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준은 은상과 함께
노비산(옛 제비산) 언덕에서
월포의 일몰을 보면서
삶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은상은 푸른 담쟁이넝쿨 가득한
청라언덕과
좁고 긴 90계단이 아름다운
태준의 고향 이야기를 들으면서
좋아했다.
태준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은상은 꿈결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하곤 했다.
“박 선생님의 이야기는
언제나 고운 시(詩)처럼 아름답습니다.”
그날도 박태준은
이은상과 함께
노비산 언덕에 앉아 있었다.
암울한 조국의 현실이
둘의 마음을 더욱 어둡게 하였다.
침울한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문득 은상이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그런데 박 선생님,
선생님의 첫사랑은
어떤 분이셨나요?”라고 물었다.
은상의 뜬금없는 질문에
태준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첫사랑은 뭐,
한번 제대로 이야기도
못했는 걸요.”
“첫사랑이 다 그렇지요.
그러니까 영영 가슴속에
박제 되는 사랑이고요.”
“제가 다니던
계성학교(註. 기독교계) 가까이에 있는
신명학교(註. 기독교계)의
여학생이었어요.
함께 교회에 다녔는데,
한번은 그 여학생이
자두를 한 바구니 가져와
교회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어요.
전 그 자두가
저한테까지 올까 하며
가슴을 조이며 있었지요.
그러다가 결국
나는 화장실로 달아나 버렸어요.
혹시 자두를 못 받게 된다면
내가 자리에 없었으니
주지 못했을 거라 위안하려고요.
그 후 돌아오니
오르간 위에 자두 두 알이
놓여 있었어요.
깨끗한 손수건이
자두 위에 덮여 있었지요.
그 자두를 한참 책상 위에 두고
날마다 바라보았어요.
더는 둘 수 없을 만큼 썩고
말라버렸을 땐
꼭지를 따서
그 꼭지를 습자지에 싸서
보관했지요.”
교회로 가려면
청라언덕을 지나가야 했어요.
여학생은 저녁 예배를 드리러
그 길을 지나곤 했는데
전 오르간 연습을 하다가도
그 시간이 되면
언덕으로 가
그 여학생이 지나가는 걸
바라보았어요.
손수건을 전해주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어요.
언젠가는 다가올
그 시간을 아껴두고 싶었거든요.
어느 날 굳은 결심을 하고
그녀를 기다렸어요.
‘자두 고마웠어요’라는 말을
수백 번도 더 연습했지요.
라일락 이파리가 잔뜩 두꺼워진
칠월 하순이었는데,
그즈음 그런 말이
유행하고 있었어요.
‘사랑의 맛을 알려면
라일락 이파리를 씹어보라’라는...
하지만 라일락 이파리가
어떤 맛인지는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문득 저는 그 맛이 궁금해졌어요.
사랑의 맛이 궁금해졌던 거지요.
손을 뻗어 연한 잎 하나를 떼서
입안에 넣었는데.
아! 그 맛이란!
그건 먹어보지 않고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맛이었어요.
정말이지 죽을 것 같은 맛이었는데
뱉어버릴 수가 없었어요.
그러면 그 기다림이
허사가 되고 말 것 같았거든요.
그때였어요.
멀리 그녀의 모습이 보였어요.
기다림은 그렇게 길었는데
그녀의 걸음은 어찌나 빨랐던지
내가 이파리를 다 씹어 삼키기도 전에
그녀는 내 코 앞에 마주 있었지요.
아직도 입안에 가득한
그 맛 때문에
혀가 얼얼하고
얼굴은 붉으락 푸르락했지요.
그때 제가 어떻게 한 줄 아세요?
바보스럽게도
‘라일락 고마웠어요’라고
말하고 말았어요.
어휴, 그렇게 골백번 연습한 말을 두고
라일락이 고맙다니요.”
순진한 아이처럼
귓불이 붉어진 태준을 바라보며
은상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아이고, 도대체 그 이파리 맛이 어땠게요?”
“그건 이 선생님이 직접 맛보셔야 알아요.
사랑의 맛이 그런 것이라는 걸
절감하게 될 테니까요.”
그리고 태준은 얼굴을 활짝 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여학생이
어떻게 한 줄 아세요?
절 보며 웃었어요.
제게 눈을 맞추고
소리 없이 빙그레 웃었답니다.”
그 후 그녀는 말 한마디 없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버렸어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은상이
갑자기 생각난 듯 수첩을 꺼내
무언가 끄적이기 시작했다.
“박 선생님, 선생님 곡에다가
그 여학생의 이야기를 담으세요.
그러면 그 소녀와의 사랑을
노래 속에서나마 이룰 수 있지 않겠어요?
제가 가사를 써 드릴 테니
곡을 붙여보시겠어요?”
잠시 후 은상은
태준의 고향 추억과
눈 앞에 펼쳐진 월포 바닷가의
풍경을 담은 시를 건네주었다.
수첩을 받아든 태준의 눈동자가
따스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촉촉이 젖어들었다.
“정말 아름다운 노랫말이군요.”
가곡(歌曲)이란
관현악 반주에 맞추어
시조시를 노래하는
한국의 전통 성악곡을 말한다.
동무생각
장르: 가곡(歌曲),
1922년 작,
이은상 작사 박태준 작곡
1.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
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2. 더운 백사장에 밀려드는
저녁 조수 위에 흰 새 뛸 적에
나는 멀리 산천 바라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저녁 조수와 같은 내 맘에
흰 새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떠돌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3. 서리 바람 부는 낙엽 동산 속
꽃 진 연당에서 금새 뛸 적에
나는 깊이 물 속 굽어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꽃 진 연당과 같은 내 맘에
금새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뛰놀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4. 소리 없이 오는 눈발 사이로
밤의 장안에서 가등 빛날 때
나는 높이 성궁 쳐다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밤의 장안과 같은 내 맘에
가등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빛날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사범학교 음악 시간에
한창희 선생님이
'백합 같은 내 사랑아'
라고 개사해서 노래부르니
여학생 쪽에서
함성이 들렸다.
‘동무생각’ 동영상 재생 버튼↓
테너 이인범(피아노 반주자 부인 이정자 녹음)
조수미
↑‘동무생각’ 노래비는
이미 문화재로 지정된
세 채의 선교사 사택이 있었던
청라(靑蘿)언덕
계명대 동산의료원 내
의료선교 박물관에
2009년 6월 17일
전재규 동산의료원
의료선교 명예 박물관장
(전 계명대 의대 학장)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을 올렸다.
이날 신명여고생
20여 명이 함께 참석했는데
이한결양(18세, 3학년)은
중학교 때 ‘동무생각’을 배웠다며
우리 학교 선배님을
짝사랑한 데서
비롯됐다는 것에 대해
다들 놀랐다고 말했다.
백합은 박태준이 짝사랑했던
신명학교 여학생을 표현한다고
의료원 측은 설명했다.
그 여학생(유인경)의 얼굴이
백합처럼 흰 데서 붙여졌다고 한다.
전재규 관장은
3.1운동길이 지나는 동산은
대구의 근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간직한 곳이라며
이런 곳에 청라언덕
‘동무생각’ 노래비가 세워져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대구 사람들은
이렇게 박태준이 태어나고 다녔던
계성학교와
박태준이 짝사랑했던
신명학교 여고생과
인근 푸른 담쟁이 넝쿨로 뒤덮인
옛 선교사 사택과
東山 일대의 언덕에서
청순한 사랑이
짝사랑으로 움텄을 것을 상상하여
푸를 청(靑) 자(字),
담쟁이 넝쿨 라(蘿) 자(字)라 풀이하여
‘청라언덕’이라 명명하고
‘동무생각’ 노래비를 세우고
창작 오페라를 공연했다.
현재명, 김동리, 박목월,
이상화, 이인성도
이 청라언덕에 올라
작품을 구상했을 것이다.
↑대구 국제 오페라축제는
축제 개최 10주년을 맞아
개막작으로 대구를 빛낸
작곡가 박태준의 삶과 음악,
사랑 이야기를
스토리 텔링화 한 창작 오페라
‘청라언덕’을 내놓았다.
‘동무생각’ 3절에 나오는 가사
‘서리 바람 부는 낙엽 동산 속
꽃 진 연당에서…’의 연못은
동산에 물을 대주던
‘선황당 연못’이라는 것도
이번에 밝혀졌다.
이 연못은 1923년
서문시장 확장과 함께 메워졌다.
오페라 '청라언덕'
2012년 12월 8일
노년의 박태준(바리톤 김상충)이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면서,
그 옆으로 젊은 시절의
박태준(테너 박현재)과
그의 첫사랑 유인경
(소프라노 이정아)이
애틋한 사랑의 노래를 불렀다.
공연 전체에는 ‘동무생각’이
다양한 변주를 통해
배경음악으로 깔린다.
유인경 역을 맡은 소프라노
이정아는 “창작 오페라라
모험도 컸지만
워낙 가사가 서정적이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풍겨
감정을 몰입해 노래하기에 좋았고,
음악 또한 우리 감성에 꼭 맞는
분위기로 채워져
연습을 하면 할수록
빠져들고 있다”라고 말했다.
마산 사람들도
옥편에 라(蘿) 자(字)의 첫 뜻은
쑥으로 나오고,
담쟁이 넝쿨은
일곱 번째 뜻으로 나온다라
풀이하여
이은상은 봄이면
파란 쑥이 지천인 뒷산
노비산(옛 제비산) 언덕에서
더운 백사장 저녁 조수(潮水)를
바라보면서
청운(靑雲)의 꿈을 키웠을 것이라고
존경했다.
창원시는
시(市)의 문학을 계승, 발전시키고
사회교육과 정서함양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마산 합포구 노산북 8길 49-1
(상남동) 58-8에
창원 시립 마산문학관을
2005년에 세웠다.
1970년
마산 합포구 산호동 247-1
산호공원에
이은상 ‘가고파 시비’가
건립되었다.
국제로터리클럽 3720 지부는
2013년 2월 6일
마산역 광장에
‘가고파 노산 이은상 시비’를 세웠다.
이에 대해 열린사회희망연대는
"이은상은 마산 시민이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에 대해 항거한
'3.15 의거'를
폄하하는 발언을 하는 등
반민주 행적을 일삼은 인물"이라며
이 노래비를 훼손하는 일이 벌어졌다.
우리 모두가 아끼고 좋아하는 가곡
‘동무생각’은
국민 애창곡이 된지 이미 오래이다.
수많은 가곡 중에서
지금까지 우리나라 음악 교과서에
단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이
계속 실린 유일한 가곡이
바로 이 '동무생각'이다.
작사가 이은상의 고향은
마산이고
작곡가 박태준의 고향은
대구이다.
누구나 태어난 고향산천을
그리워하고
어릴 때 뛰어놀던 친구들을
잊지 못한다.
고향 사람을 추켜 세우고자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정(情)이
유별나게 두터우신 두 분의 공적을
사모하는 마음은
전 국민이 그지없습니다.
오빠생각은
최순애
(崔順愛, 1914~1998, 84세 사망) 여사가
11살 때인 1925년에
발표한 동시(童詩)를
박태준씨가 1930년 작곡하여
발표한 초창기 동요(童謠) 작품이다.
일제강점기의 어린이의 마음이
얼마나 애처로운 것이었나를
짐작하게 한다.
8분의 6박자의 노랫가락에 나타난
애상 조의 멜로디로서
당시의 어린이의 심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잊혀지지 않는 동요(童謠)로서
오늘날에도
흘러간 노래로 애창되고 있다.
동요(童謠)란
문학 장르의 하나로
어린이들의 생활 감정이나
심리를 표현한 정형시로서
형식상 음수율이 강화되어
음악성이 돋보이며
형식과 수사(修辭)를 중요시하고
어린이를 위하여
동심(童心)을 바탕으로
지은 노래이다.
오빠생각
장르: 동요(童謠),
1925년 발표,
최순애 작사 박태준 작곡
1.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2. 기럭 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귀뚤 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최순애(왼쪽) 선생과 이원수 선생
1980년 이원수 선생이
대한민국 문학상 아동문학부문
본상을 받았을 때 모습
고향의봄 기념사업회
표절의혹
1919년 일본에서 발표된 동요
'하마치도리'를 표절했다는 주장이 있다.
'하마치도리'와
끝부분 일부를 제외한 부분의
박자 전개가 유사하다는 것.
'하마치도리'는 '오빠생각'이 지어진
1925년보다 빠른
1920년에 JVC에서
음반이 제작된 기록이 있는데,
새를 소재로 삼은 노래라는 것도
유사하다.
다만 선율의 유사성이
표절이라고 볼 정도는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직접 들어보고 판단하자.
최순애 작사 박태준 작곡 이정숙 노래
오빠생각 1930년
새를 주제로한 일본곡 1920년 작
浜千鳥(はまちどり, 하마치도리, 물떼새)
浜千鳥 はまちどり(中日文字幕)
青(あお)い月夜(つきよ)の 浜辺(はまべ)には
親(おや)を探(さが)して 鳴(な)く鳥(とり)が
波(なみ)の国(くに)から 生(う)まれ出(で)る
濡(ぬ)れた翼(つばさ)の 銀(ぎん)の色(いろ)
夜(よる)鳴(な)く鳥(とり)の 悲(かな)しさは
親(おや)をたずねて 海(うみ)こえて
月夜(つきよ)の国(くに)へ 消(き)えてゆく
銀(ぎん)のつばさの 浜千鳥(はまちどり)
푸른 달밤의 해변에는
부모를 찾아 우는 새가
파도의 나라에서 태어나다
젖은 날개의 은빛
밤에 우는 새의 슬픔은
부모를 찾아 바다를 물어보며
달밤의 나라로 사라져 가다
은제비 해변의 바닷가 치도리
노산 이은상 선생이
아버지가 설립한
마산 창신학교(기독교계)
고등과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모교인 창신학교에
국어교사로 있을 때
박태준이 1921년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마산 창신학교에 음악교사
(1921~1923)로 부임해 옴으로써
교분이 두터워져서
가곡 ‘사우(思友)’를
이은상 작사 박태준 작곡으로
1922년 발표하였다.
‘사우(思友)’는 ‘동무생각’으로
개명되었다.
↑1910년 당시의 마산 창신학교
(지금의 창원시 마산 합포구 상남동 87번지)
↑‘동무생각’ 2절의
'더운 백사장에 밀려드는
저녁 조수 위에'의
조수(潮水)는 마산 앞바다
합포만 돌섬 유원지에
저녁 파도를 가리킨다.
↑마산 월포해수욕장과 자산동 굼턱.
옛날 월포해수욕장은
물이 차갑지 않고
멀리까지 얕으며
백사장과 송림이 길게 늘어져 있어
피서객들도 많았다고 한다.
해안 도로를 따라가면
기찻길 흔적이 보이고
마산세관터와
월포해수욕장터 표지석이 있다.
1931년 7월 19일 자
동아일보 기사:
馬山月浦의 海水浴場開始,
욕객에겐 긔차임도 할인,
兒童水泳所도 別設.
긔후와 공긔가 온화하고 명미하여
경치가 조키로 유명한
마산 월포해수욕장은 개시되엇다.
중략. 마산 월포해수욕장은
수질(水質)과 모래 밋
공기가 모다(모두)
해수욕장으로서의 조건을 구비하여
잇슴으로 금년 하긔(여름)에도
자못 번창할 것을 예칙한다고 한다.
↑ 노비산(일명 제비산)은
창원시 노산동(鷺山洞)에 있는
낮은 산으로
용마산과 연결돼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신작로 공사로
분리되었다.
말을 끄는 노비에 비유하여
노비산이라 이름 붙였으며
1940년대 이후에는
제비산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창원시는 문학을 계승, 발전시키고
사회교육과 정서함양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마산 합포구 노산북 8길 49-1
(상남동) 58-8 청라언덕에
창원 시립 마산문학관(馬山文學館)을
2005년에 세웠다.
박태준(朴泰俊)
작곡가, 합창지휘자,
출사: 1900~1986, 86세 사망
일제강점기
오빠생각, 오뚝이, 하얀 밤 등을 작곡.
일제말기 민족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대구에서 포목상을 운영하던
박순조의 차남으로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대구 계성학교
(1911~1916년, 기독교계) 졸업
박태준 학생은
평양 숭실전문학교 재학시에
서양 선교사들에게서
성악과 작곡의 기초법을 배워
가을밤, 골목길 등을 작곡하였는데,
이 곡들은
동요의 초창기 작품으로 평가된다.
1921년
평양 숭실전문학교 졸업 후
마산 창신학교 음악교사로
부임하여 마침 이 학교에
국어교사로 있는
이은상과 만나게 되어
동무생각(思友)
이은상 작사 박태준 작곡으로
1922년 발표하였다.
1924~1931년까지
모교인 대구 계성중학교에
재직하면서
오빠생각{최순애(崔順愛) 작사},
오뚝이{윤석중(尹石重) 작사},
하얀 밤, 맴맴{윤석중(尹石重) 작사}) 등
우리나라 동요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작곡하였으나,
이 가운데 윤복진의 작사에
곡을 붙인 50여 곡의 작품들은
윤복진의 월북 관계로
1945년 이후
가사가 바뀌거나
또는 금지되기도 했다.
1922~1925년
동무생각(思友, 사우),
가을밤, 골목길, 미풍,
님과 함께, 소나기를 작곡했다.
이 시기 그의 작곡 형식은
진취적이고
시의 선택도 유절 가곡에서
자유스러운 형태를 채택하여
우리나라 예술가곡(藝術歌曲)의
효시라 볼 수 있다.
오빠생각 작곡 후
음악을 정식으로 공부하기 위해
도미, 1932년
미국 터스칼럼(Tusculum)대학교에서
문학을,
1935년 웨스트민스터
(Westminster) 음대에서
합창지휘를 배워
최초로 합창지휘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같은 해 귀국한 뒤
1936년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하였다.
1945년
한국 오라토리오 합창단을
창단하여 협회장 겸
합창지휘자로서
27년간 헨델의 메시아,
바하의 b단조 미사 등
수많은 합창곡을
국내에 소개했다.
1946년
서울여자 음대 교수,
1948~1966년
연세대 음대 교수로 있으면서,
1952년
미국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음대에서
명예 음악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5년
연세대 음악대 종교음악과
초대 과장에 취임,
1966년 정년퇴임까지
후배를 양성했다.
1958년
연세대학교 종교 음악과 개설,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초대 학장 및 명예교수.
1960~74년에는
교회음악협회장을 역임했다.
1964년
연세대 음악대학장,
예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1966~74년
연세대 특별 교수,
1968~72년
한국음악협회 회장,
서울음악제를 창설
예술원 회원으로 활동
1973년까지
지휘자로 활동하며
합창음악 발전에 기여했으며
남대문교회 성가대도 지휘했다.
1974년 도미,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필라델피아 등에서
신병 치료를 하면서도
지휘 활동을 계속했다.
연세대 교가와
제헌절 노래도 작곡했다.
1978년
예술원 종신회원(작곡)이 되고
후학 양성과 음악계에
큰 업적을 남겼다.
제6회 서울시 음악 문화상(1957)
제6회 예술원 음악 공로상(1960)
예술원상(1961)
대통령상 문화훈장(1962)
국민훈장 무궁화장(1970)
1982년 MBC에서 제정한
제2회 가곡 공로상 수상.
1983년 제7회 월남상(月南賞)과
1984년 한국 아동 음악 공로상을 받았다.
작곡:
가을밤, 골목길, 오빠생각,
동무생각(思友), 집 생각,
고향 하늘, 누나야 보슬보슬 봄비 내린다,
등대, 종달새,
새 나라의 어린이
{윤석중(尹石重) 작사} 등,
성가 작곡에도 몸 바친
그는 한국 가곡의 뿌리로 불린다.
‘주 예수 흘린 피’
‘어둠의 권세에서’ 등
찬송가와 가곡, 동요
150여 곡을 만들었다.
장지: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
일산 기독교 공원 묘원.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시조 작가, 사학자, 수필가.
출사: 1903~1982(79세 사망)
대학에서
이은상 문학특강시에 보니
귀가 부처님 귀 같다는
인상이 들었다.
가곡 동무생각, 고향생각,
가고파, 성불사의 밤 등의 작사자.
본관: 전주
저서 작품:
혈조, 테니슨의 사세시,
새타령, 조선의 꽃,
남산에 올라,
황진이의 일생과 예술,
고향생각, 가고파, 성불사의 밤
경력: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
해방 이후 노산 시조 선집,
푸른 하늘의 뜻은 등을
저술한 작가.
시조 작가. 사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노산(鷺山),
필명은 남천(南川),
강산유인(江山遊人), 두우성(斗牛星).
1903년
이승규(李承奎)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18년
아버지가 설립한 마산 창신학교
(昌信學校) 고등과를 졸업하고,
1923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수업하다가
1925~1927년에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사학부에서 수학하였다.
1931년~1932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비롯하여,
동아일보사 기자,
신가정(新家庭) 편집인,
조선일보사 출판국 주간 등을
역임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홍원 경찰서와
함흥 형무소에 구금되었다가
이듬해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1945년
사상범 예비 검속으로
광양 경찰서에 유치 중에
광복과 함께 풀려났다.
광복 후
이충무공 기념사업회 이사장,
안중근 의사숭모 회장,
민족문화 협회장,
독립운동사 편찬위원장,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
문화보호협회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1921년
두우성이라는 필명으로
아성(我聲) 4호에
혈조(血潮)라는 시를 발표한 바 있으나,
본격적인 문학 활동은
1924년
조선문단의 창간 무렵부터였다.
그는 이 잡지를 통하여
평론, 수필, 시들을
다수 발표하였는데,
그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국학이나 시조는 거의 등한시 하고,
서구의 자유시 쪽에
기울어 있었다.
이 무렵에 발표한 자유시는
30편을 헤아리고 있는 데 비하여
시조는 단 한편에 불과하였다.
또, 평론 부문에서도
1925년
조선문단에 게재된
시인 휘트만론, 테니슨의 사세시,
영시사강좌(英詩史講座),
예술적 이념의 본연성(1926.6)이나
동아일보에 발표한
아관남구문학(我觀南歐文學)
(1925.1.30~2.23) 등의
제목들이 그간의 사정을 말해준다.
그러다가 1926년 후반에 이르러
시조 부흥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시조를 비롯한
전통문학과 국학 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시가 분야에서는
1929~1930년에
민요조의 리듬을 살린
새타령, 매화동(賣花童),
조선의 꽃, 말몰이,
님 향한 생각이야,
남산에 올라, 말노래 등을
발표하였다.
평론 분야에서도
같은 시기에
청상(靑孀) 민요 소고,
이언(俚諺)의 의의 및
그 형식에 관하여,
특수 이언과 공통 이언,
풍수(風水)를 믿던 이들,
문학상으로 본 조선의 어희(語戱),
황진이의 일생과 예술 등을
발표하였다.
그는 시조는 문학이 아니라고
낮추어 생각하였다가
시조 논의가 일어나자
비로소 시조를 문학시 하게 되었다고
술회 한 바 있으나,
한동안 자유시와 시조의
창작을 병행하다가
1930년대 후반부터
시조인으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그는 시조를 쓰는 한편,
당시(唐詩)를 시조 형식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시조에 관한 이론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동아일보에 발표한
시조 문제(1927.4.30~5.4),
시조 단형추의(短型芻議)
(1928.4.18~25),
시조 창작문제(1932.3.30~4.9) 등의
논고를 통하여
자수로서가 아니라
음수율로서
시조의 정형성을 구명(究明)하려
시도하였다.
1932년에 나온
그의 첫 개인 시조집인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은
향수, 감상, 무상, 자연예찬 등의
특질로 집약된다.
이 중 고향생각, 가고파,
성불사의 밤 등은
시조의 평이하고 감미로운
서정성이 가곡에 걸맞아
노래로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광복후 그의 시조는
국토 예찬,
조국 분단의 아픔,
통일에 대한 염원,
우국지사들에 대한 추모 등
개인적 정서보다는
사회성을 보다 강조하는
방향으로 기울어갔다.
이러한 작품들은
시조집, 노산시조선집(1958)을
비롯하여 특히,
푸른 하늘의 뜻은(1970)과
마지막 작품집인 기원(祈願)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그의 시조는 대체로 평이하고
기발한 표현으로
독자에게 친근감을 주고 있다.
그는 한때 주요한(朱耀翰)에 이어
두 번째로 양장시조(兩章時調)를
시험하여,
시조의 단형화를
시도한 바도 있으나
말기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음수가 많이 늘어나는
경향을 띠었다.
사학가이자 수필가이기도 한
그는 해박한 역사적 지식과
유려한 문장으로
국토순례기행문과
선열의 전기를 많이 써서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광복 후에 문학보다는
사회사업에 더 많이 진력하였다.
그 밖에 저서로는
시문집으로 노산문선(鷺山文選),
노산시문선 등과
수필집으로 무상(無常),
사화집으로 조선사화집(朝鮮史話集)과
기행문집 등이 있고
전기로는 탐라기행한라산
(耽羅紀行漢拏山),
피어린 육백리, 이충무공일대기
(李忠武公一代記) 등
1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1949년
동국대 교수에 부임하였고
이후 충무공 이순신 장군
기념사업회장,
안중근 의사 숭모회 이사장,
통일촉진회 최고위원,
한국청년운동협의회
(현 대한민국 통일건국회) 회장,
전두환 정부 국정자문 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언론, 사학, 문학 쪽에서
다양한 저술을 남겼으며
난중일기를 초역하는 등
충무공 이순신 연구자로서도
명성이 높다.
상훈과 추모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져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마산에 그의 시조를 새긴
‘가고파 시비’가 세워졌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사후 문화훈장 1등급
금관문화훈장에 추서되었다.
출처 참고:
[네이버 지식백과]
이은상 [李殷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