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십 고개를 거의 다 올라온 나는 잠을 놓친 밤이면 벽위에 매미같이 달라붙은 전자시계의 녹색 숫자판을 보면서 과거를 한 페이지씩 되돌려 본다.
‘일생 살아온 중에서 가장 기뻤던 일이 뭐였지?’
그런 생각을 종종 한다. 눈 위에 다시 내리는 눈 같이 다른 생각이 다시 조용히 와서 내려 앉는다.
‘돌아가신 어머니와 아버지를 가장 기쁘게 해드렸던 일이 뭐였지’
그 중의 하나가 치열한 명문이라고 불렸던 경기중학교의 입시에 합격했던 순간이었다. 함경도에서 혼자 서울로 온 어머니는 품팔이 뜨개질을 했었다. 거친 성정의 어머니는 싸움을 피하지 않았다. 항복이라는 걸 모르는 성격이었다. 그 댓가로 수없이 많이 얻어 맞았다. 어머니는 배우지 못했다고 무시당할 때 마다 악에 바친 듯 소리쳤다.
“이놈들아 내 자식을 너희보다 몇 십배 잘 가르쳐서 훌륭한 사람을 만들어 낼 테다.”
어머니는 어디서 그런 얘기를 들었는지 초등학교시절 나보고 꼭 경기중학교에 들어가야 한다고 다구쳤다. 개천에서 벗어나려면 명문중학교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새벽 네시 교회의 차임벨이 울릴 무렵이면 나를 강제로 깨웠다. 그리고 책상에 앉혔다. 그렇게 하루 종일 공부를 해야 했다. 책상에 앉아 졸고 있으면 어머니는 나를 끌고 마당의 수돗가로 갔다. 어머니는 함석으로 만든 빠께스에 찬물을 담아 나에게 뒤집어 씌웠다. 나는 내가 왜 공부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공부하는 방법도 입시에 대응하는 요령도 몰랐다. 그 당시도 부잣집 아이들 사이에 일류과외라는 게 있었다. 출제 경향도 분석하고 시험위원들이 문제를 낼 때 참고하는 일본의 여러 서적에 관한 정보도 파악해서 합격의 지름길을 알려주는 과외였다. 욕망만 있을 뿐 우리 모자가 그런 걸 알 리가 없었다. 그냥 무조건 통째로 교과서든 전과든 다 외우자는 방식이었다. 강추위가 닥친 날 중학입시를 치렀다. 그리고 나는 시험에서 떨어졌다. 어머니는 나를 때렸다. 나는 왜 얻어맞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몇 달 후 신학기가 됐다. 우연히 버스 안에서 경기중학교 교복과 뱃지를 단 아이를 보았다. 버스 안의 부모 또래의 사람들이 경이의 눈으로 그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교복도 없고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었다. 낙오자가 된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당시는 재수학원도 없었다. 어머니는 전학문서까지 위조해서 나를 다시 서울 변두리의 초등학교에 넣었다. 나는 그제야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어렴풋이 알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렸던 그 시절 같이 공부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 동네에서 몇 명의 아이들이 모여 하는 과외공부도 했다. 그리고 이듬해 다시 경기중학교 입시에 도전했다. 같이 공부하던 동네 아이들이 라디오에서 나오는 합격자 발표를 함께 듣고 있었다. 나의 수험번호인 ‘542’가 나오자 환성이 터져 나왔다. 감격한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과외선생님에게 엎드려 절을 했다. 싸움닭 같던 어머니가 누구에게 합장하면서 허리를 굽히는 건 처음 보았다. 칠십의 인생 고개에서 그날이 가장 기쁜 날이었다.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기쁘게 한 날인 것 같기도 하다. 얼마 전 나이 팔십을 바라보는 선배인 박경재 변호사와 점심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나의 시각으로 그는 좋은 것은 다 쥐어본 사람 같았다. 경기중고교와 서울법대를 졸업했다. 행정 사법 고시 양과에 합격했다. 경제기획원 관료도 해보고 검사도 했다. 허버드 대학에 유학을 하고 돌아와 시사토론자로 사회명사가 됐다. 서울시장 소리가 나오고 한때 정계진출에 뜻을 두기도 했다. 그는 부자이기도 했다. 그에게 인생에서 언제가 가장 즐거웠고 부모를 즐겁게 했느냐고 물어보았다.
“내가 경기중학교에 들어가니까 말이야 아버지가 하루는 말이 없이 교복을 입은 내 손을 잡고 종로 일가의 신신백화점 블록을 두 번이나 걸어서 도시는 거야. 나중에 보니까 너무 좋아서 아들을 자랑을 하려고 그러신 거지. 그때 가장 좋아하셨던 것 같아.”
경기중학교는 없어진 지가 오십년이 훨씬 넘는다. 사람들의 기억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땀 흘려 얻은 인생의 첫 성취를 잊을 수가 없다.
첫댓글물런 훌륭한 수재였겟지만 요새같은 system, 과외, 수능, 해마다 70만의 자유경쟁입시에도 가능하셨을까 생각해본다. 혹시 긋땐 만명의 그런분 어머니가 요새의 70만 어머니루 변한건 아닐까? 우리의 축복은 그런 어수룩한, romantic한 시대에 큰, 영양가 많은 유년기선물을 받은건 아닐까 싶다.
첫댓글 물런 훌륭한 수재였겟지만 요새같은 system, 과외, 수능, 해마다 70만의 자유경쟁입시에도 가능하셨을까 생각해본다.
혹시 긋땐 만명의 그런분 어머니가 요새의 70만 어머니루 변한건 아닐까?
우리의 축복은 그런 어수룩한, romantic한 시대에 큰, 영양가 많은 유년기선물을 받은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