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7장 37-38절 생수의 강이 흘러 넘쳐 나리라.
요 7:37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영국의 유명한 저술가인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라는 분이 있습니다.
국제 연맹이 창설된 후에 1919년 파리에서 평화 회담을 개최했습니다.
로렌스경은 이때에 아랍 대표들과의 서방 사람들과 중재역할을 맡았습니다.
아랍대표들은 파리에서 보았던 에펠탑이나 루브르 박물관보다도 호텔의 목욕탕을 훨씬 더 인상적으로 보았습니다.
물이 아주 부족한 사막에서 왔는데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펑펑 나오는 것이 너무도 신기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회담이 끝날 무렵 로렌스경에게 그들이 묵고 있던 호텔의 직원이 황급히 찾아왔습니다.
“정말 큰일 났습니다. 로렌스 경, 지금 아랍 대표들이 호텔의 목욕탕을 다 뜯고 있습니다. 빨리 와 보십시오.” 그래서 가서 보니 정신없이 목욕탕을 뜯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요? 묻자 그들의 대답은 정말 황당했습니다.
“물이 없는 사막에서 이 목욕탕은 정말 인기가 있을 것이고, 사막 한가운데에 이 목욕탕을 놓고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펑펑 쏟아질 테니까요.
돈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 변상하겠습니다.”
속사정을 들은 로렌스가 아랍 대표들에게 목욕탕에 물을 공급해 주는 수도관이 따로 수원지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땀을 뻘뻘 흘리면서 겨우 설명했습니다.
물은 수원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수원지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진정한 목적은 성령을 보내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다 재림하는데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기도합니다.
제일장 하나님은 초막절 행사를 하게 하셨습니다.
요 7:1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요 7:2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요 7:3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요 7: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요 7:5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요 7: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요 7: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요 7:8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요 7:9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요 7:10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시니라
요 7:11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요 7:12 예수께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혹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하게 한다 하나
요 7:13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를 말하는 자가 없더라
요 7:14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요 7:15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요 7:1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요 7: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요 7: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요 7: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요 7:20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요 7: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를 인하여 괴이히 여기는도다
요 7:22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주느니라
요 7:23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
요 7:24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의 배경은 이스라엘의 삼대명절인 초막절 때 일어난 일입니다.
초막절은 장막절이라고도 합니다. 이날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사십 년 광야 생활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모든 이스라엘에 사는 사람과 다른 나라에 흩어졌던 성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듭니다. 이들은 8일 동안 텐트를 치고 생활하기 때문에 그날을 장막절이라고 합니다. 장막 위에 풀이나 나무를 얹기 때문에 초막절이라고도 합니다.
우리 달력으로는 10월 15일이기 때문에 모든 추수가 끝나고 저장한 후입니다.
마치 우리나라 추석과 같이 한 해의 추수를 감사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곡식을 다 저장하였다고 하여서 그날을 수장절이라고도 합니다.
이 명절은 일 년 중에 가장 풍성한 명절입니다. 가장 하나님께 감사하는 명절입니다.
우리는 이런 추석 명절에 선물을 가지고 고향으로 갑니다.
고향에서는 풍성한 과일과 고기와 술로 즐깁니다.
따뜻한 방안에서 온 가족이 오손도손 송편을 먹으며 지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즐거운 수장절에 과거 조상들이 사십년 광야 생활한 것을 체험하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풍요를 누리게 한 것이 아니라 불편함을 체험하게 하였습니다. 이들이 장막생활을 하면 자고 씻고 먹는 것이 다 불편합니다.
이때는 가을이므로 밤이 되면 춥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풍성한 명절에 우리의 풍속하고는 전혀 다르게 불편함을 체험하게 하였습니다. 흥미롭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풍요만으로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궁핍을 알 때 감사합니다.
궁핍을 알면 우리의 기대수준이 낮아집니다. 기대수준이 낮아진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감사합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영화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이 도시에서 한 사람씩 눈이 멀게 됩니다. 눈머는 것이 전염됩니다.
눈먼 자들을 수용소에 가둡니다. 눈먼 자들의 수용소는 무정부 상태가 찾아옵니다.
그곳에는 인권이 없습니다. 물질적으로 약탈당하고 성적으로 유린당합니다.
그러다가 한 사람씩 눈먼 순서대로 눈을 다시 뜨게 됩니다. 그들은 감격에 외칩니다.
그 수용소에 눈을 떴던 한 사람이 남편을 따라서 들어갔습니다. 그 여자가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이렇게 많은 것을 깨달았는데 나는 무엇을 깨달았는가?”
계속 눈이 떠있던 사람은 감사도 감격도 없습니다. 이것을 안타까워합니다.
이처럼 궁핍한 생활을 체험하면 풍요에 대해서 감사가 생깁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에서 노예살이도 했습니다.
사십년 광야 생활도 하였습니다. 이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 왔을 때 그들은 감격하였습니다. 하지만 광야 생활도 체험하지 못하고 풍요 속에 태어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원래부터 풍요를 누린 줄로 생각합니다. 이들은 감사가 없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감사를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까?
군대 갔다 온 사람은 자유로운 사회에서 사는 것을 감사합니다.
병원에 가서 호흡기를 꽂고 살았던 사람들은 숨 쉬는 것으로도 감사합니다.
맹장 수술을 받았던 사람은 방귀를 꿀 수 있는 것도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런 고난을 당하기 전에 우리가 사는 것만으로 감사해야합니다.
제이장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명절에 예루살렘 올라가셨습니다.
요 7:25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혹이 말하되 이는 저희가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요 7:26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저희가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요 7:27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예수님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가 오실 때는 어디서 오는지 모른다는 생각하였습니다.
이사야서 46장에 보면 그리스도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며 산이 진동하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메시야는 큰 영광과 위엄 가운데 강림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어린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시 받는 갈릴리 나사렛 출신입니다.
예수님이 어린 아기로 태어난 것을 다 알고 있는데 예수님이 무슨 메시아냐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은 맞는 것 같지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자들입니다.
성경에는 하늘에서 강림하시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도 있지만 우리가 지난 주 배운 것처럼 한 아기로, 한 싹으로, 흠모할 만한 것도 없으신 모습으로 오신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처음 오실 때는 어린 아기로 오시지만 다시 오실 때는 하늘에서 오십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자들은 성경 말씀 중에 자신에게 은혜가 되는 말씀만 받아들이고 좋아하지 않는 말씀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려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말씀을 다 받아 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재림 때는 영광의 주이시지만 초림때는 고난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재림 때는 권능으로 오시지만 초림 때는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요 7:28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가라사대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요 7:29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 하신대
예수님은 왜 자신이 메시아인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보내셔서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므로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보낸 분이 있고 자신은 하나님이 보내서 이 땅에 오셨다는 말씀을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이 성령으로 태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남녀 관계에 의해서 태어나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처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은 다 남녀 관계에 의해서 태어났습니다.
여기에는 석가나 공자나 마호메트나 차이점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신 분이요 하늘에서 오신 분이므로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요 7:30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요 7:31 무리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요 7:32 예수께 대하여 무리의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하속들을 보내니
30-32절을 보면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들은 메시아가 오시더라도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보다 더 많은 표적을 행하실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살아생전에 많은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문둥병자,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시고 군대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들은 이런 표적을 근거로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보여주실 표적은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보다 더 큰 표적을 보여주십니다.
요 7:3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요 7:34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신대
요 7:35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저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요 7:36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예수님은 조금 있다가 유대인들에게 체포되고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새로운 몸으로 부활하십니다.
부활 후에 사십 일 동안 부활을 증거하시다가 하늘로 승천하여 하나님 나라로 가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진짜 표적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하늘나라로 가신 예수님은 우리의 진정한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인간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헬라에 흩어진 유대인들에게 갈 것인가 반문했습니다.
예수님은 흩어진 유대인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가셔서 하실 일이 무엇입니까?
제삼장 예수님은 성령의 생수를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요 7:37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요 7: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이제 초막절 마지막 8일 째입니다. 이때는 명절의 절정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초막절 행사에 초막을 짓는 것 외에 또 하나 기념하는 것이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실로암 못에서 물을 길어다가 예루살렘 성전 앞에 붓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막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물을 주신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백만의 인구와 가축이 물을 먹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막에서 물이 없어 갈증이 나서 모세를 원망하며 부르짖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에 대하여 서서 지팡이로 바위를 치라고 하였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을 때 바위에서 물이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조금씩 나오다가 나중에는 폭포수같이 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물은 강물을 이루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든 가축들이 이 강물에서 풍족하게 물을 마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실로암 못에서 물을 퍼다 성전에 부으면서 하나님이 주신 물을 기억하고 감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행사를 하는데 갑자기 일어서셨습니다. 예수님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솟아나리라.”
예수님은 바위를 자신에 비유하셨습니다. 바위에서 강처럼 나온 생수를 성령님에 비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신선한 비유를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비유에서 두 가지를 배웁니다.
먼저 예수님이 물을 공급하는 수원지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여 하나님 우편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서 성령을 받아서 우리에게 보내주십니다.
사람들은 성령을 받기 위해서 여러 가지로 애를 씁니다.
어떤 사람은 나무뿌리를 뽑으며 부르짖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을 받으려면 소나무를 세 그루는 뽑아야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목이 쉬도록 부르짖습니다.
대부분 성령 운동을 하시는 분들이 목이 쉬어 있습니다.
이들이 간절히 찾는 것은 성령을 받는데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성령님의 근원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처음 죄 사함을 받고 예수님을 영접할 때 성령을 충만히 받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예수님이 계시는 자리에 다른 것을 놓습니다. 예수님 대신에 물질을 놓고, 예수님 대신에 자녀나 부모를 놓고, 예수님 대신에 양들을 갖다 놓고, 예수님 대신에 이성을 갖다 놓습니다.
그들의 신앙생활이 메말라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으려면 우리 예수님을 다시 찾아야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모셔야합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여 영광중에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영접해야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나의 마음속에 충만히 임하십니다.
성령님은 바위에서 나오는 강물과 같습니다. 성령님을 비유하는 것이 많습니다.
불에도 비유하고 바람에도 비유하고 기름에도 비유하고 비둘기에도 비유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는 성령님을 물에 비유합니다.
물은 우리 몸에 8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물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아주 중요합니다.
물이 있어야 생명이 자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가 날마다 물을 마셔야하는 46가지 이유를 적어 보냈습니다.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물은 에너지의 주 원천입니다. 물은 인체 내에 전기적 에너지와 자기적 에너지를 생성합니다. 우리는 물로부터 살아갈 힘을 공급받습니다.
물은 세포구조의 건축 설계에서 강력접착제 역할을 합니다.
물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DNA의 변형을 줄여줍니다.
물은 골수의 면역체계의 기능을 증강시켜줍니다. 여러 병원균을 막아줍니다.
물은 모든 음식물과 비타민 미네랄을 용해시켜 음식물을 날라주고 소화 흡수시켜 줍니다. 물은 산소를 공급하며 유독 가스를 배출시켜 줍니다.
물은 몸의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시켜 줍니다.
물은 척추나 관절에 윤활유 역할을 하며 완충제 역할을 합니다.
하여튼 물이 있어야 생명이 자라고 활동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물과 같습니다.
성경에는 물에 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모세와 야곱이 사랑하는 사람을 우물에서 만납니다. 에덴동산과 하나님 나라에는 생명수의 강물이 흐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은 목마름을 채워주십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목마름이 있습니다.
이성으로 채울 수 없고 물질로 채울 수 없고 세상적인 쾌락으로 채울 수 없는 목마름이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이런 영혼의 목마름을 채워주십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다섯 명의 남편으로 채울 수 없는 목마름을 성령님은 채워주셨습니다.
성령은 우리 영혼에 샘솟는 기쁨을 주십니다. 영원한 기쁨을 채워주십니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마음에 강같은 평화를 주십니다.
예수님은 곡식의 씨와 같습니다.
성령님은 씨에 주는 물과 같습니다. 물을 주어야 씨가 자랍니다.
성령님은 모든 영적인 것을 운반하고 활동하게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죄의 노폐물을 씻어내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의 상처받은 것을 다 씻어내 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먹은 말씀을 소화 흡수하게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예수님께 붙어있게 하는 접착제 역할을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속사람을 날마다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가 육적으로는 늙지만 영적으로는 점점 새로워져야합니다.
이 일을 성령께서 하십니다. 성령님을 우리를 공격하는 마귀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영혼에 완충제 역할을 합니다.
어떤 시련이나 충격적인 일을 받아도 그 충격을 흡수시켜 다치지 않게 합니다.
성령님은 윤활유와 같이 우리의 활동을 부드럽게 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영적인 생활을 부드럽게 만들어주십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은혜의 단비를 주십니다. 우리를 위로해주십니다.
성령님은 어머니와 같습니다. 어머니처럼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해주십니다.
성령님은 힘을 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 병자를 치료하십니다.
물이 생명을 주듯이 성령님은 생명을 주십니다.
인류는 물이 있는 곳에 발전하였습니다.
물이 끊어지면 사막과 같아집니다. 에스겔서에 보면 사해지방에 물이 흐릅니다.
물이 흐르자 나무들이 자라고 꽃이 피어납니다.
동물들이 모여들고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이 계신 곳에 하나님은 생명을 자라게 하십니다.
성령님은 자유를 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영혼을 자라나게 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풍성하게 하십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풍요롭게 하십니다.
성령님은 물이 어떤 현실에서도 적응하듯이 우리가 현실에서 잘 적응하게 하십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신 후에 성령의 강물이 흘렀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신 후에 성령의 강물이 흘렀습니다.
예루살렘에 흐르고 유대인들이 이 흐름을 막았습니다.
그러자 성령의 강물은 사마리아 지방으로 안디옥으로 소아시아로 유럽으로 로마로 미국으로 아시아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 물이 지금 한국에까지 흐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이 강물처럼 흐른다고 하셨습니다.
한강이나 금강 물처럼 흐릅니다. 대청댐의 물을 청주 대전 천안 사람들이 먹습니다.
한강물을 이천만의 서울 시민이 먹습니다. 성령님은 이렇게 많이 흘러넘칩니다.
서울 여의도 순복음 교회는 허허 벌판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용기 목사님에게 성령의 강물이 흘렀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들어서 성령의 강물을 마셨습니다.
성령의 강물이 우리의 속에 흘러야합니다. 우리의 교회에는 성령의 강물이 흘러야합니다. 여러분은 생수의 강물이 마음속에 흐르고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성령의 강물이 풍성하게 흐르도록 유지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저를 믿는 자는 생수의 강물이 흐른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광야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로 돌아가 보아야합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생수의 강이 넘치게 하셨습니다.
광야는 어떤 것입니까? 광야는 아무런 물도 없는 곳입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광야에서 오직 하나님께만 매달렸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만 신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초막절을 통해서 예루살렘의 풍요를 비우고 옛날에 궁핍을 체험하도록 하셨습니다. 궁핍 속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때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비우고 예수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믿는 자들에게 임하십니다.
내려놓는 것으로 유명한 이용규박사는 하버드대 박사와 미국 시민권을 내려놓고 몽골로 갔습니다. 그곳에 성령께서 일하셨습니다.
요 7:40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혹은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요 7:41 혹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요 7:42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요 7:43 예수를 인하여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요 7:44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선지자라고도 하고 그리스도라고도 하고 그리스도 아니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로 믿지 않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나지 않고 갈릴리 나사렛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알듯이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고 갈릴리 나사렛에서 자라셨습니다.
이들은 불충분한 정보들 근거로 예수님에 대해서 불신에 빠졌습니다.
우리가 성경 잘 공부해보면 예수님은 구약 성경에 예언된 그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요 7:45 하속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저희가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요 7:46 하속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요 7:47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요 7:48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요 7:49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45-49절을 보면 종교지도자들은 하속을 보내서 예수님을 잡아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속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감동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알지 못하므로 그리스도가 아니요.
저주를 받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삼십팔년된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 법을 어겼으므로 그리스도라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안식일 법의 정신을 누구보다 더 잘 실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법의 정신을 따라서 병자들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요 7:50 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저희에게 말하되
요 7:51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요 7:52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요 7:53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50-52절을 보면 이때 공회원으로 예수님을 믿은 니고데모가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그의 말을 들어보고 예수님의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예수님이 죄인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마음속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됩니다.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성령의 강물이 우리 가운데 흐르는 것입니다.
처음에 아기의 모습으로 아신 예수님은 하늘에 올라가시고 이제는 성령으로 오셨습니다.
다음에는 큰 능력과 영광으로 재림하실 것입니다.
누가복음 21장 27절 말씀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예수님은 이 땅에 세 번 오십니다. 처음에는 베들레헴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두 번째는 오순절날 예루살렘에 오셨습니다.
이제 세번째는 구름타고 번개처럼 오실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충만히 받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