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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1. 장원
<인생의 첫 그늘>
유선희
‘농산물코너 진열사원 급구’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오는데 사원모집 공고문에 자꾸만 시선이 머물렀다. 손은 자동으로 휴대전화를 꺼내 연락처를 저장했다.
아이들의 온라인 수업이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코로나 검사. 확진과 자가격리. 더 이상 말을 해서 무엇하랴? 일상이 마비되고 오로지 가족들의 건강에만 신경이 곤두서 있을 때 쯤, 남편의 월급이 밀리고 반 토막만 들어오기 시작했다. 바이러스로 인한 경제 타격은 다른 집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우리 집이라고 그냥 지나치지 않고 어김없이 찾아왔다.
아침 일찍 일어나 거울 앞에서 출근 준비를 하는 것이 몇 년 만인가! 분주함 속에서도 첫 출근하는 모습이 한껏 들떠 있었다.
배테랑 선배와 한 조가 되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야채 박스를 진열대에서 판매할 수 있도록 일회용 포장 용기에 담는 작업이다. 선배 여사님 손은 어찌나 빠른지, 내가 겨우 한 박스를 마무리할 동안 세 번째 박스를 쉴 새 없이 뜯고 있는 모습이란, 감탄이 절로 나왔다.
“애기엄마! 이런 일 처음이지?”
“네. 애들도 이제 좀 크고, 집에 있는게 무료해서... ... .”
거짓말이다. 사실은 당장 이번 달부터 아이들 학원비며 생활비가 마이너스가 될 것 같아 급한 마음에 위생 두건과 앞치마를 두른 것인데, 나도 모르게 말을 둘러대기 바빴다.
“나는 몇 년째인지 기억이 안 나네. 그래도 애들 아빠 먼저 가고, 이 일하며 애들 공부도 다 시키고 고맙지.”
여사님 말씀에 뭔가 뭉클했다. 나도 그냥 솔직하게 말씀드릴 걸... ... .“
돌이켜보면 그동안 부족하지 않은 남편의 월급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무뚝뚝하지만 자상한 남편에 하루하루 쑥쑥 자라는 두 아들. 이제서야 감사함을 느낀다. 이렇게나 많은 보물이 있었는데 그동안, 다른 집 형편과 비교하며 욕심을 부린 내 자신이 초라해졌다.
물론, 하지 않던 일을 시작하니 몸은 힘들고 아이들과 아침마다 분주함으로 정신은 이미 널뛰기하고 있다. 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들어갔던 카페를 이제는 그냥 지나친다. 하루에 3500원을 한달 모으면 얼마야. 푼돈을 우습게 여기던 내가 3500*25를 계산하고 있다.
인생의 그늘이 있음을 나는 마트에서 일을 시작하며 깨닫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날까봐 모자도 눌러쓰고 얼굴 가리기 바빴다. 거칠고 지문이 닳은 여사님의 손을 보며 나는 아직 인생을 시작도 안했음을, 직업의 귀천이 어디 있을까? 남편의 고단함에 조금이라도 힘이 될 수 있다는 뿌듯함에 인생의 첫 그늘을 큰 불평없이 건너고 있다.
그늘이 지난 자리에 더욱 단단해진 햇살이 있음을 알기에, 마트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끝>
2. 차상
어머니의 빈 그늘(장용숙)
친정 동생 부부가 큰딸 사돈댁과 상견례 후 사윗감을 데리고 온다는 전화가 왔다. 동생은 돌아가신 부모님 대신 4남매의 맏이인 나에게 먼저 사윗감을 인사 시키고 싶었던 게다. 연락을 받고 동생들이 함께 모였다. 모처럼의 경사인지라 집안이 시끌벅적 잔치 분위기가 되었다. 이렇게 오랜만에 동생들과 모임을 가진 것은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로 부모님 제사에도 모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하여 가정환경 조사를 하던 날이 생각난다. 그날 환경 조사서를 뒤적이시던 선생님은 우리 부모님 나이를 보시고 놀라셨다. “나와 동갑 나이신데 벌써 중학생 딸을 두셨네. 너는 좋겠다. 부모님이 젊으셔서…. 우리 아이는 아직 초등학교 입학도 못 했는데….” 하고 부러워하셨다. 대학을 입학했을 때도 “벌써 대학생이야? 나는 아이가 초등학교 다니는데….” 개인 상담을 하시던 물리과 교수님도 아버지와 동갑이라면서 놀라셨다. 그때도 나는 왜 부러워하시는지 몰랐다.
우리 아버지가 결혼을 일찍 하신 이유가 있었다. 할머니께서 딸 둘을 낳고 사십이 넘도록 아들이없었단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께서 시주를 오셔서 할머니께서 정성을 드리는 것을 보고 “백일기도를 드려 보세요. 팔자에 아들 둘이 있으십니다.” 라고 하셨단다. 그리고 백일기도 후 큰아버지와 우리 아버지를 낳으셨다. 대사님의 예언으로 낳으셔서 동네 사람들은 큰아버지를 대사라고 불렀다. 나는 늦둥이 막내아들이었던 아버지가 일찍 결혼하시어 20세 되던 해에 태어났다. 덕분에 학교 다닐 때 “부모님이 젊으셔서 좋겠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자랐다. 그때는 부모님의 젊음이 어떤 뜻인지 잘 몰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부모님이 젊다는 것은 자녀가 다 자랄 때까지 든든한 지원군의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나 보다. 하지만 나는 부모님이 젊어서 누릴 수 있는 그늘의 따뜻함을 누릴 사이도 없이 어머니는 혈압으로 53세에 돌아가셨다. 그때 나는 결혼하여 큰아이를 낳았고 언제나 내 편인 남편이 있어도 맏딸인 나에게 어머니가 안 계신 빈 그늘은 참 힘겨웠다. “어머니는 내가 죽는 날 돌아가신다”고 한 어느 시인의 말처럼, 어느 날에는 그리움으로, 어느 날에는 원망으로, 어느 날에는 하소연으로 그렇게 어머니는 늘 내 마음속에 살고 계셨다. 막냇동생이 결혼하던 날, 나는 어머니의 빈 그늘이 주던 짐을 모두 내려놓았다.
부모는 자식이 효도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말도 있지만, 부모는 자식이 결혼할 때까지 살아주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어머니가 안 계신 빈 그늘은 늘 버거웠다. 친정어머니 장례를 모시던 날, 눈가가 벌겋게 충혈되어 어머니의 영정사진을 들고 서 있던 남편의 모습이 힘들 때마다 참 든든했었다. 그래서 “부모님의 3년 상을 치른 조강지처는 절대 버리지 못 한다”고 옛 어른들이 말씀했나 보다.
사윗감을 데리고 인사를 온 남동생 부부를 보면서, 어머니의 빈 그늘이 나보다 동생들에게 더 힘들고 외로웠을 거라는 생각을 이제야 해 본다. 동생들은 배우자를 만나고 자식을 낳아 키우면서 어머니가 안 계신 빈 그늘에서 오는 외로움이 덜어졌을까? 어쩌면 내가 내려놓은 어머니의 빈 그늘을 큰 올케가 지켜왔을지도 모른다. 막내 여동생은 늦게 결혼을 하여 아직 어린 조카를 키우면서 바쁘게 지내지만 명절이 되면 아직도 허우적거린다. 나는 그것이 어머니가 안 계신 빈 그늘에서 오는 외로움인 것임을 안다. 명절이 되어 친정 나들이 가는 일이 부럽고, 나이 드신 친정어머니에게 시댁 흉도 보면서 사느라고 고단했던 일을 털어 버릴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지난해 내가 건강이 나빠져 병원에 입원했을 때였다. 막냇동생은 나 혼자 있어도 괜찮다고 집에 가라고 해도 고집부리며 병실에서 잠을 자곤 했다. 내가 입맛이 없어 잘 먹지 못한다고 해도 이것저것 먹거리를 만들어 병실 냉장고에 넣어 주던 마음까지도 아마 나를 엄마 대신이라고 생각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었을까.
조카가 짝을 만나 결혼을 한다니 큰동생 내외가 대견하고, 마음은 한결 가벼워진다. 지금껏 내 삶의 슬픈 뇌관처럼 묻혀 눈물이 되던 것을 이제는 꺼내놓고 담담하게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하고, 마주 대할 수 있을 만큼 시간이 지난 것일까? 어머니 오늘도 당신의 따뜻했던 그늘이 그립습니다.
3. 차하
제15회 충북도민백일장) 수필부문 차하
큰 나무 그늘
김 용 술
시골 마을엔 늙수그레한 느티나무가 입구에서 맞아준다. 깊은 산골 고찰 ‘공림사’에 가면 수백 년 삶을 살아온 지킴이요, 증인인 느티나무를 여러 그루 볼 수 있다. 대부분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느티나무지만, 고향에 갈 때마다 우리 마을엔 없어 아쉬움이 컸다. 느티나무는 덩치도 크거니와 위세가 대단하다. 무더위를 식히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그곳 그늘을 찾는다. 짚 부채 부치며 더위를 쫓다가 매미 소리 자장가 삼아 낮잠을 자기도 했다. 내기 바둑이나 장기를 두면 옆에서 훈수 두는 것도 재미있다. 모시 적삼, 삼베 바지의 성김으로 들어오는 시원함은 그 시대 최고의 선풍기였을 것이다. 지금의 에어컨에 버금가는 바람이었으리라. 오월 단옷날은 그네 타는 날. 그렇게 느티나무는 동네 사람들과 함께 살아온 가까운 친구였다.
더위를 이겨내느라 멍석에 누워 느티나무를 쳐다본다. 네댓 아름의 줄기에는 수만 개의 가지로 갈라지고 그 끝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푸른 공장이 돌아간다. 공장에서 버려진 시원함은 사람들의 몫이다. 봄이면 보드라운 입술, 여름엔 푸르디푸른 녹음과 그늘, 가을엔 오색 단풍, 겨울이면 낙엽으로 거름을 주는 나무. 오히려 사람들에게 시달리면서도 아낌없이 모든 것을 주는 고마운 나무. 지금까지 주었던 그 베풂을 올해도 내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베풀 나무.
그런 느티나무가 내 마음속에 한 그루 있다. 첩첩산중, 하늘만 빠끔히 보이는 산촌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에게 심어진 느티나무는 큰 그늘을 주었다. 학교까지 14km를 도보로 다녔다. 새벽 6시에 출발하여 저녁 7시에 집에 도착하는 일과는 즐거웠다. 하루 5시간씩 걸었다. 발바닥은 물집투성이였고 몸은 천근만근이다. 그래도 배움에 목마른 나는 14살 어린 나이였지만, 용기 잃지 않고 힘차게 학업을 할 수 있었다. 이는 느티나무 그늘 같은 큰 힘을 주신 분 때문이다. 바로 할아버지다. 몸이 약하신 분 이였지만, 손자를 위해 무엇인들 못 하는 게 없으셨다. 어릴 때는 밤마다 천자문을 가르쳐 주셨다.
“사람은 힘들어도 배워야 한다.”시며 학문의 길을 터 주셨다. 그뿐만 아니라 못하는 것은 자상히 일러주시기도 하였다. 집안에서는 낫 갈기, 소죽 쑤기, 외양간 치기, 나무하기를 가르치시고 농사일은 못자리 피살이, 모찌기와 모내기, 밭매기 같은 농촌 농부의 일도 차근차근 일러 주셨다. 중, 고등학교 다닐 때 타동을 지나 걸어가다가 만나는 어른들이 날 알아보셨다. 할아버지 존함을 대며 ‘아무개 손자 아니냐?’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의 그늘이 여기까지 미침에 자랑스럽기도 했다. 할아버지의 생활신조는 ‘착하게 살아라.’였던 것 같다. 남이 해코지하든가 피해를 주어도 참으라 하셨다. ‘착한 끝은 있어도 악한 끝은 없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그러다 보면 손해 보거나 농사에 피해가 왔다.
학교에서 늦는 날은 고갯마루까지 마중을 나오셨다. 종이 등불을 손에 들고……. 지금은 손전등이 있고 핸드폰에도 손전등 기능이 있어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상관이 없다. 작은 바람에도 꺼지기 일쑤인 등불이지만, 소중한 안내자였다. 온종일 논밭 농사일에 고단하실 텐데 기꺼이 등불을 손에 들고나오셨다. 깜깜한 밤에 반짝 보이는 등불은 나의 희망이고 그늘이었다. 그분이 내 곁을 떠나신 지 삼십여 년이 넘었지만, 할아버지의 그늘은 내 가슴에 영원하다. 할아버지께서 주신 큰 그늘을 다시 손자에게 전해주기 위해 나는 노력한다. 그것이 할아버지의 기운을 이어가는 것이지만, 그분처럼 되지 않는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보련다.
때때로 산소를 찾아뵐 땐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할아버지와 함께 타임머신을 탄다. “참으로 훌륭하셨던 할아버지, 당신의 그늘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상도 많이 타고 훈장도 받았습니다.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이제 편안히 계세요.” 평생을 가슴에 안고 사는 할아버지의 그늘. 느티나무와 같은 큰마음, 큰 사랑, 큰 그늘을 소중히 생각한다. 오늘도 느티나무 그늘에서 글을 쓰며 할아버지 큰 그늘을 생각해 본다. 받은 그늘을 더 많은 사람에게 나누리라고…….
4. 차하(윤지혜)
그늘
윤지혜
나에게는 늘 편한 그늘이 있다.바로 우리 엄마다.
언제고 어디서고 항상 편한 그늘이 되어주는
나만의 작은 쉼터이다.
뜨거운 햇빛을 막아주고,항상 내가 쉴 수있게 도와준다.우리 엄마는 오늘도 나의 그늘이 되었다.
나에게 잔소리도하고,항상 따뜻함을 주었다.
그 잔소리 한마디로 나는 성장한다.
이렇게 그늘을 만들어준 우리 엄마에게 항상 고맙다.
고맙다는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늘 표현도 못했지만
언제나 나의 그늘은 자랑스럽다.
자랑스러운 그늘 뒤에 나의 버팀목이되어 내가 성장하는 시간 속에 나의 성장을 기대한다.
오늘은 우리 그늘이 무슨 얘기를할까??
나는 어떤 말을 해야할까??
그 자랑스러운 그늘에게 한마디도 전하지 못했다.
그늘의 빛 속에 가려져 한마디도 못했지만,
오늘도 나의 그늘 우리 엄마는 햇빛이 되어준다.
그 햇빛으로 시원한 그늘 아래 나무 벗이 되었다.
언제나 나만의 시원한 그늘 벗이 되어주는 엄마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엄마,수고했어.고생 많았어.
고마워,항상 사랑해라고.
5. 참방. 김영기
그늘
우암산 숲 속으로 들어섰다. 아침 동트기 전 고즈넉한숲길과 만나고, 거미줄에 이슬이 그대로 맺혀 있는 것으로 보아 첫 산행임을 느낀다. 등산을 하다 보면아무도 내 앞에 간 사람이 없는, 내가 오늘의 첫 등산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때 더욱 깊은사색에 잠긴다.
멀리서 딱따구리가 보금자리를 만드느라 나무를 쪼아대는 소리는 숲속에 사는 새들의 단잠을 깨운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내려올 때 보았네”라는시인의 글귀가 떠오른다. 우리 인생에서 옆도 뒤도볼 겨를 없이 앞만 바라보며 바쁘게 살아온 발자취를 살펴보게 하고, 잠시 하늘을 보며 좌우를 살펴보는 느림의 여유를 생각했다.
우암산 ‘생태학습장’을 지나가노라면, 노오란 꽃잎을 자랑하는 산수유와 생강나무도 봄맞이 인사를 하러 나왔고, 개나리도 방긋 웃고 서 있다. 산마늘, 패랭이꽃, 상사화 등 다양한 야생화들이 숨을 죽이며 꽃 피우고 있다. 구불구불한산길을 걷다 팻말에 적혀 있는 글이 눈에 띄었다.
“쑥부쟁이와 구절초를구별하지못하는 너하고 이들길 여태 걸어왔다니,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절교다!”
‘무식한 놈’ 이란 안도현 기인의 시 구절인데,참 재미있는 내용이다. 그것을 바라보고 가던 한 등산객이
“미친놈! 그걸 모른다고 친구를저버리냐?”
한마디 내뱉고는 지나간다.시인도, 시를 읽고 감상한 말을 내뱉고 가는 저 사람도 모두 재밌다. 그렇다. 우리가 모르고 살아왔던 것이 얼마나 많았던가.생각해보니 나도 꽤나 무식한 놈이었던 같다.
생태학습장을 지나 당산 능선 길을 따라 내려오면 충북문화관을 만난다. 도지사관사로 사용하던 공간을 시민을 위해 문화공간으로 내놓은 곳이다. 그곳에는 충북의 근현대 작고 문인들의발자취를 그려 놓았다. 총칼보다 무서운 붓의 힘을 본다. 뒤편건물 2층에는작가들이 마음껏 예술의 세계를 선보이는 전시회장이있고, 1층엔 가끔 국악연주자들이 한국의 정을 소개하는 소극장이기도 한 방이 준비되어 있다. 대금과 소금으로 구성진 멜로디를 연주하면 장구가 장단을 맞춰 흥을돋우고, 남도창의 노래가 꽃을 피우는 봄밤은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은 듯 감미롭다.
오솔길을 휘돌아 내려가면 과학의 메카 ‘충북자연과학연구원’이 자리 잡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내가 근무하던 곳이다. 이곳은많은 학생들이 자연의 원리와 법칙을 공부할 수 있게 만든 탐구의장이다. 엄마의 손을잡고 과학관을 찾아 왔던어린아이가 선생님이 되어서도 과학연구를 끊임없이 해온 분이 있다. 그 선생님이이곳에 와서 근무하며, 어린 학생들 가르치는 모습을 보았다. 전국과학대회에서 최고의 상을 휩쓸어 오게한 저력이 이러한 바탕에서 생겼구나! 느끼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진다.
청주 중심의 터 주성(舟城)은 새로운 도시 형성이 서쪽으로 진행되고 있어, 이제는구도심이되었다. 가난하고 빈약한 집들이 남아서 달동네가된 수암골이 벽화마을로 자리 잡고 있다. 어느 날부터인지 담벼락에는 벽화가 그려지고 작은 마당에는 들꽃들로 화단을 이루고 있다. 제빵왕 김탁구, 카인과 아벨, 영광의재인 영화 촬영지가되어 인기를 끌면서 유명한 관광지로 바뀌었다. 옛날 추억을하나씩 꺼내 볼 수 있는 골목길은 걷는 재미가 있다. 살아왔던과거의 아픔들이 간직된 골목이 고단한 삶의 짐을 내려놓고 마음을 달래보는 감성문화의 장소가된것이다. 수암골 벽화 속에 있는 “그래, 너는 특별한 존재야.우리 모두 행복하자”는말이 눈물 나도록고마웠다.
우암산 숲그늘 산책길을 걸으며 새소리와 노래하고, 나무와 들풀과속삭이는 시간이 무척이나행복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인사는새힘을 주는 활력소가되었다. 지난 가을에 떨어져 쌓인낙엽들을 밟을 때, 바스락거리는 소리를들으며 걷는 명상의 시간은 수필과 시상을그려보는 시간이다. 산허리 숲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능선을 타고 등산객들이 두런두런 속삭이며 내려오는모습들이 정겹게 보인다. 산 위에서 야호!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산 끝자락에서 젊은청년들이 빠른 걸음으로 정상을 향해 올라가기도 한다.
길은 길로 연결되어 서로이어지고, 동서남북 길에서길은 길로 통하는 법이다. 우리는 한길이 막히면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좌절하고슬퍼하는 때가 많다. 삶에 지쳐서 울다가 가만히 살펴보면, 또 다른길이 있음을발견하여 소망의 빛으로 웃음을 찾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자연의 숲길에서외눈박이 인생의 고단함을 벗어버리고, 여유롭게 사는 지혜의 행복을맛본다.
청주는 피라미와 갈겨니들이 춤추는 무심천이 도심을 흐른다. 배 모양의 도시에돛대를상징하는 철당간이 중앙에 우뚝 세워져 있다. 도심의휴식처인 중앙공원에 오백년 세월을 견딘 은행나무가 역사의 증인으로 자리 잡고 서 있어, ‘청주목’의 오랜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 역사의 그늘 아래에서 오늘도 아이들은 오카리나를 불고 탬버린을 흔든다.
6. 참방
신승하
어머님의 그늘
2020년 5월 9일 잊지 못하는 사건 하나가 나에게 일어난다. 바로 어머니께서 병으로 앓고 계시다가 아픈 세상을 등지시고 하늘 나라로 가시게 된 것이다. 벌써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너무나도 아픈 상처였지만,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무뎌지는 것을 보면 나는 나쁜 아들인가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회사 일이 너무 바쁘고 어느덧 자식 셋을 키우면서 정신없이 살다보니 그렇다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 살아가고 있다.
가끔 처가에 가면 사위는 손님이라면서 부담스러울 정도로 잘 챙겨주시는 장모님이 계신다. 너무 좋고 존경스러우신 분이다. 언젠가 처가에 놀러 갔을 때 취미로 하시는 농사일을 도와드리러 간 적이 있었다. 언제나처럼 나는 열심히 일을 도왔고, 그 댓가로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고 또 일했었다. 내 옆에 있던 처남도 일을 했지만, 일도 더하고 땀도 더 많이 흘렸다. 하지만 장모님께서는 “아들, 쉬어가면서 해”라고 하셨고 나에게는 한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이 조금 이기적이지 모르겠지만, 그 날 나는 부모님, 특히 어머님의 ‘그늘’이 사무치도록 그리웠다. 내 나이 39세 막내 아들인 나는 아직도 어머님의 ‘그늘’이 너무나도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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