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배사 창원지회에서 신정역주 이충무공전서 읽기 3회차를 하였습니다.
■ 일시 : 2023.11. 21 화요일 PM.7:00
■ 장소 : 이순신리더십국제센터
■ 읽은 부분 : 권2. 장계1(206~297쪽)
■ 참석자 : 내이포판옥선, 홍패, 동자갑선, 상유, 진해중부장, 선격, 남포, 백의종군로악양, 손자병법, 진해현감, 웅천현감, 제포만호, 미신불사 총 13명
■ 다음 모임 안내 : 2023. 12. 12 화요일 PM 6:30
■ 읽어올 분량 : 신정역주 이충무공전서 권3(300~362쪽) 계사년 장계 부분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券2, 장계狀啓1
이번 회차부터는 장계 순서입니다.
• 이순신의 장계로서 현재까지 전해져 오는 것 – 78편
• 국왕에게 올린 장계 22편, 계본 49편, 장달 3편, 달본 4편
종류 | 특징 |
장계 | 관찰사, 병사, 수사 등 왕명을 받들고 외방에 있는 신하가 그 지역의 중요한 일을 승정원의 담당 승지를 통하여 국왕에게 보고하는 문서 |
계본 | 2품 이상이 중대한 일을 승정원을 통하지 않고 국왕에게 직접 올리던 문서 |
장달 | 승정원 또는 세자시강원 등을 통해서 세자에게 올리는 장계 |
달본 | 세자에게 바로 올리는 문서 양식 |
• 초본 : 충민공계초, 임진장초, 충무공유사, 요람, 이충무공전서, 충무공계초, 충무이공순신임진왜변장계 등이 현존하고 있다.
수록 장계 | 특징 | |
충민공계초 | 68편의 장계가 수록 『이충무공전서』에 없는 장계 7편이 실려 있음 | 이순신의 후손에 의해서 1662년(현종3)에 작성, 현존하는 등초장계 중 그 시기가 가장 앞선 것. 현재 국립해양박물관에 소장 |
임진장초 | 61편의 장계가 수록.『이충무공전서』에 없는 장계 7편이 실려 있음 | 국보 제 76호. 현충사에 보관 중. 작성 시기는 충민공계초보다 늦고 이충무공전서보다 앞선 것으로 추정됨. |
충무공유사 | 정조가 1792년에 읽었던 책자 | |
요람 | 1724년(영조4)이후에 작성된 초본. 국립해양박물관에 소장 | |
이충무공전서 | 71편의 장계가 수록 | 1795년에 규장각에서 편찬. 편찬자가 이두를 모두 생략함. (이두는 조사, 어조사, 연결어미 등 서술 끝 부분에 많다. |
충무공계초 | 『임진장초』를 보고 20세기 이후에 필사한 책 | |
충무이공순신임진왜변장계 | 성균관대학교 존경각에 소장 |
➜ 왕에게 장계를 보내기 위해 초본을 쓰고 결재본을 다시 써서 보냄. 이순신은 이들 장계들을 따로 등초(원본에서 베껴 옮김)하여 보관하였다. 원본은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없고, 원본을 후손들이 베껴 쓴 것이 지금 남아 있는 것이므로 계본과 베낀 것 사이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현재 임진년, 계사년, 갑오년 장초 3년 치만 남아 있다.
이충무공전서 권2 = 임진년 장계
이충무공전서 권3 = 계사년 장계
이충무공전서 권4 = 갑오년 장계
로 구성됨.
1~17번까지 임진년 장계 부분만 올립니다.
조선수군의 수영水營<신정역주 이충무공전서 수록>
수영 | 품계 | 본영 | 관할지역 |
전라좌수영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 정3품 | 순천 내례포 (전남 여수) | 5관 (순천 보성 낙안 광양 흥양) 5진포(방답 사도 녹도 발포 여도) |
전라우수영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 정3품 | 해남 우수영 (전남 해남) | 14관(장흥 강진 해남 진도 영암 나주 무안 함평 영광 무장 흥덕 고부 부안 옥구) 13진포(회령포 마도 가리포 이진 어란포 금갑도 남도포 목포 다경포 임치 법성포 검모포 군산포 ) |
경상우수영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 정3품 | 거제도 오아포 (거제 동부 가배리) | 11관(진주 창원 김해 웅천 진해 고성 거제 사천 남해 곤양 하동 ) 19진포(가덕 천성보 안골포 제포 영등포 율포 조라포 당포 가배량 소비포 사량 적량 곡포 옥포 지세포 삼천포 미조항 상주포 평산포 ) |
경상좌수영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 정3품 | 동래 남촌 (부산 수영구 수영동) | 2관(기장 울산) 11진포(다대포 서평포 부산포 두모포 서생포 개운포 염포 감포 포이포 칠포 축산포) |
질문 : 경상우수영은 8관 20포, 경상좌수영은 2관 12포로 기억하는데 숫자가 왜 다른가요? ➜ 시기별로 관과 포를 설치하기도 하고 폐지하기도 하므로 어느 시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위 자료는 임진왜란 시기의 관할구역이다.
■ 왜적의 경보로 인한 사변에 대비하는 계본 (1), (2), (3)
➜ 시시각각 보고하는 기록이 남아있으므로 임진왜란이 일어난 시점을 정확히 알 수 있다.
■ 옥포에서 왜적을 격파하였음을 알리는 계본 玉浦破倭兵狀(내이포판옥선님 요약 정리)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신 이순신 全羅左道 水軍節度使 臣 李舜臣(1545~1598)
1592년 5월 4일
축시 출발하며 우수사 이억기에게 ‘수군을 거느리고 신의 뒤를 따라오라“ 공문
판옥선24척, 협선15척, 포작선46척을 거느리고 출발
소비포 앞바다에 이르러 날이 저물어 결진하여 밤을 지냄
5월 초5일
새벽에 출발하여 당포 앞바다로 급히 달려갔으나 그 도의 우수사 원균이 약속한 곳에 있지 않으므로 신이 거느린 경쾌선輕快船으로 ”당포로 빨리 나오라“고 공문을 보냄
5월 초6일
진시 辰時(오전7~9시)에 원균이 우수영 경내의 한산도에서 단지 1척의 전선을 타고 도착, 적선의 많고 적음과 현재 정박하고 있는 곳과 접전하는 절차를 상세히 묻고 있을 때, 그 도의 여러 장수인 남해현령 기효근, 미조항첨사 김승룡, 평산포권관 김축 등이 판옥선 1척에 같이 타고, 사량만호 이여념, 소비포권관 이영남 등이 각각 협선을 타고, 영등포만호 우치적, 지세포만호 한백록, 옥포만호 이운룡 등은 판옥선 2척에 같이 타고 초5일과 6일에 속속 뒤따라 도착, 두 도의 여러 장수들을 한곳에 불러모아 약속을 재삼 분명히 한 뒤에 거제도 송미포(거제 남부면 저구) 앞바다에 이르자, 날이 저물어 밤을 지냄
5월 초7일
새벽에 일제히 출발, 적선이 정박하고 있다는 천성 가덕으로 향하여 가다가
오시午時(오전11시~오후1시)쯤 옥포 앞바다에 이르자, 척후장 사도첨사 김완과 여도권관 김인영 등이 신기전神機箭을 쏘아 급변을 보고하므로 적선이 있음을 알고 여러 장수들에게 지시하기를,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태산같이 침착하라 勿令妄動 靜重如山“
고 전령한 뒤에 옥포 바다 가운데로 대열을 지어 일제히 전진, 왜선 50여척이 옥포 선창에 나뉘어 대어 있는데 대선은 사면에 두른 장막에 온갖 무늬를 그렸으며 그 장막 변두리에는 대나무 장대를 열지어 꽂아서, 붉고 흰 작은 기들을 어지러이 달았고, 깃발의 모양은 가지각색으로 모두 무늬 있는 비단으로 만들었으며, 바람결을 따라 펄럭이어 바라보기에 눈이 어지러울 지경
적도賊徒들은 그 포구에 들어가 약탈, 연기가 산을 덮었는데, 우리 군선軍船을 보고 허둥지둥, 6척이 선봉으로 도망쳐 나오므로 장수들 모두 한마음으로 분발 죽기를 기약하며 동서로 충돌하고 둘러싸서 바람과 우레같이 급히 총통과 활을 쏘니, 적들은 화살맞은 자, 헤엄치는 자 수를 알 수 없었으며, 일시 무너지고 흩어져서 바위 언덕으로 기어오르면서 서로 뒤떨어질까 두려워하였음.
좌부장 낙안군수 신호는 왜대선倭大船 1척을 쳐부수고 머리 1급을 베었고, 우부장 보성군수 김득광은 왜대선 1척을 쳐부수고 포로가 되었던 1인을 산채로 빼앗았고, 전부장 흥양현감 배홍립은 왜대선 2척을, 중부장 광양현감 어영담은 왜의 중선 2척과 소선2척을, 중위장 방답첨사 이순신은 왜대선 1척을, 우척후장 사도첨사 김완은 왜대선 1척을, 우부기전통장 사도진군관 보인保人 이춘은 왜중선 1척을, 유군장 발포가장인 신의 군관 훈련원 봉사 나대용은 왜대선 2척을, 후부장 녹도만호 정운은 왜중선 2척을,...왜선 26척을 모두 총통으로 쏘아 맞혀 쳐부수고 불태우니 넒은 바다에는 불꽃과 연기가 하늘을 덮었으며, 산으로 올라간 적도들은 숲속으로 숨어 엎드려 기운이 꺽이지 않는 놈이 없었음.
신시申時(오후3시~5시)쯤 ”멀지 않은 바다에 또 왜대선 5척이 지나간다“라고 척후장이 보고하므로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쫓아가서 웅천 땅 합포(진해 원포 합개마을) 앞바다에 이르자 왜적들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감
사도첨사 김완이 왜대선 1척을, 방답첨사 이순신이 왜대선 1척을, 광양현감 어영담이 왜대선 1척을, 신의 군관 등이 힘을 합해 활을 쏘아 왜대선 1척을 남김없이 쳐부수고 불태웠으며, 밤중에 노를 재촉항 창원 남포(마산 난포) 앞바다에 진을 치고 밤을 지냄
5월 초8일
이른 아침에 ’진해 땅 고리량高里梁(마산 진동)에 왜선이 정박하고 있다‘는 기별을 듣고 곧 출발을 명하여 내외의 섬들을 협공 수색하며 저도를 지나 고성 적진포(고성 동해로 추정)에 이르자, 왜선 13척이 정박, 왜인들은 여염집을 노략질한 뒤 우리 군사들의 위세에 놀라 산으로 올라감. 낙안군수 신호는 순천대장 유섭과 협력하여 왜대선 1척을,....모두 11척을 총통으로 쏘아 쳐부수고 불태움. 적진포 근처에 사는 향화인向化人의 호소를 듣고 왜적들을 섬멸할 계획을 세웠으나 적선이 정박하고 있는 곳은 대개 지세가 좁고 얕아 판옥선 같은 대선大船으로 싸우기 어렵고 우수사 이억기가 미처 오지 않아 홀로 진격하기에는 위태로워 별도의 계획으로 나라의 치욕을 씻기로 함, 임금의 관서關西 피란소식을 알게되어 놀랍고 통분함
5월 초9일
정오에 모든 전선을 거느리고 무사히 본영으로 돌아와 여러 장수에게
”배들을 한층 더 정비하여 바다 어귀에서 사변에 대비하라“
고 타이르고 진을 파함. 흉하고 추한 적의 해독이 극도에 이르러 살육 노략질로 피란민이 없는 곳이 없으며, 신들의 배를 바라보고 아린아이나 늙은이나 짐을 지고 흐느껴 울며 비참하고 불쌍하여 싣고 가고 싶었으나 사람이 너무 많고 전쟁하는 배에 사람을 가득 실을 수 없어
”돌아갈 때 데리고 갈 예정이니 잘 숨어서 적들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하여 사로잡히는 일이 없도록 하라“
고 타이른 뒤에 적을 쫓아 멀리 떠났다가, 별안간 서쪽으로 몽진蒙塵하신 기별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몰라 노를 재촉하여 그대로 돌아왔어도 불쌍한 정경은 오히려 잊을 수가 없어 겸관찰사에게
”끝까지 탐방探訪해서 찾아오고 구호하기 바랍니다“ 라고 통보
접전할 때 정병正兵 이선지가 팔 한 곳에 화살을 맞아 조금 상한 것 외에 달리 상처를 입은 군사는 없으나, 우수사 원균이 신의 장수들이 사로잡은 왜선들을 빼앗으려 활을 쏘아 사부와 격군 2명이 상처를 입게 됨
적을 막는 방책으로 수군이 선단을 편성하여 나아가거나 물러나지 않고 오직 육전에서 성을 지키는 방비에만 전력하였기 때문에 수백 년 기업基業이 하루 아침에 적의 소굴로 번지게 된 것, 적이 만약 배를 타고 본도를 침범해 온다면 신이 해전으로 결사적으로 담당하겠으나, 육로로 침범해 오면 본도의 장사들은 전마戰馬가 한 필도 없어 대응할 도리가 없음, 순천 돌산도 고흥 도양장의 목마牧馬 중에 쓸만한 말들이 많이 있으므로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살지게 먹이고 달리기를 훈련시켜 전쟁에 사용한다면 승첩할 수 있을 것임, 사태가 급하므로 겸관찰사 이광에게 ”감착관을 정해서 보내고, 구마군驅馬軍은 각 진포에서 급히 보낸 군사들을 이용하여 길들이겠다“ 공문을 보냄
■ 견내량에서 왜적을 격파하였음을 알리는 계본 見乃梁破倭兵狀(내이포판옥선님 요약 정리)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신 이순신
삼가 아뢰는 것은 왜적을 잡아 죽인 일에 관한 것입니다. 이광의 관문 유지有旨를 전하는 서장이 도달하기 전에 해로에 있는 적들이 경상우도의 연해안 지방을 침범 집들을 불태우고 재산을 빼앗으며 사천 곤양 남해 등지까지 침범하였으므로 본도 우수사 이억기와 경상우수사 원균 등에게 공문을 보내 약속하고 지난 5월 29일 발선하여 사천 고성 당포 율포 앞바다 왜선들을 쳐부수고 무찌른 뒤에 6월 초10일 본영으로 돌아온 상황은 이미 ”아뢰었습니다.
떼를 지어 출몰하는 적을 맞아 무찌르고자 공문을 돌려 약속하고, 배들을 정비하고 경상도 적세를 탐문하니
“가덕 거제 등지에 왜선이 혹 10여 척 혹은 30여 척이 출몰한다”고 하고 본도 금산 지경에도 적세가 크게 뻗치었는 바, 수륙으로 나누어 침범한 적들이 곳곳에서 불길같이 일어나도 하나도 맞아 싸운 적이 업어 승승장구할 기세
7월 초4일 저녁 때 본도 우수사와 모이기로 약속한 곳에 도착, 초5일 서로 약속
7월 초6일
수군을 거느리고 일시에 출발하여 곤양과 남해의 경계인 노량에 도착하니, 경상우수사가 파손된 것을 수리한 전선 7척을 거느리고 그곳에 대어 있으므로, 바다 가운데서 같이 만나 재삼 약속하고 진주 땅 창신도(남해 창선)에 이르러 날이 저물어 밤을 지냄
7월 초7일
동풍이 크게 불어 행선이 어려움, 고성 땅 당포에 이르자 날이 저물어 나무하고 물을 긷고 있었는데, 그때 피란하여 산으로 올랐던 그 섬의 목자牧子 김천손이 급히 달려와 고하는 내용에, ’적의 대중소선을 합하여 70여 척이 오늘 미시未時(오후1시~3시)에 영등포(거제 장목면 구영리) 앞바다로부터 거제와 고성의 경계인 견내량에 머무르고 있다‘고 함
7월 초8일
이른 아침에 적선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향함, 바다 가운데 왜의 대선1척 중선1척이 선봉, 대선36척 중선24척 소선13척이 대열을 벌여 정박, 견내량은 지형이 매우 좁고 암초가 많아 판옥전선이 서로 부딪치게 되어 싸움하기 곤란하고 적은 형세가 급하면 기슭을 타고 육지로 올라갈 것이므로, 한산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여 모조리 잡아 버릴 계획을 세움, 한산도는 거제와 고성 사이에 있어 사방에 헤엄쳐 나아갈 길이 없고 적이 비록 육지로 오르더라도 굶어주게 될 것. 판옥선 5~6처을 시켜 선봉으로 나온 적선을 뒤쫓아가서 습격 기세를 보이자, 여러 배의 적들이 일시에 돛을 달고 쫓아 나오므로 우리 배는 거짓으로 물러나 돌아 나오자, 적들도 줄곧 쫓아옴
바다 가운데 나와서 여러 장수에게 명령하여, 학익진鶴翼陣을 벌여서 일시에 진격하여 각각 지자地字 현자玄字 승자勝字 등의 각종 총통을 쏘아서 먼저 2~3척을 쳐부수었음. 그러자 왜적들이 사기가 꺽이어 물러나 도망, 여러 장수와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뛰쳐나가 앞을 다투어 돌진, 화살과 총환을 번갈아 쏘니 그 기세가 바람과 우레와 같아서 적선을 불태우고 왜적을 쏘아 죽이기를 일시에 거의 다 해 버림
순천부사 권준이 왜의 층각대선 1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왜장을 비롯 머리 10급을 베고, 우리나라 남자 1명을 산 채로 빼앗음, 광양현감 어영담도 돌진하여 왜의 층각대선 1척을 쳐부수고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왜장을 쏘아 맞혀서 신의 배로 묶어 왔는데, 문초하기 전에 화살 맞은 것이 중상이고 말이 통하지 않으므로 즉시 목을 벰, 다른 왜적을 비롯 머리 12급을 베고 우리나라 사람 1명을 산 채로 빼앗음......(이후 자세한 전황 193쪽 참조)
그 나머지 왜대선 20척, 중선 17척, 소선 5척 등은 좌・우도의 여러 장수가 힘을 모아 부수고 불태우자, 화살을 맞고 물에 떨어져 죽은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음, 왜인 400여 명은 형세가 급하고 힘이 다 디어 스스로 도망하기 어려움을 알자 한산도에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갔으며, 나머지 대선 1척, 소선 6척 등은 접전할 때, 뒤떨어져 있다가 멀리서 배가 불타고 목이 베이는 것을 바라보고는 노를 재촉하여 도망, 종일 접전으로 장수와 군졸들이 노곤하였고 날도 어두워 끝까지 추격할 수 없어서 견내량 바다 안쪽에서 진을 치고 밤을 지냄
7월 초10일
새벽에 출발하여 “본도 우수사는 안골포 바깥 바다의 가덕도 부근에 결진해 있다가 우리가 만일 접전하면 복병을 남겨두고 급히 달려오라”고 약속, 신은 함대를 거느리고 학익진을 벌여 먼저 전진하고 경상우수사는 신의 뒤를 따르게 하여 안골포에 이르러 선창을 바라보니 왜의 대선 21척 중선 15척 소선 6척이 머물고 있는데, 누각이 있는 3층 대선 1척과 2층 대선 2척이 포구에서 밖을 향하여 부박浮薄하고 있으며 나머지 배들은 줄지어 정박 중, 이 포구의 지세는 좁고 얕아서 조수가 물러나면 육지가 드러나므로 판옥대선은 용이하게 출입할 수 없어 여러 번 유인했으나, 그들의 선운선先運船 59척을 한산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여 남김없이 불태우고 왜적을 목 베어 죽였기 때문에, 형세가 궁해지면
육지로 올라갈 계혹으로 험한 곳에 의거하여 배를 매어둔 채 겁내어 나오지 않았음
형세상 할 수 없이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서로 교대로 출입하며 천자 지자 현자총통과 장전 편전등을 빗발같이 쏘고, 본도 우수사가 장수를 복병시켜 둔 뒤 급히 달려와 함께 공격, 군세가 더욱 강해져 왜적들은 거의 다 죽거나 다쳤고, 왜적들은 사상한 자를 낱낱이 끌어내려 소선으로 실어 내고 다른 배의 왜적들을 소선에 옮겨 실어 층각대선으로 모여 들였다. 이렇게 하기를 종일토록, 그 배 또한 거의 다 쳐부수자 살아남은 왜적은 모두 육지로 내렸고, 육지에 내린 적을 다잡지는 못함. 그곳 백성들이 산골짜기에 숨은 자들이 많은데, 배를 불태워 적을 궁지에 빠지게 하면, 숨어있는 백성들이 어육魚肉이 되는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므로 1리 정도 물러 나와 밤을 지냄
7월 11일 새벽
다시 돌아와 포위, 왜적들이 당황하여 닻줄을 끊고 밤을 이용하여 도망, 어제 싸움하던 곳을 탐색해보니 전사한 왜적들을 12곳에 모아 쌓고 불태웠는데 타다 남은 뼈다귀 손발 들이 흩어져 있고 안골포성 내외에는 흘린 피가 가득 곳곳이 붉은 빛, 저들의 사상자를 헤아릴 수 없었음.
11일 사시巳時(오전 9~11시)에 양산강과 김해 포구 및 감동 포구를 모두 수색, 적의 그림자가 전혀 없었으므로, 가덕 외면으로부터 동래 몰운대에 이르기까지 배를 늘려 진을 치고 군대의 위세를 엄하게 보임. “적선의 많고 적음을 탐망해서 보고하라”고 가덕도의 응봉과 김해의 금단곶 연대煙臺 등지로 후망군(탐망군)을 보냄.
11일 술시戌時(오후 7시~9시)에 탐망군이 보고 내용에 정박 적선의 수는 100여 척, 적선의 동정은 요즘 날마다 50여 척이 혹은 떼를 지어 드나들며 연 11일 동안 본토로부터 그 강으로 들어왔다가 어제 안골포 접전 때, 포 쏘는 소리를 듣고 간밤에 거의 다 도망가고 100여 척이 남아있는 것이라하였다.
11일 저물녘에 천성보에 정박하여 잠시 머물며 적에게 우리가 오랫동안 있을 계획이라는 것을 의심하도록 하고, 밤을 이용하여 군사를 돌려
7월 12일
사시巳時에 한산도에 도착하니 육지에 내린 왜적들이 연일 굶어서 걸음을 잘 걷지 못한 채 피곤하여 해변에서 졸고 있었는데, 거제도의 군사와 백성들이 이미 머리 3급을 베었고, 나머지 400여 명 왜적은 탈출하여 도망할 길이 없는 조롱 속의 새같이 되어 있었음, 신과 본도 우수사는 타도의 객병으로서 군량이 벌써 떨어졌을 뿐 아니라 “금산의 적세가 크게 성하여 이미 전주에 도착하였다”라는 기별이 도착하므로 그 섬에 뭍으로 내린 적들은 “거제도의 군사와 백성이 협력하여 목을 베고 그 급수는 공문으로 통보하라”고 그 도의 우수사와 약속하고
7월 13일 본영으로 돌아옴
신의 여러 장수가 벤 왜적의 머리 90급, 당초에 여러 장수와 군사들에게 약속할 때, “공훈을 바라는 생각으로 머리 베는 것만을 서로 경쟁하다가는 도리어 해를 입어 죽거나 부상을 당하는 예가 많으니, 이미 적을 죽였다면 비록 머리를 베지 않아도 마땅히 힘껏 싸운 자는 제1의 공로자로 삼겠다”라고 두 번 세 번 거듭 명령하였기에 목을 벤 수는 많지 않음. 공로를 세운 경상도 여러 장수들은 소선을 타고 뒤에서 관망하던 자가 거의 30여 척이나 되었는데, 적의 배를 쳐부수고 나면 구름처럼 모여 목을 벰.
여러 사람이 왜적들은 3개 부대로 나누어 배를 정비하여 전라도로 향한다는 말을 전함, 왜적들이 다시 침범해 올 것이 염려스러우므로 ’창을 베게로 삼아 변을 기다려 다시 통고하는 즉시 수군을 거느리고 달려오라‘고 본도 우수사 이억기와 약속하고 진을 파함.
포로가 되었다가 도로 잡혀온 사람은 각각 그 빼앗은 관원에게 명하여 ’구제하고 편히 살게 하였다가 사변이 평정된 뒤에 고향으로 돌려보내라‘고 알아듣도록 타이름
여러 장수와 군사들이 분연히 몸을 돌보지 않고 힘껏 싸워 여러 차례 승첩하였으나, 조정이 멀리 떨어져 있고 길이 막혔는데, 군사들의 공훈 등급을 만약 조정의 명령을 기다린 뒤에 결정한다면 군사들의 심정을 감동시킬 수 없으므로 우선 공로를 참작하여 1,2,3등으로 별지에 기록, 당초의 약속과 같이 비록 머리를 베지 않았다 하더라도 죽을 힘을 다해 싸운 사람들은 신이 직접 본 것으로써 등급을 나누어 결정하고 함께 기록.
■ 포위되었던 왜병이 도망친 일을 아뢰는 계본
지난 7월 초 8일 경상도 한산도 앞바다에서 접전할 때, 화살을 맞은 왜적 400여명이 한산도에 상륙하였는데 외딴 섬에 상륙한 것은 마치 조롱 속에 갇힌 새와 같았으므로 한 10일만 지나면 굶어 죽을 것이 분명하여 그 도의 우수사 원균에게 ‘소속 수군을 거느리고 4면을 포위하여 남김없이 잡아죽이라.’하고 신과 우수사 이억기 등은 진을 파하고 본영으로 돌아왔습니다.
원균은 그 이후 적선이 많이 몰려온다고 잘못 듣고는 포위한 것을 풀고 가버렸습니다. 육지에 내린 왜인들이 나무를 베어 뗏목을 만들어 타고 모두 거제로 건너가 버렸다고 합니다. 솥 안에 든 고기가 마침내 빠져나간 것이나 지극히 분하고 원통합니다. -286쪽-
• 질문 : 한산도에서 원균이 왜군 400명을 놓친 후 벌을 안 받았는가요? ➜ 한산도는 원균의 관할구역이니 원균한테 뒤처리를 맡긴 것이므로 따로 벌을 주지는 않았다.
• 질문 : 판옥선이 이동할 때 노를 저어 움직였나요? 돛을 이용했나요? ➜ 전투 상황 외에는 돛으로 바람을 이용해 움직였다. 계속 노를 젓는 일은 힘들기 때문이다. 전투 상황에만 돛을 내려 눕혀두고 노를 사용했다. 거북선은 쌍돛을 사용했다. 판옥선이 가장 약한 것이 파도다. 그래서 외해로 나가지 않고 내해를 이용해 이동했다.
• 질문 : 1차 출전 때 거제 남쪽으로 돌아갔나요? 북쪽으로 돌아갔나요? ➜ 송미포의 위치는 경상남도 거제시 남부면 저구리 대포이다. (정진술 「조선 수군의 임란 초기 대응에 대한 연구」, 『은봉전서』에 따름.) 이순신과 원균 연합 함대는 거제 남단을 돌아 송미포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7일에 옥포로 진출한다. 거제 현지인들은 파도 때문에 남쪽으로 못 지나다닌다고들 한다. 하지만 문헌에 송미포가 아래쪽에 있으므로 남쪽으로 돌아갔다고 본다.
■ 종이를 올려 보내는 일을 아뢰는 장계
■ 전쟁 곡식을 실어 보내는 일을 아뢰는 장계
■ 전쟁 곡식과 진상물을 실어 보내는 일을 아뢰는 장계
행재소에서 쓸 종이를 넉넉하게 올려 보내라 하셨으나, 계본을 받들고 가는 사람이 고생스럽게 가는 길에 무거운 짐을 가지고 갈 수 없으므로 우선 장지 10권을 봉하여 올려보냅니다. -290쪽-
비변사의 공문에 “전죽(箭竹)을 넉넉하게 올려 보내라.”고 하였으나 – 중략 – 이번에 정사준 등이 올라갈 때 장전죽•편전죽과 종이 등의 물품을 함께 봉하여 같은 배에 함께 싣고 물목은 따로 기록하여 올려 보냅니다.(291쪽)
• 전쟁 중에 진상품을 바치는 게 바람직한가? 조정에서 뜯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다. ➜ 전쟁 상황이 아니라면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올려야 한다. 전세, 부역, 공물 등을 올려보내는 것이 조선시대 세금 체계였다. 지방 특산품 등을 지정해주면 그 지역에 없더라도 수량에 맞추어서 올려보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자진해서 올려보내기도 했다.
• 출전 보고서를 보면 전사자, 부상자, 소속, 신분, 전리품 등을 아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어떻게 이렇게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 각 선장, 첨사, 만호들이 보고를 올리면 그것을 정리한 것이다.
• 1차 출전 때는 포작선이 46척으로 많이 참여했는데 2차 출전 때는 보이자 않았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 포작을 이 책에서는 보자기로 번역했다. 포작은 바닷속에 들어가 조개 • 미역 등의 해산물을 따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포작선은 어부들이 타는 배다. 처음에는 배가 많아 보이게 하려고 포작선을 참여시켰으나 전쟁을 해보니 포작선이 없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어 포작선을 동원하지 않았다.
사후선은 협선이라고도 하며, 물을 길어오고, 땔감을 구하는 등 전선에 딸린 부속선으로 전투능력이 없다. 승선 인원은 5명이다.
• 임금이 유지(왕의 명령)를 내리면 전달되는데 얼마 정도의 시간이 걸렸나요? ➜파발로 전달되는 목적지나 전달하는 사람에 따라 소요되는 시간이 달랐다. 밤새 달렸는지 3.5일이 걸린 경우도 있었고, 6.5일이 걸린 사례도 있다. 정확한 기준은 잘 모르겠다.
• 임진왜란 때와 정유재란 대 왜인들이 조선인을 대한 태도의 변화 ➜ 임진왜란 때는 정명가도를 주장하며 침입해 왔으므로 조선인들에게 우호적인 정책을 펼쳤다. 일본인들은 농민과 사무라이가 구분되어 있었으므로 조선인들도 농민들에게는 그대로 농사짓게 했다. 하지만 정유재란 때는 전쟁목표가 조선땅을 점령해 일본 다이묘들에게 영지로 나눠주겠다는 것이었으므로 조선 땅에 살던 성인 남자들은 다 죽였다.
• 이총, 비총의 예를 들며 일본인들이 잔인했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일본인들만 귀를 자른 게 아니라 조선 장군들도 실적을 증명하기 위해 왼쪽 귀를 잘라서 소금에 절여 올려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전쟁 때는 적들만 잔인한 게 아니라 조선군들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마음에 와닿은 구절
"신이 소관하는 좌도는 경상도와 한 바다가 서로 접한 지역으로서 적들이 침범하는 길목의 요충지이며, 도내에서 가장 중요한 곳입니다. 적이 변경을 침범한 뒤에는 방비에 필요한 잡색군을 징발하지 못하겠으므로 각 고을에 급히 한두 패의 군사징발을 재촉하여, 우선 방어에 참여하거나, 성을 지키거나 해전을 할 일에 정비하여 사변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219쪽 ➜ 넓은 시야 및 유비무환의 자세와 책임감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옥포해전을 앞두고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태산같이 침착하라 (물령망동정중여산 勿令妄動 靜重如山)" 232쪽
신이 이번에 연해안을 두루 돌아보니 지나치는 산골짜기마다 피란민없는 곳이 없으며, 신들의 배를 바라보고 어린아이나 늙은이나 짐을 지고 서로 이끌며 흐느껴 울며 부르짖는 것이 재생할 길을 얻은 것 같아서 혹은 적의 종적을 알려 주는 자도 있었는데, 보기에 비참하고 불쌍하여 곧 싣고 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을 뿐 아니라 전쟁을 해야 하는 배에 사람들을 가득 실으면 배를 움직이는 데 지장이 있음을 생각하여
"돌아갈 때 데리고 갈 예정이니 각각 잘 숨어서 적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하여 사로잡히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타이른 뒤에 적을 쫓아.... 237~238쪽 ➜ 백성을 사랑하는 장군님의 따뜻한 마음을 볼 수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접전할 때, 사졸로서 화살이나 철환을 맞은 사람 중에는 신이 타고 있는 배의 정병 김말산, 우후선의 방포 진무 장언이, 순천 1선의 사부인 사삿집 종 배귀실, 순천 2선의 격군인 사삿집 종 막대와 보자기 내은석, 보성 1선의 사부인 관청의 종 기이, 흥양 1선의 전장이며 관청의 종인 나성, 사도 1선의 사부인 진무 장희달, 여도선의 사공인 토병 박고산, 격군 박궁산 등은 철환을 맞아 죽었습니다..... ➜ 전쟁은 없어야 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겠지요. 전쟁 중 사망한 사람들을 신분에 상관없이 천민들까지 이름도 하나하나 다 기록하여 보고하는 태도에 감동합니다. 죽어서도 그들의 이름은 남아있을 수 있으니 그 죽음이 헛되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해 희생했던 많은 분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내이포판옥선님의 후기
: 조선수군 출전 지도 속에서
지금 살고 있는 이땅의 역사가 되살아 납니다
오래된 장어구이 식당이 있던 합포해전지
역사 추체험(追體驗), 진해의 1592년을 상상해 봅니다
권2, 장계 1를 들여다볼수록
이충무공의 세심한 기록 정신이 놀랍습니다
그의 뛰어난 지략 뿐 아니라
감동적인 휴머니티에 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댓글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깊은 밤까지 정리하셨네요!
이충무공의 진면목을 생생하게 만나는 계본, 장계 읽기!
기록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습니다
딴일 하다 밤늦게 후기 쓰기 시작하다보니 그리되었네요. 발제 준비하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늘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모습 본받고 싶습니다~^^
늘 열공하는 창원지회가 자랑스럽습니다~~~ 좋은계절 되십시요~~
늘 적극적 댓글 감사합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올 여름에 읽었던부분들~
감사한 마음으로 다시한번
더 공부해봅니다.^^
정리하시느라 고생많으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ㅋ
제대로 전달하고 있는지 조심스럽습니다. 잘못된 게 있다면 지적해줄거라 믿고 들은 것 중심으로 정리해봅니다. 깊이 공부하시는 달밤님 후기는 따라갈 수 없습니다. 부족하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감사하죠. ㅎ
발제를 맡아 수고해주신 내이포판옥선님 그리고 후기를 속기사 버금가는 실력으로 정리를 잘 해주신 창원지회장 진해현감님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장계 속의 내용 중에 감동적인것은 당시 신분차별이 엄격한 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분에 관계없이 공적을 기술하고 전사자나 부상자의 처리하는 내용 등 장군님의 평등사상과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신은 감동이었습니다.
장계에서 전쟁 준비와 진행상황 등을 현장감있게 기술해 400여년 전의 상황을 실감나게 느낄수 있었습니다.
늘 바쁘신데도 불구하고 창원지회 이충무공전서 공부모임에서 강의와 질문에 답해주시는 이민웅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공부모임이 더 알차고 발전되도록 열심히 공부 하기를 다짐해 봅니다.
함께 하신 창원지회 회원님들과
창원지회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도 장계를 읽으면서 장군님의 유비무환 정신과 책임감, 평등사상을 기본으로 한 애민정신, 자신감을 갖고 자신의 소신을 피력하는 부분이 감동이었습니다. 시대가 다르고 상황이 달라져도 인간이 기본적으로 어떤 가치를 추구하느냐에 따라 행동양상이 다르게 나타나겠지요. 함께 공부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오래오래 함께 가요~~^^
덕분에 공부하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창원지회 아자아자 홧팅^^
응원 감사합니다. 끝까지 우리 지회 회원들 모두 함께 완독하길 기대해봅니다.
날씨가 추워졌네요. 건강유의하시고 늘 행복하세요~^^
열정적인 향학열에 박수를 보냅니다.
참여자 모두가 전문가로 보입니다.
겉모습만 그럴 듯??
회원분들 모두 열심히는 하는 것 같아요. 완독할 때까지 이 에너지가 계속되길 바랄 뿐입니다.
무슨일로 이제사 정성스럽게 올려주신글 읽고 공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