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1/07 입 동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0 - 박지성, 시즌 3·4호 골 폭발 [앵커멘트] /YTN 2010-11-07 05:04
2010 - 양성자 대신 납 이온 충돌 ‘미니 빅뱅’ 재현 성공 우주탄생 비밀 규명 새 장 열다 우주를 탄생시킨 대폭발인 ‘빅뱅’ 직후의 상태를 작은 규모로 재현하는 실험이 7일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거대강입자가속기(LHC)에서 성공했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http://news.dongascience.com/PHP/NewsView.php?kisaid= 20101110100000000114&classcode=0102
中 룽먼석굴서 백제불상 첫 발견 "7세기 백제멸망후 끌려간 백제인이 만들어" 유석재기자 karma@chosun.com /조선닷컴 2004.11.07 17:51 34' http://www.chosun.com/culture/news/200411/200411070210.html
2000 - 빌 클린턴 대통령의 부인 힐러리 여사 미국 뉴욕주 상원의원 당선 2000년 11월 7일 치러진 뉴욕주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빌 클린턴 대통령의 부인 힐러리 로드햄 클린턴이 공화당의 릭 라지오 후보를 누르고 승리했다. 힐러리는 10% 이상의 격차를 벌리며 라지오를 크게 앞질렀다. 힐러리는 이날 맨해튼에서 열린 축하모임에서 “앞으로 6년간 여러분을 위해 정성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딸 첼시와 함께 아내의 당선을 지켜본 클린턴 대통령은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힐러리는 “남편과 딸에게 감사한다”고 했을 뿐 그들의 이름을 부르지는 않았다. 힐러리는 라이벌인 라지오와는 비교할 수 없는 지명도를 가지고 선거를 시작했지만 쉬운 선거는 아니었다. 유세기간 중 불미스러운 스캔들이 그녀 발목을 붙들었고, 선거 막바지에는 이슬람 단체로부터 선거 자금을 받은 사실이 알려져 곤경에 빠졌다. 공화당은 이 이슬람 단체가 예멘에서 발생한 미 구축함 콜호 피격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공세를 펴는 무리수를 둬, 역효과를 냈다. 라지오는 뉴욕에 아무 연고가 없는 힐러리를 `철새정치인`으로 몰아붙였으나 역부족이었다. 이에 비해 힐러리는 클린턴의 르윈스키 스캔들 등 불리한 이슈는 피해가면서 뉴욕 유태인들의 표를 거머쥔 조지프 리버만 부통령 후보를 선거에 투입해 성공을 거뒀다. /조선
1998 - 디스커버리호 귀환 디스커버리號, 무사 착륙 우주비행사상 최고령인 77세의 나이로 두번째 우주여행에 나선 존 글렌 상원의원등 7명의 승무원을 태운 디스커버리호가 9일간의 우주비행을 마치고 7일 무사히 귀환했다. (케이프 커내버럴 AFP=연합) /문화일보 1998-11-08 11:30
1997 - 김영삼 대통령, 신한국당 탈당 김영삼 탈당 김영삼대통령이 오늘 신한국당 탈당을 발표한 가운데 신한국당은 김영삼 대통령의 탈당으로 YS 직계로 분류되고 있는 권재근 기자 /부산MBC 뉴스 1997-11-07 http://busanmbc.co.kr/sub01/sub01.html?load=view&newsno=19971107001600000000T
- Mars Global Surveyor - Mars Global Surveyor
1996 - 미국항공우주국에서 마스 글로벌 서베이어 호를 발사하다 마스 글로벌 서베이어(Mars Global Surveyor)는 NASA에서 발사한 화성 탐사선이다. 1996년 11월 7일 델타 7925 로켓에 실려 발사되었다. 10개월간의 여행 끝에 1997년 9월 11일 화성 궤도에 진입하였다. 총 무게는 1030.5 kg 이며, 출력은 980 W 이다. 2006년 11월 5일 임무를 종료하였다. /위키백과
1993 - 대전 세계박람회(EXPO) 폐막 [책갈피 속의 오늘]1993년 대전엑스포 폐막 1993년 11월 7일 오후 7시. 대전 대덕연구단지 한빛탑광장에서 어둠을 뚫고 한 줄기 빛을 남기며 꿈돌이가 하늘로 올라갔다. 꿈돌이를 환송하는 사람들은 한데 어울려 강강술래를 하며 한빛탑 주위를 돌았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동아닷컴 2008-11-07 02:58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811070128
둡체크(두브체크) [Dubček, Alexander, 1921.11.27~1992.11.7] `프라하의 봄`을 주도한 두브체크 사망 1968년 체코에서 '프라하의 봄'을 주도한 알렉산드르 두브체크가 1992년 11월 7일 숨졌다. 향년 70세였다. 두브체크의 일생은 불운의 이상과 실패한 열망으로 상징된다.
한국과 파키스탄 양국은 1968년 1월 15일 영사관계 수립에 합의하고 1968년 4월 22일 주(駐)이슬라마바드 대한민국총영사관을 설치하였으며, 1969년 8월 1일 주(駐)카라치 대한민국출장소, 1980년 6월 25일 주한 파키스탄총영사관을 설치하였다. 파키스탄의 대한반도 정책은 비동맹주의의 중립외교 노선에 따라 기본적으로 남북한 등거리정책을 유지하는 것이다. 파키스탄은 1965년 8월의 제2차 인도-파키스탄 국경분쟁 후 친서방에서 친중국 노선으로 전환함에 따라 1972년 11월 북한과 수교하는 등 친북 자세를 취하다가 1985년 5월 대통령 모하마드 지아울 하크의 방한을 계기로 한국과의 실질 협력관계 강화에 노력하고 있다.
1983 - 삼성반도체, 64K D램 개발 성공 1983년 12월1일 강진구 당시 삼성반도체통신 사장이 갑자기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뭔가 중대한 발표가 있을 것이라는 정보가 나돌았지만 반도체 관련 발표일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데일리 이종석기자] /이데일리 2005.08.30 12:40 http://www.edaily.co.kr/columnissue/column/columnRead.asp?sub_cd= CD03&newsID=01886006576672568
- Irrigation Project, Laborers, Heavy Equipment, 1991.8.28
1983 - 동아건설, 리비아 대수로 공사 따내 1983년 11월 7일, 동아건설이 단일공사로는 세계최대규모인 32억 9700만 달러의 대수로공사를 리비아에서 수주, 현지에서 계약을 체결했다.
1980 - 미국의 영화배우 스티브 매퀸(McQueen, Steve) 사망 매퀸 [Mcqueen, Steve, 1930.3.24~1980.11.7] 미국의 영화배우. 1930년 3월 24일 미국 인디애나주 비치 그로브(Beech Grove)에서 출생하였으며 본명은 테렌스 스티븐 맥퀸 (Terence Steven Mcqueen)이다. 아버지는 곡예비행을 하는 서커스단원으로 그가 태어난 지 6개월 후 그의 어머니와 그를 버렸으며 어머니마저 그를 농장을 운영하는 삼촌에게 맡기고 떠나버렸다. 12살까지 그곳에서 외롭게 성장했으며 이후 18개월간 비행 청소년 수용 시설인 소년원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한때 유조선을 타는 선원생활도 했으나 1947년 해병대에 입대하였고 북극에서 훈련 중 동료 군인들을 구해낸 공로로 대통령으로부터 무공 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 한미연합군사령부 창설 30주년 (2008.11.7. 발행)
1978 - 한미연합사령부 창설 한국군과 주한미군을 통합 지휘하는 한미 연합사령부가 1978년 11월 7일 창설됐다. 1978년 한미국방장관간의 합의로 설치된 한미군사위원회의 전략지시 제1호에 따른 것이다. 한미 연합사는 양국이 주한미지상군의 철수와 관련, 작전지휘체계를 효율화하기 위해 창설한 기관으로 상위기관인 한미군사위원회의를 통해 작전지침 및 전략지침을 받아 효과적으로 한국에 대한 적대행위를 억제하고 적의 침공을 격퇴하는 것이 그 임무이다. 한미연합사는 통합된 군사력을 적절하게 운용할 수 있도록 사령관(미군측 대장), 부사령관(한국측 대장)을 중심으로 사령부내 참모 및 구성요원을 동률원칙에 따라 동수로 편성했다. /조선 [역사속의 오늘] 한미연합사령부 창설 지난 2월 한미 양국 국방장관이 만나 주한미군사령관이 갖고 있는 한반도 전시작전통제권을 2012년 4월 17일 한국군에 전환키로 합의함으로써 해체될 위기에 놓인 한미연합사령부. 한국군과 주한미군을 통합 지휘하는 군사지휘기관인 한미연합사령부는 제11차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 합의로 설치된 한미군사위원회의 전략지시에 의거해 1978년 11월 7일 창설되었다. 1975년 국제연합 총회에서 UN군 사령부의 해체를 결의하자 이에 대안으로 한미연합사령부의 창설이 결정되었다. 한미연합사령부는 한국군에 대한 미군의 지휘통제를 실질적으로 강화하는 것으로, 한미 양국이 주한미지상군의 작전지휘 체계를 효율화하고, 양국군의 방위노력을 효율적으로 통합해 한국의 방위력을 증진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993년 11월 한미 양국의 합의에 따라 한미연합사령부는 전시에만 한국군을 지휘하도록 변경되었다. 미국군 장성을 사령관으로, 한국군 장성을 부사령관으로 하여 참모 및 구성요원은 同數(동수)의 한미 양국 고급장교로 구성된다. 한미연합사령부는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근거하여 주한미군의 합법성을 보장받으며 ‘합의 의사록’에 따라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장악하고 있다. 정보관리부 /매일신문 2007년 11월 07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8706&yy=2007
리처드 M. 닉슨 대통령은 1972년 11월 7일 실시된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일반 유권자표의 61% 라는 압도적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재선됐다. 닉슨 대통령은 50개주(州) 중 49개주를 석권, 선거인단 5백21표를 확보해 민주당의 조지 맥거번 후보를 압도했다. 그의 라이벌이었던 맥거번의 급진은 보수적인 미국민들에 의해 제동이 걸렸지만 맥거번의 등장은 변화를 추구하는 미국 정치의 새 흐름을 반영한 것이었고 그의 공약은 닉슨의 공약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닉슨 대통령은 1946년 켈리포니아주에서 공화당 하원의원에 출마, 당선됨으로써 정치생활을 시작했다. 1950년 상원의원을 거처 1952년 아이젠하워의 러닝메이트로 출마 39세의 젊은 나이로 부통령에 당선됐다. 이후 1960년 대통령선거와 1962년 캘리포니아지사선거에서 패배하기도 했으나, 1968년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출마해 대통령에 당선됐다. /조선
루스벨트 [Roosevelt, (Anna) Eleanor, 1884.10.11~1962.11.7]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의 부인 엘리너 루스벨트 사망 엘리너 루스벨트. 힐러리는 그를 자신의 ‘이상적인 모델’이라 했고, 포드 대통령의 부인 베티 포드는 그를 ‘귀감’으로 삼았다고 했다. 열 살 때 고아가 돼 불우한 성장기를 보냈지만 그는 운명적으로 루스벨트가(家)의 여성이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Roosevelt, Theodore, 1858~1919) 대통령은 그의 삼촌이었고, 남편 프랭클린 루스벨트(Roosevelt, Franklin D., 1882~1945)도 먼 친척 오빠였다. 그가 다섯 아이를 키우며 내조에 충실하는 동안 남편은 상원의원, 해군성 차관보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현모와 양처를 꿈꿔온 그의 결혼생활은 1918년 남편과 자신의 비서 루시 머서와의 관계를 알게 되면서 산산이 부서졌다. 이때부터 둘은 평생토록 껍데기만 부부였다. 의례적인 자리 외에는 별거했고, 식사도 따로 했다. 1921년 루스벨트가 소아마비에 걸리면서 엘리너에게 새로운 인생이 펼쳐졌다. 남편을 대신할 정치적 공간이 마련된 것이다. 그는 이제 독립적인 공인이었고 남편과는 정치적인 동반자였다.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 엘리너는 신문에 칼럼 ‘마이 데이(My Day)’를 쓰며 때로는 남편의 정책을 지지하고 또 때로는 반대의사를 표명하며 정치적으로도 긴장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의회에서 증언을 하고, 또 기자회견까지 한 최초의 퍼스트 레이디였다. 루스벨트가 또 다른 여성과 사랑을 속삭일 때 엘리너는 AP통신 여기자 로리나 히콕과 동성애에 빠졌다. 루스벨트가 죽은 뒤에도 그는 미국의 유엔대표로, 또 유엔 인권위 의장으로 활약했고, KKK단이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그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부를 찾았던 그런 여성이었다. 1962년 11월 7일, 그녀가 죽었다. /조선
(1882년의 조미수호통상조약으로) 한미관계가 125년 전에 시작되었다고 하나, 20세기 초 35년 이상의 단절이 있었으므로, 실질적인 관계의 시작은 제2차대전으로 일본이 패망한 후인 1945년에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다만 소위 “에치슨 라인”에서 보듯이 냉전 초기 한반도는 미국의 시각에서 볼 때 경제적 가치가 없는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양국은 1957년 10월 7일에 비준서를 교환했으며, 조약은 1957년 11월 7일 발효되었다. 흥미 있는 사실이 있다. 조약 체결을 기념하여 한국정부는 기념우표를 발행했는데, 당시 발행된 2종의 우표의 증정용 시트는 오늘날 세계 우표수집가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 높은 수집 품목에 속한다. 미화 2,000불을 호가하니 일반인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이 우표는 우리의 우정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주미한국대사관 http://www.koreaembassyusa.org/han_newspress /fta_whatsnew.asp?num=485&page=7&spec=4
1950 - 한국전 참전 태국군 부산항에 도착 본진이 1950년 10월 22일 방콕의 크렁떠이 항을 출발해 11월 7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지상군 1개 대대에 프리깃함 2척, 수송선 1척이었다. ('한국전쟁과 태국군 참전' 중에서) /부산일보 2008.10.03 http://www.busanilbo.com/news2000/html/2008/1003/060020081003.1017101232.html
1944 - 소련의 첩보원 리하르트 조르게(Sorge, Richard) 사형 조르게 [Sorge, Richard, 1895.10.4~1944.11.7] [오늘의 경제소사/11월7일] 조르게 ‘역사상 최고의 스파이’ ‘소련판 제임스 본드’. 일본에서 활동한 소련 간첩 리하르트 조르게(Richard Sorge)에게 붙는 수식어다. ‘가장 빛나는 첩보원’이라는 맥아더 장군의 평가도 있다. 1895년 독일인 석유기사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그의 어린 시절은 독일 애국주의자. 1차대전이 터지자 자원입대해 철십자훈장도 받았다. 변신계기는 부상. 병원에서 만난 간호사로부터 공산주의를 접했다. 의병제대하고 베를린대학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에는 신문기자로 일하며 소련을 제발로찾아가 간첩교육을 받았다. 프랑크푸르트 차이퉁지 상하이특파원으로 부임(1930년)한 그는 중국어와 일본어를 익히고 아시아 농업사를 탐구하며 인맥을 쌓아나갔다. 소련이 도쿄로 보낸 조르게는 독일인 사회에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일본 문화에 대한 심층기사로 일본 권력층의 환심도 얻었다. 독일대사관 무관 출신인 오토 대사는 핵심 군사정보를 스스럼없이 나눴다. 조르게가 보낸 독일군의 소련침공 첩보를 스탈린은 묵살했지만 ‘일본군이 보르네오산 석유 확보에 전력을 다하기 위해 시베리아를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보고는 2차 대전의 흐름을 갈랐다. 소련이 안심하고 시베리아에 배치된 75만 병력을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에 투입하고 유전지대를 지켜낸 것도 조르게 덕분이다. ‘관동군이 남방으로 이동한다’는 보고를 마지막으로 1941년 10월 조르게가 체포됐을때 일본은 발칵 뒤집혔다. 정권이 바뀌었을 정도다. 공작금도 없이 일했던 조르게는 소련에 버림받았다. 소련은 그의 존재를 부인하며 일본의 석방교섭에도 응하지 않았다. 소련이 조르게의 공적을 인정한것은 1964년, 조르게가 교수형에 처해진 1944년 11월7일로부터 20년만이다. 권홍우 <편집위원> /서울경제 2006/11/06 17:21 http://economy.hankooki.com/lpage/opinion/200611/e2006110617212563820.htm
미첼 [Mitchell, Joni, 1943.11.7~ ] 캐나다의 가수 겸 작곡가. 캐나다앨버타주(州) 포트매클레오드(Fort McLeod)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로버타 존 앤더슨(Roberta Joan Anderson)이다. 상업미술을 전공했으며 1964년 토론토의 포크 클럽과 커피하우스에서 연주활동을 시작했다. 포크 가수인 척 미첼(Chuck Mitchell)과 결혼했다가 헤어진 뒤 1967년 뉴욕에서 데뷔 앨범 《송스 투 어 시걸 Songs to a Seagull》을 만들었다. 1969년에 《클라우즈 Clouds》로 최우수 포크 공연 부문 그래미상을 받았으며, 《레이디스 오브 더 캐니언 Ladies of the Canyon》(1970)에 이어 발표한 앨범 《블루 Blue》(1971)가 밀리언 셀러를 기록했다. 1970년대 초부터는 록과 재즈로 실험적인 음악을 하기 시작했으며, 복잡하고 중첩되는 음향의 《더 히싱 오브 서머 론스 The Hissing of Summer Lawns》(1975)를 냈다. 유명한 음악제에 관한 노래인 《우드스톡 Woodstock》은 다른 가수들이 불러 세 번이나 히트하기도 했다. ‘앨범 가수’로서 다른 가수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한때 보브 딜런(Bob Dylan)과 음양의 관계를 이룰 만큼 대등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1997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Rock and Roll Hall of Fame) ‘공연자(performers)’ 부문에 올랐으며, 같은 해 《자니 미첼 : 시와 가사 전집 Joni Mitchell : The Complete Poems and Lyrics》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naver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은 1924년 국공합작(國共合作)이 되자 공산당 중앙위원, 국민당 제1기 후보, 중앙집행위원, 선전부장 대리, 중앙농민운동 강습소장, 정치주보 사장 등을 겸임하였다. 1926년 장제스[蔣介石]의 숙청으로 상하이에 갔다가 1927년 우한[武漢]으로 가서 중국공산당 중앙농민부장이 되었고 국공분열(國共分裂) 뒤 농홍군(農紅軍) 3,000명을 조직하여 징강산[井岡山]에 들어가 근거지로 삼고 주더[朱德]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이듬해 공농홍군(工農紅軍) 정치위원이 되었고, 1930년 홍군 제1방면군 군사위원, 중국 공농혁명위원회 주석에 올랐다. 1931년 장시성[江西省] 루이진[瑞金]의 중화소비에트정부 중앙집행위원회 주석이 되었고, 그 인민위원회 주석으로 뽑혔다. 1934년 10월 루이진에서 산시성[陜西省] 옌안[延安]까지의 1만 2,500km에 이르는 대서천(大西遷)을 시작하였으며, 도중에 구이저우성[貴州省] 쭌이[遵義]회의에서 당 지도권을 장악하였다. 시안사건[西安事件]을 거쳐 국공합작에 성공하자 항일(抗日)민족통일전선을 수립하고, 홍군을 국민혁명 제8로군으로 개편하여 일본군에 대항하였다. 그리고 《지구전론(持久戰論)》(1938) 《신단계론(新段階論)》(1938) 《신민주주의론》(1940)을 발표하였는데, 마지막 것은 중국공산당 강령으로 채택되었다. /naver
무솔리니는 1914년 7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이탈리아의 참전(參戰)에 반대하였으나 몇 달 뒤 갑자기 열렬한 참전론자로 전향, 사회당에서 제명되었다. 1914년 말에는 참전을 위한 파쇼(Fascio:결속의 뜻)를 조직하였고, 대전 중에는 병사로 출전하였으나 사고로 부상당하였다. 대전 후인 1919년 3월 밀라노에서 ‘전투자동맹(Fasci di Combattimento)’을 조직하여 제대군인과 반사회주의적 분자들을 규합하고 과격한 국가주의를 주창하여 사회주의자들을 습격하였다. 당시 이탈리아는 노동과 농민운동이 격심하였고 이에 대하여 폭력으로 대항하는 파쇼 세력도 자본가 ·지주 ·군부의 지원을 얻을 수 있었다. 1921년 5월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그 해 11월 전투자동맹을 파시스트당(Partito Nazionale Fascista)으로 개편하여 당수가 되면서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였다. 1922년 10월 ‘로마 진군’이라는 쿠데타로 정권을 인수, 정치 ·문화 ·경제를 개혁하여 강력한 독재정권의 기반을 굳혀 나가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1935년 에티오피아침략, 1936∼1939년 에스파냐내란 간섭 등으로 제국주의적 팽창정책을 구체화시켰다. 1939년 5월 독일과 군사동맹을 체결하고 나치스 독일 ·일본과 함께 국제파시즘 진영을 구성하였다. /naver
- 'Lenin Adressing 2nd Congress of Soviets', by V. A. Serov 1917 - 러시아 10월혁명 발생 1917년 11월 7일(러시아 구력 10월 25일) 오전 10시, 트로츠키를 위원장으로 하는 볼셰비키 군사혁명위원회가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됐음을 선언했다. 블라드미르 일리치 레닌이 망명지 스위스에서 급거 귀국한지 6개월여 만의 일이었다. 같은 해 일어난 2월혁명 이후 러시아는 지주-부르조아들의 임시정부와 노동자-병사들의 소비에트로 대립하고 있었다. 이때 망명중인 스위스로부터 독일이 제공한 봉인열차편으로 귀국한 레닌은 ‘자본주의의 타도 없이 종전은 불가능하다’는 등 10개항에 걸친 4월 테제(April Theses)를 발표했다. 이것이 곧 볼셰비키의 방침이 되어 ‘임정타도’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임시정부에 대항했다. 레닌의 강력한 요청으로 볼셰비키 당내에서는 봉기의 방침이 결정되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의장 트로츠키의 지도하에 군사혁명위원회가 설치되어 구체적인 계획이 진행됐다. 11월 6일 새벽2시, 임시정부 수상 케렌스키가 볼셰비키 신문 인쇄소를 봉쇄하자 트로츠키는 전 부대에 무장봉기를 명령했다. 노동자를 주축으로 하는 적위대가 전화국, 정부청사 등 주요 거점을 무혈 점거했다. 제2회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열린 오전11시까지는 임시정부의 거점인 동궁(冬宮)을 제외한 도시 전체가 볼셰비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1월 7일 새벽2시, 드디어 동궁이 함락됐다는 소식이 소비에트 대회장에 알려지자 대회장은 환호의 도가니로 변했다. 오전 6시, 해가 떠오르는 가운데 레닌이 기초한 대회선언이 낭독됐다. 하룻밤 사이에 러시아는 공산주의 국가가 된 것이다. 이로써 의회민주주의를 심어보려는 많은 사람들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고, 그들이 타도한 황제보다도 훨씬 무자비한 공산당의 독재가 수립되어 70여년이 지나 소련이 붕괴될 때까지 지속됐다. /조선
[오늘 속으로] 10월혁명 1917년 11월7일(러시아력 10월 25일) 아침에 눈을 뜬 상트페테르스부르크시민들은 자신들이 다른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 sec&sid1=104&oid=038&aid=0000032367
카뮈 [Camus, Albert, 1913.11.7~1960.1.4] 1913년 11월 7일 알제리의 몽도비에서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알자스 태생의 궁핍한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스페인계 후손이었다. 공립국민학교에서 만난 교사 루이 제르맹의 도움으로 1923년 알제 리세(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들어갔으며, 알제대학 재학 중에는 철학 교수 장 그르니에를 만나 깊은 영향을 받았다. 1930년대에 알제리의 젊은 좌파 지식인들 사이에서 중요한 인물로 주목받았으며 1934~35년 잠깐 알제리 공산당에 입당하기도 했다. 레지스탕스 기관지였던 일간지 <콩바 Combat>의 편집장으로서 큰 영향력을 누렸다. 1942년에 발표한 첫번째 단편소설 <이방인 L'Etranger>(1942)은 아랍인을 죽인 한 '아웃사이더'의 초상을 통해 20세기의 인간 소외를 탐구한 뛰어난 작품이다. 그밖에도 <페스트 La Peste>(1947)·<전락 La Chute>(1956) 등의 소설과 평론 <시지프의 신화 Le Mythe de Sisyphe>·<반항적 인간 L'Homme revolte>(1951) 등이 유명하다. 1957년 44세의 젊은 나이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며, 그후 3년이 채 안 되어서 교통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브리태니커
1913 - 영국의 박물학자, 진화론자 앨프리드 월리스(Wallace, Alfred) 사망 월리스 [Wallace, Alfred Russel, 1823.1.8~1913.11.7] [역사 속의 인물] 진화론 원저작권자 앨프리드 월리스 인간의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꾼 다윈의 ‘종의 기원’은 1859년 출간됐다. 다윈은 당초 2, 3년 더 생각을 가다듬은 뒤 책을 낼 계획이었다. 창조론을 뒤엎는 혁명적인 이론을 제기하는데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그가 계획을 앞당긴 것은 젊은 박물학자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1823~ 1913)가 1858년에 편지와 함께 보내온 ‘변종이 조상종으로부터 무한히 벗어나려는 경향에 관해’라는 논문 때문이었다. 월리스는 편지에서 이 논문의 출판이 가능한지를 물었다. 다윈은 그 내용이 자신이 20년에 걸쳐 구축한 생각과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다윈은 이 편지를 받은 지 13일 만에 문제의 논문과 자신의 미발표 원고를 린네학회에 발표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논문은 학계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했다. 이는 다윈에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조바심이 난 다윈은 자신의 이론을 빨리 출판해야겠다고 결심하고 필사적으로 집필에 매달려 13개월 만에 ‘종의 기원’을 세상에 내놓았다. 만약 월리스가 다윈에게 자신의 이론을 공개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먼저 출판했다면 아마도 ‘종의 기원’은 빛을 보지도, ‘다위니즘’이란 말도 생겨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진화론의 창시자가 될 수도 있었던 불운한 과학자 월리스, 1913년 오늘 사망했다. 정경훈 논설위원 /매일신문 2011년 11월 07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63552&yy=2011
1910 - 세계 첫 항공화물 운송 [책갈피 속의 오늘]1910년 세계 첫 항공화물 운송 1910년 11월 7일 오전 10시 45분. 조종사는 스물세 살의 필립 파맬리. 추위를 피하기 위해 두꺼운 코트에 바지를 몇 겹씩 껴입고 고글과 목도리, 모직 모자까지 푹 눌러 쓴 그는 영락없는 ‘미라’의 모습이었다.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20071107/8508832/1 1909 - 미국의 민권운동가 루비 헐리(Hurley, Ruby) 출생 헐리 [Hurley, Ruby, 1909.11.7~1980.8.9] 20th Century Civil Rights in the USA Heroines Ruby Hurley "Negroes and whites could not play checkers together." Biography Ruby Hurley was born November 7, 1909 in Virginia. She was born in the era of Jim Crow. This was the time just after the Civil War finished and colored people were free from slavery but they had no rights. In Ruby's childhood she was discriminated a lot and treated different from whites. The NAACP was created in the year that Ruby was born. She was the first professional civil rights worker. In 1943, Hurley was appointed to the Youth Secretary of the NAACP. NAACP stands for 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 She helped with many cases such as getting a colored person into an all white University. She also helped set up campaigns to support the rights of colored people. In 1951, she set up an office in Atlanta she worked in Atlanta but later on retired from her job shortly after. Ruby Hurley died August 9, 1980.
- '내일을 향해 쏴라'(1969)
1908 - '내일을 향해 쏴라', 부치 캐시디 사망 캐시디 [Cassidy, Butch, 1866.4.13~1908.11.6/7] [역사 속의 인물] ‘내일을 향해 쏴라’ 부치 캐시디 ‘내일을 향해 쏴라’(1969년)는 서부영화의 걸작이다. 원제는 ‘부치 캐시디 & 더 선댄스 키드’였고 폴 뉴먼이 부치 역을, 로버트 레드포드가 선댄스 역을 맡았다. 영화에서 갱 두사람은 낭만적이고 인간적으로 나오지만 실제로 그랬을까? 부치 캐시디(1867~1908)는 유타주 작은 목장주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4세 때 옷가게에 침입, 청바지와 파이 몇조각을 훔친 뒤 말 도둑질에 나섰다. 좀도둑이 무장강도로 변신한 것은 감옥에 갔다온 직후부터. 무법자들과 ‘Wild Bunch’(무법자패거리)를 조직, 서부 일대를 돌며 은행, 열차, 상점을 휩쓸었다. 보안관과 철도회사에 쫓기던 동료들은 체포, 사살되고 부치와 선댄스, 애인 에타는 1901년 뉴욕에서 남미로 도피했다. 아르헨티나에서 큰 목장을 샀지만 제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강도질을 일삼다 볼리비아에서 군경에 포위됐다. 영화 마지막 장면처럼 둘이 군경을 향해 뛰쳐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살로 결말을 맺었다. 둘 중 한 명이 부상당한 다른 한 명을 쏘고 자신도 쐈다. 1908년 오늘이었다. 영화는 낭만적이지만 현실은 비정하다. 올해 존 트라볼타와 톰 크루즈 주연으로 리메이크 작품이 만들어진다니 흥미롭다. 박병선 논설위원 /매일신문 2009년 11월 07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8238&yy=2009
1903 - 오스트리아의 동물학자 콘라트 로렌츠(Lorenz, Konrad) 출생 로렌츠 [Lorenz, Konrad, 1903.11.7~1989.2.27] 오스트리아의 동물학자, 동물심리학자. 1903년 11월 7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은 정형외과 의사였으며 빈 교외 알덴베르크에서 넓은 숲이 딸린 대저택에서 자랐다. 그의 저택 숲에는 많은 새들이 날아와 동물들과 가까이 하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의 부모는 콘라드가 동물을 키우고 보살필 수 있도록 배려했다.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에 유학하였다가 다시 오스트리아 빈으로 돌아와 빈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하여 1928년에 졸업하였다. 비교해부학을 전공하여 1933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1940년 쾨니히스베르크대학 심리학 교수를 역임했고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제2차대전 중에는 독일군으로 참전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한때 포로생활을 했으며 뮌스터대학교 등을 거쳐 바이에른의 막스플랑크연구소 설립에 참여하였고 이 연구소 행동생리학 부문의 부장을 지냈다.
1888 - 인도의 물리학자 찬드라세카라 라만(Raman, Chandrasekhara) 출생 라만 [Raman, Chandrasekhara Venkata, 1888.11.7~1970.11.21] 인도 남부 마드라스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수학·물리학 교수였다. 1902년 마드라스의 프레지덴시대학에 입학하여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광학 및 음향학에 관한 초기의 연구는 학생시절에 이루어졌다. 1907년 재무부 회계국(會計局)에 들어가 관리로 근무하면서, 과학진흥협회의 연구실에서 연구를 계속하였다. 이 연구가 인정되어 1917년 캘커타대학교 물리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라만이 개척한 연구분야는 진동·음향·빛의 회절(回折), 콜로이드에 의한 빛의 분산, X선 회절, 결정의 자성(磁性)·유전체(誘電體)·초음파(超音波) 등 다방면에 걸쳐 있었다. 이 중 1922년의 논문 〈빛의 분자에 의한 회절〉로 시작되는 일련의 연구는 ‘라만효과’의 발견(1928)으로 이어졌고, 양자론(量子論)의 실험적 증명으로 인정받아 1930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1933년 방갈로르의 인도과학연구소 소장, 1948년 라만연구소 소장이 되어 많은 연구자들을 양성하였다. /naver
- Leon Trotsky as a Child 1879 - 러시아의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Trotskii, Leon) 출생 트로츠키 [Trotskii, Leon, 1879.11.7~1940.8.20]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 출생 비극적인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가 1879년 11월 7일 남우크라이나의 부유한 유태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트로츠키는 오데사대학에 입학했으나 혁명운동에 가담하면서부터 1940년 8월 멕시코에서 피살될 때까지 투옥과 탈출 그리고 망명을 반복했다. 본명이 래프 다비도비치 브론슈테인인 그가 가명인 트로츠키를 사용한 것은 1902년 시베리아 탈출을 목적으로 한 위조여권을 만들면서부터였다. 독일어 `트로츠`는 반항, 완고, 고집, 과감, 기민 등을 뜻한다. 실제로 트로츠키의 일생도 그의 이름에 걸맞는 생활이었다. 집안에서는 아버지와 불화, 학교에서는 선동가, 독재치하에서는 혁명가,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인민의 적인 반혁명분자, 자본주의로부터는 위험한 혁명수출업자로 낙인찍힌 채 지구상의 어느 정권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하며 유랑생활만을 거듭한 것이 그의 일생이었다. 트로츠키는 1인자가 되기에는 덕이 모자랐고, 2인자로 남기에는 너무나 열정적이었던 혁명가였다. 1898년 체포돼 시베리아로 유배되었으나 1902년 탈주에 성공, 영국으로 망명했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의 혼란속에서 다시 러시아로 돌아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소비에트 의장이 되었으나 1906년 다시 체포됐다. 1907년 다시 탈주, 국외에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통일을 도모했으나 실패하고 1914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1917년 2월 혁명후 귀국, 외무인민위원, 군사인민위원, 정치국원을 거쳤으나 레닌 사후 스탈린과 본격적인 정치투쟁을 전개했다. 스탈린과는 1905년부터 영구혁명론과 일국사회주의로 대립했다. 러시아와 같은 후진국에서 혁명이 성공하려면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불가피하며, 또 그것을 유지하는데는 세계혁명, 최소한 유럽 각국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 `영구혁명론`이라면, 러시아만으로도 사회주의 건설이 가능하다고 본 것은 `일국사회주의론`이다. 두 사람의 노선투쟁이 권력투쟁으로 확대되면서 전권을 쥐게 된 스탈린은 1929년 트로츠키를 국외로 추방하는데 성공했다. 터키 프랑스 노르웨이를 거쳐 1937년 1월 트로츠키가 마지막 정치적 피난지로 정착한 곳은 멕시코였다. 그러나 KGB의 집요한 추적은 그를 놓아주지 않아, 1940년 8월 20일 KGB가 보낸 한 밀사에 의해 멕시코 코요아칸 자택에서 피살됐다. /조선
1878 - 오스트리아 출신의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Meitner, Lise) 출생 마이트너 [Meitner, Lise, 1878.11.7~1968.10.27] 빈 출생. 빈대학의 첫 여학생으로 물리학을 전공했고, O.한과 협력하여 30년 동안 방사능(放射能) 연구를 했다. β선의 스펙트럼, 방사성되튐[放射性反跳] 등에 대해 연구했으며, 1918년 프로토악티늄을 발견했다. 그 후 베를린대학에 초빙되어 1926년 교수가 되었다. 1934년 페르미가 중성자(中性子)에 의한 우라늄의 변환(變換)을 발표하자 한과 함께 초(超)우라늄원소 탐색에 착수했으나, 나치스의 압박을 받고 1938년 베를린을 떠나 스웨덴에 망명하여 후에 귀화했다. 1938년 말 한과 슈트라스만이 중성자로 충격을 준 우라늄에서 바륨을 얻자 이를 핵분열(核分裂)이라 명명했으며, 그 구조를 설명하여 핵분열 연구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스톡홀름공업대학 교수, 마이트너연구소장을 역임했다. /naver
퀴리 [Curie, Marie, 1867.11.7~1934.7.4] [어제의 오늘]1867년 마리 퀴리 출생 ㆍ바르샤바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암 치료에 사용되는 방사선의 정체는 19세기 말에 와서야 밝혀졌다. 1895년 뢴트겐이 X선을, 이듬해 앙리 베크렐이 우라늄 방사선을 발견해내자 물리학계는 떠들썩해진다. 이때 프랑스 소르본대학의 작은 연구실에서 한 젊은 부부가 역청우라늄광(우라늄을 함유한 광석 중 하나) 연구를 시작하고, 1898년 폴로늄과 라듐이라는 방사성원소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1867년 러시아 지배하의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난 마리아 스클로도프스카는 다섯 남매 중 막내였다. 가난했던 그녀는 여성도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프랑스로 가기 위해 몇 해 동안 가정교사로 일하며 학비를 모았다. 1891년 파리의 소르본대에 진학한 그녀는 물리학과 수학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금속의 자기 특성을 연구하던 마리는 물리학자 피에르 퀴리를 만나 1년 만에 결혼하고, 함께 발견한 첫 원소의 이름을 조국 폴란드에서 따온다. 임소정기자 sowhat@kyunghyang.com /경향신문 2009-11-06 17:42:3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11061742355 1848 - 재커리 테일러 미국 대통령 당선 [역사 속의 인물] 대통령 임기 중 사망한 재커리 테일러 윌리엄 헨리 해리슨, 에이브러햄 링컨, 제임스 A. 가필드, 윌리엄 매킨리, 워런 하딩, 프랭클린 루스벨트, 존 F. 케네디의 공통점은? 이들은 미국의 대통령들이었으며, 10의 자리가 짝수이면서 0으로 끝나는 해, 즉 1840년, 1860년, 1880년, 1900년, 1920년, 1940년, 1960년에 각각 당선되었다. 그리고 모두 임기 중에 사망했다. 우연이었을까, 저주의 희생자들이었을까. 1980년에 당선된 로널드 레이건과 2000년에 당선된 조지 W. 부시도 ‘죽을 뻔’했다. 부시는 과자를 먹다 목에 걸려 의식을 잃은 적이 있고, 레이건은 암살자의 총에 맞았다. 이를 두고 ‘테쿰세의 저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디언 추장이었던 테쿰세가 1813년 미국 정부의 인디언 박해에 저항하다 죽으면서 이런 저주를 걸어놓았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임기 중 사망한 미국 대통령이 있는데, 바로 재커리 테일러이다. 그는 0으로 끝나는 해가 아닌 1848년 오늘 당선되었기에 테쿰세의 저주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도 군인 시절 인디언을 토벌하고 탄압하는 데 많은 공(?)을 세운 사람이었다. 홍헌득 특집부장 /매일신문 2014.11.07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 56704&yy=2014#axzz3IOWYzKPh
로이터 [Reuter, Fritz, 1810.11.7~1874.7.12] 메클렌부르크슈베른주(州) 슈타벤하겐 출생. 북부 독일의 방언인 저지(低地) 독일어로 창작을 시작한 독일 향토문학의 선구자. 슈타벤하겐 시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예나대학 재학 중 학생결사에 가맹하고 정치운동에 참여한 죄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30년으로 감형되어 감옥을 전전하다가 8년 만에 특사로 석방되었다. 집안에서도 괄시받아 농장관리 ·가정교사 등으로 근 10년을 유랑하였다. 음주벽을 극복하면서 목사의 딸인 아내의 격려로 문필생활을 시작, 점차 문재(文才)를 발휘하였다. 그의 작품은 당시 19개 국어로 번역되었고 19세기 말에는 2,000만을 넘는 발행부수를 올렸다. 이것은 역경을 헤치고 일어선 그의 낙천주의가 독일 사람들을 불행에서 인생의 성공으로 이끌어 주었기 때문이다. 생활고로 미국으로 건너가, 성공을 이룬 수백만의 독일계 미국인들이 로이터의 애독자들이었다. 대표작으로는 《프랑스 통치시대 Ut de Franzosentid》(1859) 《나의 감옥시대 Ut mine Festungstid》(1862) 《나의 농민시대 Ut mine Stromtid》(1862∼1864) 등이 있다. /naver
- 'Clio' - 'Virgin with Grapes' 1610 - 프랑스의 화가 피에르 미냐르(Mignard, Pierre) 출생 미냐르 [Mignard, Pierre, 1610.11.7~1695.5.13] 1624년 브르쥐의 J.부셰, 1627년 파리의 S.부에에게 사사하였다. 1630년부터 이탈리아에 머물렀다가, 1657년 파리로 돌아와 궁정의 초상화가로 활약하였다. 1663년 발드 그라스성당의 천장화로 성공하고 이 밖에 신화화(神話畵)나 우의화(寓意畵)도 그렸으나 왕립아카데미 회장인 C.르블랑과 대립하여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것을 사퇴하였다. 그러다가 1690년 르블랑이 죽은 후 아카데미 회장과 왕실 소속 수석화가가 되었다. 대표작에 《멘트농 후작의 초상》(루브르미술관 소장)이 있다. /naver
994 - 스페인의 이슬람 문학가, 역사가, 법학자, 신학자 이븐 하즘(Ibn Hazm) 출생 스페인의 이슬람 문학가·역사가·법학자·신학자. 문학활동, 학식의 깊이, 그리고 아랍어에 정통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슬람의 자히리(Ẓāhirῑ:원문을 중시하는 사람) 법학파의 대표적 인물들 중 한 사람으로 법학·논리학·역사학·윤리학·비교종교론·신학에 걸친 약 400편의 작품과 사랑학에 관한 〈비둘기의 고리 The Ring of the Dove〉를 저술했다. 시리아 우마이야 왕조의 첫번째 통치자 무아위야의 동생 야지드의 한 가신(페르시아 출신)의 혈통임을 자처하는 저명한 가문 태생이다. 이베리아(스페인)인 이슬람교도 가문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이 아랍인임을 주장할 족보를 가지고 있으므로 학자들은 이븐 하즘이 만타리샴(세비야 서쪽에 있음)에서 이베리아의 그리스도교 배경을 가진 집안 출신이라고 시사하는 증거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그의 증조부 하즘 때 이슬람교로 개종한 듯하며 조부인 사이드 때 칼리프령의 수도 코르도바로 이주했다. 신앙이 깊은 학자였던 아버지 아흐마드는 칼리프 히샴 2세를 대신하여 유능하게 통치했던 부자지간인 알 만수르와 알 무자파르 밑에서 고위 관직을 갖고 있었다. 열성적이고 관찰력이 예리한 학생이었던 이븐 하즘은 지배계층 사회에서 살았기 때문에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하렘이라는 환경이 가져다준 여러 가지 경험들은 그에게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남겼다. 1008년 알 무자파르가 죽고 2세기 반 이상 안정을 구가해온 스페인 우마이야 왕조가 붕괴되면서 이븐 하즘을 둘러싼 주위 여건이 급격히 변했다. 유혈 내란이 발발하여 1031년까지 계속되었으며, 이때 칼리프제가 폐지되고 중앙집권 정치체제가 다수의 군소국가로 대체되었다. 1012년 아버지 아흐마드가 죽고 가문이 몰락했지만, 이븐 하즘은 대담하게 끊임없이 우마이야 왕조의 후예들을 다시 칼리프로 추대하기 위해 지원했으며 수시로 투옥되었다. 1031년까지 그는 작품활동을 통해 자신의 신념과 행동가적인 성향을 보여주며 매우 논쟁을 좋아하는 인물이 되었다. 마요르카 섬에서 단기간 체류한 것을 제외하고 생애의 대부분을 만타리샴에 있는 가문 소유의 커다란 저택에서 보냈다. 그의 아들에 의하면 그는 약 400편의 작품을 창작하면서 8만 쪽의 원고를 썼다고 한다. 이들 중 현존하는 작품 수는 40편도 안 된다. /브리태니커 ------------------------------------------------------
-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