從地涌出品(종지용출품) 第十五
4. 미륵보살의 의문(疑問)
(3) 솟아 나온 보살들의 수량(數量)
지금 저희들이 공부하고 있는 부분이 종지용출품 이라고 하는 품인데
“땅에서 수많은 보살들이 솟아올라 왔다.”
도대체 이 보살들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훌륭한 부처의 모습으로서
전혀 손색이 없는 그런 인격을 갖춘 사람들이냐?
그것도 이제 그들이 올라 올 때 꼭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부처님이 타방 보살들이 소위 법화경을 펴겠다, 진리를 이 세상에 펴겠다 라고
이렇게 말할 때 그대들은 필요치가 않다.
왜 그대들을 타방 보살이라고 했겠는가?
뭐 이런 이야기를 그 순간에는 해설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대들은 필요치가 않다” 라고 하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땅이 갈라지면서 수많은 보살들이 올라왔고
그 수많은 보살들을 말하자면 아주 훌륭한 그런 부처로서의 아무 손색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부처님의 제자들은 의심을 하게 되지요.
도대체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생이라고 하는 것은 뻔한데,
그리고 법화경을 설할 때까지 평생을 49년 설법이라손 치더라도
법화경을 설할 때까지가 기껏해야 한 44~ 5년 동안의 그런 교화 활동인데,
그 교화 활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교진여 같은 사람은 다 지켜보았잖아요.
법화경 그대로 우리가 이야기를 하자면
이 순간까지도 지켜본 것으로 되어 있지요.
그런데 그 부처님 제자로서 부처님에게 교화를 받은 사람들의 숫자를
아란존자 같은 이는 다 외우고 있고,
교진여 같은 이들도 역사적인 인물이니까 다 알고 있지요.
사리불 같은 이, 가섭존자 같은 이들도 다 알고 있는데
그들이 알지 못하는 보살들이 땅에서 올라온 것으로 이야기 되고,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들이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았다고 그렇게 이야기가 되느냐?
도대체 그것이 무슨 뜻이냐?
이제 그 뜻을 드러내는 것이 법화경이고, 특히 후반부 본문의 주된 일이고
또 그것은 결국은 여래수량품에 가서 반복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지요.
전체 흐름이 그렇게 되어 있다 라고 하는 것을 말씀 드리고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땅에서 솟아 나온 보살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느냐? 그 뜻이지요.
하나 하나의 보살들이 데리고 온 권속들이
그 수효가 한량이 없어 항하강의 모래 수와 같습니다.
어떤 대보살의 권속은 육만 항하사인데
이렇게 많은 대중들이 일심으로 불도(佛道)를 구하며
이 항하사 라는 말을 이렇게 쉽게 씁니다마는
예를 들어서 육만 항하사 합시다.
항하수의 모래수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항하 강의 모래를 한 주먹만 잡고
이 숫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라고 우리가 생각해볼 때
그것도 정말 도저히 우리의 능력으로서는 헤아려낼 수가 없지요.
해운대 백사장의 모래나 한강 백사장의 모래같이
그렇게 낱알이 굵은 모래가 아니 예요.
항하 강의 모래는 그 특색이 밀가루를 만지는 듯 한 아주 고운 모래입니다.
그러니까 숫자의 비교가 안 되지요.
우리나라 바닷가의 어떤 모래 수하고 같은 한 주먹이라 하더라도
그 수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그렇게 많습니다.
그런데 항하 강이 육 만개나 있고
그 육 만개에 있는 항하 강의 모래 숫자 전체만한
그런 많은 숫자의 보살들, 이런 뜻입니다.
한 개의 항하강의 모래수라 하더라도,
아니 한 주먹 안의 모래수라 하더라도 그 수가 이루 말 할 수가 없는데
이렇게 까지 이야기 합니다.
참 이 인도 사람들의 사고력이라고 할까요?
이런 것들이 우리가 듣기에는 어의가 없는데
그 어이없는 사고를 이 분들은 거침없이 인도 일상사 같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비유를 해도 어떻게 이렇게 까지 할 수가 있습니까?
경전에 그렇게 표현되어 있으니까 그대로 우리가 받아 들여야지요.
육만 항하사인데 이렇게 많은 대중들이 일심으로 불도(佛道)를 구하며
이 여러 큰 스승님들 육만 항하사나 되는 분들이 함께 와서
부처님께 공양하고 이 경전을 수호(守護)합니다.
오만 항하사의 권속을 거느린 보살은 그 수효가 이보다 더 많으며
그러니까 육만 항하사의 권속을 거느린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많고
또 그 권속을 오만 항하사 숫자만큼 거느린 사람들은
그 수효가 더 많다는 것이지요.
그 팀이 더 많다 이것입니다.
사만 항하사나 삼만 항하사, 이만, 일만 항하사, 일천 항하사,
일백 항하사 내지 일 항하사도 있습니다.
반 항하, 삼분의 일 항하사, 사분의 일 항하사 내지 억만 분의 일 항하사이며
천만 나유타의 권속과 만 억의 제자들을 거느렸습니다.
또 반 억의 권속을 거느린 이는 그 수효가 이보다 더 많고
백만 권속, 내지 일만 권속, 일천 권속, 일백 권속이며
오십, 열, 내지 셋, 둘 하나의 권속을 거느린 이도 있습니다.
권속은 없고 단신으로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보살들까지 모두 부처님께 오니
그 수효는 더욱 더 많습니다.
이렇게 많은 대중들을 어떤 사람이 산수로 헤아려
항하사 겁을 지내도 다 알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많은 대중들을 어떤 사람이 산수로 헤아려
항하사 겁을 지내도 다 알 수 없습니다.
항하강의 모래숫자와 같은 겁을 지내면서 헤아린다 해도, 다 헤아릴 수 없다.
그런 많은 이들, 이것이 결국은 어떤 뜻이냐 하면,
모든 생명 모든 사람이 부처님이고
그야 뭐 보살이라고 부르든 부처님이라고 부르든 도인이라고 부르든
선지식이라고 부르든 사람이라고 부르든 그 명칭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똑 같은 하나의 뜻을 두고 하는 말이니까요.
그래서 법화경 어느 구절을 보더라도 사람이 부처님이다.
또 나아가서 모든 생명이 그대로 부처님이다.
그것이 아니고야 어찌 이렇게 많고 많은 숫자를
보살이라고 이렇게 표현할 수가 있겠는가?
저 앞에서도 있었지만 다 부처님 상호를 갖춘 그런 보살!
그것도 또 암시하고 있는 내용이 부처님이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본래로 부처님이라고 하는 그것을 알면 우리는 끝이지요.
부처인데 더 이상 바랄 것이 있겠습니까?
그것이 최고의 이익이고, 최고의 수준이고
우리가 이르러갈 수 있는 최고의 경지거든요.
그러면 최고의 경지를 이해하고 나면 더 이상 이야기가 필요 없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법화경의 주된 사상 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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