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운암~서운암] 구간
탐방로 도중의 3거리에 있는
이정표
서운암 입구
서운암 입구에 있는
삼천불전
[서운암(瑞雲庵)은 현 통도사 방장 성파(性坡) 스님이 주석하는 절이다. 서운암은 백련암 옥련암을 창건한 2년 뒤인 고려 충목왕 2년(1346)에 충현대사(沖絢大師)가 창건했다. 옥련암 옆으로 난 산길을 2분 가량 가면 도자기로 불상을 조성하여 모신 서운암의 삼천불전이 나온다. 아래로 내려가면 야생화가 지천이다. 서운암의 4월은 금낭화, 5월은 이팝나무'라는 말이 있다. '꽃 암자'라는 명칭도 있고 '야생화의 보고'라는 수식도 있으며, '서운암 꽃길'이라는 이름도 있다. 이처럼 많은 호칭은 2000년부터 성파스님이 암자 주위 야산에 100여 종의 꽃나무와 들꽃 1만 포기를 심기 시작하면서부터라 한다. 이후 봄부터 가을까지 때에 맞춰 복사꽃, 할미꽃, 벌개미취, 참나리, 붓꽃, 은방울꽃, 비비추, 애기똥풀, 산철쭉, 꽃창포, 하늘매발톱, 황매화, 불두화 등 각양각색의 꽃들이 피고 진다. 금낭화가 피어나는 4월에는 야생화 축제를 열기도 한다.
서운암의 장경각(藏經閣)에는 16만여 개의 도자 대장경이 소장되어 있다. 대장경을 도자기로 굽는 일은 1991년부터 시작되었다. 성파스님의 제자 5명, 기술자 20여 명과 함께 밤낮 없이 경을 새기고 뜨겁게 구웠다. 숱한 실패를 거듭했다. 그리고 2013년 장경각 불사를 마무리했다. 도자판의 크기는 가로 52㎝, 세로 25㎝, 정확한 경판의 수는 16만3천장이라고 한다.
장경각 앞마당에는 두 개의 커다란 수조가 있다. 왼쪽 수조에는 국보 285호인 반구대 암각화가 잠겨 있고, 오른쪽 수조에는 국보 147호인 울산 천전리 각석이 잠겨 있다. 성파 스님의 '나전옻칠 반구대 암각화' 그림은 옻칠과 나전칠기 공법을 통해 생명력을 불어넣은 더욱 생생하고 율동감 있는 작품으로 감동을 주고 있다. 잊힐 수 있는 귀중한 인류문화유산을 되돌아보게 되고 특히, 수중전시라는 독특한 방법을 통하여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켰다. 반구대 암각화의 실물과 같은 크기로 7.8 x 4.4(m)로 만들어졌고, 제작하는 데 3년이 걸렸다고 한다.
서운암은 '된장 암자'로 불리기도 한다. 장이 익어가는 독이 무려 5천 여 개다. 이곳에서는 1천300년 동안 스님들이 절 식구들을 위해 장을 담그던 방법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한국불교조계종의 제15대 종정(宗正)인 성파(性坡)스님이 전국을 돌며 장독을 모으고 옛 방식대로 장을 담그는 일을 주도했다. '신분제가 있었던 시절에도 왕족이나 양반, 상놈 할 것 없이 똑같이 사용했던 게 장독이니 우리에게 이만큼 소중한 문화유산이 어디 있겠느냐'라는 것이 스님의 생각이다. 그렇게 독을 모으고 장을 담근 지 10년이 넘었고 지금 서운암의 재래식 된장은 양산시의 특산품으로 지정되어 있다.]
불상을 도자기로 제작한
삼천불전
서운암 하면 성파스님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통도사 주지를 지내고 현재는 통도사 방장으로 있는 스님은 이곳에서 1985년 부터 5년 동안 삼천불상을 흙으로 구워내 도자삼천불(陶磁三千佛)을 모셨다.
삼천불전 옆의
전각
삼천불전 옆의 전각 뒤에 있는
건물
서운암의 명물인
5천여 개의 장독
[서운암의 약된장 항아리는 무려 5,000여개가 넘는다고 한다.
국내산 콩으로 10여 가지의 한약재를 써서 만든 약된장은 담백하고 깔끔한 맛이 특징이라고 한다.]
[주말&여행] 경남 양산 통도사 서운암, 동자승 얼굴처럼 장독대 반지르르…저마다 된장 품고 "나무아미타불"
영남일보 발행일 2022-05-13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고려 충목왕때 충현대사가 창건…삼천불상 모신 거대한 2층 전각 눈길
성파스님 전국 돌며 장독 모으고 1300년 전 비법 그대로 담근 된장 유명
4월엔 야생화 축제 열리고 5월엔 이팝꽃 온통 흐드러져 '꽃암자' 별명도
매끄럽게 굴곡진 길이 골짜기의 가장자리를 타고 오르면, 정수리까지 청명해지는 솔숲이 커튼처럼 차르르 열린다. 저 아래 골 깊은 곳에는 계류가 흐르고 그 양 옆으로 난 밝은 길에는 색색의 연등이 알알이 맑다. 어떤 이는 계곡의 무지개다리에 우뚝 올라섰다. 또 어떤 이는 통도사 일주문 속으로 사라진다. 이제 보이는 것은 완두콩 빛깔의 숲에 가려져 이따금 반짝거리는 계류와, 길과, 담장이나 전각의 작은 조각들이다. 보타암을 지나고 덩치가 꽤나 큰 선원과 율원을 지난다. 그리고 텅 비어 있으나 여전히 경내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산길을 잠시 달리며 서운암(瑞雲庵) 이정표를 찾아 두리번댄다.
◆ '된장암자'로 불리는 서운암
그늘진 샛길로 들어선다. 길 한쪽은 공사 가림막이 긴 벽으로 높다. 수장고를 짓는 중이라 한다. 크릉 크릉 땅을 퍼 올리는 소리가 점점 멀어지는가 싶을 즈음 환한 양지가 열리면서 반드러운 장독들의 도열과 맞닥뜨린다. 그들의 머리 위로 이팝나무 흰 꽃들이 아득히 흐드러졌다. 정신을 차리면 길 가에 작은 연못이 보이고 그 맞은편에 마른 먼지 날리는 작은 주차장과 '서운암 된장'을 판다는 글이 적힌 가게가 있다. 서운암은 '된장암자'로 불린다. 장이 익어가는 독이 무려 5천 여 개다. 이곳에서는 1천300년 동안 스님들이 절 식구들을 위해 장을 담그던 방법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장독대와 연못 사이로 몇 걸음 들어서면 서운암 경역이다. 삼천불상을 모신 커다란 2층 전각이 있고 그 뒤로 선원과 요사 공간이 사립문을 앞에 두고 근엄하리만치 정갈하게 자리한다. "오늘은 열려 있네" 사람들은 열린 사립문 앞에서 기웃대며 활짝 피어난 철쭉꽃을 들여다 볼 뿐 선뜻 마당으로 들어서지 못한다.
서운암은 고려 충목왕 2년인 1346년에 충현대사가 창건했고 조선 철종 10년인 1859년에 남봉대사가 중건했다고 전한다. 옛날에는 초막인 인법당이 전부였는데 근래에 성파(性坡)스님이 현재의 모습으로 일구었다고 한다. 스님은 지난해까지 통도사의 방장(方丈)을 지냈고 올해 한국불교조계종의 제15대 종정(宗正)에 추대됐다.
전국을 돌며 장독을 모으고 옛 방식대로 장을 담그기 시작한 것이 성파스님이다. '신분제가 있었던 시절에도 왕족이나 양반, 상놈 할 것 없이 똑같이 사용했던 게 장독이니 우리에게 이만큼 소중한 문화유산이 어디 있겠느냐'라는 것이 스님의 생각이다. 그렇게 독을 모으고 장을 담근 지 10년이 넘었고 지금 서운암의 재래식 된장은 양산시의 특산품으로 지정되어 있다. 성파 스님은 장을 담그는 일 외에도 도자기, 민화, 글씨, 옻 공예 등 많은 예술 작업을 하고 있다. 전통 천연염색인 쪽(葉) 염색기법도 이곳에서 재현된다. 5·6월이면 서운암 일대는 온통 쪽물들인 천 조각들로 아른거린다.
◆ 서운암 꽃길
장독대 오른편으로 난 오솔길로 들어선다. 늙은 모과나무 아래에 금낭화가 낭창거린다. '서운암의 4월은 금낭화, 5월은 이팝나무'라는 말이 있다. '꽃 암자'라는 명칭도 있고 '야생화의 보고'라는 수식도 있고 '서운암 꽃길'이라는 이름도 있다. 이처럼 많은 호칭은 2000년부터 성파스님이 암자 주위 야산에 100여 종의 꽃나무와 들꽃 1만 포기를 심기 시작하면서부터라 한다. 이후 봄부터 가을까지 때에 맞춰 복사꽃, 할미꽃, 벌개미취, 참나리, 붓꽃, 은방울꽃, 비비추, 애기똥풀, 산철쭉, 꽃창포, 하늘매발톱, 황매화, 불두화 등 각양각색의 꽃들이 피고 진다. 금낭화가 피어나는 4월에는 야생화 축제를 열기도 한다.
지금은 확연히 이팝나무의 시절이다. '하얀 눈꽃'이라는 학명처럼 이팝나무 흰 꽃이 사방에 쌓여 흩날린다. 하얗고 따뜻한 꽃눈을 헤치며 산을 오른다. 동그란 연못을 지나 불두화가 피기 시작한 길 끝에 샤스타데이지와 철쭉으로 뒤덮인 언덕바지가 나타난다. 경 읽는 소리가 아주 낮게 들려온다. 자유로운 풍경 소리는 그보다 더 또렷하다.
◆ 16만 도자대장경과 물속의 그림
언덕 위는 아주 너른 대지다. 시야는 통도사 골짜기를 지나 멀고 먼 곳으로 활짝 열려 있다. 거기에 장경각이 자리한다. 사각의 중정을 가진 장경각에는 도자기로 구운 팔만대장경이 봉안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층층으로 빼곡히 쌓인 대장경 판에 압도된다. 그들 사이로 난 좁은 통로는 이리 저리 꺾이고 이어져 마치 만(卍)자의 미로를 헤쳐 나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대장경을 도자기로 굽는 일은 1991년부터 시작되었다. 성파스님의 제자 5명, 기술자 20여 명과 함께 밤낮 없이 경을 새기고 뜨겁게 구웠다. 숱한 실패를 거듭했다. 그리고 2013년 장경각 불사를 마무리했다. 도자판의 크기는 가로 52㎝, 세로 25㎝, 정확한 경판의 수는 16만3천장이라고 한다. 길고 긴 구도의 불사에는 남북통일의 염원을 담았다. 중정을 가득 메운 대낮의 빛이 커다란 창의 격자살을 뚫고 들어와 경판의 가장자리를 밝힌다.
장경각 앞마당에는 두 개의 커다란 수조가 있다. 왼쪽 수조에는 국보 285호인 반구대 암각화가 잠겨 있고 오른쪽 수조에는 국보 147호인 울산 천전리 각석이 잠겨 있다. 꼭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하다. 아름다워서 몸서리가 난다. 우주처럼 까만 바탕은 삼베다. 전통 방식으로 직조 된 두꺼운 삼베에 열두 번 넘게 옻칠을 하고 또 삼베를 붙여 옻칠하기를 여러 번 거듭해 도자기처럼 단단한 바탕을 만들었다. 그 위에 나전칠기 기법으로 반구대의 고래와 거북, 천전리 각석의 기하학 무늬와 문자 등을 구현했다. 7천년 전의 동물들이 선명하게 살아 있다. 신석기에서 신라시대로 이어지는 시간이 별처럼 반짝인다. 두 작품 모두 물에 잠겨 있지만 옻칠은 방부성이 강하고 접착력도 강해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 역시 성파 스님의 작품이다. 제작 기간만 꼬박 3년이 걸렸다. '일하며 공부하고, 공부하며 일한다.' 성파스님의 생활신조다. 샤스타데이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풍경 소리는 끊임없다.
■ 여행Tip
55번 대구부산고속도로 부산방향으로 가다 밀양 분기점에서 14번 밀양울산고속도로 울산방향으로 간다. 서울주 분기점에서 1번 경부고속도로 부산방향으로 가다 통도사IC로 나가면 된다. 통도사를 거쳐 임도를 따라 1㎞ 남짓 더 올라가면 서운암이다. 서운암에서 장경각까지 임도로 400m 거리다. 차를 타고 올라갈 수도 있지만 '서운암 꽃길'로 오르기를 추천한다. 통도사 입장료는 성인 3천원, 청소년 1천500원, 어린이 1천원이며 주차비는 2천원이다.
서운암 [장독대~장경각] 구간
탐방로 도중의
멋진 소나무
서운암 [장독대~장경각] 구간
탐방로 도중의
멋진 소나무
[서운암 주변 15만여㎡의 야산에 100여 종의 야생화 수만 송이를 심어 군락지를 조성했다. 산책로 주변 금낭화와 겹황매화가 봄이면 만개할 것이다. 이곳에는 봄이면 들꽃축제를 연다.
사계절 중에서 서운암이 가장 예쁘다고 하는 시점은 4월과 5월이다. 흐드러지게 핀 불두화, 그리고 황매화, 하얀 조팝꽃, 그리고 작약 등이 그 아름다움을 뽐내기 때문이다.]
서운암 [장독대~장경각] 구간
탐방로에서 바라본
영축산 능선
서운암 장경각
서운암 하면 성파스님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한때 통도사 주지를 지낸 스님은 이곳에서 1985년부터 5년 동안 삼천불상을 흙으로 구워내 도자삼천불(陶磁三千佛)을 모셨고, 이어 16만 도자대장경 불사를 91년 시작해 10년 만인 2000년 9월에 완성하여 도자대장경은 서운암 위쪽 산중턱에 조성된 장경각에 보관중이다.
16만 도자대장경을 보관한 '장경각'은 천연 옻칠로 건립했다고 한다. 도자대장경을 보관한 서운암 장경각은 팔만대장경처럼 경판에 직접 옻칠을 하지 않았지만 건물의 부식을 막기 위해 장경각 건물 전체에 전통기법인 옻칠로 단장했다고 한다.
[장경각은 도자로 만든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 곳으로 십년이 넘게 걸린 역작이다. 불에 구운 도자기를 불경 한 면에만 새겨 16만3 천장으로 되어 있다. 해인사 8만대장경은 목판으로 몽고의 침략을 이기고자 하는 불심의 발로였고, 장경각의 도자기 불경은 남북의 통일을 발원하는 의미였다고 한다.]
서운암 장경각 앞마당에 있는
수조 속의
나전옻칠 울주 반구대 암각화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蔚州 大谷里 盤龜臺 巖刻畵)
시대 선사/석기
문화재 지정 국보 285호
건립시기 신석기시대
성격 바위그림, 암각화
유형 유적
크기 높이 5m, 너비 8m
소재지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999-1 일원
분야 역사/선사문화
요약 :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에 있는 석기시대 신석기의 고래사냥 관련 바위그림. 암각화. 국보 285호.
목차접기
개설
내용
특징
의의와 평가
개설
1971년 문명대, 김정배, 이융조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1995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선사시대 암각화 유적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며 약 300여점의 그림들이 새겨져 있다. 바위에 새겨진 그림 중에서 고래를 사냥하는 매우 사실적인 그림은 약 7000년 전 신석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서 지구상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고래사냥 그림으로 평가되고 있다.
내용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999-1 일원에 위치하고 있다.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유적은 울산 태화강 지류에 해당하는 대곡천변의 깎아지른 절벽에 너비 약 8m, 높이 약 3m 가량의 판판한 수직 암면에 그림이 집중적으로 새겨져 있다. 주변 10곳의 암면에서도 소수의 그림이 확인되고 있다.
바위의 암질은 셰일(shale)과 혼펠스(hornfels)로 구성되어 있다. 암면의 방향은 북향으로 석양이 질 무렵에만 잠시 빛이 들어오며 윗부분이 앞으로 돌출된 암음(岩陰) 구조로 되어 있다. 유적 발견은 천전리 각석을 발견한 이듬해인 1971년 12월 25일 문명대, 이융조, 김정배가 천전리 각석을 답사하는 과정에 지역 주민의 제보를 통해 이루어졌다. 1984년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간한 최초의 보고서에서는 191점의 그림이 소개되었으며, 2013년 울산암각화박물관이 실시한 정밀조사를 통하여 모두 307점의 형상이 표현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림은 주제에 따라 크게 사람의 전신(全身)이나 얼굴을 표현한 인물상(人物象), 바다와 육지동물을 표현한 동물상(動物象), 배나 부구(浮具)와 같은 수렵이나 어로와 관련된 도구상(道具象), 그림의 주제나 형태를 명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미상(謎象)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인물상은 측면(側面)을 표현한 전신상이 많으며 활로 동물을 사냥하거나 두 손을 치켜든 모습, 악기로 보이는 긴 막대기를 불고 있는 모습 등은 사냥과 일종의 종교적 행위를 연상시키고 있다. 측면 전신상의 대부분은 다소 과장된 남근(男根)을 표현하고 있으며, 사지를 벌리고 있는 정면상이나 가면처럼 얼굴을 표현한 그림도 있다.
동물상들은 구체적인 종 구분이 가능할 정도로 각 동물의 형태와 생태적 특징들을 잘 표현하고 있다. 동물그림에서는 고래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주암면 좌측 편에 집중되어 있다. 반면 사슴과 같은 발굽동물과 호랑이와 표범, 늑대와 같은 육식동물들은 주암면 우측 편에 많이 새겨져 있다. 구체적인 종 구분이 가능한 동물로는 북방긴수염고래, 혹등고래, 참고래, 귀신고래, 향유고래와 같은 대형고래류와 바다거북, 물개, 물고기, 바다 새와 같은 바다동물, 백두산사슴, 사향사슴, 노루, 고라니, 호랑이, 표범, 늑대, 여우, 너구리, 멧돼지 등의 육지동물이 있다.
고래는 대체로 20~30㎝ 정도 크기의 그림이 가장 많으며 큰 것은 80㎝ 정도이고 작은 것은 10㎝ 정도이다. 대부분의 고래 그림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본듯한 조감적(鳥瞰的) 표현으로 머리를 위로 향해 무리지어 헤엄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측면으로 새겨진 고래의 경우는 꼬리를 엇비스듬하게 새긴 “비틀림 화법”을 사용하여 물고기와 구별되는 고래의 수평 꼬리를 의도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새끼를 업고 있는 어미고래나 물 위로 도약하는 모습 등 고래의 생태적 특징을 매우 생동감 있게 표현한 그림들도 있다. 몸통을 수평으로 배를 뒤집고 있는 고래 그림은 이미 죽은 것으로 표현한 것으로 판단되며 몸통에 새겨진 줄무늬는 일종의 분배(分配) 또는 해체(解體) 선으로 여겨지며 민족지 자료에서 볼 수 있는 원주민들의 고래 분배 그림과 매우 유사하다. 이와 같은 그림들은 고래와 같은 대형동물의 사냥과 분배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육지동물들은 주암면 우측편에 집중되어 있다. 고래와 달리 대부분 측면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이는 네발 달린 육지동물의 형태를 가장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화법이다. 사슴류에서 뿔을 관찰할 수 있는 종은 백두산 사슴, 우수리 사슴, 수컷 노루 등이 있으며, 이외 몸통의 형태, 털 무늬, 꼬리와 다리 길이 등을 통하여 종 구분이 가능하다. 육식동물은 몸의 무늬와 꼬리와 다리의 길이, 어깨선 등으로 판단할 수 있다. 유적에서 이런 방법을 통해 구분할 수 있는 종류는 백두산사슴, 사향사슴, 노루, 고라니 등이 있다. 고래와 사슴류는 몸통의 내부를 모두 쪼아 표현한 그림이 많으며 육식동물은 외곽선과 무늬만을 선으로 표현한 것이 많다. 이러한 차이는 그림의 중복관계를 따져 볼 때 시간적 차이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유적에서는 고래류, 사슴류, 육식 동물의 순으로 비중을 갖고 있으며 거북과 물개, 물고기, 조류 등도 소수 확인할 수 있다. 주암면 좌측 상단에 새겨진 세 마리의 거북은 마치 무리지어 헤엄치는 고래를 인도하는 장면으로 표현되어 있다. 바다거북은 산란을 위해 초봄에서 여름 사이에 해안으로 오르기 때문에 흔히 민족지에서나 고대 신화에서는 바다와 육지를 넘나드는 상징적 동물로 해석되곤 한다. 물고기는 측면으로 표현된 상어와 물 위를 뛰는 연어로 보이는 물고기 머리 부분이 표현되어 있다. 바다 새 그림은 항상 고래 주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는 먹이를 사냥하는 고래 주위에 몰려든 바다 새를 연상시킨다. 동물그림 중에서는 먼 바다를 회유(回遊)하는 대형고래와 육지동물 중에서는 짝짓기 하는 장면이나 털갈이와 무늬, 낙각(落角) 등을 통해 계절을 유추할 수 있는 그림들도 있으며, 주로 환절기와 번식기에 나타나는 생태적 특성을 표현한 그림들이다.
도구상은 사냥·어로와 관련된 것으로 배와 부구, 작살, 그물, 어살, 활 등으로 유적의 조성시기와 당시 생활상을 이해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유적에서는 그물을 이용해 고래를 잡는 장면과 호랑이를 포획하는 장면의 그림이 있다. 아직까지 선사시대 그물이 발굴된 사례는 없지만 동삼동 패총에서 출토된 토기표면에 찍힌 미세한 그물 망 흔적을 볼 때, 당시 어로뿐만 아니라 사냥에서도 그물이 널리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지금까지 흔히 목책(木柵)이나 울타리로 해석되어온 그림의 경우, 초기에 제작된 도면과 달리 실제 암면에서는 육지동물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내부 형상의 윤곽선이 물고기와 유사하여 목책보다는 어살의 형태와 유사하다. 일부 연구자들은 이를 배나 무리를 지어 춤추는 사람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국내 유적에서 발굴된 사례는 없지만 일본의 죠몽[縄文]시대 유적에서 연어와 숭어잡이 어살이 확인된 바 있다. 그림만으로 이를 단정하기 어렵지만, 주제가 불분명한 이 그림을 통해 목축(牧畜)을 유추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유적에서는 고래 사냥을 매우 상세하게 표현한 장면들을 볼 수 있다. 고래 주변에 새겨진 배에는 17명, 7명, 5명 가량의 사람이 승선하고 있다. 배는 뱃머리와 고물이 반달처럼 휘어져 있으며, 고래 몸통에 박힌 작살과 줄에 매달린 부구와 연결되어 있다. 이는 지금까지도 행해지고 있는 원주민들의 고래사냥에서 사용되는 도구들과 거의 동일하다.
미상은 정확한 주제와 내용을 알 수 없는 그림으로서 그림의 상태가 양호하나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주제미상(主題迷象)과 오래 세월을 거치면서 마모와 탈락 등으로 판독(判讀)이 어려운 형태미상(形態迷象)으로 세분할 수 있다. 이 중에는 일정한 패턴을 지닌 기호로 볼 수 있는 그림도 있겠지만, 유적에 표현된 그림만으로는 이를 구별해 내기는 어렵다. 기호는 실제 현실 속에서 볼 수 없는 관념적 표현물로 최소한의 반복적인 표현으로 일정한 패턴을 찾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암각화는 단단한 돌연모를 사용해 쪼기, 갈기, 긋기 수법으로 제작되었으며 각흔(刻痕)의 깊이와 폭, 크기, 밀도, 표현 기법을 통해 크게 4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돌연모와 금속으로 새긴 그림은 각흔의 형태를 분석하여 구분할 수 있다. 대체로 돌 연모의 경우 단면의 형태가 “⋃”자 형이며 금속의 경우 “⊔” 자 형 또는 “⋁”자 형을 띤다. 이외에도 각흔의 깊이와 너비, 균일도(均一度)에서 그 차이를 어렵지 않게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유형Ⅰ은 쪼기 기법을 사용해 새긴 그림으로 형상의 크기가 작고 각흔의 깊이가 얕은 편이다. 전체 형상을 점 쪼기로 표현하였으며 고래를 사냥하는 장면이나 작은 동물, 주제를 알 수 없는 그림들로 구성되어 있다. 암면에서 가장 먼저 새겨진 그림에 해당한다.
유형Ⅱ는 흔히 면 그림으로 분류되어온 것으로 쪼기 기법을 사용해 그림의 내면을 모두 쪼아 내거나 일부는 자연면을 이용해 새끼 고래나 작살 등을 양각(陽刻)으로 표현한 것도 있다. 고래에 박힌 작살처럼 외곽을 긋기로 마무리한 그림도 있다. 점 쪼기에 비해 그림의 크기가 크고 각흔의 깊이가 상대적으로 깊고 규칙적인 편이지만 각흔이 다소 거칠게 남아 있다. 이 유형으로 표현된 그림들은 주 암면의 좌측 편에는 고래와 같은 바다 동물을 우측 편은 사슴이나 늑대, 여우와 같은 육지 동물들을 주로 표현하고 있다. 바다와 육지 동물의 비중은 거의 비슷하다.
유형Ⅲ은 흔히 선 그림으로 분류되어온 그림으로 각흔의 깊이가 깊고 쪼기와 함께 갈기 수법을 사용하였다. 그림의 윤곽선이 비교적 매끈하게 마무리 되었으며, 쪼아 새긴 각흔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 유형에서는 바다 동물이나 사슴류보다는 호랑이나 표범과 같은 육식동물의 비중이 매우 높은 편이다. 유형Ⅱ와 유형Ⅲ은 그림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그림의 주제에서도 바다동물에서 육식동물이란 뚜렷한 변화를 관찰할 수 있다.
유형Ⅳ는 쪼기와 함께 갈기 기법으로 이전에 새겨진 그림들을 많이 훼손하고 새긴 것으로 도약하는 고래와 새끼 멧돼지 그림이 있다. 전체적으로 그림이 크고 그 수도 적다. 그림의 중복관계를 통해서 선후관계를 유추할 수 있으며 후대로 갈수록 바다동물의 비중이 감소하고 육지동물과 육식류의 비중이 증가한다. 흥미로운 점은 암각화 유형의 주제 변화와 신석기시대 패총에 포함된 동물 유체의 비중에서 어떤 관련성을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암각화에 새겨진 그림은 단순히 사냥의 대상을 그대로 표현했다기보다는 관념적 표현물로 이를 직접적으로 비교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한데에 노출된 암각화는 정확한 제작연대를 추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유적 발견당시부터 조성연대를 두고 연구자들 간에 많은 이견이 존재하고 있다. 연구자들 사이에 견해차는 있겠지만 대체로 신석기시대 말에서 청동기시대 초기까지로 보는 견해가 많다. 그러나 전혀 다른 주제를 담고 있는 천전리 암각화가 유적에서 불과 2㎞ 내에 위치하고 있는 점, 우리나라 남부지방 전역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 암각화에서 표현된 검, 동심원, 음문, 검파형, 이외 추상적인 기하문 등의 그림을 유적에서 전혀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이들 유적을 모두 동시대로 보기는 어렵다.
최근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조성시기를 밝히려는 좀 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분석들이 시도되고 있다. 울산과 동남해안 일대의 패총에 포함된 동물유체 분석결과와 울산만 고(古)환경 연구 등에 따르면, 유적 조성의 중심연대는 지금으로부터 약 7,000~3,500년 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부산 동삼동 패총출토 사슴문 토기, 그물문 토기, 조개가면, 양양 오산리 얼굴상, 통영 욕지도 패총 멧돼지 토우, 울산 신암리 여인상, 울산 세죽리 패총 물개 토우 등 암각화에 표현된 그림의 주제와 관련된 많은 유물들은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볼 수 있다. 이외에도 2005년 창녕 비봉리 패총에서 배가 발굴된 바 있으며, 2010년 한국문물연구원이 실시한 울산 황성동 패총 발굴조사에서는 고래사냥을 실증적으로 밝혀주는 작살이 박힌 고래 뼈가 출토되었다. 이는 반구대암각화의 제작연대를 추정해볼 수 있는 결정적인 물증자료로서 과거 울산만과 해안지역에서 적어도 7,000년 전부터 고래사냥이 이루어졌으며 반구대암각화는 당시 고래 사냥집단에 의해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당시의 생업 환경, 사냥과 어로 도구, 관련 유물, 시대적 맥락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볼 때 암각화 유적의 조성연대는 신석기시대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
특징
반구대 암각화에 표현된 고래사냥 장면과 약 22종에 이르는 육지와 동물그림은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생활상과 정신세계를 보여준다.
의의와 평가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가 다른 나라 관련 학계에 알려지기 전까지, 인간이 바다에서 처음으로 고래를 사냥한 시기는 10~11세기로 추정되고 있었다. 반구대암각화는 이 보다 수 천 년이나 앞선 그림으로 인류 최초의 포경유적일 뿐만 아니라 북태평양 연안지역의 선사시대 해양어로문화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나전옻칠 울주 반구대 암각화
안내문
나전옻칠 울주 천전리 암각화
울주 천전리 각석(蔚州 川前里 刻石)
시대 선사/석기, 고대/삼국/신라
문화재 지정 국보 제147호
건립시기 선사, 신라
성격 암각화
유형 유적
소재지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산 210-2
분야 역사/선사문화
요약 :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에 있는 석기시대 이후 조각·그림·명문 등이 새겨진 암각화. 국보 제1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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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내용
개설
1973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1970년 12월 동국대학교박물관 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1971년 2차례에 걸쳐 정식 조사되었다.
각석은 태화강의 지류인 대곡천(大谷川) 중류 강안 암벽지대에 있다. 이 지역은 울산과 경주를 잇는 길목지대에 해당되어 울산·언양 일대의 풍부한 물산이 경주로 운반되는 교통로로 많이 이용되었다.
또한 경관이 빼어나 예로부터 명승지로 이름난 곳이기도 하다. 이 각석은 발견 후 암반 하부에 새겨진 다량의 명문 때문에 서석(書石)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내용
각석은 내용상 선사시대 점각기하학적 문양(點刻幾何學的文樣)과 각종 동물상이 새겨진 상부와,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선각화(線刻畫)와 명문이 있는 하부로 나눌 수 있다.
암질은 적색 셰일이고 크기는 너비 9.5m, 높이 2.7m이다.
상부의 문양은 주로 쪼기[彫琢] 기법을 썼으며 하부는 긋기[線刻]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것은 제작 시대 및 제작 집단이 달랐음을 뜻한다.
1) 상부
가. 기하학적 문양
상부의 기하학적 문양은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마름모꼴무늬·굽은무늬·둥근무늬·우렁무늬·십자무늬·삼각무늬 등이 홑이나 겹으로, 혹은 상·하·좌·우 연속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들 기하학적 문양은 대개 직선보다 곡선이 많고 상징성을 띠는 것이 많아 명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가장 많이 새겨진 것은 마름모꼴무늬로 홑무늬·겹무늬 외에 연속문이 있다. 연속문에는 가로·세로로 겹친 것과 한 무늬 내부에 같은 무늬가 두 겹·세 겹 반복되거나 점이나 빗금이 있는 것도 있다.
굽은무늬에는 가로굽은무늬와 세로굽은무늬가 있다. 원시문양에서 이들은 각기 물결과 뱀을 상징한다. 상부 오른쪽 끝의 열매를 꿴 화살모양의 무늬는 암수의 결합을 의미하는 문양으로 해석되기도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상부의 이와 같은 문양들은 본질적으로 신석기시대 무늬토기의 기하학문양과 연결된다. 표현이 단순, 소박하면서도 명쾌한 무늬토기 문양양식을 이어받아 청동기시대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문양은 곡식이나 음식물 등이 항상 풍요롭기를 바라는 청동기시대인의 기원을 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나. 동물상
동물상은 대부분 상부 왼편에 있다. 사슴 종류가 압도적으로 많고 이름을 알 수 없는 각종 동물과 물고기·새 등이 있다. 사슴은 대개 암수 2마리가 서서 마주보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한 쌍으로 표현된 사슴 중 수사슴은 뿔이 매우 크고 가지가 무성해 순록의 일종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크기가 작은 사슴들은 신체의 특징이 각기 다르게 표현되어 염소나 말 등 다른 동물로 볼 수 있는 것도 여러 마리 있다.
상부 중심부에는 도안화된 얼굴의 한 인물과 태양을 나타낸 듯한 둥근 문양의 좌우로 4마리의 사슴이 뛰어가는 모습을 새겨놓았다. 이는 당시의 어떤 종교의식이나 신앙관념과 관련있는 표현으로 보인다.
이들 동물상과 기하학 문양 사이에는 곡식이삭이나 풀뿌리·꽃봉오리를 나타낸 한 문양도 있으나 상징성을 띤 기하학 문양의 변형으로 볼 수도 있다.
석각 상부 문양 제작 집단의 종교신앙과 관련해 주목되는 것은 상부 왼편 끝에 보이는 인두수신상(人頭獸身像)이다. 이 동물상은 부드러운 얼굴을 한 사람의 머리와 사슴을 닮은 몸체가 결합된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선사인이 믿고 숭배하던 신수(神獸)의 하나로 생각되며 반인반수(半人半獸) 관념의 기원과 관련해 중요하게 평가되는 자료이다.
그 밖에도 몸체가 긴 2마리의 동물이 교미를 하는 듯 돌아서서 꼬리를 맞댄 채 서 있는 모습이 2군데 보인다. 어떤 동물을 나타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상부 왼편에는 상어를 나타낸 듯 꼿꼿한 지느러미가 여러 개 있는 물고기 2마리와 주둥이와 비늘까지 표현된 물고기 1마리, 붕어모양의 물고기 1마리가 각기 새겨져 있다.
다. 인물상
인물상은 뚜렷이 파악되는 것이 모두 7군데이다. 얼굴만 묘사된 것과 전신을 나타낸 것 등 두 종류가 있다. 모두 원시암각화 특유의 극도로 단순화된 표현법을 쓰고 있어 사실성이 약하며, 일면 괴상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얼굴상은 대부분 원시종교의식과 관련된 탈을 연상시킨다. 눈·코·입이 뚜렷이 새겨진 얼굴상 하나는 시베리아 아무르강 유역 암벽조각에 새겨진 원시탈과 유사해 흥미를 끈다. 이 지역과의 문화적 연계성, 주민의 이동 가능성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2) 하부
석각 하부는 선각화와 명문이 뒤섞여 있다. 대개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대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선각화는 인물·기마행렬도를 비롯해 환상적인 동물들과 자연계의 동물, 크고 작은 배가 항해하는 모습 등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명문에는 영랑(永郎)·금랑(金郎)·정광랑(貞光郎) 등 신라 화랑의 명칭을 비롯해 관명·직명·인명 등이 여럿 새겨져 있어 신라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가. 선각화
인물·기마행렬도는 3군데 보인다. 이 중 하부 중앙 제2행렬도의 한 기마인물은 눈·코·입을 점으로 찍어 표현하고 얼굴 윤곽을 마름모꼴로 처리한 것이 신라의 토용(土俑)이나 토기선각화 중 인물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얼굴과 흡사해 주목된다.
상부 왼편 제3행렬도의 말은 질주하는 순간의 모습이 간략한 몇 개의 선만으로 잘 표현되어 제작자의 빼어난 표현감각을 잘 드러내고 있다.
환상적인 동물로는 용으로 보이는 것이 여러 마리 새겨져 있다. 특히, 하부 오른편 끝에 새겨진 용은 머리를 쳐들고 왼편을 향해 허공을 날아가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몸체의 지느러미와 비늘, S자형으로 휘며 뒤로 뻗은 꼬리부분 등이 세심하게 처리되어 있어 언뜻 고구려 중기 고분벽화의 사신도(四神圖)에 보이는 청룡을 연상시키는 측면도 지니고 있다.
자연계의 동물로는 말이 홀로, 혹은 군마(群馬)의 형태로 묘사되었고, 새도 여러 마리 새겨져 있다. 그 밖에 큰 돛을 단 범선과 사람이 노를 젓고 있는 용머리의 배는 당시 신라인의 해상활동과 관련된 중요한 자료이다.
나. 명문
명문 중 확인된 글자는 800자가 넘는다. 상부 오른편의 원명(原銘)과 그 왼편의 추명(追銘)이 내용의 중심을 이루고 있고 그 밖에 제명(題銘)이 다량 보인다. 원명이 새겨진 기사년은 법흥왕 12년(525), 추명에 새겨진 기미년은 법흥왕 26년(539)으로 추정된다.
뒤의 추명은 왕과 왕비가 이곳을 찾은 것을 기념해 기록했음을 밝히고 있어 6세기경의 신라사회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명문 중에는 사탁부(沙啄部)라는 부명이 여러 번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이곳이 신라 6부의 하나인 사탁부인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장소임을 뜻한다. 이곳은 사탁부의 고유 종교의식이 행해지던 성지(聖地)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 밖에도 제명에는 여러 화랑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당시 많은 화랑이 이곳을 찾아 도량(道場)으로 삼았음을 전해준다.
이들 각석 하부의 명문과 각종 선각화는 신라 6부체제의 발전·변화과정과 내용을 규명해나가는데 주요한 실마리를 제시해주고 있으며, 앞으로 이에 대한 보다 종합적이고 면밀한 검토가 요구된다.
나전옻칠 울주 천전리 암각화
안내문
서운암 장경각 앞마당에 있는
수조 속의
나전옻칠 울주 천전리 암각화(앞)과 나전옻칠 울주 반구대 암각화(뒤)
[ 이 작품을 주도하여 제작한 분이
조계종 종정이신
성파 스님이시다.]
새롭게 추대된 제15대 종정예하 중봉 성파대종사는?
불교신문 기사 승인일 : 2021.12.14.
홍다영 기자
불지종가 영축총림 통도사 방장으로
후학양성·도량수호, 수행포교의 길 걸어
2018년 방장 추대법회 열지 않고
미래세대 어린이 위해 기금 기탁 ‘귀감’
새롭게 종정예하로 추대된 중봉 성파대종사는 영축총림 통도사 방장으로 평생 후학양성과 수행, 포교의 길을 걸었다.
1939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난 중봉 성파대종사는 1960년 조계종 종정을 지낸 월하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70년 월하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하고 1971년 통도사 승가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문경 봉암사 태고선원 등 제방 선원에서 정진했으며, 통도사 주지, 제5·8·9대 중앙종회의원, 총무원 교무부장· 사회부장을 역임했다. 2013년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선출됐으며, 2014년에 종단 최고 법계인 대종사 법계를 받았다.
중봉 성파대종사는 종단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친 선지식으로 꼽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우리 고유의 전통예술의 여러 장르에서 굵직한 흔적을 남겨온 대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1980년대 초반 연 첫 ‘금니사경전시회’를 기점으로 삼아도 성파대종사의 예술적 행보는 40여 년을 훌쩍 넘는다. 스님의 발걸음은 어느 한 분야에만 멈춰 서지 않고 전통 예술의 다양한 장르를 쉼 없이 섭렵해 왔다.
통도사 서운암에 주석하며 팔만대장경을 일일이 새겨 도자기로 구워내고 야생화를 가꾸는가 하면, 불화, 민화는 물론 시조까지 다양한 방편으로 우리시대 수행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통도사 주지 소임을 내려놓은 뒤 1991년부터 이곳 서운암에 머물며 도자대장경 불사를 시작했고, 10년에 걸쳐 남북통일 발원을 담은 도자대장경 조성이라는 대작불사를 일궈냈다.
기나긴 장르의 여정은 도저히 한 사람이 일궈온 성과라고는 믿기가 어려울 정도다. 1983년 옻을 이용한 개인전을 처음 연 후 국내외에서 전통 옻과 불교미술을 접목한 전시를 수차례 열었다. 옻칠로 고려와 조선 불화를 모두 되살려 냈다는 평가도 나온다.
민족통일의 원력을 담은 도자삼천불과 16만도자대장경을 조성하고, 옻칠 불화, 민화, 서예, 천연염색 등 전통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2017년 옥관문화훈장을 수훈하기도 했다. 또한 시조문학 발전을 위해 지난 1984년 성파시조문학상을 제정해 최근까지 시조 시인들을 격려해왔다. 1985년부터 영남시조백일장을 개최해온 스님은 이를 확대해 전국대회로 운영해왔다.
중봉 성파대종사는 2018년 희귀병 소아암을 앓고 있는 어린이 환우들을 위해 5000만원을 기부하는 것으로 통도사 방장 추대법회를 대신했다.
성파대종사는 방장으로 추대된 직후 본지와 부처님오신날 특별인터뷰도 가졌다. 성파대종사는 당시 인터뷰에서 스님과 재가 불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설파했다.
스님은 “우리 스님들은 중생의 고통을 해소하고 중생이 행복해질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을 수행으로 여길 줄 알아야 한다”며 “부처님은 청정성을 잃지 않은 화합승가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고 일깨웠다. 당시 스님은 불자들에게도 “청정승가, 화합승가를 유지할 수 있도록 불자들이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것도 부처님오신날에 되새겨야할 가르침”으로 꼽았다.
■ 종정(宗正)은…
종단의 신성(神聖)을 상징하며 종통(宗統)을 계승하는 최고의 권위와 지위를 가진다. 조계종 종정은 명실상부하게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최고의 정신적 지도자다. 임기는 5년이며 한 차례 중임할 수 있다. 예하(猊下)는 종정을 높여 부르는 존칭으로, 부처님 또는 고승이 앉는 자리라는 뜻이다.
자격은 승납 45년 이상, 세납 70세 이상의 대종사 법계를 받은 수행과 법력이 높은 비구스님으로 하고 있다. 종단 법을 상징하기 때문에 종단 행정에는 관여하지 않으나 주요 행사와 안거 등을 맞아 종도들에게 법어를 내리며 모든 스님들에게 계를 전하는 전계대화상의 위촉권을 가진다. 종헌 종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포상과 징계의 사면, 경감, 복권의 권한을 가진다.
조계종은 통합종단이 출범한 1962년 제1대 종정으로 효봉 대종사를 모셨다. 그 후 청담대종사(2대), 고암대종사(3~4대), 서옹대종사(5대), 성철대종사(6~7대), 서암대종사(8대), 월하대종사(9대), 혜암대종사(10대), 법전대종사(11~12대), 진제대종사(13~14대)가 뒤를 이어 종단의 법을 상징하는 최고 어른으로 역할을 해오고 있다.
현 종정예하 진제 법원대종사는 2011년 추대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추대됐으며, 2016년 재추대돼 2022년 3월25일까지 그 본분을 다한다. 새롭게 추대된 종정예하는 2022년 3월26일 임기를 시작하며, 역대 종정예하의 가르침을 이어 종단 역사와 전통을 이어 후학들을 지도하게 된다.
중봉 성파(中峰 性坡)대종사 약력
• 1939년 경남 합천 출생
• 1960년 통도사에서 월하 명근스님을 은사로 사미계 수지
• 1970년 통도사에서 월하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수지
• 1975년 극락호국선원, 봉암사 태고선원에서 수선안거 이래 26안거 성만
• 1980년 제5대, 제8대, 제9대 중앙종회의원 역임
• 1981년 제15교구본사 통도사 주지 역임
• 1980년 원효학원 이사장 역임
• 1988년 영축학원 이사장 역임
• 2013년~(現) 대한불교조계종 원로의원
• 2014년 대한불교조계종 대종사 법계 품수
• 2018년~(現) 영축총림 통도사 방장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서운암 장경각 앞마당에서 바라본
영축산
서운암 장경각
장경각 건물은 법당을 앞으로 배치하고 대장경을 보관한 전각을 ㄷ자로 하여 전체는 ㅁ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서운암 장경각
내부 모습
장경 보관대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서운암 장경각 내부에 전시되어 있는
16만여 개의 도자기로 만든
팔만대장경
서운암 장경각 앞마당에서
영축산을 배경으로
이성수
서운암 장경각 앞마당에서
영축산을 배경으로
이성수
서운암 장경각 앞마당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영축산
서운암의 명물인
5천 개의 된장독
서운암에는 유명한 세 가지가 있다. 그 첫번째가 된장이고, 두번째가 들꽃이며, 세번째가 천연 염색이다. 전통 천연 염색인 쪽 염색기법과 전통 한지인 감지를 재현했다.
[서운암에서 전통 장을 담그기 시작한 사람은 통도사 주지를 지내고 현재 방장님이신 성파스님. 때는 1990년대 중반이다. 1,300년 동안 스님들이 절 식구의 부식으로 사용하기 위해 직접 메주로 담그던 방법을 재현해 낸 것.농가에서 직접 재배한 햇콩을 무쇠 가마솥에 넣고 장작불을 지펴 삶은 후 공기가 잘 통하도록 황토와 짚으로 만든 전통가옥에서 발효시킨다. 일반 장맛과는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에게 나눠주다가 98년부터는 규모를 늘려 주문을 받아 전국으로 택배로 보내주며 일반인들에게 판매도 한다. 된장 1.5㎏ 13,000원, 막장 1㎏ 1만원, 고추장 1㎏ 1만원, 간장 0.9리터 8,000원. 문의처 (055)383-8888.]
서운암 입구에 있는
삼천불전 앞 단풍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