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 한음 이덕형 3편
대사헌, 한성 판윤을 거쳐 병조 판서, 이조 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마침내 1602년 이덕형은 정치가로서나 벼슬아치로서 최고의 영광인 영의정이 되었다. 이덕형은 4년 동안 영의정의 자리에 있으면서 전쟁으로 피폐된 나라를 바로잡기에 힘썼다. 원만한 성품, 부드러운 리더십으로 인맥으로는 남인 계열에 들었으나 당색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정직하고 바른 정사를 폈다. 서인(西人)인 이항복과의 우정도 그런 자세의 결과였을 것이다.
이덕형은 남인이었지만 정치적으로 중립을 견지하며 광해군의 즉위에도 중요한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世子)를 세워 국본(國本)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하여 광해군이 후사로 책봉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그 뒤 1608년 선조가 붕어(崩御)하자 진주사(陳奏使)로 명에 파견되어 책봉 칙서를 받아온 것도 중요한 성과였다. 다섯 달이나 걸렸다는 사실은 그 임무의 지난(至難)함을 말해준다. 북인(北人)과 밀접하게 보이는 이런 행보는 장인이 북인의 거두인 이산해였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지만, 그보다는 이덕형이 당파를 초월한 중도적인 자세로 당색에서 상당히 자유로웠기 때문이라고 보여 진다.
하지만,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당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광해군을 지지한 북인(北人)은 왕위계승과 관련된 분쟁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선조의 적장자(嫡長子)인 어린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하고, 계비(繼妃)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이런 조처는 당연히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고, 신하들은 당파에 따라 찬반양론(贊反兩論)으로 첨예하게 대립했다. 1613년에는 영창 대군의 처형과 인목 대비 폐모론을 이항복과 함께 반대하다가 이에 삼사가 모두 이덕형을 모함하며 처형을 주장했으나, 광해군이 관직을 삭탈해 이를 수습하였다. 그는 광해군이 여러모로 빚어내는 마찰을 몸소 겪으면서 관계(官界)에 있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용진(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에 한음별서(別墅)를 짓고 물러나 있다가 병으로 52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 이항복도 같은 사건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망우리에 동강정사(東岡精舍)를 짓고 동강노인(東岡老人)이라고 자칭하면서 지냈다.
그 날의 《광해군일기》에는 그의 타계를 이렇게 기렸다.
『전 영의정 이덕형이 세상을 떠났다. …… 이덕형은 일찍부터 재상이 되리라는 기대를 받았다. 문학(文學)과 덕기(德器)는 이항복과 대등했지만, 관직은 이덕형이 가장 앞서 38세에 이미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임진왜란 이후 두드러진 공로를 많이 세워 중국과 일본 사람 모두 그의 명성에 복종했다. 사람됨이 솔직하고 까다롭지 않았으며 부드러우면서도 곧았다. 또 당론(黨論)을 좋아하지 않았다. ……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멀고 가까운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고 애석해 했다(1613년, 광해군 5년 10월 9일).』
- 4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