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이몽이 되지 않으려면
참고말씀: 창5:21,22,24; 15:18-21; 45:5,7,8; 46:1-4; 50:24,25; 수1:2-4; 행20:28; 고후12:18; 엡4:3
읽을말씀: 창13:10-12; 창15:13,14
주제말씀: 창13:10-12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첫째, 같은 곳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창13:10-12)
우리의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세워진 곳으로써, “...하나님이(어떤 사본에, 주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20:28 하)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곳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각자 어떤 의무가 있습니까? 이 같은 교회를 힘써 지켜나가야 할 의무입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
이처럼 우리의 교회를 힘써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의 신앙공동체가 성장하고 발전하며 앞으로 나아가게 하려면 더욱 어찌 해야 합니까? 동상이몽(同床異夢)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즉 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어리석음(愚)을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동상이몽이 되지 않는 첫 번째 방법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컨대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은 왜 헤어질 수밖에 없었습니까? 각기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바라보았다면, 롯은 물질적인 풍요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창13:10-12)
혹 우리는 지금 어느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아브라함처럼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롯처럼 물질적인 풍요를 좇아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까? 원컨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의 방향이 결정된다는 점을 명심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만일 두 사람이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끝까지 동행했을 것입니다. 사실 동행(同行)이란 같은 곳을 바라볼 때에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즉 ‘같은 곳을 바라보는데서’ 시작되며 ‘계속 같은 곳을 바라봄으로써’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번 실험해보십시오. 조금이라도 다른 곳을 바라보면 어떻게 됩니까? 동행이 불가능해집니다. 왜냐하면 진행할수록 옆 사람과의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동행을 위해서는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 외에 또 무엇이 필요할까요? 보조(步調)를 같이 해야 합니다.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고후12:18 하) 옆 사람과 보폭(步幅)을 맞추고 걷는 속도(速度)를 맞춰야 합니다. 즉 보폭이 넓은 사람은 좁은 사람과 맞추어야 하고, 빨리 걷는 사람은 느리게 걷는 사람과 속도를 맞추어주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동행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일이며, 어려운 것 같으면서도 막상 해보면 그리 어렵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원컨대 우리도 옆 사람과 동행하기를 원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참고로, ‘하나님과의 동행’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누굽니까? 에녹입니다. 그는 몇 년 동안이나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까? 300년입니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창5:21,22) 이쯤 되면 ‘동행의 달인’이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얼마나 동행을 잘하였으면 하나님이 그에게 어떤 특혜까지 베푸셨습니까?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데려가시는 복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5:24)
이를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하나님은 ‘동행’을 참으로 좋아하시며 당신과 우리가, 우리 서로가 동행하기를 원하신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찌 해야 합니까?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기 위해, 오늘도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 동일한 보조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자신이 조금 빠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보다 느린 사람을 배려하고, 멀리 보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을 배려하며, 보폭이 넓은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을 배려하면서 말입니다.
둘째, 큰 그림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15:13,14)
우리의 교회를 힘써 지키려면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큰 그림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째서입니까? 큰 그림을 보아야 비로소 우리 모든 사람이 각자의 부분을 완성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요셉, 그리고 모세, 여호수아 여섯 사람이 모두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의 큰 그림을 보면서 달려갔을 때 그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들 중 누가 제일 먼저 큰 그림을 보았습니까? 아브라함입니다.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그의 후손이 400년 동안 애굽에서 객이 되어 지나다가 나와서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15:13,14) /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창15:18-21)
또 누가 애굽으로 먼저 내려가서 이주를 준비했습니까? 요셉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45:5 하) /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45:7,8)
누가 가족을 이끌고 애굽으로 들어갔습니까? 야곱입니다.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창46:1-4)
요셉은 출애굽을 확신하면서 그의 후손들에게 유언으로 무엇을 남겼습니까? 출애굽할 때 자신의 해골을 가지고 나갈 것입니다.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창50:24,25)
400년 후에 요셉의 말대로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사건입니다. 이 때 모세가 무엇을 함께 메어갔습니까? 요셉의 해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출13:18,19)
누구 때에 이 큰 그림이 비로소 완성될 수 있었습니까? 여호수아입니다.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수1:2-4)
이 대목에서 한 번 묻겠습니다. 사실 이들은 모두 동시대에 산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일관된 방향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보여주신 하나의 큰 그림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의 큰 그림을 보았기에 그 안에서 자신이 맡은 부분을 성실하게 그려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령 여러 사람이 한 줄로 서서 한 장이 큰 종이에 ‘이어 그리기’를 한다고 쳐봅시다. 동시에 여러 사람이 그릴 수 없고 오직 한 사람씩만 차례대로 그릴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어 그리기’를 잘할 수 있을까요? 각자의 개성대로 그려나가면 될까요? 아닙니다. 그리 되면 그림은 절대로 조화를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찌 해야 합니까?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큰 그림을 보여준 후에 순서대로 그리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선배들이 시작한 그림을 우리가 이어서 그리고, 우리가 이어서 그린 그림을 우리의 후배들이 또 완성해나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앞 사람의 그림을 송두리째 무시하고 새로 그려나가야 할까요? 그래선 안 됩니다. 또한 우리 대에서 단 번에 모두 완성하려고 무리수를 두어야 합니까? 그래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맡은 부분만 그리면 되고, 나머지 부분은 우리의 후배님들에게 맡겨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무엇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까? 우리가 모두가 보아야 하고, 또 전해주어야 할 하나의 큰 그림입니다. 이를 보통 무엇이라고 부르기도 합니까? 교회의 비전이나 공동체비전입니다. 원컨대 지도자들은 이 비전을 보고 공유하기를 힘쓰고, 회원들은 이 공유된 비전 아래서 각자의 맡은 부분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준비 되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