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濟였던 百濟가 다시 칠해지던>
나의 첫 답사지가 백제의 문화권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초등학교에서 역사 신문을 만들던 기억이 떠올랐다. 고구려 백제 신라중 한 나라를 골라 조별로 역사신문을 만들라는 수행평가였던 것 같다. 친구들은 모두 ‘씩씩한 고구려’와 ‘화려한 신라’를 선택 하였는데 그때 난 어쩐지 인기 없는 백제가 불쌍했었다. 그래서 백제를 골라 자료를 찾으려는데 당시 초등학생이던 내가 알 수 있는 백제의 모습은 그리 많지 않았다. 신문을 만드는 내내 ‘온화하고 세련된 ’이란 수식어를 몇 번이고 반복해야 했고 커다란 전지는 반가사유상과 잘 구별도 못하는 이름 모를 탑 사진으로 채웠다. 그 뒤로 백제는 나에게 오랫동안 쉽게 채워지지 않는 하얀 전지 마냥 무색(無色)인 ‘백‘제(白濟)였다.
답사지를 위해 자료를 찾고 3박4일간 백제문화권을 주제로 한 답사를 다녀오는 동안 난 계속 그 무색 위에 어떠한 색이 다시 칠해질까 궁금했다. 나의 첫 답사는 백제의 색을 찾기 위한 답사였다.
-태안 마애 삼존불과 위덕왕 그리고 일본서기
무엇이든지 첫, 처음이 가장 기억에 잘 남는 다고 한다. 그래서 일까. 유난히 태안마애삼존불(泰安磨崖三尊佛)과 서산마애삼존불(瑞山磨崖三尊佛)에서 들었던 설명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답사지를 위해 정림사지(定林寺址)를 따로 조사할 때 많이 느꼈지만 흔히 답사유적에 대한 설명을 찾다보면 미학적인 부분에서 접근한 자료를 많이 보게 된다. 시대 배경으로서 역사가 아닌 직접적으로 유적의 역사적 의미는 알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교수님의 설명을 듣고 나서 태안의 바위에 새겨진 세 부처를 보고 있으면 그들의 옷고름과 얼굴의 미소 위에 위덕왕(威德王554∼598)의 슬픈 절규가 느껴진다. 우리가 흔히 왼쪽부터 석가여래 관음보살과 약사여래로 알고 있지만 교수님께서는 법화경에 나오는 관음보살 보문품을 들시며 다시 설명해 주셨다. 이는 이불봉주상(二佛奉珠像)이라고 하는 구도로서 가운데 관세음보살이 다보불과 석가불에게 구슬을 주는 것이라고 한다. 자비의 관세음보살이 사부대중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를 위해 구슬을 바치는 것이라고 하셨다. 불상을 새긴 위덕왕은 모든 백제 사람들이 위기에 빠진 백제를 구하기 위해 뭉치기를 바라는 마음 이였을 것이다.
교수님께서 답사 동안 위덕왕의 일화를 많이 들려 주셨는데 좋은 기회로 스터디에서 이러한 이야기들이 어디서 나왔는지 조사해볼 수 있었다. 삼국사기 진흥왕 본기와 성왕 본기에 관산성에서 백제왕(성왕)이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어디에도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위덕왕이야기'를 찾을 수가 없었다.
위덕왕은 요번 답사에서 교수님 설명에 참 자주 등장하는 왕인것 같다. 서산 마애삼존불의 본존여래도 위덕왕 자신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백제의 미소라고 명명한 그 풍요로운 미소가 한 백제왕의 자신감을 나타낸다. 왕권 강화를 위해 받아들인 불교이고 신라의 왕즉불(王則佛)사상이 백제에는 왜 없었겠느냐마는 꽤나 격정적인 삶을 산 위덕왕에게 부처란 스스로의 안심이었던가 보다. 왕흥사지도 원찰로서의 기능을 하였고 백제문화의 자랑인 금동대향로도 아버지와 죽어간 수많은 백제인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하니 불교가 왕실에 끼치는 영향이 어마어마함을 알았다. 무엇보다 내가 아는 최고의 동예술품인 금동대향로의 역사적 재작 의미를 알고 실제로 보니 경탄할 수밖에 없었다. 집에 가져가고 싶다는 솔직하지만 못된 생각을 하기도 했다. 용과 봉황의 휘어진 날개가 아름다웠다. 무엇이 아름답다는 간지러운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금동으로 주조하기 전에 틀을 만들었을 밀랍형태로도 보았으면 좋았을 텐데. 밀랍으로 처음 만들었을 땐 장인의 지문까지 더 섬세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불에 그냥 녹아 버렸다는 게 못내 아쉬웠다.
교수님께 들은 '위덕왕의 이야기'는 알고 보니 일본서기에 있었다. 과연 삼국중 가장 활발한 외교 활동을 하던 나라답게 백제에 대한 기록은 국내보다 외국에 더 많다고 한다. 일본서기 <백제성왕의 죽음>이라는 편에 보면 위덕왕이 노신들의 말을 무시하고 아버지에게 관산성을 쳐야한다고 간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교수님께서 해주신 이야기대로 아버지 성왕이 죽자 위덕왕이 죄책감에 절에 출가하겠다고 하는 장면도 나온다.
이번에 처음으로 일본서기를 보았는데 천왕의 존재에 황당했고 이렇게 세세하게 기록되었다는데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께서 인용하실 정도면 어느 정도 일본서기가 우리 학계서 완전히 배격된 것은 아니니깐. 설화로만 인식하던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준하는 유물 유적지가 나오면서 단순히 '이야기'로 치부하기 어려운데, 황당하다고만 생각했던 일본서기의 기록도 그 실효성을 인정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백제는 다른 삼국 다른 어느 나라에 비해 남은 자료가 적다고 한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쓰고 이전의 모든 역사서를 불살라 버렸다는 말도 있다. 이렇게 조금씩 이나마 외국 역사서에 백제에 관한 기록이 등장하는 것을 아쉬워해야 하나 아님 기뻐해야 할까.
-무령왕릉과 문화보호
답사가 언제나 감탄과 감동으로만 계속 되었던 것은 아니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내에 있는 무령왕릉의 발굴 과정을 들으면서 너무 아쉽고 안타까웠다. 우리나라 수많은 고분 중에 주인이 밝혀진 몇 안 되는 무덤인 무령왕릉. 우연히 발견되어서 무척이나 무례한 졸속 급속 발굴이 단행되었다고 한다. 무령왕릉은 묘지석이 있어 묘지의 정확한 주인을 알 수 있었으며 출토된 유물은 백제문화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중국 남조와의 교류를 보여주는 벽돌식 무덤양식을 보이는데 인상적이게도의 별돌은 하나하나 떡살로 찍은 듯 무늬가 섬세하다. 이런 큰 발견에 오명이 남아서 민망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방안으로 향하는 길목에 놓인 석수인데 무덤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하지만 나무사슴뿔을 가진 석수는 삽과 포대자루를 들고 밀려들어오는 사람들을 막지 못하였나보다.
난 미륵사지에 발라졌다는 무식한 시멘트 처치를 보지 못하였지만 그것을 진보와 개발의 당당함이라 여겼던 시대가 너무나 원망스럽다. 빠른 근대화화 산업화를 거치고 뒤돌아보니 참 많은 문화재가 그 속도에 치여 생채기를 입었다. 우리나라 고고발굴 역사상 가장 안타까운 사건인 무령왕릉 발굴 사업. 우리는 지금 계속되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천년전 조상의 지혜를 따라잡지 못하여 얼마 전까지 태안 마애삼존불은 이끼로 얼룩덜룩했다고 한다. 분명 우리는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백제 답사를 다녀오고 나서 우리에겐 유물을 보존하여 보전함에 있어서 무엇보다 자연적인, 최대한 그대로 두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는 것을 느꼈다.
-망국 백제와 답사를 마치고
![](https://t1.daumcdn.net/cfile/cafe/145ECC0F4BC49EF903)
이틀간 비가 계속 잔잔히 내려 이루지 못한 백제 중흥의 애잔함을 더해 주었다. 마무리 하면서 멸망한 고구려의 부벽루에 올라 휘파람 불던 목은 이색의 시가 떠올랐다. 어쩌면 우리도 닳은 백제의 돌계단에 기대어 떠나간 기린마와 천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고구려로 못 이룬 대륙의 꿈을 꿔보고 신라를 통해 화려한 금제국을 꿈꾸고. 하지만 백제는 망했다. 두 번이나 살아 보려고 했지만 멸망 후 한번 더 좌절한다. 아무리 발달한 문명의 선진 백제라고 해도 그 당연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루어진 일을 오래오래 비를 탓하며 슬퍼하고 싶지 않다. 깔끔하게 애잔해만 하고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답사의 기억은 비에 젖어 필기가 번지고 쭈글쭈글해진 답사지보다 더 오래 남을 것이다.
답사원고를 쓰는 것 보다 답사 감상을 쓰는 것이 더 어렵고 고민하는 일임을 알게 되었다. 위 두 가지는 3박4일간 나의 화두-였다고 하고 싶다. 앞으로 고민을 계속 해봐야겠지만 지금 20살 추운 봄에 내가 보고 이에 느낀 것을 그대로 써봤다. 참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하지만 답사를 가는 이유가 단순히 역사를 실제로 느끼는데 있다고는 동의 못하겠다. 정림사지 5층 석탑에 새겨진 명문의 내용과 정림사의 시대적 의미를 익히지 않고는 절대 그 스산한 함을 느낄 수 없다. 답사는 스스로 익히는 자기 학습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관문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답사 전에 답사부 원고를 쓰고 답사 스터디를 들어 불처와 보살에 대해 배우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내 자신에 대한 아쉬움도 많고 겉핥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지만 두드리는 만큼 얻게 될 것이다. 역사를 배우는 사람은 없을 것 같은 자료도 두드려 찾는 적극성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흘러간 과거가 계속해서 후대에 전해지도록 지켜주는 석수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 우린 정말 그 대화를 위해 공부하는 사람들이란 것을 백제, 그 단정(斷定)할 수 없는 색(色)이 알려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