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자비와 평화를 찾기 위해 희생하라고 요청 받지 않는다.
1.
고통의 종식이 상실일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을 받는 선물은 오로지 더할 수 있을 뿐입니다.
당신께서는 오직 주실 뿐, 결코 빼앗아 가시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당신을 닮게 창조하셨으니, 당신께나 제게 희생은 불가능합니다.
저 또한 줄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영원히, 또 영원히 모든 것을 받습니다.
저는 창조된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당신의 아들은 희생할 수 없으니, 당신을 완성하는 기능을 가진 그는 완전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완전하니, 당신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잃을 수 없으니, 오로지 줄 수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영원히 제 것입니다.
2.
신의 자비와 평화는 공짜이다.
구원은 비용이 없다.
구원은 자유로이 주고받아야 하는 선물이며,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가 배우려는 것이다.
...
[예수의 추가 설명]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은, 에고가 가진 가장 큰 두려움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이다.
물론 에고에게 이 말은 맞는 말이니, 투사는 진리를 부정하며 다른 누군가에게 뒤집어씌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고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신은 그대에게 희생을 요구할 것이다.
신은 구원을 주는 대신에 모든 것을 빼앗아갈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에고 마음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에고 마음은 모든 것을 빼앗아가면서 구원을 줄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면에서 에고는 일관되다.
에고는 끊임없이 자기가 하는 것을 신에게 투사한다.
그대는 마음 안에서 반전시켜야 한다.
그대가 신에 대해 가진 두려움은, 사실은 그대 자신의 에고 마음이 그대에게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대가 경험한 고난, 고통, 혼란을 돌아볼 때, 에고는 그대가 신과 사랑으로 돌아서면 더 악화될 것이라고 말한다.
에고는 그대가 이용당할 것이라고, 그대는 가진 모든 것을 잃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이다.
에고 마음과 함께 머문다면, 그대는 죽음 안에서 건강, 사랑하는 사람, 돈 등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사랑은 모든 권능, 힘, 사랑, 기쁨 및 창조성의 근원인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은혜로운 힘에 그대를 연결한다.
그대는 사랑으로부터 왔다.
사랑은 그대의 집이다.
기적수업 용어로 구원은 그대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구원은 필요한 모든 것이 그대에게 주어졌으며, 여전히 그대 안에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안을 보아야 한다.
구원이 안에 있는데, 구원을 위해 계속해서 세상을 바라볼 수는 없다.
그대는 모든 선물을 내면에 가지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대의 사랑, 창조성, 영감, 설레임, 열렬한 기대, 이 모든 것은 그대의 것이다.
다만 에고의 거짓과 에고가 유도하는 투사가 가리고 있을 뿐이다.
이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자신의 밖에서 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기적수업이 말하는 준다는 아이디어 중의 하나는, 가지고 있는 것을 줄 때 비로소 그대에게 그것이 있음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단지 돈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의 선물, 곧 사랑, 자기표현, 창조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그대의 안으로부터 흐르도록 허용해야 비로소 그대가 가지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
[알렌의 설명]
상실과 희생이라는 아이디어 전체는 기적수업에 이질적입니다.
수업은 우리에게 “희생이라는 개념은 신께 전혀 알려지지 않은 개념”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레슨의 첫 문장이 지적하듯이, 고통을 끝내는 것이 어떻게 상실일 수 있겠습니까?
행복을 어떻게 희생을 통해 얻을 수 있겠습니까?
잘 살펴보면 터무니없지만, 수 백 년 동안 많은 종교들이 신의 자비를 얻기 위해 무언가, 일반적으로 정말로 가치 있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믿어왔습니다.
당신은 천국을 얻기 위해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당신의 실수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천국, 또는 구원은 오직 얻음이어야만 합니다.
천국이 상실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천국일 수 있겠습니까?
나는 아버지께 다음과 같이 확언하렵니다.
<당신은 오직 주기만 하십니다.
당신은 결코 빼앗아 가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저를 당신과 같게 창조하셨기에, 희생은 당신에게 불가능한 것처럼 저에게도 불가능한 것이 됩니다.>
오늘 어떤 사람이, 신이 그를 이런 고통의 꿈을 경험할 수 있도록 창조하심으로써 부당하게 대접했다는 느낌에 빠져있다고 제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신이 이기적인 이유로 우리가 이 모든 일을 겪도록 한다는, 또한 최소한 이 모든 일을 겪도록 허락하셨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신은 오직 주십니다.
신은 빼앗아 가시지 않습니다.
다른 식으로 생각하지 맙시다.
그리고 신이 주시는 것은 영원히 주어집니다.
제가 창조된 그대로 저는 남아 있습니다.
당신의 아들은 어떤 희생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당신을 완성하는 기능을 가졌기에, 완성되어 있음에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의 정체를 잃을 수 없습니다.
나는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을 잃어 불완전하게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신을 완성시키는 나의 기능과 상반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이 완전하기 위해서는 (물론 신은 신이므로 완전하십니다) 내가 완전해야 합니다.
신은 당신 자신을 완성하시기 위해 나를 창조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희생할 수 없습니다.
나는 완전하게 남아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애를 써서 신의 자비와 평화를 얻어야 한다는 개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특히 내가 에고의 우회로를 헤매고 있을 때, 나는 항상 돌아가는 길을 찾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겪어야 만 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나는 참회와 죄책감의 기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먼저 일종의 벌로 보상을 하지 않고, 에고의 광기에서 평화와 기쁨의 상태로 즉시 바뀌는 것은 왠지 옳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신의 자비와 평화는 무료다.
구원에는 아무런 비용이 들지 않는다.
구원은 자유롭게 주어지고 받아질 수밖에 없는 선물이다.
그리고 이점이 우리가 오늘 배우려고 하는 것이다."
자비와 평화는 대가가 없으므로, 우리는 매 순간 즉각적으로 그것들을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나는 단지 기꺼이 자비와 평화를 자유로이 주고, 자유로이 받으려는 용의만 내면 됩니다.
이 순간, 바로 지금, 나는 자비를 나 자신에게 주려 합니다.
자신이 했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에 고통 받고 있는 나의 아이 같은 마음을 보려 합니다.
그런 내 마음에 자비를 마치 따뜻한 담요처럼 덮어 주렵니다.
나 자신을 사랑으로 품어 주고, 나 자신의 결백함을 다시 한 번 확언하렵니다.
내가 나의 정체를 잊었나요?
괜찮습니다.
나는 형제에게 화를 냈나요?
그래도 나는 여전히 자비와 평화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나는 친구를 배신했나요?
신은 여전히 나를 당신의 것으로 여기십니다.
어떤 희생도 요구되지 않습니다.
어떤 회개도, 참회하며 근신하는 기간도 요구되지 않습니다.
나는 단지 신뢰를 갖고 나의 친구(Friend)에게 내 마음을 열어, 내가 환영받고 있음을 보면 됩니다.
나는 신이 계시는 집에 갈 수 있습니다.
무엇을 기다리나요?
나는 지금 그분께 가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