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le. 31
"련아, 다 그만두고 나한테 올래? 재미있게 해줄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시선이 얽혀 든다. 재미를 운운하는 남자의 얼굴을 살펴보니 꽤 무미건조했다.
턱을 잡은 손 끝의 서늘함이 전해진다. 고동치던 가슴의 열기가 서서히 식는 것을 느낀다.
내가 반응이 없자 발끈한 그가 몰아붙이듯 한 걸음 더 다가온다. 엉덩이에 딱딱한 탁자의 촉감이 느껴졌다. 이미 물러설 곳은 없었다.
"저 오만한 거 알아요. 그러니까 한 마디만 더 할게요."
"백 련, 더 떠들어대면 키스한다."
"난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잘 알아요. 매일 아침마다 보거든요. 속이려고 한다면..."
망설임 없이 다가오는 입술에 황급히 고갤 돌렸다. 놀란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그는 내 어깨 위로 머릴 떨궜다.
귓가로 전해지는 불규칙한 숨결이 그의 입 보다 정직하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이 조금은 납득이 갔다. 김지석의 감정을 모두 이해할 수 없지만, 그 감정이 얼마나 사람을 비참하고 힘들게 만드는 지 정돈 나도 안다.
숨을 몰아 쉰 김지석이 간헐적으로 어깨를 떨었다. 곧이어 들리는 웃음인지 울음인지 구분할 수 없는 소리에 눈을 내려 깔았다. 구부렸던 몸을 일으키고 한 손으로 입을 감싼다. 표정을 확인하기도 전에 나에게 등을 돌린 그는 가만한 한숨을 쉬었다.
그를 바라보다가 사무실로 들어갔다. 가방을 들고나와서 못 박힌 듯 서 있는 그를 향해 가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스튜디오의 계단에 발을 내디딜 때쯤, 갈라지고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듣는 사람을 슬프게 만드는 사과는 처음이었다.
스튜디오를 나와 마냥 걸었다. 뻔스러울 정도로 김지석에게 얘기했다 해서 내 안에 있는 문제가 해결 된 것은 아니었다.
싸해지는 코 끝을 잡고 흔들었다. 길 거리에 우는 만큼 추잡한 짓은 없다. 김지석은 최선희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이 내게 다 말해주었다. 나와 같다는 동질감 하나 때문에 그를 미워하기 힘들어 질 것 같다. 그렇다고 못된 행동을 용서한 것은 아니었다. 맑았던 하늘이 점차 어두워진다. 회색 빛이 감도는 도시를 훑어보다가 멈췄던 걸음을 옮긴다.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발걸음이 익숙하면서도 낯선 길로 향한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삭막한 풍경을 눈에 넣는다.
폐부에 가득 차는 공기가 눅눅하다. 흙과 먼지가 뒤섞인 냄새에 고갤 들어 하늘을 올려보았다. 이마 위로 빗방울이 떨어진다. 반사적으로 구겨진 인상을 펴고 손바닥을 펼쳤다. 드문드문하게 빗방울이 떨어진다. 축축해진 손바닥을 움켜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빗방울이 떨어지는 횟수가 잦아졌다. 가방 안에 우산이 있었지만 꺼내지 않았다. 꿉꿉한 머리를 쓸어 넘기고 망설임 없이 거리를 지났다. 서둘러 뛰거나, 바빠지는 걸음 사이로 무딘 발이 도착지를 향한다.
그렇게 싫어하는 비를 맞는다. 청승도 이런 청승이 없다. 눈가를 타고 흐르는 빗물이 얼굴을 가로질러 턱에 닿아 이내 떨어진다. 빗줄기가 멍청한 날 혼내듯이 매섭게 내려친다. 하늘의 호통에 등줄기가 쭈뼛 선다.
"백 련!"
거센 빗줄기에 시야가 가려졌다. 손으로 눈을 따갑게 하는 빗물을 훔쳤다. 빠르게 다가오는 인영을 확인하기도 전에 어깨가 잡힌다.
어깨의 압박보다 손이 주는 열기에 데일 것 같았다. 식어가는 몸은 점점 움직임이 둔해진다. 느린 몸짓으로 눈에 얼굴을 담았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놀라는 척하는 가증스러운 내 마음에게 야유를 퍼부어주고 싶다. 송시환의 집으로 향하는 큰 길가에서, 난 길 잃은 어린애마냥 처량하게 서 있었다.
송시환의 속눈썹 위로 빗방울이 맺힌다. 마치 눈물 같아 희열을 느낀다. 날 위해서만 울어줘. 손을 뻗어 그 빗방울을 훔쳐냈다. 서로 눈길이 닿는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그의 입이 움직이려는 순간, 뛰어오는 구두소리와 함께 우산이 씌워졌다.
처음 보는 얼굴에 누군지 알지 몰라서 보고만 있는데, 내 시선을 읽은 송시환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그를 로드매니저라고 소개했다. 로드매니저에게 우산을 받아 든 송시환은 날 끌었다. 가까워지는 거리에 송시환의 숨소리가 들린다.
"집에 갈 테니 이제 가보세요."
로드매니저는 송시환의 말에 고갤 숙이고 차로 돌아갔다. 로드매니저라고 하기엔 그의 행동은 정중하고 깍듯했다. 눈을 굴리며 송시환의 잘생긴 얼굴을 올려 볼 뿐이다. 지나치게 말이 없는 내가 이상했는지 눈을 내려 깐 그가 나와 눈을 맞춘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해."
담담하게 들리는 어조에는 명백하게 노여움이 서려있다. 송시환은 묵묵히 걸음을 옮기고, 난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어깨를 감싼 손길에 서글퍼진다. 얼마만인지 모르는 송시환의 집에 들어서자 냉기가 날 덮친다. 비로소 추위를 느끼자 몸이 떨렸다. 간헐적으로 치아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양 팔로 몸을 감싸고 거실에서 꾸물거리자, 방 안으로 사라졌던 송시환이 큰 타올을 가지고 나왔다. 내 어깨에 둘러주는 손길이 자못 급하다.
"너도 비 맞았잖아."
"잠깐 맞은 거랑 생쥐 꼴이 된 거랑 같아? 대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언성이 높아졌다. 고요한 거실에 울리는 목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다. 하지만 머리의 물기를 닦아내는 손의 움직임은 여전히 급하지만 부드럽다.
어느 정도 물기가 사라지자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으면서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쉽게 드나들던 곳도 이젠 들어갈 수 없다. 보이지 않은 선이 그어진 것 같았다.
빠른 걸음으로 되돌아온 그는 나에게 여벌의 옷을 주었다.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욕실로 향했다. 바보 같게도 그가 준 옷은 내가 놀러 올 때마다 입는 추리닝이었다. 당황한 나머지 송시환이 보인 허점이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녹이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눅눅한 웃음을 띠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집 안은 훈훈한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 자신의 방에 딸린 욕실에서 샤워를 마친듯한 송시환은 내게 머그잔을 내밀었다. 데워진 우유의 고소한 향이 코를 간질였다. 먹기 좋은 온도에 바로 마실 수 있었다. 온 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식탁에 기대어 서서 날 응시하는 송시환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았다.
빈 잔을 식탁에 내려놓고 그의 앞에 마주섰다.
"김지석이 자기한테 오래. 나 정말 가도 괜찮아?"
완벽한 진실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없는 일을 꾸민 것도 아니었다. 최선희를 만나고 나서 든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가운데에서 힘들어할 송시환에겐 미안하지만 나도 이 방법뿐이다. 다른 대책을 생각해보아도 뚜렷한 수가 나오지 않았다. 반응을 기다리면서 감정을 내비칠 송시환의 눈을 관찰한다.
"그만 자극해.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이 우습게 들렸어?"
"네 말이 우스웠던 적 없어. 단지 물어 보...으읏!"
"물어 볼 걸 물어봐, 백 련. 너 몰라? 정말 몰라서 이러는 거야?!!!"
잡힌 팔에 고통이 밀려왔다. 아픔에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송시환은 격노로 인해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소리쳤다. 겁에 질린 나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몰라.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송시환이 바람이 새는 헛웃음을 쳤다.
탄식과도 같은 헛웃음이 무서웠다. 이렇게 송시환이 무서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압도적인 힘과 분노에 온 몸이 잘게 떨렸다.
"적당히 해. 나도 참는데 한계가 있어."
"몰라! 정말 모르겠어 서 그래! 네가 왜 그러는지 이유를 모르겠어!"
눈물이 쏟아졌다. 바보같이 엉엉거리는 바람에 발음이 뭉개졌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며 정신이 없었지만, 또 얘기를 피하고 어디 갈까 겁이나 그의 티셔츠 끝자락을 붙잡았다. 손이 빨개질 정도로 꽉 쥐어 잔뜩 구겨진 자신의 옷을 보더니 묘한 표정으로 날 본다.
가만히 서있기만 하는 송시환이 미웠다. 뿌옇게 변한 시선 속에 송시환이 있다. 제대로 보이지 않은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눈을 치켜 떴다. 차오르는 눈물이 맺혀 떨어진다.
"그만 울어."
"시환아.."
"넌 말을 해야지 알아? 내가 왜 너 힘들어하는 거 무시하면서, 미친 새끼처럼 다른 년들 만나고 다녔는데!
다 너 때문이잖아! 최 선희가 나 모르는 사이에 백 련을 건드릴 까봐 무서워서!!!"
"....."
"계속 악몽을 꿔! 나 때문에 네가 다치는 걸, 꿈 속에서 보면서 깰 때마다 내 기분이 어떤 줄 알아?
그러면서도 널 못 놓는 내가 하루에도 몇 번씩 저주스러워!!!"
붉어진 눈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고함을 지른 송시환은 거칠게 숨을 몰아 쉬었다. 온 몸에 소름이 돋아 올랐다.
예상치도 못한 송시환의 말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다. 모질게 군 게 다 나 때문이라고? 최선희한테서 지키겠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한 거라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난 송시환을 놓지 못한다.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송시환이 천장을 바라보며 숨을 고른다.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송시환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은 송시환의 심장은 터질 것처럼 뛰고 있다.
힘들게 고통을 토해낼 때마다 그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힘들어 했을 송시환이 고뇌에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울음을 억누르고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주문을 외우듯 송시환의 이름만 되뇌었다.
"난 네 옆에만 있으면 돼."
"백 련."
"아무 것도 듣고 보지도 않을게. 아프다고 안 할게. 네 말만 잘 들을게.
그러니까 헤어지잔 소리는 하지마! 이렇게 만든 사람이 누군데! 네가 또 그러면 진짜 나 못살 것 같아, 시환아!!"
고개를 내저으며 울부짖었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바보였던가. 그래, 날 이렇게 만든 건 너였다. 난 이제 송시환 없이는 살수 없다.
네가 이렇게 만들어놨으니 끝까지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 내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힘들 송시환에게 이기적인 나는 짐을 더 떠 안긴다.
내 이름을 부르는 송시환의 목소리가 고통에 일그러졌다. 없어질까 봐, 날 두고 사라질까 봐 더욱 힘주어 송시환의 허리를 고쳐 안았다. 송시환의 손이 내 어깨에 닿는다. 내가 떨린 만큼 그도 떨고 있었다. 머뭇거리던 손이 어깨를 감싼다.
밉고 재수없는 놈이라고 욕해도 이별은 정말 참을 수 없다. 어떻게 내가 널 잊어.
"내 걸 다 가져가도 괜찮아. 너만 있으면 돼."
내 목덜미에 깊숙이 고개를 묻는다. 뜨겁게 젖어오는 어깨의 감촉에 가둬놓았던 감정이 물밀듯 몰려온다. 송시환은 깊은 한숨만 내뱉을 뿐이었다. 나도 송시환이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게 기대주었으면 한다.
내 바람이 그대로 전해지길 바라며 송시환과 간격을 두었다.
눈물의 젖은 송시환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나 놔두고 혼자 가지마."
"..넌..예전이나 지금이나.."
내 입맞춤에 뒷말은 저 멀리 사라졌다. 눈물 맛이 나는 키스에 입술이 호선을 그린다. 숨이 차오를 때까지 서로에게 정신을 못 차리다 입술이 떨어졌다. 송시환의 붉어진 눈가를 손가락으로 쓸어보았다. 민망했는지 고갤 돌리는 송시환을 붙잡았다. 까치발을 들어 볼에 입을 맞추자 송시환이 날 또 다시 껴안는다.
우리는 몇 년 만에 만난 사람처럼 굴었다. 서로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키스 한 채로 움직이다 벽에 부딪히고 물건을 쓰러트리기도 했다. 정확히 3번을 부딪히고 나서 송시환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날 번쩍 들어올리는 바람에 새된 비명소리가 나왔다. 시선이 조금 높아졌을 뿐인데 겁이 났다. 바닥으로 떨어질까 봐 무서워서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코알라처럼 달라붙었다.
목에 팔을 둘러 필사적으로 붙어있는 내 모습이 그렇게나 우스웠는지 송시환은 웃음을 참지 못한다.
"어, 어!"
송시환이 침대로 몸을 기울였다. 버둥거릴 찰나도 없이 침대로 떨어졌다. 이불에서 송시환의 향기가 풍겼다. 옆으로 떨어져 울리는 머리를 붙잡는데, 마주보고 누워있는 송시환은 고른 치아를 드러내면서 웃고 있다.
호선으로 휘어진 눈이 만드는 모양새와 참지 않고 터트리는 호탕한 웃음소리가 나까지 절로 기분 좋게 만든다. 예전의 그를 되찾은 것 같았다. 아무런 걱정 없이 좋기만 했던 고등학교 때의 너를 만난 것 같아.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는 그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다.
"이제 아무 것도 문제없어. 그러니까 계속 웃어줘."
"최선희 무서워. 무슨 짓을 할지 예상을 못해서, 더."
"다 뺏기고 나면 여기에 숨어있지 뭐. 네가 밥 주고, 잠도 재워줄 거잖아. 잘나가는 송시환이 평생 먹여 살리면 되지."
"언제는 몇 억을 줘도 싫다며. 진짜 못 당한다, 백 련."
괜히 호기를 부렸다. 최선희의 얘기에 딱딱하게 굳어지던 송시환의 얼굴이 다시 풀어진다. 몸을 일으켜 송시환의 배에 올라탔다. 마르지 않은 머리를 헝클리다가 눈에 힘을 주어서 그를 노려보았다. 덩달아 송시환의 입도 꾹 다물린다.
"약속해. 앞으로 무슨 일 있던 간에 혼자 해결하려고 하지 않기로."
"....어."
"으, 진짜! 내가 너 때문에 마음 고생한 거 생각하면!"
송시환 대신 그의 그녀들을 만나야 했던 고역스러운 순간들을 회상하고 있는데 송시환의 손에 의해 침대로 쓰러졌다. 나와 똑같이, 내 위로 올라탄 송시환은 긴 손가락으로 내 머리를 쓸어 넘긴다. 그 때 일은 내가 다 잘못했어. 무표정하게 있으면 지독하게 시린 얼굴인 송시환이 애원조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한다. 그런 상반된 모습이 매력이라면 또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너랑 붙어있는 꼴을 못 봐서 너한테 그래야 했어. 최선희, 완전 미친 여자야."
"네가 그 여자를 미치게 만들었잖아."
"백 련만 나한테 미쳤으면 좋겠는데."
그래, 잘나셨다. 이럴 때보면 송시환은 태어날 때부터 당당함과 오만함이 몸에 배어있는 사람 같다.
재수없어서 눈을 흘기자 장난스러운 미소를 띄운다. 그러다가 갑자기 엄중한 얼굴을 한다. 머리를 쓸어 넘겨 준 손가락은 내 얼굴을 배회하고 있다.
송시환은 나를 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혼자 두면 불안해서 나를 잡아 곁에 두고 감정을 쏟아냈다.
그것이 제어가 되지 않은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저번에 시상식에 불참한 것으로 확실해진 우리 사이에 최선희는 견디지 못해서 송시환에게 압박을 가했나 보다. 송시환은 그녀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지금의 자신이 그녀를 이길 수 없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든 것이 마음처럼 되지 않는 걸 알고 나에게 헤어지잔 소리를 했다고 실토했다.
"상식 없는 새끼라 그런가, 못된 짓도 그런 것 밖에 안되더라. 근데 너 힘들어하는 거 볼 때마다 안아주고 싶었어."
"너 못됐어."
"어, 맞아. 근데 백 련은 내가 괴롭혀도 남이 괴롭히는 건 싫다. 최선희가 너 괴롭히는 거 보면 나 돌아버릴걸."
소문에 의하면 암암리에 모종의 일은 원래부터 많이 일어났고, 최선희도 그런 디자이너 중 한 명이라고 한다. 유독 튀는 그런 한 명.
그녀는 사람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은 성격으로 그런 관계로 맺어진 모델들과 큰 친분을 갖지 않는다는 소릴 들었다. 3번 이상을 만나지 않는다는 그녀가 유달리 송시환에게 집착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송시환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기점인 최선희의 화보를 찍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송시환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송시환과 나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송시환이 최선희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을 탓할 마음은 없다. 그가 왜 그랬는지 충분히 이해가 갔다.
송시환은 그 때부터 못되게 굴기 시작했으며 술과 여자가 끝도 없었다. 이미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최선희는 여전히 송시환에게 반응한다. 아니,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다.
최선희에게 이별을 통보하라고 떼쓰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송시환 때문에 힘들어하며, 패션 쪽에서 일한 세월 동안 배우게 된 이 곳의 섭리였다. 모든 사람들이 혀를 내두르며 말할 정도로 그녀의 힘은 막강했다.
최선희가 송시환을 놓기 전까진 자유란 없다. 그녀를 만났을 때, 마지막으로 했던 얘기가 또 다시 떠올라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극단적으로 송시환이 모델 일을 그만둔다고 해도 그녀는 무슨 짓을 하던 간에 송시환을 찾아서 망가뜨려 놓을 것이다.
그녀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힘이 있었다. 난 그것이 가장 두렵다.
"백 련, 힘들 거 알아. 그래도 내 옆에 있어줘. 잘해줄게."
진지한 눈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프겠지만 그래도 난 할 수 있다. 지금까지 견뎌왔으니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다. 송시환은 얼굴을 내려 내게 입을 맞추었다. 난 그에 응하듯 목에 팔을 두르고 힘을 주어 끌어안았다.
송시환은 내게서 모든 걸 빼앗은 것 같아 미안하다고 했다. 사죄하는 마음으로 살겠다는 말에 옆구리를 꼬집었다. 사죄 말고 평생 사랑하겠다고 해야지.
퉁명스러운 말에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를 감싸주는 그의 품이 어느 때보다 포근하다.
The Male. 32
"어이, 백 련. 너 일 다하고 농땡이 까는 거야?"
"에? 지금 일 하고 있습니다!"
김지석의 호통에 흐뭇하게 보고 있던 쪽지를 서둘러 접었다. 모니터를 보고 있지만 피식 웃음이 난다. 움찔거리는 입매를 다물어보려고 해도 그 때뿐이다.
송시환과 화해하고 난 다음 날, 나보다 일찍 집을 나서야 했던 송시환이 메모를 남기고 떠났다. 잠결에 송시환이 나간 것만 확인한 나는, 해가 중천에 떴을 때나 돼서야 일어났다. 밍기적 늘어지는 몸을 일으켜 멍하니 앉아있는데, 침대 옆 작은 테이블 위에 올려진 메모지가 보였다. 끝을 날려 쓰는 눈에 익은 글씨체에 저절로 손이 갔다. 포장음식 사서 냉장고에 넣어놨으니 아침 챙겨먹으라는 내용이었지만, 마지막 문구에 눈을 뗄 수 없었다. '내 침대에서 네가 자고 있으니까 좋다.' 별 것 아닌 말이었지만 나에겐 의미가 컸다.
유일하게 송시환이 쉴 수 있는 공간을 내게 내어주었다는 것이, 그게 좋다는 그 말이 날 행복하게 만든다. 지갑 안 쪽에 고이 집어넣은 송시환의 쪽지는 그렇게 내 부적이 되었다.
"꾸물거릴 시간 없습니다. 빨리빨리 끝내놔야 파리 컬렉션이 편할 거에요."
발행일이 다가올 수록 김지석이 날카롭게 변했다.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에 직원들은 엄살 부릴 틈도 없이 일에 매진했다.
그가 고르고 고른 사람들이라 그런지 척하면 척하고 일도 잘했으며 김지석에 대한 충성심도 만만치 않았다. 일반적인 상사의 꽉 막힌 이미지와 다르게 남들 의견도 잘 들어주고 수렴해주는 스타일이라 그런지 더욱 호감을 샀다.
나도 그 점을 본받을 점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매의 눈을 하고 주변을 살펴볼 때면 무서워 오금이 저릴 정도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던 송시환은 아직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고 했다.
현실주의자인 송시환은 영원이란 단어를 신뢰하지 않는다. 영원이란 단어를 쓰기보다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해서 날 사랑하겠다고 말했다.
허영심이 가득한 난, 의미가 없더라도 영원하길 바라는 나로써 두 팔 벌려 환영할만한 대답은 아니었다. 더 이상 욕심부리지 않기로 했다. 내 고집을 부린다고 해서 바뀔 송시환이 아니었다. 뭐, 뜻만 맞으면 되는 것이 아니겠나. 송시환과 다시 전처럼 지낼 수 있게 되면서, 세상이 햇살에 비춰 반짝이는 강물이 되었다. 느긋하게 흘러가며 아름답게 빛나는 그 것처럼, 한층 여유로워진 나는 일에서도 여유를 부리게 된 것이다.
"백 련!"
"가, 가요! 다 정리 했습니다!"
김지석을 헤집어 놓은 복수일까. 발행일이 가까워진 이유도 있었지만, 최선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이후로 그는 매우 까칠하게 군다.
유독 저에게만 그런다며 엄살을 피우고 싶었다.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진 못하고 퉁명스러운 얼굴을 하자, 귀신 같은 김지석이 잘 말려 흉기가 된 브로마이드를 휘둘렀다.
"혼자 세월아, 네월아잖아!"
"에이. 다 됐다니까요."
정리된 스케줄 표와 파리 컬렉션 일정표를 놓았다. 일일이 읽어보는 세심한 눈을 곁 눈길로 훑어보았다.
오늘은 각진 모서리가 인상적인 뿔테를 쓴 그는, 우리 회사 내의 패셔니스타다. 점심에 짬이 날 때마다 날 포함한 4명의 여직원들끼리 모여서 날 마다 김지석의 패션을 극찬한다. 딱히 멋 낸 것 같지도 않으면서도 잘 입는다는 그녀들의 말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김지석이 옷을 아주 훌륭하게 입기보다는 좋은 몸매가 기본적인 스타일의 옷을 멋져 보이게 만드는 효과를 이룬다. 뿔테에 무지 티와 낡아 보이는 청바지를 입었을 뿐인데도 눈길이 간다. 이런 것이 바로 안 꾸민 듯, 꾸민 거라나. 여직원들에게 그는 연예인이 따로 없다.
"이 쇼는 빼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바뀌고 나서부터 별로야."
"네. 그럼 비는 시간에 어떻게 할까요?"
"봐둔 신진 디자이너 편집샵 있으니까. 거기 가자."
김지석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수첩에 모조리 적어놓고 자리로 돌아왔다. 이제 교통편만 알아보면 되겠다.
회사가 바뀌고 적응하지 못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쉽게 자리 잡아가고 있다. 아마 김지석과 벽이 없는 직원들 덕분일 것이다. 에이전시보다 일이 훨씬 수월하다. 책상 위에 흐트러진 자료를 정리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누구에게 들킬 새라, 잽싸게 핸드폰을 들고 사무실을 튀어나왔다.
전활 받자마자 들리는 송시환의 목소리에 입 꼬리가 올라간다. 촬영 일부분이 끝나고 이동 중이라는 송시환의 낮은 목소리는 듣기 좋게 나긋나긋하다. 촬영 때문에 며칠째 얼굴을 못보고 통화와 문자만 주고 받았다. 감정이 격렬해져서 다시 사귀게 되었지만 송시환은 예전보다 더 조심스러워졌다. 송시환이 진심을 최선희가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 고약한 여자가 더 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거라는 그의 판단 때문이었다. 그 덕에 우리는 어울리지도 않는 비밀연애를 하게 되었다. 송시환의 핸드폰에 내 이름은 이은환이라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의 이름으로 저장되어 있다. 설마 최선희가 남의 핸드폰까지 뒤져보겠냐 싶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고 했다.
그렇게도 최선희를 걱정하는 모습에 나 때문이라는 걸 알지만 가슴 한 구석이 씁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스튜디오 계단을 한 발, 한 발 올라서며 흰 페인트가 칠해진 콘크리트 벽을 매만졌다. 손 끝에 쓸리는 거친 느낌이 생경하다. 낮게 끄는 목소리로 보고 싶다고 속삭인다. 간지러워서 웃음을 터트리자 민망했는지 뚱한 게 쏘아붙인다.
[오늘 우리 집에 가 있어.]
"봉달이 혼자 있으면 외로울 텐데.."
[그럼 나는?]
"너랑 봉달이랑 같아?"
[다르지, 한참. 그러니까 우리 집에 와.]
봉달이가 걱정되어 확실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질질 끌자 참지 못한 송시환이 제법 강하게 말했다.
없기만 해봐라. 억양에 다분히 협박이 묻어있다. 알았다는 대답을 듣고 나서야 전화가 끊어졌다. 통화 시간이 뜨는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나도 보고 싶어.'
간지럼에 말하지 못했던 대답을 문자로 보냈다. 타박할 김지석을 생각하며 서둘러 사무실로 돌아갔다.
옮기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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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동장에 봉달이를 넣고 송시환네 집으로 왔다. 앙숙인 봉달이가 자기 집에서 돌아다니는 꼴을 보면 기겁을 하겠지.
악마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비밀번호를 눌렀다. 역시 이 집엔 혼자 들어오기 쓸쓸하다.
모델하우스 같은 송시환의 집은 매주마다 와주시는 아주머니 덕택에 손도 못 댈 정도로 깨끗한 상태를 늘 유지한다. 들어서자마자 답답하다고 사납게 우는 봉달이를 꺼내주었다. 탐색하는 기미도 없이 냉큼 거실로 달려간다. 진짜 누굴 닮아서 저렇게 반죽이 좋은지 모르겠다.
거실 한 가운데 놓은 검정색 가죽 소파에 대자로 눕자, 봉달이가 냉큼 배에 올라 앉는다.
느긋하게 장난치고 놀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비밀번호가 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봉달이를 안고 거의 뛰다 싶은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 현관 앞에 섰다.
"안녕!"
청바지에 후드 티를 입고 있는 송시환은 고등학생이라고 말해도 믿을 만큼 어려 보였다. 지쳐있던 얼굴이 눈을 마주치자 부드럽게 펴진다.
그것도 잠시, 시선을 내려 내 품에 안긴 봉달이를 보더니 사납게 구겨진다. 얼굴의 빠른 변화를 보는 게 즐거워서 봉달이의 발을 잡아 흔들었다. 신발을 벗자마자 앞에 선 송시환이 내게 짧게 입술을 맞췄다 떨어졌다. 휘어진 입 꼬리가 예뻐서 거기에 입을 맞추자 거침없이 내 볼을 꼬집어 늘린다.
다른 손으론 봉달이의 목덜미를 가볍게 긁는 것도 잊지 않는다. 매번 싫다면서 어떻게 하면 봉달이가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다.
"아주 세트로 다니냐?"
"내 몸이 둘이 아닌 걸 어떡해."
어깨를 으쓱 이자 송시환이 고갤 절레절레하면서 안으로 들어간다. 봉달이를 내려놓고 뒤따라 걷다가 냉큼 송시환의 허리의 팔을 둘렀다. 무심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더니 피식 싱겁게 웃는다. 어쭈구리. 오기가 생겨 옆구리를 파고들어 고개를 내밀었다. 내 머리에 팔을 두른 그가 날 앞으로 잡아 끈다. 내 의도는 다분했지만 새침데기처럼 모르쇠를 잡았다.
곧 다가오는 입술이 장난스럽게 부딪힌다. 흥흥거리며 코웃음이 나왔다. 송시환은 내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놓는다.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계속되는 장난과 밀착되는 몸에 팔에 힘이 들어갔다. 조금 더 농밀이 입술이 부딪히는데 갑작스러운 통증에 짧게 신음했다.
놀라서 떨어지자 미간을 잔뜩 구긴 송시환이 시선을 내렸다. 익숙한 통증에 고갤 숙이자 허리춤에 매달려있는 봉달이가 야옹 하고 울었다. 봉달이를 안아 든 송시환이 나머지 팔로 내 위 옷을 들췄다. 골반 뼈 위 옆구리 가까이에 꽤 선명한 발톱자국이 나있다.
피가 맺혀 붉게 부어 오른 상처에 웃음이 나왔다.
"넌 이게 웃기냐?"
"봉달이가 우리 둘만 뽀뽀해서 싫은가 봐."
고양이를 키우면 어쩔 수 없이 자주 있는 일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는 나의 손목을 잡아 이끈다. 괜찮다고 말해도 완강하다. 거실에 봉달이를 내려놓고 방으로 향한다. 봉달이가 따라 들어오기도 전에 문이 닫히고 날 침대에 앉힌다. 어두운 방 안, 침대 옆에 있는 작은 스탠드를 켰다. 등이 노르스름한 빛을 발한다. 방을 밝히는 따뜻한 느낌에 시선을 두다가, 움직이는 송시환의 뒤를 쫓았다.
약이라도 발라주려나 싶어서 눈을 굴리는데 내 어깨를 가볍게 밀어 눌렀다. 무릎으로 서서 다리 사이에 자리잡는다. 상처가 보이는 곳까지 옷을 들어 올리는 바람에 당황해서 황급히 옷자락을 잡는데 그에게 손이 잡힌다. 얽혀지는 시선이 짙어서 눈가에 열이 몰렸다.
마주친 눈이 떨어지지 않는다. 송시환은 보란 듯이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상처에 천천히 입을 가져갔다. 점점 가까워지는 숨결에 온 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숨결이 주는 간지러움에 몸을 뒤척이는데 단단히 허리가 잡힌다. 이윽고 상처에 느껴지는 혀의 감촉에 눈을 질끈 감았다.
느긋하게 움직이는 축축하고 부드러운 느낌에 허리를 뒤로 빼려 해도 송시환의 힘을 이길 수 없다. 옆구리부터 전류가 흐른다. 짜릿하고 간지러움에 숨이 탁해졌다.
"...으..그만."
"...제대로 소독해야지."
송시환이 코웃음을 치자 고스란히 피부로 전해졌다. 소름이 돋아 오른다. 어깨를 밀어내려 해도 꼼짝하지 않는다. 참을 수 없어 다급히 어깨를 두드려봐도 미동 조차 없다. 결국 손을 올려, 손등을 깨물고 숨을 참았다. 절대로 익숙해질 수 없는 감촉이다.
날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한 움직임에 허리가 움찔거렸다. 느긋함에 몸서리가 쳐진다.
당장이라도 넘어갈 듯 헐떡거릴 때까지 몰리자 그제야 얼굴을 들어올렸다. 위로 올라와 날 다리 사이에 두고 얼굴 옆으로 팔을 집는다. 숨을 몰아 쉬는 날 재미있다는 얼굴을 하고 내려다본다. 반대쪽 손은 아직도 상처가 난 곳을 지분거린다.
"너, 못된 것만 배웠어."
"그래서 싫어?"
얄밉게도 잘생긴 얼굴이 화려하게 호선을 그린다.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알면서 일부러 이런다. 장난끼가 가득한 검은 눈동자가 전등 불빛에 비춰 반짝인다. 나는 송시환의 얼굴을 감싸 내리고 그의 입술을 머금었다.
-
"그래서 프랑스 온다고?"
"왜, 마음에 안 들어?"
"아니. 오는 건 좋은데 왜 김지석이랑 다니냐."
아니긴 뭐가 아니야. 목소리만 들어도 골이 난 걸 느낄 수 있는데.
영화 보자는 송시환의 말에 이불을 둘둘 말고 거실로 나왔다. 우리가 방에서 나오지 않자, 울다가 지친 봉달이는 심드렁하게 소파에 늘어져있다. 바닥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사이 좋게 먹으면서 영화를 보았다.
아이스크림을 퍼서 송시환의 입에 넣어주고는 내 몫은 좀 더 크게 퍼서 입에 넣었다. 온 몸에 퍼지는 차가움에 어깨를 떨며 등 뒤에 앉은 송시환의 가슴팍에 몸을 밀착시켰다.
김지석과 파리 컬렉션을 같기 가게 됐고, 송시환이 서는 최선희 쇼는 백 스테이지까지 취재 간다고 말했다. 떨어지지 않고 얼굴을 보게 되어 좋아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미지근하다.
짐 캐리가 나오는 이터널 선샤인은 완벽히 송시환의 취향이다. 영화는 액션영화만 좋아하는 나완 다르게, 의외로 서정적인 구석이 있는 송시환은 바쁜 와중에도 턱턱 DVD를 구입해서 보았다. 우울한 노을 빛과 공허한 배우들의 모습에 저절로 몰입이 된다.
팔에 힘을 주어 날 끌어안은 송시환이 내 어깨에 턱을 올린다.
"며칠 전까진 나도 저러고 싶었어."
"내 기억 지워버리고 싶었어? 왜!"
"그럼 외롭지 않으니까. 힘든 것도 모르고 얼마나 좋냐."
퍽이나 좋겠다. 뾰루퉁하게 말이 튀어나갔다. 귀 옆에서 들리는 송시환의 작아지는 목소리에 입을 굳게 다물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지워버리고 싶다는 말이 서운했지만, 혼자 힘들어했을 송시환을 타박할 순 없었다.
말이 없는 내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는지 송시환이 웃음을 흘린다. 귀에 통증이 느껴진다.
"삐지지마."
"안 삐쳤어."
귓불을 깨문 송곳니의 감촉에 허리가 저린다. 고개를 흔들어 떼어냈다. 그래도 끈질기게 쫓아오는 송시환을 피할 길이 없다. 장난치다가 쏟아질 뻔한 아이스크림 통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잠시 한 눈 판 사이에 영화가 꽤 지나갔다.
다시 프랑스 얘기를 하다가 김지석이 아직도 최선희를 좋아하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자못 심각해진 얼굴로 날 바라본다.
"어떻게 알았어?"
"그냥."
"백 련."
"아. 최선희가 말했어. 둘이 사겼다고."
"너 최선희 만났어?"
목소리가 높아진다. 무섭게 변한 말투에 입에 물었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엉덩이를 틀어 앉았다. 송시환의 눈을 피하지 않으며 똑바로 말했다.
최선희랑 네가 걱정할 만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고, 난 단지 김지석과 그녀의 관계를 물어봤을 뿐이라고. 방금 보단 누그러졌지만 그래도 얼굴은 굳어있었다. 이런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두 볼을 감싸 눌렀다.
화 풀라는 뜻을 담아 볼록 올라온 입술에 소리 내어 입을 맞췄다.
"다시는 그 여자랑 얼굴도 보지마."
"그럼 너도 못 보는데 어떡해."
"너까지 그 여자한테 엮기는 건 죽어 못 봐."
"알았어. 다시는 찾아가서 안 만날게. 그러니까 여기 좀 풀지?"
구겨진 미간을 눌렀다. 최선희 이름만 나와도 민감하게 구는 모습을 보는 것이 싫다.
이렇게 반응하는 걸 보니 죽어도 최선희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을 것 같다. 당장 이틀 뒤에 프랑스에서 마주칠 텐데 그 땐 표정 관리를 어떻게 하려고 하는 건지 걱정이 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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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컬렉션은 이미 6월 말에 했답니다. 소설 상 계절은 가을인데, 이 점 이해 부탁 드려요
이번 편은 무난히 깨 볶으면서 넘어갑니다. 이 둘도 이럴 때가 있어야겠더라구요ㅋㅋㅋ
거의 일년만에 제대로 된 연재를 하네요. 소식도 없는데 카페에 들러서 기다려주신 분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뭐라고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네요. 완결까지 열심히 할께요ㅠㅠ
The Male. 33
by. 형광등♬ (La Boheme 형광등♬)
"그런 눈 하지마. 편집장이 일개 사원이랑 같이 타고 와야 되겠어?"
"아주 이런 데엔 칼 같으시네요."
시원스럽게 웃는 얼굴에 여권을 집어 던지고 싶었다. 김지석은 샤를르 드 골 공항 앞에서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골이 난 나를 놀리 듯, 프랑스 하늘은 높고 청명하다. 한국과 다른 프랑스 특유의 냄새와 공기에 진짜 프랑스에 도착했음을 느낀다. 주변을 둘러보기 전에 그의 뒷모습을 삐딱한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퍼스트 타고 와놓고 힘든 척을 하니 속이 뒤틀렸다.
한국에서 프랑스로 떠나는 날. 인천 공항에게 내게 표를 내밀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가 정말 재벌 2세가 아닌가 고민했으며, 재미있게 해준다는 며칠 전의 제안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비행기에 올라타는 순간 달라졌다.
나와 다른 방향으로 가버리는 그를 황망히 쳐다보았다. 난 이코노미 석에 밀어 넣고 자기는 날름 퍼스트를 타고 오다니. 약 12시간 동안 나 홀로 지루한 비행을 하면서 입이 튀어나오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다. 그 시간 동안 비행기 값을 내준 걸로 감동했던 깃털만큼 가벼운 내 마음은, 회사에서 당연히 내 줘야 한다는 쪽으로 휙 날아갔다. 옹졸하다고 욕해도 상관없다. 오는 내내 두 다리 쭉 펴고 왔을 김지석을 보니 괜스레 분했다.
뒤에서 꽁하고 서 있는 나를 슬쩍 보더니 턱짓을 한다. 느린 걸음으로 다가가자 손에 들린 짐을 가져간다. 이제 좀 내가 여성인 걸 깨달아 준 줄 알았는데 말 없이 턱짓을 한다. 그가 가리킨 곳을 따라 고갤 돌리니 공항 택시 정거장이 보였다.
내가 뭘 기대했던가. 허탈감에 어깨를 늘어트리고 정류장에 가서 버튼을 눌렀다. 택시가 오자 느긋한 걸음으로 오는 김지석의 히죽거리는 얼굴을 무심한 척 바라보았다. 묘하게 속을 긁는 그의 모습에 속으로 참을 인자를 다섯 번이나 새겼다.
"일단 호텔에서 밥부터 먹고."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사람 여럿 망쳐놓는 것 같아요."
"난 그보다 더 좋은 지침서는 없는 것 같은데."
택시에 타자마자 능숙하게 프랑스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김지석이 놀라웠다. 영어도 잘하던데 프랑스 어까지? 감탄과 함께 존경심이 들 찰나에 그 입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줄줄 쏟아 놓는다. 황급히 수첩에 받아 적었다. 마지막에 밥 얘길 하지 않았다면 난 정말 삐뚤어졌을 거다.
발 빠른 김지석이 미리 예약해 놓은 중심가에 있는 호텔에 도착했다. 흰 터번과 멋들어진 콧수염이 인상적인 택시 기사가 손수 캐리어를 내려주었다. 그에게 어설픈 프랑스어로 감사하단 인사를 하고 캐리어를 끌었다. 자기 짐을 두고 저만치 가버린 김지석의 뒷모습을 흘겨보았다.
일부러 이러는 게 눈에 보인다. 그래서 도발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하는데 매 번이 고비다. 호텔에 들어서자 벨맨이 짐을 받아 든다. 로비를 가로질러 가던 김지석이 우뚝 걸음을 멈춰 선다. 뒤따르던 나도 덩달아 걸음을 멈춰 그를 보았다. 군더더기 없는 몸짓으로 돌아선 그가 씩 웃는다. 묘한 미소에 이번엔 또 무슨 일인가 싶어 저절로 눈썹이 모아졌다.
"백 련씨, 나 스위트룸 하나 잡았다."
노래하는 어조에 멍해졌다. 프런트에서 카드를 받아 들고 가벼운 발걸음을 옮긴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내가 꼼 짝을 못하자 그가 팔짱 끼고 비스듬히 서서 카드를 흔든다. 거기서 지낼 거야? 건조한 물음에 정신이 돌아왔다. 서둘러 걸음을 옮겨 김지석의 옆에 섰다.
말도 안 통하는 타국에서 날 매정히 버릴 건 아니겠지.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할 말 있으면 해."
나의 뜨거운 시선을 의식했는지 그가 운을 뗀다. 나는 최대한 불쌍한 목소리로 나는 어디에 묵어야 하냐고 물었다. 질문이 이해하지 못했던 얼굴로 멀뚱히 내려다보기만 한다. 뭐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에 이미 김지석이 누른 층에 도착했다.
벨맨은 친절하게도 방문까지 짐을 갔다 주었고, 김지석은 익숙하게 팁을 그에게 건 냈다. 김지석이 카드로 문을 열자, 보기만 해도 돈이 꽤 들었을 스위트룸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는 안으로 들어섰지만, 문 앞에 선 나는 꼼짝 할 수 없었다.
"안 들어와?"
문을 집은 채, 기대어 서 있는 김지석은 의중을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다. 캐리어를 쥐고 있는 손에 땀이 배어 나온다. 바지에 손바닥을 문지르고 꼼 짝을 않자 그의 고개가 삐딱해진다. 개미 한 마리도 지나다니지 않는 복도는 묘한 침묵만 감돈다.
깊은 한숨 소리. 부자연스러운 그 소리가 엄청 인위적으로 들린다. 조심스럽게 고갤 들자 검지 손가락으로 이마가 밀린다. 내 손이 쥐어주는 또 다른 카드에 안도를 느끼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놀리는 맛이 없다고 중얼거린 김지석은 방으로 들어서 매정하게 문을 닫는다. 뒤돌아서는 김지석의 재미없다는 얼굴에 어깨를 추스른다.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를 지나 복도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역시 이번에도 일개 사원에 대한 배려인지 황금색 카드에는 스위트룸과 한참 떨어진 호수가 적혀있다.
비로소 혼자가 되자 장시간 비행의 피로가 몰려왔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층수를 누르고 목 주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아까는 엘리베이터가 엄청 느린 것 같더니 순간 내 방이 있는 층에 도착했다. 너털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아까보단 방과 방 사이가 가깝다는 것 말고는 달라진 점이 없었다. 물론 문을 여는 순간 더 기운이 빠지겠지. 김지석이 일부러 스위트룸부터 보여준 게 틀림없다.
자기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지고 노니 그렇게 재미있었을까. 아직 기운이 있는지 끝없는 뒤끝이 넘쳐서 공항에서부터 방금 전에 일어난 일까지 회상하며 김지석을 원망했다. 자기는 재미로 했을지 몰라도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물어 뜯은 입술의 여린 살을 혀로 한 번 훑자 따끔거린다.
"윽!"
불쑥 튀어나온 손이 눈두덩을 덮는다. 쥐고 있던 카드가 발등 위로 떨어진다. 내 발에 넘어진 캐리어가 문과 부딪혀 둔탁한 소리를 낸다. 놀라 뒷걸음치자 등에 단단한 가슴팍이 닿았다. 나보다 월등히 큰 덩치를 자각하자, 놀라서 발버둥치려는데 귓가에 나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탁하고 긴장이 풀린다. 뻣뻣하게 굳은 어깨에 힘이 빠졌다. 여전히 눈을 가린 상태로 몸을 굽히는 바람에 강한 힘에 따라 움직였다.
카드를 주어 들었는지 곧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에서 밀어붙이기에 더듬더듬 한 발자국씩 걸음을 옮겼다. 막상 눈이 가려지니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불안함에 주위를 더듬으려고 팔을 뻗는데 금새 잡히고 만다. 움직일 때마다 스킨의 시원한 잔향이 코 끝을 간질인다.
건조한 손끝이 이리저리 턱을 매만진다. 살짝 힘을 주어 옆으로 돌리는 손길에 따라 움직였다. 고갤 틀어 뒤를 보는 다소 불편한 자세가 되자 입술에 말캉한 촉감이 닿는다. 더욱 깊숙하게 다가오는 감촉을 느끼다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허리에 둘러진 손을 떼어내고 황급히 물러섰다.
가려졌던 눈에 갑자기 빛이 들어오자 눈이 부셨다. 제대로 뜨지 못하고 깜빡이는 동안, 송시환은 문을 두드린 인물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들어온 사람은 카트를 밀고 들어왔다. 난 시킨 기억이 없는 룸 서비스에 의문을 담은 눈으로 송시환을 올려다보았다.
"얘기라도 하고 와야 할거 아냐!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직원이 나가자마자 송시환의 등을 때렸다. 아프지도 않은지 장난스러운 눈으로 웃기만 한다. 놀란 걸 생각하면 두들겨 패주고 싶은데 저 미소 한 방에 전의가 상실된다. 복도와 같은 카펫이 깔려있는 룸은 단조로웠다. 흰 시트가 유난히 돋보이는 큰 침대와 커다란 창이 눈길을 사로 잡았다. 캐리어를 끌어 침대 옆에 놓고 창을 열었다. 고풍스러운 발코니의 모양새를 훑어보며 밖으로 나가자 파리 거리가 한 눈에 들어왔다.
큰 창을 통해 들어오는 따사로운 햇살이 침대를 쬐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창과 침대 사이에 자리한 티 테이블 위에 직원이 세팅해놓은 음식들이 보기 좋게 놓여있다.
손수 샴페인을 따른 송시환이 내게 잔을 내민다. 은근슬쩍 넘어가는 모습에 눈을 흘겼다. 잔을 가볍게 부딪힌 송시환이 샴페인을 마신다. 그 유려한 몸짓을 넋 놓고 바라보다 잔을 기울였다. 입 안에서 톡 쏘는 샴페인이 포크를 집어 들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나 여기 있는지 어떻게 알았어?"
"비밀."
뭐냐고 물어봐도 다문 입을 열지 않는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얼굴 보니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괜스레 송시환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얌전히 내 손길을 받고 있던 송시환이 반대 쪽 손에 들린 샴페인 잔을 가져가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다. 자신의 샴페인 잔도 놓고 침대 끝에 걸터앉아 팔을 잡아 당겼다. 속절없이 끌려가자 두 다리 안에 붙잡혔다.
허리에 팔을 두른 송시환이 명치에 머리를 기댄다. 안식을 찾는 행동에 무수한 질문들을 조용히 삼켰다.
"피곤해?"
"어, 피곤해."
묻자마자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몰라 뒷목을 손으로 훑다가 조심스럽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고갤 들어 빼꼼히 눈만 내놓는 모습이 귀여웠지만 심각한 분위기에 웃을 수 없었다. 숨쉬는 것도 조심스러워졌다.
"프랑스 여자들이 날 내버려 두질 않아. 눈은 높아서. 오늘 일하는데 스태프 중에 밥 먹자는 여자만...악!"
"진짜 죽어. 송시환!"
화를 참지 못하고 송시환의 머리를 붙잡아 이마를 들이 박았다. 머리를 붙잡고 침대 위에 나자빠진 그가 신음을 흘리고 이리저리 뒹군다. 꼴 좋다. 아려오는 이마를 누르면서 테이블로 다가갔다. 잔에 샴페인을 가득 따르고 원샷을 했다. 시원함에 아저씨들 마냥 '끄어-' 하고 치즈와 과일이 작게 잘라 올려진 크래커를 집어 먹었다. 손가락에 남은 소금기를 입술로 훑어 먹고 뒤돌자 침대에서 모로 누운 송시환이 억울한 얼굴을 하고 있다.
"열심히 돈 벌고 있는 남자친구한테 머리나 박는 여자가 어디 있냐."
"쓸데없는 소리하면 맞아야지."
아프긴 아픈가 보다. 엄살을 피우는 모양새가 우스웠다. 자기 침대마냥 침대를 뒹굴던 송시환이 뒷주머니에서 명함 크기만한 폴라로이드 사진을 내밀었다. 사진 속엔 손으로 브이를 하고 있는 송시환이 있었다. 치아가 다 보일 정도로 활짝 웃은 얼굴은 서글서글하다.
평소에도 보기 힘든 개 구진 모습이 담겨있다. 누가 봐도 사적인 사진을 보다가 문득 내게 송시환 사진이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알면서 내게 준 건지 의문이 들었다.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어 쪽지 뒤에 넣자 송시환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 동안의 일들을 보상하려는지 부쩍 살갑게 행동하는 송시환이 고맙다. 뽀뽀라도 해줄까 하고 침대로 다가가는데 노크 소리가 났다. 누워있는 송시환에게 또 시켰냐고 물어보니 묵묵히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누구냐고 묻기도 전에 저 편에서 등이 쭈뼛 서는 목소리가 들린다.
"백 련! 이게 빠져선. 취재하러 안 갈 거야?"
"아, 네!"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다급히 송시환을 쳐다보자 미간을 모은 채 잔뜩 짜증을 담고 있었다. 곱지 않은 시선을 받으면서 가방을 챙겨 들었다.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대답하고 나가려는데 송시환이 손목을 잡는다. 여기에 송시환이 있는 걸 들켜봤자 좋은 꼴을 못 볼 것 같은데.
잡힌 손을 떼어내기 위해 손을 흔드는데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다. 문이라도 열라는 재촉에 식은땀이 나온다.
온 몸으로 심기가 불편한 것을 피력하는 송시환을 일으켜서 화장실로 밀어 넣었다. 골이 잔뜩 난 걸 한 눈에 알 수 있었지만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단단히 화장실 문을 닫고 문을 열었다. 김지석이 있는 도중에 송시환이 분에 못 이겨 튀어나올까 봐 닫혀있는 화장실 문을 힐끔힐끔 보았다. 못 참기 전에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얼른 가방을 챙겨 들었다. 안으로 들어오려는 김지석의 등을 밀며 서둘러 호텔을 나섰다.
-
"이번에 대박이네요."
"그러게. 저번에도 괜찮았는데 역시 기대를 저버리질 않아."
어제와 오늘을 통틀어서 벌써 10번 넘게 패션쇼를 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앉아서 보는 것뿐이지만 진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패션쇼가 진행되는 내내 검은 수첩과 펜에서 손을 떼지 않았던 김지석은 꽤나 열정적이었다.
그가 열심히 패션쇼에 대해서 적는 동안 미숙한 솜씨로 모델들의 모습을 일일이 사진으로 담았다. 어딜 가나 꽃 미남 천국이었다. 훈훈한 광경에 아무렇게나 찍어도 사진이 다 잘나오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다른 곳이 아니라 맨즈웨어 쇼에 데려와 준 김지석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며, 못 살게 군 지난 날의 행동들을 모조리 지워버렸다.
다음 년도는 어떤 스타일이 유행할 것인지 포인트를 금방 집어내는 김지석의 센스에 감탄했다. 의상 사진보다 모델들의 얼굴이 더 자세히 찍힌 사진들을 보면서 그에게 한 소리 들어야 했지만 그래도 난 괜찮았다. 패션쇼 장을 나서자 거리에는 다음 쇼를 위해 분주히 뛰어가는 모델들의 모습이 보였다. 유명한 모델 일수록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일 것이다. 거리가 있는 경우를 위해 에이전시에서 준비한 모토택시가 길가에 서 있었다. 분장도 지우지 못한 상태에서 헬멧을 뒤집어 쓰는 늘씬한 장정들에게 저절로 눈이 간다. 서두르는 그들의 모습 조차 한 폭의 그림이다.
"간단히 뭐 좀 먹자."
식욕은 전혀 없어 보이는 건조한 얼굴로 근처 카페를 가리킨다. 아마도 내 배에서 요란하게 울리는 소리를 들었나 보다. 배를 움켜 잡고 그의 뒤를 따랐다. 패션쇼 주변이라 멋지게 차려 입은 사람들이 가득했다. 한 눈에 시선을 잡아 끄는 사람들과 그들을 찍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포토그래퍼들까지. 색다른 광경에 눈을 뗄 수 없다.
카페 테라스에 자리잡고 앉아서 가볍게 먹을 샌드위치와 커피를 시켰다. 거리에 오고 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데 얼굴이 따가워 고갤 돌렸다. 물끄러미 날 보고 있는 김지석에게 왜 그러시냐고 물어보았지만 묵묵부답이다. 민망해서 마른 손바닥으로 볼을 쓸어 내렸다.
"내 제안 아직도 유효해."
"거절할게요."
"어째서? 너한텐 과분하게 좋은 조건 아닌가."
당당하게 턱을 치켜드는 오만한 태도에 떨떠름한 미소를 띠었다. 본인께서 잘 알고 계시네요. 팔짱 낀 김지석은 묵묵히 내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확하고 열기가 끼쳐와 답답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몰라 머리가 답답하다.
유리컵에 낀 성애를 문질러 없앤다. 손가락 끝이 차가운 물기에 촉촉히 젖어 든다. 손 끝의 냉기가 팔을 타고 척추로 전해져 등골이 서늘하다.
"세상에서 편집장님 같은 남자를 마다할 사람은 없죠. 근데 편집장님은 안돼요."
"음, 더 해봐."
"편집장님 눈이 그런데 어떻게 연애를 하자고 해요. 뻔히 끝이 보이는 게임에 누가 도전을 하겠어요?"
"백 련이 보기에 내 눈이 어떤데."
"편집장님 눈은요. 사랑에 빠진 눈이에요. 무엇보다 제가 잘 알아요. 저도 아침마다 보거든요."
당돌하게 말을 마치자마자 그에게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얼굴을 구기면서 몸을 웅크려 웃는 모습에 쩝 입맛을 다셨다. 과도한 반응이 두렵다. 큰 웃음소리에 시선이 모아졌다. 민망해서 뒷목을 긁적이는데 마침 직원이 주문한 음식을 가지고 나왔다.
저러다가 태풍처럼 몰아칠 거라고 생각하니 어서 배부터 채우는 게 우선이다. 그가 웃던 말던 샌드위치를 집어 들어 베어 물었다. 정말 웃겨서 웃는 걸까.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등으로 찍으며 커피잔을 든다. 콜록 이면서 커피를 잘도 마신다.
묵묵히 샌드위치를 먹으며 그의 표정을 하나하나 면밀히 살펴보았다. 방정맞던 웃음기가 사라진 김지석은 무섭도록 진지하다. 커피를 마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감히 읽을 수 없다. 그의 고고한 몸짓에 샌드위치를 먹는 속도를 높였다. 저러다가 프랑스에 오는 날처럼 나에게 심술을 부릴지도 모른다.
"떡 줄 때 못 먹는 네가 바보야."
"별로 그 떡, 제 취향 아니에요."
"이렇게 물렁해 빠진 인물도 내 스타일 아니거든."
"편집장님은 도도하고 차가운데다가 빨간 립스틱이 잘 어울리는 여자가 좋죠?"
그가 굳게 입을 다문다. 햇빛을 받아 갈색으로 변한 그의 눈동자에 쓸쓸함이 묻어 나온다.
너무 앞서 나갔나. 아차 싶어 입술을 깨물었다. 신난다고 끝없이 나대는 구나, 백 련.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먹고 있는 샌드위치가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 시럽을 타지 않아 쓰디 쓴 커피를 마시면서 거리로 시선을 돌린 김지석의 옆 모습을 보았다.
당당하고 멋진 사람이 이렇게 안타까워 보이긴 처음이다.
"그래, 좋았어."
"네?.."
"병신같이 나한테 독인지 약인지 구분도 못할 정도로."
말 끝이 바람결에 흩어진다. 낮게 깔린 목소리에 애절하게 들렸다. 다 먹었으면 일어나자는 말에 냉큼 몸을 일으켰다. 미안한 마음에 김지석이 들고 있던 짐까지 들으려고 하자 까불지 말라고 머리에 알밤을 맞았다. 아파오는 정수리를 매만지면서 서둘러 그의 뒤를 쫓았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쇼는 최선희 브랜드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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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황제가 세웠다는 높은 탑이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방돔 광장 주위에 있는 건물에서 최선희 쇼가 열렸다. 나 같으면 벌써 길을 잃었겠지만, 김지석은 자기 동네라도 되는 것마냥 거침없이 거리를 지나다녔다. 패션쇼가 이루어질 건물은 프랑스의 옛 건축 양식이 돋보였다. 영화 속에서나 보는 궁궐 같은 모습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패션쇼가 시작되기 전까지 아직 2시간이나 남아있었지만 건물 입구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저 멀리 카메라도 보이는 걸 봐선 매체에서도 왔나 보다. 생각보다 프랑스에서 반응이 좋나 보네. 입술을 모으며 서 있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멍청히 서 있는 날 잡아 끈 김지석이 서둘러 뒷문으로 향한다. 미리 연락이 되어 있는 한국인 스태프에게 출입증을 받아 들고 백 스테이지로 들어갔다.
"침 좀 닦아라."
"편집장님, 여기가 천국이네요."
어디부터 봐야 하지?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저절로 입 꼬리가 휘어졌다. 진짜 증오스러울 정도로 미운 여자지만 모델 캐스팅에 일가견이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동, 서양의 미남들은 모조리 모아 놓은 백 스테이지는 어디에 눈을 둘지 몰랐다.
한국에서 유명하다고 손꼽히는 남자 모델들과 우리나라 잡지에도 이름이 올라오는 외국 남자 모델들이 빠짐없이 자리하고 있다. 장담하는데 백 스테이지만 다 찍어가도 우리 잡지 판매 부수는 보통은 넘을 것이다.
세로로 길게 생긴 커다란 공간인 백 스테이지는 여러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커다란 쇼 카드가 걸려있는 곳을 기점으로 반을 나눠진 공간에서 무대와 가까운 쪽은 모델들이 쇼에서 입을 옷들이 걸려있는 수십 개의 행거가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져 있다. 우리가 들어온 쪽으로는 수십 개의 거울과 의자가 있으며, 모델 한 사람당 둘에서 많게는 3~4명의 사람들이 붙어 있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헤어 아티스트들의 바쁜 손놀림을 받는 모델들은 묵묵히 앉아 있다.
뒷문 옆에 빈 공간에는 모델들이 먹을 수 있도록 뷔페가 준비되어 있다. 이미 준비를 마친 모델들이 한 손에는 과일 샐러드가 담긴 접시를 들고 주변에 모여 앉아 있었다. 다 같은 모양새를 하고 앉아있는 모습에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쇼를 위한 기다림과 지루함은 모델들이 감내해야 할 고통이다. 그런 그들을 배려하여 만들어진 쉴 수 있는 공간은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발 빠른 포토그래퍼들은 돌아다니면서 이미 신상 옷들과 모델들을 찍고 있다.
"난 사람 만나고 올 테니까 사진 찍고 있어. 똑바로 못하면 모가지야."
김지석의 엄포에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못미덥다는 시선이 박혔지만 난 개의치 않고 카메라를 들었다. 만약 생각만큼 사진이 나오지 못한다면 포토그래퍼가 아닌 내게 사진을 찍게 한 김지석의 잘못이다. 뭐 비싼 카메라니까 막 찍어도 잘나오겠거니, 안일한 생각으로 걸음을 옮겼다.
잡지에 사용될 법한 구도로 사진을 찍으며 돌아다녔다. 최대한 사람들에게 방해가 안되게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쇼에 나갈 순서대로 모델들의 사진과 옷이 붙어있는 쇼 카드를 찍고, 전체 사진을 찍으려는데 렌즈 안에 익숙한 얼굴이 불쑥 들어왔다.
"누나!"
"이원아!"
타지에서 만나니 이렇게 반가울 수 없다. 이산가족 상봉한 것 마냥 우리 둘은 팔을 붙잡고 방방 뛰었다. 이미 메이크업과 헤어를 마친 이원이는 어디서 뭘 하다 튀어나왔는지 입가에 빵 부스러기가 묻어 있다.
1대 9라고 불러야 할까. 귀 가까이로 가르마를 타고 나머지 머리를 쓸어 넘긴 듯한 스타일을 하고 있다. 이원이 뿐만 아니라 헤어를 마친 다른 모델들도 똑같았다. 머리가 흘러내리지 않고 고정하기 위해 휴지와 은색 핀이 꽂혀져 있다. 핀을 꼽고 있는 모습이 소녀 같아 보여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괜히 손을 들어 건드려 보았다. 메이크업은 한껏 자연스러웠다. 혈색이 도는 입술 말고는 메이크업을 받은 지도 모를 정도다.
"누나 취재 온 거에요?"
"응. 편집장님이랑 왔어. 난 사진 찍고, 편집장님은 사람 만나러."
"잘됐다. 저기 내 친구들 있어요!"
무작정 나를 잡아 끄는 이원이는 모델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갔다.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떨고 있던 그들은 이원이가 다가오자 아는 체를 한다. 나를 그들에게 소개하자, 인사하는 몇몇의 인물 사이로 나에게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있었다. 민 소매를 입은 그의 마르고 긴 팔에는 색색의 타투들이 빼곡하다. 다짜고짜 삿대질 당하자 불쾌함에 미간을 모았다가 이원이를 보았다.
"맞죠? 클럽 앞에서 입술 쫙 번져서!"
무슨 클럽? 저렇게 강렬한 인상을 잊을 리가 없다. 생각해 내지 못한 내가 고개를 기울이자 이원이가 손바닥을 친다. 아직도 기억하지 못한 내게 킥킥거리며 설명을 한다. 잡지 런칭 파티 때. 누나가 빨갛게 입술 칠하고 아이라인 쫙 그어서 나타났었잖아요. 그 때 얘도 있었어요. 단조롭지만 확실한 설명에 짧게 소리를 내며 고갤 끄덕였다. 분위기와 술에 취해서 제대로 된 기억은 없지만 알 것 같았다. 클럽 앞에서 남자애들이 모여서 담배피고 있었지. 나에게 아는 척한 이원이 친구와 어설프게 인사를 나누자 이원이가 사진 찍어달라고 재촉했다.
무리 지어 앉아있으니 꽃다발이 따로 없다. 모델들이라서 그런지 카메라에 대한 거리낌도 없어서 찍기 편하다. 멋진 모습도 보여줬다가 자기들끼리 장난치면서 한껏 우스꽝스러운 표정도 지어 보인다. 어디서 본 건 있어서 헤어스타일과 메이크업 클로즈업 사진도 찍어 두었다.
담배 피우러 나간다는 친구들을 순순히 보낸 이원이가 멀어지는 그들을 향해 서서 손바닥으로 꽃받침을 만들어 턱에 댄다. 앙큼한 행동이 귀여워서 냉큼 찍자 이건 포즈 한 것이 아니라고 꽥꽥 소릴 지른다. 원래 이런 게 소장가치가 있는 거라고 설득해도 막무가내로 달려든다.
"시환 선배도 이제 헤어 받나 보다!"
경쾌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자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송시환이 보였다. 가보자고 등 떠미는 이원이 때문에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혹시라도 최선희가 있을까 봐 마음에 걸렸다. 송시환과 3걸음 정도 거리를 두고 카메라를 들었다. 팔짱 낀 채, 눈 감고 있는 그는 정말 자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차마 앞에서 찍지 못하고 거울에 비춰진 얼굴을 찍었다. 옆에 붙어선 이원이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누나 완전 스토커 같아요.
얄미운 녀석을 흘겨보다가 턱 바로 밑에 카메라를 들이대서 셔터를 눌렀다. 적나라하게 찍힌 굴욕사진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악 거리는 이원이를 보면서 카메라를 뒤로 숨기는데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들리는 낮은 목소리가 귀를 파고든다. 이런 사람은 나뿐이 아닌지, 흥분상태던 이원이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거울 속 송시환을 바라보았다. 싸늘한 눈초리로 우리를 보고 있는 송시환 앞에서 우리 둘은 죄인마냥 몸을 움츠렸다.
"시끄럽게 하지 말고 꺼져."
냉정한 말에 소름이 돋아 올랐다. 더듬거리던 이원이가 어색하게 웃으며 내 팔을 잡아 끌었다. 갑작스러운 송시환의 태도에 당황해서 멍청히 이원이에게 끌려갔다.
The Male. 34
By. 형광등♬
(La Boheme 형광등♬ http://cafe.daum.net/gud14)
"세상에 뭐 저렇게 재수없는 자식이 다 있어!"
"누, 누나."
당장이라도 송시환에게 달려들 태세로, 성난 코뿔소마냥 성질을 부렸다. 당황한 이원이가 날 붙잡고 늘어질수록 내 객기는 탱천하다. 정면으로 몸을 돌린 송시환은 콧방귀를 뀐다. 귀에 들리진 않았지만, 거울 속의 이미지가 소리로 바뀌어 환청이 들렸다. 그것도 얄밉고 크게.
벌벌 기는 이원이는 내 어깨를 감싸면서 뒤로 잡아 끌었다. 이 정도면 내 체면치레도 어느 정도 한 것 같아 순순히 끌려갔다. 너무 쉽게 끌려가나 싶어서 다섯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펄쩍 뛰어오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누나 완전 미쳤어요!"
"내가 뭘! 그 자식이 먼저 재수없게 굴었잖아."
가슴을 쓸어 내리는 이원이가 똥마려운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하면서 주머니를 뒤적인다. 찾는 게 없는지 안절부절하며 주위를 둘러본다. 얘가 안 어울리게 왜 이러나 싶다. 'ㄷ'자 형태로 생긴 패션쇼장 건물 중앙에는 노천 카페처럼 의자들과 테이블이 있었다.
이미 이 곳도 나와서 쉬고 있는 모델들이 즐비하다. 족히 몇 백 년은 넘어 보이는 무수한 돌이 깔린 바닥을 신발 끝으로 툭툭 쳐보았다. 이원이가 부산스럽게 몸을 움직이다가 아는 척을 한다. 고갤 들자 아까 이원이와 함께 있던 그의 친구들이었다. 담배를 빌려 물자 친구 중 한 명이 담배 불을 붙여준다. 니들이 미성년자인 걸 단체로 잊었나 보구나.
"아오, 진짜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어."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면서 용가리처럼 연기를 내뿜는다. 잔뜩 인상을 찡그린 모습이 귀여워서 뚫어져라 보았다. 둘 다 얘길 꺼내지 않아서 궁금했는지 불을 붙여 준 타투친구가 팔꿈치로 이원이의 옆구리를 찌른다. 자극에 놀란 이원이가 허둥거리면서 담배를 놓칠 뻔했다.
당황하는 꼴이라니. 누가 보면 무슨 큰 일 저지른 줄 알겠다. 혀를 쯧쯧 차고 의자에 앉았다. 오늘도 앉아있던 시간보다 일어서 있는 시간이 길어서 다리가 아파왔다. 깊게 담배를 빨아들인 이원이가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다 타투 친구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누나랑 장난치다가 시환 선배한테 한 소리 들었어."
"그게 놀랄 일이냐?"
대수롭지 않은 친구의 반응에 그게 아니라고 말하는 얼굴로 사정없이 고개를 흔든다. 격렬한 반응에 이원이의 모델 친구들이 비웃으면서도 슬슬 관심을 보인다. 이원이는 다시 한 번 가슴을 팡팡 치고선 검지 손가락으로 날 가리킨다. 손가락을 따라오는 시선에 꺼림직한 기분이 들었다. 잘생긴 애들에게 눈길을 받는 게 좋긴 하다만 이렇게 한 번에 귀신처럼 쳐다보면 거북하기 짝이 없다. 냉큼 고갤 돌렸다. 친구들의 재촉에 못이긴 이원이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재떨이에 담배를 지져 끈다. 방금 보단 흥분이 가라 앉은 목소리로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빠짐없이 그들에게 들려준다.
입에 올릴 만큼 큰 일도 아닌데 이들은 단체로 호들갑을 떨었다. 송시환이 무섭긴 무서운 존재라는 걸 새삼스럽게 느낀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제각기 다르고 생동감 넘치는 표정을 훑어보았다.
"진짜 재수없는 새끼라고 했어요?"
"어? 새끼까지는.."
"와, 속 시원하다! 누나 역시 내 느낌이 틀리지 않았어요."
타투 친구가 나에게 엄지를 치켜세운다. 어색한 웃음과 함께 뒷목을 쓸었다. 얘네들이 송시환에게 맺힌 게 많나 보다. 자기들끼리 송시환의 역사를 욾고 호박씨를 깐다.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듣고만 있는데 점점 수위가 세진다. 사색이 된 이원이가 시환 선배는 그렇지 않다고 반박을 해봐도 송시환이 제대로 미운 털이 박혔는지 이원이의 주장은 묵살당했다.
"그래도 너네 잘 되라고 알게 모르게 힘쓰지 않아?"
"뭔 상관이에요. 앞에서는 취급도 안 하는데."
뭐시라. 제어가 되지 않은 감정이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났다. 눈썹을 치켜 세우곤 타투 친구의 뻔뻔한 낯짝을 올려다 보았다. 이자식이 지금 뵈는 게 없나. 아무리 뒤에선 임금님 욕도 한다지만 해도 너무 하는거 아냐? 나불거리던 입을 매섭게 다물고 있자 눈치 빠른 이원이의 따끔한 시선이 느껴졌다. 서둘러 고개를 주억거리며 타투 친구의 말에 억지로 맞장구 쳤다.
그래, 무시 당하면 짜증나지. 쓰디쓴 대답을 하고 의자에 늘어졌다. 의자를 끌어와 내 옆에 붙어 앉은 이원이가 아예 얼굴을 내민다. 대놓고 관찰 당하자 기분이 나빠 오만상을 찌푸렸다.
눈을 가늘게 뜬 이원이가 '에이-' 하고 내시 같은 목소리를 낸다. 뭐, 뭐! 터질 것 같은 마음에 성질을 부리고 싶지만 조용히 이원이의 얼굴을 밀어냈다. 이원이의 친구들이 아예 내 카메라를 가지고 가서 자기들끼리 신나게 사진을 찍는다. 친구를 목마 태우고 아슬아슬하게 움직인다. 보기에도 불안할 정도로 휘청거리는데도 용케 걸음을 내딛는다. 거의 3미터가 되는 괴물 같은 높이에 신이 난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낄낄거린다. 한 쪽에선 스케이트 보드를 타기도 하고, 반대 쪽에선 모여서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정말 가지각색이네.
패션위크 마지막 날이라 피로가 장난 아닐 것이다. 안 쪽에서는 거의 모자란 잠을 자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곳에 나와있는 사람들은 활기가 넘친다. 넘치다 못해 말뚝 박기를 하자고 설친다. 외국에도 말뚝 박기가 있는 건지 4명의 외국 모델들이 다가와 편을 나눈다. 생소한 모습에 카메라를 받아 들고 셔터를 눌렀다. 어설픈 발음으로 가르쳐준 대로 데덴찌라 외치며 손바닥을 움직이는 외국인들이 마냥 재미있다. 한국인 둘, 외국인 둘. 알맞게 편이 갈리자 선공을 정하고 자릴 잡는다.
"넌 안 해?"
"허리 부러질 일 있어요?"
의자에 늘어진 이원이가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젓는다. 혈기 왕성한 청년 8명이 본격적으로 말뚝 박기를 시작한다. 개중에는 고상한 이미지로 사랑을 받는 모델이 있었는데 얘가 제일 전투적으로 달렸다. 각국의 언어들이 뒤섞인 괴성이 공간을 울린다. 요란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안타까울 정도로 말랐다고 해서 힘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에겐 뾰족한 꼬리뼈가 최대 무기였다. 수비 팀에서 여기저기 곡 소리가 난다. 하나같이 똑같은 머리와 메이크업, 거기에 핀 하나씩 꼽고 있는 건장한 사내들이 고등학교 쉬는 시간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모델이라고 별 다를 게 없는 그 또래구나. 큭큭 거리며 서둘러 셔터를 눌렀다. 생동감 넘치는 모습이 카메라 속에 담긴다. 단순히 노는 것뿐인데 화보가 따로 없게 찍힌 사진들을 돌려보면서 역시 모델은 모델이라 중얼거렸다.
한참 열을 올리고 있을 때, 매서운 눈매를 가진 금발의 여자가 나와 소리를 질렀다. 뭉크의 절규와 같은 표정에 말뚝 박기를 하던 이들이 서둘러 물러선다. 영어에다 빠르게 쏟아지는 통에 뭐라고 알아 들을 수 없었지만 표정만 보고도 확실하게 뜻이 전해졌다. 공간에 있던 모든 이들이 침묵하며 여자를 주시한다. 신나게 혼이 난 8명의 청년들이 흩어지자 광선이 쏟아질 듯한 뜨거운 시선으로 모델들을 훑어본 여자가 안으로 걸음을 돌렸다.
말뚝 박기 결판을 내지 못했다고 안타까움에 입맛을 다시던 이들이 모여서 이번엔 간단한 게임을 한다. 술자리에서나 볼 수 있는 게임들을 세세하게 외국 모델들에게 가르쳐주며 게임을 시작한다. 걸리게 되면 옆에 사람에게 한 대씩 맞는 룰을 정했다. 그들은 어찌나 융통성이 있는지, 개인마다 쇼에서 노출되지 않는 부위를 때리기로 정했다. 인정 사정없이 서로를 후려친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모였어도 남자는 남자다. 과열된 열기에 마치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는 기분이 들었다.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 있던 이원이도 허리를 세워 그들과 동화된다.
여기서 너무 노는 것 같아 카메라를 들고 다시 백 스테이지로 향했다. 주위를 둘러봤지만 김지석은 보이질 않는다. 서둘러 걸음을 옮기면서 내가 해 야할 일들을 해나갔다. 자고 있는 모델들을 찍거나, 옷이 걸린 헹거로 다가가 이번 시즌 옷들의 디테일을 찍었다. 신발과 구두, 하다못해 속옷까지 찍었다. 쇼 시간이 다가올 수록 분주해지지만 반대로 차분한 느낌이 들었다. 모두들 황급히 움직이지만 허둥지둥하는 느낌이 없다. 저마다 얼굴엔 견고함이 서려있다. 그건 아티스트와 모델 구분 없이 모두 마찬가지다.
"리허설 가겠습니다!"
우렁찬 목소리가 장내를 울린다. 또 한 번 영어로 같은 말이 들렸다. 말이 끝나자마자 모델들이 서둘러 움직인다. 쇼카드에 적힌, 자신에게 주어진 번호대로 맞춰 서기 시작한다. 밖에서 장난치고 놀던 모델들도 일제히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걔 중에 한참 재미있게 놀았던 문제의 8명도 보였다.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며 줄을 선다. 일제히 늘어선 모습에 초등학교 시절이 떠오른다. 번호를 정하기 위해서 일제히 복도로 나와 키 순서로 섰던 때. 조금이라도 더 커보이려고, 좋아하던 애 옆에 앉으려고 조바심을 냈던 그 시절. 뭣 모르고 순진한 때를 생각하지 살포시 미소를 띤다. 긴장감이 서린 진지한 얼굴들이 그 때 반 친구들과 겹쳐졌다.
서 있는 모델들을 훑어보는데 그들 중 제일 앞에 서 있는 송시환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최선희 쇼에 선 이례로 항상 오프닝과 피날레를 장식했다. 이번에도 오프닝은 그 외에 누구의 것이 될 수 없다는 얼굴로 당당히 자리하고 있다. 순서와 타이밍을 맞춰보기 위한 리허설이 시작된다. 리허설이라도 허투루 하는 법이 없다. 진지하게 임하는 그들은 단 몇 초의 순간을 위해 온 힘을 쏟아낸다.
리허설이 끝나자마자 모두들 헹거로 향한다. 헬퍼들의 도움을 받으며 옷을 입는다. 아무리 백 스테이지를 찍겠다고 들어왔지만 수 십 명이 벗고 있는 걸 눈깜짝하지 않고 본다는 건 나에겐 아직 무리가 있었다. 목숨보다 소중한 카메라를 챙겨 들고 서둘러 백 스테이지를 빠져 나왔다.
긴 복도를 지나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큰 소파와 의자들이 보였다. 아마 이곳도 쉬라고 마련해 놓은 장소인가보다. 쇼가 시작되기 1시간도 남지 않았으니 이곳으로 올 사람은 없었다. 소파에 뻗어 의자 위로 다리를 올렸다. 발바닥의 욱신거림이 몸을 타고 머리까지 올라오는 느낌이다.
"팔자 좋아."
비꼬는 말투에 눈이 번쩍 떠졌다. 내가 이보다 더 빨리 움직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소파를 집고 상체를 들어올리는데 팔짱을 끼고 비스듬히 서 있는 송시환과 눈이 마주쳤다. 난 또 김지석인 줄 알았잖아. 긴장이 풀리고 소파를 집었던 손에 힘이 빠졌다. 다시 축 늘어지자 고소하단 얼굴이 불쑥 내밀어진다. 성질 같아선 이원이에게 했던 것처럼 바로 밀쳐냈겠지만 내가 그러지 못하리라는 걸 잘 안다. 그래서 더 얄밉다. 곧게 핀 검지 손가락으로 내 아랫입술을 지긋이 누른다. 가벼운 압박감에 눈을 내려 깔아 손가락을 보았다. 아무런 말도 없이 계속 누르고만 있다. 눈을 치켜 뜨고 송시환을 보았다. 결국 성질 급한 내가 먼저 운을 뗀다.
"이게 잘도 재수없다고 했겠다."
톡톡 가볍게 아랫입술을 두드린다. 자기도 먼저 꺼지라고 했으면서 재수없단 소리 들은 게 거슬렸나 보다. 입술을 괴롭히는 검지 손가락을 잡아 채고 몸을 일으켰다. 뭐라고 반박할지도 잘 알면서 꼭 먼저 시비를 건다.
프랑스에 도착한 첫 날, 송시환을 룸에 내버려두고 취재를 갔다가 지친 몸을 끌고 문을 열자마자 송시환의 늘씬한 몸을 보았다. 아주 느긋하게 침대에 대자로 누워서 자고 있던 모습이 얼마나 얄미웠는지 모른다. 괜히 분한 마음이 들어 발로 다리를 차서 깨웠지만 꿈쩍하지 않았다. 온 힘을 다해 침대 끝까지 그를 밀어내고, 녹초가 돼서 빈 공간에 눕자 잠결에 옆으로 몸을 돌린다. 얼굴에 한 가득 잠이 묻은 상태로 웅얼웅얼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릴 했다. 세 번이나 되물음 끝에 알아듣게 된 소리는 최선희 패션쇼 장에서 보자마자 욕하자는 소리였다. 내가 하루 종일 파리 시내를 돌아다닐 동안 네가 생각한 대안이 고작 그거였냐? 타박을 해주고 싶지만, 나도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생각을 접었다. 그리고 몇 분 지나지도 않아 골아 떨어지고 말았다.
"아주 벗겨갈 기세네, 백 련."
역시 옷은 옷걸이에 걸려있을 때랑 차원이 다르다. 최선희는 어떻게 해야 남자의 몸이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지 잘 알고 있다. 의식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옷을 보고 감탄했다. 예전엔 스키니 했던 하의가 통이 넓어지고 곡선 라인이 살았다. 거기에 특이한 재질의 수트 자켓은 송시환의 몸이 꼭 들어맞는다. 단단해 보이지만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라인을 뚫어져라 바라보자 송시환이 코웃음을 친다.
"진짜 싫은데 옷은 정말 잘 만들어."
"내가 입어서 더 살리는 거야."
"헐."
그만 좀 하시지? 눈살을 찌푸리고 흘겨보자 킥킥 웃는다. 별 얘길 나누지도 않았는데 쇼를 보려면 지금 자리에 가서 앉아야 한단다. 메이크업 했기에 차마 얼굴을 만질 수 없어서 멈칫하던 손을 내리고 씩 웃었다. 기대하고 있겠단 말을 하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백 스테이지 뒷문에서 두리번거리고 있는 김지석의 곁으로 한 걸음에 달려갔다.
최선희 측의 배려로 앞 좌석에 앉을 수 있었다. 착석하고 10분도 지나지 않아 쇼가 시작되었다. 모든 조명이 암전되고 잔잔한 바이올린 선율이 장내에 흘렀다. 저 끝에서 송시환이 걸어 나온다. 섬세한 음의 흐름에 맞춰 워킹을 한다. 움직임엔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다. 걸음에 맞춰 서서히 캣워크에 빛이 쏘아진다. 흰 바닥에 조명이 반사되어 캣워크 주변이 뿌옇게 보이는 잔상이 생겼다.
뒤 이어 모델들이 차례대로 나온다. 짧은 시간에 걸어갔다 들어가는 행위일 뿐이지만,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몇 십 배나 큰 의미가 부여된다. 최선희는 멈추지 않는구나. 김지석이 씁쓸한 목소리로 조용히 읊조린다. 슬프게도 그 말에 나도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재능은 섬세하고 폭발적이다. 화려한 색채를 사용하지 않고도 그보다 더 많은 걸 보여준다. 부연설명 따윈 없다. 무조건 디자인에서 승부를 건다. 그 작은 차이를 감히 아무도 따라가지 못한다.
"저 셔츠 저도 갖고 싶어요."
"애석하게도 네 사이즈는 없을 거다."
건조한 어조로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위로를 건 낸다. 그 다음에 나온 모델은 이원이었다. 항상 장난끼가 서려있던 이원이는 캣워크 위에서는 차갑고 도도하다. 고고한 느낌이 드는 사뿐한 걸음거리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다. 그 뒤로 이따금씩 얼굴을 비추는 소란스러웠던 8명의 모델들의 모습에 괴리감이 느껴졌다. 무대 뒤에 모습만 보고 허술할 거라 조금이나마 단정지었던 내가 경솔했다. 어떻게 흘렀는지 모를 15분의 시간이 지나고 피날레를 끝으로 최선희가 얼굴을 비췄다. 정말 아무런 색도 섞이지 않은 검은 색의 단조로운 원피스와 그녀의 필수 아이템인 붉은 립스틱을 바른 최선희가 나타났다. 머리가 아찔할 정도로 사방에 박수소리가 가득 찼다. 기운이 빠져서 바로 나설 수 없었다. 이런 내 기분을 아는지 김지석은 재촉하지 않고 내 옆에 앉았다. 송시환이고 뭐고 몇 번을 나왔다 들어갔는지 옷에 정신이 팔려서 기억도 나지 않는다.
"가자."
김지석이 몸을 일으킨다. 우리의 일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지금쯤 최고급 샴페인을 터트릴 백 스테이지로 걸음을 옮겼다. 들어서자마자 여기저기 카메라가 보인다. 모델들과 모여서 사진 찍는 최선희는 사람들에게 파묻혀있다. 쇼가 성공적이어서 모델들도 신이 났는지 저마다 소리 높여 이야기를 나누며 잔을 부딪힌다. 각종 매체에서 인터뷰를 하는 모습을 보다 담담히 셔터를 누르는 김지석의 뒷모습을 보았다. 이 사람은 지금 어떤 심정일까. 마음에 쏙 들어서 별로 였던 걸 찾기가 더 어려웠던 쇼를 봤으면서 끝이 불편한 건 단지 내 옹졸한 마음 때문일 것이다. 사실 마음 한구석에선 오늘 그녀의 쇼가 멋지지 않았으면 했다. 사람들에게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저번 시즌과 같아서 기대를 저버렸다는 소리를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작은 것도 이루어지지 않네.
카메라를 정돈해서 가방 안에 넣는 김지석이 나에게 턱짓을 한다. 그도 이 공간을 도망치고 싶은 게 분명하다. 우리가 들어왔던 곳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멀리서 김지석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색한 말투로 김지석의 이름 석자를 부르자 저절로 걸음이 멈춰졌다. 김지석이 몸을 돌리자 스태프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와 은색 펄지로 반듯하게 접힌 봉투를 내밀었다. 둘의 대화는 프랑스어로 이루어져서 난 멀뚱히 서 있어야 했다. 봉투를 건 낸 그가 떠나고 김지석의 시선이 느껴져 머릴 들어올렸다.
"어쩌냐, 련아. 애프터 파티 초대 받았다."
그가 부자연스럽게 얼굴을 구기고 난감한 듯이 웃었다.
-
하늘이 어두워지자 호텔을 나섰다. 초조한 얼굴로 김지석의 단정한 옆모습을 보다 차창 밖으로 고갤 돌렸다. 침묵이 감도는 택시 안. 택시 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한 뒤로 한 마디도 꺼내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는 김지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로서는 도무지 알 방법이 없었다. 은은한 조명이 켜진 거리를 지나자 택시는 서서히 화려한 건물들 사이로 들어섰다. 관광 책자에서 한 번 쯤은 본 적 있는 유명한 클럽 앞엔 이미 사람들이 가득하다.
최선희의 애프터 파티는 프라이빗 애프터 파티이기 때문에 게스트 리스트에 있거나, 초대장이 있어야지 입장이 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럽 입구 주위에는 셀러브리티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는 파파라치들과 고급스럽게 치장한 사람들이 입장하지 못하고 거리를 서성이고 있다. 색다른 모습에 눈을 굴리며 택시에서 내렸다. 머리를 넘기고 검은 수트를 입고 있는 김지석은 스튜디오에서 괴팍하게 소리 지르던 인물과 아예 다른 인격체처럼 보였다. 김지석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입구로 향했다. 입구를 지키고 서 있는 이에게 초대장을 보이자 쉽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자 늦지 않았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다.
"안녕하세요!"
우리가 들어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오는 이원이가 방긋 미소 띈 얼굴로 김지석에게 인사한다. 나는 보이지도 않는지 조명을 받아 반질거리는 검은 눈동자가 김지석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아주 눈에서 존경심이 뚝뚝 떨어지네. 간단하지만 격식을 차린 듯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이원이는 목에 둘러진 늘어진 보타이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남색과 빨간색이 섞인 독특한 프린팅이 된 것이었는데, 그게 무슨 제품인지 한 참 뒤에 기억이 떠올랐다. 최선희가 재작년에 디자인 한 보타이다. 역시 이원이 센스는 알아줘야 한다.
이원이의 센스를 칭찬해 주기 위해 한 발자국 다가서는데 앞으로 샴페인 잔이 내밀어졌다. 손의 주인을 확인하니 무덤덤한 김지석이었다. 자신은 마티니를 마시면서 나에게 내미는 건 샴페인이라니. 어이없는 헛웃음을 지으며 그의 손에 들린 마티니 잔을 보았다.
"안 마셔?"
"들어온 지 5분도 안됐는데 다시 나가시려구요?"
"아, 이거? 이건 시작이지."
반쯤 비어있는 마티니 잔을 까딱 가볍게 흔들어 보인다. 이런 인간이 존경할 가치가 있냐? 의문을 담은 눈으로 이원이를 보자, 그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순간 눈이 마주친다. 웃음을 참지 못해 킥킥 거리면서 직원이 내미는 핑거푸드를 집어 입에 넣었다. 연어가 오른 카나페였는데 입에서 그냥 살살 녹는다. 계속 마실 거냐고 묻자 김지석이 가볍게 고갤 끄덕인다.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이원이가 내게 손을 내민다. 술만 들이키는 김지석 보다는 이원이 옆에 있는 게 훨씬 재미있을 거란 판단에 냉큼 그의 손을 잡았다. 그래, 버리고 가라. 못된 백 련. 뒤에서 탓하는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지만 머릴 흔들며 무시하기로 했다.
DJ도 초빙했는지 신나는 음악이 클럽 안을 울린다. 몸을 흔드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이원이가 가는대로 따라갔다. 클럽 안쪽으로 들어가자 패션쇼장에서도 보았던 이원이의 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평소에도 친한 건지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고 있다. 한 번 봤던 사이라고 보자마자 거리낌 없이 아는 체를 한다. 어색하게 손을 흔들자 이원이가 무리 쪽으로 끌어당긴다. 우스꽝스럽게 스텝을 밟으면서 나와 맞잡은 손을 위로 뻗고 날 빙글빙글 돌린다. 이원이의 장단에 맞춰 놀면서 몸을 흔들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아이들도 저마다 음악에 몸을 싣는다. 그들과 장난치고 한참을 놀고 있는데 귓가에 음악소리를 단번에 사라지게 만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미있게 노니 다행이네요."
"아, 안녕하세요."
"련씨는 참 사람이 괜찮나 봐. 벌써 얘들이랑 친해졌네요?"
놀라서 몸을 떨며 황급히 뒤돌았다. 성공의 기쁨이 충만해 보이는 최선희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당당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축하 인사를 건네고 살짝 시선을 옮기는데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송시환이 시야 안에 들어왔다. 무표정했지만 그 안에 담고 있는 초조함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올라가려는 입 꼬리에 필사적으로 힘을 주었다. 내 시선의 끝이 무엇에 닿아있는지 들킬까 염려되어 자연스럽게 다른 곳을 보는 척 하다가 최선희를 보았다. 최선희의 등장한 이후로 떠들썩하게 놀던 이원이와 친구들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
"가만히 보면 련씨 대단해. 나 같으면 이렇게 못 나타날 것 같거든."
"네?"
"왜, 내가 너무 어렵게 얘기했나요? 수준에 맞춰서 말할 필요가 있겠구나, 미안."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지
"구질구질하게 그만 달라붙고 좀 떨어지란 소리에요. 사람이 주제파악을 하고 살아야지. 평생 이렇게 살 거예요? 이게 구걸이 아니면 또 뭐야. 안 그래?"
사람에게 모욕을 주는 방법도 참 가지가지다. 이렇게 망신을 주는 경우도 있구나. 매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주먹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이미 최선희의 등장으로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을 향해 쏟아진 상태였다. 음악 소리가 그렇게 큰 것도 아니었기에 주변에 있는 한국 사람들은 모조리 얘길 들었을 것이다. 이원이가 염려를 담은 작은 목소리로 날 부른다. 기분이 더러운 걸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면 내가 지는 것 같았다. 억지로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부디 내 표정이 자연스럽길 바라면서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무슨 말씀 하시는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어머, 어떻게 못 알아들을 수 있어. 학교는 어떻게 나온 거니, 그럼."
"당신 말이 사람 말 같아야 백 련이 알아들을 것 아닙니까."
내 어깨를 잡고 뒤로 미는 손길에 뒷걸음질 쳤다. 이원이는 김지석이 내미는 빈 잔을 냉큼 받아든다. 그는 고맙다는 말을 할 정도로 느긋하게 굴었다. 싸늘한 얼굴로 천천히 최선희와 마주섰다. 그녀는 사납게 그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상황이 어떻게 되려는 걸까, 당황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표정이 역력히 드러난 송시환과 눈이 마주치자 가슴이 울렁거린다.
"벌써 술에 취하셨나? 사람이 앞뒤 구분 못하고 왜 그럽니까."
"단지 련씨를 아끼는 마음에서 여기저기 구걸하고 다니지 말라고 충고했을 뿐인데? 당신도 그래. 이런 여자한테 적선하다간 큰 코 다치는 수가 있어. 그러니까 분수에 안 맞는 짓 그만 두란 말이야."
"내가 지금 적선 한다고 말하는 겁니까?"
"그래, 적선."
"적선이란 단어는, 나보다는 김 성근이 당신한테 한 행동에 붙여야 할 것 같습니다. 사용 용도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됐네."
팔짱을 낀 채, 턱을 치켜들며 도도하게 단어마다 힘을 주어 말하는 최선희에게 정중하게 대꾸한다. 겉모습은 그럴싸하게 꾸며도 말뜻에는 조롱이 담겨 있다. 김 성근이라 하면 최 선희의 남편이자, 패션 유통업계를 주름잡는 거대 기업인 SW 회장이다. 김지석이 입을 열수록 철옹성 같던 최선희이에게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심지어 김지석이 한 발자국 더 다가서자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언성을 높였다.
야, 김지석! 음악 사이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울린다. 이성을 잃은 모습을 얼마 만에 보는 것일까. 송시환의 벽장 안에 숨어서 봐야했던 끔찍했던 일이 오버랩 되는 것 같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당장 귀라도 막고 싶은 심정이다. 한 줄기의 미풍이 그녀를 미세한 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안을 헤집어 놓을 것이다. 김지석은 그런 남자라는 걸 아마 제일 잘 알고 있을 테지. 꿈쩍도 하지 않은 김지석은 타투 친구 손에 들린 술잔을 가져가 남은 술을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도대체 지금 저 입 안으로 들어가는 술이 몇 번째 인지 알고 싶지도 않다. 계속해서 마시면서도 꿈쩍하지 않은 김지석은 부드러운 미소를 얼굴에 띨 뿐이다.
"그래, 그게 내 이름이야. 당신이 나에 관한 건 모조리 잊은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닌가 보군."
"..너 적당히 해."
"나한테 초대장을 내밀었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이거 봐, 나 꽤 놀랐어."
김지석이 과장되게 놀란 표정을 지으며 술잔을 들고 있던 손으로 엄지를 치켜세운 후에 자신을 가리킨다. 윗 단추까지 꼼꼼히 잠겨있던 셔츠는 이미 두 개가 풀어져서 더욱 한량스럽게 보이게 했다. 그만하시라고 말리고 싶었지만 그는 나에게 간섭하지 말라는 무언의 눈빛을 보냈다. 바로 앞에서 최선희는 놀려는 의도가 빤히 보이는 행동을 하는 김지석을 막을 사람은 없다.
최선희는 붉은 입술이 짓이겼다. 말없이 김지석을 노려보던 그녀가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깊이 숨을 들이마시는 모습을 보았다. 김지석 앞에서는 최선희도 별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세상에 두려울 게 없어보이던 그녀가 김지석의 몸짓과 말 한마디 하나, 하나로 흔들리다니.
"난 다 잊었어. 근데 얘길 들어보니 나보단 김지석씨가 더 잊지 못한 것같이 굴고 있는데?"
"맞아. 내가 당신을 어떻게 잊겠어."
"그만해."
"아, 내가 왜 못 잊는지도 다 잊었겠군. 뭐, 다시 상기라도 시켜줘야 하나."
최선희의 균열이 점점 커진다. 그녀에게 속삭이던 유약하던 미풍이 가면을 벗는다. 거대한 태풍이 되어 그녀를 붙잡고 흔든다. 무엇보다 자존심이 강한 최선희는 물러서려고 하지 않는다. 둘의 대화가 계속 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대화를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누구라도 그만 두게 했으면 하고 바라고 있을 때, 최선희에게 다가온 여자가 그녀의 팔을 잡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어떠한 말을 전했는지 알 수 없지만 최선희의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것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그녀가 우리를 훑어보고는 자리를 떴다.
그녀의 뒷모습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던 김지석은 그녀가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서 아예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송시환과 거리를 유지하는 나는 눈인사만 나누고 김지석의 손에 들린 빈 잔을 뺏어 들었다. 김지석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바로 향했다. 위태로운 그가 걱정되어 빠른 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의자에 앉은 그는 바에 기대며 웨이터에게 코냑 한 잔을 시킨다. 왜 그러셨냐고 물어보지 못하고 빤히 쳐다보고만 있자, 그가 굳게 다물었던 입을 들썩였다.
"재미있게 해준다고 했잖아."
"재미치고는 조롱이었어요. 너무하셨던 거 아니에요? 많이 열 받은 것 같던데..."
"멍청하기는. 난 저 여자한텐 그래도 돼. 그거 알아? 위대하신 셰익스피어가 그랬지. 남자가 맹세하면 여자는 배반한다고. 그 사람은 다 알고 있었던 거야. 대단하지 않냐?"
"취하셨어요. 그만 드세요."
"왜 난 몰랐을까. 세익스피어가 아니라서? 아니. 백 련아, 나도 다 알고 있었다. 단지 그 늙은 노인네랑 내기 한 판 했을 뿐이야. 정말 맹세하면 배반을 하는지.."
씁쓸한 미소를 보인 김지석이 보기만 해도 취할 것 같은 술을 거침없이 마신다. 말려보아도 듣질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옆에 앉아서 그의 말을 듣는 일 뿐이었다. 술은 술술 말하게 해서 술이라고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한 김지석은 소리 내어 웃었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다른 사람들처럼 즐길 수 없었다. 김지석과 내가 있는 곳은 그들과 한참이나 동떨어진 공간이었다. 말없이 술을 들이키던 김지석은 추억에 잠긴 얼굴로 간간히 고갤 떨구며 미소를 띄었다. 나는 옆에서 그런 그의 안색을 살피며 샴페인을 홀짝였다.
신나게 어울려 놀았던 이원이와 친구들에게 다음에 놀자고 손 인사를 했다. 2차를 간다고 클럽을 나서던 이원이는 내게 괜찮냐고 여러 번 되물었다. 귀찮아서 빨리 가라고 소리치기를 기다리는 듯 한 모습에 냉큼 팔을 휘둘렀다. 무리 지어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는데 김지석이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놀라서 그를 붙잡자, 귀찮다는 얼굴로 날 흘겨보면서 화장실도 따라올 거냐고 타박을 주었다. 민망함에 서둘러 손을 떼고 어색하게 웃었다.
"괜찮아?"
깜짝 놀라 옆을 보자, 김지석이 앉았던 자리에 앉은 송시환이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주위를 황급히 둘러보았다. 내 속을 알아차린 송시환이 일 때문에 사람 만나러 갔다고 나지막이 말한다. 비밀연애라서 짜릿하다고 해야 하나.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것처럼 뛰었던 심장을 진정시키고 송시환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의 얼굴은 불쾌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 얼굴이 뜻하는 것이 뭔지 잘 알아서 서글펐다. 난 괜찮다고 말하고 싶어 괜히 송시환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정확하게 전해졌을까. 송시환의 입에선 당장이라도 미안하단 말이 나올 것 같았다. 절대로 그 말은 듣고 싶지 않아 서둘러 대화 주제를 바꿨다. 한국에 돌아가서 일정을 묻자, 한 동안은 널널 할 거라는 희망적인 대답을 듣게 되었다. 야속한 송시환은 이번에도 봉달이 데려오기만 해보라며 엄포를 놓았다. 왜 이리 봉달이에게만 야박하게 구실까.
이야기를 나누다가 멀리서 김지석이 보였다. 그에게까지 숨길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송시환을 밀어냈다. 현재 누굴 믿고, 말아야 할지 확실하게 결론이 나지 않는 상태에서 섣불리 행동하고 싶지 않다. 그랬다가는 최선희에게 약점만 내주는 꼴이 된다. 못마땅한 얼굴로 김지석을 한 번 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날 가만히 보고만 있다. 연락하겠다는 말을 하고 허리를 밀어내자 그제야 느릿하게 몸을 움직인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알지만 밀어닥치는 감정은 불쾌하기 짝이 없다. 아마 송시환도 나와 같은 기분일 것이다.
"가자."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김지석이 앉아있는 나의 어깨를 짚었다. 서둘러 일어서서 밖으로 나왔다. 택시는 없었지만 안면이 있는 최선희 측 스태프의 배려로 차를 얻어 탈 수 있었다. 호텔에 도착하자, 술기운이 완전히 오른 김지석은 몸을 가누질 못했다. 힐을 신어서 발이 터질 것 같음에도 끝까지 그를 부축하며 호텔로 들어섰다. 멀쩡해지면 값을 톡톡히 받기로 다짐하며 흘러내리는 김지석을 팔을 붙잡았다. 의식이 있긴 한 건지 자기가 걸으려고 노력은 했지만 실질적으로 별로 도움이 되진 않았다.
다리를 질질 끌어서 구두가 벗겨질 뻔한 일을 여러 번 겪은 끝에 그의 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온 몸에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진다. 머리는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진지 오래고 허리는 나갈 것 같다. 그의 몸을 추스르며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냈다. 그 좋다는 스위트룸에 들어섰지만 몸이 힘드니 좋다하는 것도 눈에 들어올 턱이 없다. 바닥에 눕히고 싶지만 아직 정신은 있는 것 같아, 후환이 두려운 마음에 침대까지 가서 김지석을 눕혔다. 그가 내 몸에서 떨어지자 십년 먹은 체증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분명 다음 날 근육통이 생길 듯한 허리와 팔을 스트레칭하며 걸음을 돌렸다.
이 개고생을 했는데 그냥 갈 수 없어서 미니 바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어서 가장 비싸 보이는 수입 맥주를 꺼내 들었다. 맥주를 두 손에 쥐고 그가 깰까봐 까치발로 걸어 문으로 향했다. 큭큭 웃음을 참지 못하며 문을 열었는데 하마터면 맥주를 놓칠 뻔 했다.
"...최 선희씨."
앓는 듯이 그녀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어느 때보다 매서운 눈으로 날 노려보는 최선희는 신화 속에 나오는 메두사 같았다.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김지석의 행방을 물었다. 어떻게 하면 좋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나의 머리는 제대로 굴러갈리 없었다. 더듬거리다 지금 주무신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가볍게 등이 떠밀렸다. 뒤를 돌아보자, 아까까지만 해도 술주정뱅이처럼 늘어졌던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눈가가 살짝 붉어졌지만 멀쩡해 보이는 김지석이 서 있었다.
"들어와. 그리고 넌 그거 월급에서 깔 줄 알아."
최선희에게 턱짓을 한 그가 돌아서다 말고 내 손에 들린 맥주를 가리키며 말했다.
The Male. 35
By. 형광등♬
(La Boheme 형광등♬ http://cafe.daum.net/gud14)
"백 련씨, 내 얼굴에 뭐 묻었습니까?"
"예? 아, 아니요."
"아무리 내가 잘생겼다고 해도 그렇지, 내 얼굴에서 눈을 못 떼면 일은 누가 합니까."
김지석은 쌀쌀맞은 얼굴의 능청스러운 한마디로 온 직원들이 나를 보며 깔깔 거렸다. 순식간에 얼굴로 달아오르는 열기를 느끼며 책상 가까이 고갤 푹 숙였다. 잠시 넋을 놨다고 해서 그렇게 사람을 민망하게 만들 필요는 없잖아요. 민망함과 원망스러움이 나를 덮쳐와 주먹으로 애꿎은 이마를 두드렸다. 프랑스에서 인천공항으로 도착한 당일. 집으로 향하는 택시에 올라탄 김지석이 차 문을 닫기 직전에 내게 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을 내밀었다. 짐만 집에 갖다 놓고 회사로 오라는 단호한 명령에 얼떨결에 지폐를 받아들고 고갤 끄덕였다. 몸은 피곤해 죽겠지만 그의 말을 거스를 수 없어서 짐도 풀지 못한 채, 부랴부랴 몸만 씻고 다시 회사로 나왔다.
자리에 앉자마자 일거리 폭탄을 맞고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고생하고 있는 직원들에게 일거리를 안겨주던 김지석은 이 일만 끝나면 고급 호텔에서 뷔페를 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일할 동기를 북돋워 주는 말에 금세 활기를 되찾은 직원들을 보면서 미소 짓던 김지석이 순간 악마로 보였던 것은 나의 착각일 것이다. 점심도 자리에 앉아 배달 온 샌드위치로 해결하고 일에 매진했다.
"인쇄소 다녀 오겠습니다. 적어도 5시까진 맡은 일 마무리 해야합니다. 그리고 백 련, 따라 나와."
갑작스럽게 불린 이름에 놀라서 머리카락이 쭈뼛 선다. 슬그머니 고갤들자 노트북을 챙겨들던 김지석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까딱이는 손짓에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끼고 몸을 일으켰다. 짐을 챙겨 사무실을 나서는 그를 뒤따랐다. 수업시간에 떠들다가 선생님한테 교무실 불려가는 기분이다. 뭘 잘못했나 싶은 조마조마한 마음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불현듯 멈춰서는 바람에 그의 발 끝만 보고 따라 걷던 나도 한 발짝 늦게 멈춰섰다. 다행이도 그에게 부딪히는 일은 없었지만, 거리가 가까워서 냉큼 뒷걸음질 쳤다.
"딱 5초 준다. 질문해."
"..최선희씨랑 무슨 얘기 하셨어요?"
"어쭈. 아주 기다렸다는 듯이 물어본다?"
"편집장님이 물어보라면서요."
삐딱하게 선 그가 기가 찬 듯, 픽 바람이 새는 헛웃음을 쳤다. 그의 말에 고개를 떨구고 다시 발끝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 면박 줄 거면 물어보라고 하질 말던가. 홀로 바닥을 보며 궁시렁거리고 있는데 머리에 딱딱한 게 부딪힌다. 고갤 들어 올리자 손으로 내 머리를 헤집는다. 단번에 봉두난발이 된 나는 억울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재미있다는 듯이 웃어보이던 그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결국 내 질문에 대답은 듣지 못했다. 억울하기도 하고 들뜨던 기분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내던져지는 바람에 살짝 우울하기도 하다. 잘 다녀오시라는 힘없는 인사를 남기고 돌아서려는데 김지석은 쉬지도 못하게 일을 시킬 생각인지 나에게 또 일거리를 안겨주었다. 기라면 기어야지요. 묵묵히 고갤 끄덕이자, 온순하게 말 잘 듣는 것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그가 은은한 미소를 띠고 스튜디오를 나섰다.
대답을 듣지 못해 찝찝하긴 했지만 그래도 감시자가 없다는 것만으로 한 커플 벗은 기분이었다. 가쁜한 걸음으로 사무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는데, 저마다 자신의 일에 집중하던 사람들이 책상 밖으로 시선을 던진다. 거의 동시에 바라보는 바람에 당황해서 이도저도 못하고 몸이 움츠러 들었다.
"프랑스에서 어떻게 된거에요? 어서 썰 좀 풀어봐!"
"프랑스에서 왜요?"
"최선희씨랑 난리도 아니었다며!"
IT강국이다 뭐라해도 피부로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선미씨의 한 마디로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클럽에서 사건이 터진지 24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한국에서 일하고 있었을 직원들이 모두 알고 있다니. 정말 무서운 사람들이다. 누가 말을 퍼트렸냐고 추궁하기엔 그 자리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테다. 별일 아니었다고 말끝을 흐려보지만 이 사람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말문을 텄다.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심지어 나보다 더 샅샅이 알고 있었으면서 확인 차 운을 뗐던 것뿐이 분명해졌다.
편집 디자이너인 선미씨는 특유의 화통한 목소리로 유쾌하게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그들의 심성과 나에게 호의적인 태도에 감사를 해야 할까, 지금까지 나를 적대시 했던 사람들과는 다르게 이야기의 초점은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최선희의 성질머리와 최선희 브랜드의 앞으로 사업 방향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에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순간 긴장한 내가 바보스럽게 느끼면서 움츠러들었던 어깨를 과장된 몸짓으로 펼쳤다.
한 없이 농땡이를 깔 만큼 일에 대한 열의가 없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잡담은 15분도 이어가지 못했다. 다시 침묵과 함께 재빠른 키보드 소리만 울리는 사무실에서 서둘러 일을 끝마치기에 분주하다. 일이 끝나면 자유라고 직원들에게 교육시키다 못하 거의 세뇌시킨, 김지석 덕분에 직원들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다. 확실히 주어진 임무를 빨리 끝낼 수록 쉴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것은 최고의 기폭제이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일을 끝마칠 때 쯤에 귀신같은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김지석의 전화를 받은 선미씨의 잔뜩 상기된 얼굴에선 자못 비장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알겠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그녀를 직원들이 숨 죽인채 지켜보았다. 드디어 짧지만 긴장감이 넘치던 전화통화가 끝나고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내놓으라하는 곳에서 이름 좀 날렸다고 하는 사람들이 단 한 명한테 쩔쩔매는 꼴을 보고 있자면, 김지석이 얼마나 대단한 인간인지 존경심마저 생긴다.
"일 끝난 사람들은 퇴근하고 내일 회식하시겠데요!"
선미씨의 경쾌한 목소리에 직원들이 저마다 신음 섞인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일찌감치 일이 끝나서 냉큼 가방을 짚어드는데 선미씨의 안타까운 시선이 느껴졌다. 련씨는 종현씨랑 우진씨 자료 가지고 편집장님 계신 쪽으로 오라는데요. 말이 끝나자마자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피곤한 날 위해서 집에 가자마자 치맥을 시켜 먹으려했던 내 계획이 산산이 무너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이면 왜 나야. 이런 날은 좀 쉬게 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미간을 모았다.
저마다 위로의 말을 남긴 직원들이 사무실을 빠져나간다. 메일로 파일을 받아도 되는 걸 굳이 서류상으로 받아 보시겠다는 그의 아날로그적 감성에 치를 떨었다. 이건 또 무슨 고집이람. 종현씨와 우진씨가 주는 파일들을 받아들고 사무실 문단속을 했다. 갑자기 납덩이처럼 무거워진 발걸음을 옮기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문자가 온 소리에 혹시 송시환인가 싶어서 버튼을 눌러보았지만 날 기다리는 건 김지석이 남긴 지극히 사무적인 문자였다. 5시까지 한국 호텔 로비로.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5시가 되기 10분 전이었다.
"아니, 사람이 정도가 있어야지!"
"왔잖아. 그럼 됐지."
"정말 쿨한 사고방식을 지니셨네요."
김지석에게 파일을 안기자마자 상체를 숙이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퇴근시간이 가까운 때라서 차가 막혔다. 그리 멀지 않는 거리였지만 상식적으로 10분 안에 가긴 무리였다. 하지만 그 놈의 잔소리가 뭔지. 그거에 겁을 먹고 TV에 나오는 것처럼 도로에서 택시 내려 그대로 호텔로 내달렸다. 그 망할 놈의 영화가 김지석에게 DVD로 있는 게 분명하다. 눈에 띄는 날에 당장이라도 박살을 내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턱턱 막히는 가슴팍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여기 호텔 베이커리에 치즈 케이크가 그렇게 맛있다던데. 아메리카노랑 같이 먹으면 입 안에서 환상의 하모니를 이루면서 탭댄스를 춘다던데. 눈을 굴리며 기웃거려 보지만 나를 한 번 힐끔 쳐다보기만 하고 꿈쩍도 안한다. 고생했다고 커피 한 잔도 사주지 않을 요량인지 그는 손에 들린 자료에만 집중한다. 바란 내가 등신이지. 전달이 됐다면 이제 집에 가보겠다고 말하려는데 김지석 뒤로 보이는 익숙한 인영에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왜, 할 말 있어?"
갑자기 조용해진 탓에 고갤 든 김지석이 의아함을 담은 얼굴로 턱을 쓸었다. 아니라고 고갤 내저어봤지만 눈치 빠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단 번에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작게 탄식이 흘러 나왔다. 못 알아보길 바라보지만 헛된 희망일 뿐이다. 어떤 기분인지 쉽게 감정을 풍기는 뒷모습에 초조해졌다. 중년의 남자와 팔짱을 낀 채 걸어오는 최선희는 얼굴 한가득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다. 항상 온 신경이 곤두선 사람처럼 구는 것만 보다가 저런 모습은 처음 보는 터라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와 발 맞춰 걸어오는 중년의 남자는 정치, 경제면과 머리가 먼 나라도 익히 들어 잘 아는 인물이었다. 그녀의 남편이자 패션 유통계의 큰 기업인 신화그룹의 김 성근 사장이다. 한 올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깔끔하게 넘긴 머리와 각이 잡힌 세련된 수트에서 그의 성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이 고갤 드는 것은 동시였다. 허나 두 사람의 반응은 굉장히 상반되어 극과 극을 달렸다.
"아니, 이게 누군가!"
마치 당장이라도 껴안을 기세로 다가온 남자가 김지석에게 손을 내밀었다. 김지석은 내게 파일을 내밀더니 가볍게 그의 손을 맞잡았다. 예기치도 못한 전개에 당황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나보다. 최선희의 얼굴엔 초조한 기운이 역력하다. 김 성근 사장은 악수를 나누며 김지석에게 몹시 반가운 듯 행동했다. 어깨를 두드리는 그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김 성근은 매체를 통해서 봤을 때보다 훨씬 기골이 장대했다. 골격이 큰 김지석과 마주서도 전혀 모자람이 없는 남자였다. 차분하고 예의 바르게 그의 안부를 물은 김지석 또한 다른 사람 같았다. 한참이나 손을 놓지 못하던 김 성근은 문득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최선희를 보더니 호탕하게 웃었다.
"이런, 내가 너무 반가워했군. 여기는 내 집사람. 자네도 알고 있지?"
"네. 이번 쇼, 성공적으로 마친 것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이건 무슨 촌극이란 말인가. 저절로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 없다. 가볍게 목례를 하는 김지석과 다소곳한 얼굴로 감사 인사를 하는 최선희의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최선희는 내리깐 눈을 쉽게 들지 않았다. 조선시대 사대부 여인같은 고고한 모습에 입술을 비틀었다.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대충 감은 잡혔다. 아주 더럽게 얽혔구나. 보는 사람조차 어색하게 만드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죽일 듯이 열렬하게 반응하는 사이라면 누가 믿을까 싶다. 최선희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사이에 얼굴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갤 틀자, 궁금함을 가득 담은 김 성근의 눈과 마주쳤다. 당황스러워 김지석을 힐끗 훔쳐보자 그가 미소 짓는 것이 느껴졌다. 곧 이어 허리를 감싸는 행동에 외마디 비명을 지를 뻔 하였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이쪽은 지금 진지하게 만나고 있는 친구입니다."
"바람 같던 자네가 드디어 마음 붙일 곳을 찾았다니 이거 기뻐할 일이군!"
여기에 엮이고 싶지 않았지만 내 허리에 힘을 주어 붙잡은 터라 쉽게 빠져나올 수 없었다. 김 성근이 내민 손을 잡으며 억지로 미소를 뗬다. 다행스러운 것은 관심이 나에게서 다시 김지석에게로 넘어간 것이다. 김 성근은 해외에 나간 동안 김지석의 행방을 굉장히 궁금해 하는 듯 했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김 성근이 그를 굉장히 아낀다는 것 또한 느낄 수 있었다. 표면적인 호의가 아닌 인간으로서 가지는 진솔한 호의와 관심이 담겨있다. 아이러니한 상황에 정신이 피폐해지는 것 같았다. 최선희는 남편의 입에서 자신이 오를 때마다 어색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미소를 보였다. 더욱 말이 길어 질 때쯤에 그녀가 그의 팔을 한 번 쓸었다.
중역들 만나신다고 안하셨어요? 나긋한 목소리에 김 성근은 너털웃음을 지어보였다. 다음에 꼭 자리를 만들어 보자는 말을 한 김 성근은 재차 확인까지 하는 모습을 보였다. 몇 분, 몇 분이 소중한 사람이 그토록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니. 지금까지의 김 성근의 태도를 보건데, 최선희와 김 지석의 사이를 전혀 모르는 듯 했다. 두 사람이 호텔을 빠져나가자마자 김지석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쏘아붙였다.
"잘나신 분이 저는 왜 끌어들여요."
"기어오른다, 백 련. 넌 충분히 협조해야할 의무가 있다는 걸 명심해."
"의무는 무슨 의무요!"
"아직도 송시환이랑 만나는 거, 최선희 귀에 들어가도 괜찮나?"
치켜들었던 턱을 슬그머니 내렸다. 눈치 못 채게 한다고 행동했는데 예전부터 알고 있었나보다. 한참 봐준다는 투로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그가 품에 안긴 파일을 가져간다. 그만 가보라는 말에 얼떨떨한 기분으로 인사를 나눴다. 호텔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호텔 로비를 느린 걸음으로 나왔다. 조금 있으면 황금빛 노을이 질 하늘을 올려 보았다. 김 성근을 의식하고 피하려했지만 김지석에 무의식적으로 시선이 향하던 최선희가 떠올랐다. 우습게도 그 표정이 무척 절박해 보여서 도와주고 싶었다. 아마 내 생각을 듣게 됐다면 그녀가 경멸에 찬 눈으로 바라볼 것이 불 보듯 뻔했지만 말이다.
벨 맨이 잡아주는 택시에 올랐다. 사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았지만 이 몸으로 지하철을 탔다간 비명횡사 할지도 모를 것 같았다. 퇴근길이라 길이 막혔지만 개의치 않았다. 호텔에서 마주친 기묘한 인연이 머릿속을 떠나지 못한다. 피곤함에 지워내고 싶어도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잔뜩 촉각을 곤두세워서 곰곰이 그 때를 되새긴다. 내 눈에 보였던 최선희의 시선과 표정, 내 허리를 감쌌던 김지석의 손에 들어가던 힘. 그리고 두 사람의 속이 어떻게 타들어가는지 모르고 마음을 다해서 그 상황을 반가워하던 김 성근까지. 김지석과 마주보던 두 사람은 그의 은근한 분노를 알아차리지 못한 건지 의문이 생겼다. 난 바로 곁에 있어서 알 수 있었던 걸까. 생각을 하다 보니 김지석의 가졌던 분노의 출처도 의심가기 시작했다. 배신에 대한 단순히 순수한 분노였는지, 그녀 곁에 김 성근이 있는 상황에 질투가 담긴 분노였는지 헷갈린다.
생각보다 빨리 도착한 집을 올려다보며 택시에서 내렸다. 집까지 고민을 안고 들어가지 말자는 다짐을 하며, 숨을 끌어 모아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모조리 떨쳐지길 바라면서 엘리베이터에 올라 버튼을 눌렀다. 옆면에 붙은 거울 속 나는 초취하기 짝이 없었다. 이게 과연 직장인의 얼굴이란 말인가. 다크써클이 짙게 내려앉은 눈가를 꾹꾹 눌러보았다. 팩이나 해야겠다. 짐도 풀어야 한다는데 까지 생각이 미치자 온 몸이 물 먹은 솜처럼 늘어졌다.
처진 어깨를 타며 떨어지는 가방을 받아들고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발을 아프게 조였던 신발을 벗자 해방된 기분이었다. 방까지 기어가고 싶을 정도다. 가방을 내려두고 봉달이를 부르는데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방에서 자나 싶어 방문을 열어보자 예기치도 못한 모습에 가볍게 헛웃음이 나왔다. 내 침대 위에서 몸을 말고 꼭 붙어 자고 있는 두 물체를 향해 다가갔다. 깊은 잠에 빠졌는지 둘 다 기척을 느끼지도 못한다. 침대 끝에 앉아 헝클어진 송시환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무게로 인해 침대 한 쪽이 쏠리자 봉달이가 살짝 실눈을 뜨더니 다시 잠을 청한다. 입고 있는 옷을 보고 얼추 시간을 계산해보니 나 보다 프랑스에서 늦게 출발한 송시환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우리 집으로 온 것 같았다. 빡빡한 일정을 소화한 후였기에 회사에서 휴가라도 얻은 걸까, 걱정되는 마음에 재빨리 이마를 짚어 보았다. 다행이도 따뜻할 정도의 미열이 있었지만 심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패션쇼를 마치고 나면 걸리는 열병도 이번에는 무사히 넘어가나보다.
"시환아."
불러도 꼼짝을 안한다. 반응이 없자 자는 동안 씻어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켰다. 겉옷을 벗어 들고 세탁기 안에 넣을 옷을 챙겨 들다가 프랑스에 가져갔던 캐리어가 비어있는 채로 속을 내보이고 있었다. 멍하게 그 걸 보다가 고갤 돌려 침대에서 자고 있는 송시환을 바라보았다. 하다못해 이젠 우렁신랑 흉내라도 내보겠다는 건가. 생각치못하고 들어올 때는 몰랐는데 찬찬히 주위를 살펴보니 프랑스에 가져갔던 내 물건들이 제자리에 정리되어 있었다. 서둘러 앞 베란다에 나가보고 기함할 듯 놀랐다. 속옷까지 가지런히 널려있는 옷들은 송시환의 작품이 분명해 보였다. 민망함과 부끄러움이 한 번에 몰려들었다. 꼭 감았던 눈을 뜨고 뜨거워진 귓가를 문지르며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혼자 두는 것이 신경 쓰여서 서둘러 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까지도 여전히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깨어 있을 때랑 아예 인격이 달라 보일 정도로 자는 얼굴은 온순하기 그지없다. 살짝 벌어져 툭 올라온 윗입술의 산을 가볍게 눌러보았다. 건드려도 쉽게 깨지 않자 무료함이 몰려온다. 자기만 피곤하나. 투덜거리며 방을 나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예상은 한 대로 꾸역꾸역 냉장고 안에 밀려들어간 마트 봉지를 꺼냈다. 물건 정리까지 바라면 내가 너무 이기적인 거겠지. 오로지 자신의 취향대로 골라온 음식을 정리하면서 저녁으로 먹을 만한 것들을 꺼냈다. 포장 음식이 없고 재료들만 줄기차게 나오는 봉지 안을 보며 한숨이 나왔다. 저녁을 만들어 먹자는 송시환의 분명한 의사 표시었다. 하필이면 오늘이냐고 투덜거리고 싶지만 누구보다 고생했을 그가 늘어져있으니 튀어나오려는 욕을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간단하고 금방 만들 수 있는 찌개를 끓이기 위해 가스레인지에 물을 올렸다. 내 주먹 세 개가 합쳐진 크기의 햄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몸에 좋은 음식만 먹고 관리한다고 해도 죽어도 햄은 못 버리겠지? 숭덩숭덩 재료를 썰어 넣고 끓기를 기다렸다. 밥만 먹고 쉬는 거야. 늘어지는 내 몸을 향해 암시를 걸며 식탁을 세팅했다. 미관상 그리 좋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맛이 없는 것은 아닌 찌개까지 식탁 위에 올려놓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자고 있는 송시환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일어나서 밥 먹어."
".....어..왔어."
아직 잠을 떨치지 못한 송시환은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퉁퉁 부운 눈두덩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비몽사몽으로 어눌하게 말을 늘어놓던 송시환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느리게 눈을 비비고 나서야 제대로 시선을 맞출 수 있었다. 날 확인하자마자 손을 뻗는 행동에 잠자코 안겼다. 방금 자고 일어난 송시환의 체온은 어느 때보다 높았다. 갑자기 열이 오르는 건 아닌가 싶어서 온도를 확인할 겸 목에 입술을 묻었다. 송시환의 가슴팍이 들썩이는 게 느껴진다. 뭔가 싶어 떨어져 나와 바라보자 실실 웃는다.
"백 련, 완전 정열적이야."
"뭐어?"
"나도 엄청 동하긴 하는데 지금 힘이 없어서 안돼. 나 아무 것도 못 먹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약올리듯이 웃는다. 얼굴이 달아올라 송시환의 어깨를 밀쳐냈다. 킥킥 거리는 송시환을 뒤로하고 서둘러 식탁으로 걸어갔다. 비실대며 뒤따라 나오는 송시환은 차려진 음식을 보며 작게 감탄사를 발했다. 생각보다 맛있게 밥을 먹는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다. 정말 밥을 못 먹었는지 먹어치우는 속도도 장난이 아니었다. 머리는 까치집을 해서 양 볼 빵빵하게 음식을 물고 있는 지금 송시환의 모습을 이원이가 본다면 아마 대성통곡을 할 것이다. 저절로 상상되는 이원이의 모습에 입 꼬리를 올리자 송시환이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이 미간을 모아 찌푸린다. 고개를 내젓고 어서 먹으라고 손짓하자 찝찝하다는 눈으로 날 보다가 다시 젓가락을 움직인다. 하여튼 눈치 하난 좋아.
설거지는 나중에 하라고 붙잡는 바람에 그대로 거실 쇼파에 앉혀졌다. TV를 보자고 한 사람은 송시환이면서 아예 관심을 끈 지 오래다. 의미 없이 버튼을 누르다가 예전에 흥행했던 액션 영화가 나오는 채널에 멈추었다. 입소문만 익히 들었지 제대로 본 적은 없어서 흥미가 생기는데 옆에 붙어 앉은 그는 그렇지 않은가보다. 누군가가 식욕과 성욕은 비례한다고 했던가. 말끔히 수면욕과 식욕을 채운 송시환은 없다던 힘을 금방 되찾은 모양이다. 인간의 본능에 누구보다 충실한 송시환에게 남은 욕구란 오직 하나 뿐이었다. 그의 뜨거운 입술은 쉴 새 없이 귓바퀴와 목 언저리를 괴롭혔다. TV 보자며. 턱으로 영화를 가리켜도 그에겐 이미 TV의 존재 자체를 잊은 듯한 눈치였다. 옆구리를 파고드는 손길에 몸을 비틀어 물러앉았다. 단호한 얼굴로 송시환을 마주보자 그가 눈을 맞춰 지그시 날 응시한다. 붉어진 눈가가 도드라진다.
"아무리 섹시하게 굴어도 머리가 까치집인 이상 난 하나도 안 동하는데."
"이래도?"
내 손을 가져가 손바닥의 오목한 곳에 입술을 맞춘다. 선명하게 느껴지는 입술의 감촉에 소름이 돋았다. 뜨거운 온기가 손을 타고 전해져 귓가에 물든다.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와 같은 시선은 여전히 날 옭아맨다. 입술이 떨어지고 새삼스럽게 밀려드는 부끄러움에 결국 먼저 시선을 피했다. 계속 마주보고 있다가는 온 몸의 수분이 모두 증발해 버릴 것 같았다. 입술을 깨물자 엄지손가락이 아랫입술을 훑어 내리는 바람에 놀라서 물러났다. 그것조차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턱을 잡은 손이 완강하다.
분위기를 유하게 풀기 위해 웃어보려 했지만 쉽사리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놀린 내가 잘못이다. 농도가 더해지는 유혹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여유를 잃은 나는 이미 송시환의 손아귀 위로 떨어진 셈이었다. 그걸 알면서 놀리듯이 밀어붙이는 송시환의 힘을 감당하기에는 아직 많이 버거웠다. 더 이상 버티는 것도 힘들어서 두 눈을 감았다.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숨 막히는 침묵이 감돌더니 피식, 바로 앞에서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초조함에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대로 뜨거운 입술이 맞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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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자 위에 올려둔 핸드폰이 미친 듯이 울렸지만 온 몸이 노곤하여 손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았다. 피곤하다고 칭얼거린 건 모두 나에게서 동정심을 얻기 위한 수작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섭게 달려드는 송시환은 정말 한 마리의 짐승이 따로 없었다. 도대체 그 힘은 어디서 오는 건지 궁금할 정도였다. 장시간의 비행과 일에 피로가 겹친 나는 애원하며 필사적으로 물러났지만 그는 쉽게 놔주지 않았다. 결국 동이 트는 걸 감기는 눈으로 확인하고 까무룩 쓰러지듯 잠에 들었다. 등을 감싸는 온기를 느끼며 탁자로 손을 뻗었다. 뻑뻑한 눈을 들어 올리고 확인한 액정에는 어느 정도 예상은 한 번호가 찍혀 있었다.
벨소리가 귀에 거슬렸는지 웅얼웅얼 투정을 부리는 송시환을 곁눈질로 보다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움직일 때마다 온 몸에서 비명을 질렀다.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입고 까치발로 방을 나와 통화 버튼을 눌렀다. 기다렸다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는 최선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불필요한 말은 붙이지 않는 그녀는 담백하게 자신이 할 말만 전했다. 나 또한 망설일 필요 없이 곧 바로 알았다는 의사를 전하고 통화를 마쳤다.
이번엔 내가 갚아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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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네요ㅠㅠ 아이고, 아이고. 소나분들 죄송합니다.
즐거운 한가위 되세요^^
첫댓글 기다립니다....^^
재미써요
ㅠㅠ 첨 보는데 갑동,,,, ㅠㅠㅋㅋ
잘 보고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