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목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
- 명칭 강릉단오제(江陵端午祭)
- 분류 무형유산/전통연행/의식/공동체의식
- 지정일 1967.01.16
- 관리자 강릉단오제보존회
설명
강릉단오제는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된 이래 지속적인 전승체계를 확립하여 왔다 강릉단오제의 전승 기능은 세부분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것은 단오제례, 단오굿, 관노가면극이다. 이중 단오제례 부분은 제관과 도가의 두 축으로 이루어진다. 강릉단오제의 제례는 유교의례의 규범을 기본적으로 따르고 있다. 따라서 복식과 홀기, 축문을 갖추고 헌관 및 집사들이 산신제부터 송신제까지 총 9번에 걸친 제례의식을 치룬다.
보유자
예능보유자 김신묵(金信默, 1893. 3. 18 生 ~ 1981. 9. 15 作故)1967년 1월 16일 제관 및 도가로 인정받고 1981년 작고하였다. 강릉시 성산면 구산리 태생의 유학자로 강릉단오제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 위한 조사에서 단오제례의 정립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예능보유자 김진덕(金振悳, 1910. 5. 20 生 ~ 1999. 1. 10 作故)1982년 2월 1일 김신묵 예능보유자의 뒤를 이어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강릉시 강동면 모전리 태생으로 성균관 전의, 유도회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86년부터 작고시 까지 강릉단오제보존회 회장을 맡았다.
예능보유자 조규돈(曺圭燉, 1947. 9. 24 生 ~ 현재)1976년 6월부터 강릉문화원 사무국장을 역임하면서 현재까지 강릉단오제를 실질적으로 이끌어오고 있다. 87년 7월 1일 강릉단오제 제관 전수생으로 등록되어 2000년 7월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1999년 부터 김진덕 예능보유자의 뒤를 이어 강릉단오제보존회 회장직을 맡고있다.
준비과정
1.제관, 제집사 선정
제례를 지내는데 있어 제관의 선정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제관은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 집례, 대축을 지칭하는데 강릉단오제는 영동지역 전체의 축제이나 행사의 주체는 강릉이기에 때문에 강릉 지역에서 덕있고 명망있는 인사를 헌관으로 임명한다.
이중 산신제는 오래전부터 대관령지역의 산림을 관리하는 지역 산림청의 장이 초헌관을 맡아 지내오고 있다. 대관령국사성황제는 옛 향토지인 「증수 임영지」에 ‘마을마다 성황사가 있어 춘추로 제사를 지내는데 강릉에서는 제사 지내는 외에 색다른 일이 있다.
매년 4월 15일에 본부의 호장이 무당을 거느리고 대관령 산위에 있는 한 칸의 신사(神祠)에 가서 고유하고 무당으로 하여금 나무에 신령을 구하게 한다.’ 라는 기록이 있어 이를 바탕으로 지금껏 강릉시장이 초헌관을 맡아 오고 있다.
그밖에 강릉지역 각 기관과 협회의 장들이 소속 회원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제관으로 참여한다. 중앙시장 번영회의 경우 단오제의 운영이 강릉문화원으로 이전되기 전인 50~60년대 강릉단오제를 주관했던 중앙시장 상인들의 연합체로 지금껏 계속 단오제에 참여하고 있다. 또한 동해상사의 경우 과거 대관령이 포장되지 않았던 시절부터 강릉을 외부와 연결시켜주는 버스를 운영하던 회사로 운행하는 버스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단오제에 많은 지원을 한 연유로 매년 헌관으로 제례에 참석하고 있다.
제관으로 선정된 이들에게는 행사 보름쯤 전에 망기(望記)를 보내어 내용을 알린다. 강릉에서는 단오제례의 헌관에 선정되는 것을 개인적으로 상당히 영예로운 일로 여겨지며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수락하는 것이 보통이다. 집사는 단오제보존회에 소속되어 있는 제례부문 회원들이 역할을 나누어 맡는다. 특히 제관과 집사로 임명된 사람들은 행사를 치를 때까지 몸가짐을 바로하고 부정한 일을 멀리해야 하는 금기를 지켜야 한다. 부정한 일로는 피를 보거나, 초상을 보거나, 개고기를 먹거나 하는 등의 일인데 이런 일들은 최소한 일주일 전부터는 금하는 것이 보통이다
2. 제물준비
단오 제례에 쓰일 제물의 준비는 전수교육보조자 최두길씨의 책임아래 제례부문 회원들이 준비 한다.
-장보기
과거에는 주로 중앙시장에서 제물거리를 구입하였으나, 현재는 농협에서 운영하는 마트에서 고기와 과일 야채 등을 구입하고 어물 종류만 중앙시장 지하의 어시장을 이용한다. 제례에 쓰일 제물은 가장 크고, 신선하며, 모양이 좋은 것을 선택한다. 농협에서 구입하는 재료는 미리 수량을 주문하면 알아서 좋은 것으로 골라 준비를 해준다.
-제물 만들기
제물을 준비하고 만들기 전에 먼저 하는 일은 주변을 청소하고 금줄을 치는 일이다. 4월 5일 신주빚기를 하는 칠사당은 4월 4일 오전에 보존회 회원들이 모여 청소를 한 후 문 앞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린다.
4월 15일 대관령과 여성황사에 열리는 행사에도 4월 12일 날 미리 금줄을 친다. 제물을 만들 때는 사각의 한지를 대각선으로 접은 삼각형 모양의 함을 입에 물고 음식을 만든다. 이는 정갈해야 할 제물준비에 혹시라도 부정이 생길지 모르는 조심스러움과 음식에 침이 들어가지 않기 위한 방안이다. 대관령산신제와 국사성황제에 올린 메는 대관령에서 생용으로 짓는다.
쇠고기는 날 것으로 올리는 부분과 육탕을 만들 부분을 잘라놓고 나머지는 길게 썰어 꼬치 산적을 만든다산적은 미량의 소금을 간하여 굽는다. 떡은 미리 불려놓은 쌀을 방앗간에서 빻아다 시루에 쪄낸다. 떡은 다른 재료를 전혀 넣지않은 백설기로 쪄내며 쌀을 빻기 전 소금으로 약간의 간을 한다. 어물은 다듬어서 찜통에다 쪄내고 문어는 다리만을 구입하여 끓는 물에 데쳐서 사용한다. 어탕, 육탕, 소탕, 알탕은 모두 무를 깍둑썰어 넣고 주재료을 넣어 소금으로만 간하여 끓여낸다. 나물에는 시금치나물과 도라지나물을 올린다. 시금치는 물에 살짝 데쳐 소금으로 간하여 버무리고, 도라지는 껍질을 벗겨 데친 후 소금간을 하여 버무린다.
-제수
(1) 메 : 음력 4월 15일 대관령에서 지내는 산신제와 국사성황제는 산에서 직접 생용에 밥을 지어 올린다. 봉안제 부터는 국사서낭과 국사여서낭 두 분을 모시기 때문에 메도 두 개를 올린다.
(2) 국수 : 가는 국수를 삶아서 놋식기에 담아 올린다. 올리는 숫자는 메와 같다.
(3) 떡 : 매 제례 때 마다 백설기 한 시루를 올린다.
(4) 신주 : 음력 4월 15일 행사에 쓰일 제주는 칠사당에서 빚은 신주를 사용 한다. 술을 빚는 양은 백미 2말에 누룩20장을 사용한다. 5월3일~7일까지 쓰일 제주는 (음력)4월 25일을 전후해 빚는데 그 양은 백미 3말에 누룩30장을 사용한다. 신주는 걸러서 사용하지 않고 위의 맑은 청주만 사용한다.
(5) 소고기 : 기름이 없는 최상의 고기를 사용한다. 보통 한번에 11근 정도를 사용 하는데 고기를 정리하면서 지방과 힘줄 등을 제거하기 때문에 실제 사용되는 양은 10근 정도이다. 생육으로 2근 정도를 쓰고 육탕으로 약간 쓰며 나머지는 산적을 만들어 쓴다.
(6) 어물 : 문어, 명태, 열기를 사용한다. 목판에 어물을 고이는 순서는 명태, 열기, 문어 순으로 올린다. 명태는 네 토막씩을 격자로 네 칸 쌓아올리고 그위에 열기는 세토막씩 격자로 네 칸을 쌓는다. 이때 명태는 머리는 사용하지 않고 굵은 몸통 부분만 사용하는데 비해 열기는 꼬리부분을 잘라내고 머리부터 몸통까지 사용한다.
마지막으로 문어를 두칸 쌓는다. 문어는 다리 부분만을 사용하는데 가장 굵은 부분을 25Cm정도의 길이로 자르고 가운데 부분을 갈라 넓게 펼쳐 담는다.
(7) 대구포 : 상품 한 마리를 사용한다.
(8) 탕 : 어탕(명태, 무), 육탕(소고기, 무), 소탕(두부, 무), 알탕(명란, 무) 네 개를 만들어 올린다.
(9) 소채류 : 시금치와 도라지나물을 쓴다.
(10) 대추 : 제기 하나를 쌓는데 작은되로 세되 정도가 들어간다. 대추의 머리와 꼬리 부분을 안으로 밀어 넣고 전체적인 모양을 둥굴게 다듬어 고인다.
(11) 밤 : 제기 하나를 쌓는데 작은되로 세되 정도가 들어간다. 겉껍질과 속껍질을 모두 벗겨 설탕물에 담궜다가 사용한다. 윗면과 아랫면은 평평하게 깍아내고 옆면은 육각으로 쳐서 모양을 낸다.
(12) 곶감 : 제기 하나를 쌓는데 꼬치곶감 100~120개 정도가 쓰인다.
(13) 배 : 일곱개를 쌓아 올린다. 세개씩 두줄을 쌓고 위에 한 개를 올려놓는다.
(14) 한과 : 큰 것 아홉장을 쌓아 올린다.
단오굿
강릉단오제는 축문에 巫覡前導라고 한 말처럼 산신과 서낭신을 제사하는 연중행사로 무의전체가 무격에 의하여 진행되는 제의이다. 1927년 아끼바(秋葉 隆)의 기록에 의하면 무격이 50-60명이었다고 하니 상당히 큰 규모의 굿이라고 하겠다. 1937년 무라야마(村山智順) 역시 강릉단오굿에는 군수의 명에 의하여 군내거주 무격이 약 백명이나 동원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강릉단오제가 중요무형문화재 제 13호로 국가에서 지정받았을 때 굿부분 기능보유자는 장대연(여, 1885-1973)이었다. 그렇지만 이미 장대연은 노쇠하여 제대로 굿을 할 수가 없었고 곧 사망하고 말았다. 그래서 현재까지 장대연이 구술한 무가는 남아있는 것이 없다. 그후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지는 못했으나 기능보유자 예정자였던 최재분의 무가는 단 한편이 채록되어 있다. 이는 1966년 임동권이 채록한 것으로 “대관령서낭 축원가”라는 제목이 붙여져 있다.
무가의 내용은 부정을 물리고 서낭님을 모신 후 축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장대연의 뒤를 이어 기능보유자가 된 무녀는 박용녀(1910년생)이다. 박용녀는 강릉지방의 유명한 무당 박동불(男)의 손녀로 태어났다. 박동불은 18세에 신이 내려 태백산에서 수도한 무당이었다. 박용녀 역시 13세부터 무병을 앓아 18세에 내림굿을 하고 조부밑에서 무의식을 익혔다. 강릉단오굿에 참가한 것은 22세때 부터라고 한다. 전통적인 세습무가 출신은 아니었으나 인품이 좋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사망하기 10여년 전부터는 노쇠하고 병들어 굿을 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조교와 기능보유자 후보자리에 있으면서 강릉단오굿을 이끌어 온 사람은 신석남이다. 신석남은 삼척 출생이지만 강릉에 이사와 살면서 아들, 딸, 며느리들과 함께 단오굿판을 이어갔다. 그러나 1994년 신석남이 기능보유자로 지정받은지 3년을 못 넘기고 사망한 후 한동안 예능보유자가 공석상태로 있다가 2000년 7월 신석남의 둘째 며느리 빈순애가 조교에서 예능보유자로 인정되 현재까지 굿을 이끌어 오고 있다.
현재 강릉단오굿을 맡은 무당은 두 패로 나뉘어져 있다. 한 패는 작고한 신석남씨의 후손들이고 또 하나는 신석남 이전의 기능보유자였던 박용녀의 후손이다. 먼저 신석남씨의 후손들을 보면 남동생 신동해, 둘째 며느리 빈순애, 셋째아들 김명광, 막내아들 김명대, 외손주 박현수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 신석남 친언니의 아들, 즉 외조카 김장길과 그의 처 송명희, 송명희의 아버지 송동숙과 처 김미향, 송명희의 남동생인 송정환이 가세하고 있다. 또한 김용택과 그의 처 김영숙도 빠지지 않고 단오굿에 참가하고 있는데 김용택은 신석남의 남편인 김용출의 조카이다. 신동해, 김명대, 김명광, 박현수는 강릉에 거주하고 빈순애는 속초와 강릉을 오가면서 살고 있다.
한편 김장길 부부는 울진 삼율에, 송동숙 부부와 송정환은 평해, 김용택은 포항에 살고있어 신석남의 직계를 제외하고는 모두 경상도에 거주하는 셈이다. 또 하나의 패는 아주 단촐하다. 즉 박용녀의 친조카 박금천과 박금천의 친정 어머니 사화선이 그들이다. 이중 사화선은 나이롱무당이라는 별호를 가지고 일을 해온 신들린 무당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세습무의 굿을 익혔다. 한편 신성녀와 신길자 자매 역시 뺄 수 없는 강릉단오굿의 무당들이다. 신들린 무녀였던 신길자(1943년생)가 김석출의 조카인 김복룡에게 시집을 가면서 세습무가의 굿을 배우게 되었다. 그후 언니인 신성녀 역시 신이 들려서 동생과 함께 굿을 다니면서 일을 배웠다. 신길자는 주문진에, 신성녀는 강릉에 거주한다. 신석남은 김석출의 사촌 형수이기 때문에 김복룡과 인척이 되어 단오굿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처럼 강릉단오굿에 참가하는 무당들은 전형적인 세습무가 출신들이다. 물론 여기에 신들린 무당이 참여하기도 하지만 대세를 이루지는 못하고 있다. 이들은 어려서부터 여자는 무가구연과 춤을 익히고 남자들은 악기연주를 학습하여 상당한 수준에 이른 사람들이다. 세습무가의 남자들을 화랭이, 또는 양중 등으로 부르는데 장고, 꽹과리, 징 등 타악기를 중심으로 연주하는 이들의 실력은 국제적이라고 하겠다. 뒤늦게 신들린 무녀가 굿을 학습하기도 어렵지만 특히 악사의 경우는 신들린 박수가 양중으로 변모되는 일은 없다. 간혹 민속음악을 공부하다가 굿판에서 실기를 연습하는 대학생출신이 참여하기도 하지만 일관성은 없다고 하겠다.
현재 무녀에 빈순애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어 있고 신석남의 동생인 신동해(32년생)가 악사부문 예능보유자 후보로 지정되어있다. 그외 전수교육조교는 악사로 김명대(62년생)와 김명광(55년생)이 있고 정종근(54년생)이 전수생으로 되어있다. 무녀로는 박금천과 이순덕이 전수교육조교로 지정되어있고 박금천의 어머니인 사화선이 이수자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강릉단오굿은 정상적으로 굿이 전승되기 위해서는 악사와 무녀가 각각 한명씩 기능보유자로 지정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강릉단오굿을 포함한 동해안 세습무권에서는 무악이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독특하고 뛰어난 음악성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음악이 있어야 무가를 부르고 춤을 추는 등 무녀가 굿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녀와 악사는 우위를 가릴 수 없이 각각 중요한 존재인 것이다.
관노가면극
강릉관노가면극은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 관노들에 의해 연희되던 탈놀이이다. 그런데 갑오경장(1894) 때 공식적으로 공사노비법(公私奴婢法)을 혁파함으로써 점차 관노가면극의 전승이 위축되다가 1909년경에는 아예 전승이 중단되고 말았다. 또한 실제로 연희를 담당했던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에 관노가면극을 복원하는 데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임동권 교수가 1966년 김동하(金東夏, 1884년생) · 차형원(車亨元, 1890년생)옹을 찾아내어 관노가면극을 복원할 수 있었다. 이 두 분은 관청의 이속(吏屬)이었는데, 김동하 옹은 21세 때 차형원 옹은 17세 때 마지막으로 관노가면극을 보았다고 한다.
김동하(1884년~1976년)1965년 추진된 관노가면극의 재연에 상당한 공헌을 하였으며, 관노가면극에 대하여 소상하게 알고 있는 관계로 1967년에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가 작고하였다.
차형원(1890년~1972년)관노가면극에 대하여 매우 소상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며, 그의 증언 내용은 오늘날 관노가면극의 원형을 복원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67년에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가 작고하였다.
권영하(1918년~1997년)1993년 8월 2일 관노가면극 양반광대역으로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강릉 지변동 출생으로 가면극의 민간전승의 기틀정착에 기여하였다. 상쇠와 양반광대춤을 추었다.
김종군(1942년~현재)2000년 7월 2일 양반광대역으로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어 있다. 1984년부터 권영하씨로부터 양반춤을 전수 받았다. 속초장재터에서 출생하여 10세때 강릉 지변동으로 이주하여 지변동에서 농사를 짓고있다.
지정문화재 행사
1. 신주빚기
음력 4월5일 칠사당에서 산신제와 대관령국사서낭제, 대관령국사여서낭제에 쓰일 술을 빚는 행사가 열린다. 칠사당은 옛 강릉관아의 부속 건물로 신주를 빚기 7일전 문 앞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려 놓는다. 예전에는 음력 3월 20일에 도가집에서 술을 담궜으나 터울이 길어 술이 쉬는 경우가 많아 1992년부터 4월 5일로 날짜가 바뀌었다.
과거에는 관에서 받은 쌀이나 제전(祭田)에서 농사를 지은 깨끗한 쌀 한말과 누룩을 섞어 술을 빚었다. 1994년부터는 그 전래에 따라 강릉시장이 쌀과 누룩과 솔잎을 제공하는 신주미 봉정식을 갖고 있다.
4월 5일 오전 10시 시청 앞마당에 제전부의 도가를 비롯한 강릉단오제 보존회 회원들은 시장에게 배례하고 신주미를 받아 칠사당까지 3km 정도를 걸어서 행진하는데, 양중과 관노가면극 악사들은 굿거리와 삼채가락을 치고 무녀와 관노패들은 여기에 맞춰 춤을 추며 행진한다. 이때 시민들은 가정에서 준비해온 단오헌미(端午獻米)를 바치기도 한다.
칠사당에 도착하면 먼저 마당 가운데서 지신을 밟고 부정굿을 한 석 한다. 도가와 제례부 종사자들은 마당에 피운 장작불에 술단지를 소독하고 미리 준비해온 고두밥과 누룩, 솔잎, 물을 알맞게 섞어 단지에 넣고 한지로 봉하여 술을 빚는다. 쌀과 누룩의 비율은 2:1 정도이고 솔잎은 쌀 한말에 닷되그릇에 담길 만큼의 양을 넣는다. 솔잎은 술맛을 좋게 하고 일정기간 술을 숙성시킨 뒤 술을 거를 때 쌀과 누룩 솔잎이 잘 엉키어 짜내기가 쉽기 때문이다.
한편 이날 행사에서는 일반 시민들이 단오제에 쓰일 술과 떡을 빚기 위한 쌀을 내는 신주미봉정 행사도 함께 열리는데 시민들은 정성껏 준비한 쌀자루에 가족들의 성명과 생년월일을 써서 가족의 안녕과 건강을 기원한다.
2. 대관령산신제
음력 4월 15일 오전 10시 대관령 산신당에서 김유신 장군을 모시는 산신제가 유교식 제의로 진행된다. 제를 지내기에 앞서 5월 12일 이곳 산신당과 대관령국사성황사 그리고 국사여성황사에는 금줄이 쳐지고 이후로는 제례가 올려지는 15일까지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히 금지된다. 15일이 되면 새벽 6시에 제례부 종사자들은 미리 대관령에 올라와 산신과 국사서낭께 올린 생용에 메을 짓고 제물을 진설 하는 등 제의를 준비한다. 산신제는 홀기의 순서에 따라 30여분정도 진행되며 초헌관은 이곳의 산림을 관장하는 영림소장이 맡는다. 제례가 끝나면 참석자들은 모두 음복을 하고 대관령국사성황당으로 이동한다.
3.대관령 국사서낭제
대관령국사서낭은 강릉단오제의 주신으로 굴산사를 창건한 신라의 고승 범일국사로 알려지고 있다. 오전 11시에 먼저 국사성황사에서 유교식 제례를 지낸다. 국사서낭은 강릉단오제의 주신인 연유로 초헌관은 강릉시장이 맡는다.
4. 신목베기
신목베기는 국사서낭이 하강하신 신체로 여겨지는 신목을 베는 행사다. 국사서낭사 앞에서 무녀가 먼저 부정을 가셔내고 국사서낭을 청하는 굿을 한뒤 신장부가 앞장서 신목을 베러 산위로 올라간다. 신장부는 세가지가 부채꼴 모양으로 곧게 뻗은 단풍나무를 찾아 붙잡고 무녀는 제금을 울리며 국사서낭이 신목에 하강하길 기원하는 대내림을 한다.
대내림은 먼저 4월 보름날 강릉에서 정성을 다 하여 서낭님과 산신님을 맞이하기 위해 모시러 왔다고 고하고, 이어 신목잡이의 생기를 댄 후 신령님이 그 정성을 반가이 받아 언짢은 일이 있더라도 눌러 받으시고 열두마디 가지마다 잎마다 설설이 내리시라는 내용이다. 신목잡이에게 대가 내리면 잡고 있는 가지의 밑 둥을 잘라 오색천으로 치장하고 국사서낭위 위패를 앞세워 강릉으로 내려온다
5. 국사서낭 모시기
「증수임영지」(1993)에 의하면 “매년 4월 15일에 강릉부의 호장이 무당을 거느리고 대관령 산위에 있는 한 칸의 신사에 가서 고유(告由)하고 무당으로 하여금 나무에다가 신령을 구하게 하여 나무에 신이 내려 흔들리면 그 가지를 하나 꺾어 기운 센 사람이 들게 하고 오는데 이를 국사(國師)의 행차라고 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현재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으나 예전에는 걸어서 대관령을 내려오던 형렬이 지금은 차량을 이용하기 때문에 고개 중턱에서부터 구산성황당까지 걸어서 내려오는 행사를 하고 있다. 국사서낭을 모시고 내려오는 사람들은 춤을 추고 산유화 또는 영산홍가라는 노래를 부르며 대관령을 내려온다.
6. 구산서낭제
대관령에서 국사서낭을 모시고 강릉으로 내려오던 행렬은 이곳 성산면 구산리 서낭당에 잠시 들른다. 국사서낭을 맞이한 마을에서는 이 때에 맞춰 국사서낭을 함께 모시고 마을 서낭제를 지낸다. 서낭당 제단 가운데 국사서낭의 위패를 모시고 마을에서 준비한 간소한 제물을 올리고 유교식 제의를 지낸다. 또한 마을에서는 국사서낭을 모셔오는 행렬을 위해 점심으로 비빔밥을 준비해 대접을 한다. 이곳에서 국사서낭 행렬은 잠시 쉬며 점심을 먹고 무녀는 마당에서 지신을 밟고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하는 축원을 한다.
7. 학산서낭제
학산은 국사서낭인 범일국사가 태어난 곳이다. 1999년 부터 이곳에서 4월 보름 대관령을 내려온 국사서낭을 잠시 모셔 서낭제를 지내고 있다. 학산서낭제는 원래 있던 행사는 아니었으나 국사서낭이 자신의 고향마을에 잠시 들렸다 가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수용해 시작하게 되었다. 마을에서 올리는 유교식 제의와 무녀의 서낭굿 한 석으로 진행된다.
8. 대관령국사여성황사봉인제
대관령을 내려온 국사서낭은 구산과 학산을 들린 뒤 시내를 한 바퀴 돌고 이곳 대관령국사여성황사에 모셔진다. 4월 보름에 국사서낭을 국사여서낭과 합사하여 모시는 이유는 이 날이 바로 정씨 처녀를 데려다가 혼인한 날이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두 분은 단오가 열리는 5월 3일까지 홍제동 여성황당에서 함께 모셔지게 된다. 제의는 유교식으로 진행되며 이때부터는 모셔지는 신위가 두 분이기 때문에 메외 국수도 2개를 올린다.
9. 지신제
남대천 단오장에 시설물을 세우기 전 지신에게 먼저 고하는 의례로 주과포를 준비해 유교식으로 간단한 제를 올린다.
10. 영신제
음력 5월 3일은 국사서낭 내외를 남대천 단오장으로 모셔가는 날이다. 이날 여성황사에서는 두 내외분을 맞이하는 영신제가 올려 진다. 오후 5시에 단오제위원회 위원장이 초헌관을 맡아 유교식 제례를 지내고 무녀는 굿을 한다. 이 굿은 부정굿, 여서낭굿, 그리고 국사서낭 내외분을 남대천 가설굿당으로 모셔가기 위한 대맞이의 순서로 이루어 진다. 대맞이 무가는 삼제관을 앞세우고 무녀가 서낭님을 모시러 왔으니 신목잡이를 통해 대를 내려오시라고 축원한다.
11.경방댁 치제
국사여성황사를 떠난 행렬은 단오장으로 가는 길에 여서낭의 친정집으로 알려진 경방(지금의 남문동 고 최준집씨 소유였던 집)댁에 들려 집에서 준비한 제상을 받고 굿 한석을 한다. 굿은 먼저 부정을 물리고 현재 이 집에 살고 있는 가족들을 위한 축원굿을 한석 한 뒤 대를 내린다. 대맞이의 내용은 여서낭의 친정집에서 한 굿을 잘 받으셨는지 알아보고 소원성취시켜 주시려는지 알아보며 확인하는 것이다.
12. 영신행차
국사서낭 내외분은 남대천 가설굿당으로 가시는 도중 강릉 시내를 한 바퀴 도는 영신행차를 한다. 행렬은 위패와 신목이 제일 앞서고 그 뒤로 제례, 단오굿, 관노가면극 보존회 회원들이 춤과 음악을 연주하며 뒤 따르고 이어서 강릉지역의 각급 기관장, 지역유지, 외부 인사를 포함한 수많은 강릉시민이 손에 손에 단오등을 들고 뒤를 따른다. 그 행렬의 길이만도 족히 1km가 넘을 정도로 길고 웅장하여 큰 볼거리가 된다. 이때 거리 곳곳에는 신주 빚을 때 시민들이 낸 헌미로 만든 술과 떡을 푸짐하게 준비해 누구나가 먹고 마실 수 있도록 하여 축제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 시킨다.
13. 단오굿 설명생략
14. 송신제
송신제는 강릉단오제의 마지막 제례로 국사서낭과 국사여서낭을 떠나 보내는 의례다. 장장 40여일에 걸쳐 진행된 강릉단오제를 정리하면서 국사서낭 내외분이 잘 흠향 하셨기를 바라고 지역의 번영과 안녕을 간절히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제례를 올린다. 이런 간절한 기원이 담긴 송신제례는 엄숙할 정도로 숙연해지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대개의 별신굿은 거리굿이라고 하여 양중 혼자 일인극으로 잡귀를 풀어먹이는 의례를 마지막으로 행하지만 강릉단오굿은 거리굿이 없다. 대신 유교식 송신제에 이어 무녀가 대내림을 하여 국사서낭이 굿을 잘 받으셨는지를 확인한 연후에 굿에 사용했던 모든 것을 태우는 환우굿으로 단오제를 끝마친다.
15. 관노가면극 설명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