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이후 동아시아 정세에 미친 영향을 정리해보겠습니다. 명나라는
임진왜란으로 직접적인 피해는 입지 않았지만 7년에 걸쳐 원군을 파병하면서 군사력을
소모한 끝에 국가 기반이 흔들렸고, 결국 멸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임진왜란이 지속되는 동안 힘을 키운 여진족이 명나라를 몰아내고 청나라를 세우게 되죠.
조선은 나라의 문을 닫지는 않았으나 동아시아 강대국의 위치에서 확실히 내려왔다고
봐야겠습니다. 오랜 전쟁 속에 국토는 황폐해졌고, 수많은 문화유산을 잃었으며, 일본군의
조직적인 학살 속에 인구가 크게 줄어들었지요. 게다가 전쟁 피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나라의
근본 체제마저 무너지게 되죠. 집권층은 나라를 지키지 못한 성리학자들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지자 예학이라는 것을 반포해 백성을 교화하고 신분제를 유지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와는
모순되게 전쟁 후의 재정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돈이나 재물을 주고 양반 신분을 살 수 있는
공명첩, 납속을 발행하죠. 이로 인해 일반 평민은 물론 천민들까지 쉽게 양반이 될 수 있었고,
양반의 숫자가 급속히 늘어나 조선을 지탱해오던 신분제의 근간이 흔들리고 말죠. 조선 후기
양반의 숫자는 전체 인구의 70퍼센트에 달했습니다.
이에 반해 전쟁에는 패했지만 본토는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은 일본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크게
발전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원래 목적대로 그의 세력에 맞서던 대부분의 반대파가
전쟁을 통해 제거되면서 일본 전역은 급속도로 안정기에 접어들죠. 또 일본은 전쟁 중에 선진국
조선의 문화와 기술을 여러가지 훔쳐가 흡수하는데요, 이때 상당수의 조선 장인과 학자들을
잡아갔습니다. 일반 백성들도 노예로 많이 끌려갔고요. 그중에서도 특히 도자기를 만드는
도공들을 데려가 조선과 달리 귀족 대우를 해주며 도자기 제작을 장려하는데요. 그렇게 조선의
기술로 만든 도자기를 유럽에 팔아 부를 축적했습니다. 조선의 문화와 노동력을 활용해 체제
안정과 경제력이라는 두 바퀴를 단 일본은 발전을 거듭하다 동아시아 3국 중 가장 먼저 근대화에
성공하며, 18세기 이후 다시 한번 한반도와 중국 대륙 정복에 나서게 되죠.
임진왜란은 결론만 보면 조선이 승리한 전쟁처럼 보이나, 이는 정말이지 상처뿐인 영광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국토는 황폐해졌고, 임진왜란 와중에 드러난 갖가지 병폐와 사회
모순이 해결되지 않은 채 조선은 그대로 곪아가게 되죠. 나라가 망하지도, 정권이 바뀌지도 않은
채 명맥을 이어가던 조선은 300여 년 뒤 결국 일본에 아예 국권을 강탈당하는 아픔까지 겪고
맙니다. 임진왜란이 준 피해를 완전히 극복하는 데 200년이 걸렸다고 하니 조선이라는 나라의
성장은 그만큼 늦어진 것이나 다름없죠.
- 설민석의 '무도 한국사 특강'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