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 4,13-17; 마르 9,38-40
+ 찬미 예수님
어제 야고보서는 하느님과의 우정과 세상과의 우정을 대비시켜 말했는데요, 오늘도 같은 맥락에서, 하느님과 상관없이 세속적 영역에서 살아가는 태도를 꾸짖습니다.
“자 이제,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 하고 말하는 여러분!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기서 야고보서가 여기서 경고하고 있는 대상은 부유한 사업가나 상인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신자 중에 이처럼 부유한 사업가나 상인이 있었을까 생각해 보면 회의적입니다. 즉 야고보서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에 아무런 관심이 없이 세상의 수준에서만 일하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허망한 일을 하고 있는지 꾸짖음으로써,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이러한 세상과의 우정을 쫓아가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첫째 잘못은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에게 달려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고, 둘째 잘못은 오늘 1독서의 마지막 구절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를 끌어안으시며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요한 사도가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았는데, 그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 했다.”고 말씀드립니다.
요한 사도는 착각을 하고 있는데요, 오직 예수님만이 그 힘의 원천이시기 때문에, 그 사람은 자기 힘이 아니라 예수님의 힘으로 그 일을 한 것입니다. 또한 “그가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가 아니라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라고 말하는 것 역시 인상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시는데요, 언뜻 이 말씀은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루카 11, 23; 마태 12,30)라는 말씀과 충돌하는 듯이 보입니다.
이에 대해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가톨릭교회 밖에도 가톨릭적인 것이 존재할 수 있고, 가톨릭교회 안에도 가짜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말로는 세상을 끊어버리지만. 행동으로는 끊어버리지 않는 사람들입니다.’라고 해석합니다. 즉 교회 밖에서도 예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교회 안에서도 복음을 거슬러 공동체를 흩어 버리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합니다. ‘누군가 내 이름으로 옳은 일을 하고 있다면, 그의 편이 되어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 사도가 생각했던 세상의 논리는 이와 반대입니다. ‘그가 하는 일이 옳은 일이기 위해서는 내 편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의 편이 되어 주는 것이 복음이고, 그를 내 편으로 만들려는 것이 복음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전임자들끼리의 만남 이후 50년 만에 이루어진 교황님과 동방교회 총대주교님의 만남(2014. 5. 25., 예루살렘)
출처: Francis and Bartholomew Meet in Jerusalem: Fifty years later, another historic encounter between pope and patriarch | America Magaz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