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진결전수(眞訣傳受)
잠시 후 착륙할 예정이니 안전벨트를 매달라는 기내 방송이 있은 직후 스튜어디스들이 통로를 다니며 손님들의 안전벨트착용 여부를 일일이 확인했다.
스튜어디스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다께다는 시선을 비행기 창밖으로 돌렸다. 둥글고 작은 창이어서 답답하긴 했지만 스튜어디스를 보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는 제복 입은 여자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창밖의 가을 하늘은 푸른빛이 만연해 있었다.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쪽빛의 하늘이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좋아하는 뭉게구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비행기가 구름 속을 지날 때 느껴지는 비현실적인 몽환감이 아쉬웠지만 날씨를 탓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착륙할 예정이라는 기내 방송이 있었지만 아직 서울의 모습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타고 있는 것은 나리타발 서울행 대한항공 보잉 747기였다.
선이 굵은 다께다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 때문에 그와 나란히 앉아있는 두 사내는 나리타에서 서울 상공까지 오는 동안 긴장을 풀지 못했다. 그들은 평범한 자들이 아니었지만 다께다는 그런 그들에게도 어려운 사람이었다.
"선생님, 안전벨트를 하지 않으셨네요."
웃는 모습이 예쁜 스튜어디스는 창가에 앉은 정장 차림의 일본인에게 말을 한 직후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의 말에 고개를 돌린 일본인의 얼굴 때문이었다. 푸른빛이 도는 검은색 정장을 입은 일본인은 처음이다 싶을 정도로 남성적인 매력이 가득했다. 40대로 보이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게 강렬한 인상이어서 스튜어디스의 심장은 통제 불능일 정도로 뛰기 시작했다.
"미안하오."
다께다는 사과와 함께 안전벨트를 맸다. 스튜어디스가 그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지금은 다른 때와는 사정이 달랐다. 그는 접근하는 여자를 마다하는 사내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겐 여자와 한가하게 노닥거릴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스튜어디스에게 무심한 눈길을 한번 주고 난 다케다는 다시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푸른 하늘 위로 한국으로 떠나오기 전 만났던 스승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저도 가겠습니다."
강렬한 어조였다. 말을 하는 사내의 무릎 위에 올려진 커다란 손등에 굵은 힘줄이 꿈틀거렸다.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
유리알처럼 투명한 눈으로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사내를 바라보던 노인이 물었다. 노인은 어께까지 내려온 눈이 부실 정도의 은발을 뒤쪽에서 단정하게 묶고 있었다. 혈색이 없는 얼굴에 한 줄의 주름도 보이지 않는데다가 말을 할 때 입을 제외한 다른 부분에서는 미세한 움직임도 없어서 마치 얼음으로 빚은 듯한 인상을 주는 노인이었다.
노인의 물음에 다께다는 양손으로 다다미를 짚으며 말문을 열었다.
'다카하시의 복수를 위한 길입니다. 제 손으로 그자의 숨을 끊어 놓는 것이
순리입니다. 스승님.'
일을 논하는 자리였지만 그 일은 사제이 복수에 대한 것이었다. 다께다는 스승 오카야마의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다께다와 다카하시를 가르친 스승이자 대명회 일본 지회의 지회장인 오카야마 미노루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전통식 일본 가옥이어서 고풍스런 분위기가 가득한 넓은 방안에 정적이 흘렀다.
'한국 지회가 도움을 청할 정동의 자다. 그자를 제거하면서 아무런 희생이 없기를 바라기는 어렵다. 그 희생자가 네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자신은 있느냐?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제자는 조선인에게 당할 만큼 약하지 않습니다. 스승님!
대답하는 다께다의 음성에서 강한 자신감이 묻어 나왔다.
오카야마는 그의 제자가 약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다께다는 그를 제외하고는 일본지회 내에서 적수가 없을 정도의 고수였다. 회의 고수들을 제외한다면 이 세상에서 다께다를 단신으로 어찌할 수 있는 사람은 그가 알기로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중엔 지금 한국 지회가 제거 작업에 들어가려 하는 자는 해당되지 않았다.
다께다를 응시하는 오카야마의 두 눈은 무심해 보였다. 하지만 그 깊은 곳에는 희미한 불안감이 떠돌고 있었다. 오카야마는 다카하시의 복수를 직접 하겠다며 한국행을 고집하는 다께다를 말리고 싶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이 부동의 경지에 도달한 그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오카야마의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허락하겠다. 다녀오너라. 그리고"
오카야마의 두 눈에 얼음처럼 차가운 빛이 일렁였다.
"내 허락 없이는 죽을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라."
"예, 스승님."
다께다는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팔꿈치와 장심을 바닥에 대고 허리를 굽혀 이마를 다다미에 댔다. 오체투지, 극경의 예였다.
다께다는 안전벨트를 풀었다. 비행기가 공항에 착륙한 것이다. 다께다가 일어서자 그의 옆에 있던 두 사내도 일어섰다. 두 사내는 다께다와 비슷한 40대 중반 정도의 나이로 보였다.
입국심사대를 통과한 다께다 일행이 출구를 나서자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가 그들에게 다가섰다. 이목구비가 수려한 30대 중반의 사내였다. 다께다의 정면에 선 그는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며 말문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다께다 님. 먼 길에 고생하셨습니다."
"오랜만이군. 진 실장."
진운은 다께다와 일행을 안내했다. 공항 건물을 나서자 기다리고있던 대형 승용차가 소리 없이 미끄러지듯 다가와 그들의 앞에 섰다.
잠시 후 그들을 태운 차의 모습은 공항에서 사라졌다.
골목길에 차를 주차시키고 걸음을 옮기던 한의 무심한 시선이 셔터가 내려져 있는 가게에 잠시 머물렀다. 아직 가게 문을 닫을 시간이 아니었으니 오늘은 쉬는 날인 듯 했다. 다행이었다. 오늘은 그가 꽃을 살 일이 없었으니. 그렇지 않았다면 두 정거장이나 떨어져 있는 꽃가게까지 돌아갔다 와야 할 뻔했다.
한은 꽃이 있는 풍경을 지나쳤다. 멀리 청운의 집이 보였지만 그의 발길은 청운의 집으로 향하지 않았다. 한이 들어서는 것을 본 김석준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별명이 이름 되겠다. 표정 좀 피고 살자."
"팔자다. 신경꺼라."
"자식은 왜? 이곳은 별일 없다."
김석준은 앉아 있던 소파에서 일어나 창밖을 가리켰다. 창밖으로 50여 미터 떨어진 청운의 집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의 부하 최원이 머물던 곳이다. 그는 청운의 집에 침입자가 있었던 그날 한이 부탁으로 김중식이 머물던 주택을 떠나 이곳으로 왔다.
한은 김석준과 나란히 서서 청운의 집을 내려다보며 말문을 열었다.
"보여줄 것이 있다."
"뭘?"
한은 고개를 돌려 김석준을 바라보며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내 손을 봐라."
말을 마친 한의 손이 활짝 펴지며 꼿꼿이 세운 손끝을 창턱에 댔다. 무슨 일인가 싶어 한 손끝에 시선을 주던 김석준의 두 눈이 점점 커졌다. 그 눈에 경악이 출렁거렸다. 한의 손가락이 알루미늄 새시를 뚫고 들어가고 있었다. 새시가 뚫린 후에도 그의 손가락은 계속 내려갔다. 손바닥의 절반 정도가 창틀에 묻힌 뒤에야 한은 손을 멈추었다.
"이게이게?"
입을 여는 김석준의 목소리가 그도 모르게 떨렸다. 그의 눈은 한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엔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완연했다.
"네 착각도 눈속임도 아니다."
한은 창틀에 묻혀있던 손을 빼며 말했다.
"이것은 내가 가진 힘의 일부다. 그리고 원한다면 네가 갖게 될 힘이기도 하고."
"무슨 소리냐?"
김석준의 놀람은 어느 정도 진정되었지만 아직도 그의 목소리엔 미세한 떨림이 남아있었다. 이런 비현실적인 광경을 본다면 그가 아니라 누구라도 그와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회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 중에서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회에는 그들의 뜻을 무력으로 관철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의 능력은 초인에 가깝다. 지금 너는 내가 보여준 능력에 놀라고 있지만 회에는 나 못지않은 능력을 가진 자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다."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거냐?"
"믿고 안 믿고는 상관없다. 네 믿음과는 무관하게 실재하는 자들이니까."
김석준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아무래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한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점입가경이었다.
"지금까지 그런 자들을 상대해왔다는 거냐?"
"그래."
"아직까지 숨이 붙어있는 것이 기적이로군."
"내가 너희들의 정체를 철저하게 비밀에 붙인 이유다. 드러나면 죽는다. 그들은 언제든지 흔적 없이 너희를 죽일 수 있는 힘을 보유하고 있는 자들이야. 나를 상대하는 것과는 달라. 너희를 죽이려 한다면 망설임 없이 손을 쓸 자들이다."
"그 동안 숨기던 힘을 지금 내게 보여주는 이유가 뭐야?"
한은 손을 들어 청운의 집을 가리켰다.
"그날 침입자를 보았던 원이 일행에게 이야기를 들었겠지만 그자는 회의 무력을 담당하는 자들 중 한 명으로 생각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에 의해 막히긴 했지만 그 여인이 없었다면 정말 속수무책인 상황이 벌어졌을 거다."
잠시 말을 멈춘 한은 시선을 김석준에게 돌렸다.
"내가 그 동안 내 힘과 회의 무력 책임자들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았던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너를 회와 직접 부딪치는 일에는 개입시키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들과의 직접적인 부딪침은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하고 너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네 능력으로는 그들과 부딪치는 순간 너는 죽는다. 그 때문에 너를 개입시키지 않으려 했던 것이고,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잘못 생각했다. 나와 연결되어 있는 한 너는 어떤 식으로든 그들과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걸 이번 일로 깨달았다. 다른 하나는 이런 힘을 가진 것이 좋은 일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힘을 얻게 되는 순간 너는 싫든 좋든 일상적인 삶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아무리 남들과 같아지려고 해도 다를 수밖에 없는 인생을 살게 돼. 나는 이런 삶 속으로 너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담담한 음성이었지만 김석준은 어딘지 쓸쓸한 느낌을 받았다. 김석준은 한을 안 이후로 그에게서 이런 느낌을 받은 기억이 없었다.
김석준은 주먹을 들어 한을 툭 치며 말문을 열었다.
"가끔 너는 생각이 너무 많다. 너무 복잡해. 어떤 일들은 일단 저지르고 나중에 생각해도 되는 일들이 있다. 나에 대해서 생각해주는 것, 별로 고맙지 않아. 친구끼리 무슨 염려가 그리 많냐!"
"내가 전하는 것을 배울 생각이 있나?"
"흐흐흐, 가르쳐 준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다. 비록 뒷골목을 전전하긴 했지만 고수를 꿈꾸던 어린 시절의 희망이 이루어지려 하는데 마다할 수야 있나. 하물며 네가 가르쳐 준다면야 목숨이 아니라 그 이상이라도 걸 수 있다."
김석준의 대답에 한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다. 가르치기 전에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내가 전하는 것은 오직 네게만 허락된 것이다. 타인에게 전수하려할 때는 사전에 나와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왜 그런지는 알겠지?"
"함부로 유출되면 영향이 그만큼 큰 무예이기 때문인가?"
"그래. 내가 가르칠 무예는 일반인들은 대항할 방법이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 내가 나쁜 마음을 먹는 다면 과연 누가 있어 나를 제어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봐라. 옛 사람들이 비인부전 했던 것은 이유가 있는 거야."
김석준은 한의 얘기를 들으면서 흥분으로 들뜬 표정이 되었다가 잠시 후 맥 빠진 얼굴이 되었다. 한이 그의 기색을 살피며 의아한 표정을 짓자 김석준이 떨떠름한 어조로 말 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지 않나? 그런 무예를 지금 네가 가르쳐 준다고 내가 하루아침에 마스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 적게 잡아도 수년이 걸릴 텐데, 그렇게 시간이 걸린다면 당장 도움이 되지 않을 듯 한데"
"정상적이라면 그렇다, 수십 년을 수련해야 소성할 수 있겠지. 하지만 우리에겐 그렇게 여유 있게 가르치고 배울 시간이 없어. 너를 가르치는 데는 조금 특별한 방법을 사용할 생각이다."
"특별한 방법?"
"속성법이야."
한의 대답에 김석준이 입이 벌어졌다.
"빨리 배울 수 있다는 말이냐? 이야! 세상 좋구만. 네가 보여준 수준의 무예도 속성이 가능하단 말이지?"
"글쎄 좋아할 일만은 아니다."
"응, 왜?"
"무척 고통스러울 거다, 다른 사람이 10년은 수련해야 얻을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는 일인데 대가가 없을 수는 없지."
한의 말에 김석준은 얼굴을 찡그렸다. 한과 같은 사내가 고통스럽다고 말할 정도면 그 고통이 어떨지 대충 예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곧 인상을 폈다.
"좋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참겠다. 해 보자."
"단기간에 얻을 수 있는 능력은 한계가 있다. 그들과 겨루어 이길 정도가 되기 위해서는 수련이 많이 필요해. 그렇지만 그들은 만나 몸을 피할 정도는 될 것이다. 그리고 너의 자질이라면 곧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겠지."
"그때까지 그자들의 손에서 살아남는다면 말이지!"
김석준이 싱긋 웃으며 말하자 한은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한의 모습에 김석준은 혀를 찼다.
"웃어 봐라. 웃으면 너도 꽤나 괜찮은 얼굴인데. 무슨 돌덩이도 아니고 말이야.
언제 가르쳐 줄 거냐?"
"지금!"
"지금? 여기서?"
김석준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내가 가르칠 것은 심법과 권법 그리고 보법과 신법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수련이 필요해. 단시간에 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나는 대로 가르쳐야 할 것들이다. 지금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은 너의 몸에 내력의 흐름을 만들려는 거야."
"내력?"
"네가 수련한 발경도 기를 응축시키는 것이고, 네 나이를 고려한다면 성취도가 드물 정도로 놀라운 것이긴 하지만 그 범주는 일반 무술의 경우에 불과하다. 네가 익힌 기공은 기나긴 수련기간에 비한다면 그 효과는 미미하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내가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기의 축적 속도가 무서울 정도로 빠르고 강력하다. 네가 알고 있는 기공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너는 기에 대한 기초가 이미 잡혀있는 상태니 배우기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빠른 시간 내에 틀이 잡힐 거다."
"어떻게 할 건데?"
"내가 갖고 있는 내력으로 너의 막힌 경혈과 경락을 일께 울 거다. 그 과정에 너의 하단전을 강화시킬 것이고, 내력을 축적할 그릇을 만들 생각이다. 내가 움직이는 기운의 흐름을 기억해라, 그것이 네게 전해줄 첫 번째 절기. 일원천강기공(一元天?氣功)의 경력 운행 법(經力運行法)이다."
한은 김석준에게 가부좌를 틀고 앉게 했다. 그의 오른손장심이 김석준의 정수리 백회혈에 그리고 왼손의 장심이 등 뒤 명문혈에 붙었다.
"고통이 심할 거다. 너도 알겠지만 기가 움직이는 동안 몸을 움직이거나 소리를 지른다면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성공한다면 너는 초고수의 길에 입문해 있을 거다."
"알았다. 시작해라."
김석준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기대와 불안이 엇갈린 그의 두 눈이 강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조금은 낡은 검은 도복 차림이었다. 반쯤 열려있는 창으로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햇살 아래 미세한 먼지들이 유유히 떠다니고 있었다."
도장의 한 쪽에 마련된 샤워 실에서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난 한은 활동하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무심한 눈으로 도장을 한 번 둘러 본 한은 집을 나섰다.
한은 어제 저녁부터 오늘 새벽까지 12시간을 김석준과 함께 있었다. 대법은 성공적이다. 김석중은 극한의 고통을 잘 견뎌냈다. 그러나 그가 김석준에게 시행했던 대법은 김석준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전자의 희생을 담보로 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대법에 정해진 이름이 없었고 천단무상진기를 응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천단무상진기로 김석준의 경락과 혈을 두드려 일깨우면서 막힌 곳을 뚫고 둔해진 곳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좁아진 경락을 넓히고 탁해진 기운을 맑게 정화시켰다. 그 작업은 두 사람에게 무서운 고통을 수반했다.
한은 김석준에게 번데기에서 나비로 변화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살아오면서 만들었던 기존의 모든 껍질을 벗어야만 했다. 김석준이 평범한 사람과 달리 끊임없이 신체를 단련하고 기를 수련한 사람이라 해도 그의 나이가 있었다.
그의 뼈는 조금씩 유연성을 상실해가고 있었고 경락은 굳어가는 중이었다.
그런 그의 신체 내부와 외부의 뼈와 장부의 질이 변하고 경락을 타고 흐르는 기의 질이 변하는 순간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살을 저미고 뼈를 깎는 극한의 고통이 그 순간마다 일어났다. 김석준이 고통에 단련되지 않은 사람이었다면 결코 참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이 대법의 1단계였다.
김석준의 신체가 어느 정도 그가 원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판단이 서자 한은 대법의 2단계를 시행했다. 천단무상진기의 기운 중 일부가 정해진 길을 따라 김석준의 경락을 치달리기 시작했다. 기운의 흐름은 처음엔 미약하고 느렸지만 시간이 갈수록 빠르고 강해졌다. 일원천강기공의 경락운행도가 김석준의 신체에 그려졌다.
김석준의 의지와는 무관한 기운이 소주천을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임독양맥을 하나로 이으며 대주천을 시작했다. 김석준은 고통을 잊고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절대무아경에 빠졌다, 김석준의 하단전에 조금씩 기운이 축적되며 단전의 크기를 넓혀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한은 손을 떼었다.
한의 전신은 비 맞은 생쥐처럼 변해 있었다. 극도의 피로로 그는 탈진하기 직전이었다. 그가 행한 대법은 목숨을 담보로 한 것이었다. 단순히 고통스럽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진기 운용이 조금이라도 어긋난다면 그 순간 김석준은 기의 폭주로 터진 붕어빵 모습을 한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
단 한 순간이라도 집중력이 흐트러진다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한이 받는 압박감의 정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게다가 대법의 2단계에서 한은 자신이 진원지기의 일부로 김석준의 하단전에 밭을 일구어 주었다.
통상의 내력으로 외부에서 의도적으로 만든 단전의 힘은 시간이 흐르면 흩어져 버린다. 제 아무리 강력한 기운이라도 그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는데 그것은 주어진 내력이 받아들인 사람이 내력과 하나로 합일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몸에 내력을 전해주는 것을 격체전력(隔體典力)이나 내공전이(內攻轉移)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대법이 시전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성공할 확률도 높지 않다.
진정으로 피시술자의 단전이나 경락 등 의도한 장소에 내력을 항구적으로 쌓아주기 위해서는 시술자가 자신의 진원지기를 희생해야 한다.
진원은 내력을 일으킬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을 뜻하는 말인데 진원의 손상은 내력의 손상과는 차원이 다른 결과를 낳는다. 내력이 소모되었을 경우 휴식을 취하면 회복이 어렵지 않다. 그러나 진원을 상실한 사람은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
한이 김석준에게 전해준 일원천강기공은 무상진결 수집편에 적혀있는 신공류 중의 하나였다. 무상진결이 담고 있는 무예의 종류를 어느 한 사람이 창안해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다양했고 가짓수도 많았다. 한 사람이 평생을 수련해도 다 익히지 못할 정도였다. 그것은 수집편뿐만 아니라 무상문 비전절기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모든 무예는 일정한 흐름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수집편과 비전편의 15종에 달하는 신공류는 첨단무상진기가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시전이 가능했다. 신법도 권법도, 장법도 그러한 흐름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한이 입산 수련하면서 깨달은 사실이었다.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한은 두 가지 가정을 하고 있었다. 하나는 무상문의 절기가 그 모든 흐름을 포괄하는 최고의 무예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모든 무예를 토대로 무상문의 절기가 창안되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한은 신공류 중 파괴력이 강하고 패도적인 기세가 일절(一節)인 일원천강기의 힘을 김석준의 몸에 실어주었다. 그가 만들어준 힘은 삼성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김석준이 초안의 반열에 한걸음을 내딛기에 충분했다.
회의 무력 책임자들과 정면으로 부딪치지만 않는다면 누구도 김석준을 어찌할 수 없을 것이고, 일원천강기공이 칠팔 성의 경지에 도달한다면 설사 그자들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일이 생겨도 몸을 빼내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김석준의 옆에 함께 가부좌를 틀고 무상진기의 기운을 일으켜 피로를 어느 정도 회복한 한이 눈을 뜬 것은 1시간 정도가 지난 후였다. 대법이 시행되고 한이 휴식을 취하는 9시간 동안 누군가 두 사람을 해치려 했다면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 시간 동안 두 사람은 완전한 무방비 상태였다. 회와의 긴장감이 극에 달하고 있는 최근의 정세를 생각한다면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한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김석준에 대한 대법의 시행은 중요한 일이었다.
경찰서 주차장에 차를 대며 한은 생각에 잠겼다.
'석준이의 자질과 성격은 일원천강기공에 잘 어울린다. 섭혼대법으로 뇌리에 심어준 대천강산수(大天?散手)와 회운보(廻雲步), 낙성비류신법(落星飛流新法)이 일원천강기공과 어울리면 누구에게도 쉽게 해를 입지는 않을 것이다.'
한은 운기행공(運氣行功)에서 깨어난 김석준에게 무상진결 수집편에 적혀 있는 세 가지 절기를 가르쳤다. 그가 김석준을 가르친 방법사용을 자제하던 섭혼대법을 이용해 세 가지 절기의 구결과 동작을 김석준의 뇌리에 심어버린 것이다.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방법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김석준은 두 시간에 걸쳐 이어진 무예 시전과 긴 구결 그리고 상세한 해설들이 토씨 하나까지 기억나는 것을 신기해하며 좋아했다. 한의 가르침이 끝나고 배운 것을 되새기던 김석준은 방금 배웠던 것들이 어설프나마 즉시 시전되는 순간엔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 옆에서 한이 한숨을 쉬든 말든.
김석준은 섭혼대법의 무서움을 모른다. 설명해주어도 이해하기 쉬운 것은 아니어서 한은 그런 것이 있다는 언급 정도로 넘어간 후 섭혼대법을 시행했다. 한은 김석준에게 섭혼대법의 해로움도 경고했다. 김석준은 상관없다며 신기해 하고 좋아했지만.
섭혼대법은 그 효과가 즉각적인 만큼 후유증도 컸다. 김석준은 한이 전수한 네 가지 절기 이외에는 한이 또다시 섭혼대법으로 그의 뇌리에 무예를 각인시키지 않는 한다른 것을 익히지 못한다. 뇌리에 각인된 절기가 다른 무예의 습득을 방해한다.
그것은 섭혼대법이 잠재의식마저도 지배하는 가공할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후유증이었다. 내기의 흐름을 잠재의식이 무의식 중에 통제하며 다른 흐름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섭혼대법에 의존하는 것은 정상적인 수련 방법에 비해 몇 배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지만 순리가 아닌 방법이어서 절정의 경지 에는 도달할 수 없었다.
'쉬지 않는 녀석이니 성취도 빠를 것이다. 하지만 그는 회의 고수들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에 이를 때까지 노출되면 안 된다. 흠.‘
이미 그가 현금 수송 트럭을 탈취한 지 일주일이 지나고 있었다. 그 동안 의 직접적인 대응은 없었다. 그러나 그자들이 그런 피해를 입고 참고 있을 자들은 아니었다. 조만간 그를 향한 회의 움직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그 동안 회는 그에 대해 적극적인 대응을 자제했었다. 무력을 담당하는 자들이 본격적으로 투입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변했다. 한은 그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줄 위험이 있는 자가 되었다. 이 상태로 한을 방치한다면 회는 바보들의 집단일 것이다. 그러나 한이 알기로 그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어쨌든 석준이는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심성과 자질을 믿을 수 있는 자로 순차적으로 사람을 골라 놓으라고 했으니 할 일이 하나 더 늘었군. 회의 본류가 우리나라에 있지 않다는 것이 확실한 이상 전쟁은 내 평생을 갈 수도 있다. 사람을 키워야 한다.'
한의 눈빛에 그늘이 졌다. 그의 손에 죽어간 다카하시가 생각난 것이다. 그리고 그가 죽어가며 뱉었던 말도. 다카하시가 아니었다면 한은 한국의 대명회가 지회라는 것을 알지 못했을 터였다.
김석준은 그가 생각이 너무 많다고 투덜거렸지만 그로서는 생각을 하지 않을래야 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적이 너무 거대한 것이다.
사람을 키워야 하는 것은 맞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선까지 키워야 하는지가 한이 하는 고민의 핵심이었다. 대명회의 무력 책임자들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을 키워야 했지만 아무리 초 고수자가 아쉬운 상황이라도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집단으로 양성하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한은 결심을 한 상태였다. 무상진결의 절기들 둥 일부를 공개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 결심은 청운의 집에 복면인이 침입한 날 이루어졌다. 남기호가 키운 김석준 일행은 능력이 있었지만 회의 무력 책임자들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본래 회의 하부 조직을 상대하기 위해 훈련되었다.
한은 그들은 데리고 회의 상부자들과 싸울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복면여인이 그 복면인을 막지 않았다면 그날 현장에 있었던 김석준의 부하들은 결코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고, 언제든 다시 그들이 그런 상황에 직면하지 말란 법이 없는 것이다.
회와의 전쟁은 목숨을 걸어야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오랫동안 싸워야할지 어림짐작도 되지 않았다. 그동안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을 개죽음시킬 수는 없기에 한은 무덤까지 안고 가고자 했던 무상진결을 공개할 결심을 했다.
그러나 누구에게 가르칠 것인가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 했다. 김석준과 그 부하들은 믿을 만했지만 그것은 현재였다. 그가 가르치는 것을 배우는 자 중 배운 후에 엉뚱한 생각을 갖는 자가 나올 가능성은 언제든 상존했다.
그가 아무리 진결의 핵심을 전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의 가르침을 받는다면 일반인들이 평범한 수단으로는 결코 상대할 수 없는 초인이 된다. 그런 자가 개인적인 사욕을 위해 그에게서 배운 것을 사용한다면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같이 배운 사람들이거나 한뿐이었다.
자기 손으로 키운 사람을 자기 손으로 제거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 올 수도 있었다. 그 때문에 한은 아무리 초고수가 필요하다해도 시간을 두고 사람을 선별해 키워야만 하는 딜레마를 안아야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가 사람을 선별해야 하는 것에는 그 자신이 갖고 있는 한계도 있었다.
한의 능력이 제 아무리 초인적이라 해도 김석준에게 사용한 방법처럼 자신의 진원지기를 손상시키는 방법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사용할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생각을 거듭하는 한의 눈가엔 의혹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내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손상된 진원은 두 시간의 운기행공만으로 회복되었다.
천단무상진기의 공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 몸 안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힘이 있다. 입산 수련할 때도 그 힘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그 힘은 아직 나의 내공과 합일되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에서 온 힘이란 말인가?
그것은 내가 현재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내공을 넘어서는 수준의 것인데'
그가 김석준에게 대법을 시행한 것은 도박과도 같은 측면이 있었다. 언제나 그의 삼단전의 심연에 숨은 채 그의 내력이 고갈 되었을 때 이외에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불가사의할 정도로 막대한 힘을 믿고 행한 도박이었다.
그가 그 힘을 최초로 의식했던 것은 이준형과의 대결 직후 통영에 있는 정운의 암자에서 수련하던 중이었다. 당시 그 힘은 한의 경지를 한 단계 올려놓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 후 한은 그 힘을 이끌어 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것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미증유의 힘이 움직인 것은 한이 저격을 당하고 휴직계를 낸 후 입산을 했을 때였다. 산중 수련 속에서 한은 그 힘을 어떻게 끌어낼 수 있는지 방법을 깨달았다.
한의 내력이 한 방울도 남김없이 소진되어 활성화된 중단전까지 텅 비었을 때에야 그 힘은 움직였다. 소진된 내공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회복되었고 동시에 그의 내력도 조금씩 상승했다.
1년 동안 그런 과정은 수없이 반복되었다. 단 1년 만에 천단무상진기가 칠성의 초입에서 구성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던 그 믿을 수 없는 성취의 이면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진원지기를 손상시킬 이유가 없었기에 진원이 손상되었을 경우 그 힘이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도 알고 있는 바가 없었다. 그래서 그가 김석준에게 시행한 대법은 위험한 도박이었다.
손상된 진원이 단시간 내에 회복되지 않는다면 그의 내력은 일성 정도 후퇴할 수밖에 없었기에 때문이다. 고수들과의 싸움은 한 순간에 승패가 갈리고 그 승패를 결정하는 실력의 차이는 거의 종이 한 장 수준인 경우가 많다.
그가 상대해야 할 대명회의 고수들은 무시할 수 없는 자들이었는데 그의 내력이 후퇴한다는 것은 치명적인 핸디캡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의 도박은 성공했다. 하산한 이후로 잠자고 있던 힘이 움직인 것이다.
차에서 내려 경찰서 본관 안으로 들어서는 한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힘이 주어지는 것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지만 이 세상에 대가 없는 선물은 없다는 것을 잘 아는 그였다. 아직까지 그에게 힘의 대가를 요구한 사람은 없었지만 누군가 그의 앞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