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요일 | 경로 |
5 | 수 | 수원역, 병점, 오산, 송탄. 평택. 아산. 송악 농막 |
6 | 목 | 유구, 사곡, 우성, 공주보, 부여 백제보, 논산 |
7 | 금 | 강경 옥녀봉공원, 금강자전거길, 웅포, 임피 |
8 | 토 | 대야, 형 댁, 선친 산소, 군산 , 친구들 만남 |
9 | 일 | 군산대, 군산여객선터미널, 선유도, 변산해수욕장 |
0 | 월 | 변산공동체학교 체험. 마른 고추 닦기, 밭에 퇴비 뿌리기 |
11 | 화 | 윤구병 선생님 인터뷰, 무 심고 배추 밭 풀매기 |
12 | 수 | 학생들에게 강의, 윤구병 선생님 댁 방문, |
13 | 목 | 고추 닦기, 격포, 전라좌수사 세트, 줄포 습지, 선운사 |
14 | 금 | 법성포, 백수해변, 염산, 현경, 무안 톱머리해수욕장 |
15 | 토 | 운남, 압해도 천사섬분재원(송공산), 갓바위와 목포해변, 수원 귀가 |
1. 9월 5일. 병점, 평택, 아산 경유 우리 농막에 가다
오늘은 아산시 송악면의 우리 농막까지가 자전거 주행의 목표였다.
집에서 출발을 서둘렀지만 준비 물품을 챙기다 보니 10시에야 라이딩을 시작할 수 있었다. 수원 화서2동에서 출발하여 수원역에 도착, 지하상가로 내려가 휴대폰 충전기를 하나 (용량 20,000 mah. 4만원) 샀다. 용량 10,000 mah 의 충전기가 있지만 지난 번 동해안 라이딩 때 휴대폰 네비 이용하느라 써 보니 용량이 부족해 더 큰 걸 구했다.
충전기를 사 들고 지상으로 올라와 자전거의 자물쇠를 풀다 보니 가방 하나가 없다. 자전거 뒤의 양쪽에 하나씩 매달았는데 한 쪽 가방이 없어진 것이다. 가방을 찾지 못하면 여행을 연기해야 할 상황이었다. 달려온 길을 되돌아 화서역 쪽으로 달려갔다. 화서역에 거의 다 와 횡단보도 옆을 보니 가방이 길 가에 놓여 있다. 길에 떨어진 걸 누군가 주워 한 쪽에 놓았나 보다. 트럭 한 대가 횡단보도를 막고 있어 차도와 인도의 턱을 넘느라 덜컹하고 자전거가 흔들렸는데 그때 가방이 자전거에서 떨어졌던 것 같다.
그 가방을 안전하게 철사로 묶고 출발하느라 약 1시간을 허비했다. 그런데 또 사고가 생겼다. 오산 시내를 달려가다 넘어져 자전거의 백 밀러가 부서졌다. 편의점에서 점심으로 삼각 김밥을 사 먹으며 자전거 수리점을 물어 보았다. 자전거포까지 1 km쯤 가서 백 밀러를 새로 달았다.
송탄 시내에서는 자전거 경로를 벗어났다는 네비의 멘트를 따르다가 되돌아가길 두 번이나 하는 바람에 시간을 많이 소모했다. 자전거 네비게이션이 출발 직후에는 방향을 잡지 못하여 100 m 정도를 달려가야 방향이 잡힐 때가 있고 인터넷 연결이 안 될 때도 있다. 그럴 때에는 상당히 당황하게 된다.
또 자전거 네비는 안전한 길로 안내하기 때문에 자동차 도로보다 거리가 더 멀어진다. 그러나, 자동차 네비를 이용하면 자동차 전용도로나 고속도로, 또는 터널로 안내하기도 하여 곤란한 경우가 있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 자동차 네비와 자전거 네비를 바꾸어 가며 이용해야 한다.
평택으로 들어서니 자전거 네비가 시골길로 안내하여 주행 거리가 길어졌다. 더구나 네비를 따라 산길로 들어갔는데 길이 끊어지고 없었다. 다시 자동차 네비로 바꾸어 산길에서 나와 지방도로 가장자리로 달렸다.
아산시로 진입하니 해가 져 어두운데, 네비는 가로등도 없는 어두운 시골길과 농로로 안내했다. 라이트를 켜고 오르막을 오르며 저속기어로 바꾸려다 자전거 체인이 벗겨졌다. 어두워서 마을 정자 옆 가로등이 있는 곳까지 자전거를 끌고 가서 체인을 끼려 고생을 했다. 체인이 평소와 다르게 벗겨져 끼우기가 어려웠다. 자전거의 체인을 끼우지 못하면 끌고 걸어가거나 택시를 불러서 타고 가야 할 상황이었다.
체인을 끼울 수가 없어 잘 살펴보니 앞 기어의 왼쪽으로 벗겨진 게 아니고, 특이하게도 오른쪽으로 벗겨졌다. 가까스로 체인을 끼웠으나 손에 검은 기름이 잔뜩 묻었다. 장갑을 끼고 체인을 끼우려니 손이 우둔하여 장갑을 벗고 체인을 잡았기 때문이다. 기름 묻은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달렸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 농막에 도착한 것은 9시. 도착 예정 시각보다 무려 두 시간이나 늦어졌다. 저녁밥을 지어 먹고 나니 10시가 넘었다. 몸을 씻고 자리에 든 시각은 자정쯤이었다. 서해안 라이딩을 시작한 첫날부터 상당히 힘든 여정이었다.
아산의 조그만 농막
9월 6일. 유구, 공주보, 백제보, 논산으로
아침을 지어먹고 짐을 챙겨 출발하니 거의 10시가 되었다. 공주보로 가서 금강 자전거길로 군산을 향하려고 아산시 송악면에서 공주시 유구읍으로 산을 넘어가는데 오르막이 2 km나 되었다. 유구읍 추계리를 지나며 시계를 보니 무려 1시간이 걸렸다.
유구에서 국도를 타고 가다 사곡에서 빠져나오니 유구천가에 주차장과 정자가 있다. 이 정자에서 짐을 풀고 점심을 해결했다. 마트에 가서 우유와 빵, 복숭아 등 간식을 사서 싣고 다시 국도로 들어가 우성에서 지방도로 나와 공주보에 다다랐다.
공주보에서 쉬면서 사진 촬영을 하려고 70세 전후의 남자에게 부탁했다. 이분은 승합차에 북과 엠프를 싣고 온 북을 치는 분인데 오늘은 엿가위 한 쌍의 가위질 소리를 음악 반주에 맞추어 보겠다는 것이다.
자전거에 올라 부여 방향으로 금강자전거길을 달렸다. 1년 전에 달려 본 길이라서 마음이 편안했다. 일부 구간은 길을 고쳐 놓아 달리기 좋았다. 금강은 강폭이 넓어 강물이 완만하게 흐른다. 강폭이 넓어서 시야가 좋다. 또 라이더가 많지 않아 홀가분하게 달릴 수 있다.
부여 백제보에 도착하여 간식으로 복숭아 하나를 먹었다. 해가 기울고 있어 잠잘 곳을 생각해 보니 논산에 사시는 이모님이 뵙고 싶었다. 정이 많아 우리 어머니 걱정을 많이 해 주시는 이모님을 찾아뵙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전화를 했다. 이모님이 반갑게 전화를 받더니 집으로 오라 하시어 곧장 지방도로로 달렸다.
4차선 국도라서 달리기는 좋았지만 차들이 고속으로 스쳐 지나가 바짝 긴장하고 달렸다. 거의 1k나 되는사비터널이 나왔는데 날이 어두워 자전거의 앞뒤에 라이터를 켜고 통과했다. 자동차의 불빛을 이용하여 어두움을 극복하고 1시간 30분을 달려 논산 이모님 댁에 도착했다.
공주보(좌안에서 촬영)
9월 7일. 내 고향 임피로
논산 시외버스 터미널을 지나 강경으로 달렸다. 금강 자전거길로 고향인 임피에 가려고 논산 강산사거리로 와서 우회전하여 논산대로 옆의 자전거 도로를 달렸다. 길이 넓고 곧아 달리기도 좋았지만 배롱나무 가로수에 빨갛게 꽃이 피었다. 왕복 6차선의 시원한 길, 중앙 분리대에 반송을 길러 배롱나무 꽃과 어울려 아름다운 길이었다.
들판을 달리다가 다리를 건너니 강둑에 자전거길이 있어 지나가는 할머니에게 금강이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했다. 그러면 이 강둑길이 금강 자전거길일 거라고 판단하여 남쪽으로 달려가다 60대의 남자가 있어 다시 물었다. 이 강은 금강의 지류라서 2 km쯤 되돌아 가야 금강 자전거길을 만날 수 있다고 친절히 알려 주었다. 길을 한 번만 물어봐서는 잘못 가기 쉽다. 두 번 이상 물어 보고 대답이 같아야 실수를 줄일 수 있다.
금강을 만나니 자전거 길 표지가 잘 나와 있다. 금강을 따라 서쪽으로 2 km쯤 달리다 보니 옥녀봉공원이 나왔다. 들판 가운데 우뚝 솟은 언덕 같은 산. 계단을 오르니 언덕 위에 공원이 잘 조성되어 있다. 여러 기념비가 있는데 안내 표지판도 잘 돼 있다. 4대강 개발에 대해, 많은 비용이 들어갔으나 수질과 생태계에 문제가 있다며 비판하는 이들이 있지만 라이더들에게는 4대강의 자전거길이 신바람 나는 길이다. 신호등이나 교차로가 거의 없고 오르막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옥녀봉공원의 느티나무. 꽃도, 열매도 없지만 긴 생명력을 가진 나무. (신은 아무에게도 다 주지는 않나 보다.)
지금은 배가 다니지 않지만 옛날에는 금강으로 이어진 이 강경 개천으로 배가 드나들어 상업이 발달했던 곳이다. 지금도 강경은 젓갈 시장이 유명하고 매년 젓갈축제를 하는 곳이다. 옥녀봉 공원의 남쪽 개천 옆으로 젓갈 축제장의 커다란 간판이 보였다.
공원의 언덕에는 230년이 지난 느티나무 몇 그루가 우뚝 서있다. 그런 곳에 어울리는 정자가 아담하게 서 있다. 역시 유서 깊은 동산이다. 느티나무 둥치 한 쪽에 시멘트로 깁스가 되어 있다. 공원 옆 초가집이 잘 정비되어 있어 가보니 우리나라 최초의 감리교 예배당이라는 표지판이 있다. 방 안에는 관리인이 앉아 있었다. 한두 가지 질문하니 표정조차 바꾸지 않고 ‘예, 아니오’ 식의 무성의한 대답을 했다. 친절하게 대답하면 참 고마울 텐데 귀찮다는 듯한 표정 때문에 기분이 언짢아 돌아섰다.
강경 들을 지나 성당이 가까워진 금강 둑에 오르니 길게 늘어진 강둑 위에 바람개비가 돌고 있다. 둑 양쪽에 바람개비를 세워 놓았는데 서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힘차게 돌고 있다. 무생물에 생명을 불어넣은 기발한 아이디어다.
금강 둑 위에 정자가 있다. 자전거를 타고 온 젊은이 둘이 정자에 누워서 쉬고 있어 나도 자전거를 세워 놓고 인사를 나누었다. 서울에서 괴산에 버스로 갔다가 거기서 자전거로 출발하여 여기까지 왔다 했다. 금강의 끝자락인 군산이 얼마 남지 않아 쉬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출발하자 바로 뒤따라 왔는지 해당화가 줄지어 피어 있는 성당 포구에서 다시 만났다. 그들에게 해당화라고 알려주니 이제 알게 되었다며 반가워했다.
마을길로 들어가는 자전거길이 오르막인 산길로 이어졌다. 산에서 내려가 둑길로 오르는데 정자가 나왔다. 식당이 나오면 점심을 사 먹으려고 했는데 식당을 만나지 못했다. 정자에 앉아 빵을 꺼내 먹었다. 혼자 달려온 라이더가 정자 옆으로 와서 자전거를 고쳤다. 혼자 먹기 미안하여 “빵 좀 드세요.” 했더니 괜찮다며 자전거의 기아를 고치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 공주에서 출발해 여기까지 왔다니 상당히 먼 거리를 온 것이다. 오늘 군산에 갔다가 다시 공주로 올라간다는 것이다. 상당히 먼 거리인데 주력이 좋은 라이더다. 잠시 자전거를 고치더니, 다 됐다며 먼저 출발했다. 자전거를 제대로 타려면 정비 기술도 있어야 하나보다.
금강 둑을 타고 달리는데 넓은 강 가운데에 연노랑 모래벌이 돋아 있다. 마치 서해 이작도의 바다에 모래가 솟아있는 것처럼 미색의 모래가 이색적이었다.
금강에서 벗어나 내륙으로 들어가야 고향 땅 임피로 갈 수 있다. 네비가 알려주는 대로 둑에서 논길로 들어가려니 다리 공사 때문에 길이 끊어져 있다. 할 수 없이 금강 둑길을 달리며 새로운 길을 찾으며 달렸다. 웅포까지 가서야 강둑길을 벗어나 지방도로를 타고 임피로 향했다.
임피는 면소재지라서 가게가 많았다. 식당도 몇 개가 보였다. 더위를 식히려고 냉면 파는 음식점을 찾아갔다. 점심때가 조금 지난 2시 반. 할머니 혼자 운영하는 조그만 식당에 들어가 냉면을 먹으니 5,000원이었다. 값도 싼데 친절하고 김치를 많이 주어 좋았다.
고향 마을에 들어가니 감회가 새롭다. 우리가 몇 년 전에 헐값으로 판 밭을 지나며 살피니 예전에 없던 농로가 잘 나 있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안 팔았을 건데…. 아쉬웠다.
내가 살던 집은 허물어져 대밭으로 변했다. 뒷집 아주머니를 찾아뵙고 마을 경로당으로 가는데 옛 친구인 동네 이장이 왔다. 반가운 인사를 나눈 후, 초등학교 다니던 저수지에 가 보았다. 방죽에는 연이 가득하고 연밥이 많이 달려 있다. 저걸 따 먹으면 좋겠는데 물에 들어갈 수가 없다. 이장 친구는 근래에 흙을 파내 물이 깊어 위험하니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경로당에 들어가니 80대의 할머니 한 분과 동네 아낙이 앉아 있다. 인사를 드리고 동네 소식을 들었다.
초등학교 동창인 친구가 오고, 함께 어울렸던 2년 선배도 왔다. 그 선배를 본 게 40년 이상 된 것 같다. 옛 모습이 있지만 다른 곳에서 보았다면 전혀 알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동네 어른들과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였는데 겨우 11명이다. 이장이 동네 모든 분들께 저녁 식사 대접을 하겠다고 안내했다는데 10 명만 모였다. 동네 주민은 모두 15명인데 사정상 5명이 오지 못했다. 내가 이 마을에 살던 45년 전에는 25가구에 150명쯤 살았다. 지금은 15 명만 산다고 했다. 기가 막힌 현실이다.
대야의 중화요리 집에 버섯덮밥, 볶음밥. 탕수육, 양장피, 소주, 맥주, 막걸리를 주문하여 저녁상을 차렸다. 음식이 푸짐했다. 모처럼 온 고향 길, 기분 좋게 값을 치렀다. 식사를 마친 동네의 아주머니들이 하나 둘 돌아가고, 남자 5 명이 남아 밤 11시까지 술을 마시며 그간의 안부와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와 선후배가 돌아가고 혼자 남은 나는 상위에 남아 있는 음식과 쓰레기를 치웠다. 남은 음식이 많아 내일 아침에 내가 먹을 것만 냉장고에 넣어두고 몸을 씻었다.
내 침낭 속에 들어가 혼자 누운 경로당에서 지난 50년 전을 생각해 보았다. 그때는 함께 어울리던 또래가 20여 명이나 되어 편을 나누어 축구 경기도 할 수 있었다. 지금은 그 친구들이 어디서 어떻게들 살고 있을까. 그 또래 중에는 세상을 떠난 친구도 있다.
고향 마을에서 - 친구와 선후배님과 -
9월 8일. 선친 산소 성묘, 친구들을 만나다
어제 밤에 함께 식사했던 후배가 7시에 와서 해장국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6시에 일어나 아침 식사를 해결한 뒤였다. 잠시 후에 어제 군산 집으로 갔던 친구가 오고, 이장도 왔다. 내가 조반을 먹었다니 허탈해 했다. 하지만 나는 편했다. 식당에 가려면 읍내까지 4 km는 나가야 한다. 또, 누군가 식사비를 내면 내가 얻어먹고 가는 부담을 안게 된다. 이렇게 홀연히 떠나야 고향 친구들에게 밥 한 그릇이라도 사고 왔다는 편안한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2년 선배도 군산에서 새벽같이 와서 경로당 앞마당에 고추를 널었다. 고추 농사를 잘 지었는지 열매가 길고 빛깔이 곱다. 잠시 이야길 나누다 짐을 챙기어 자전거를 끌고 나와 친구와 선후배에게 작별의 악수를 청했다. 앞으로 몇 년이 지나야 또 악수를 나눌 수 있을 지 기약이 없다. 이별이란 만나자는 약속이 없는 것이다. 어쩌면 이 중에 누군가는 다시 만나지 못하고 어느 날 홀연히 먼 길을 떠나기도 할 것이다.
마을을 벗어나 대야 시장으로 나와 6촌 형의 가게에 갔다. 매년 선산과 선친의 산소를 관리해주어 고마운 형이다. 젊을 때 열심히 살아 지금은 재산도 많이 모으고 모범적으로 살아 존경스럽게 여기는 형이다. 대화를 나누다 탁자를 보니 미술전시회 도록이 있다. 펴보니 전시 작품을 낸 화가 중에 고향 선배님이 있다. 선배님을 아느냐고 형에게 물어보니 안다며 아내도 그 전시회에 작품을 냈다고 형수님의 그림과 약력을 보여주었다. 형수님이 활동하는 단체의 전시회였는데 마침 지금이 전시 기간이었다. 6촌 형의 가족들이 모이기로 했다고 점심때 식당으로 오라하여 이따 뵙기로 하고 나왔다.
마트에 들러 선친께 올릴 제수와 술 한 병을 사, 선산으로 갔다. 군산 쪽으로 가다가 오른쪽 마을길로 들어서니 가로수가 감나무와 사과나무였다. 아기 주먹만한 열매가 달려 있다.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선친의 산소에 난 키 큰 풀을 뽑았다. 조그만 나무 한 그루가 산소 앞 쪽에 자랐는데 뿌리가 깊어 뽑히지 않는다. 지난 4월에 성묘를 왔지만 며칠 후의 추석에는 교통이 복잡해서 오지 못하기 때문에 이번 여행길에 들렀다. 아버지 떠나신지 17년이 되었으니 상당히 세월이 지났지만 엊그제 같다.
선친 산소에 제수(祭需)를 놓고, 복분자주 한 잔 따라 놓고 정중히 절을 올렸다.
‘아버지. 제가 40년 교직 생활을 마치고 교단에서 물러났습니다. 그 공로로 엊그제 훈장을 받았습니다. 제가 이렇게 한 생애를 영광스럽게 산 것은 아버지의 땀 값으로 배운 덕택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사셨으면 아버지 춘추가 98세인데요. 한 2년 만 더 사셨다면 100세 인생을 누렸을 것이고, 제가 퇴직했으니 아버지 모시고 조부님 산소에 함께 왔을 텐데요. 저 멀리 만경 평야가 보입니다. 며칠 후면 노랗게 벼가 익어 황금 들판으로 물들겠지요. 그 들판을 보시며 늘 평안히 계세요. ’
만경들판이 잘 보이는 전망 좋은 곳,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선친을 모시어 다행이다. 주변 산소들을 살펴보고 6촌 형 가족이 모이는 군산의 식당으로 갔다. 형의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고 낙지덮밥을 얼큰하게 먹고 먼저 일어났다.
식당에서 나와 6촌 형수님의 문인화와 고향 선배님인 김욱렬 화가의 서양화 전시를 보러 군산예술의 전당으로 갔다. 전시장에서 안내하는 화가가 팜플렛을 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형수님은 한 가지에 석류가 세 개 달린 문인화를 그려 놓았다. 여백을 많이 살린 단순한 그림이지만 채색이 산뜻한 세밀화로서 석류가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고향 선배님은 강천산의 단풍을 유화로 그렸는데 세부적인 묘사보다는 색상으로 이미지를 표현하는데 중점을 둔 것 같았다.
그림을 보고 사진을 촬영하며 30분쯤 기다렸더니 선배님 내외분이 오셨다. 선배님은 대학 다닐 때부터 그림을 그렸으니 경력이 50년이 넘은 것 같다. 그림에 경륜이 쌓였을 것이고 많은 발전도 있었을 것이다. 그동안 수차례의 전시회를 열었다며 전시회 했던 도록을 몇 권 주셨다. 또 사모님도 그림을 그린 지가 오래 되어 부부 합동전시회를 한 적도 있단다. 그야말로 부부 동반자 시대의 대표적인 예화가 될 만하다.
평범한 사람들도 이제는 이렇게 문화생활과 여가생활을 즐기고 있다. 이렇게 시대가 좋아진 것에 대해 누군가에게 감사하고 싶다. 차 한 잔 들며 고향 소식과 가족 이야기,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간단히 나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배님은 집으로 함께 가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다음으로는 교대 동창들과 저녁 약속이 있다. 은파호수공원 옆의 한식당으로 갔다. 30분을 먼저 도착하여 라이딩 옷을 평복으로 갈아입고 기다렸다. 주변 경관을 보고 있는데 한 친구가 먼저 왔다. 찻집에 가서 아메리카노를 한 잔 마시며 안부를 나누었다. 잠시 후에 두 친구가 와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식사 중에 계산하기 위해 나와 살짝 카운터로 가서 카드를 내미니 이미 자리를 마련한 친구가 계산을 해놓았다. 그 친구가 교육장을 하고 퇴임했는데 그렇게 덕을 베풀며 살기에 승진도 잘 했나 보다. 더구나 잠도 자기 집에서 자고 가라 했다. 자신의 서재에서 내가 자도록 배려해 주었다.
군산 예술의 전당 전시실, 군산미술협회 정기전시회
9월 9일. 선유도와 변산해수욕장으로
다음날 아침 일찍 친구와 둘이 나와 콩나물 해장국집에 가서 조반을 했다. 아침 운동을 나온 그룹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교대 선배님도 둘이나 있어 인사를 했다. 식후에 커피를 한 잔 하고 친구와 작별했다.
고향에 오니 만날 사람이 많다. 여동생이 세상을 떠난 지가 20년이 넘었지만 매제가 군산에 살고 있어 아침에 만나 차 한 잔 하기로 했다. 자전거 네비를 이용하여 매제의 아파트가 있는 지곡동 상가로 갔다. 매제는 재혼한 아내에게 내가 왔다는 이야기를 안 했을 것이다. 웬만하면 자신의 집으로 가자고 하는 게 좋은 일인데 그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하여 밖에서 만나자고 했다. 찻집으로 가려 했는데 이른 아침이라 문을 열지 않았다. 마트의 파라솔 테이블에 앉아서 차 한 잔을 들며 안부를 나누었다.
내가 찾지 않으면 매제는 나를 찾지 않는다. 그래서 그 인연의 끈을 놓을 수도 있지만 돌아가 어머니께 매제 소식을 전하면 어머니께서 반가워하실 것 같다. 또 어머니의 외손자 소식도 알려드릴 수 있다. 나는 장남이고 우리 집안의 대들보다. 매제의 머리가 약간 벌겋고 속은 흰색 그대로다. 염색을 했지만 착색이 잘 되지 않는가 보다. 내년에 지금 하고 있는 토목공사 자영업을 그만 둘 거라고 했다. 일이 줄어 사업이 신통치 않은가 보다. 차 한 잔을 들고 일어나 작별 인사를 하고 자전거에 올랐다.
새만금방조제로 선유도를 가기 위해 네비를 켰다. 승용차로 가면 새만금방조제 입구인 비응도에 1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데, 자전거로 가려니 1시간 30분이나 걸렸다. 자동차 전용도로로 가지 못하고 군산대학 캠퍼스를 통과하여 시골길을 달렸다. 군산항 하류의 군산산업단지로 가는 우회도로를 이용하니 비응도가 상당히 멀었다. 자동차 도로를 이용하면 조금 빨리 가련만 자전거 네비가 라이더의 안전을 고려해서 안내하기 때문인지 조금 멀리 돌아가게 안내했다.
새만금방조제 위로 올라가 서해를 보며 달리고 싶었는데 네비는 내 뜻과 달리 둑길을 건너 내륙 쪽으로 안내했다. 방조제보다 낮은 자전거 도로라서 오른쪽의 서해를 볼 수 없었다. 곧게 뻗은 방조제 길이라 전망은 좋지만 단순하고 바다를 볼 수 없어 아쉬웠다. 자전거 탄 사람도 걷는 이도, 그야말로 아무도 없다. 길 앞을 보니 먼 산이 가로막고 있어 거기서 길이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일요일인데도 사람을 볼 수가 없다. 햇살만 맑고 청명하여 더 쓸쓸한 광경이었다.
혼자 달리는 자전거길이라 마음 놓고 달리니 자전거 속력이 시석 25 km 이상으로 올라갔다. 평소에는 20 도 달리기도 어려운데 길이 좋으니 속도가 붙었다. 야미도에 와서는 서해를 보고 달리기 위해 방조제 위로 올라갔다. 우측에 인도가 넓게 잘 나 있었다. 이 방조제의 인도를 걷는 사람은 없다. 군산 비응도에서 신시도까지의 거리가 17 km, 부안까지는 총 39. 9 km나 되기에 이 길을 걸어갈 사람은 거의 없다. 자전거로 인도를 독차지하여 마음 놓고 인도를 달렸다.
신시도로 들어가니 먼저 선착장이 나왔다. 간이 방파제 주변에서 낚시꾼들이 낚시를 하고 있다. 많은 갈매기들이 낚시꾼 주변에서 너울거렸다. 군산에서 부안 가는 방조제의 중간에 신시도가 있다. 이 섬의 우측으로 돌면 무녀도를 지나 선유도로 간다. 섬 산 옆구리로 데크길을 만들어 선유도로 가는 길을 다리처럼 만들어 놓았다.
오르막을 오르니 벤치가 있는 휴식 공간이 나왔다. 자전거에서 내려 서해와 야미도, 비응도에 연결된 방조제의 도로를 보았다. 이렇게 바다를 메워 길을 내고 섬을 연결한다는 건 과거에는 상상하지 못한 일이다. 세계에서 가장 긴 방조제라니 이제는 우리나라에도 세계 최고의 기록이 많아진 것이다.
신시도에서 무녀도로 건너가는 고군산대교가 나왔다. 문명의 힘과 디자인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다리였다. 산과 산에 걸쳐놓은 것 육중한 다리가 섬을 간단히 건너도록 해주었다. 미지의 세계로 건너갈 수 있도록 만들어준 고마운 다리요, 건너고 싶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디자인의 교량이었다.
신시교와 고군산대교를 건너 무녀도로 들어갔다. 무녀도에서 선유도로 건너는 선유교 입구에는 포토존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교량 입구에서 선유항과 망주봉을 배경으로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나도 자전거를 세우고 사진을 촬영했다.
망주봉과 선유항을 배경으로 촬영하는 포토존
라이더들이 여러 명 몰려왔다. 그 중 인상적인 라이더가 있었다. 자전거 뒤에 자동차 트레일러 같은 작은 유모차를 달아 아기를 태우고 온 사람이 있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광주에서 왔다 한다. 아기를 태우고 이틀 이상 달려왔을 것 같다. 대단한 자전거 매니아다.
선유도로 들어가 산을 끼고 내려가니 선유스카이선라인 스탠드가 첨성대 비슷한 모양으로 서 있다. 해수욕장 위로 지나가는 짚 라인을 걸친 구조물이다. 10층 높이라니 그 위용이 상당히 크고 색상이 화려하여 눈에 확 띤다. 한번 타고 내려가는데 2만원이다. 라오스에서 다섯 번이나 타는 짚 라인에 비하면 조금 비싼 편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다.
선유스카이선라인 스탠드 옆 식당으로 들어가서 물냉면 한 그릇을 주문했다. 먹고 나서 계산하니 1만원이다. 사흘 전 임피에서 5,000원에 먹었는데 여기는 배나 비싸다. 자리 값이다. 40년 전 선유도에 왔을 때는 가난에 찌들은 스레트 집 몇 채가 있었다. 당시의 이곳 사람들은 농토를 팔고 도회지로 나가고픈 소망을 가지고 살았다. 그런데 지금에는 땅을 지니고 산 사람은 부자가 되어 이 섬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상전벽해다.
해수욕장을 지나 망주봉 앞까지 와서 우측으로 건너가려 했으나 길이 좁아 들어갈 수가 없다. 자동차가 들어가면 길이 좁아 짐을 실은 내 자전거가 지나갈 수가 없다. 그래서 직진하여 산길 쪽으로 갔다. 산기슭 왼쪽 길옆에 전망대겸 포토존이 있다. 내려서 솔섬을 보며 사진을 촬영하고 섬 안으로 더 들어갔다. 몇 가호 집이 있는 마을로 가니 오른쪽 바다로 나가는 고개가 있어 올라갔다. 바닷물이 철썩이는 바위. 바다 건너에는 방축도와 횡경도가 가로로 늘어서 있다.
다시 섬 끝으로 가니 방파제 옆으로 고깃배 여러 척이 묶여 있다. 방파제 끝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좁은 산길에서 자동차와 어렵게 비켜 지나와 장자도로 갔다. 장자도로 가는 옛 다리로 자전거를 끌고 들어갔는데 다리 끝에 쇠말뚝을 세워놓아 자전거를 가지고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돌아 나와서 자동차 도로로 올라가 장자교를 건너 장자도로 건너갔다. 장자도 입구에서 왼쪽 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어 봉우리로 올라갔다. 전망 좋은 정자가 있다. 선유도, 무녀도, 장자도, 대장도가 잘 보였다. 섬의 매력은 이렇게 전망 좋은 곳에서 넓은 바다를 조망하는 재미에 있다.
중앙 바위산이 선유도 망주봉, 장자교
장자도에서 나와 야영장을 찾기 위해 무녀도로 들어갔다. 야영장을 찾아가니 음푹 꺼진 자리에 화장실, 샤워실과 관리실, 바닥을 데크로 만든 야영장이 있다. 여기도 섬인데 바다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텐트 자리를 하나 빌릴까 했더니 요금이 3만원이다. 그 요금을 줄 바에는 변산에 가 민박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망설이다가 아직도 해가 많이 남아 있어 변산해수욕장으로 출발했다.
가다가 변산공동체학교를 만든 윤구병 선생님께 몇 차례 전화를 했으나 받지 않으셨다. 변산공동체학교에 전화를 하여 공동체학교를 취재하고 싶다고 전화를 했다. 취재는 허용하지 않으니 3박4일 이상 직접 체험을 하라고 했다. 오늘 학교로 가겠다니 내일 이후에 오라 하여 내일 가겠다고 예약했다.
변산해수욕장에 다가가니 캠핑장이 나왔다. 야영객에게 텐트 치는 요금을 물어보니 3만원이라 했다. 조금 더 바닷가에 가면 무료로 텐트를 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해수욕장으로 가니 솔밭에 텐트 하나가 있다. 그 옆에는 데크로 만들어진 평상이 있다. 백사장 뒤의 자동차에서 커피와 음료를 파는 아주머니가 백사장에 있는 데크 위에 텐트를 쳐도 된다고 알려주었다.
텐트를 치려니 데크라서 팩을 박을 수가 없다. 평상 아래의 모래바닥에 텐트를 치는데 바람이 몹시 불어 어려웠다. 큰 돌로 텐트의 가장자리를 눌러 놓고 텐트의 팩을 박았다. 팩을 박지 못하는 곳은 텐트 자락에 큰 돌을 얹어 고정시켰다.
해가 바다로 점점 기울고 있다. 일몰을 보고 싶은데 어두워지면 텐트를 치기 어렵기 때문에 서둘러 텐트를 치고 나니 석양이 수평선에 닿아 있다. 여러 사람들이 바다로 나와 지는 해를 바라보거나 사진을 촬영했다. 빨간 해가 수평선에 걸쳐 있다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바다로 가라앉는 해를 보며 복분자주를 마셨다. 해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나니 하늘은 붉은 여명으로 장엄하다. 복분자주를 다 먹고 나니 어두워졌다. 저녁 식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산해수욕장의 일몰
텐트에 짐을 넣은 후, 자전거를 타고 식당가에 가니 불을 켜고 장사하는 식당은 모두 횟집 간판이다. 대중식당을 찾기 위해 한 바퀴 돌았다. 마땅한 가게를 찾지 못해 어느 가게에 들어가 물으니 칼국수를 파는 집이 딱 한 곳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 식당을 찾아 들어가니 아주머니가 칼국수를 끓여주었다. 큰 냄비에 끓여 왔는데 양이 많아 보여 다 먹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소주 한 병과 천천히 먹다 보니 다 먹게 되었다. 배가 고팠기 때문이었는지 맛이 있었다.
식당을 나와 텐트 친 곳으로 가려는데 야외 테이블에서 아주머니 대여섯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호탕하게 웃으며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 혼자 여행하는데 칼국수를 한 그릇 먹게 되었다고 말하니 소주 한 잔 더 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소주 한 잔 받았을 뿐,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기 어려웠다. 또 그들의 대화에 내가 장애가 되는 것 같아 감사 인사를 하고 텐트로 돌아왔다.
9월 10일. 변산공동체학교에서 고추를 닦다
어제 저녁에 텐트를 칠 때는 바람이 드셌는데 아침이 되니 바람이 멎었다. 새벽녘에는 파도소리가 텐트 가까이에서 들렸다. 날이 밝아 나와 보니 밀물이었는지 바닷물이 아주 가까이에 있다.
아침을 지어먹고 텐트를 걷어 짐을 싸고 있는데 나처럼 자전거에 가방을 양쪽에 매단 라이더가 다가왔다.
“어제 신시도에서 야영을 했는데 여기서 아침을 해먹으려 합니다. 어디가 좋을까요?”
하고 물었다. 물을 이용할 수 있도록 화장실을 알려 드리고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서울에서 왔는데 진도까지 갈 거라고 했다. 제주도, 남해안, 동해안 라이딩 중 이렇게 야영 장비를 갖추고 라이딩 하는 사람을 만나 보지 못해서 반가웠다. 장비나 복장, 경력이 나보다는 한 수 위였고 외국에도 라이딩을 다녀온 고참이었다.
나도 목포까지 갈 예정이기 때문에 잠시라도 동행하며 대화를 나누면 라이딩에 대한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텐데 오늘 변산공동체학교에 들어가 며칠 지내기로 하여 아쉬웠다. 사정을 말하고 연락처를 물으니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서울에 사는 박용우 씨였는데 그 뒤로 몇 차례 통화를 했고 사진도 주고받았다.
변산공동체학교에 9시에 들어가려 했으나 밥 해 먹고, 씻고, 텐트를 걷어 짐을 정리하니 9시가 넘었다. 9시 20분에 출발해 변산치안센터를 지나 변산공동체학교에 도착한 것은 10시쯤이었다.
산자락에 강당 같은 2층짜리 큰 건물이 있고, 우측에는 흙담으로 지은 조그만 스레트 지붕의 흙집 두 채. 왼쪽에는 조그만 집 세 채가 나란히 붙어 있다. 왼쪽의 첫 건물은 창고였고 두 번째 건물은 큰 식당이었는데 사무실 겸 거실이었다. 그 옆 건물은 도자기를 만들고 실습을 할 수 있는 작업실이었다.
안살림을 맡은 초란님이 거실에서 초등학생을 지도하다가 나왔다. 학생들과 공동체 식구들이 모두 개울로 빨래하러 갔으니 조금만 기다리라 했다. 빨래하는 과정도 보고 싶고, 내 빨래도 하려고 개울로 가려했더니 학생들이 돌아왔다.
공동체학교의 가장 큰 건물이 생활의 중심인 곳 같아서 들어가 보았다. 강당으로서 다목적실이었다. 실내의 가장자리에 피아노가 두 대가 있고, 운동기구들이 있다. 2층으로 올라가니 이곳도 다목적실로 쓸 수 있게 되어 있다. 탁구대가 있고, 가장자리에는 여러 개의 책장이 있어 도서관이나 공부방으로 쓰는 것 같았다.
책장에는 많은 책들이 내용별로 구분되어 있는데 어린이 도서에서부터 인문학, 철학의 전문 서적까지 다양한 책들이 꽂혀 있다. 그 중에 『윤구병 일기』가 눈에 띄었다. 두꺼운 하드표지로 되어 있는데 900페이지가 넘었다. 윤 선생님이 공동체학교를 시작한 초창기, 1996년의 생활기록인데 만 1년 동안의 일기였다. 잠시 앉아 읽다보니 예전에 함께 글쓰기 활동을 함께 했던 회원들의 이름이 나와 반가웠고 읽고 싶었다.
윤 선생님이 공동체학교를 시작한 초기라서 공동체 생활의 어려움, 그 시기에 있었던 중요한 일들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호기심이 발동했다. 공동체학교의 생활상,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 원고를 써서 보낸 일, 강의하러 다닌 일 등을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그 바쁜 일상 중에서 어떻게 이렇게 자세히 썼을까. 정말 공을 많이 들인 일기였다.
점심을 먹고 나니 공동체 가족이며 학교의 일들을 추진하는 달님이 일감을 내놓았다. 위탁교육을 받으러 온 남학생과 나는 물젖은 삼베 걸레로 마른 고추의 흙을 닦았고. 달님은 닦은 고추의 꼭지를 땄다.
고추를 말리면 바로 빻아서 고춧가루로 만드는 줄 알았는데 마른 고추를 일일이 닦았다. 고추 꼭지를 따지 않고 고추를 빻는 사람도 있다 한다. 그러면 고춧가루의 양이 많이 나오지만 여기서는 꼭지를 모두 따내기 때문에 고춧가루의 빛깔이 곱고 맛이 좋다고 했다. 그리고 고추를 이렇게 깨끗이 닦아내니 고춧가루의 질이 일반 고춧가루보다 좋을 것은 당연하겠다. 그런 걸 아는 사람들이 여기서 생산한 농산물을 주문한다는 것이다.
일을 하고 있는데 이 학교의 박형진 교장선생님이 오셨다. 이 마을에서 거주하는 분인데 이 공동체학교 초기에 세 자녀를 가르쳐 줄 것을 의뢰하여 서둘러 학생 교육을 시작하도록 만든 분이었다. 지금은 이 학교의 교장 직을 맡고 있다.
새 참을 먹고 무 밭으로 가, 풀을 뽑은 후 퇴비를 뿌렸다. 퇴비를 아주 많이 넣었다. 내가 우리 무 밭에 넣은 퇴비의 양보다 서너 배는 더 넣은 것 같다. 거름이 충분해야 농작물이 잘 자라나 보다. 우리가 심은 들깨는 거름을 안 주었기 때문에 키가 작고 볼품없이 자랐다.
저녁 식후에 방으로 와서 “변산공동체학교,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을 조금 읽었다. 변산공동체학교의 설립 동기와 목적, 학교 운영 등의 내용이 적혀 있다.
방에 모기가 있을까 봐 함께 방을 쓰는 학생에게 걱정을 했더니 다른 학생 방에 가서 모기향을 얻어 왔다. 모기향을 피우고 잠을 청했다.
변산공동체학교의 강당과 도서관
9월 11일. 윤 선생님 뵙고 인터뷰
오전에 고추 닦는 일을 하는데 윤구병 선생님이 오셨다. 인사를 드리고 식당으로 들어가 말씀을 여쭈었다.
여기에서는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칩니까? 우선 제 앞가림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도록 합니다. 자기 삶을 스스로 해결해가는 능력을 기르는 게 중요하지요. 여기는 교과서가 없습니다. 텃밭 가꾸기, 새끼 꼬기, 천연염료, 목공예 등 손발 놀리는 교육, 수학, 영여, 사회, 인문학, 철학 등을 공부합니다.
대학 가기를 희망하는 학생은 진학을 목표로 1년쯤 공부하면 검정고시에 합격합니다. 그리하여 대학에 가기도 합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진학한 학생도 있고, 대학 진학 후 사법고시에 합격한 학생도 있습니다.
이 학교에 다니다 도시 학교로 간 학생이 있는데 다시 이 학교로 돌아오기도 하였습니다. 과거의 조부모, 현재의 부모, 미래 세대의 아이, 이렇게 3대가 함께 살아야 진정한 공동체가 됩니다. 그건 30년, 즉 한 세대가 걸리는 일이지요.
세월호가 가라앉아 많은 학생들이 희생당했습니다. 학생들이 알아서 행동하도록 내버려 두었으면 배에서 뛰어 내려 대부분이 살아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뛰어내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니, 스스로 선택하고 그 선택을 책임지게 하는 교육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남에게 의지하게 하는 교육을 하고 있지요. 자기 앞가림을 할 줄 알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처음 여기에 와서 농약, 제초제 등 화학 비료를 안 쓰고 농사지으니 동네 사람들이 이해 못했지요. 그런데 그런 생각에 일대 변화를 갖는 계기가 생겼습니다.
가뭄으로 중산리 저수지가 말라 저수지 바닥에 썩은 나뭇잎이 드러났습니다. 그 나뭇잎을 주워 고추밭에 넣었습니다. 그 해 동네 사람들의 고추는 탄저병이 들어 말라 죽었는데 우리 고추는 싱싱하게 자라 동네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겼지요. 마늘도 굵게 잘 되었습니다. 썩은 나뭇잎이 거름이 되어 건강하게 자란 것이지요. 동네 사람들이 보고 놀랐습니다.
우리는 비닐 멀칭도 하지 않습니다. 비닐 조각이 토양의 오염 물질이거든요. 우리는 똥도 썩혀서 거름으로 씁니다. 화장실에 고무 함지박을 놓고 똥을 누우면 왕겨나 재를 덮고 썩혀서 좋은 거름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버리는 게 거의 없습니다.
이 학교의 화장실은 수세식이 아지만 냄새가 거의 나지 않았다. 환기가 잘 되기도 했지만 변에 왕겨를 덮기 때문에 냄새가 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함지박에 모아진 걸 화장실 밖에서 끌어낼 수 있도록 집의 구조를 만들었다. 똥을 꺼내가기가 수월했다.
샤워장에서 쓰는 비누는 따로 있었다. 비누를 망 속에 넣어 쓰는데 환경오염을 덜 시키는 비누란다. 독립 가정에서 만드는 걸 구입해 쓴다고 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데 대학에서 한의학 강의를 했다는 분이 오셨다. 이분은 이 마을 사람들의 건강을 위해 도움을 준다고 했다. 이분은 윤 선생님께 인생2막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귀농 학교를 운영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하셨다. 그러면 선생님께서 귀농 학교 운영 계획을 좀 세워 달라고 윤 선생님이 바로 간청했다. 그러자 그분은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그런 교육이 있다면 나도 맨 먼저 입학하겠다고 그 의견을 지지했다. 정말이다. 올 2월 퇴직 후 소일을 위해 밭을 사서 농사를 짓고 있는데 농사짓는 법이나 요령을 몰라 애를 먹고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 학교에서 귀농 강좌를 시작하면 나도 배우고 싶고 일정 기간이나마 그 일에 자원봉사를 하고 싶다는 말도 했다.
윤 선생님은 점심을 함께 드시고 내가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는 동안에 지름박골로 돌아가셨다. 지름박골로 따라가며 말씀을 더 여쭙고 싶었고, 사시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홀연히 가셨다. 그 아쉬움을 달님에게 말씀 드렸더니 내일 지름박골에 갈 일이 있으니 그때 함께가보자고 하셨다.
밤에 방을 청소하는데 큰 지네가 방구석에서 나오더니 장판 밑으로 들어갔다. 장판을 손으로 힘껏 누르고 열어보니 지네가 없다. 도망을 갔나 보다. 이곳에 체험을 왔다가 지네에 물린 학생이 있었는데 팔이 조금 붓자 바로 다음날 돌아갔다는 말을 달님에게 들었다. 나도 밤사이에 물리는 건 아닌가 걱정을 했다.
9월 12일. 학생들에게 강의, 윤 선생님의 흙집에 다녀오다
아침밥을 먹고 10시까지 학생들과 들깻잎을 땄다. 들깻잎이 조그만 했다. 잎이 좀 큰 것은 벌레가 뜯어 먹기도 했다. 농약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들깻잎을 따며 학생들에게 어떻게 이 학교에 들어오게 되었는가를 물었다. 두 여학생은 어머니께서 권장하여 오게 되었다고 했다. 부모님과 떨어져 여기서 생활하려면 불편한 점이 많을 텐데 괜찮으냐고 물었다. 대체로 만족하고 있으며 주말에는 집을 다녀오기 때문에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남학생들은 일반 학교에 다니기 싫어서 왔다고 했다. 일반 학교에서 적응하기 어려웠는데 이 학교는 편하다는 것이다. 달님의 말은, 일반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해 우리 학교에 올 텐데 이곳에 오면 학생들의 행동에 특이성이 없어져 보통 학생으로 바뀐다고 했다. 그렇겠다. 전 학생수가 모두 10 명이니 가족처럼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나이나 학년의 큰 차이가 있으니 형, 동생으로 부르고 있다. 옛날에는 형제자매가 많으면 형이나 언니가 동생들을 보살피며 길렀다. 그런 분위기라서 함께 잘 어울리나 보다.
달님의 요청으로 10시 20분부터 학생들에게 내가 강의를 했다. 강의하며 학생들의 이름을 묻고 그 이름으로 불렀다. 대부분 중 ․ 고등학생들인데 초등학생 두 명을 포함하여 모두 10명이다.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이나 공통점을 예로 들면서 자신의 꿈을 실천하려고 간절히 노력할 때, 힘과 지혜가 생기고 인내심도 강해진다고 말했다. 성공한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세 가지 특징으로 성실성, 지속성, 창의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일단 성실하고 부지런해야 생계를 해결할 수 있다. 그 다음이 지속성이다. 꾸준히 어느 한 분야에 집중하면 전문가가 된다. 그리고 새로운 생각, 즉 창의성을 가진 사람이 새로운 길을 개척하거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게 된다고 말했다.
한 여학생이 몹시 졸아, 내 강의가 재미없어서 그럴 거라고 위로했다. 그러자, 한 학생이 일방적으로 강의하기보다는 대화로 수업하면 졸지 않는다고 의견을 냈다. 맞다. 그래야 졸지 않고 재미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질문하고 대답을 들으며 강의를 하다 보니 금세 마칠 시간이 되었다.
강의를 위해 준비한 내용의 30 %도 말하지 못했다. 아쉬웠다. 그러나 학생들은 더 빨리 끝내주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래도 대부분은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었고, 뭔가를 얻은 듯한 표정을 보여준 학생도 있었다.
점심을 먹고 오후 일과가 시작된 후, 달님을 따라 지름박골에 갔다. 논밭을 지나 산길로 가는데 달님은 고무신을 신었다. 풀이 무성하여 뱀이라도 나오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산길 가에는 여러 가지 버섯들이 탐스럽게 자라있다. 그 중에는 독버섯이 있기 때문에 탐스런 버섯일지라도 채취할 수가 없다.
오르막을 오르는데 힘이 들었다. 그런데 달님은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이런 길을 자주 다녀 익숙했기 때문인지, 체력이 좋은 건지 가볍게 걸어가는 달님이 대단하게 여겨졌다. 나는 라이딩으로 체력이 충분히 길러졌으리라 자부했는데 간신히 따라갔다. 숨을 헐떡이는 게 부끄러워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참았다.
내리막길을 가다 작은 개울을 건너자 커다란 당산나무가 나왔다. 나무 둥치가 2 미터나 되는 팽나무인데 수령이 300년은 된 것 같다. 윤 선생님께서 ‘당산 할매’라 부르며 이곳을 지나갈 때면 항상 절을 한다고 했다. 윤 선생님은 이 나무를 제재로 ‘당산나무 할매’라는 동화를 쓰기도 했다.
이 당산나무 아래로 몇 그루의 팽나무가 자손인 듯 개울을 따라 줄지어 자라 있다. 그 개울가로 100미터 정도 내려가다 감나무 사이로 들어가니 방 한 칸, 부엌 한 칸의 흙집이 나왔다. 선생님이 손수 지은 집이다. 예전에는 촛불이나 등잔불을 이용하여 책을 읽었지만 작년에 태양열 발전 시설을 하여 지금은 전등불로 책을 읽을 수 있다. 휴대폰 충전도 가능하다니 다행이다. 아무리 자연을 지향하더라도 문명을 완전히 등질 수는 없겠다.
이 집을 짓고 살면서 방의 난방은 나무를 때고, 물은 집 아래 옹달샘에서 길어 오고, 화장실은 나뭇잎을 이용하여 썩혀서 거름으로 쓴다. 버릴 것이 없기에 돈을 쓸 일도 거의 없다. 자연에서 구해 쓰고 자연으로 돌려보낸다.
해발 300미터 이상의 산맥이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운산리. 선생님은 산줄기가 꽃잎처럼 마을을 싸안은 모습이라 했다. 논과 밭, 산, 개펄이 있는 마을이라 먹을 것이 풍족해 살기 좋은 마을이란다. 그 산맥의 양쪽에는 쌍선봉과 변산 봉우리가 솟아있어 풍광도 아름답다.
선생님은 TV도 보지 않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나들이도 하지 않는다. 숙소와 공동체학교를 오가는 길은 30분이 걸린다. 그 길을 걸으며 오붓하게 명상을 하실 거다. 이렇게 산 속에서 살기에 여러 책을 저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선생님의 글을 좋아하는 많은 독자가 있고 선생님을 따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가족이 있어 나름대로 보람도 있을 것이다.
‘몽실 언니’를 쓴 권정생 선생님처럼 단칸방에 산다. 방바닥에는 한 사람이 누울 이불이 펼쳐 있다. 그 외에는 방 한쪽에 먹거리를 해결할 그릇 몇 개가 있을 뿐이다. 방 벽에는 책들이 수북이 쌓여있다. 가구가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살림이지만 책이 많은 부자다. 부엌에도 아무 기구가 없고 아궁이 막아둔 덮개만 있을 뿐이다.
부엌에서 뒷문을 열면 반 평도 되지 않는 뒷간이 있는데 솔잎에 덮여 있다. 냄새가 없어 뒷간 같지도 않다. 선생님보다 더 단순하게 사는 사람이 없지 않겠지만 자기 집을 가지고 사는 사람 중에 이렇게 단순하게 사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선생님 댁에서 산 아래로 내려오며 뒤돌아보니 선생님의 집은 숲에 가려 안 보이고 산등성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눈부시다. 아! 이게 자연이 주는 즐거움이겠다 싶다.
윤구병 선생님이 사시는 흙집
윤 선생님 댁에서 돌아와 고추를 닦았다. 학생들과 일을 함께 하여 고추 닦는 일을 했다.
저녁 식사 후에 학생들과 공동체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여기 와서 농사짓는 방법도 배우고 학생과 공동체 식구들과 지내게 되어 좋은 체험을 했다. 앞으로도 기회가 있으면 다시 오고 싶다고 인사했다.
9월 13일. 아내와 줄포를 지나 고창으로 가다
아내에게 변상공동체학교의 모습이나 운영에 대해 알게 하고 싶어 오라고 했다. 오전에 고추 닦는 일을 마치고 방에 앉아 있는데 아내가 도착했다. 아내와 학교를 둘러보는데 윤구병 선생님이 오셨다. 함께 자리해서 말씀을 듣고 점심을 먹었다. 이 학교에서 생산한 농산물 중 필요한 것을 아내에게 구입하라고 했더니 쌀과 보리쌀을 샀다.
작별 인사를 하고 식당에서 나와 자전거를 자동차에 실었다. 변산으로 나오는 길에 윤구병 선생님의 초막에 아내를 데리고 갔다. 흙집에서 단순하게 사는 모습에서 아내도 무언의 교훈을 얻을 수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중산리 마을에서 저수지 옆에 주차하고 걸어서 올라갔다.
호젓한 산길. 이따금 나뭇가지에 옷이 걸리기도 하지만 가시를 비켜가며 1 km쯤 오르니 작은 계곡이 나왔다. 개울물이 흐르고 있다. 옹달샘을 지나 선생님 집에 도착했다. 집을 살펴보고 당산나무가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깊은 산의 계곡. 주름지고 구부러진 당산나무는 정말 할머니의 주름 같다. 계곡을 따라 더 올라가면 선녀탕도 있다지만 그만 돌아섰다.
선생님 초막 주변에는 감나무들이 많다. 벌레 먹은 감들이 떨어져 있다. 물러 떨어진 감이 익은 것처럼 먹을 만해서 감을 주워 아내에게 주고 나도 하나를 먹었다. 맛이 괜찮다.
변산 상가로 나와 마트에서 음식물을 샀다. 아내가 격포 해수욕장을 가보고 싶어 하여 격포로 갔다. 10여 년 전의 여름에 장모님을 모시고 함께 온 적이 있다. 장모님은 8년 전 세상을 떠나셨다. 아내는 이곳을 보며 어머니 생각을 많이 했을 것이다.
변산반도를 차를 타고 돌았다. 먼저 테마파크인 영화 촬영지를 가니 성곽 같은 담장이 둘러쳐져 있다. 정문으로 가서 안을 들여다보니 여러 동의 기와 건물이 있다. 정문 왼쪽에 음식점이 있다. 안쪽에 있는 집들은 장영실, 징비록 등의 촬영 세트장이다. 가건물일 뿐 문화 유적이 아니다. 그러니 들어가 볼 생각이 나지 않아 입장을 하지 않고 나왔다.
‘불멸의 이순신’ 드라마 촬영지인 궁항의 ‘전라좌수영’ 세트장으로 갔다. 여러 채의 한옥들이 바다를 향하여 자리하고 있는데 산의 나무들과 어울려 경치가 좋다. 주차장에 차를 두고 걸어서 세트장을 돌았다. 평일이라 관람객이 없어 우리 부부만 있다. 바다 가까운 산기슭, 기와집으로 만든 좌수영 청사와 수목 등 조경이 잘 되어 이런 곳에 살아도 참 좋겠다 싶다. 동헌, 내아, 군청 등으로 만들어진 19 개의 건물이 잘 배치되어 있다. 누각에도 올라가 보고 호젓한 마당을 걸으며 사진을 촬영했다.
전라좌수영 세트장(세트장의 게시용 사진 촬영)
세트장에서 나와 변산반도의 오르막길을 오르내리다 산모롱이를 도는데 작은 공원이 나왔다. 바다가 잘 보이는 곳에 벤치와 휴게 공간이 있다. 새로 지었는지 공중 화장실도 깨끗했다. 캠핑카로 개조한 승합차가 주차장에 한 대 있는데 문을 열고 빨래를 널어놓았다. 여기서 침식을 했나 보다. 오늘 마땅히 잘 곳이 없으면 이곳으로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를 타고 가다 보니 모항이 나왔다. 바닷가로 내려가 방파제에 올라갔다. 방파제 위에서 낚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방파제 가장자리에 현수막이 걸려 있는데 피자와 치킨 집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다. 이곳에서 낚시하는 사람들이 배달을 시켜 먹는가 보다.
변산 관광지도에 자연휴양림이 있어 찾아가니 식당가였다. 입장권 판매소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식사하러 가는 게 아니라면 들어갈 필요가 없다 한다. 공연히 입장료만 낼 뿐 볼 게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관광안내 지도에 변산자연휴양림이라는 건 왜 써 놓았을까.
지도에 줄포 습지공원이 있고 캠핑장이 나와 있어 줄포로 갔다. 습지 공원에 들어가니 습지를 개발하여 길과 화단을 잘 조성해 놓았다. 습지 공원에서 오르막에 오르니 캠핑장이 있는데 캠핑하는 사람도 없고 관리하는 사람도 없다. 사무실은 닫혀 있고 내부는 텅 비어 있다. 캠핑장 안내의 포스터가 있지만 공원 안으로 더 들어갔다. 텐트 칠 자리를 찾아볼 요량으로 습지공원 끝가지 갔다. 야영장과 화장실이 또 있지만 사무실이 없다.
야영장 앞 건물에서 나가는 사람이 있어 야영장 이용에 대해 물었다. 위쪽에 있는 사무실로 가야 한다며 자신이 그곳을 지나가니 따라오라 했다. 그러나 이 야영장에도 야영을 하는 사람이 없다. 날씨는 비가 올 듯 썰렁했다. 야영을 포기하고 고창 선운사로 출발했다. 거기에는 식당과 호텔, 숙박업소가 많기 때문이다.
선운사 입구에 도착하니 예상대로 식당과 호텔이 많았다. 선운사 매표소까지 갔다가 나와 조그만 호텔에 숙소를 정하고 주인에게 장어구이를 잘하는 집을 물었다. 호텔 바로 옆에도 장어구이집이 있는데 좀 떨어진 곳을 알려주어 걸어갔다. 역시 깨끗하고 친절한 음식점인데 음식이 다양하게 나왔다. 장어구이를 먹고 호텔로 돌아와 몸을 씻고 누웠다. 아내가 곁에 있으니 편안했다.
9월 14일. 법성포, 백수, 함평, 무안으로 라이딩
아침에 부슬비가 내렸다. 밥을 지어먹고 짐을 챙긴 후 자전거를 끌고 호텔을 나왔다. 아내는 선운사를 돌아보고 나중에 현경면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출발했다. 500 m 쯤 가다가 우비를 꺼내 입고 다시 달렸다. 아산, 무장, 공음을 지나 법성포로 가다가 시장에서 모시떡을 한 상자 샀다. 모시떡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자신도 라이딩을 많이 했다며 백수로 가는 자전거길을 알려 주었다. 산으로 오르는 길이라 힘이 들었지만 자전거길로 연결이 되었다. 자전거 전용도로가 끝나 일반 도로의 산길로 가는데 건너편 산에 백제 불교문화 최초도래지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부처의 모습도 보여 커다란 절 같았다.
산길 숲을 나오니 영광대교가 머리 위로 지나갔다. 대교 아래를 통과하니 쉼터가 나왔다. 법성포와 서해가 만나는 지점이다. 그 아래는 모래미 해수욕장이었다. 자전거길이 잘 돼 있고 쉼터가 있어 자전거를 세우고 피크닉 테이블에 앉았다. 법성포에서 사온 모시떡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영광대교 아래의 쉼터, 필자의 라이딩 자전거
쉼터에서 일어나 산기슭을 돌아 오르니 바다와 포구를 볼 수 있는 전망대가 나왔다. 데크로 널찍하게 만들어 관광객들이 전망을 즐길 수 있도록 넓게 만들어 놓았다.
다시 산길로 오르니 칠선정이 나왔다. 서해를 조망하기 좋은 곳이었다. 자동차 주차장이 산기슭에 거듭 이어져 제8주차장도 눈에 띄었다. 그 길로 산을 돌며 달리는데 돌머리해수욕장가는 표지판이 나왔지만 들어가지 않고 지나쳐 함평으로 갔다.
아내가 현경면 하나로 마트 주차장에 도착하여 기다린다고 전화를 했다. 나는 6시쯤 도착했다. 아내가 숙소를 알아보았는데 현경면에는 없다고 했다. 일단 운남면사무소까지 가서 만나자고 하고 나는 자전거로 달리고 아내는 차를 몰고 앞서 갔다. 가다보니 상가가 나와 여관을 물어 보았다. 두 곳을 알려주었다. 바로 길옆에 조그만 호텔이 있어 들어가니 중국 관광객과 내국인들이 있는데 조금 소란스러웠다. 무안 톱머리해수욕장에 무안비치호텔이 있다고 알려주어 전화를 해보니 빈 방도 있고 이용료도 저렴했다.
우남면사무소에 도착했다는 아내에게 무안비치호텔로 오라고 전화를 했다. 그리고 무안 비행장 옆으로 15분쯤 달려가니 아내가 차를 몰고 내 곁을 지나 먼저 호텔로 갔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뒤따라갔다. 무안 비행장 옆길을 달리는데 무안의 명물인 뻘낙지 음식점이 보였다.
호텔에 도착하여 아내에게 음식점으로 가서 뻘낙지 요리로 저녁을 먹자고 했다. 아내는 저녁 먹을 걸 준비했다며 호텔에서 음식을 만들어 주었다. 아내가 차려주는 밥, 찌개와 반찬이 한결 맛있다.
오래된 호텔이라 침대나 가구가 구식이었지만 바다가 보이고 방이 널찍하여 좋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날씨가 흐려 창밖으로 보이는 건 안개뿐이었다.
9월 14일 압해도 분재원과 목포 갓바위
아침을 지어 먹고 신안군 압해도로 아내보다 먼저 출발했다. 아내는 차로 가고 나는 자전거로 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라이딩의 종착지가 목포였기 때문에 계획대로 목포까지 자전거로 달려가 여행을 마치고 싶었다.
호텔에서 나와 무안비행장을 지나는데 목포 쪽에서 달려오는 라이더들을 보았다. 그들은 현경면 쪽으로 갔고 나는 운남면 쪽으로 좌회전을 했다. 널찍한 지방 도로를 지나 김대중대교에 다다르기 전에 아내가 내 옆을 스쳐가더니 대교 옆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나의 라이딩 장면을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촬영했다.
잠시 멈추어 압해도와 서해안을 연결하는 김대중대교 아래, 강 같은 바다와 주변을 아내와 살펴보았다. 아내가 압해도의 명소를 하나 들리자고 했다. 맞다. 처음으로 와 본 이 신안군과 압해도인 이곳에서 명소 하나는 보고 가는 게 좋겠다 싶었다. 인터넷을 검색하니 송공산분재공원, 천사섬분재공원, 압해도분재공원의 이름이 나왔다. 그 세 개의 분재공원 중 송공산분재공원을 가 보자고 했다.
네비를 보고 달리다가 압해초등학교 옆에 벤치가 있는 쉼터가 앉아 사과를 먹으며 잠시 쉬었다. 아내가 분재원에 도착했다고 전화를 했다. 압해읍사무소 부근에서 목포로 가는 길을 벗어나 송공산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시골길을 달렸다.
송공산 안내 표지가 좌회전으로 나와 왼쪽 오르막을 오르자니 힘이 들었다. 저속 기아로 바꾸고 고개에 올라갔다. 고개에서 내려가는데 네비가 오른쪽 산으로 길을 안내했다. 이상했다. 분재공원의 표지도 없고, 공원 같지도 않은데 네비는 송공산 입구라고 어느 민가 앞에서 안내를 종료했다.
아내에게 전화를 거니 천사섬분재공원이란다. 송공산분재공원, 압해도분재공원으로 이름은 달라도 동일한 곳이었다. 공식 명칭은 천사분재공원이었다. 이름이 달라 각기 다른 세 개의 분재공원이 있는 것으로 잘못 판단했던 것이다. 알고 보니 모두 같은 곳이었다. 압해도의 송공산에 있는 분재공원인데 신안군의 섬들이 모두 1004 개라서 신안군에서 천사섬분재공원이라 이름을 붙였단다. 하나의 이름으로 통일을 해야 이런 착각을 하지 않겠다. 또는 공식 명칭 옆에 ( ) 표시만 했어도 이런 착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천사분재공원에 도착, 아내에게 전화를 하여 공원의 입구에서 만났다. 송공산의 남쪽 바닷가 4만 평에 분재와 야생화, 수목, 삼림욕장, 온실을 만들어 놓고 2009년에 개장했다.
아내와 분재공원 안으로 올라갔다. 조각 공원을 지나 유리온실에 들어가니 많은 분재들이 진열되어 있다. 금송, 해송, 주목, 향나무, 모과나무, 소사나무 등, 나무의 종류와 모양도 매우 다양했다. 정원에도 큰 분재, 정원수가 많았다. 아프리카 석조문화의 쇼나조각도 여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제주도의 ‘생각하는 정원’과 비슷한 분재원이다. ‘생각하는 정원’은 개인 분재원이고 이 천사섬분재원은 신안군에서 조성한 분재원이다.
최병철분재기념관에 들어가니 최병철 씨가 평생 만들고 가꾸어 온 분재 500점, 그리고 여러 자료와 분재 기구들을 기증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 생애 동안 귀하게 가꾸어온 작품을 무상으로 기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참으로 뜻깊은 일이요 고마운 일이다. 그 외에도 여러 독지가들이 분재를 기증했다 한다.
분재원에서 나오니 2시가 넘었다. 압해도에서 송공산에 가지 않고 바로 목포로 갔으면 오전에 도착했을 텐데 분재공원에 오느라 목포에 간 것 만큼 자전거로 달렸다. 아내와 목포에 가서 갓바위를 보고 목포항 관광을 하기 위해 여기서 라이딩을 마치기로 하였다. 자동차에 자전거를 싣고 라이딩 옷을 갈아입었다. 점심 때가 지나니 배가 출출하여 모시떡을 몇 개 먹었다.
목포항에 가서 갓바위를 보고 수원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차를 운전하며 가다보니 압해도를 벗어나기 직전에 한식 뷔페식당이 나왔다. 잘 되었다. 1인 8,000원에 여러 가지 음식이 있으니 골라서 마음껏 먹자. 식당에 들어가니 깨끗하게 정돈이 되어 있다. 여러 가지 산해진미의 음식이 진열되어 있다. 매우 만족한 식사를 하고 압해대교를 건너 목포 시내로 갔다.
목포자연사박물관에 주차하고 해변을 따라 산 아래의 갓바위를 향해 걸어갔다. 지난 5월, 남해안 라이딩을 할 때 혼자 왔던 곳이다. 오늘은 아내에게 가이드 역할을 했다. 데크길로 들어가 왼쪽으로 도니 갓바위가 잘 보였다. 두 사람이 삿갓을 쓰고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바위다. 바위가 풍화작용과 해식작용으로 만들어진 풍화혈(tafoni)이다. 입암산 바위산이 바다와 맞닿은 곳이라서 경관이 더 특별하다.
목포 입암산 삿갓바위
삿갓바위를 지나 데크 길로 조금 돌아가니 달맞이 공원이 나왔다. 공원에서 바닷가로 길이 잘 나있다. 많은 사람들이 공원과 바닷가 길을 걸었다. 바다에 분수를 만들어 놓았는데 분수쇼는 일정한 시간에 한다고 씌어 있다.
바닷가를 30분쯤 걷다가 주차장으로 돌아와서 수원으로 출발했다. 수원에서 이번 여행길을 나설 때는 혼자 자전거로 시작했다. 그런데 아내가 차를 가지고 변산으로 왔고, 목포까지 에스코트하여 함께 승용차로 귀가하게 된 것이다. 덕택에 귀로는 아주 편하게 되었다.
이번 서해안 라이딩은 남해안이나 동해안 보다 편했다. 고향에 들러 친구도 만나고 선친 산소에도 들렀다. 농사 체험도 해 보았고, 아내와 동행하여 압해도에 가 본 뜻깊은 여행이었다. 친척집, 친구집, 호텔에서 숙박을 했기에 텐트는 변산해수욕장에서 하루만 이용했다. 식사는 제주도, 남해안, 동해안 여행 때보다 매식을 많이 했다.
오는 길에 경부고속도로가 밀리는지, 네비가 공주와 아산으로 안내해 우리 농막이 있는 송악면을 지나게 되었다. 출발할 때도 이 길로 갔고 돌아올 때도 우리 농막 옆으로 지나오게 되었다. 농막에 들렀다 가면 좋겠는데 시간이 늦어 들리지 못하고 수원 집으로 곧장 돌아왔다.
이전의 여행 중에 아내와 동행하지 못해 미안하고 아쉬웠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일부 구간만이라도 아내와 동행하기 위해 여정을 고려하였다. 변산반도, 천사섬분재공원, 목포 해변과 갓바위, 등을 아내와 함께 여행하여 편하고 즐거웠다. 또 세월이 흐르더라도 아내와 가끔 이번 여행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이다. 슬픔을 나누면 절반이 되고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된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제주도 해안, 남해안, 동해안에 이어 서해안 라이딩도 마쳤다. 이제 다음 여행은 내륙이다. 우리나라 북쪽 설악산에서 남쪽 지방까지 달린 후, 전국 라이딩을 마쳐야겠다. 염려와 격려를 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첫댓글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