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거미」해설 / 김미현
거미
김수영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1954.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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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는 거미줄을 놓아 먹이를 잡아먹는다. 그것도 모자라 암거미는 황홀한 성교 후에 자신의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숫거미를 잡아먹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거미의 잔인한 이미지와는 달리 염낭거미는 자신의 몸을 자식들에게 먹여 새끼들을 기른단다. 그리고 새끼들은 그토록 희생적인 어미의 살을 파먹으며 성장한다.
이런 거미의 이중성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한 편의 시와 한 편의 영화가 있다. 바로 김수영의 시 ‘거미’와 마뉴엘 푸익의 소설을 영화화한 ‘거미여인의 키스’이다. 이 두 작품은 가학과 피학이 결합된 사랑과 절망을 다룬다는 데에 공통점이 있다. 자해만이 구원이 된다면 그 처절함 때문에 피학이 되고, 그 폭력성 때문에 가학이 된다.
김수영의 시 ‘거미’가 ‘바라니까 서럽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1연에서 끝났다면 평범한 시에 머물렀을 것이다. 이 시의 비의는 2연에서 그런 설움에 빠진 자신을 혐오하는 데에 있다. 절망할 줄 알면서도 자꾸 희망을 갖고, 그래서 다시 절망을 하게 되는 악순환이 싫은 것이다. 진정한 나르시시스트인 김수영은 이처럼 절망을 반성하지 않는 자신을 반성하는 결벽성을 이 시에서 보여준다.
당연하게도 희망을 희망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절망이 필요하다. 절망은 희망 이전이나 이후에야 의미를 갖게 되니까. 그래서 희망과 절망은 암수 한 몸인 생물이다. 하지만 김수영은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런 관계가 3연에서처럼 ‘너무나 자주’ 반복되는 것을 문제 삼는다. 거미를 죽이는 것은 절망 자체가 아니라 절망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포기하지 못하는 ‘희망’이라는 괴물 때문이다. 거미는 절망으로 자신의 몸을 태울 만큼 절망적인 동물이지만 그 몸으로 자식을 살릴 만큼 희망적인 동물이다. 인간처럼.김수영처럼.이 모순이 이 시의 생명력이다.
김미현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