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철, “이제 심성락 샘 뵈러 가야죠?”…
‘다시 부는 바람의 노래’ 프로젝트 홍보
▲가수 이승철이 자신의 SNS에 ‘다시 부는 바람의 노래’ 악기 헌정 프로젝트를 알리고 있다. ⓒ이승철 트위터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알려진 가수 이승철이 “서로서로 칭찬합시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제 심성락 선생님 뵈러 가야죠?”라며 ‘다시 부는 바람의 노래’ 악기 헌정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마쳤음을 지난 22일 자신의 SNS에 알렸다.
‘다시 부는 바람의 노래’ 악기 헌정 프로젝트는 2016년 4월 말 ‘라잇 나우 뮤직 2016’ 공연을 앞두고 갑작스러운 화재로 모든 것을 잃은 아코디언 연주자 심성락을 위해, 페이퍼레코드레이블 대표 최성철과 후배들에 의해 텀블벅에서 진행된 후원 프로젝트다. 프로젝트에는 이승철 외에 김형석, 신승훈, 하림 등도 참여했다.
심성락은 나이가 80을 넘었고 새끼손가락이 절단됐으며 한쪽 귀는 난청이다. 그는 음악을 하는 데 있어 여러 장애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1976년에 데뷔해 ‘이필원과 미스틱무드 오케스트라’, ‘EBS space 공감’ 등에 꾸준히 출연했다. 화재 가운데서도 오히려 공연에 차질이 있을까에 더 마음을 써 많은 화제를 모았다.
올림픽공원에서 열렸던 한 공연의 스태프들은 심성락에 대해 “정성을 다해 공연할 뿐 아니라 한결같이 겸손한 분위기로 말씀하시는 것이 많은 이들을 울렸다”고 했다. 또 한 스태프는 “선생님께 음악뿐만 아닌 또 다른 감동을 배웁니다. 하루하루 겸손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며 실력과 겸손을 두루 갖춘 연주자라 평했다.
▲아이유와 심성락이 'Silent Night Holy Night' 곡을 공연하고 있다. ⓒ KBS '유희열의 스케치북' 방송캡쳐
그는 ‘인어공주’, ‘봄날은 간다’에 수록된 곡뿐 아니라 아이유와 함께한 ‘Silent Night Holy Night’, ‘이필원과 미스틱무드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주님의 은총’ 등을 발매했다.
특히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심성락과 함께 출연한 아이유는 ‘Silent Night Holy Night’을 부르며 “오랫동안 불린 캐럴을 심성락 선생님과 함께 부를 수 있어서 행복하고 감사했습니다”고 했다
한편 프로젝트를 통한 후원금의 90%는 악기 구입에 사용되며, 나머지는 후원자들과 함께하는 공연장 대관과 리워드 아이템 제작에 사용될 예정이다. 공연 일정은 오는 7월 14일 목요일이다.
출처: 크리스천 투데이
50년 동안 아코디언과 함께 걸어온 연주가 심성락 그의 바람 같은 인생
주름상자를 신축시키며 바람을 만들어 소리를 내는 악기 아코디언. 평소에는 들리지 않던 바람의 소리는 아코디언과 연주자를 만나 경쾌하거나 슬픈 소리로 다시 태어난다. 50년간 아코디언과 함께 음악인생을 살아온 연주가 심성락의 노래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파고들어 큰 여운을 남긴다. 그의 음악을 둘러싸고 있는 애잔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60년대 주현미, 나훈아부터 2000년대 가수 장윤정까지 최고 가수들의 노래를 연주하고 청와대 공식행사의 연주자로 있었던 심성락 선생님을 만났다.
심성락 약력
1936년 일본 교토 출생. 해방 이후 귀국.
1953년 경남고등학교 1학년 시절 부산 악기상에서 아코디언 독학.
1956년 논산 제2훈련소 군 예대 악장
1959년 부산 KBS, 부산 MBC, 부산 TBC 경음악단 멤버.
1965년 장충동 세션, 오르겐과 아코디언 전문 연주자로 독보적인 위치에 오름.
1966년 전자올겐 경음악 연주곡 앨범 발매.
1974년 청와대 행사의 오르겐 주자로, 박정희 대통령의 애창곡을 녹음한 것이 인연이 되어
1992년 김영삼 정부 초기까지 궁정동에서 대통령의 악사로 활동.
2000년 많은 영화음악 앨범에 참여. (인어공주, 봄날은 간다, 효자동 이발사 등)
2010년 그랜드민트페스티벌 ‘최고의 순간’, ‘최고의 공연’ 수상
제7회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회 특별상
2011년 아코디언 연주가로서 대한민국 최초 헌정공연
제2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국무총리표창
“초등학교 학예회 때 뭣 모르고 연주한 ‘선녀와 나무꾼’이 음악인생의 시작이야.”
▲ 심성락 선생님은 “어린 시절의 일도 생생하게 기억한다.”며 이야기를 풀어갔다 ⓒ(사)한국음악발전소
" 초등학교 시절 음악을 배워 본 적은 없지만 풍금이 좋았어. 그래서 풍금 청소는 내가 도맡아 했지. 청소하면서 조금씩 쳐 본 거야.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지나가다가 내가 풍금을 치는 모습을 보셨나봐. 학예회 연습을 하는데 ‘선녀와 나무꾼’을 부르게 되었거든. 갑자기 선생님께서 나보고 풍금을 연주하라는 거야. 난 풍금을 배워본 적이 없었어.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 그런데 그 선생님은 굉장히 무서운 분이어서 나와서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풍금을 쳤어. 그런데 신기하게 연주가 되더라고. 그러니까 친구들도 놀라고 나 자신도 놀랍고 신기했지. 어릴 때부터 음악이 좋다, 나쁘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기보다는 그냥 스스로 희한했어. 지금 생각해도 그게 어떻게 됐을까 신기하더라고. "
“내 음악인생의 걸림돌은 6.25전쟁과 사고로 잘린 새끼손가락.”
" 경남중학교에 들어가고 3개월 후에 6.25전쟁이 났어. 그래서 자연스럽게 음악과도 멀어지게 되었지. 고향이 경남 의령인데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이웃사람들에게 신 부잣집으로 불렸대. 그런데 전쟁이 나고 집안 사정이 많이 어려워지게 됐지. 그래서 학교 수업료를 제대로 못 내게 됐어. 다른 사람 같았으면 아마 신문 배달이라도 하고 그랬겠지. 그런데 우리 집안이 원래 그런 집안이 아니라서 어머니가 가만두지 않을 것 같더라고. 아르바이트는 꿈도 못 꿨지.
그래도 중학교 때 노래는 많이 들었어. 내가 어렸을 때부터 형님이 음악을 좋아해서 SP 판이 집에 많이 있었거든. 많이 들었기 때문에 또래 친구보다 음악에 대해서 더 관심이 생긴 거지. 그 시절에는 레코드가게 앞에 유리창에 가사가 적혀있는 음반광고전단이 붙어있었어. 가요를 좋아해서 신곡이 나오면 가게 앞으로 달려가서 홍보종이에 적혀있는 가사를 보고 손으로 적곤 했지. 가게 점원이 나랑 나이가 비슷한 친구였는데 계속 가게 앞에서 뭔가 적고 있으니깐 궁금했나 봐. 뭐하냐고 물어봐서 가사를 적는다고 했지. 그러니까 책상 밑에서 음반회사에서 주는 가사가 적힌 음반홍보물을 주더라고. 이제는 손으로 적지 않아도 되니깐 정말 고마웠지.
사실 경남중학교 시절 야구부 투수 친구가 있었어. 노래를 참 잘 불렀지. 그 친구 집에 자주 놀러 갔는데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더라고. 기타를 배우고 싶었는데 그 친구가 왼손잡이라 기타를 반대로 치더라고. 그런데 난 어릴 때 동네 친구들 싸움을 말리다가 깨진 창문에 오른손 새끼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를 당해서 기타 코드를 짚을 수가 없더라고. 아쉽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 "
“아코디언을 처음 본 순간 금방 칠 수 있을 것 같았어.”
" 어느 날 내가 자주 다니던 레코드가게에 악기상이 들어오게 됐어. 그런데 그 가게에 아코디언이 있는 거야. 딱 보니까 피아노나 오르겐 건반이랑 똑같이 생겨서 몇 번 연습하면 금방 될 것 같더라고. 나는 그 가게에 살다시피 해서 사장님들이 자리를 비울 때 가게를 대신 봐주곤 했거든. 그때마다 몰래 아코디언을 연주해본 거지. 한번은 하다 보니깐 연주가 잘돼서 주인이 오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걸렸어. 처음에는 손님이 와서 연주하는 줄 알았데. 크게 혼날 줄 알았는데 나를 귀여워하셔서인지 잘한다고 칭찬해주셨지. "
▲ 부산 KBS 노래자랑 당시 아코디언 연주를 하던 심성락 선생님 ⓒ(사)한국음악발전소
" 아코디언을 그렇게 배워가던 중에 부산 KBS방송국에 노래자랑 프로그램이 생겼어. 반주가 필요해서 아코디언과 기타연주가 두 사람이 했었지. 그런데 그 사람들이 미군 부대에서 연주를 하던 사람들이라 우리 가요를 모르는 거야. 전주가 원곡과 달라서인지 사람들이 노래를 시작하지 못 했지. 3주를 그렇게 진행하다가 악기상 사장님이 노래자랑 심사위원에게 가요를 많이 듣고 아코디언을 연주하던 나를 추천했어. 지금 생각하면 정말 말도 안 되지. 초등학교 때 우연히 연주했던 풍금처럼 정말 생각지도 않았던 일을 하게 됐지. 난 가요를 좋아해서 웬만한 곡을 다 외우고 있어서 전주를 그대로 해주니깐 그때부터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더라고. "
“명문고에서 퇴학당한 후 본격적인 악사의 길로 들어갔어.”
▲ 그는 연주할 때 오로지 멜로디에만 집중한다고 말한다 ⓒ(사)한국음악발전소
" 어린 나이지만 노래자랑 반주를 하니 본격적인 악사가 된 거지. 그때부터 아코디언 연주를 직업으로 생각하게 됐어. 그래서 그 이후로 더 열심히 곡을 외우고 연습했어. 음악을 듣기 위해 음악다방에 살다시피 했지. 음악다방에 클래식이 나오다가 갑자기 다른 음악이 나오면 내가 왔다는 걸 안에 있던 손님들이 알 정도였으니까. 가만히 앉아 있다가 좋은 노래가 나오면 DJ에게 방금 틀어준 곡목을 알려달라고 메모를 적어 보내면 친절하게 알려줬었어.
고등학교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안 나가니까 무단결석으로 퇴학을 당했어. 내가 어머니에게 퇴학당한 이야기를 했겠어? 어머니는 내가 뭐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다가 몇 년 후에 우리 집이 이사를 한 후에 아셨지. 방송국장님이 우리 집에 차를 타고 나를 데리러 오고 하니까 어머니가 아시게 됐어. 집이 힘들었던 당시 방송국에 나가서 또래보다 많은 돈을 벌어오니 별말씀은 없으시더라고. 우리 형님도 처음에 내가 음악을 한다는 사실이 우스웠는지 나를 하숙생 작곡하신 김호길 선생님께 데려갔어. 카바레에서 일하고 계셨는데 나를 무대에 세우시고 연주를 해보라고 하시더라고. 무대를 마치고 내려오니 선생님께서 “그만하면 음악 해도 되겠다.”고 인정해주시니깐 형님도 인정을 해줬고. 그때부터 아코디언 연주가 완전히 내 직업이 되었지. "
“군예대에서 악장을 맡은 경험과 녹음실 세션맨 생활은 내 음악인생에 큰 밑거름이 되었지.”
" 형님의 권유로 군예대에 들어가게 됐어. 나는 눈 때문에 면제판정을 받아서 입대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지만 당시 어머니 생활비를 안정적으로 보내드리기 위해 들어가기로 했지.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사람이 별로 없던 때라서 군예대 대장을 맡은 소령도 간곡히 부탁했었어. 그런데 얼마 후 원래 악장을 맡은 사람이 술을 먹고 실수해서 잘렸어. 군예대 대장이 나에게 악장을 맡아달라고 하더라고. 내 나이 21살이었는데 군예대 악장이 되어버렸어. 책임감이 강해져서 음악공부를 시작했지.
논산삼거리 시골인데 책을 어디서 사야 할지 모르겠거든. 지나가던 학생을 불러서 혹시 학교에서 음악책 보고 공부 하느냐고 물었지. 화성악책을 주더라고 그래서 매일 밤잠을 줄여가며 책을 읽기 시작했어.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더라고. 그런데 같은 책을 두 번, 세 번 읽으니깐 점점 이해가 되는 거야. 또 사회에서 음악생활을 하던 군예대 사람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받았지. 하나하나 가르쳐줄 때마다 배운 내용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어. 어린 나이에 악장을 맡았지만 주위 사람들이 많이 도와주었기 때문에 잘해나갈 수 있었지. 2년 7개월 정도 활동을 하다가 군예대가 해체 돼서 부산에 내려가 어머니를 모시면서 카바레에서 일했어.
그렇게 카바레에서 일하다가 지구레코드사 사장님 권유로 서울로 올라가게 됐지. 지금의 실력을 쌓은 것은 이때 녹음실에 세션맨으로 들어가면서 대가들과 함께 연주하며 보고 배웠기 때문이지. 그때는 50명이 함께 연주하는데 한 사람이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해서 분위기가 심각해졌어. 그래서 항상 긴장하고 집중하면서 연주하다 보니 실력이 늘더라고. 그냥 연주만 한 것이 아니고 악보를 보면서 왜 이런 식으로 음이 흘러갈까 생각하면서 연주하다 보니 자연히 작곡공부가 되었고. 계속 고민하고 생각해보니깐 다 되더라고. 그렇게 노력하지 않으면 도태 돼서 음악을 할 수 없던 시절이었어.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평생을 대가들과 함께 해왔기 때문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오늘의 내가 있는 것 같아.
그러다 아시아 레코드 사장님의 제안으로 이봉조 씨와 ‘경음악의 왕’이라는 음반을 내게 되었지. 사실 녹음하는 날 이봉조 씨가 개인 사정으로 못 와서 따로따로 녹음했던 음반이야. 어찌 됐건 그 당시 대박이 났지. 그런데 지금 들으면 얼굴이 붉어지더라고. 참 이상하게 했었지. 그때는 뭣도 몰랐어. 내 기분에 들떠서 하라니까 했고 잘 팔려서 기분이 좋았고. "
“20년간 하루의 대부분을 녹음실에서 보냈어.”
▲ “나에겐 녹음실이 양지였어. 조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았지.” ⓒ(사)한국음악발전소
" 65년 장충동 세션에 들어가면서 바빠졌지. 한 달에 60번 이상 녹음 한 적도 있어. 애인도 보고 싶고 지쳐서 녹음하기 싫어질 때는 다음날 녹음이 취소되길 기도하기도 했지. 거의 20년을 그렇게 살아온 것 같아. 멀리 떠나지도 못하고 휴가도 못 가고 개인 생활이 없었지. 60년대 뽕짝으로 시작한 우리나라 가요의 전성시대가 트위스트, 소울, 고고, 디스코로 이어졌지. 장르가 많이 바뀜에 따라 연습도 게을리 할 수 없었어. 그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면 밀려나거든. 내가 클래식 공부를 했으면 이렇게 여기저기서 찾아주지 않았을 거야. 나는 연주할 때 탱고를 접목했거든. 굉장히 감정이 풍부한 음악장르야. 그런 감정이 있었기 때문에 나를 좋아했던 것 같아. 덕분에 남진, 나훈아, 심수봉, 주현미, 송대관, 태진아, 최백호, 신승훈, 김건모, 이승철, 장윤정 등 수많은 가수의 앨범에 참여할 수 있었지.
나에겐 무대보다 녹음실이 양지였어. 항상 시험을 치러 가는 기분으로 녹음실에 들어갔지. 어떤 곡을 연주하던 힘들었지. 간다한 노래일수록 어렵더라고. 간단한 노래라고 간단하게 연주하면 재미없거든 감정을 살리기 위해서 나름대로 가사를 집어넣어 그 장면을 상상하면서 연주를 했지. 연주도 노래와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연주할 때는 멜로디에 온 정성을 쏟았지. "
“중학교 시절 본 영화 ‘슈베르트 세레나데’의 음반을 연주해보고 싶었는데...”
" 2000년대에는 ‘인어공주’, ‘봄날은 간다’, ‘효자동 이발사’ 영화에 참여했지. 그런데 영화를 보진 못했어. 그러고 보니 극장가본지 오래됐네. 기억에 남는 영화는 중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극장에 놀러 갔을 때 본 ‘슈베르트 세레나데’였어. 어린 나이였지만 영화에 나오는 멜로디가 그렇게 가슴을 울리더라고. 그 영화 속 음반을 꼭 연주해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지. 주로 가수들의 노래에만 참여했었으니깐. "
“음악이 싫어진 나의 마음을 돌려놓은 것은 후배들과 젊은 팬들이야.”
▲ “음악은 호흡이야.”라고 말하며 항상 전체적인 조화를 생각하는 선생님은
무대 앞에 서기보다 뒤에서 맞춰 주는 것이 편하다고 말한다 ⓒ(사)한국음악발전소
" 시간이 흐르면서 아코디언이 무거워지고 찾아주는 곳도 많지 않게 되면서 음악을 그만둘까 진지하게 고민했었지. 평생을 함께해온 음악에 환멸을 느끼게 되는 사건도 있었고. 2010년 10월 KBS 가요무대를 끝으로 그만두겠다고 다짐했어. 방송국에서 전화가 와도 악기를 팔았다고 둘러대면서 거절했지. 그때는 그만큼 음악이 싫었어.
이 마음을 바꾸게 된 계기는 ‘유희열의 스케치북 100회’에 출연하게 되면서였던 것 같아. 후배들과 함께 무대에 올랐는데 아직 내가 음악을 좋아했는지 무대에서 후배들과의 그 호흡이 좋더라고. 그리고 젊은 관객과 호흡하는 기분도 좋았어. EBS ‘스페이스 공감’에 출연했을 때 연주를 하다가 바로 앞줄에 사람들이 내 음악을 듣고 감동하는 모습이 보이니 나도 감정이 더 좋아지더라고. 연주가 끝나고 그 모습이 고마워서 앞줄에 앉은 관객 한 사람 한 사람 다가가 악수를 했지.
2010년에는 ‘그랜드 민트 페스티벌’ 무대에도 오르게 됐어. 그때는 내가 젊은 사람 틈에 끼어서 음악을 한다는 것이 우습기도 하고 걱정도 많이 됐지. 내 음악을 젊은 사람들이 좋아해 줄까 걱정됐고 지금 그들의 삶과 내 삶도 많이 달라서 감정 전달이 잘 될 수 있을까에 대해 의문이었거든. 그런데 뜻밖에 많이 좋아해 주시더라고 ‘최고의 공연’, ‘최고의 순간’ 두 개의 상도 받았지. 지금은 젊은 사람들이 내 음악을 더 많이 좋아해 줘. 세상일은 참 알다가도 모르는 거구나 다시 느꼈지. 음악을 그만뒀다면 이런 일이 있었을까? 사무실에 요청해서 인터넷에 나에 대한 댓글을 모아달라고 요청해서 집에서 보거든. 보물단지로 갖고 있어. 처음에는 그 글들을 보면서 울었어. 정말 눈물이 나오더라고. 정말 고마웠고 다른 세상을 알게 됐지. "
▲ 그의 헌정공연에는 2,800명의 관객이 찾아왔다 ⓒ(사)한국음악발전소
" 한국음악발전소 최백호 소장과 후배들의 헌정공연 제안이 들어왔을 때 깜짝 놀랐어. 정말 고마웠어.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는 헌정공연을 한 사람이 없었거든.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한다 해도 딱 한 번뿐인 기회잖아. 헌정공연 이후에 이제는 후배들에게 갚아줄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게 됐지. "
“이제는 내 몸도 늙고 아코디언도 헐었어.”
▲ 다른 악기와 함께 하는 음악이 더 즐겁다고 말하는 연주가 심성락 ⓒ(사)한국음악발전소
초등학교시절 담임선생님의 지시로 친 풍금으로 시작해 50년을 음악과 함께해온 연주가 심성락. 음악이 뭐라고 생각 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호흡’이라고 답했다. 언제나 혼자 연주하는 것보다는 다른 악기와 함께 어울려 음악을 할 때 즐거웠다는 그는 다른 사람의 소리를 더 돋보이도록 연주할 줄 알았다. 이제는 악기도 자신의 몸도 헐었다고 말하는 그의 꿈은 새 아코디언으로 좋은 소리를 내보는 것.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은 그의 인생이지만 그때마다 음악으로 극복해냈기에 이제는 헐어가는 아코디언으로도 그의 음악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해주는 것은 아닐까? 음악에 대한 환멸로 힘든 시기를 겪고 있지만 그가 언젠가 좋은 악기로 무대에 올라 세대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의 가슴에 그의 삶이 담긴 바람 소리를 남기는 모습을 기대한다.
첫댓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대 선배님휼륭한 일들을 하고 있는 후배들에게 를 보냅니다
대단하신 분께서 기회 있을 때마다 대장님과 함께하신 앨범에 대해 말씀하시는 걸 여러 번 들었기에 자료 올려보았습니다.
예전에 뵈었을 때 음악에 대한 소신을 여실히 느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