吾 이서영 :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철학자들의 고찰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철학자들의 고찰 이 서 영 목차 I.서론 II . 고대의 행복이론 1. 스토아학파 2.세네카 에피쿠로스 아리스토텔레스 ifi. 현대의 행복이론 1.칸트 2. 슈타인파트 3. 프로이트 Iv. 인생의 의미에 대한 이론 쇼펜하우어 에드워즈 3.슈미트 4.회페 5.네이글 V.갈론 참고문헌 58 찧 16번째 제주 소피아 ‘울림’ 이서영 :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철학자들의 고찰 I.서론 ‘행븍이란 무얏인가’ 라는 질문은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서 한번 쯤 생각하기 마련인 보편적인 질문이라고 생각된다. 하시만 우리 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명확히 단정 짓기 힘들다. 고대와 현대의 행복에 대한 철학사들의 사상을 통해 행복에 대한 의미를 되새겨 보려한다. 끄l, 우리는 행복을 너무 경험적인 것으로 해석하기 때문어ㅣ, 즉 행복을 경험적 쾌락에 제한하기 때문에 행복이 춰쟁화, 개별화된 다. 쾌락만이 행복이라고 하면 쾌락의 측정만이 문제된다. 하지만 공리주의의 문제로 지적되듯이 쾌락 이외의 다른 가치들도 있고, 쾌락을 넘어선 인생의 의미에서 행복을 찾을 수도 있다. 행복의 의미가 확장된다면 쾌락만이 행복이 아니라 다른 의미의 행복이 이야기될 수 있다. 그것이 더 이상 행복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다면, 인간은 행복을 넘어서 삶의 의미를 추구하고 살아간다 고 할 것이다. 따라서 행복이란 무엇인가의 의미에 대해 논함에 있어서, 인생 혹은 삶의 의미에 대한 철학사들의 사상 또한 빠질 수 없다고 본 다. 행복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이론을 통해 논제에 더 다가가보 도록 한다. II . 고대의 행복이론 1. 스토아학파의 행복이론 16번째 제주 소피아 ‘울림‘ 얌 59 볍 이서영 :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철학자들의 고찰 스토아학파의 시대인 헬레니즘시대는 그리스를 점령한 마케도니 아의 알렉산더 대왕과 그 후계사들에 의한 전쟁 때문에 불안한 시 대였다. 로마의 황제들이 등장하면서 시국은 더욱 혼란해졌고 사 람들은 내적으로 불안하고 절박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러 한 시대 상황에서 철학은 인간의 내면에서 구원과 행복을 찾으려 고 했고, 따라서 윤리학이 발전했다. 스토아학파의 윤리학은 자연 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자연, 우주는 .엄격한 법칙이 지배되는 세계 이성이다. 인간은 이러한 대우주의 모사로서 소우주이며 이성의 지배를 받는다. 인간의 영흔의 지배적인 부분인 이성이 무력해지면 고통, 공포, 욕정 및 쾌락 등의 광기가 나타난다. 인간은 이성을 통해 광기를 통제하고 자연에 따른 삶을 살아갈 때 행복해진다. 하지만 스토아 학파의 윤리학은 통상적인 행복주의에 반대되는 것이다. 스토아학 파에 따르면 행복은 경향, 기호, 욕정, 쾌락, 이익과 안락함이 아 니라 법칙에 대한 충실, 의무의식, 극기, 단념. 엄격함과 같은 도 덕적인 덕을 따르는 것이다. 덕 있는 사람은 명성, 쾌락과 고통, 부와 빈곤, 건강과 질병, 삶과 죽음마저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덕 과 본성에 알맞은 삶을 살기위해서는 정욕, 분노. 공포 등에 움직 여서는 안 된다. 어떠한 형태의 격정으로부터도 해방된 상태를 마 음의 평정이라고 한다. “너는 부딪히는 모든 파도들을 부셔 버리 는 바위와 같아야 한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48)) 전쳬, 우주의 법칙과 이성적 필연성을 볼 때 인간은 혼들리지 않는다. ‘세계가 무너져 내릴시라도 의연히 버티고 서 있는 사’가 스토아적 아파테 이아49}의 이상이다. 현사는 모든 덕을 갖추고 흔들리지 않는다. 이 런 사람만이 진정으로 행복하며, 부유하고 자유롭고 아릉답다. 스토아학파는 운명론자이다. 운명은 우주의 법칙이다. 통상적으 로마제국의 제16대 황제(재위 161慇18O)로 5현제(탓帝)의 마시막 황제 이며 후기 스토아파의 철학사로 《명상록》을 남겼다. 정념이 없는 상태 60 I 16번째 제주 소피아 ‘울림’ 이서영 ,: 』핼볶이란 무엇인가 · 행복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철학자들의 고찰 로 운명은 인간의 사유를 배제한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스토아학 파에게서 자유는 실제로는 필연성과 일치한다. 현자는 사건의 법 칙을 사신의 법칙이라고 븐다. 현자는 다른 것을 기대하지 않고 운명을 긍정한다. 의무를 수행하는 것은 고귀하고 고통을 인내하 는 것은 영응적이다. “네가 동의하면 운명은 너를 인도해주고, 네 가 동의하지 않으면 운명은 너를 강제한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 스) 2. 세네카 ; 이성에 의해 인도된 마음의 평정 세네카는 로마황제 네로의 선생이었고. 스토아학파에 속한다. 기원후 54년에서 기원전 59년까지 국가의 통치자에 올랐다. 그가 자신의 엿! 제자 네로 황제의 폭정을 비판했을 때, 황제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세네가는 샨고가 집행되기 선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우리가 사람들의 말에 끌려서 사람들을 많이 동의하는 것을 최 선의 것이라고 간주할 때보다 우리가 더 큰 어려움에 빠질 때도 없다; 이러한 경우 우리는 사신의 이성에 따르지 않고 본보기에 따른다. 그렇게 해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근거하는 방식으로 집적된 사람들의 무리가 형성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 유에로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운명에 대한 무관심과 냉 정함을 통해서만 사유로워질 수 있다. 이러한 무관심에 의해서 대 단히 귀중한 인격적 특성이 생겨난다. 즉 영혼의 고요와 숭고함이 공포로부터 사유로워져서 진리의 인식에 의해 고차적이고 지속적 인 기쁨을 획득하고, 정서의 부드러움과 쾌활함을 획득하는 확고 한 관점을 발견한다. 이러한 속성에서 영흔은 특수한 기쁨을 갖는 다. 왜냐하면 그 족성들은 영혼 자쳬에서 발생한 갓이고 외부로부 터 영혼에 쓰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성에 의해 인도되어서 16번째 제주 소피아 ‘울림’ 콥 61 ~ 이서영 :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철학자들의 고찰 더 이상 어떤 것도 원치 않고 어떤 갓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만이 행복하다고 칭해질 수 있다. 살로 돌과 동물도 공포와 슬픔으로부 터 자유롭시만 아무도 그것들을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그것들에게는 행복의 의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 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은 올바른 판단을 가진 사람이며, 존속하는 것에 만족하고 기꺼이 자신의 상황에 익숙해지는 사람이다. 행복 한 사람은 그의 이성이 그의 온전한 상황을 좋다고 시인하는 그런 사람이다. 3. 에피쿠로스 ' 합리적인 쾌락 추구 에피쿠로스도 사신의 철학 학파를 창립했다. 그는 쾌락에 찬 생활을 가 장 중요하게 여기는 쾌락주의자였다. 에피쿠로스의 생각은 사신의 욕구를 지배하고 절제하는 방식만이 지속적인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생각할 수 있는 사람에게 육쳬의 쾌락은 최고의 가장 확실한 기 쁨이다. 고귀한 것, 덕과 같은 것들은 그것들이 쾌락을 산출할 때 소중히 여겨져야 한다. 그것들이 그렇지 못할 때. 사람들은 그것들 을 포기해도 좋다. 따라서 우리는 쾌락을 행복한 삶의 시작과 끝 이라고 칭한다. 쾌락은 생득적인 속성이다. 우리는 쾌락이라연 어 느 것이나 다 취하기로 결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쾌락이 너무 많 아서 부담이 될 때는 많은 쾌감을 포기하는 일이 생겨난다. 우리 는 또한 고통을 오래 참은 뒤에 커다란 쾌락이 뒤따른다면 많은 고통을 쾌감보다 더 선호하기도 한다. 모든 쾌락은 그것이 우리의 본성에 상응하기 때문에 좋다. 하지만 우리가 오든 쾌락을 취하기 로 결심할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모든 고통은 나쁜 것이지만 우리가 모든 고통을 피할 필요는 없다. 장점과 단점을 정확히 축 고해 봄으로써 사람들은 무엇을 선택하기로 결심해야 할지 판단할 62 믐 16번째 제주 소피아 ’울림’ 이서영 : 행복이란 무엇인가훰 행복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철학자들의 고찰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쾌락을 삶의 목표로 삼는다면, 그걋은 육 쳬적 고통도 영혼의 불안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에피쿠로스의 행복관은 쾌락이 행복의 길임을 인정하는 가운데 행복이 지속적이고 삶 전쳬에서 오는 쾌락이 되기위해 욕망의 절 제를 부르짖게 된다. 이 욕망의 절제를 통해 단순한 육체적, 감각 적 쾌락이 아니라 정신적 만족과 평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신 쳬적 쾌락과 소유를 통한 만족은 시간이 흐르면 점차 감소한다. 최초의 쾌락은 점차 익숙해지고 쾌락의 지속을 위해 또 다른 욕망 과 소비가 발생한다. 더 이상 소비할 수 없다면 어느 순간 욕망을 억누르거나 만족해야 한다. 소박한 삶에 마음의 평화가 있으며 마 음의 평화가 바로 행복이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우리가 행복하다면 지금에 만족하기에 나 쁜 것을 할 생각이나 기회가 없을 것이며, 불행하다면 행복을 얻 기 위해 무슨일이든지 할 걋이므로 우리는 지금 행복을 위해 노력 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행복하기 위해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것은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욕 심을 버리고 지금에 만족하는 삶뿐이다. 내가 비록 어려운 상황에 있더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욕심을 줄인다면 지금 당장 나의 마음은 고통이 없을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 4. 아리스토텔레스 : 니코마코스윤리학 모든 기술과 탐구, 또 모든 행동과 추구는 어떤 선을 목표 삼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선이란 모든 것이 목표 삼는 것이라고 한 주장은 옳은 것이라 하겠다.…그런데 행동, 기술, 학문에는 여 러 가지가 있기 때문에, 목적 또한 여러 가지로 많다. 가령, 의술 의 옥적은 건강이요, 조 트1의 목적은 배요 병법의 목적은 승리요, 경제학의 목적은 부다. 그런데 몇 가지 기술이 하나의 능력 아래 16번째 제주 소피아 ‘울림’ 쑈 63 鑛 이서영 :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철학자들의 고찰 종속하는 경우, 예컨대 말굴레 제작이나 이 밖에 마구의 제작에 관계되는 다른 모든 기술이 승마의 기술에 종속하고, 또 이 승마 의 기술과 모든 군사적 행동이 병법에 종속하고, 그리고 이와 같 이 여러 가지 다른 기술이 또 다른 여러 가지 기술에 종속하는 경 우 이 모든 걋에 있어서 으뜸가는 기술의 목적은 모든 종촉적 목 적보다 나은 것이다. 왜냐하면 전자 때문에 후사가 추구되기 때문 이다. 이것은 활동자쳬가 행동의 목적인 경우이건, 방금 위에서 언 급한 학문의 경우에서와 같이 활동 이외의 어떤 것이 목적인 경우 이건,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달성할 수 있는 모든 선 가운데 최고의 것은 무엇인가? 명목상으로는 대쳬로 누구나 여기에 대해서 같은 답을 내린다. 즉 일반 사람들도 교양 있는 사람들도 다 같이 그것은 행복이라고 말 하며, 또 잘 살며 잘 처세하는 것이 곧 행복이라고 여긴다. 우리는 이 점을 좀 더 명료하게 제시하시 않으면 안 된다. 분명 히 목적은 하나 이상 있고, 이 목적들 가운데 어떤 것은 다른 어 또! 것 때문어ㅣ 선정되므로, 모든 목적이 다 같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러나 최고의 선은 분명히 궁극적인 목적이다. 그러므로 만일 오직 하나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고 하면 이것이 야말로 우리가 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자쳬에 있어 서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다른 어떤 것 때문에 추구할 만 한 가치가 있는 것보다 더 궁극적인 것으로 보며, 다른 어떤 것 때문에 바래지는 일이 절대로 없는 것을, 그 사쳬에 있어서 바래 지는 경우도 있고 다른 어떤 것 때문에 바래지는 경우도 있는 것 보다 더 궁극적인 것을 본다; 그리하여 또 언제나 그 사쳬에 있어 서 바래지고 다른 어떤 것 때문에 바래지는 일이 절대로 없는 것 을 무조건적으로 궁극적인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다른 어느 것보다도 이러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은 행복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행복을 그 자처l 때문에 선택하 고 결코 다른 어떤 갓 때문에 선택하는 법이 없으나, 명예나 쾌락 64 壞 16번째 제주 소피아 ‘울림’ 행복과 인생0I셉嵩 HMOI2.1- CO1OI醉 이나 이성이나 도 이 밖의 모든 덕은 그것들 자쳬 때문에 우리가 선택하는 경우가 있다고는 해도 또한 우리는 이런 것들을 통해 행 븍하게 되리라 생각하여, 행복 때문에 이것들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 행복은 슥커LL十 이것들 때문에, 샨택하는 것 이 아니요, 또 일반적으로 그 자쳬 이외의 다른 어떤 것 때문에 선택되는 것도 아니다. 자족이란 관점에서 보더라도 똑같은 결론이 나오는 것 같다. 즉 궁극적인 선은 자족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자족적이라 함은 어떤 한 개인만을 위하여, 즉 고립된 생활을 하 고 있는 사람을 위해 족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부모와 자녀와 아내와 그리고 일반적으로 친구들과 동포들을 위해서도 족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래 사회적인 존재로 E꿰 어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족이란 것을 그갓만으로 생활을 바람직한 것이 되게 하며, 크l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행복 이야말로 바로 이런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는 행복이 모든 것 가운데 가장 바람직한 것이요, 다른 여러 가지 선 가운데의 한 선으로 여겨질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 일 행복이 많은 선 가운데 한 선으로 여겨진다면 여러 가지 선 가 운데 가장 적은 것을 보태더라도 그것이 보다 더 바람직한 것이 될 수 있음이 분명하다. 부가된 선은 선의 잉여물이 되며 선 가운 데 보다 큰 것이 언제나 보다 더 바람직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 다면 행복은 궁극적이고 자족적인 어떤 것이요, 또 행동의 목적이 다. 행복은 한가함에 의존한다. 우리가 바쁜 것은 한가함을 얻기 위 해서요, 전쟁을 하는 것은 평화 속에 살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천적인 덕들은 정치나 전쟁에서 자신의 활동을 드러내지 만 이런 영역에서의 행동들은 한가함과는 거의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전쟁의 행위는 완전히 그렇다. 아무도 전쟁하는 것 자쳬가 16번째 제주 소피아 ‘울림‘ 를 65 蔘 이서영 :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철학자들의 고찰 좋아서 전쟁하지는 않는다. 싸움을 하고 살육을 하기위해서 사기 친구를 원수로 만드는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전적으로 살인적 인 사람이라 생각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정치도 한가함과는 어 울리지 않는다. 정치는 그 정치적 행동 이외에 전제 군주의 권력 이라든가 명예, 혹은 사기의 동포의 행복을 목적으로 삼는다. 이 행복은 정치적 행동과는 다른 것이요, 또 그와 다른 것으로서 추 구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설사 덕 있는 행동들 가운데서 정치적 행동과 군사적 행동이 그 고귀성과 규모의 크기0ㅔ 있어 뛰 어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은 한가함과 일치하지 않고 어떤 목 적을 추구하며 그 자처ㅣ 때문에 바람직한 걋이 아니다. 이에 반해 이성의 활동은 관조적인 갓으로서 그 진지함에 있어 뛰어난 가치 를 지니고 있고 그 사신 이외에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시 않으 며 그 자신에 고유한 쾌락과 자족성과 한가함과 싫증이 나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또한 다시없이 행복한 사람에게 속하는 걋으 로 볼 수 있는 모든 성질이 이활동과 결부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응당 이 활동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행복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물론 이렇게 되는데는 이 활동이 전 생애에 걸 쳐야만 한다. 행복의 속성치고 불완전한 것이란 하나도 없기 때문 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대부분의 내용은 정치적 삶의 행복을 위한 길을 알려주려는 목적이다. 그러나 제1권과 마지막 10권에서 삶의 세 가지 방식을 구분하고 가장 행복한 삶의 길을 말할 때 예로 드 는 것은 세 번째 삶의 방식인 이론적 삶 또는 관조적 삶의 형태이 다. 이로부터 오늘날까지 많은 아리스토텔레스 오拓1자들은 두 번 째 삶의 형태인 정치적 삶과 세 번째 삶의 형태간의 관계에 대해 많은 논쟁을 벌이고 있다. 인간이 행복에 이르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하는 길은 인 간학에서 출발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기능을 가장 잘 발휘하는 갓 이 좋은 삶, 성공적 삶, 즉 행복인 것이다. 인간의 가장 고유한 본 66 蓼 16번째 제주 소피아 ’울림‘ 이서영 · 행복이란 무엇인가 . 행복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철학자들의 고찰 성은 이성적 부분과 이성의 말에 귀 기울일 수 있는 비이성적 부 분 두 가지였다. 이에 해당하는 두 가지 삶의 방식이 다 행복과 관런된다고 할 수 있다. 비이성적 부분은 최고로 실현하는 삶인 정치적 삶과 이성적 부분만을 실현하는 관조적 삶, 그리고 행복이 탁월함에 따른 활동이라면, 당연히 최고의 탁월함을 따른 것이어 야 하고, 이 최고의 덕은 우리들 속에 있는 최선의 부분의 탁월함 이어야 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최상의 행복에 이 르는 길은 관조적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활동은 또한 가장 지 속적이기에 가장 큰 행복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다. 정치적 삶도 행복한 삶일 수 있으나 이는 많은 부분 우연에 맡겨셔 있다. 아무 리 내가 정치적 삶을 탁월하게 수행할지라도 외부의 조건이나 사 회적 조건이 따르지 않는다면 영원한 쾌락을 얻기는 힘들 것이다. 따라서 외부적 관계를 벗어나 아무런 시시비비에 휘말리지 않고 어떤 욕망에도 좌우되지 않으며 이성적 활동만으로 사는 것이 최 고의 행복일 것이다. 우리는 사회적 삶의 과정에서 삶과 진리에 대해 때로 고민하며 때로 자기욕구를 적절히 만족시키고자 할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 은 삶의 다양한 측면에서 자신의 활동과 삶이 탁월하고 성공적이 게 되는 곳에 존재할 것이다.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관은 오 늘날의 말로 하면 자기실현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라는 사 신에게 맞는 것을 찾고 자신이 잘 하고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사회 속에서 실현하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그 의미있는 것은 곧 사회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자기실현은 사기에게 맞고 잘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실현하는 것일 뿐이다. 이 과정이 좋은 삶이며 이때의 성공적 사기실현이 바로 자신의 탁 월함을 드러내는 성공적 삶, 즉 행복한 삶이다. 16번째 제주 소피아 ‘물림’ 驪 67 이서영 :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철학자들의 고칼 ifi. 현대의 행복이론 1. 칸트 : 행복의 불확실함과 공동쳬적인 사고방식 도덕적 실천에서 문제가 되는 두 가지는 감정과 이성이다. 칸트 는 이성적으로 행동해야지,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도덕적으 로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감정을 칸트는 경향성이라고 부른다. 경향성이란 ‘∼에로 쏠리는’ 성질, 욕구, 충동 같은 것을 말한다. 뿐 만 아니라 자기보존의 욕구,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느끼는 안락함 (복지), 행복, 그리고 의지가 도달하고 실현하고사 하는 목적도 경 향성에 속한다. 경향성은 인간의 이성과 대립되는 본능적인 측면 이다. 반면에 도덕적 실천을 위해 사용되는 이성은 실쳔이성인데. 칸 트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실천이성에 따라 자신의 내면에 있는 도덕법칙을 인식한다. 이 도덕법칙이 양심의 내용을 형성한다. 칸 트는 누구나 양심을 타고난다고 하는데, 이 말은 도덕법칙은 경험 적으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선험적인50)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 다; 도덕법칙은 우리가 마땅히 따라야하는 당위로서 우리의 도덕 적 의식에 자명하게 주어셔 있다. 우리는 도덕법칙을 오직 그것이 옳기 때문에 그것을 따르려는 의지에서 따라야한다. 도덕적인 사 람은 경향성에서가 아니라 오직 그것이 옳기 때문에 도덕법칙을 따르려는 의지에서 행동해야 한다. 이러한 선의지에 따른 행동만 이 도덕적이다. 반면에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려는 목적에서 행동 하는 것은 도덕적이지 않다. 칸트는 영국의 감정윤리학과 행복주의를 주관주의적이고 상대주 의적인 것이라는 이유에서 거부하면서 감정, 경향성을 따르는 것 50) 경험에 앞서는, 경험에 독립적인 68 I 16번째 제주 소피아 ‘물림’ 이서영 : 행복이란 무엇인가 빴 행복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철학자들의 고찰 은 도덕적이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적으로 본 능에 속하는 경향성에 따라 행동하려는 성향이 있다. 따라서 인간 이 도덕적이려면 욕구를 억제하고 도덕법칙을 따라야 한다. 그렇 기 때문에 도덕법칙은 인간에게 그가 따라야 할 의무로서 명령된 다. 이 명령은 무조건적인 명령이다. 그것은 가량 도덕법칙에 따르 는 것이 너에게 이익이 된다면 그것을 따르라는 조건적인 명령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조간하에서도, 따라서 우조건적으로 따라야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그것을 의무로서 이행하려는 동기이다. 그러한 동기에서 하는 행동이 혹시 결과적 으로 비도덕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되더라도 그 행동은 도덕적이 다. 따라서 칸트의 도덕철학을 동기주의 윤리샬이라고도 한다. 그 런데 도덕법칙, 양심은 누구나 선험적으로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도덕법칙은 외부로부터 강제된 법칙이 아니라 인간 자신 이 스스로에거I 부여한 규율이다. 따라서 칸트에게 도덕법칙은 자 율이며, 도덕적인 인간은 자율적이다. 만약 이성과 의지가 있는 존재에게 자기의 보존, 사기의 복시, 한마디로 사기의 행복이 자연의 원래 목적이라면, 사연은 자신의 이러한 의도를 그 피조물의 이성으로 실행하게 했다는 점에서 아 주 잘못된 준비를 한 셈이다. 왜냐하면 피조물이 행복해지기 위해 서 해야 하는 모든 행위와 행동규칙 전부를 본능이 훨씬 더 정확 하게 그 피조물에게 지시할 것이고, 이성이 할 수 있는 것보다 훨 씬 더 확실하게 본능이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 이다. 그리고 설령 이 축복받은 피조물에게 이성이 주어져야 했다 면, 그 이성은 오직 7겪그에게 운 좋게 주어진 소질을 살펴보고, 그 것에 경탄하고, 기뻐하며, 이렇게 만들어 주신 자비로운 분께 감사 하는 데만 사용되었어야 하며, 피조물 자신의 욕구 능력을 이성의 나약하고 기만하는 인도에 내맡겨, 자연의 의도에 서투르게 끼어 드는데는 사용되지 말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성이 실 16번째 제주 소피아 ‘울림‘ 필 69 이서영 :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철학자들의 고찰 천적으로 사용되어 그 보잘것없는 통찰로 주제넘게 행븍과 그것을 달성할 수단을 스스로 구상하는 일이 없도록 자연이 예방했어야 한다. 자연은 목적만이 아니라 수단까지도 선택해 이 두 가지를 오직 본능에만 맡겨두는 현명한 준비를 했어야 한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행복이라는 개념은 너무 불확실해서, 모든 인간이 행복을 얻으러고 소망하면서도 자신이 진정 무엇을 소망하 고 ‘하려고 하는지’ 한 번도 스스로 확정적이고 일관되게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그 원인은 행복이라는 개념을 이루는 모든 요소는 전부 경험적인 것, 다시 말해 경험에서 빌려와야만 하기 때운이다. 그렇지만 행복이라는 이념51)을 위해서는 나의 현재 상태와 모든 미래 상태에서의 복지의 절대적인 전쳬, 즉 최대량이 없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아무리 통찰력과 능력이 있다고 해도 유한한 존재라 면 여기서 그가 진정 무엇을 ‘하려고 하는시’에 대한 개념을 결정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행복을 이루는 요소는 경험적이지만, 행복 이라는 이념 자쳬는 이 경험적인 것 전쳬와 관련되고. 따라서 경 험에서는 얻어질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그가 재산을 바란다면 그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근심, 시기, 속임수를 짊어져야 할 것인가? 안약 그가 높은 학식과 통찰력을 바란다면 아마도 눈이 점점 더 날카로워져서, 비록 피할 수는 없을지라도 아직은 모ㄹ고 있는 나 쁜 일들이 그에게 점점 더 무섭게 보이거나, 이미 그를 충분히 애 태워 온 욕망에 한층 더 많은 피로가 쌓일 것이다. 만약 그가 오 래 살기를 바란다면 그것이 오랫동안 비참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고 누가 보증하겠는가? 만약 그가 최소한 건강만을 바란다면 아주 건강할 때 빠지게 되는 방탕함을 막기 위해 얼마나 사주 육쳬의 불편을 감수해야 하겠는가? 간단히 말해, 그는 우엇이 사기를 진 정으로 행복하게 해줄지 어떤 근본 법칙에 따라 완전히 확실하게 결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제 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알 51) 신, 세계와 같이 그 자쳬 강각 경험에 주어질 수 없는, 경험적인 것들 의 절대적인 전쳬, 칸트는 행복을 이념으로 간주한다. 70 졉 16번째 제주 소피아 ‘울림‘ 이서영 : 행복이란 무엇인가 ~ 행복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철학자들의 고찰 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정해진 원칙 에 따라 행위할 수 없고, 단지 경험적인 충고들, 여!름 들어 식이요 법, 절약, 예절, 사세 등 대쳬로 잘 사는 데 가장 필요하다고 경험 이 가르쳐주는 것들에 따라 행위할 수 있을 뿐이다. 칸트의 도덕법칙은 감성적 욕구와 이기적 욕망의 인간을 이성적 질서로 고양시키기 위한 안내자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내부에서 이성과 감성, 도덕성과 경향성, 사유와 욕구에 따른 필연의 충돌은 피할 수 없으며 항상 우리 삶을 위태롭게 한다. 그래도 우리 삶을 안전하게 하기위해 우리는 최소한의 도덕을 지키며 남의 눈치를 보며 산다. 하기 싫은 일이라도 해야만 할 일이 있고, 하고 싶은 일이라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이런 도덕적 당위를 내 스스 로 원하고 그것을 나의 행븍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가 말하는 최고 선에 이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삶에 대한 인식전환이 필요하 다. 도덕과 행복의 일치를 위해 나의 행복과 다른 사람의 행복이 충돌하는 걋이 아니라 조화될 수 있다는 것은 개인주의적 사고에 서 공동쳬적인 사고방식으로의 방향전환을 요구한다. 현실에서 타인과 관계 맺는 사회 속에서 우리의 삶은 의미를 가 지고 그 속에서 자신에게 맞는 탁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의 행복인 것이다; 칸트에게서도 이런 도덕 과 행복의 종합은 우리의 영혼이 무한대의 시간 속에서 성취할 수 있는 이상향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우리가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으로 작용할 때 의미있을 것이다. 그때 칸트가 의미하는 도덕과 행복의 종합은 바로 우리의 행복추구가 결코 나 만의 사아실현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개인이 자신만의 꿈과 욕구를 실현할 때 느끼는 만족이 과연 우리 모두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지에 대한 반성일 것이다. 자신의 이성과 강점을 탁월 하게 하는 자아실현은 사회 안에서 가능할시라도 개인적 차원에 머문다. 그러나 행복이 진정 사신만의 만족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16번째 제주 소피아 ‘울림’ 흴 71 이서영 :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철학자들의 고찰 사람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관점이 필요하다. 우리는 사신의 고통 을 무릎쓰더라도 남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을 또한 높이 평가한다. 칸트에게 있어 도덕법칙이란 보편적 관점에서 자신의 행동을 반성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도덕적 판단과 행동은 보편적 이 성의 관점에서, 타인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정당화되는 것이다. 그 리고 행복은 이런 도덕적 삶을 사는 것, 또는 자신의 삶이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모두가 바라는 공동선에 기여할 때 존재하 게 된다. 칸트가 말하는 정언명법이란 개인의 주관적인 준칙이 모 두가 바랄 수 있기를 원하는 것이다. 나의 행동이, 나의 꿈이 모두 가 인정할 수 있기를 원할 때 도덕적이며 행복할 수 있다. 이제 행복은 최고선의 한 부분을 이루는 것으로 된다. 다시말하 면 행복은 의미있는 삶일 때 가장 최고의 선으로 된다는 것이다. 자기의 특성과 강점을 발휘하는 자기실현의 삶이나 자기만족의 삶 으로는 완전한 행복이 되기 어렵다. 이 사기실현의 삶이 또는 개 인의 삶이 타인과 역사와 세계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고려하고 그 속에서 자기 삶의 의미가 밝혀질 때 삶은 비로소 자기에게 명 확하게 드러나며 기쁨을 줄 것이다. 2. 슈타인파트 : ‘좋은 삶’에서 개인화로 18세기에는 아직도 철학에서 행븍이라는 개념 하에 좋은 삶에 대한 주제가 집중적으로 논의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시기에는 좋은 삶에 대한 생각이 급격한 주관화를 경험한다. 이러한 경향과 더불어 좋은 삶은 그것의 고대적 원천으로부터 멀어졌고 학문적으 로 이해되는 철학에서는 점점 이론적으로 언급하기에 부적절한 것 으로서 나타나게 되었다, 인간의 본질을 인간학적으로 근거 짓든 혹은 우주론적으로나 신학적으로 근거 짓든 간에 인간의 본질규정 으로부터 좋은 삶을 도출하는 모든 시도에 대해서 회의가 증가했 72 콤 16번째 제주 소피아 ‘울림‘ 이서영 : 행복이란 무엇인가 · 행복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철학자들의 고찰 다. 이러한 회의는 개인적 삶의 영위에 관한 물음을 완전히 개인 의 자율에 맡기라는 규범적 요구에 의해서 강화되었다. 좋은 삶에 대한 급진적으로 주관화된 생각이 갖는 핵심적인 이 념을 칸트는 여러 곳에서 인용되는 “행복은 우리의 모든 경향성 들52)의 충족(다양성에서 광범위할 뿐 아니라, 정도에서도 집중적이 고, 앞으로도 시속적인 충족)이다.”라는 말로써 표현한다. 이것 역 시 물론 좋은 삶이라는 주제에 대한 철학적 주장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 보면 그러한 주장이 철학에서 권한을 가질 수 있는지는 논 쟁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어떤 경향성을 갖는지는 순수하게 경험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경향성과 선호는 사랑마다 다르다. 그래서 한 사람에게 좋은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나쁘다. 존 로크는 이미 17세기0긺 좋은 삶에 대한 고대의 이론과 뚜렷한 대조를 보이면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인간 오성에 대 한 탐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정신의 기호는 입맛처럼 여러 가지이다. 모든 사람의 굶주림을 치즈와 바닷가재로 충족시 키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을 부와 명예로 기쁘게 하려고 하는 것(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행븍을 찾는다)은 헛된 노력이다. 이런 저런 사람들에게는 치즈와 바닷가재가 잘 맞는 음식일 것이 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그것은 역겹고 몸에 맞지않는 음식일 수 있다.… 그것 때문어ㅣ 고대의 철학자들은 쓸데없이 최고선이 부 에 있는지 강각적 향유에 있는시 덕에 있는지 혹은 사색에 있는지 를 탐구했던 것일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의 권한을 가지고 사과가 가장 맛있는지 혹은 자두가 그런지 아니면 호두가 그런지에 대해 서 논쟁을 벌일 수 있을 것이고 그게 따라 학파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인간들은 여러 가지 것들을 선택할 것이지만 모든 선택 이 다 옳을 것이다.” 52) 마음의 쏠림. 칸트는 이성에 대립되는 감각적 욕 L를 경향성이라고 칭 했다. 칸트에 따르면 실천이성에 따르는 행위가 도덕적 행위이고 감각 적 욕구어ㅣ 따르는 행위는 도덕적이지 못하다; 16번째 졔주 쇠디아 ‘울림’ · 73 ~ 이서영 :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철학자들의 고찰 좋은 삶,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은 한갓된 기호의 문제로 설명된다. 이렇게 된 것은 로크처럼 마찬가지로 칸트도 행 복을 쾌락과 기쁨에 대한 경험으로 해석하는, 행복에 대한 쾌락주 의적 생각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렇게 행복은 행복감의 현전으 로 세한된다. 적어도 그런 경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무엇 이 행복인가는 특히 행븍과 기쁨이 가득한 순간을 쳬험하거나 조 망 가능한 길이의 시간을 쳬험하는데 에서 알 수 있기 때문에, 좋 은 삶에 관한 고대의 이론이 목표로 했던 삶의 ‘전쳬’는 시야로부 터 완전히 벗어나거나 순간적인 쳬험들의 총쳬로서 생각된다. 고 전적 공리주의에서 이러한 생각들은 행복이 측정가능하다는 생각 에 이른다. 그래서 그것들은 다시 객관화의 형식을 띠게 되는데, 또한 그와 더불어 좋은 삶에 대한 주제는 철학의 주제로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의식적으로 경험적 사회과학들에게 할당된 다. …좋은 삶에 대한 주관주의적 이해가 핵심적으로 주장해르 것은 그저 한 사람에게 좋은 것이 그의 그때그때의 경향성과 선호나 희 망에 의존한다는 사실이며, 이 사람은 또한 항상 내용적으로 이러 한 것들에로 향할 것이라는 것이다. 더 이상 좋은 삶에 대해서 철 학적으로 얘기될 수 없다는 것이다. 3. 프로이트 : 삶의 의미0뜁 대한 물음 인간의 삶의 목적에 대한 물음은 수없이 제기되어 왔다. 그것은 아직 만족할 만한 대답을 발견하지 못했고 절대로 만족할 만한 대 답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삶이 어 떤 목적도 없는 것이어야 한다면 그들에게 모든 가치가 사라져 버 릴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협박은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는 그런 물음을 거부할 권리를 갖는 것처럼 74 I 16번째 제주 소피아 ‘울림‘ 이서영 : 행복이란 무엇인가 춈 행복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철학자들의 고찰 보인다. 인간이 그러한 질문을 하는 데는 인간의 간방짐이 전제되 어 있는 것 같다. 우리는 그런 건방짐에 대해 그 만큼 많은 다른 언급들을 이미 알고 있다. 동물의 삶을 규정하는 것이 인간의 삶 을 위해 소용이 없을 때, 인간들은 동물의 삶의 목적에 대해서 말 하지 않는다. 하시만 인간이 동물의 삶의 목적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많은 동물들에게 서 그것들을 서술하고 분류하고 연구하는 것 이외에 그 동물들을 어찌할 줄 모르며, 수많은 동물의 종들이 인간이 그것들을 보기 전에 살다가 멸종하면서 인간의 이용으로부터 벗어나 있었기 때문 이다. 삶의 목적에 대해 대답할 줄 아는 것은 종교뿐이다. 우리는 거의 혼동의 여지없이 삶의 목적이라는 개념이 종교쳬계와 함께 생겨나고 사라진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보다 덜 까다로운 문제로 향한다. 인간들이 사신의 삶의 목적 혹은 의도라고 인식하는 것은 무엇인 가, 또 인간들은 삶에서 무엇을 요구하며, 살면서 무엇에 도달하려 고 하는가. 그에 대해서 잘못 대답하는 일은 거의 일어날 수 없다.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하며 행복하게 되고 행복하게 머물기를 바란 다. 이러한 노력은 두 가지 측면, 즉 긍정적 목표와 부정적 목표라 는 두 가지 측면을 갖는다. 그것은 한편으로 고통과 불쾌가 없는 갓을, 다른 한편으로 강한쾌감의 쳬험을 의욕한다. 엄밀한 의미에 서 ‘행븍’은 단지 후자와만 연관된다. 목표가 이같이 이분화됨에 따라 그에 상응해서 인간의 행위는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된다. 즉, 인간들은 그때그때 이러한 목적 중에서 전자 혹은 후자를 실 현하려고 노력한다. 알다시피 삶의 목적을 세우는 것은 쾌락원리53)의 프로그램이다. 이러한 원리는 처음부터 심리적 기관의 실행을 지배한다. 그것의 유용성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 프로그램은 전 53) 욕구의 만족을 추구하는 본능의 원리 프로이트에 따르면 쾌락원리와 현샬원리가 대립한다 16번째 제주 소피아 ‘울림’ I 75 이서영 :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철학자들의 고찰 쳬 세계와, 즉 미시적 세계뿐 아니라 거시적 세계와도 반목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관철될 수 없는 것이며, 우주의 모든 장치들이 그것어ㅣ 거스르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을 ‘행복’하게 하려는 의도는 ‘창조’의 계획 속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은 높은 둑으로 막아 놓은 욕구의 갑작스러운 층족에서 생겨나며 그것의 본성상 단지 에피소 드적인54) 현상으로서만 가능하다; 우리가 쾌락원리에 따라 판단하 는 지족적인 상황은 어느 것이나 미적지근한 쾌감만을 불러일으긴 다. 우리는 심한 차이만을 집중적으로 향유할 수 있고 상황을 단 지 매우 적게만 향유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행복의 가능성은 이미 우리의 구조에 의해서 제한되어셔 있다. 불 행을 경험하는 것은 훨씬 덜 어렵다. 세측면에서 고통이 위협한다. 첫째, 타락하고 구원되기로 정해져서 아픔과 공포를 위험신호로 서 불가피하게 겪어야 하는 자신의 신쳬로부터의 고통, 둘째, 압도적이고 무자비한 파괴적 힘을 가지고 우리에 대해 맹 위를 떨치는 외부세계로부터의 고통,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른 사랑과의 관계로부터 오는 고통이 그 것이다. 이 마시막 원천으로부터 유래하는 고통을 우리는 아마도 다른 모든 것들보다 더 고통스럽게 느낄 것이다. 우리는 어느 정 도 그갓을 불필요하거ㅣ 부가되는 것으로서 간주한다. 하지만 그것 은 다른 곳에서 유래하는 고통과 꼭 같이 운명적으로 불가피한 것 일 것이다. Iv. 인생의 의미에 대한 이론 54) 삽화적인, 삽화적 사건의. 굵직굵직한 사건의 연결 속에서 중요성이 없는 짧은 시기의. 76 I 16번째 제주 소피아 ‘울림’ 이서영 : 행복이란 무엇인가 · 행복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철학자들의 고찰 1. 쇼펜하우어 : 삶의 허무함과 고통에 대하여 삶은 크든 작든 간에 계속적인 기만으로 나타난다. 삶은 약촉한 갓을 지키지 않는다. 약속을 지킨다면 그것은 오직 소망한 것이 얼마나 소망할 가치가 없는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할 뿐이다. 말하사면 삶은 때로는 우리의 희망을 기만하고 때로는 우 리가 희망한 것을 기만한다.… 행복은 따라서 항상 미래에 혹은 과거에 있고, 현재는 바람이 햇빛 비치는 땅의 표면 위를 몰고 지 나가는 작은 검은 구름과도 같은 것이다. 현재의 앞과 뒤에 있는 모든 것이 밝고 현재만이 항상 그늘져 있다; 현재는 따라서 항상 불충분하지만, 미래는 불확실하고 과거는 다시 가져올 수 없다. 삶 은 매시간, 매일, 매주, 매년 크고 작은 불운과, 희망에 대한 기만 과, 모든 계산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는 사고들로 채워셔서, 우리가 싫어하는 어떤 것의 특징을 분명하게 지니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 이 어떻게 이러한 사실을 오인할 수 있었는시, 또 어떻게 삶이 고 맙게도 향유되기 위해 존재하고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 존재한다 고 설득될 수 있었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오히려 삶의 일반적인 성질이 그러하듯이 저 지속적인 기만과 실망은 다음과 같은 확신 을 일깨워 주기 위해 나타난다. 그 확신이란 우리가 노력하고 추 진하고 애쓰는 것들이 모두 가치가 없고, 모든 재산이 다 허망한 것이며, 세계가 결국에는 파산할 것이고, 삶은 수지맞지 않는 장사 이며, 우리의 의지는 거기로부터 몸을 돌린다고 하는 것이다.··· 낙관주의는 근븐적으로 본래 세계를 창시한 자의 부당한 사화자 찬이며, 사신의 작품 촉에 만족스럽게 반영된 삶의 의지의 자화자 찬이다. 따라서 낙관주의는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해로운 이론이 다. 왜냐하면 낙관주의는 우리에게 삶을 바람직한 상태로서 묘사 하고 인간의 행복을 삶의 목적이라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런 다 음 거기에 기초해서 모든 사람은 각기 행복과 향유에 대한 정당한 16번째 졔주 소피아 ‘울림’ I 77 얌 이서영 :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과 인생의 의미0ㅔ 대한 철학자들의 고찰 요구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이제 행븍과 향유가그러기 마련인 것 처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을 때 그들은 부당한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고 사신의 존재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하 지만 노동과 긍핍, 고통과 시련, 그리고 그 최후를 장식하는 죽음 0] 우리의 삶의 목적으로서 간주되는 것이 훨찐 더 옳은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삶의 의지를 부정으로 이끄는 것이기 때문 이다.… 우리 앞에는 물론 무밖에 없다. 하지만 이렇거ㅣ 무로 녹아들어가 는 것에 저항하는 것, 즉 우리의 본성은 바로 우리 사신이사 우리 의 세계이기도 한 삶에의 의지일 뿐이다.一· 하지만 우리가 우리 사신의 궁핍하고 난처한 상황얘서 눈을 돌려 세계를 극복한 사람 들을 바라본다면(세계는 온전한 자기인식에 도달한 의지로 하여금 모든 것 속에서 사신을 다시 발견하고 난 다음에 자기 7卄l을 자 유로이 부정하게 하며, 그러고 나서 의지의 마지막 혼적이 그것이 생명을 불어넣은 육쳬와 함께 사라지는 것을 보기를 고대한다), 우 리에게 나타나는 것은 쉼 없는 충동과 표류가 아니며, 또 바람에 서 저주로, 기쁨에서 슬픔으로의 끊임없는 이행도 아니고, 욕구하 는 사람의 일생의 꿈인 희망이 층족되지 못하고 사멸하는 것도 아 니라, 모든 이성보다 높은 평화이며, 완전히 바다와 같이 고요한 심정의 상태이며, 깊은 안식이다.∼. 인식만이 남고 의지는 사라졌 다.… 이것은 마치 인도인들이 말하는 세계영혼으로의 흡수나 불 교신자들의 열반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자유롭다고 고백한다. 의지를 완전히 부정한 후에도 여전히 남는 것은 아직 의지로 가득 찬 모든 사람들에게는 물론 무이다. 하지만 또한 거 꾸로 의지의 방향을 바꿔 그것을 부정한 사람들에게도 모든 자신 의 태양과 은하수들을 가지고 있는 이러한 우리의 매우 실재적인 세계가 있지만, 그것은 무인 것이다. 78 1 16번째 제주 소피아 ‘울림’ 이서영 : 행복이란 무엇인가 ~ 행복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철학자들의 고찰 2. 에드워즈 : 삶의 의미 이제 인간의 삶이 그때그때 살만한 것이고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즉 가치를 갖는 것인지의 문제를 살펴보자‘ 이 문저ㅣ도 염 세주의자들에 의해 명백히 부정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 삶이 허무하고 쓸모없는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염세주의자 들의 견해가 ‘틀렸다’는 사실을 어떤 의미에서는 보여 줄 수가 없 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삶 이 많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두 가지 방식으로 사주 전적으로 가치 가 있다는 사실을 매우 쉽게 보여줄 수 있다. 이러한 목적에서 우 리는 어떤 상황에서 ‘나의 삶은 살 가치가 있는가?’라고 묻게 되 고, ‘나의 삶은 더 이상 살 가치가 없어졌다’라고 확증하게 하는 원인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숙고해보려고 한다. 우리가 어떤 특 정한 행동에 대해서 가치 있는 일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 행동 들이 특정한 목표에 도달했다는 것을 주장하는 갓이다. 우리가 어 떤 삶이 살 가치가 있다고 말할 때 비슷한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 우리는 두 가지 주장들을 제기하는 것 같 다. 첫째는 해당하는 사람이 특정한 목표들을 갖는다는 것(더욱이 단순히 죽거나 고통을 덜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때 특정 한 목표들은 그에게 하찮은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둘째는 이러 한 목표들에 도달할 진짜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 각들은 자살을 생각한 적인 있거나 자살을 기도한 적이 있는 사람 들에 대한 여러 가지 쳬계적 연구들과 사람들이 실제로 자살을 행 하게 되는 상황에 디l한 연구에 의해 확증되었다. 해당하는 사람들 이 자신들의 삶이 더 이상 살 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할 때, 그들 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들의 삶에 그들에게 실제로 중요 했던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거나, 그들이 자신들의 ㅅㅅ로 정해 놓은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삶이 살 가치가 있다거나 더 이상 살 16번째 계주 소피아 ‘울림’ I 79 . 이서영 :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철학자들의 고찰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전적으로 흔동할 수 있다는 점을 주목 해야: 한다. 말하사면 그는 가령 장시 동안의 침울함을 시속적인 관심의 상실과 혼동하고 있거나 자신의 목표에 도달할 기회를 잘 못 평가하고 있을 수 있다.··· “자신의 삶을 공산주의 전파에 바쳤던 사람의 삶은 그 사람에겐 의미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의미 있는 갓이었나?”라 는 문장은 무의미해 보인다. 사람들은 ‘어떤 이의 삶이 그에게 의 미 있는 것이었다면 실제로 의미 있는 것이었고, 그것이 전부다’라 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삶이 갖는 가치가 문제가 될 때에 사람들은 이런 대답을 잘하지 않는다. 아이히만 같은 사람에 대해 서 ‘그가 유태인 학살을 감행했을 때, 그에게는 그의 삶이 보람 있 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의 목적이 나쁜 것이었기 때문에 그 의 삶은 가치 있는 것이 아니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 마도 우리는 ‘가지 있다는 말의 ‘주관적’ 의미와 ‘객관적’ 의미를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주관적 의미에서 볼 때 어떤 삶이 가치 있다는 주장은 그에 해당하는 사람이 사신이 하찮다고 생각하지 않는 자신의 목적들을 추구하고 이 목적들 또한 그가 도달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만을 말한다. 하지만 객관적 의미에서 볼 때, 이러한 주장은 해당하는 사람이 도달 가능하기도 하고 가치 있기도 한 목 적을 추구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논의의 결과는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닌데, 그것은 몇몇 사 람들의 삶이 때때로 우리가 구별한 두 가지 의미에서 가치 있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몇몇 사람들의 삶은 실로 주관적 의미에서는 가치 있지만 객관적 의미에서는 가치가 없으며. 또 다른 몇몇 사 람들의 삶은 객관적인 의미에서는 가치 있지만, 주관적 의미에서 는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가 놀라운 것이 아니라고 해서 그런 구별을 철회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어떤 독사들은 그 것이 염세주의자들의 도전에 대한 답변이 될 수 있느냐고 물을 것 이다. 인간들이 때때로 그들 사신에게 사소하게 보이지 않는 목표 80 鞭 16번째 졔주 소피아 ‘울림’ 이서영 = 행복이란 무엇인가 . 행복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철학자들의 고찰 들을 추 1한다는 공공연한 사실을 염세주의사는 부정하지 않는다 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을 걋이다. 하지만 염세주의자는 이러한 목표들이 때때로 달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필요 또한 없 다; 염세주의자는 심지어 인간에 의해 추구된 목적들이 피상적(‘직 접적’) 의미에서는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시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염세주의사는 우리의 이승의 존재에게 영원한 행복은 오지 않기 때문어ㅣ 그 목적들이 ‘정말로’혹은 ‘궁극적으로’가치가 있지는 않다고 덧붙일 것이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우리는 거리에서 마주 치는 사람과 염세주의자는 ‘가치 있다’는 표현을 같은 것으로 이해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혹은 그들이 실로 그것을 같은 것으 로 이해하더라도 상이한 가치척도들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말하사면 염세주의자의 가치척도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가치 척도보다 훨씬 까다롭다. 죽음이 끝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염세주의자들이 그들 자 쑈l의 척도에서 볼 때 삶이 결코 가치 있지 않다고 주장하 는 것이 부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염세주의 사는 종종 그러하듯이 이러한 주장으로부터 삶이 보통의 척도에서 볼 때 가치 있지 않다고 하는 사실을 추론하는 오류를 범한다. 영 원한 행븍이 아니라 지상의 행복은 삶을 가치 있게 만들지 않는다 고 하는 반론은 고려하지 않도록 하자. 어쨌든 왜 염세주의적 척 도가 아니라 보통의 척도를 포기해야만 하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 하는 것은 정당하다. 누군가 사신의 척도를 변경해야 한다면 보통 그렇게 하는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하지만 염세주의자는 자신의 통상적이지 않은 척도를 정당화하려뇨 하는가?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보통의 척도가 우리에게 염세주의자들의 척도가 층족시켜줄 수 없는 기능을 층족시켜 준다는 사샬에 주목 해야 한다. 말하사면 그것은 우리의 결정을 인도한다; 우리가 사는 한 우리는 결정들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염세주의자의 척도도 결정을 내리는 더ㅣ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 16번째 제주 소피아 ‘울림’ I 81 鬱 이서영 :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철학자들의 고찰 은 맞다. 하지만 대부분의 염세주의사들이 사살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은 자신의 척도에 따라서 볼 때 사살해야만 할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을 무시한다. 따라서 그들은 계촉해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삶에 있어서의 양 자택일(죽느냐= 사느냐)어ㅣ 마주친다. 이런 상황에서 염세주의자들의 까다로운 척도는 소용이 없고 실제로 그들은 보통의 척도를 사용 한다. 3. 슈미트 : 삶의 기술의 철학 아름다움의 본래적인 힘은 완벽함, 조화, 표면의 매끄러웅에 있 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삶의 형성과 관련해 말하는 긍정의 가능 성에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삶을 긍정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혐 성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것은 개인이 그것에 대해서 ‘그렇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왜 삶을 형성해야 하는가? 그것은 삶이 짧기 때문이다. 왜 삶을 ‘아름답게’ 형성해야 하는가? 그것을 위한 동기는 사신의 삶을 전 적으로 긍정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동경으로부터 나온다. 왜냐 하면 사신의 삶을 전적으로 긍정해야만 꺼려지는 상황에서도 거대 한 힘을 발휘하는 사존감이 강화되기 때문이다. 살아온 삶에 맞서 서, 가능한 삶에 관해 스스로 선택한 당위와 온전한 긍정을 가능 케 하는 고유한 삶의 이념이 작동한다. 이러한 이념을 따르지 못 하는 것은 자존감의 상실을 가셔올 것이다. 아름다운 것은 삶을 새로이 방향 짓는 안내자이며 ‘드문 매력의 소유사’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삶의 기술의 명령이 정식화된다; 그 명령은 매 걸음마다 전쳬 실존의 지평을 염두에 두고, 개인 자신애 의해서만 실행될 수 있다. 그것은 실존적 명령이다. 너의 삶을 긍정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형성해라. 긍정할 가치가 있는 것은 단시 편안하고 유쾌하 82 留 16번째 졔주 소피아 ‘울림’ 이서영 : 행복이란 무엇인가 U 행복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철학자들의 고찰 거나 20세기말에 즐겨 얘기되었던 것처럼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 다. 그갓은 오히려 마찬가지로 불편하며, 고통스러운 것이며, 추하 고 ‘부정적인’것이다. 형성은 미적으로 완벽함, 조화나 매끄러움만 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실패도 안다. 중요한 것 은 삶이 전쳬적으로 긍정할 가치가 있느냐는 것이다r·. 이러한 전제하에서 삶의 기술은 삶을 ‘아름답게 하고’ 삶은 기꺼 이 그것을 따라 한다. 하지만 아름답게 한다는 것은 삶을 긍정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는 의미에서이다. 삶의 기술은 사실상 사신에게 아름다운 삶을 만들어 주는 것이며, 그것을 위해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의 삶과 이 삶을 조건 짓는 관계들에 대한 노동 을 수행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측면의 실존의 미학, 즉 자기지배, 실존의 예술적 형성, 선택의 행위, 감각적 정신적 능력의 온전한 전개, 아름다움의 실현은 성취된 삶에 기여한다는 데서 일치한다. 이러한 삶은 행복한 순간들로 구성될 뿐 아니라 모순들도 배세하 지 않는다. 문세가 되는 것은 꼭 사람들이 쉬운 삶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러 극복할 수 없고 극복해야만 하는 어 려움으로 가득 차 있고, 끝까지 싸워서 해갈하고 견뎌 내는 저항 과 착종과 궁핍과 갈등으로 가득 차 있는 삶이다. 말하자면 보통 좋은 삶과 행복함이라고 간주하지 않는 모든 것이다. 이 좋은 삶 과 행복함은 너무나 쉽게 낭만적 오해에 빠셔든다. 아름다운 삶이란 현대적 행복, 즉 지속적인 안락함과 쾌락으로 층만 되고 고통이 없고 노동을 하지 않는 상태를 말하지는 않는 다. 그런 상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고 그렇 기 때문에 불행하게 되는 상태이다. 반면에 그런 상태에 도달한 사람들은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한 행복은 소비, 즉 소 모하고 파손하는 것으로 살아간다. 외적 및 내적인 재산, 그리고 관계들도 ‘좋다고 느끼기’위해서 자아에 의해 소모되어야 한다. 하 시만 신속한 소모뫄 그것이 남기는 공허함은 더 많은 소모를 더 집중적인 소모를 요구한다. 아무것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16번째 제주 소피아 ‘울림’ 1 83 鬱 이서영 :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철학자들의 고찰 중시되어서는 안 된다. 행복은 결코 행복 되지 않는다. 그러한 행 복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그것이 정치적으로 오용될 수 있다는 점 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단지 힘들이 소비에 집중된다는 점뿐 아니 라, 미래의 보편적이고 영원한 행복이라는 환상적인 유토피아를 모든 문명의 목적으로서, 완전한 평화와 조화로서, 고통과 불쾌의 부재로서 확정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좋은 삶을 위해 일반적으로 행복이 얘기될 수 있다면, 그것은 사족적인 행복이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 행복이나 스 토아적 행복으로부터 도출되며, 개인 7卄l이 사신의 고유한 쾌락 과 향유를 아는 사기지배에 근거한다. 이러한 쾌락과 향유는 소모 의 쾌락이 아닌 사용의 쾌락이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현대적 행 복을 필요로 하지 않고 ‘긍정적인 성공지향’에 모든 것을 걸지 않 는 사람이다. 삶의 기술이 경멸적으로 ‘현재 순간의 유아론55)'과 결합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행븍은 방해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사랑은 사신이 산출할 수 없고 단지 그것을 위해 준비할 뿐인 이러한 순간, 즉 운명적 행복. 신적인 우연에 자신을 개방시켜 놓 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복은 한 순간 시간을 망각하게 하고, 가장 그럴싸하지 않은 장소를 우주로 만드는 행복이다. 그것은 척도와 실존과 역사조차 파괴하는 아름다운 순간이며, 오직 부드럽게, 즉 시적으로 말해질 수 있는 순간이여, 사적이고 전적으로 전혀 공적 인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순간을 살고, 남김없이 맛보고, 화내지 않으면서 다시 가게 내버려두는 것이 삶의 기술의 한 구성요소이 다. 이런 의미에서 행복한 실존이 있다. 삶의 기술이 쉬운 삶에 대 한 통상적인 샘각과 관련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정말로 쉽 게 행복한 순간에 그것의 권리름 보증해주며, 모든 번잡스러움 속 에서도 7卄l의 고유한 다른 생각을 알고 있다. ‘그것은 그렇고, 나 는 오늘 삶을 사랑해.’ 다시 말해서 한동안 유행했던 노래의 소박 한 말로 말하면. ‘그건 멋진 삶이야’이다. 55) 유아론. 오로지 자기 밖에 없다는 이론. 84 톨 16번째 제주 소피아 ‘울림’ 이서영 : 행복이란 무엇인가 . 행복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철학자들의 고찰 4. 회페 : 도덕이 행복하게 만드는가? 유한한 이성적 존재는 두 가지 큰본관심을 갖는다. 한편으로 그 들은 이성적 존재로서 도덕적이기를 원한다. 유한한 존재로서, 즉 욕구를 가시고 있고 물리적, 정서적으로도 상처 입을 수 있는 존 재로서 이성적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비도덕적 방식 으로 행복해지기가 어렵다. 반면에 도덕과 그것의 도덕성으로의 고양은 자존감이라는 도덕적 감정을 보증해준다. 이러한 감정은 다시금 행하고 당하는 일을 되풀이하면서 저 이성과 욕구의 통일 을 형성하고, 동시에 그것 없이는 인간이 어떤 지속적인 행복도 발견하지 못하는 유의미성을 형성한다. 자존감은 인간에게 자기만 족을, 더욱이 자신의 현존재에 대한 만족을 가져다준다. 이것은 어 떠한 종류의 일을 당하더라도 행복의 쳬험, 안녕을 촉진시킨다. 이 미 서양의 도덕철학익 시조인 소크라테스가 말했듯이 여기서 좋음 과 안녕은 하나의 통일을 형성한다. 완전한 도덕은 물른 그것으로 도달되지 않는다. 자=l의 삶의 계 획들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머물러 있는 사람이나 나쁜 일을 당한 ㅅ 귿才므 자시 으」 ㄷ= 더 전 ㅈ 不z} 두 ㄱ 킨 =7 거 기 ㄹ 브 【ㅋ 】 ㅑ ㅇ 느 아녀 도 상실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신의 전쳬적인 처 지에 있어서 자신이 심하게 방해받고 있음을 본다. 이러한 삶의 상태와 감각의 상태는 실존적으로 배제될 수도 없고 철학적으로 부정될 수도 없다. 도덕성은 자연적이고 사회적인 세계에 작용해 서 실제적인 행복을 촉진시키지만, 세계는 항상 도덕성에 비례하 는 행복이 생겨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도덕성은 도덕적인 개 인들 각사에게도 그들의 공동쳬나 사회에게도 행복을 함께 구성하 는 요소들을, 즉 삶의 보존과 삶의 향유를 보장해 줄 수 없다. 도 덕성만으로는 확실한 척도는 마련되지만 충만한 행복은 마련되지 16번째 제주 소피아 ‘울림’ 뿔 85 뺨 이서영 :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철학자들의 고찰 앉는다. 신앙은 그것이 종교적 신앙이든 도덕적 이성신앙이든 간에 하나 의 탈출구를 마련해 준다. 신앙은, 물론 이 세상에서는 아니지만 내세에서 보답을 해 주는 전지, 전능하고 전적으로 옳은 신을 내 세운다. 거기에 덧붙여 신앙은 내세에서의 보답을 쳬험할 것을 허 락하는 죽지 않는 영혼을 내세운다. 거기에 덧붙여 신앙은 내세에 서의 보답을 쳬험할 것을 허락하는 죽지 않는 영혼을 내세운다. 하지만 신앙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 그러니까 심판하는 신도, 신의 법정에 내맡겨진 불멸의 영혼도 받아들이시 않는 사람에게는 우엇 이 남는가? 단지 적은 범위의 사람들에게서뿐 아니라 세계의 많은 부분에서 무신론이 활성화되고 적어도 신이 암묵적으로 죽은 것으 로 천명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올바른 사람은 불행하게 되는 반면 악한 사람은 행복하게 된다 는, 소위 궁극적인 행복의 상실이라는 유행하는 협박은 신이 없는 세계질서에는 쓰여 있지 않다. 올바른 사람은 세상이 끝나고 저 세상에서 결국에는 행복하거l 된다는 희망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이 라면 결코 확실한 행복의 상실이 일어날까봐 두려워할 필요도 없 다. 결국 행복을 상실할까봐 두려워하는 공포 때문에, 도덕어I 대한 존경심에 반대해서 말할 수 있을 부정적 동기는 없어져 버린다. 반면 개인적 실용주의적 및 사회적 실용주의적 논의는 도덕을 변 호함으로써 도덕이 세계에서 점점 더 관철될 수 있게 한다. 물론 여기서 전제되는 것은 상당히 많은 사랑들이 실용적인 논의들에 맞게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올바른 사람들은 이러한 도덕의 관철 을 더욱 촉진한다. 더욱이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본보기로서 모방할 가치가 있는 도덕의 최고형태, 도덕성을 형성한다. 개인적 행복에 대한 관심에서뿐 아니라 집단적 행복에 대한 관 심에서도 대부분의 도덕을 위한 좋은 논의들이 발견된다. 많은 걔 별적인 경우에 실로 행복은 도덕성에 반대해서 말해질 것이지만, 행복은 어떤 절대적인 거부권도 제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도덕성 86 를 16번째 졔주 소피아 ‘울림‘ 이서영 : 행복이란 무엇인가 ~ 행복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철학자들의 고찰 으로부터 생겨나는 사기존중이 행복의 쳬험을 촉진시킨다는 사실 은 도덕을 변호해 준다. 행복은 결코 에피쿠로스적인 도덕의 완화, 즉 도덕을 삶의 향유에 맞추는 것에 찬성표를 던지지 않는다. 왜 냐하면 많은 잘못된 해석과는 반대로 도덕은 삶에게나 쾌락에게나 적대적인 것이라고 생각되시 않기 때문이다. 도덕은 단지 삶과 쾌 락에게서 그것들에게 궁극적인 원동력의 자격을 부여하는 면허를 빼앗음으로써 그것들을 상대화할 뿐이다. 게다가 완화된 도덕은 도덕성 에서 생겨나는 만족과 안녕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만족 과 안녕이 없이는 충만한 도덕도 성취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성을 변호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복에의 열망이 아니라 도덕적 존재로서 자기에 관해 순수하게 존재하려는 인간의 관심이라는 사실이 존속한다. 왜 도덕적이어야 만 하는가라는 질문을 엄밀한 의미에서 이해하는 사람, 따라서 종 종 도덕적이어야 하는 이유에서 만족을 경험하지 못하고 항상, 그 리고 도덕 때문에 도덕적이어야 하는 이유에서 만족을 경험하는 사람에게는, 단시 도덕적 사기존중에 대한 독!媤과 사신의 잘못에 서 자기존중을 상실할까 봐 염려하는 마음만이 답변을 줄 수 있 다. 많은 것들에 대해 우리는 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 동료나 상황 에 책임을 지울 수 있다. 하지만 사기존중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 로 혼사만이 질 수 있다. 여기로부터 이런 결산표가 나온다. 운명의 일치 없이는 도덕적 이성이 어떤 성공적이고 충족된 삶을, 어떤 완전한 행복을 줄 수 없을 지라도, 도덕적 이성은 이 행복을 놓고 도박하지는 않는다. 도덕적 이성 없이는 이 행븍은 결코 기대될 수 없다. 이러한 사정 과는 무관하게, 인간은 진정으로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과제를 사 기를 제외한 아무것에도, 아무한테도 부과할 수 없다. 내가 생각하 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잘못된 것에는 결코 올바른 삶이 있시 않다는 아도ㄹ노의 말은 여기에 적중하는 것이다. 말하사면 도덕 과는 독립적인 이유에서 도덕적인 개인으로 사는 사람은 도덕적으 16번째 제주 소피아 ‘울림’ 콤 87 脯 이서영 :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철학자들의 고찰 로 올바로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그가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을 도덕과는 독립적인 이유에서 행하기 때문에, 그는 진정으로 도덕 적인 개인은 아니다. S. 네이글 : 삶의 의미 아마 당신은 200년 후어ㅣ는 우리 모두가 죽을 것이기 때문에 우 리가 무슨 일을 하든 모두 덧없는 것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있을시 모른다. 이것은 참 특이한 생각이다. 왜냐하면 200년 후에는 우리 모두가 죽는다는 사실이, 우리가 지금 하는 모든 것이 왜 모두 덧 없는 일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시 않기 때문이다. 그 생각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목표를 성취하고 우리의 삶에 무엇인가를 만들어보려고 투쟁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섬취가 영원한 것일 때만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라는 것과 같다. 그러 나 우리의 성취는 그렇지 못한 찰나적인 걋이다. 비록 당신이 지 금으로부터 수천 년 뒤에도 계속 읽힐 위대한 문학 작품을 쓴다 하더라도, 종국적으로 태양계가 식게 되거나 우주가 축소되어 붕 괴되어 버리면 당신 노력의 발사취는 사라져 버릴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이러한 불멸성의 조그마한 일부조차도 희망하기 힘들다. 만약 우리가 하는 일이 외부에서 볼 때 덧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의미를 우리 삶의 내부에서 발견해야한다. 왜 그런 작업에 어려움이 있는가? 당신은 당신이 하는 일의 대 부분에 대해 의미를 설명할 수 있다. 당신이 돈을 버는 이유는, 당 신 자신과 혹 당신이 결혼했다면 당신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이다. 당신은 배가 고파서 먹고, 피곤해서 자고, 그냥 그렇게 하고 싶어 서 산보하거나 친구에게 전화를 걸고, 세상 물정을 알고 싶어서 신문을 읽는다. 만약 당신이 이들 중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면, 당 신은 아주 불행해지리라. 자, 그렇다면 도대쳬 워가 그리 대단한 88 韆 16번째 제주 소피아 ‘울림’ 이서영 : 행복이란 무엇인가 灌 행복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철학자들의 고찰 문제인가? 문제는 비록 읽크이 살아있는 동안에 하는 대부분의 일에 대해 그것이 크든 작든 간에 정당한 이유나 설명이 있게 마련이지만, 그 어떤 것도 [ 0-工 인생 전쳬의 의미를 설명하지는 못한다는 것이 다. 이 모든 행위, 성공과 실패, 투쟁과 실망이 그 한 부분으로 있 는 그 인생의 전쳬 의미를 말이다. 만약 당신이 그 전쳬에 대해 생각해 보면, 거기에는 아무런 의미도 있는 것 같지 않다. 외부에 서 보면, 당신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조차 아무런 문 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당신이 죽고 난 후에, 당신이 한때 존재 했었다는 사실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겠는가? 물론 당신의 존재는 당 :그 부모와 당신을 아끼는 다른 사람에게 는 중요하다. 그러나 전쳬를 놓고 볼 때 그 사람들의 인생 또한 의미가 없는 것이어서, 당신이 그들에게 중요한 존재가 된다는 사 실자쳬가 궁극적으로는 덧없는 것이다. 당신은 그들에게 중요하고 또 그들은 당신에게 중요하다는 이런 관계가 당신 인생에 어떤 의 미가 있다는 느낌을 줄지는 모르나, 당신은 소위 말해 사람들이 서로 위안하려고 통용하는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에 불과하다. 어 또! 사람이 존재한다고 전세하면, 그는 당신의 삶 속에 있는 특정 한 사물과 사람들이 당신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 되도록 만들려고 하는 관심과 필요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전쳬를 놓고 보면 아무 런 의미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의미가 없다고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가? 당신은 ‘그래 서 도대쳬 어떻단 말인가? 내가 기차를 놓치지 않게 역에 도착했 는지,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등을 생각 하는 데도 바쁜 인생이다. 세상 살아가는데 그 이상 무엇이 필요 한가?’라고 말할지 모른다. 이것은 그 사체로 아주 좋은 반응이다. 하지만 이 반응은 당신이 시야를 좀 더 높은 데 두고, 이 전쳬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것을 정말로 피할 수 있을 때 에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만약 당신이 한번이라도 그런 생각을 하 16번째 제주 소피아 ‘울림’ 戮 89 ~ 이서영 :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철학자들의 고찰 게 되면, 당신의 삶 전쳬가 전혀 무의미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당신은 봉착하게 되기 때문이다. 당신이 200년 후에 죽을 것이라는 생각은 당신의 삶이 보다 큰 문맥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바라보는 한 방법이어서, 그 삶 촉에 있는 자질구레한일들이 별로 대수롭지 않고, 무엇인가 큰 질문이 대답되어지지 않은 채 놓여 있는 듯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전쳬로서의 당신의 삶을 보다 큰 무엇과 연결해서 생각해 볼 때: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이 의미 하는 바는 결국 당신의 삶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인가? 당신의 삶이 보다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방법에는 여러 각지 가 있다. 당신은 미래의 세대에게 혜택을 주는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 정치적.사회적 운동의 한 부분인지 모른다. 혹은 당신은 당 신의 자식과 그 후손들에게 좋은 삶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혹은 당신의 삶은 종교적 맥락에서 의미가 있어서, 당신이 지구에서 보내는 시간은 신과의 직접적인 만남이 가능한 영생을 위한 준비기간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먼 장래의 사람까지 포함한 타인과의 관계에 의존하는 의미의 유형에 대해, 나는 이미 그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지적했다. 만약 우리의 삶이 보다 큰 것의 한 부분으로서 의미를 갖는다면, 그 크 다는 것은 도대쳬 무엇이며,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라는 물음은 여전히 제기될 수 있다. 거기에 대해서는 보다 큰 관 점에서 대답이 주어지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만약 대답이 있다면, 우리는 단순히 질문을 되풀이해서 물어 보아야 한 다. 만약 더 이상 대답이 없다면, 의미를 찾고사 하는 우리의 노력 은 드디어 더 이상의 의미가 없는 것과 함께 끝나 버린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인생이 한 부분이 되는 보다 큰 것이 무의미하다고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 왜 전쳬로 받아들여지는 우리 인생이 무의 미하다는 것을 그 이전에 벌쩌 수용할 수는 없는가? 왜 당신의 삶 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는가? 그리고 만약 여기서 수용 잇〕 · 16번째 제주 소피아 ‘울림‘ 이서영 : 행복이란 무엇인가 . 행복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철학자들의 고찰 될 수 없는 것이라면, 왜 갑사기 보다 큰 문맥 속에 들어가서는 수용될 수 있는가? 왜 우리는 계촉해서 ‘흐러나 그러한 모든 것의 의미는 대쳬 무얏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없는가? 삶의 종교적 의미를 호소하는 것은 약간 성격이 다르다. 만약 당신이 당신 삶의 의미가 당신을 사랑하는 신의 옥적을 수행해서 그를 영원히 보는 것으로부터 온다고 믿는다면, ‘그런데 그것의 의 미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듯하다. 그것은 원 래 그 사쳬로 의미를 가시는 것이고, 그 자쳬 밖에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그것은 그 사쳬 의 문제들을 가진다. 신이란 개념이야 말로 그 자쳬로 샬명될 필요 없이 다른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그런 개념인 듯하다. 그러나 그런 존재가 어 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갓은 대단히 힘들다. 만약 우 리가 ‘왜 세상은 이와 같이 만들어셔 있는가?’라고 물은 뒤에 어떤 종교적 대답을 듣는다면, 어떻게 우리는 ‘그런데 왜 그것이 전실인 가?’ 라는 질문을 되풀이해서 물어보시 않게 될까? 어떤 대답이 우리 모두로 하여금 ‘왜 그런가?’라는 질문을 다시는 던시지 않도 록 만들 것인가? 그리고 만약 신에 이르러 비로소 그러한 질문을 멈추게 된다면, 왜 그보다 더 일찍 멈추지 못했던가? 만약 신과 그의 목적이 우리 삶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최종적인 설명이라면, 마찬가지로 문제가 일어나는 듯하다. 우리의 삶이 신 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더 이상의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 방법으로 의미를 부여하도록 되어있다. ‘신의 설명이란 무엇 인가?’라고 묻지 않듯이, ‘신이 가진 의미는 무엇인가?’라고 묻지 는 않는 법이다. 그러나 궁극적인 설명으로서의 신의 역할과 관련해서 내가 가지 는 문제점은, 그 개념을 내가 잘 이해하고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 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것에게 그갓을 감싸줌으로써 의미를 주면서, 그 자쳬로는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도 가질 필요도 없는 존재가 16번째 제주 소피아 ‘울림‘ 뿜 91 i 이서영 :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철학자들의 고찰 정말로 있을 수 있을까? 더 이상의 외부가 없기 때문에 외부로부 터 물어질 수 있는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그런 존재가 도대쳬 있 을 수 있단 말인가? 만약 신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의미를 우리의 삶에 부여해 주는 존재라면, 그것은 별 위로가 되지 못한다. 궁극적 설명으로서 의 신과 마찬가지로 궁극적 정당화로서의 신 또한 우리가 없애 버 릴 수 없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알아들을 수 없는 대답에 불과한 지 모른다. 다른 한편으로 아마 그것이 우리가 알 수 있는 전부인 지도 모르고, 나는 종교적 사고를 이해하는데 그냥 실패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아마 신에 대한 신앙은, 이 우주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의미로 가득 찬 것이라는 믿음인지 모른다. 그 쟁점은 제쳐 놓고, 인간 삶의 보다 작은 규모의 차원을 이야 기해보자. 비록 전쳬로서의 인생은 무의미할지 모르시만, 아마도 그것은 별걱정할 바가 아닐 것이다. 아마 우리는 그런 문제를 인 식하고도 예전과 다름없이 살아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 요령은 당신 앞에 있는 것에만 신경을 쓰면서. 의미를 찾는 작업이 당신 삶의 내부에서 또 당신과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삶의 내부에서 끝 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당신 스스로에게 ‘그러나 도대쳬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한 번이라도 던진다면, 당신이 학교생활을 하든, 술집 종업원 생활 을 하든, 또는 어떤 자리에 우연히 있든 간에 당신은 ‘거기에는 아 무런 의미도 없다; 만약 내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서, 혹은 만약 내가 아무것도 개의치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없다. 그러나 나는 존재하고, 매사에 신경을 쓴다. 그것이 전부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태도를 완벽하거ㅣ 만족할 것으로 안다. 다른 사람들은 피할 수 없는 결론이기는 하지만, 대단히 우울하게 그것 을 받아들인다. 문제는 우리 중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너무 심 각하게 생각하는, 고칠 수 없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외 92 I 16번째 졔주 소피아 ‘울림’ 이서영 : 행복이란 무엇인가 ~ 행복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철학자들의 고찰 부로부터’볼 때, 우리 자신에게 중요한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 만 약 전쳬로서 본 우리의 삶이 무의미한 듯하면, 우리 사신 내부의 일부는 실망한다; 그 우리 자신의 일부는 다름 아닌 우리가 하는 일을 우리 어깨 너머로 항상 지켜보고 있는 존재를 말한다. 그냥 일신상의 편안이나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원대한 야망을 성취하 기 위한 많은 인간의 노력은 특히 사기 사신의 일이 가지는 중요 성을 느끼는 감적에서 그 힘을 얻는다. 그 감정은 당신이 하고 있 는 일이 단순히 당신 자신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보다 더 큰 의미에서 중요한, 즉 중요함 그 사쳬라는 갓을 느끼는 감정이다. 만약 우리가 이 중요함을 포기해야 한다면, 그것은 돛단배에게 바 람을 빼앗아 가는 것과 마찬가지인지도 모른다. 만약 삶이 진정한 것이 아니고 성실한 것도 아니고 무덤이 그 목표라면, 아마 우리 사신을 그토록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이 우스운 일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만약 우리가 사신을 그토록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연, 아마 우리는 우스꽝스럽게 취급당하는 것을 그냥 참고 지 내야: 할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삶이란 무의미할 뿐 아니라 우 스꽝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V.결론 고대에서 현대까지, 또 인생에 대한 철학사들의 이론을 살펴보 았지만 구지 행복에 대한 개념을 세 가지 방식으로 정의해보차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자아실현으로서의 객관주의적 행복관, 에 피쿠로스에 따른 개인의 만족을 통한 주관주의적 행복관, 칸트의 도덕개념을 해석한 의미 있는 삶으로서의 보편 주의적 행븍관이라 고 말하겠다. 노동을 매개로 하여 사신과 외부세계의 관계를 중시하는 삶의 16번째 제주 소피아 ‘울림‘ I 93 錢 이서영 :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철학자들의 고찰 방식, 사신과 자신의 내면의 관계를 중시하는 삶의 방식, 마지막으 로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삶의 방식이 있다면 객관주 의적 행복관은 자신과 외부세계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는 행복이 며, 주관주의적 행복관은 사신과 내면의 관계에서, 보편 주의적 행 복관은 자신과 타인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는 행복일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하면 각각의 철학자들이 대변하는 행복관은 그 사쳬만으로는 모두 문제점을 가진다. 사아실현으로서의 행복관 은 우리가 자신의 삶을 어떻게 대하고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 는지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덕과 강점을 발휘 하는 자아실현이 현실의 근본적 가치기준에 대해 반성하지 못할 때 그 자아실현은 단순히 현실을 인정하는 삶의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나의 자아실현이 단순히 기존의 권력과 제도를 인정하는 방식이 되지 않기 위해 현실과 사회를 반성하게 하는 에피쿠로스 의 삶의 방식이 필요하다. 에피쿠로스의 행복관이 비록 개인주의 적 삶의 방식에 기초하더라도 사아실현에서 중요한 것은 사회와 현실을 반성하는 나의 마음임을 일깨워준다. 내 마음의 평화와 안 정을 위해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 명확히 알고 모든 환상과 거짓,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회와 현실에 대한 반성의 결과가 개인주의적 쾌락을 중시하는 삶의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은 공동쳬로서의 인간에 대한 반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행복을 위해 칸트는 우리의 마 음에 있는 선의지, 도덕법칙을 존경하는 마음을 일깨우기를 원한 다. 도덕법칙을 존경한다는 것은 나의 의지가 나만의 의지가 아니 라 모든 사람의 의지를 고려해야한다는 것이다. 나의 꿍이 이미 공동쳬에 의해 만들어지고 공동쳬의 선을 우리가 함께 만든다는 것을 알 때 나의 삶은 의미 있을 것이다. 삶의 세 가지 방식은 전쳬적인 삶의 각각의 부분만을 나타낼 뿐 이다. 우리는 항상 전쳬로서의 삶을 살 수밖에 없으며 우리가 살 아가는 순간에도 삶은 세 가시 방식 모두를 취하고 있다. 이럴 때 ,4 琇 16번째 제주 소피아 ’울림‘ 이서영 :' 행복이란 무엇인가 ` 행복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철학자들의 고찰 우리의 행복은 세 가지의 행복개념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이런 삶일 때 이런 행복개념이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삶은 전쳬이기에 세 가지 행복 개념 모두가 함께 작용하는 걋이다. 나의 사아실흰 은 곧 우리의 자아실현이기에 의미 있으며 이럴 때 우리는 흔들리 지 않는 단단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비록 삶에 우연한 곤 란들이 있을지라도 나의 삶이 이런 과정일 때 우리는 스스로 행복 할 수 있다. 결국 행복을 느끼는 것은 사기 자신이기 때문에 끝없는 자기반 성과 비판이 있을 때 진정한 행복이 주어진다. 행복이 무엇인지 내가 지금 행복한가에 대해 답할 수 있는 갓은 나 자신이기 때문 이다; 참고문헌 강순전·이진오, 『철학,· 윤리, 논술 교육을 위한 철학수업』, 학이시 습, 2011 이상형, 『철학사의 행복 여행』, 역락. 2013 샤를페팽(이세진 옮김)『철학을 만나는 시간』, 삼양미디어, 2013 아리스토텔레스(흥석영 옮김) 『니코마코스윤리학:아들에게들려주는 행복의길』, 풀빛,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