격을 얻어 6년 만에 귀국, 전라북도 군산 야소병원장에 취임하여 본격적인 의료봉사사업을 시작하였다.
1909년 군산에 영명중학교(永明中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직을 맡아가며 청소년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구암교회도 설립하였다. 1910년 봄, 군산을 떠나 전라남도 광주로 가서 광주야소교 병원장에 취임하고, 1911년에는 목포야소교병원장으로 전임하여 목포 정명여학교(貞明女學校)교장직도 겸임하였다. 1912년에는 남장로회 선교부 대표자격으로 세브란스의학교 조교수 겸 진료의사로 취임하였는데, 이는 한국인 교수로는 첫 등용이었다.
1916년 4월부터 1년간 일본 동경제국대학 의학부에서 피부비뇨기과학을 전공하고 돌아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피부과를 신설하여 과장 겸 주임교수로 피임되었다.
1919년에는 경성보육원(京城保育員)을 설립하여 고아양육사업을 시작하고, 1934년 2월에 에비슨교장 후임으로 제2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에 취임하였으며, 교장취임을 축하하는 명예이학박사와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미국 센트럴대학과 루이빌대학에서 각각 받았다.
1942년 1월 일제의 압력으로 교장직을 사임한 뒤로 보육사업에만 전념하였다.
광복 후에는 관계진출의 권유를 뿌리치고 안양기독보육원장으로서만 진력하였는데, 그간 조선피부비뇨기과학회 명예회장, 대한성서공회이사장, 기독청년회이사, 서울여자의과대학 재단이사 등을 지냈으며, 구황실재산관리총국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서울특별시 시민보건위생공로감사장, 민간사회분야 사회사업공로표창, 대한의학협회 의학교육공로표창, 정부의 공익포장(公益褒章), 새싹회의 소파상(小波賞) 등을 수상하였다.
죽은 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증되었다.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1864∼1953)
서예가, 언론인, 독립운동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 전서(篆書)·전각(篆刻) 및 서화 감식에 뛰어나다.
근대를 대표하는 서예가·전각가(篆刻家)이자 탁월한 감식안(鑑識眼)을 지닌 서화사(書畵史) 연구자이기도 한 위창 오세창은 조선말기의 역관(譯官)으로 개화사상의 선각자요 서화가로 유명한 역매(亦梅) 오경석(吳慶錫, 1831∼79)의 장남으로 태어나 부친으로부터 개화사상의 일단을 이어받아 언론인으로 활동했고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3·1 만세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다 투옥되기도 했다.
1921년 11월 2년 8개월만에 가출옥된 뒤 일제강점기 동안 민족 서화계의 정신적 지도자로 활약하면서 서예와 전각 분야에서 걸출한 예술성을 발휘했다.
광복 직후에는 민족대표의 상징적 인물로서 추앙받으며 건국준비 초기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여러 정당의 고문에 추대되었으며, 무수한 환영대회·국민대회·시민대회에 주요인사로 참석했다.
이밖에 그는 부친과 자신이 수집했던 풍부한 서적과 고서화·금석탁본등을 토대로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을 편찬하는 등 우리나라 서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남기기도 했다.
<분야별 업적>
언론·사회 활동
오세창은 부친 오경석과 함께 "개화"와 "독립"이라는 근대사의 민족적 대명제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우선 그는 우리나라 언론 1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한성주보(漢城周報)> 기자를 지냈고, <만세보(萬歲報)>와 <대한민보(大韓民報)> 사장을 지내면서 개화운동과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했는가 하면, 광복 후 서울신문 초대사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또 그는 1902년 개화당(開化黨) 역모사건으로 인해 일본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천도교(天道敎) 교주였던 손병희(孫秉熙)를 만나 그를 통해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귀국 후에는 손병희·권동진(權東鎭)·최린(崔麟) 등과 함께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향후 독립운동의 전환점이 된 3·1 만세운동에 앞섰다. 이밖에 그는 1918년 서화협회(書畵協會)를 창설한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뒤에는 고문으로 있으면서 민족서화계의 대표인사로 활동했다.
이러한 오세창의 왕성한 사회활동은 개화 선각자였던 부친과 어렸을 때 가숙(家塾)의 스승이던 유홍기(劉鴻基, 일명 劉大致)의 개화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의 청·장년기를 통해 일관되게 전개되었다.
전각 (篆刻)
오세창은 10대 말부터 부친으로부터 전각을 배운 이래 자신을 "조충 (雕蟲:새김벌레)"이라 불렀을 정도로 전각에 몰두했다. 그의 전각은 크기·형태·재료 등에서 다양할 뿐만 아니라, 각풍(刻風)에 있어서도 종정금문(鐘鼎金文)·상형고문(象形古文), 진(秦)·한대(漢代) 고인(古印)의 각풍 및 청대(淸代) 명가들의 각풍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수용하였다. 또 인문(印文:인장에 새겨진 글)에 있어서도 예를 들어 위창(葦滄)이란 호를 "韋倉" 등의 동음이자(同音異字)로 새기거나 여러 가지 별호(別號)를 지어 작품에 응용하여 전각과 서예를 겸비한 면모를 잘 보여주었다. 더욱이 그의 서예가 실제 전각의 수련을 바탕으로 진보될 수 있었다는 점과 그저 신표(信標) 정도로 이해되던 전각에 본격적인 예술성을 더해갔다는 점에서 근대 전각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서예 (書藝)
오세창은 전서(篆書)와 예서(隸書)에서 예술적 성과를 이루었고, 옛 명적을 보고 베껴쓰는 임서(臨書)로부터 엄정·단아한 서풍의 자기세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풍을 보였다.
전서(篆書)는 상(商)·주대(周代) 종정문(鐘鼎文)으로부터 진(秦)·한대(漢代) 이후의 와전문(瓦塼文)·각석(刻石)·비갈명(碑碣銘)은 물론이요 청대(淸代)의 여러 전서풍에 이르기까지 전 영역을 섭렵하였다. 또 그것들이 지닌 금석학적(金石學的) 의미를 탐구하는 등 이론과 실제 양면에서 근실한 연찬을 수행했다. 그 중에서도 상형고문(象形古文)이나 종정금문(鐘鼎金文)을 응용한 것과 엄정한 소전(小篆)을 특유의 필법으로 소화해낸 것이 백미이다. 예서(隸書)는 한대(漢代) 예서를 근간으로 청대(淸代) 예서풍도 두루 수용했는데, 중년에는 정갈한 필치였다가 노년에는 전서의 필의(筆意)를 가미한 졸박한 서풍을 이루었다.
이러한 그의 서예는 부친에게서 전해 받은 수많은 금석탁본과 관련서적 등 청조문물(淸朝文物)의 영향이 크다. 또 문자학(文字學)에 대한 통달과 전각에서의 독보적 경지는 그의 서예 세계를 더욱 풍부하게 하였다. 흔히 근대의 명서가 가운데 "고전을 이끌어내는 데 위창을 따를 사람이 없다"고 하는 말은 그의 예술적 특징을 대변해주는 예이다.
금석학(金石學)·서화사(書畵史) 연구
오세창은 김정희(金正喜)·이상적(李尙迪)·오경석으로 이어지는 조선시대 금석학의 전통을 실제의 서예작품을 통해 심화시켜 갔다. 그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금석문에 대한 엄정한 고석(考釋)을 가했는데, 여기에는 유물에 대한 역사적 안목, 철저한 실증적 태도, 사려깊은 심미안 등 작가의 모든 역량이 배어있다. 또 그는 옛 금석문과 서화를 심정(審定)하는 등 감식가(鑑識家)로서도 활약했는데, 그러한 자취는 곳곳의 고탁본이나 고서화에 남겨진 그의 제발(題跋)로 전한다.
탁월한 감식안을 바탕으로 그는 서화자료의 수집과 서화사 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가 정리해낸 편저물로 우리나라 고서화를 집대성한 {근역서휘(槿域書彙)}·{근역화휘(槿域畵彙)}·{근묵(槿墨)}, 조선시대 명인들의 인영(印影:인장을 찍은 것)을 모은 {근역인수(槿域印藪)}, 우리나라 역대 서화가에 관한 문헌사료를 모은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편저물은 오늘날 한국서화사 연구에 있어 귀중한 참고서로 평가되고 있어 그를 작가라기보다 서화사 연구자로 강조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호암(湖岩) 문일평(文一平)
(1888. 5. 15∼1939. 4. 3)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조국독립과 민족주의역사학의 확립을 위해 헌신하신 문일평 선생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888년 5월 15일 평안북도 의주에서 남평(南平)을 본관으로 하는 무관가문에서 태어났다. 상당한 재력을 지녔던 가문의 외아들이었던 선생은 18세가 되던 1905년까지 의주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그러나 고향에 교회가 설립되고 서양인들을 보면서 서양문화를 접한 선생은 러일전쟁을 목도하고 신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단발을 한 뒤 일본에 유학하였다. 선생은 메이지학원 중학부에서 공부하면서 유학생단체인 태극학회의 임원으로 기관지『태극학보』에도 많은 글을 기고하였다.
1910년 3월 귀국한 선생은 안창호가 설립한 평양의 대성학교를 시작으로 의주의 양실학교, 서울의 경신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해 비밀결사로 조직된 신민회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봄 선생은 다시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재동경조선유학생친목회의 기관지인 『학계보(學界報)』를 편집하고 김성수·안재홍·송진우 등과 교유했다. 1912년 말 중국으로 건너간 선생은 상해에서 신규식이 주도하던 독립운동단체 동제사(同濟社)에 참여하면서 동제사에서 설립한 박달학원(博達學院)의 교사로도 활약했다. 상해에서 박은식·신채호와의 만남은 선생의 역사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14년 봄 이후 고향에 은거하면서 독서에 전념하던 선생은 1919년에 3·1운동이 발발하자 일제의 요시찰 인물로 감시를 받는 상황에서 독립청원서를 작성하고 3월 12일 서울 보신각에서 시위군중 앞에서 낭독하다가 체포되어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20년에 출옥한 선생은 중동학교와 송도고보, 배재고보, 중앙고보 등 여러 학교에서 역사교사로 재직하면서 조선노동대회 교육부장, 신간회 발기인 겸 중앙위원·간사, 조선물산장려회 이사 등으로 민족운동에 끊임없이 참여하였다.
1933년 4월부터 조선일보 편집고문으로 재직한 선생은 조선일보에 여러 편의 사화(史話)와 사론, 수필 등 한국사 관련 글들을 게재하여 역사지식의 대중화에 노력하는 한편 '조선심(朝鮮心)'과 '조선정신'을 강조, 민족주의역사학의 확립에 기여하였다. 1934년 5월에는 일제의 식민사학에 맞서 실증적 학풍을 주장하면서 진단학회가 창립되자 이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선생은 1939년 4월 3일에 향년 52세로 별세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과 서대문독립공원 역사관에서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고 관련자료와 사진을 5월 한달 동안 전시할 예정이다.
편집고문 문일평 ‘조선학’운동
조선일보가 민족사학자들의 기관지처럼 된 것은 민세 안재홍과 호암 문일평이 세상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면서 연재한 사론·사화의 결과였다. 호암은 1933년 초 조선일보 편집고문으로 입사했다. 계초 방응모가 풍전등화 같던 조선일보를 인수하고 고향의 선각자인 호암을 영입한 것이다.
호암은 조선일보 입사 전인 1928년 11월 30일자부터 12월 28일자까지 ‘조선역사강좌’를 조선일보에 연재, 독자들과 친숙했었다. 호암은 조선일보 입사 직후인 1933년 4월 26일자에 ‘역사로 본 조선’을 연재하기 시작하여 7월 4일자까지 33회 게재했다. 호암은 이 연재를 하는 동안 ‘역사상의 반역아’를 5월 31일자부터 연재에 들어가 7월 4일자까지 24회로 동시에 끝을 맺었다.
호암의 조선일보 연재 ‘대미관계 오십년사’는 한·미관계사 연구의 효시가 됐다. 1934년 7월 15일자부터 12월 18일자까지 석간에 연재된 ‘대미관계 50년사’는 호암이 미국 선교사와의 인연이 배경이 되어 3·1 독립투쟁 직후부터 집필한 논문을 조선일보에 101회의 장기 연재로 공개한 것이다.
호암은 민족사학을 충실히 계승하면서 우리나라의 위인, 예술가, 자연, 고적, 풍속, 외교 등 자랑스런 문화전통을 짤막한 글로 소개하는 데 주력했다. 호암의 이런 노력은 민족과 민중에 대한 사랑이었고 조선일보의 지가를 올려줬다. 호암은 1930년대 중반 민세 안재홍과 이른바 ‘조선학’ 운동을 전개했다. 나라를 빼앗겼던 시절의 조선학 운동은 문화운동의 핵심을 국학으로 뿌리내리게 하고 실학 연구를 촉발하는 큰 역할과 학문적 성과를 올렸다.
호암은 “우리가 알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근본을 알려는 데 있다”고 말했다. 호암은 3·1 독립투쟁에 앞장서 독립시위를 주도하다가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이며 민족문화를 말살하려는 일제에 대항하여 조선일보를 통해 우리 역사의 대중화와 국학진흥을 위한 민족의식 고취에 큰 역할을 했다. 이런 결과 호암 문일평과 민세 안재홍은 일제하 조선일보를 내실 있는 민족지로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만해 한용운(韓龍雲)의 생애 (1879. 8.29~1944. 6.29)
독립운동가·승려·시인. 본관 청주(淸州) 호 만해(萬海·卍海) 속명 유천(裕天) 자 정옥(貞玉) 계명 봉완(奉玩) 충남 홍성 출생.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1896년(건양 1)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갔다가1905년(광무9)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 가서 연곡(連谷)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1908년(융희 2) 전국 사찰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설립한 후 일본에 가서 신문명을 시찰했다.
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중국에 가서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 이를 격려하고 만주·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3년 귀국, 불교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해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6년 서울 계동(桂洞)에서 월간지 《유심(唯心)》을 발간, 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26년 시집 《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이듬해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의 일을 맡았다.
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이해 월간지 《불교(佛敎)》를 인수, 이후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되었다. 그 후에도 불교의 혁신과 작품활동을 계속하다가 서울 성북동(城北洞)에서 중풍으로 죽었다. 시에 있어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고 불교적인 ‘님’을 자연(自然)으로 형상화했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衆生濟度)를 노래했다.
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이 추서되었다. 작품으로는 상기 장편 외에 장편소설인 《박명(薄命)》이 있고, 저서로는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불교대전》 《불교와 고려제왕(高麗諸王)》 등이 있다. 73년 《한용운전집》(6권)이 간행되었다.
만해에 관한 논문
개요
한용운은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이며 동시에 시인이다. 그의 삶이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온 것은 각각의 관심사에 따라 비중을 두는 측면이 다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삶이 따로 따로 분리될 수 없듯이 이 세 가지는 항상 함께 언급되고 또 연결되어 있다.
전통적으로 불교는 출세간의 법이었다. 석가모니는 집을 떠나 출가사문으로 살았다. 성도후에 제자들 역시 출가자들이었다. 그들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출가한 승려들은 집을 떠나고 부모 형제를 떠나 그들만의 집단, 즉 승가에 속해서 살아간다. . 시대가 바뀌고 절집의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지만 현재 한국불교의 주류를 조계종으로 보았을 때, 그 기본적인 형태는 여전히 지켜지고 있는 것이 한국불교이다. 이러한 전통을 계승한 흐름이 교단불교라면, 호국불교의 흐름을 이은 승려들은 그들이 살았던 시대상황에 따라 조금씩 양상을 달리 하면서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사람들이다.
한용운은 이러한 흐름에서 본다면 '교단불교'라기 보다는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승려였으며, 비록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지만 그는 일생을 통해서 승려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 논문에서는 두 가지를 살피고자 한다. 하나는 한용운의 민족주의가 우연히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시대와 함께 호흡했던 승려들의 전통 즉 호국불교라고 하는 한국불교의 전통을 뿌리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한용운의 민족주의는 당시의 다른 민족주의와 다른 특징이 있음을 보고자 한다. 그 특징은 불교적 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므로 불교적 민족주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용운의 생애
한용운을 바라볼 때 크게 세 가지 방향이 있다. 하나는 문학가로서의 모습, 독립지사로서의 모습, 그리고 승려로서의 모습이 있다. 이 세 가지는 따로 떼어서 생각하기 어렵지만, 세 가지 부분에서 모두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는 점에서 그가 일생을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 가늠할 수 있다.
그의 삶을 어떤 측면에서 보느냐에 따라 분기점이 달라질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그의 삶의 정체성을 승려로 보고자 하므로 승려로서의 그의 삶에 촛점을 맞추고자 한다. 그렇다면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출가, 오도, 환속이 될 것이다. 그 중에서도 한용운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그가 '오도송'을 지은 1917년이다. 이 시기를 중심으로 그는 이전의 삶과 다른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성장과 출가 그리고 吾道
고종 16년 1879년 음력 7월 12일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한윤경은 미관말직인 아전(衙前)으로, 가세가 여의치 못해 여러 곳을 이 떠돌며 살았으나 세상의 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으며, 어린 한용운에게 걸사와 의인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훗날 한용운의 삶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고 회상하고 있다.
한용운 입산하여 중이 되기 전까지 나서 자라고 교육을 받았던 홍성은 구한말의 의병활동이 활발했던 곳이었다. 한용운이 입산한 동기에 대해서 동학에 가담했느냐, 의병활동에 가담했느냐 하는 문제에서 이설들이 있지만, 어떤 형태로든지 참여했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다.
그는 두 번의 입산을 하는데, 첫번째는 18세되던 해로 이미 14세에 결혼을 한 몸이었다. 첫번째 입산한 이후로 몇 년을 산에서 지내다가 1901년에 고향의 처가로 와서 은신하던 그는, 1904년 아내가 첫아들을 낳을 무렵 다시 집을 떠났다. 두 번째 입산에서 그는 진정한 의미의 출가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로 다시 집을 찾은 적이 없으며 뒷날 아들이 찾아왔을 때에도 지극히 냉냉하게 대했다고 한다. 이후 55세에 유씨부인과 재혼하여 다시 딸을 하나 두었다.
승려 한용운으로서는 중요한 시기는 바로 그가 오도송을 지은 1917년이 될 것이다. 그해 12월 3일 밤 10시경 좌선중에 문득 바람이 불어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평소 의심하던 마음이 풀렸다고 한다.
그가 오도송을 지은 1917년은 그의 내면에 있어서 중요한 분기점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전의 삶은 무엇인가를 찾아 헤메는 삶이었다. 일본을 시찰하고, 시베리아를 여행했으며, 무장독립투쟁을 하고 있던 만주로 찾아가기도 했다. 비록 밀정으로 의심받아 죽을 고비를 넘기지만, 당시의 그의 모습은 목숨을 걸고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오도송을 지은 이후의 모습은 더 이상 외부로 무엇인가 찾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외국으로 더 이상 나가려고 하지 않았으며 사상적인 면에서도 다른 점을 보여주고 있다. 철저한 비폭력주의는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55세 되던 해 유씨 부인과 재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다. 불교 유신론에서도 승려의 결혼을 주장했기 때문에 어쩌면 그의 환속은 한용운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때문에 불교계 내에서 아직도 그를 수용하지 못하는 점이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한국불교사에서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많은 승려들이 대체로 결혼을 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승려로서의 한용운의 활동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불교교단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불교의 대중화를 위한 노력으로 불교관련 책을 저술한 것을 들 수 있다.
불교교단의 문제는 대표적인 사건이 '임제종'을 설립한 것이다. 당시 이매광이 독단으로 일본 조동종과 연합조약을 체결하자 영남과 호남의 승려들이 송광사에 모여 임제종을 세웠다. 이 모임은 한국불교가 일본불교와 동화되는 것을 막는데 큰 힘이 되었으며, 한용운은 종무를 맡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제의 식민지 침탈이 가속화되자, 한용운과 같이 독립운동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변절하고 일제가 여러 가지 수단으로 회유하기도 했지만, 한용운은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지조를 지켰다는 점 때문에 더욱 부각되고 있다. 이 땅에 남아서 절개를 지킨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힘든 일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역시 절개의 댓가로 혹독한 어려움을 겪었다. 일제가 요구하는 창씨개명을 거부했기 때문에 민적이 없었고, 그 때문에 식량배급에서도 제외되었으며, 그의 딸은 학교에 다닐 수가 없었다.
한용운은 본래 체구는 작고 힘이 세고 건강했지만, 전쟁말기가 되자 일제 통치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그는, 신경통이 악화된 데다가 영양실조가 겹쳐 극도로 쇠약해졌다. 더구나 한 겨울에 냉방에서 거처하면서 참선을 했기 때문에 더욱 악화되어 잠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기도로 밤이 새는 줄도 모를 때가 많았다고 한다. 1944년 6월 29일 법랍 40년 향년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2-2 한용운의 시대인식
한용운의 민족주의사상은 그의 시대인식과 맞물려 있다. 그의 역사관은 자유와 평등이 실현되는 방향으로 점진적으로 발전해 간다고 보는 진보사관이었다. 동시에 그가 살고있던 시대를 군사주의에 바탕한 세계제국주의 시대로 해석하고, 그 제국주의적 이기주의가 인류의자유화 평화를 파괴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18세기 후반부터 당시까지의 역사적 성격을 제국주의로 인한 침략전쟁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인식하고, 20세기 초두부터 정의와 인도적 평화주의가 개막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았으며, 미래 세계의 대세는 침략주의가 멸망하고 평화주의가 승리할 것이라고 봄으로써 일본의 침략주의의 어리석음을 비판하고 질책하였다.
이처럼 제국주의가 세계를 지배하고있는 상황에서 세계의 정의와 평화를 실현할 수 있는 이념이 민족주의라고 보았으며, 3.1운동 당시 독립 선언을 하지 말고 일본 정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고 무저항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주장이 있자, 한용운은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조선 독립은 제국주의에 대한 민족 운동이요, 침략주의에 대한 약소 민족의 해방 투쟁인 만큼 청원에 의한 타력 본위가 아니라 민족 스스로의 결사적인 행동으로 나가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
그렇다면 한용운이 생각하는 민족과 민족주의란 어떻게 정의 할 수 있을까.
Nichias Abercroombie, Stephen Hill and Bryan s. Turner 가 민족주의를 '동일한 인종, 언어, 문화 등의 공동체적 요소를 공유한 집단이 하나의 국가나 정치단위로서 정착하려는 운동'으로 정의했는데, 이것은 한용운과 일제시대의 민족주의 개념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다. 이때 '민족'이란 '동일한 인종, 언어, 문화 등의 공동체적 요소를 공유한 집단 '이 될 것이다.
그런데 당시 독립운동의 흐름이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의 분열로 인해서 어려움에 처하자,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사회주의보다 민족주의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조선에서는 민족 운동의 장애나 사회운동의 장애나 다 같습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장애를 물리치기 위하여 하는 운동이 비록 본질상으로 다르다 할지라도 그 과정에서는 같이 마쳐질 것이 아닙니까. 아무리 사회 운동파가 정치 해방을 제외로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이상이고 실제에는 그리되지 않을 것이외다. 저 러시아로 불지라도 그네들은 국가를 가지고 한 민족의 독립을 가진 뒤에 사회 혁명을 이룬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불교사회주의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 때의 불교 사회주의란 기존의 사회주의와 차별성이 있을 것이다. 그 차이점이 바로 철저한 평등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용운의 평등개념은 다른 평등의 개념과 기본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평등을 인간과 인간, 계급과 계급, 민족과 민족의 평등을 말하지만 한용운에게 있어서 평등은 일체만물의 평등함이다. 이때의 일체만물이란 모든 생명체와 무생물까지 포함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점이 바로 승려로서 한용운의 불교적 평등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2-2 한용운의 불교적 민족주의
우리나라의 불교가 삼국시대부터 호국불교적 성격이었음은 앞에서 살펴보았다. 강돈구는 그의 책' 한국근대종교와 민족'에서 불교의 호국적 성격을 역사적으로 살피고 있는데, 호국불교의 성격을 관통하는 것이 불교적 민족주의라고 보았다.
그러나 한용운은 호국불교의 이면에 흐르고 있던 불교적 민족주의를 운동의 차원으로 끌어내었다는 점에서 이전의 호국불교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
그는 세계 평화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민족 자결이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민족 자결이 이룩되지 않으면 언제라도 싸움이 잇달아 일어나 전쟁이 계속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선민족의 독립 자결은 세계의 평화를 위한 책임이며 동양 평화에 있어서도 중요한 열쇠가 된다고 본 것이다.
한용운에게 있어서 민족주의의 목표는 '평등과 자유'가 실현되는 사회를 말한다. 그는 '자유는 만물의 생명이요, 자유가 없는 사람은 죽음과 같다'(조선독립의 서)고 보았으며, 평등이란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얽매임이 없는 자유로운 진리'('조선불교유신론',[전집2], 44쪽)라고 보았다. 이러한 자유와 평등을 설명하면서 그 근거를 부처의 가르침을 들었으며, 현상이 아닌 '진리'로서의 평등을 주장하고, 근세의 자유주의와 세계주의가 사실은 평등한 이 진리에서 나온 것으로 보았다.(조선불교유신론).
이러한 절대적 평등의 개념은 대승불교의 보살사상과 괘를 같이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와 평등이 실현 될 수 있는 공동체의 범위를 민족으로 보았기 때문에 , 철저한 '민족자존과 자결'이 요청되는 것이다. 그는 그것이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만물의 본성이며 당위라고 보았다.
같은 종류 중에서도 벌과 개미는 자기 무리가 아니면 서로 배척하여 한 곳에 동거하지 않는다. 이는 감정이 있는 동물의 자존성에서 나온 행동으로 반드시 이해 득실을 따져 남의 침입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리가 자기 무리에 대하여 이익을 준다 해도 역시 배척하는 것이다. (중략..). 인류도 마찬가지여서 민족간에는 자존이 있다.
그러므로 이 자존성은 독립자존의 길에 이를 때까지 멈추지 않는 것이며, 때문에 조선의 독립은 역사적 필연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한민족이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 하는 것은 인류가 공통으로 가진 본성으로서 이 같은 본성은 남이 꺽을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스스로 자기민족의 자존성을 억제하려 하여도 도지 않는 것이다. 이 자존성은 항상 탄력성을 가져 팽창의 한도 즉 독립 자존의 길에 이르지 않으면 멈추지 않는 것이니 조선의 독립을 감히 침해하지 못할 것이다.( '조선독립선언의 이유' [한용운 전집1].350쪽)
민족주의는 그에게 있어서 불교와 마찬가지로 신앙이었으며, 독립의 정당성에 대한 근거였으며, 완전한 자유와 평등을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가 말하는 세계주의는 민족이 대등하게 민족자결과 자존이 실현되어 서로 침탈함이 없는 세계를 말하며, 불교의 사상은 이것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최후의 '무엇'이었다.
또한 이렇게 완전한 자유와 평화가 실현되는 사회를 바로 '불교의 사회'라고 보았다.
요컨데 불교는 그 신앙에 있어서는 자신적이요, 사상에 있어서는 평등이요, 학설로 볼 때에는 물심을 포함, 아니 초절한 유심론이요, 사업으로는 박애 와 호제인 바, 이것은 확실히 현대와 미래의 시대 아울러서 마땅할 최후의 무엇이 되기에 족하리라 합니다. 나는 이것을 꼭 믿습니다.
무슨 까닭으로 불교의 세계라고 하는 것인가. 평등한 때문이며 자유로운 때문이며 자유로운 때문이며 세계가 동일하게 되는 때문에 불교의 세계라고 이르는 것이다.(전집 2권, 45쪽)
2-4 한용운의 비폭력 사상
그렇다면 이러한 세계의 실현을 위해서 어떤 방식으로 저항 할 것인가? 한용운은 철저한 비폭력을 주장했다. 그가 주장한 비폭력저항은 그의 불교적 세계관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 이점에 대해서 '그가 철저하게 정의와 인도의 편에 서서 비폭력의 무저항주의를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은 구도자로서 도달할 수 있었던 인간 본연의 대도'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헛된 욕심이나 분노 혹은 일의 성패에 급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점은 민족의 자존과 자결의 근거를 미물에서 민족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성으로 파악하는 그의 인식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방편의 문제가 서로 분리되지 않는 철저한 불교적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용운의 시를 분석하고, 시에 나타난 한용운의 현실 대응논리를 연구한 정대호는 '한용운의 시에 있어서 님과 나와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님(타자)'이 아니라 '나'가 더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피동적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존재이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정복국(일본)만을 원망하고 그들이 자멸하기를 기다리는 것은 그 원인이 제거된 것이 아니므로 소용없는 것이므로, 스스로 불행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반성'(전집Ⅰ,211쪽)이라는 그의 글에서도 이러한 생각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점은 한용운의 비폭력사상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폭력으로 억압하는 대상을 향해서 끝까지 비폭력으로 저항한다는 것은, 정신적인 면에서 보면, 개인에서 민족에 이르기까지 가장 철저한 '자존과 자결'이요, 자신의 인간됨을 실현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바라는 자유와 평등이 실현되는 '민족자존과 자결'이 이루어지는 세계가 되려면 폭력은 결코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불교는 피압박민족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정복국에도 똑 같이 적용되는 것이며, 그렇게 본다면 모든 폭력은 '나'에서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연기적 세계관'일 뿐만 아니라 철저한 '화엄사상'의 실현이라고 볼 수 있다. 연기적 세계관에서 보자면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을 수 밖에 없다. 화엄의 입장에서 보면 불국토가 실현되는 곳은 바로 이곳이며, 이 순간이기 때문이며. 비폭력으로 저항한다는 것은 지금 바로 이 순간, 바로 '나' 에서부터 불국토(불교적 세계)를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오도송은 그가 화엄의 세계를 깨달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남아란 어디메나 고향인 것을
그 몇 사람 객수 속에 길이 갇혔나.
한 마디 버럭 질러 삼천 세계 뒤흔드니
눈 속에 점점이 복사꽃 붉게 지네.
결론
한용운의 삶을 돌아보면서 그의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마지막까지 남는 의문은 그가 승려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리고 처음 서울가던 길을 바꾸어 산으로 들어가게 만들었던 '인생이 무엇인지 그것부터 알고 보자'라고 하는 물음은 과연 해결이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
민족, 평등, 평화, 자유, 님, 그가 추구했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의 표면적인 삶은 고단하고 힘든 것이었다. 비록 스스로 선택한 삶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지탱해준 무엇인가가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그의 정체성을 이루고 있는 가장 밑바탕에는 승려로서의 그의 모습이었다고 본다. 그의 외면적 모양이 독립지사나 시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의 삶을 끝까지 관통하고 있는 것이 불교적 세계관과 그의 깨달음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승려 생활을 통하여 무엇을 얻을 수 있었던가? 한용운도 스스로에게 그런 의문을 던져보았던 듯하다. 한용운의 신앙고백이다.
"나는 결국 영생하나를 얻은 것을 느낀다. 어느 날 육체는 사라져 우주의 적멸과 함께 그 자취를 감추기라도 하리라. 그러나 나의 마음은 끝없이 둥글고 마음 편한 것을 느낀다."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배기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인연설
정말 사랑하고 있는 사람앞에선 사랑하고 있다는 말을 아니합니다. 아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 사랑의 진리입니다. 잊어 버려야 하겠다는 말은 잊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정말 잊고 싶을 땐 잊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헤어질때 돌아보지 않는 것은
너무 헤어지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정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은 그 만큼 그사람을 잊지 못하는 증거요. 그 사람앞에서
웃는 것은 그 만큼 그 사람과 행복했다는 것이요. 그러나 알 수 없는 표정은 이별의 시초이며 이별의 시달림입니다. 떠날때 울면 잊지 못하는 증거요. 가다가 멈추면 다시 한번 더 보고 싶다는 것이요. 뛰다가 전봇대에 기대울면 오직 당신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한용운-
복종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 하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해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 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님의 손길
님의 사랑은 강철을 녹이는 불보다도 뜨거운데 님의 손길은 너무 차서 한도가 없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서늘한 것도 보고 찬 것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님의 손길같이 찬 것은 볼 수가 없습니다.
국화 친 서리 아침에 떨어진 잎새를 울리고 오는 가을 바람도
님의 손길보다는 차지 못합니다.
달이 작고 별에 뿔나는 겨울 밤에 얼음 위에 쌓인 눈도 님의
손길보다는 차지 못합니다.
감로와 같이 청량한 선사의 설법도 님의 손
길보다는 차지 못합니다.
나의 작은 가슴에 타오르는 불꽃은 님의 손길이 아니고는 끄는
수가 없습니다.
님의 손길의 온도를 측량할 만한 한란계는 나의 가슴밖에는 아무 데도 없습니다.
님의 사랑은 불보다도 뜨거워서 근심 산을 태우고 한 바다를 말리는데 님의 손길은 너무도 차서 한도가 없습니다
조봉암의 생애
1899년 인천 강화군에서 출생한 조봉암은 20년대 후반기 국내와 상하이(上海)에서 조선공산당의 지도적인 인물로 활약하며 독립운동을 벌였다. 1932년 일경에 의해 체포돼 수차례 옥고를 치렀으며 8·15해방도 헌병사령부 유치장에서 맞았다. 해방 후 공산주의와 결별, 이승만 단독정부에 참여함으로써 노선을 전환. 48년 5·10선거에 인천에서 출마해 당선된 뒤 초대 농림부장관과 국회부의장 등을 지냈다.
52년 제2대 대통령선거에 출마, 전체 유효투표의 11.45%를 획득하고 56년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는 30%를 획득함으로써 이승만의 정적으로 급부상. 조봉암의 진보당 세력이 점차 커지고 있던 58년 1월 정부당국은 죽산을 비롯한 진보당 간부들을 구속했다.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이 국시(國是)에 위배된다는 이유였다. 1심에서는 징역 5년이 선고됐으나 59년 2월 대법원의 최종판결로 사형이 확정됐다. 평화통일론에 대해서는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간첩죄가 적용됐던 것. 간첩 양명산(梁明山)으로부터 북한의 공작금을 받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재심청구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그해 7월31일 사형이 집행됐다.
진보주의자 조봉암 사상 재조명
『나는 비록 법에 의해 죽음의 몸이 되었다고 하여도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은 스스로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힙니다. 내 나이 딱 환갑입니다. 여러분은 나가더라도 내 구명운동은 절대로 하지 마세요. 길 가던 사람도 차에 치여 죽고, 침실에서 자다가 자는 듯이 죽는 사람도 있는데 과히 상심하지 마세요.』
59년 7월30일 서울구치소. 대법원에서 사형판결을 받은 직후 죽산 조봉암(竹山 曺奉岩)은 가족들과 진보당 관계자들과의 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다음날 사형집행 됐다.
올해는 죽산 조봉암의 탄생 1백4주년이자 간첩혐의로 사형 당한 지 44주년되는 해. ‘조봉암과 진보당사건’은 극심한 좌우 대립 속에서 중도파 진보주의의 싹이 잘려나간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었다.
특히 대통령선거에 두 차례나 출마했던 현역 야당 대통령후보가 재심청구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태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는 점에서 재판과정의 공정성이 의심받기도 했다. 미국 일본 프랑스 등 해외의 언론은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사법살인(司法殺人)’ 또는 암살과 반대되는 의미의 ‘명살(明殺)’이라는 말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진보당의 정강정책
우리는 공산독재는 물론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배격하고 진정한 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여 책임 있는 혁신정치의 실현을 기한다.’(진보당 강령 중)
일제 때 조선공산당의 창당멤버였던 조봉암은 해방 후 46년 박헌영(朴憲永)에게 보내는 서신‘존경하는 박헌영 동무에게’를 통해 공산당과 정식으로 선을 긋는다. 이후 이승만정권의 단정에 참여, 의회민주주의자로서 반독재투쟁을 벌였다.
조봉암의 진보당은 ‘반자본 반공산’의 중도파 노선의 한국 정치사상 최초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이었다. 죽산은 ‘우리의 당면과업’이란 청사진을 통해 민족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방안으로 미국과 소련, 유엔 등과 균형감각 있는 외교를 통한 ‘평화통일론’을 내걸었다. 또 극좌 극우를 배제한 민주대연합의 정계개편을 주창하며 ‘대중의 수탈이 없는 경제개혁과 민생개혁’ 등 혁신정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진보당의 개혁론은 ‘북진통일’을 외치는 이승만대통령과 보수세력의 반발로 좌절됐다.
“비록 죽음으로 막을 내렸지만 죽산의 민주통합론과 개혁론은 한국정치사의 밑거름이 됐고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에 맞선 ‘평화통일론’은 이후 7·4공동성명 남북합의서 등을 이끌어낸 원동력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조영건·曺永建 경남대 교수)
■한국의 진보주의 정당
조봉암에 대한 사형집행은 8개월 뒤 4월혁명으로 몰락하게 되는 이승만정부의 정권연장을 위한 단발마적인 행위였다. 조봉암의 죽음과 진보당의 궤멸을 계기로 평화통일론 등 통일정책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가 동결됐고 혁신정당의 전통은 싹부터 잘리게 됐다. 조봉암과 진보당 사건은 한국 정치사에서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중도파’의 비극을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해방공간에서 건준(建準) 근로인민당 민주주의민족전선 남북협상파 사회대중당 등 진보정당은 한국 정치사에서 모두 제도화되지 못하고 소멸해갔다.
이와 같은 상황은 80년대 말에 생겨난 민중당도 마찬가지였다.
“진보당에 대한 탄압은 한국의 정치체제를 서구 유럽형 보혁양당제(保革兩黨制)가 아닌 미국형 보수양당제(保守兩黨制)로 정착시키려는 미국의 의도가 강하게 작용했다.”(‘조봉암과 진보당’의 저자 정태영·鄭太榮)
강만길(姜萬吉) 고려대 명예교수는 “20세기 초 일제의 지배를 받느라 민주주의에 대한 기회를 갖지 못한 한국은 해방 후 미소간 냉전이 열전으로 불붙은 상황에서 좌우 어느 한쪽만의 선택을 강요당했다”며 “조봉암의 죽음은 한국의 정치 사회 각 분야에서 ‘이분법적 흑백논리’만이 지배한 배경이 됐다”고 말했다.
조봉암선생 장녀의 애절한 소원
『평소와 같이 이른 아침부터 아버지께 면회를 갔지요. 그런데 간수부장이 ‘몸이 안좋으셔서 면회를 거부하신다’고 말하는 거예요. 섬뜩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죽산 조봉암의 큰 딸 호정(72·서울 종로구 부암동)씨. 40년이 넘었지만 아버지가 사형당한 그날의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호정씨는 죽산이 상하이에서 공산계열 독립운동을 하던 때 태어났다.
“아버지는 피도 눈물도 없는 비정한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낙천적이고 정이 많던 성격도 공산주의와 결별하게 된 계기가 됐던 것 같아요.”
50년 이화여전을 졸업한 호정씨는 초대 농림부장관과 국회부의장으로 활동하던 아버지를 비서로 도왔다. 58년 죽산이 진보당 사건으로 구속되자 이승만대통령에게 장문의 탄원서를 보내는 등 활발한 구명활동도 펼쳤다.
“아버님이 묻힌 망우리 공원묘지에는 당국이 허가하지 않아 비석조차 세울 수 없었어요. 추모식을 벌이다 ‘폭동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며 묘지관리소 앞에서 닭장차에 실려간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호정씨와 남편 이봉래(李奉來·전 예총회장·98년 타계)씨는 이사갈 때도 당국의 감시를 받는 등 고초를 겪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호정씨는 83년 이후 매번 정권이 바뀔 때마다 조봉암의 명예회복 및 사면복권 탄원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그러나 헌법상 ‘사자(死者)에 대한 사면 복권 조항’이 없다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됐다.
91년 13대 국회에서는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씨 등 여야 국회의원 86명이 조봉암 사면복권 청원서에 서명했으나 임기에 쫓겨 법사위에서 심의조차 못한 채 폐기되고 말았다.
호정씨는 조봉암의 탄생 1백주년과 서거 40주기인 올해 죽산의 명예회복과 재심청구를 위해 대대적인 서명운동을 벌일 예정.
“이제 저 세상에서 아버님을 뵈올 날도 멀지 않았어요. 아버님에게 씌워진 억울한 간첩누명을 벗기고 묘소에 비석이라도 세워드리고 싶습니다.”
[조봉암선생 비문] 올핸 새기나
망우리 공원묘지에 가면 비문 없는 비석이 지키는 묘소가 하나 있다.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의 최대 정적이면서 정치보복의 희생양으로 현대사의 어둠 속에 묻혀있는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선생. 죽산은 아직도 비문없는 비석으로 역사에 정당한 평가를 묻고 있다.
죽산이 59년 이른바 「진보당사건」으로 간첩혐의 사형된 뒤 유족과 창녕 조(曺)씨 문중에서는 지금까지 그의 비문제작을 거부해 왔기 때문이다. 고인의 명예가 회복될 때까지 유족들 스스로 죽산의 삶을 간첩으로 마감시킬 수 없다는 뜻이었다.
문중에서는 올해 그 동안 별러온 죽산의 명예회복을 관철하겠다고 작심하고 나섰다. 올해가 죽산 탄생 100주년과 사망 40주년이라는 의미 때문만은 아니다.
비슷한 정치적 궤적을 그려온 김대중(金大中)대통령에 대한 동병상련의 기대 때문이다. 과거정권에서 근거없이 친북인사로 몰렸던 김대통령이 죽산의 억울한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리라는 기대다. 김대통령이 추진하는 햇볕정책도 당시 죽산의 통일사상과 맥이 닿아 있고 취임 1주년을 맞아 대대적으로 준비중인 사면복권 움직임도 큰 힘이다.
문중에서는 이미 「죽산선생 명예회복 추진위원회」(가칭)를 결성했다. 국내는 물론 미국 일본 호주 등 100여 곳에서 사면복권을 위한 서명작업을 벌이고 있고, 국내외 학자를 초청하는 「죽산대토론회」를 조만간 개최해 고인의 사상과 철학을 재조명할 계획이다.
추진위는 이를 토대로 다음달 초 청와대에 죽산에 대한 사면복권을 정식으로 건의할 방침이며 구체적인 입법청원에 대한 실무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죽산의 장녀 호정(扈晶·71)씨는 『재심을 통한 무죄확정이나 항일운동의 공로로 독립유공자 지정, 아니면 사면복권이라도 이뤄져야 한다』면서 『명예회복이 되어야 비워둔 묘비를 채울 것 아니냐』고 말했다. 법무부 관계자는 『사면복권이란 선거권 피선거권 공무담임권 등의 자격제한을 복원시켜주는 것인데 사자(死者)에 대해서는 이 같은 조항적용이 불가능하다』고 난색을 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봉건왕조에서도 억울한 누명은 사후(死後)에라도 씻어주는 신원(伸寃)제도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