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영어 교육 8년 "이대론 안된다" 한목소리
아이들은 '술술' 선생님은 '쩔쩔'
"학원서 다 배운것… 발음도 엉망" 교과서 외면
시대 못따라가는 공교육 "이런 것부터 개혁을"
입력 : 2005.06.06 22:10 04'
“May I help you?” “How much is this?” “It’s twenty dollars”….
서울 S초등학교 특별활동실. 6학년 2반 영어시간이다. 학생들은 교과서 진도에 따라 ‘상점에서 쓰는 영어회화’를 배우고 있었다. 회화표현 6~7개를 비디오를 보며 익히고 있다.
그러나 수업이 중반을 넘어가자 분위기가 점점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아, 지루해” 하며 하품하는 학생도 나왔다. 영어교사는 아이들을 통제하는 데 진을 빼고 있었다.
학생들에게 “왜 집중하지 않느냐”고 묻자, “학원에서 다 배운 거라서…” “쉬운 것만 반복하니까”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정부가 1997년 초등학교 영어교육을 전면실시한 지 8년.
그러나 주 1~2회 국정교과서로 배우는 학교 영어수업은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다. 학생과 학부모는 물론, 심지어 교사들까지 “학교 영어는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입을 모은다.
그 원인은 우선 영어 사(私)교육이 너무 광범위하게, 일찍부터 이뤄지는 탓이다. 서울 강남의 초등학교 2학년 백모(9)양은 5세 때 영어유치원을 다니기 시작, 체계적인 영어공부를 4년째 하고 있다. 원어민 회화, 문법 학원, 토론과 쓰기를 병행하는 그룹과외에다 방학 때 해외 어학연수까지 마쳤다. 어려서부터 이렇게 배운 학생들이 한국식 학교 영어수업에 만족할 리가 없다.
초등학교에선 1년 이상 외국 거주 경험이 있는 학생도 이젠 흔하다. 서울 여의도에 사는 초등학교 5학년 강모(12)군은 “50대 담임선생님에게 배우는데, 발음이 너무 엉망이다. 친구들도 뒤에서 ‘저 발음은 저렇게 하면 안 되는데’ ‘학원이랑 너무 차이난다’고 수군거린다”고 말했다.
학부모도 학교 영어교육엔 기대를 포기한 지 오래다. 경기도 안산의 주부 이모(41)씨는 요즘 둘째 아이에게 ‘작정하고’ 영어학원과 학습지를 시키고 있다. 이씨는 “첫 아이를 학교 영어만 배우게 했더니 6학년인데도 교과서 하나 제대로 못 읽더라”고 말했다.
경기도 분당의 학부모 배모(34) 씨는 “초등학교에서 다른 과목은 한 학기 이상 선행학습하지만, 영어 사교육은 학교보다 3~4년 앞선다고 보면 맞다”고 했다.
조기 영어사교육은 거의 모든 학부모들의 관심사항이다. 서울 강북의 공립학교인 S초등학교 6학년 한 반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36명 중 35명이 영어과외·학원 등 영어 사교육을 받았다고 답했다.
교사들도 영어수업만은 제발 맡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서울 강남 D초등학교는 영어전담교사 1명이 5·6학년을, 3·4학년은 각 담임교사가 가르친다. 하지만 영어전담 교사조차 학생들로부터 어색한 발음을 지적받고 무안해하거나, 아예 외국에서 살다온 학생에게 받아쓰기 문제를 불러주게 하는 일도 벌어진다. 이 학교 교장은 “담임들도 ‘딴 과목은 몰라도 영어는 전담교사를 더 구해달라’고 하소연한다”고 털어놨다.
서울 강북의 W초등학교는 궁여지책으로 사설학원 강사로 일하는 원어민 교사 2명을 어렵게 섭외해 시간제로 고용했지만, 학생들이 이들을 접할 기회는 한 달에 한 번뿐이어서 ‘원어민 효과’가 지속될 리 없다.
광주의 학부모 임정욱(44) 씨는 “잘하든 못하든 ‘학교 영어는 시간낭비’라고 하더라. 공교육이 너무 무책임한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한국영어교육학회 김세중 교수(단국대)는 “비싼 사교육이 아니더라도 요즘은 취학 전부터 동화책·방송 등 엄청난 영어환경에 노출돼 있다”며 “학교 영어교육의 근본적인 수술 없이는 학교에서 배울 게 없다는 아이들이 갈수록 더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