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 수 위야
-전해숙
109동 612호, 우리 집이다. 우리 아파트 아이들이 모여서 놀기도 하고 공부도 배우는 ‘방과 후 공부방’이다. 오늘은 나, 영배, 길수 등 셋이 모였다. 우리 엄마는 집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방과 후 공부방 선생님이다. 오늘은 한자 능력 검정 시험을 대비해 예비시험을 보기로 했다. 다음 주면 한자 급수 시험이 있으니 그동안 공부한 한자를 총정리 해 보자는 것이다. 나는 방과 후 교실 수업 외에도 ‘EBS 참 쉬운 급수 한자 시간’을 보면서 보충 공부도 했다. 한자 시험은 50분 동안 치러야 하는데, 우리는 70점 이상을 맞아야 합격하는 6급 시험에 원서 접수를 했다.
지금 한참 시험을 보는 중이다. 나는 영배에게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공부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공부한 건 별로 나오지 않은 것 같다.
“주원이, 한눈팔지 마. 나는 뒤에도 눈이 있어.”
감독하던 엄마가 톡 쏘면서 한마디 한다.
‘엄마는 괜히 나만 갖고 그래.’ 속으로 중얼거리며 영배와 길수를 흘깃 보니 빨려 들어갈 것처럼 시험지에 집중하고 있다.
“자, 인제 그만. 시험지를 제출하세요.” 하며 엄마가 그만할 것을 재촉한다.
“잠깐 쉬어요. 선생님이 채점하는 동안 화장실도 다녀오고.”
“네~~”
손을 씻는데 긴장해서인지 눈앞이 침침하다.
“시험 잘 봤니?” 영배가 옆에 와 묻는다.
“아니, 좀 어려웠어.”
“아씨~나는 시험 망쳤다.”
한 학년 아래인 길수가 얼굴을 찡그리면서 말한다. 시험지 채점이 끝날 때까지 긴장감이 풀리지 않았다.
“자, 이리 와 앉아봐요.”
드디어 채점이 끝난 모양이다. 우리는 우르르 책상 앞으로 모였다.
“채점 결과가 나왔는데 모두 잘 봤어요. 그동안 시험 준비하느라 힘들었지? 김주원 86점, 박영배 92점. 조길수 58점, 주원이 영배는 6급 합격이고 길수는 좀 더 해야겠다. 시험이 좀 까다로웠지?”
“네!”
내 목소리만 컸다. 모두 웃었지만 난 웃음이 나오질 않았다. 영배에게 6점이나 뒤졌다. 생각할수록 분하고 화가 나서 내가 폭발할 것만 같다. 밤늦게까지 ‘다시 보기’ 강의도 되돌려 보면서 열심히 했는데 또 영배한테 지다니. 너무 억울해서 울음이 나오려고 하는데 입술을 꽉 물고 참았다.
“수고했어요. 이리 모여 간식 가져다줄게.”
“감사합니다~”
둘은 즐겁게 대답했지만 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난 합격한 거나 다름없다. 신난다.” 영배는 점수를 잘 받아서인지 신이 났다. ‘저 자식~또 얼마나 잘난 척을 할까?’ 영배는 저럴 때마다 정말 밉상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데 저 녀석은 그럴수록 기고만장하면서 잘난 척한다. 이번에는 내가 점수를 더 잘 받아서 그 기를 팍 꺾어놓고 싶었는데 다 틀렸다. 조금 더 열심히 하는 건데, 졸려도 참고 게임이 하고 싶어도 참았어야 했는데 자꾸만 후회가 된다.
엄마가 떡볶이와 내가 좋아하는 망고를 깎아 간식으로 내왔다. 영배와 길수는 맛있게 먹고 있는데, 나는 별로 먹고 싶은 마음도 없다. 영배에게 뒤진 점수 6점이 자꾸만 떠올라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영배는 간식을 먹으면서도 눈은 계속 책을 보고 있다. 길수는 아무 생각 없이 해맑게 떡볶이만 먹고 있다. 나는 간식도 먹고 싶지 않고 마음만 복잡해 짜증이 나는데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안녕하세요? 영배 데리러 왔어요.”
하며 영배 엄마가 들어오신다.
“어서 오세요.”
영배는 잽싸게 가방을 들더니 쪼르르 자기 엄마한테 달려간다.
“선생님께 인사드려야지.” 하니까 그제야 돌아서서
“안녕히 계세요.”라며 인사를 하고 또 홱 돌아선다. 정말 재수 없는 녀석이다. 갑자기 길수가 일어선다.
“저도 이제 집에 갈게요.” 하더니 가방을 들고나온다.
“그래, 길수야 잘 가거라. 오늘 시험 보느라 아주 피곤할 테니 일찍 자고.”
영배와 길수가 돌아간 후
“너 이리 와 앉아봐.”
나는 엄마의 눈치를 살피면서 슬금슬금 앉았다.
“너 오늘 보니까 계속 심술이 나 있던데 왜 그래? 영배보다 점수를 못 받아서 그러는 거야? 그러게 게임 좀 조금만 하지 그랬어?”
엄마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으앙~~ 몰라~”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버렸다. 내 몸 어딘가에서 샘물이 솟아나는지 자꾸만 눈물이 났다.
“그만 울어. 어린애도 아니고 왜 계속 울기만 하는 거야? 왜 그래? 말을 해 봐. 엄마가 도와줄 테니까.”
엄마가 휴지로 눈물을 닦아주며 날 위로했다. 나는 한참을 울기만 했다.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으니 엄마한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뭔가 많이 억울하고 분하고 그랬다.
“영배한테 졌다고 생각하지 마. 너도 6급 점수는 패스했으니까, 영배나 너나 같은 6급이잖니? 그러니까 너희 둘은 똑같은 등급이니까 누가 더 잘하고 못하고가 아닌 거야.”
엄마는 또 무심히 휴지 한 장을 뽑아 건네주었다.
“네가 영배한테 약간 뒤진 점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거야. 네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얼마든지 따라잡을 수 있는 점수니까. 힘내고 이제 그만 울어. 응?”
엄마는 내 마음속을 훤히 알고 있는 듯했다. 엄마의 말을 사실이라고 믿고 싶어졌다. 그런 생각이 들자 언제 서러웠냐는 듯 눈물이 멈추고 마음도 편안해졌다.
다음 날 학교 가는 길에 아파트 앞에서 영배와 마주쳤다. 나는 영배를 보고는 그냥 가 버렸다.
“준우야!”
영배가 나를 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학교로 달려갔다. 쉬는 시간에 화장실을 다녀오면서 또 영배와 마주쳤다. 난 또 휑하니 지나가 버렸다.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자리로 가서 앉았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영배는 내가 자기를 피하니까 그냥 갔을 것이다. 길수도 벌써 갔는지 보이지 않아 혼자 집으로 향했다. 교문을 나와 한참을 걷다가 언덕길을 오르느라 숨이 차는데, 갑자기 골목에서 중학생 또래의 형들이 튀어나와 깜짝 놀랐다. 동네에서 불량배로 소문난 형들이다. 양쪽 팔짱을 끼더니 골목 안으로 끌고 간다.
“이거 놔! 나 돈 없단 말이야.”
“시끄러워 조용히 안 해?”
무리 중에 덩치가 제일 큰 형이 윽박지르며 인상을 쓴다.
“나 돈 없어요. 용돈 받으려면 아직 멀었단 말이에요.” 하고 말하니
“돈 없으면 다른 거라도 있을 거 아니야?”
“야! 가방부터 뒤져봐.”
우두머리가 옆에 있는 형에게 말하자, 내 가방을 낚아채 가더니 마구 뒤지기 시작한다. 겁이 났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돈 될만한 게 없는 것 같다.”
“차근차근 잘 뒤져봐.”
자기들 물건처럼 책 갈피갈피 넘기면서 필통을 열어 칸마다 마구 뒤졌다. 짝꿍 은주한테 선물 받은 연필과 지우개가 쏟아져 나 뒹군다. 샤프심 통 뚜껑이 열려 쏟아져 몇 개가 부러졌다. 말리려는데 두 팔이 붙잡혀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하느님, 부처님! 저 형들 좀 혼내주세요.!’ 속으로 빌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느님도 부처님도 믿는 게 아닌가 보다. ‘누구 지나가는 사람은 없나?’ 하고 골목 밖으로 고개를 돌려봤다. 수업이 끝난 후인데도 지나가는 친구들이 눈에 띄질 않는다. 그러던 찰나, 영배가 자기 동생 영호와 함께 지나가는 것이 보인다.
“영배야!”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영배가 나를 보더니 깜짝 놀란다. 양손을 나팔 모양으로 오므려 큰길 쪽을 향해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요! 나쁜 형들이 친구를 때려요! 살려 주세요!” 하고 소리를 지르니 골목 상인 아저씨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너 이 자식 다음에 보자. 그땐 가만 안 둔다.”
불량배들이 내 가방을 집어 던지고 필통을 발로 밟아 뭉개더니 잽싸게 흩어져 도망간다. 뒤통수를 갈겨 주고 싶었는데 어찌할 수가 없었다.
“주원아! 괜찮니? 다치지 않았어?”
“주원이 형 괜찮아?”
두 형제가 동시에 묻는다. 나는 그제야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가방에 학용품을 주워 담았다.
“다치지 않았어?”
영배가 물으며 필통을 집어 준다.
“응, 괜찮아, 고마워.”
노트와 책에 묻은 흙을 털며 영배를 보니 얼굴 가득 걱정을 담고 있다. 진정으로 날 걱정해 준 모양이다. 아까 학교에서는 미웠던 마음이 스르르 사라지는 것 같다.
“별일이 없어서 다행이다. 많이 놀랐겠다. 어서 친구들과 집으로 가거라.”
곁에 서 계시던 아저씨가 나의 등을 쓰다듬어 주셨다.
“가방 이리 줘. 우리가 집까지 데려다줄게.” 영배가 가방을 낚아채 갔다.
“오늘 주원이 불량배 형들한테 돈 뺏기고 맞을 뻔했어요.”
“아니? 뭐라고? 큰일 날 뻔했구나.”
영배 말을 들은 엄마는 놀라서 내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살펴본다.
“괜찮아, 영배가 소리 질러서 도망갔어.”
엄마는 영배에게 고맙다고 한다. ‘간식을 해 줄 테니 먹고 가라’며 우리에게 맛있는 떡볶이와 시원한 망고를 깎아 주셨다.
“그놈들 누군지 아는 놈들이야?”
“학교 오가다 가끔 보던 형들이야.”
“그러니까 영배랑 함께 오지 왜 혼자 왔어?”
“그냥!”
난 영배 얼굴을 쳐다보기가 쑥스러웠다. 영배와 영호가 돌아가고 며칠 후 일요일, 드디어 한자 시험을 보는 날이 왔다.
“수험표랑 필기구 잘 챙기고 옷 입고 빨리 나와. 엄마가 시험장까지 데려다줄게. 가는 길에 영배도 같이 가자고 전화해.”
“싫어, 그냥 우리끼리 가.”
“영배 부모님은 가게를 하시니까 갈 수가 없잖아. 친구니까 당연히 같이 가야지 친구한테 그럼 안 되는 거야. 불량배들한테 맞을 뻔한 것도 구해줬잖아.” 난 아무 말도 못 하고 영배에게 전화를 한 후, 현관 앞에서 만나 엄마 차를 타고 함께 시험장으로 출발했다. 나도 영배도 긴장했는지 우리는 차 안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고등학교인데 도착해 보니 사람들이 붐볐다.
“시험 끝나면 둘이 사이좋게 집으로 와라. 엄마는 결혼식에 가야 해서 데리러 오지 못해.”
“알겠어요.”
“네.”
우린 동시에 대답했다. 학교 게시판에 붙어있는 자리 배치도를 보고 시험을 치러야 할 교실로 찾아갔다. 영배와 나는 같은 교실, 내 자리는 두 번째 줄 맨 앞자리, 영배는 옆의 세 번째 줄 뒤쪽 자리다. 시험을 기다리는 시간이 제일 떨린다. 콩 콩 콩! 가슴 뛰는 소리가 망치 소리만큼 크게 들린다.
드디어 시험이 시작되었다. 수험번호를 표기하고 이름을 쓴 다음 문제지를 대강 훑어보니 다행히 쉬워 보인다. 아는 문제가 많은 것 같아서 안심이다. 웃음이 나려는 걸 참으면서 문제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영배 모습이 궁금해 고개 돌려 뒤를 보고 싶은데 꾹 참았다.
시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영배와 이것저것 시험문제를 맞혀보니 영배도 꽤 많이 맞힌 것 같다. 아~콩 콩 콩! 가슴이 또 망치질이다. 시험문제가 전체적으로 쉽게 나온 모양이다. 이번에도 영배보다 점수가 낮으면 어떡하지? 벌써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한자 등급 시험 결과가 발표되었다. 나도 영배도 6급에 합격했다. 점수는 영배보다 내가 4점 더 높았다.
“준우야, 뭐가 먹고 싶니? 맛있는 거 해줄게.”
“피자와 통닭이 먹고 싶어.”
“알았어. 아빠께 일찍 들어오시라 전화해 봐.”
오늘 저녁엔 우리 가족이 모두 모이기로 했다. 아빠가 일찍 들어오셨다. 가족이 식탁에 모여앉아 아빠와 엄마는 시원한 맥주 한 잔씩을 나와 동생은 콜라를 한 잔씩으로 건배했다. 웃고 떠들며 저녁을 먹은 후
“준우야, 네가 정말 자랑스럽다. 우리 아들 최고야!”
엄마의 갑작스러운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엄마 왜 그래?”
“네가 영배 때문에 마음 졸이며 지낸 거 알아. 그런데 친구를 경쟁자로 생각하거나 라이벌로 생각하면 안 되는 거야. 물론 경쟁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러다 보면 서로 사이좋게 지낼 수가 없는 거야. 친구와는 서로 자극받는 정도면 딱 좋아.”
“엄마 그 말이 무슨 뜻이야?”
“응, 친구가 나보다 잘했을 때는 자극을 받아 더욱 노력하면 된다는 말이야. 더 열심히 노력해서 친구를 따라가려고 하면 되는 거란다. 그걸 동기부여 받는다고 하지. 친구가 나보다 점수가 좋을 때마다 신경 쓰면서 그 친구를 멀리한다면 영원한 우정은 만들어지지 않을 거란 말이야. 엄마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니? 너 그동안 영배한테 신경 쓰여서 혼자 괴로웠잖아? 맞지?”
“응, 속 많이 상했어.”
“그런 것 같더라. 하지만 영배는 네게 신경 쓰지 않고 평상시에도 변함없이 널 대하잖아?”
“그랬나? 그랬던 것 같아.”
“그것 봐, 영배는 늘 네게 변함없이 대하는 것 같았어. 엄마가 볼 때는 영배의 마음 씀씀이가 너보다 한 수 위인 것 같아. 너도 좀 그랬으면 좋겠어.”
엄마의 말을 듣고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 봤다.
“알았어, 엄마 앞으로 노력할게.”
엄마는 무척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동안 나 때문에 걱정이 컸나 보다.
“이제 가서 숙제하고 일기도 쓰고 씻고 잘 준비하렴.”
“네.”
난 방으로 와 책상에 앉았지만, 머릿속은 온통 엄마 말씀이 파도처럼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것 같다. 나는 늘 내가 영배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가 보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영배는 내게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낸 적이 없다. 엄마 말씀처럼 영배가 나보다 한 수 위인 게 맞다. 엄마가 어두컴컴했던 방에 불을 켜 준 것처럼 내 마음이 환해졌다.
오늘은 일기 쓸거리도 많고 편안하게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영배와 어깨동무하는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
첫댓글 ㅎㅎ완성했는데 손 보면서 읽다 보니 많이 부족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