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직이 미국 유학 후 귀국한 1932년은 일제의 대동아공영권 계획이 구체화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한경직은 숭인 상업학교 교목과 교사, 숭실 대학 강사로 있다가 총독부 학무부의
교사 임명 취소로 인해 신의주 제2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하게 되어 1933년부터 목회활동을
시작했다. 한경직은 신의주 제2교회에서 시무하다가 월남하기까지 근 10년의 목회기간을
이북에서 보낸다. 월남 이후에는 1945년 영락교회 전신인 베다니전도교회를 창립하고
1973년 은퇴하기까지 27 년 간 시무하면서 목회활동과 함께 교육사업과 사회사업을 펴나갔다.
한경직이 시무한 두 교회가 모두 초기에 큰 성장을 이룬 점 때문에 한경직과 영락교회는
교회의 양적 성장, 대형교회의 대명사로 불린다.
영락교회의 양적 성장은 단순히 월남 개신교인 유입이 아니라 피난민들을 위한 필요를 채우는
노력이 종교적 측면과 실용적 측면에서 모두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한경직의 목회관은 현실인식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어 영락교회의 3대 목표도 당시 피난민의
현실을 반영한 '전도, 교육, 봉사'로 정해졌다. 한경직은 영락교회의 구호를 세운 배경을 당시
우리 민족이 가장 절실히 필요로 했던 현실인식에서 비롯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목회에서 깨달은 것, 인간의 삶을 해롭게 하는 것이 있는데, (1) 죄, (2) 무지, (3) 가난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혼을 살리는 것이고, 둘째는 지적으로 교육이고, 셋째는 경제적으로
도와주어야겠다. 그래서 세 가지 구호가 뚜렷해졌다. (1) 전도, (2) 교육 (3) 봉사애였다.
그래서 교회에서 새 건물을 지을 때 선교관, 교육관, 봉사관으로 명명하여 지었다.
한경직은 당시 민족이 처한 심각한 경제난을 비롯한 가난의 원인이 배우지 못한 '무지'
때문이라고 보았다. 무지란 교육만으로 해결 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죄' 문제에 대해 제대로
알고 깨달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즉 전도 교육, 봉사는 우리 민족이 처한 '죄, 무지, 가난'을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 도식은 앞에서 말한 기독교적 건국론의 핵심주제와 일치하고
있다.
❖ 2006년 현재 영락교회 목표는 3대 목표에서 한 가지가 추가된 4대 목표로서 교육,
성도의 교제, 선교, 봉사이다. 영락교회 홈페이지(http://www.younghmak.net) 참조
- 이혜정 저, ‘한경직의 기독교적 건국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