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의 출근길
조 흥 제
코로나로 막혔던 일본 여행길이 풀렸다는 보도다. 몇 년 전 갔을 때를 떠 올려 보았다.
2018년 4월 개인적으로 일본 동경과 후지산에 3박4일 동안 다녀왔다. 9시 비행기로 인천 공항을 출발했다. 구름이 잔뜩 끼어 창측에 앉아서 밖을 내다보려던 계획이 무산된 것이 아쉬웠다. 구름 위를 날아 2 시간 만에 도쿄 나리타 공항에서 내렸다. 버스 타고 도쿄로 와서 아들의 안내를 받아 신주꾸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그 애는 스마트폰만 들면 세계 어디든지 찾아 가는 재주를 가졌다.
인근에 있는 도쿄도 청사에 갔다. 제1청사와 제2 청사가 있다. 언덕에 있는 40여 층의 같은 크기의 건물이다. 제1청사의 엘리베이터 앞에 서자 중년의 안내원이 허리를 90도 굽히고 인사를 한다. 내려 준 곳은 가판대가 많은 실내 전망대다. 서양 관광객도 있지만 중동지방 관광객이 더 많았다. 산이 없는 도쿄는 끝이 안 보인다. 근방에 60여 층 되는 건물이 많았다.
서울과 다른 것은 도심에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많고, 아파트 단지가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차는 운전석이 우측에 있는 것이 우리와 달랐고, 외국 관광객들이 많고, 지하철역무원들도 영어를 하는 것이었다. 한국보다 관광산업이 훨씬 더 활성화 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이튿날 지하철을 몇 번 갈아타고 금룡산이라는 일본 왕실의 신전(神殿)으로 갔다. 입구에 淺草神社御祭禮 (천초신사어제례)라는 글씨가 써져 있다. 한참 들어가니 향불을 피운 큰 향로가 있다. 그 뒤에 신전이 있는데 탁자 위에 손잡이가 달린 주전자 같은 게 놓여있고 좌우에 등불 같은 것이 있는데 일본인들은 거기에 합장을 했다. 신으로 모신 것이 뭔지 모르겠다. 그 근방에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 많고 탑과 연못, 조형물도 많다. 일본 전통의상을 입은 사람이 많은데 그들은 외국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경복궁에도 한복을 입은 사람은 외국인이라고 했는데 일본도 마찬가지다. 전통의상을 입고 있는 사람과 사진을 찍었는데 말레이시아 사람이라고 했다.
인근에 스카이트리라는 높은 전망대가 있는데 634m로 관악산(632m)보다 높다. 그 옆 강으로 배를 타러 갔다. 하류로 내려 갈수록 강폭은 넓어지고 미국의 금문교를 닮은 큰 다리가 있다. 내리는 곳에 미국 뉴욕항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닮은 동상이 있다. 일본인들이 2차 대전에서 패하고 얼마나 미국을 닮고 싶었는가를 알 수 있었다. 건너다보이는 아래 쪽 배가 있는 곳이 도쿄항이란다. 안으로 들어앉아 있어 태평양에서 밀려오는 큰 파도에 직접 영향을 받지 않는 천혜의 항구다. 우리가 내린 인근이 공원이다. 곤색교복을 입은 일본 여학생들 상의 뒤 목덜미에는 4각지게 만들고 거기에 흰 줄이 여러 개 쳐진 것이 보였다. 우리 중학생들도 해방되기 전엔 그런 옷을 입었는데 해방 되고 없어졌다. 일본 여학생들은 아직까지 그런 교복을 입고 있어 반가웠다. 사진으로 남기고자 여학생에게 사진 찍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 여학생은 겁먹은 표정으로 두 손을 저으면서 거부의사를 표했고 일행 여학생들은 옆으로 비껴 갔다. 그녀들은 낯선 사람들에게 사진 찍히지 말라고 배운 모양이다. 어쩌나. 진심을 털어 놓을 수 없으니.
3일째는 후지산 가는 날이어서 가슴이 들떴다. 눈으로 뒤덮인 3776m의 큰 산이어서 오래 전부터 가고 싶었던 산이어서다. 각국 관광객들을 태운 버스에 영어 통역사 할머니가 안내해 주었다. 도쿄에서 300㎞ 거리라고 한다. 후지산 근처에 내린 곳은 조그만 도랑이 있고 양쪽에 벚꽃이 활짝 핀 도원경(桃源境)이다. 집들은 지붕이 나무판자로 되어 있는 것이 특이했다. 일본 장수가 군사들을 조련시키던 은둔의 장소였다. 후지산 가는 길은 64년 도쿄 올림픽 때 만든 2차선 도로다. 2020m의 휴게소까지 차가 갔다. 그전에는 2400m에 산장이 있어 거기까지 차가 갔는데 공사 중이어서 못간다고 하여 서운했다. 후지산은 여기까지가 숲이고 그 위 1700m는 바위다. 거기서 보이는 인근의 산들은 한국산들과 달랐다. 한국의 산은 능선에 봉우리가 많고 긴데 비해 일본의 산들은 불쑥 솟아난 이등변 삼각형이다. 후지산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래 전에 후지산에 등산 갔던 사람의 말을 들었는데 산장에서 밤에 전깃불이 달린 지팡이를 주어 그걸 가지고 올라 갔는데 올라오는 사람들이 들고 있는 불빛이 길게 늘어서 움직여 장관이었다고 했다.
점심은 후지산 근방 산장 같은 식당에서 먹었는데 밥그릇이 나무로 만든 3층탑이었다. 거기에 뚜껑이 있어 열었더니 밥그릇과 여러 가지 반찬통이 분리되었다. 우리의 찬합 같은 전통적인 이동식 밥그릇인가 보다. 그날 저녁은 도쿄의 한국인 식당에서 먹었다. 한인촌이라고 한다. 40대의 여자 사장님이 내가 얘기하면 ‘그러셨구나’를 연발하였다. 한떼의 청년들이 술을 마셔 한국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여 반가웠다. 외국에 나가서 동포들을 만나면 반갑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거기서 나온 것 같다. 그 식당들이 코로나 홍역에 잘 견뎌냈으면 좋으련만.
숙소로 오다가 슈퍼에 들렀다. 한국과 다른 것은 상품마다 붉은 글씨로 크게 쓴 가격표가 달려 있고, 약도 파는 것이었다. 우리는 무슨 기계를 손에 들고 상품에 대면 값이 나오는데 일본에는 상품에 값을 붙였다. 우리는 약국에 가야만 약을 사는데 일본에서는 슈퍼에서도 파니 편리했다. 간단한 약은 슈퍼에서 팔자고 우리 정부에서 제안했는데 약사 모임에서 반대하여 실행되지 못한 것으로 안다.
마지막 날 아침 출근 시간에 큰 길로 나갔다. 도쿄 도심의 출근길은 어떤지가 궁금하였다. 자전거 출근자가 많이 눈에 띄었다. 인도로 자전거와 보행자가 함께 다니는 것이 우리와 달랐다. 도심에서 자전거를 타고 출근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들의 집이 가까운가? 아니면 지하철을 타고 와서 직장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는가 궁금증이 일었지만 확인할 길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