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슬산 (琵瑟山1083.6m)
<가야산 칠불봉에서 바라본 비슬산 전경>
군립공원 비슬산은 흔히 산의 지형이 정상 대견봉은 비파요 조화봉아래 대견사지 일대가 거문고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설명한다. 비슬산은 정상인 대견봉, 조화봉, 관기봉으로 연결된 능선이 마치 병풍을 두른 듯 감싸고 있다 하여 풍수지리적으로 일명 포산 (包山)이라고도 불렀다. 정상대견봉의 모습이 비파를 닮았다 해서 풍류적으로 비파산(琵琶山)이라고도 한다. 혹자는 대견봉이 비파를 닮고 조화봉아래 대견사지일대가 거문고를 닮았다 해서 비슬산이라 한다고 설명하는 이도 있다.
비슬산은 서쪽 현풍에서 이 산을 봤을 때 좌로 정상 대견봉(大見峰1083.6m), 우로 관기봉(觀機峰983m)인데 그 중앙에 조화봉(照華峰 1057.7m) 이 위치한다. 조화봉아래 대견사지 주변이 비슬산의 백미가 된다. 멋진 바위들이 운집한 이곳에서 일명 톱 바위라 부르는 칼바위더미가 있는 조화봉 정상 쪽을 바라 볼 때 해질녘 황금빛으로 붉게 물들면 마치 닭 벼슬처럼 붉게 보이고, 벼슬산을 한자로 음역한 것이 비슬산(琵瑟山)이다.
이 산에는 유가사(瑜迦寺), 용연사(龍淵寺), 용천사(湧泉寺), 소재사(逍災寺) 등의 4대 사찰이 동서남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일연이 쓴 포산(包山) 이성(二聖) 조(條)에 북암혈(北岩 穴) 곧 도성암 도성굴에 도성(道成)이, 남령(南嶺) 관기봉 기슭에 관기(觀機), 이 두 성사가 입산수도했다고 전한다. 이후 군위 인각사에서 삼국유사를 쓰기 전 일연선사 (一然禪師)가 30여 년간 은거하며 삼국유사 집필을 구상했고, 의병장 곽재우 (郭再祐)장군이 임진왜란 때 정상서쪽 능선에서 초곡산성(草谷山城)을 쌓다가 정유재란을 맞이하여 화왕산성으로 출정하기도 했다.
비슬산은 팔공산과 더불어 대구를 달구벌 (達句伐; 달성~대구)이 되게 한 분지역할을 하고 있다. 정상 대견봉이나 조화봉 어느 곳에서도 팔공산, 금오산, 가야산, 화왕산, 무학산, 자굴산과 동쪽으로 가지산등 영남알프스 산군들이 두루 조망된다. 전국최대규모의 비슬고원 (琵瑟高原) 진달래 군락지에 참꽃을 피우는 봄(4월29일 만개기준)이면 비슬산 참꽃축제가 열리는데 이때 전국에서 마지막 진달래꽃 산행 인파들이 집결하는 진달래 명산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山上의 花園 참꽃 群落地 琵瑟高原
(유가사 전경>
오늘은 유가사입구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유가사는 신라고찰로 용연사, 용천사, 소재사와 함께 비슬산 4대 사찰로서 그중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정상 서쪽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데 역사에 비하여 규모는 그리 크지 않고 가람배치도 잘 정돈된 느낌을 주지 않는데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다. 청도출신 청도 김씨 시조 영헌공(英憲公) 김지대(金之岱1190~1266)선생은 오늘처럼 진달래꽃이 만개하여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든 봄철이 아닌 단풍으로 물든 만추에 이곳을 찾았는가보다.
瑜迦寺(유가사)
寺在煙霞無事中 (사재연하무사중) 절은 안개 속 산수 좋은 곳에 한가로이 있고
亂山滴翠秋光濃 (난산적취추광농) 새파랗게 온산은 가을빛 짙어간다.
雲間絶磴六七里 (운간절등육칠리) 구름사이 가파른 돌계단이 육칠개나 되고
天末遙岺千萬重 (천말요령천만중) 하늘 끝 아득히 이은 산봉우리는 천겹만겹이로다
茶罷松簷掛微月 (차파송첨괘미월) 다회를 마치고나니 처마 끝에 초승달이 걸려있고
講闌風搨搖殘鍾 (강란풍탑요잔종) 설법이 끝나고 침대에 누우니 편종 소리 들려온다
溪流應笑玉腰客 (계류응소옥요객) 계곡에 흐르는 물은 이 벼슬아치를 응당 비웃겠지
欲洗未洗紅塵蹤 (욕세미세홍진종) 씻으려다 씻지 못하는 속세의 발자취를 보고서
<수성골에서 쳐다본 비슬산 정상 대견봉>
09시50분 유가사를 출발하여 정상으로 올랐다. 계곡을 따라 이어진 등로는 숲이 좋다. 산 벚꽃과 진달래가 만개한 계곡에는 어제 내린 밤비로 계곡 물소리도 크게 들리고 간간히 이름 모를 산새들의 지저 김도 들으니 세상에서 찌든 때도 절로 씻기는 듯하다. 대중교통의 불편함을 알면서도 혼자 찾은 것은 느긋하게 원하는 곳을 밟을 생각에서다. 일연선사가 30여년을 비슬산에서 은거하며 남긴 시를 생각하면서 산을 오른다. 그렇다. 나도 이제 이 시를 공감할 만 한 나이가 아닌가 생각한다. 광야 같은 이 세상 사는 동안 얼마나 위태위태한 일들이 많았나? 헛되고 헛된 것을 쫒아 발버둥 쳤지만 결국은 제 자리 걸음인 것을 말이다. 평균수명 34세에도 미치지 못했던 그 시절 일연선사가 지금의 나이로 100세를 넘긴 나이에 해당하는 83세로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은 마음을 잘 먹어서이지 좋은 음식 많이 먹어서가 아닐 게다. 만리장성을 명령하나로 쌓았고 용변 보는 것 말고는 명령 하나면 무엇이든 지할 수 있었던 절대 권력의 소유자 진시황도 마흔아홉에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굶어 죽었다는 사실이다. 끼니가 없어서가 아니다. 병들어 먹지 못해서다. 권력 명예 재물이 무엇이 길래 그렇게도 탐하나? 과욕은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 마음 문을 활짝 열고 보면 누굴 미워할 이유도 없겠다. 대개 한시를 남긴 사람들의 수명은 장수했다. 마음공부를 했다는 이야기다. 인성교육을 무시하고 돈 버는 기술만 가르치는 요즘의 공부는 경제가 옛 보다 더 좋아졌을지라도 학생이 선생을 때려눕히는 등 살아가기는 더 험악한 세상이 되고 있지 않는가? 보각국사 일연 (一然1206~1289)선사가 남긴 시를 오늘날 우리들의 시로 되새김질 해본다.
隱居(은거)
三十年來不入塵 (삼십년래불입진) 30년 긴 세월을 속세와 멀리하고
水邊林下養精眞 (수변임하양정진) 깊은 산 물가에서 참뜻 길렀소.
誰將搖搖人間事 (수장요요인간사) 뉘라서 시끄러운 세상사 끌어다가
繫縛逍遙自在身 (계박소요자재신) 내 마음대로 거니는 이 몸을 어찌하리?
回顧 (회고)
快適須臾意已閑 (쾌적수유의이한) 즐겁던 한 시절 자취 없이 가 버리고
暗從愁裏老蒼顔 (암종수리노창안) 시름에 묻힌 몸이 덧없이 늙었에라
不須更待黃粱熟 (불수갱대황량숙) 한 끼 밥 짓는 동안 더 기다려 무었하리
方悟老生一夢閒 (방오노생일몽한) 인간사 꿈결인 줄을 나 이제 알겠노라
정상아래 진달래 군락지가 시작되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이 부근에서 6년 전 이른 아침 해도 뜨기 전에 어둑어둑한 산길을 혼자 오르는데 인기척을 들은 늑대들이 요란하게 짖어 댔다. 당장 공격해 올 듯 위협적인 상황에서 긴장하면서 만약에 상황이 벌어지면 내가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했다. 실제 공격을 해오더라도 나는 겁을 먹고 도망하지 않으며, 담담하게 처신하면서 공격불능이 되도록 몽둥이로 다리를 일격에 못쓰게 만들어 놓겠다. 등등이었다. 다행히 직접공격을 해 오지 않아 무사했지만 비슬산 산행에서 지금도 생생히 기억에 남는 일이다.
<정상직전 병풍듬에서 내려다본 현풍시가지와 낙동강>
비슬산 정상 대견봉(大見峰1083,6m)이다. 11시30분 1시간 40분 걸려 정상에 올랐다. 오늘은 평일이고 참꽃축제가 시작되기 전이라 비교적 한산한 편이다. 이곳은 높고 암봉이라 주변조망이 막힘없는 곳이지만 날씨가 흐려서 멀리는 조망이 선명하지 않다. 이곳 정상에서 유가사까지 3,5km, 남 능을 타고 내려가면 대견사지까지 4km, 관기봉까지 8,3km이다. 북 능을 타고 내려가면 대구 앞산공원까지는 16km 거리에 5시간 이상 걸린다. 북의 팔공산과 남에 비슬산이 있는 대구의 풍수지리적인 측면에서 풍수도참설이 관심을 끈다. 요즘 용어로 자연 환경적인 측면에서 혹자는 사왕설(四王說) 또는 팔왕설(八王說)을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다. 멀리는 시야가 흐렸지만 가까이 서쪽 아래로 현풍시가지와 낙동강이 내려다 보였다.
<정상 대견봉에서 바라본 비슬고원 참꽃군락지>
망우당 곽재우(忘憂堂 郭再祐1552~1617)장군은 의령이 고향(故鄕)이고 관향(貫鄕)은 이산 아래 현풍(玄風)이다. 비슬산기슭 예연서원(禮淵書院)에 배향되어있다. 동 시대의 이호민(李好閔1553~1634)선생은 당나라 때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곽자의(郭子儀697~781)에 비견하여 이런 시를 지어 홍의장군을 칭송했다. “郭汾陽(곽분양)” 聞道紅衣將 (문도홍의장) 들으니 홍의장군은/ 遂倭如遂獐(수왜여수장) 왜군을 노루 쫓듯이 한다고 하네/爲言終戮力(위언종육력) 그대를 위해 말하노니 끝까지 힘을 다해/ 須似郭汾陽(수사곽분양) 부디 곽 분양처럼 되소서!
장군은 남자들은 모두 전쟁터에 나가죽고 살아남은 과부들이 쌓았다는 속칭 과녀산성(寡女山城)이라 불러지던 허물어진 정상서쪽 능선 해발 700m고지에 있는 초곡산성(草谷山城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7호)을 쌓던 중 정유재란이 일어나 화왕산성으로 출정하기도 했다. 장군은 이곳 현풍 비슬산아래 낙동강 변에서 말년을 보냈다. 물러나 비파산에 살면서 그때 남긴 시 “퇴거 비파산” 을 감상해본다.
退去 琵琶山(퇴거 비파산)
朋友憐吾絶火煙 (붕우련오절화연) 친구들은 속세와 인연을 끊은 나를 불쌍히 여겨
共成衛宇洛江邊 (공성위우낙강변) 함께 모여 낙동강 변에 집을 지어주었네
無飢只在啖松葉 (무기지재담송엽) 지금 솔잎을 씹고 있으니 나 굶지를 않고
不渴惟憑飮玉泉 (불갈유빙음옥천) 맑은 샘물 마시니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守靜彈琴心淡淡 (수정탄금심담담) 고요한마음 지키며 거문고 타니 마음이 편안해서
杜窓調息意淵淵 (두창조식의연연) 창문 닫고 심호흡하니 내 생각 맑고도 깊어라
<정상에서 비슬고원 참꽃군락지로 가는 참꽃능선 풍경>
정상에서 내려와 비슬고원 참꽃 군락지로 향한다. 정상에서 조금 내려서면 헐티재 방향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동쪽으로 능선이 보이는데, 이 능선이 가지산에서 비슬산을 거처 화왕산을 지나 부곡온천 뒷산인 종남산까지 이어지는 비슬지맥이다. 다시 남쪽으로 참꽃능선을 타고 내려서면 전국최대의 비슬고원 참꽃군락지가 펼쳐진다. 가다가 능선을 타고 직진하면 대견사지로 가고 서쪽방향 군락지로 들어가면 군락지 상, 중, 하 중에서 하단 전망대를 지나 건너편 능선 팔각정으로 갈수가 있다. 나는 굳이 거리가 먼 이 길을 택한다. 오늘 내가 그린 행로는 완벽한 활 궁자(弓字)형이다. 군락지를 지나면서 꽃의 상태를 살펴보니 지난 4월21일에 내린 눈으로 개화율이 절반수준이다. 멀리서 봤을 때 아직 덜 피었나 했으나 와서 보니 만개상태인데 평년작에도 못 미친다. 해발 950m의 비슬고원은 개화기에 된 서리를 맞아 꽃잎이 동해를 입는 사례는 자주 있지만 금년은 눈까지 내려 매우 심하다.
<비슬고원 참꽃 군락지에서 바라본 비파를 닮았다는 대견봉>
조화봉(照華峰1057,7m) 대견사지 서쪽 봉우리로 공식 명칭이 없는 전망대가 있는 1034봉이다. 비슬고원(琵瑟高原) 참꽃군락지와 건너편 북으로 비슬산정상을 감상하기 좋고, 서쪽아래 현풍시가지와 낙동강조망이 좋고 대견사지 아래로 전국최대규모의 길이 1km 이상 되는 여러 개의 암괴류(岩塊流)가 내려다보인다. 여기서 보면 비슬산정상 대견봉에서 관기봉에 이르는 약 8km의 능선이 병풍처럼 둘러있어 일명 포산(包山)이라 불렀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다. 남쪽 건너편 능선을 건너다보면 어떤 이의 설명처럼 관기봉 (觀機峰983m)은, 어느 기녀의 유두처럼 뾰족하게 솟아 관기봉(觀妓峰)이라고도 하는데 요즘처럼 진달래가 만개하면 봉우리가 붉게 보인다. 특히 동쪽으로 이어진 조화봉과 대견사지 일대가 이산에서 백미다. 해질녘 석양빛에 붉게 물든 조화봉을 바라보면 화려하게 닭 벼슬처럼 보여 대견사지와 어우러져 비슬산(琵瑟山)은 바로 벼슬산을 음역한 이름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대견사지에서 바라본 관기봉>
이곳에서 동쪽으로 능선을 타고 조금가면 대견사지(大見寺址)다. 13시20분 오늘행로의 절반가까이 온 셈이다. 비슬산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몰리는 대견사지 주변은 비슬산의 백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견사지는 지금 달성군과 팔공산 동화사가 공동으로 시행하는 중창불사가 진행 중이다. 그대로 두면 좋으련만 인공구조물이 들어서면 주변경관을 해칠 뿐만 아니라 이곳까지 차량통행이 빈번해져 환경오염까지 우려된다.
<대견사지 주변풍경>
대견사지에 오니 생각나는 것이 있다. 6년 전 비슬산 산행을 마치고 하산 길에 유가면소재지 비슬초등학교 앞마을 정자나무 아래에서 만난 80대 할머니의 말이 생각난다. 들판 건너편 마을을 가리키며 저기서 태어나 이웃마을에 시집와서 평생을 그곳에서 살았다는 할머니는 처녀 때 살기 어려워 일철에는 남의 일 해주고 겨울에는 비슬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현풍 장에 내어다 팔아서 먹고살았다 했다. 그때 대견사가 있었고 초파일에는 대견사에 갔었다고 했다. 더욱 놀라운 이야기는 해방되기 몇 해 전에 스님이 빈대를 잡다가 절을 그만 불태웠노라 면서 지금도 거기 바위틈에 빈대가 있을지 모른다며 나더러 거기가면 조심하라했다. 나는 속으로 웃으면서 빈대도 먹을 것이 있어야 붙어살지 절도 없고 승려도 없는데 빈대인들 무얼 먹고 사느냐했다. 그런데 달성군에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1917년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폐사되었다고 하는데 이유를 밝히지 못했다. 어느 것이 사실인지 지금도 궁금하다. 내가 어릴 적만 해도 3적(빈대, 이, 벼룩)으로부터 시달림을 많이도 받았다. 요즘은 보기 드문 빈대이야기가 나온 김에 방랑시인 김삿갓 난고 김병연 (蘭皐 金炳淵1807~1863)선생의 시 한편을 배꼽을 틀어잡고 감상해보자.
벼룩
貌似棗人勇絶倫 (모사조인용절륜) 생김새는 대추씨 같으나 날쌔기는 대단하고
半虱爲友蝎爲隣 (반슬위우갈위린) 이(虱)하고는 친구(親舊)요 빈대와는 사촌(四寸)이 로다
朝從席隙藏身密 (조종석극장신밀) 낮에는 자리 틈에 음밀(陰密)히 숨었다가
暮向衾中犯脚親 (모향금중범각친) 밤만 되면 이불속에서 다리를 물어 뜯네
尖嘴嚼時心動索 (첨취작시심동색) 주둥이가 뾰족하여 물리면 깜짝 깜짝 놀라고
赤身躍處夢驚頻 (적신약처몽경빈) 펄떡펄떡 뛸 때마다 꿈에서도 깜짝깜짝 놀란다
平明點檢肌膚上 (평명점검기부상) 날이 밝아 살펴보면 온몸이 울긋불긋
剩得挑花萬片春 (잉득도화만편춘) 복사꽃이 만발(滿發)한 듯 봄의 경치(景致)같구나!
<조화봉 칼바위 일명 톱 바위 군>
<조화봉 한강 홍수통제소 기상레이더 관측소>
대견사지를 떠나 조화봉 (照華峰1059m)으로 향한다. 대견사지에서 휴양림 주차장까지 3km 거리에 1시간이면 내려 갈수 있다. 오늘 계획대로 조화봉, 관기봉을 거쳐 휴양림주차장으로 하산할 생각이다. 능선을 타고 칼바위아래 다리를 건너 조화봉 북편에 속칭 기상관측소라고 부르는 한강홍수통제소 강우 레이더 관측소다. 근래에 신축된 이 건물은 모두 7층 규모인데 1층과 6층만이 개방되고 있다. 승강기를 타고 오르는 6층에는 전망대 구실을 하여 창밖으로 참꽃군락지에서 4km 거리의 비슬산 정상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자연휴양림에서 대견사지를 거쳐 이곳 관측소까지 승용차가 올라 올수 있으니 참꽃 만개 시에 가족과 함께 오면 참꽃군락지와 대견사지를 편히 볼 수 있겠다. 다시 시설물 입구로 나와 100m 정도 오르면 조화봉정상이다. 헬기장이 있는 정상에는 일출 전망대다. 동쪽으로 영남알프스 최고봉 가지산까지 막힘없이 조망된다.
<가까이서본 석검봉>
조화봉에서 석검봉을 향해 솔밭능선을 타고 내닫는다. 조화봉에서 2km 정도 거리에 관기봉과 모양이 비슷하게 생긴 봉우리가 있는데 이것이 석검봉 (石劍峰989.7m)이다. 남쪽에서 가까이 보면 장수가 검을 빼어든 것처럼 날카로운 바위가 옆으로 삐죽삐죽 나와 있다. 지도상에 높이 표시만 되어있어 이 봉우리 이름을 아는 이는 비슬산을 찾은 수만 명 중에 한명정도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산행을 할 때 마다 그 산과 관련된 내용이면 무었이든지 공부를 해서 간다. 그래야만 산행의 묘미를 백배 즐길 수 있다. 산의 지질, 동식물생태, 기후풍토를 망라한 자연환경(풍수지리), 역사 문화인물 등을 알고 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석검봉은 바위로 되어 있어 오르기도 까다로워 오른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아예 배낭을 벗어놓고 네발로 기어올랐다. 6년 전에는 그다지 힘든 줄 모르고 올랐었는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북쪽의 조화봉과 남쪽에 관기봉의 중간쯤에 위치하여 두 봉을 조망하기에 좋았다. 불과 5층 정도의 높이를 올랐다 내려오는데 20분이 훌쩍 지나버렸다.
<석검봉에서 바라본 관기봉>
내려와 관기봉으로 향한다. 이 능선은 암릉 지대가 이어지는 험로로 비교적 거리도 멀고 인적이 드물어 길도 희미하고 이정표도 없다. 약초채취 꾼이나 송이채취 꾼이 아니면 비슬지맥을 타는 산꾼 정도이겠다. 오늘도 능선 길에는 잡목이 엉키고 수백 년 묵은 소나무들이 재선충으로 송림지대는 고사목지대로 변해 있었다. 6년 전에도 이 길을 지나갔는데 멀쩡하던 것이 그동안 이렇게까지 되다니 이러다가 우리나라 대표적 수종인 소나무가 멸종되지 않을까 참담한 심정일 뿐이었다. 이윽고 관기봉을 1km 쯤 남겨둔 곳이다. 여기에 3개 군(달성, 청도, 창녕) 경계표석이 있다. 6년전 이 부근에서 만났던 창녕지역 주민에게 “저 위에 바위봉우리가 관기봉이 맞느냐?”고 물었더니 알아듣지 못하고 “경계봉(境界峰)이요?”하고 되묻던 기억이 난다. 이 지역 주민들은 이 산에 관기봉은 없다면서 옛날부터 경남 북 달성, 청도 창녕 등 3개 군의 경계가 되는 봉우리라 경계봉이라 부른다고 했다. 이제 또 다시 오르막이다.
<관기봉 아래 주변풍경>
관기봉(觀機峰992m)이다. 관기가 입산수도했던 봉우리라 해서 관기봉이라 한다. 능선 정수리에 바위가 우뚝 솟아올라 정상 대견봉이나 조화봉 대견사지에서 보아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는 비슬산 3대 명봉의 하나다. 이곳에 15시10분 산행 5시간 만에 도착했다. 관기봉 주변에는 참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산 아래는 연 녹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조화봉과 대견사지 하단부 일대의 길이1km에 달하는 전국 최대 규모인 여러 개의 비슬산 암괴류 (천연기념물 제435호)가 한눈에 들어온다. 일연이 쓴 삼국유사 포산 이성 조에 抱山(포산) 북 암혈(北岩穴)에 도성(道成), 남령(南嶺)에 관기(觀機), 반사 첩사 두 성인이 있었다. 서로 왕래하며 수도에 정진했으니 두 성사(二聖師)라 칭한다. 보각국사 일연 (一然1206~1289)선사가 비슬산에 30여 년간 머물며 삼국유사 집필을 구상하며, 도성과 관기 두 성사를 칭송하는 시를 남겼다.
讚搬師牒師二聖師之遺美 (찬반사첩사이성사지유미)
紫芽黃精褓肚皮 (자아황정보두피) 산나물 풀뿌리로 주린 배 가죽을 채우고
蔽衣木葉非蠶機 (폐의목엽비잠기) 나뭇잎 옷으로 몸을 가리 우니 누에치고 베 짜지않았네
寒松颼颼石犖确 (한송수수석락학) 찬 솔 나무 돌너덜에 소슬바람은 불고
日暮林下樵蘇歸 (일모임하초소귀) 해 저문 숲에 나무꾼은 돌아가고
夜深披向月明坐 (야심피향월명좌) 깊은 밤 달 아래 앉아 선정에 들어
一半颯颯隨風飛 (일반삽삽수풍비) 이윽고 부는 바람 따라 반쯤 날았도다.
敗蒲橫臥於睡憨 (패포횡와어수감) 헤진 삿자리에 가로누워 잠이 들어도
夢魂不到紅鹿羈 (몽혼부도홍록기) 꿈속에서라도 속세에 이르지 않았다니
雲遊逝虧二菴墟 (운유서휴이암허) 구름이 놀다가 사라진 두 암자 터에
山鹿遊登人跡稀 (산록유등인적희) 사슴은 마구 뛰놀고 인적은 드물구나!
관기봉에서 능선을 타고 비슬산 자연휴양림 주차장으로 내닫는다. 급경사라 낙엽이 깔려 미끄럽고 희미한 능선 길을 따라 미끄럼을 타듯 내려왔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16시10분이더라. 오늘 행로는 완벽하게 활 궁자(弓字)모습이다. 유가사~정상 대견봉~참꽃군락지~960봉 전망대~1034봉 팔각정~대견사지~조화봉(강우 레이더 관측소)~석검봉~관기봉~ 자연휴양림 주차장 거리17km, 6시간 산행이다.
2013년 4월30일 화요일 구름
첫댓글 덕분에 좋은 구경 합니다!
정말 산을 좋아 하시는 군요! ..ㅋ
금년 봄은 일기불순으로 진달래 作況이 좋지 못합니다.
날씨 마져 흐려 사진이 흐립니다. 좋게 보아주시니 감사하고요.
산은 제게 제2의 신앙입니다.
그러나 갈곳은 많고 몸은 하나이니....
비슬산의 풍경과 산행기 거기에 곁들은 한시들 잘 보았습니다.
아주 긴 산행 17km.6시간의 장시간에 힘도 많이 들었겠군요.
감사합니다.
누구든 산행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힘은 들기 마련입니다.
<사랑은 오래참고..>라고 하지않습니까?
자연을 사랑하고 매력을 느끼다보니 힘든가운데서도 보람을 느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