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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랑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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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이야기 주머니 스크랩 가을에 가 본 직지사(0.10.8)
숲길(吉) 추천 0 조회 27 10.10.14 09:33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가을에 가 본 직지사(0.10.8)

 

대구에서 서울가는 길에 직지사를 들려 가기로 했다.

언제 꼭 한번 가보고 싶은 절이었는데 마침 시간이 나서 다행이었다.

김천 IC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정표를 따라가니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먼저 입구까지 가 보았는데 아침을 먹을 곳이 없어 다시 주차장까지 내려왔고 가면서 보니 직지문화공원이 조성되어 지역주민에게 아주 좋은 휴식공간이 될 수 있을 것같았다.

아침은 해장국을 먹고 다시 입구에 있는 작은 주차장까지 가서 주차를 하고 입장을 하였다.

입구에는 동국제일가람황악산문이라고 편액이 쓰여져 있었다.

입구문 천정의 문양이 아주 화려하게 단청이 되어 있었다.

입구 들어가자 오른쪽에 한옥의 찻집이 있었다.

입구에 들어가서 뒤를 돌아보니 입구문에도 편액이 있었는데 각성임천고치인가 모르겠다.

들어가니 왼쪽에는 입석에 직지사 시가 쓰여져 있었다.

입구문에서 걸어가는 길은 나무가 울창하였는데 어떤 사람은 차를 타고 가는데 신도들이라는 것이다.

절 가까이 가니 하천이 흐르고 만세교가 있었는데 궁궐의 금천교가 생각이 났다.

1차적으로 속세와 부처님의 세계를 구분하는 경계하는 느낌이 들었다.

만세교를 건너니 안내도가 있고 오른쪽에 비석군이 있었는데 예전 주지스님의 행적비라고 쓰여 있다.

안내도를 지나가니 가시여뀌, 여뀌,진득찰, 붉은서나물이 보였다.

산문을 지나 일주문(一柱門)으로 가는 길 오른쪽으로 여러개의 비석이 있다. 이 곳을 비림이라고이라고 하는데 직지사 사적비(事蹟碑),고승(高僧)의 비석, 군수의 공덕비(功德碑)등이 있다.

오른쪽을 보니 담장이 쳐져 있고 큰 비석 1개와 작은 비석 4개가 서 있었다.

사적비는 직지사 1,500여년의 역사를 새겨놓은 비석으로 귀부(龜趺), 비신(碑身), 이수(이首)로 이루어졌다. 귀부의 얼굴은 통일 신라나 고려의 이수와 달리 조선 시대 해태상과 닮아 있다. 비신에는 직지사의 사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1681년 조종저(趙宗著)가 쓴 것이다.

조금 더 걸어가니 작은 규모의 일주문이 있었는데 편액은 황악산직지사였다.

일주문에 걸려 있는 "황악산 직지사(黃岳山直指寺)"라고 씌여있는 현판은 송설체로 유명한 원나라 조맹부(趙孟부, 1254~1322)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일주문 안쪽에는 자하문이라는 편액도 있었다.

일주문의 기둥은 천년묵은 싸리나무와 칡으로 세웠다고 전해지는데 이것도 사리함을 만들던 나무인 느티나무인 것으로 생각된다.

일주문이 있고 불이문이나 자하문이 있는데 여기는 바로 일주문이 자하문 역할도 하는가 보다.

마음을 모으자 마자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선 것이다.

특이하게 대양문이 있었는데 벽화를 보니 원효대사가 해골의 물을 마시는 그림이 있었다.

대양문 편액은 청명 임창순 선생님의 글이란다.

대양문 설명을 하고 넘어간다.

대양문(大陽門)은 부처님의 큰 광명을 상징하는 제3문이다. 직지사 대양문은 녹원화상에 의하여 일주문과 금강문 사이에 신축되었으며 정면 3간, 측면 2간으로 건평 18평의 주심포 팔작지붕이다

일주문과 금강문 사이에 있는 건물로 1990년에 신축되었습니다.

문 양쪽에 인왕이 그려져 있습니다.

대양문 들어가기 좌측에도 문이 있는데 그 안에는 전각들이 있었다.

대양문의 천정은 연등천정이었다.

대양문을 들어와서 뒤를 돌아보니 벽화가 있는데 하나는 웬 소년이 벌통을 때리는 형상인데 무슨 그림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나의 그림은 부처님의 전생에 진리의 말을 듣고 악귀에게 몸을 던지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금강문에 도착했는데 아름다운 설경과 무릉도원에서 한가로이 배를 타는 그림인 것으로 보인다.

금강문 안에는 금강역사와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 사자를 탄 문수보살이 그려져 있었다.

여기 금강역사는 금강저나 금강령을 든 것이 아니고 칼같은 무기를 들었다.

천왕문 들어가기 바로 왼쪽에 반듯한 돌이 있었는데 거기에 사명대사가 누워있었다는 것이다.

천왕문 외벽에는 청룡과 황룡, 그리고 화조도가 그려져 있고 풍경과 노스님이 유유자적하는 듯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천왕문 내에는 사천왕과 천정에 비천무가 그려져 있다.

이제 경내에 들어선 듯 만세루도 보이고 사방에 전각이 보인다.

만세루을 지나니 대웅전이 보이는데 배례석은 자세히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대웅전 앞에는 2기의 3층 석탑이 놓여 있어 통일 신라 시대에 나타나는 쌍탑(雙塔) 가람(伽藍)의 배치를 하고 있다. 그리고 석등, 노주, 배례석 등의 석조물이 있다.

2기의 석탑은 보물 606호로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도천사지(道川寺址)에 무너져 있던 것을 이 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두 탑 모두 단층으로 형성된 기단 위로 3층의 탑신을 올리고 있다. 대체로 신라의 석탑은 2층 기단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양식인데 문경, 선산 일대는 단층 기단이 유행했다. 석등은 연꽃이 새겨진 하대석(下臺石) 위에 8각의 간주석(竿柱石)이 놓여 있다.

그 위에 상대석과 사각의 화사석(火舍石)이 놓여 있다. 석등의 간주석에는 다람쥐가 조각되어 있다. 노주는 계단 좌우에 위치하고있는데 계단 오른쪽에는 8각의 중대석을 가진 노주가 있고, 왼쪽에는 사각의 중대석을 가진 노주가 있다. 상대석에는 독특한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배례석은 2개가 놓여 있다. 하나는 직사각형이고 다른 하나는 정사각형을 하고 있다. 직사각형의 배례석은 연꽃 봉우리로 테두리를 조각하였고. 내부에는 고리를 경계로 2개의 원이 조각되어 있다. 정사각형의 배례석은 8엽의 연꽃을 크게 조각하였다

대웅전 바로 왼쪽에는 포대화상이 있었는데 이것이 중국풍이라고 하는데 맞는 지 모르겠다.

드디어 대웅전 3존불을 보게 되었는데 어느 분이 약사불인지는 약합이 잘 보이지 않아 모르겠다.

대웅전 외벽에는 심우도와 서호팔경 그림이 있었고 대웅전 삼존불 뒤에도 오래된 그림이 있는데 모슨 그림인 지는 알 수 없었다.

대웅전 오른쪽에 성좌각이 있었는데 삼성각 정도 되는 것같았다.

대웅전 좌측에는 향적전도 있었고 관음전도 있었는데 관음성지라는 표찰도 있었으며 관음전 옆에 웅진전이 있었다.

웅진전 앞에는 아주 큰 파초가 있었는데 혜가대사의 잘라진 팔이 생각난다.

사명각에는 사명대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었고 근처에는 오래된 등나무도 있었다.

명부전도 보고 비로전으로 갔는데 이 비로전은 임진왜란 때도 무사히 보존되었다고 한다.

비로전의 꽃살문은 아주 화려하였고 비로자나불 위에는 탄생불이 있었다.

지덕의 빛으로 온 세상을 두루 비추는 비로자나불이 모셔진 비로전 앞에는 오래된 측백나무가 한 그루가 지난 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고풍(古風)스런 한 그루의 나무는 나이가 500살이 넘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황악루(黃岳樓)는 비로전 영역으로 들어가는 누각이다. 대웅전 영역으로 들어가는 곳에 만세루가 있는 것처럼 누각을 설치하엿다. 황악루는 원래 대웅전 앞에 있었으나 비로전 앞으로 이전하였다고한다.

비로전에는 고려 초기 능여(能如) 대사(大師)가 조성하였다는 천불 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비로전에 봉안된 천불은 과거, 현재, 미래의 3천불 중 현재의 천불을 조성하여 봉안한 것이다. 천불은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며, 크기도 조금씩 다르게 만들었다. 비로전의 천불은 경주에서 생산되는 옥돌로 제작되었다고한다

비로전 천불전에는 탄생불이 하나 있는데 가장 먼저 탄생불 보면 득남을 한다고 한다.

비로전 앞의 석탑은 대웅전 앞 2기의 석탑과 같은 양식이다. 1974년 문경 도천사지(道川寺址)에서 3기의 석탑을 옮겨와 2기는 대웅전 앞에, 1기는 비로전 앞에 놓은 것이다.

대웅전과 비로전 사이에는 관음전과 응진전 사명각이있다. 숲속에 쌓여있다. 사명각(四溟閣)은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고승인 사명 대사의 영정(影幀)을 모신 전각이다. 사명 대사는 직지사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된 후, 30세에 직지사의 주지가 되었고, 임진 왜란 때에는 나라를 구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이 쓴 것이다

비로전 바로 옆에 명월료로 생각되는 전각도 있었는데 스님들이 쓰는 요사채인지도 모르겠다.

약사전에도 가 보았는데 석불은 성보박물관에 있다고 하는 것같았다.

성보박물관의 이름은 청풍료이었는데 여기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었다고 해서 사진은 촬영하지 못했다.

지장보살과 십시왕이 있었고 저승사자는 꼭 관운장처럼 그려진 것이 특색이 있었다.

사리함과 석불, 그리고 서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박물관앞에는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에서 동남쪽으로 약 6㎞되는 원동(院洞)에서 낙동강가를 따라 1㎞쯤 떨어진 강창(江倉) 부락의 강락사지(江洛寺址)에 무너져 있던 탑으로, 1968년 당시 선산 군청 앞뜰에 옮겨 복원하였고, 1980년 10월 다시 현재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촬영된 사진을 보면 1917년만 하더라도 완전한 상태였으나, 그 뒤 일제강점기 말에 도굴범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전한다. 1993년 보물 제1186호로 지정되었다

만덕전이라는 전각이 있었는데 김천시니어클럽 사무실로도 사용되는 것같았다.

시간 제약이 있어 찬찬하게 모든 것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짧은 시간이 많은 것을 보게 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 자료를 참고하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직지사 역사

 

소백산맥(小白山脈)의 준령(竣嶺)이 남쪽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그 서쪽 추풍령(秋風嶺)에서 잠시 머물러 관문(關門)을 이루었고,다시 서남쪽으로 웅장(雄壯)한 산세(山勢)를 유지하며 달려와 힘차게 솟아오른 황악산(黃岳山) 동남쪽 산자수명(山紫水明) 한 곳에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直指寺)가 자리해있다. 해발 1,111m에 달하는 황악산은 북쪽으로 충청도,서쪽으로 전라도, 동남쪽으로는 경상도에 연이은 삼도(三道)의 도계(道界)에 접하였으며, 이중심에 눌러 앉은 본사는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북도

(慶尙北道) 김천시(金泉市) 대항면 (代項面) 운수리

(雲水里) 216번지이다.

황악산(黃岳山) 의 황자는 청(靑), 황(黃), 적(赤), 백(白), 흑(黑)의 5색(色) 중에서도 중앙색을 상징하는 글자이다. 따라서 예로부터 직지사는 해동(海東)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으뜸가는 가람이라는 뜻에서 동국제일가람(東國第一伽藍)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본사(本寺)로부터 김천까지는 12km이고, 다시 김천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는 230km, 부산까지는 218km로서 남한의 중앙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경부선(京釜線)을 비롯하여 태백산(太白山), 삼척(三陟)등 동해방면(東海方面)으로도 연결되는 한반도(韓半島) 교통의 요충지이며, 예로부터 길상지지(吉祥之地)로 전해져 내려오는 곳에 직지사는 정좌(定座)하고 있다.

 

따라서 절의 위치가 산곡(山谷)이면서도 높지 아니하고,야지(野地)인듯 하면서도 산사(山寺)의 풍취(風趣) 가 항상 흘러 넘쳐서 4계절 내내 도량을 참배하는 신남신녀(信男信女)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잠시 황악산의 산세와 지형을 살펴보면, 최상봉인 비로봉(毘盧峰)에서는 경상, 충청, 전라의 3도를 한눈으로 굽어볼 수 있으며, 바로 아래에는 선유봉(仙遊峰)을 비롯하여 천룡봉(天龍峰)과 운수봉(雲水峰)이 있고, 조금 내려와서 절경대(絶景臺)가 있으며, 그 중턱에 운수암(雲水庵)이 있어 승경(勝景)을 이룬다. 운수봉(雲水峰)에서 다시 2km쯤 올라가면 백운봉(白雲峰)이 있고, 그 아래로 만경대(萬景臺)가 펼쳐진다. 다시 남서로 난 능선을 따라가면 망월봉(望月峰)과 함께 신선봉(神仙峰)을 만날 수 있으며, 그 위에 형제봉(兄弟峰)은 백운봉과 마주하여 아름다운 절경을 이루고 있다.

 

황악산은 대체로 3대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능여계곡(能如溪谷), 내원계곡(內院溪谷), 운수계곡(雲水溪谷)이 그것이다. 능여계곡에는 그 옛날 능여 대사(能如大師)가 황악산 계곡의 원천(源泉)을 찾았다는 멱원대(覓源臺)를 비롯하여 많은 대(臺)와 소(沼)가 있고, 두 곳의 폭포와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능여천(能如泉)과 법수천(法水泉) 등의 약수가 있어 더욱 유명하다.

본사(本寺)의 초창(草創)은 신라 눌지왕(訥祗王) 2년(418) 아도 화상(阿道和尙)에 의하여 도리사(桃李寺)와 함께 개창(開創)되었다. 그 사명(寺名)을 직지(直指)라 함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禪宗)의 가르침에서 유래되었다 하며, 또 일설에는 창건주(創建主) 아도 화상이 일선군(一善郡, 善山) 냉산(冷山)에 도리사를 건립하고 멀리 김천의 황악산을 가리키면서 저 산 아래도 절을 지을 길상지지(吉祥之地)가 있다고 하였으므로 하여 직지사(直指寺)라 이름했다는 전설(傳說)도 있다. 또는 고려의 능여 화상이 직지사를 중창할 때 자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지(測地)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 설도 있다.

이는 모두 창건설화와 연관된 직지(直指)의 미화(美化)된 전설에서 유래되고 있지만, 실은 불교 본연의 직지인심(直指人心)을 상징하는 의미로 풀이 될 수 있다. 즉 창건 설화의 직지(直指)와 선가(禪家)의 직지(直指)가 둘이 아니라고 볼 때, 이는 곧 불교의 본질을 나타내는 이름이라 하겠으며, 또한 사명 (寺名)에 불교의 본지(本旨)를 이처럼 극명(克明)하게 나타내는 사찰도 흔치 않으리라 본다.

 

아도 화상에 의하여 개창된 직지사는 신라시대에 2차에 걸친 중수가 있었다. 그 첫째는 선덕여왕(善德女王) 14년(645) 자장 법사(慈藏法師)에 의한 중수를 들 수 있고, 두번째는 경순왕(敬順王) 4년(930) 천묵 대사 (天默大師)에 의한 2차 중수가 그것이다.

 

먼저 자장 법사의 중수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잘 알 수 없고, 오히려 경순왕대의 사실이 보다 자세히 전해진다. 아마 이때는 신라의 국운이 쇄진하여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投降)하기 불과 5년 전의 일이며, 이 시기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변혁기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직지사 사적에 따르면 이러한 시기에 천묵 대사는 본사를 중수하고, 더 나아가 금자대장경(金字大藏經)을 서사(書寫)하여 신라 조정(朝廷)에 헌상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는 현존 유품(現存遺品)이 전해지지 않아 그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다음에 언급하게 될 금자대장경비(金字大藏經碑)가 이를 입증(立證)하고 있다. 다만 이제 지난날 직지사의 찬란하였던 사격(寺格)을 밝히면서 신라시대에 이미 금자대장경을 제작하였다는 이 놀라운 사실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대장경이라고 하면 해인사(海印寺)의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을 그 대표로 삼아 왔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서 이미 신라시대에, 그것도 금자대장경을 만들었다는 사적기의 내용은 진실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더구나 이를 접한 경순왕은 어찰(御札)로써 점제(點題, 經名을 쓰는 것)하였다고 하였으므로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에 대한 현품이 전래되지 않아 그간의 사정을 잘 알 수 없지만, 왕조(王朝)가 바뀐 고려시대 초기에 본사(本寺)에는 금자대장경이 봉안되었고, 또한 대장당비(大藏堂碑)가 건립되고 있다. 즉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직지사의 고승 능여 조사(能如祖師)의 도움으로 후백제(後百濟)와의 불리한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직지사는 국가적 비호(庇護)를 받았으며, 이후 능여 조사(能如祖師)의 제자들 역시 대대로 본사를 중흥(中興)하더니 광종 원년(光宗元年, 950)에는 3월 1일부터 약 50일 간 법회(法會)를 개설(開設)하여 경찬회(慶讚會)를 성대히 베풀었다.

 

그런데 이때의 경찬법회는 금자대장경을 다시 필사한 것에 대한 법회인지, 아니면 경순왕이 점제(點題)하였던 금자대장경을 경순왕의 투항 후 신라 조정으로부터 인수하고 대장당(大藏堂)을 건립한 낙성연(落成宴)인지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더욱 짙다. 그것은 신라의 국운이 고려로 이양되는 과도기적 상황과 함께 태조 왕건의 불교신앙과 아울러 능여 조사로 인한 그간의 사정에서 짐작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보다 분명한 것은 금자대장당비(金字大藏堂碑)를 새겨 절을 북정(北亭)에 세웠다는 사적기의 내용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에 대한 물적 근거는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실려 있는 직지사 대장당기비(大藏堂記碑)의 탁본(拓本)이며, 이는 왕우군(王右軍)의 집자(集字)로서 유명하다.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직지사는 제 2대 정종 원년(定宗元年, 1339) 정종의 어태(御胎)를 절의 북봉(北峰)에 봉안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고, 이로 인하여 조선시대에도 줄곧 사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 중기에는 사명 대사(四溟大師)가 본사(本寺)에 출가(出家)하여 신묵 대사(信默大師)의 제자가 된 것이 유명하거니와, 이로 인하여 직지사는 배불(排佛)의 그늘 속에서도 사운(寺運)을 유지할 수 있었다.

30세에 직지사 주지(主持)가 된 사명 대사는 이후 임진왜란(任辰倭亂)이 발발(勃發)하자 구국제민(救國濟民)의 선봉(先鋒)에서 큰 공을 세웠음은 너무나 유명하다. 이렇게 구국(救國) 사명 대사의 공로로 인하여 직지사는 조선(朝鮮) 8대가람(八大伽藍)의 위치에 놓이게 되었고,300여 소속사암(寺庵)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리고 직지사의 사세가 가장 흥성했던 시기에는 현재 김천시내 법원이 있는곳을 비롯하여 구화사(九華寺)까지가 직지사의 사유지였으며,뿐만 아니라 상주 통로 우시장(牛市場) 근처의 다리이름이 직지교(直指橋)였고, 그 상류(上流)는 모두 직지사의 영유(領有)였다 하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직지사는 조선시대 말엽 국운의 쇠퇴와 함께 그 사운(寺運)을 같이 하여 한때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무엇보다 직지사는 일제시대(日帝時代)사찰령(寺刹令)이 제정되면서 한때 해인사(海印寺)의 말사(末寺)로 전락하기도 하였으나, 광복 이후 50년대에 본산제도(本山制度)가 재편성되면서 본산(本山)으로 승격되어 그 사세를 차츰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국내 25본산(本山) 가운데 하나로서 제8교구(第八敎區) 본사(本寺)이며 소속 말사(末寺) 54개 사찰에 이르고 있다. 관할 구역은 4개시(個市), 1개군(個郡)으로 김천, 구미, 상주, 문경시와 예천군이다. 또한 본사의 산림(山林)은 약 600정보(町步)에 달하며, 사찰 경내 면적만도 약 30,000평에 이른다. 그리고 본사에 소속된 말사 역시 수많은 성보문화재(聖寶文化財)와 고적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본사는 역대의 중건(重建), 중수(重修)를 거치면서 천 수백년 법등(法燈)을 이어 오다가 최근(最近) 반세기 동안 창사 이래(創寺以來) 최대의 불사를 일으키어 그 면모가 일신되었으니 이는 오로지 1958년 본사의 주지로 부임한 녹원 화상(綠園和尙)에 의한 중흥불사(中興佛事)의 공덕에 힘입은 바라 할 것이다.

먼저 사찰 주변의 정화(淨化)를 위하여 사유대지(私有垈地) 10,088평과 전답 12,627평, 그리고 임야 3,740평을 매입하였다.

이와 함께 사적기(事蹟記)에 따라 모든 불전(佛殿)과 당우(堂宇)를 중건,중수함은 물론 국제회의와 대법회를 위한 본사 최대의 건물인 만덕전(萬德殿)을 건립하는 한편 4기(基)의 신라시대 고탑(故塔)을 이건(移建)하였으니 이는 창건 이래 최대의 불사(佛事)이며 일대변혁(一大變革)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직지사 전각 소개

대웅전

신라시대 대웅전의 규모에 대해서는 미상이나 고려 이후 조선 초기,적어도 정종대까지는 2층 5간의 특수한 건물이었던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사적기에 대웅대 광명전이라 하였는데 명칭부터 특이하여 혹시 당시에는 석가모니불과 비로자나불을 동시에 봉안했는지 알 수 없다. 대웅전은 임진왜란때 소실되었으나 선조 35년(1602) 사승 인수,명례 등에 의하여 중창되었다. 현 건물은 이로부터 150여 년 후인 영조 11년(1735) 중건되었으며 당시 중건에는 주지 수변화상,전 주지 설운 종익 그리고 태감화상을 비롯하여 산중 대중의 협력과 시주로써 이룩 되었다. 그 관계자는 상대목 동래 운수사의 치백과 도목수 설인을 비롯하여 목수 20여 명과 야장,개와공,도감,그리고 화사,총찰도감,도와도감등 50여 명의 산중대중과 900여 명의 시주가 참가하고 있는데,이 명단은 중창 상량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들은 주지 녹원 화상에 의하여 연목 교체 및 기와를 번와(1969.3.1~1970.11.30) 할 때 확인 되었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대웅전의 주위 석축 및 축대를 새로 조성(1973.4.10~1975.6.20)하여 필역 하였다. 다시 녹원 화상에 의하여 재차 연목 및 기와가 번와(1979.10.25~1980.1.14)되었고, 1980년 8월에는 부분적으로 고색금단청을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직지사 대웅전은 경북유형문화재 제 215호였는데, 2008년 9월 3일 보물 제1576호로 지정되었다.

 

비로전

고려 태조때 능여 조사에 의해 처음 세워진 비로전은 천불상을 모시고 있으므로 천불전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병화를 모면한 3동의 건물중 하나로 근년에 개수하였다.정면 7간,측면 3간의 맞배지붕이며 크기는 53평에 금단청을 하였다. 천불상도 같은 시기에 조성되었으며 과거,현재,미래의 삼천불 중 현겁 천불을 모신 것으로 1992년 개금 불사가 완료되었다.또한 비로전 앞에는 수령 500년이 넘는 측백나무가 있다.

 

동자상

천불상 중 독특하게 벌거벗은 동자 의 모습을 한 불상으로 법당에 들어가 첫눈에 이 동자상을 보면 옥동자를 낳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천불상

비로전 내의 천불상은 많은 전설을 가지고 있으며 그 모습이 제각기

다르다.불상의 재료는 경주 특산인 옥돌을 사용하였는데 ,그 모습은 사방의 모든 부처님을 모셔놓은 듯 장엄하다

 

웅진전

응진전은 고려 태조 14년(931) 능여 대사가 창건 하였으나,임진왜란에 전소되었던 것을 효종 7년(1656) 관음전으로 중건 하였다가 뒤에 응진전으로 개액 하였다. 이건물은 구후 주지 녹원 화상에 의하여 중수 되었는데 이때는 기와 번와,단청 및 석조 축대까지 신축(1970.3.1~1971.11.30)되었다.

 

웅진전 나한상

응진전에 모셔진 나한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많은 제자들 중 상수제자 16인이다. 이들은 일찍이 말세의 중생에게 복덕을 성취하게 하고 정법으로 인도하겠다는 원을 세운 성자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많은 영험담과 함께 민간에서 신봉되어 나한 신앙을 형성하게 되었다

 

관음전

관음전은 일명 원통전이라고도 하며 관세음보살을 모신 곳이다.

협시로는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이 있으나 이들은 대부분 후불탱화로 나타난다. 대승불교가 낳은 수많은 보살중에서 관세음보살 만큼 대중의 신앙대상이 된 보살도 드물다. 모든 중생의 애환을 대자대비로 거두어 주는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근기에 맞게 32응신으로 화현하여 중생을 구제한다

 

약사전

약사전은 동방유리광정토를 표출시킨 법당으로 약사여래가 봉안되어 있다. 아미타신앙이 사후의 신앙을 기본으로 하는 반면에 약사여래신앙은 현실적 이익을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약사여래는 인간을 질병으로부터 보호하여 줄 뿐만 아니라 죽음을 물리치는 힘을 갖고 있는 부처로 대중의 신앙대상이 되었다. 왼손에는 약사여래의 특징적 모습인 약합을 들고 있다.

 

약사전내 석조약사여래좌상 보물319호

약사여래좌상은 통일신라시대의 조성 양식을 반영하는 약사여래상은 마멸이 심하나,전체적인 윤곽은 광배와 함께 부드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성보박물관에 모셔서 상시 전시하고있다.

 

직지사(直指寺)는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황악산(黃嶽山)에 위치한 조계종 25교구 본사이다.

신라 제19대 눌지왕 때인 418년(눌지왕 2년)에 묵호자(墨胡子)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고려 태조 때인 936년(태조 19년)에 능여 대사(能如大師)가 중건할 때 자를 쓰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량하여 지었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었다. 임진왜란 때에 소실된 것을 조선 15대 광해군 때인 1610년(광해군 2년)에 재건하였다. 직지사 대웅전 앞 삼층석탑 등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가 여럿 있다.

 

직지사 대웅전 삼존불탱화

직지사 대웅전 삼존불탱화(直指寺大雄殿-三尊佛幀畵)는 보물 제670호로, 비단바탕이며 채색 3점이다. 약사여래불화(좌)는 6m×2m 2, 석가여래불화(중)는 6m×2.4m 3, 아미타불화(우)는 6m×2m이다.

영조 11년(1735년) 대웅전 중건 때 진기, 지영 두 스님이 불화를 그리기 시작하여 9년 만인 영조 20년(1744년) 5월에 완성, 봉안했다. 중앙의 그림은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문수·보현 두 보살과 범천·체석천 및 십대제자를 배치했다. 왼쪽 그림은 약그릇을 든 약사여래가 중앙에 안좌하고 주위에 일광·월광 등 8보살과 사천왕 12신장이 에워쌌다. 오른쪽 그림은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음·세지 등 보살과 신장들이 둘러싼 구도이다. 전체적으로는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안정감이 있고, 비범한 묘사와 정교한 장식표현은 생동감이 있으며, 주위에 그려진 범서가 특이하다.

 

직지사 석조약사여래좌상

직지사 석조약사여래좌상(直指寺石造藥師如來坐像)은 보물 제319호로, 직지사 경내에 있다. 고려시대의 석불좌상으로 전체 높이는 1.6m, 불상 높이는 1.26m이다. 불신과 광배(光背)가 1개의 돌로 조각된 상으로 사각대석 위에 놓여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과는 다른 빈약한 체구, 어색한 손의 위치, 간략한 옷주름 등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직지사 대웅전 앞 삼층석탑

직지사 대웅전 앞 삼층석탑(直指寺大雄殿-三層石塔)은 보물 제606호이다. 전체 높이는 8.1m, 탑 높이는 5.3m이다. 원래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에 있었던 도천사 자리에 파손, 산재해 있던 것을 1974년 직지사 주지 오녹원이 이곳에 옮겨 원형대로 복원하였고, 탑봉 상륜부는 1976년 전문가(한수영 박사)의 고증으로 복원되었다. 8개의 석주와 8면의 석판으로 된 초대 위에 4개의 석주와 4개의 석판으로 정방체를 이룬 탑신이 조화를 이루어 안정감을 주는 거탑이다. 1층과 2층은 6단, 3층은 5단으로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으며 통일신라시대 도선 국사가 조성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직지사 비로전 앞 삼층석탑

직지사 비로전 앞 삼층석탑(直指寺毘盧殿-三層石塔)은 보물 제607호로 전체 높이는 8.1m, 탑 높이는 5.3m이다. 원래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뒷산에 있었던 도천사 유허지에 파손, 산재한 것을 이곳으로 옮겼다. 상륜부는 없어져 1980년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복원했다. 탑의 규모가 크고 전체적으로 조형미가 우수한 작품으로 직지사 대웅전 앞 삼층석탑과 수법이 같으며 한 사람이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상세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도선 국사가 도천사를 창건할 때에 조성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직지사 석조약사여래좌상

직지사 석조약사여래좌상(直指寺石造藥師如來坐像)은 보물 제319호로, 직지사 경내에 있다. 고려시대의 석불좌상으로 전체 높이는 1.6m, 불상 높이는 1.26m이다. 불신과 광배(光背)가 1개의 돌로 조각된 상으로 사각대석 위에 놓여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과는 다른 빈약한 체구, 어색한 손의 위치, 간략한 옷주름 등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직지사대웅전삼존불탱화(直指寺大雄殿三尊佛幀畵), 보물 제670호

 

직지사 대웅전에 봉안된 후불탱화로 비단바탕에 채색되었다. 탱화란 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액자나 족자형태로 만들어지는 불화로, 일반적으로 이 직지사처럼 대웅전 본존불의 뒷벽에 위치한다. 조선 후기에는 대웅전이나 대광명전 등에 흔히 3폭의 불화를 봉안하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인데, 이 불화도 그러한 형식을 따르고 있다. 중앙에 석가여래의 영산회상도, 왼쪽에 약사회도, 오른쪽에는 아미타불의 극락회도를 배치하였다.

중앙에 배치된 불화는 석가가 영취산에서 여러 불·보살에게 설법하는 모습을 그린 영산회상도이다. 화면의 중앙에 석가불이 있고 좌우에 8보살과 10대제자, 사천왕 등이 그려져 있으며 둘레에 많은 범문을 써 놓았다. 왼쪽 어깨에만 옷을 걸친 석가불은 악귀를 누르는 항마촉지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비교적 균형잡힌 체구와 둥근 얼굴에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으며,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세밀하게 그렸다.

왼편에 있는 약사회도는 화면의 중앙에 약합을 든 약사여래가 앉아 있고 그 주위에 8대보살과 사천왕, 12신장 등이 에워싸고 있는 복잡한 구도이다. 본존불의 신체는 건장하고 당당한 모습인데 비하여 얼굴은 지극히 작은 눈과 입 등이 매우 단아하고 엄숙한 인상을 풍긴다. 이러한 모습과 등뒤의 물결무늬 원형광배, 옷의 문양표현 등이 18세기 불화의 시대적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오른편의 아미타회상탱화는 중앙에 아미타불을 두고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을 비롯하여 신장상 등이 주위를 둘러싼 구도이다.

이 세 폭의 탱화는 영조 20년(1744) 세관(世冠), 신각(神覺), 밀기(密機) 등

 

사진을 보면서 설명하기로 한다.

 

먼저 직지사 대웅전의 모습을 먼저 본다.

 

 

주차장의 식당들인데 대구식당에서 해장국을 먹었다.

 

 

직지문화공원의 풍경이다.

 

 

매표소 옆 출입문이다.

 

 

천정의 문양이 화려하다.

 

 

찻집의 모습이다.

 

 

산문 뒤의 모습이다.

 

 

직지사 싯귀가 있는 입석이다.

 

 

일주문으로 가는 길이다.

 

 

소하천과 만세교이다.

 

 

비림의 비석들이다.

 

 

직지사 안내도이다.

 

 

가시여뀌를 올려본다.

 

 

담장 속에 있는 비석들이다.

 

 

일주문의 모습이다.

 

 

일주문의 자하문 편액이다.

 

 

대양문이다.

 

 

금강문이다.

 

 

천왕문이다.

 

 

의상대사가 누워 있었던 돌이라고 한다.

 

 

대웅전 앞에 있는 만세루이다.

 

 

대웅전의 모습이다.

 

 

종무소 건물이다.

 

 

대웅전 삼존불이다.

 

 

대웅전 앞 탑과 만세루를 본다.

 

 

대웅전 외벽의 벽화이다.

 

 

성좌각의 모습이다.

 

 

성좌각 내부 모습이다.

 

 

향적전이다.

 

 

관음전의 모습이다.

 

 

관음전의 관세음보살이시다.

 

 

사명각의 뒷모습이다.

 

 

웅진전의 옆모습이다.

 

 

웅진전의 모습이다.

 

 

웅진전의 내부 모습이다.

 

 

웅진전 앞은 혜가선사을 연상하듯이 파초가 자라고 있다.

 

 

사명각 안의 모습이다.

 

 

사명각의 모습이다.

 

 

명부전의 모습이다.

 

 

비로전을 옆에서 본다.

 

 

명부전의 지장보살이시다.

 

 

비로전 앞의 모습이다.

 

 

비로전의 모습이다.

 

 

비로전 내부의 모습이다.

 

 

명월료라고 되어 있다.

 

 

비로전 내부의 모습을 다시 본다.

 

 

비로전 앞 삼층석탑이다.

 

 

약사전이다.

 

 

약사불이시다.

 

 

황악루의 모습이다.

 

 

청풍료앞 삼층석탑이다.

 

 

설법전이다.

 

 

청풍료의 모습이다.

 

 

거북이 두마리가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다.

 

 

내려가면서 대양문, 금강문, 천왕문을 차례로 본다.

 

 

만덕전의 모습이다.

 

 

저 전각은 산해종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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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10.21 18:17

    첫댓글 모든 현판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썼는데, 유독 '사명각'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쓴 이유가 있을 법 합니다만.....???

  • 작성자 10.10.22 08:08

    그러게요. 특이하네요 ㅎㅎ
    최근에 쓴 편액인가요?
    한글 유행에 맞게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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