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그들은 케이시 뒤로 돌아가 바텐더에게 딱 한마디 말을 던졌다. 그러자 바 텐더가 바 아래 숨겨뒀던 무기를 하나 둘 꺼내기 시작했다. 바로 놈들의 무 기였다. 그들은 정치적인 이유에서 권총을 차지 않았을 뿐이지, 정말 무장을 해제한 것은 아니었다. 결투 상대로 결정된 사람은 메이슨이었다. 무시당한 제스로가 입술을 툭 내 밀고 한바탕 불평을 쏟아놓으려 했지만, 그 형인 제드가 단호한 시선으로 기 선을 제압하며 공개적인 장소에서 소란을 떨지 못하게 했다. 그들이 권총에 장전하는 동안 케이시는 속으로 온갖 궁리를 다했다. 과연 이번 결투가 공정해질 수 있을까? 그들은 케이시에게 무기를 집으라고 권했다. 하지만 그 탄창이 비었다 해도 놀라지 않으리라. 그녀는 그 제의를 거절하고 손가방에서 무기를 꺼냈다. 잠 깐 시간을 얻어 옷을 갈아입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말해봤자 통할 것 같지 않았다. 케이시 자신도 드레스 위에 권총 벨트를 차는 기분이 묘했으니 잭 일당이 히죽거리며 비웃는 것도 당연했다. 그들의 표정에는 케이시가 총 에 대해 뭘 알랴, 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밖으로 나와, 케이시는 길 한복판으로 갔다. 메이슨이 마지막으로 살롱을 나왔다. 그는 키가 크고 날렵한데다, 어깨에 닿을 만큼 흑발을 기르고 콧수 염을 말끔하게 손질했다. 쌀쌀한 냉기가 감도는 10월 날씨에도 코트를 벗은 차림이었다. 화려하게 수놓은 조끼를 받쳐입은 정장 위에 쌍권총을 찬 모양 새가 케이시만큼 부자연스럽게 보였다, 문명과 야성을 동시에 갖췄다고나 할 까.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간파한 것처럼 허둥지둥 몸을 피했다. 주변은 삽시간에 한적해져 간조 때의 바다를 연상시켰다. 잭의 패거리들이 총을 차 고 등장하자마자 벌어진 일이었다. 케이시는 속으로 생각했다. 잭이 이 읍에 도착한 이래 바넷 살롱 밖에서 얼마나 많은 혈투가 벌어졌을까? 그녀의 아버지가 이 일을 안다면, 볼기가 퉁퉁 부을 정도로 매질을 할 것이 다. 무법자를 추적하는 일과 결투는 전적으로 다른 문제였다. 챈도스는 오래 전, 삶의 다양한 측면에 대해 철저하게 가르쳤고, 케이시는 그 지식을 수배 범 추적에 유용하게 써먹었기 때문에 적이 총을 겨눌 기회조차 주지 않고 상황을 제압했다. 설령 그들이 총을 뽑는다 해도 그녀의 총구가 먼저 불을 뿜었으므로 결투까지 이른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므로 저만큼 떨어진 적과 눈싸움을 하며 총을 뽑을 기회를 주는 이 상 황은 매우 어렵고 이례적이었다. 그녀는 총을 빨리 뽑는데다 과녁을 정확하 게 맞혔다. 하지만 멍석이 깔린 곳에서 실력을 발휘하려니, 왠지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다. 더구나 벅키와 그 짝패들 말에 의하면, 샌더슨에서 메이슨이 명사수로 소문이 자자하다고 했다. 손바닥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이런 제안을 하다니, 정말 미친 짓이었어. 이보다 훨씬 안전하게 바넷 살롱을 빠져 나올 수도 있었는데. 제대로 생각할 시간만 있었다면 말이다. 차라리 비명을 지르면서 협박당한 여인네 시늉을 내는 편이 좋았을까? 그랬더라면 누군가 그녀를 방어하기 위해 나섰을 테 고..., 그녀와 함께 총에 맞아 죽었으리라. 안 돼, 이런 생각은 금물이야. 그녀 는 저승사자를 눈앞에 둔 기분이었다. 하지만 케이시에 비해 메이슨은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일에 익숙한 전 문가, 바로 그런 타입이었다. 케이시도 겉으로는 침착해 보였지만, 내심 속마 음을 숨기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짜는 중이었다. 사실 지금 이 순간보다 더 신경이 날카로웠던 때가 없었다. 그녀는 메이슨의 차갑고 흔들림 없는 눈을 응시했다. 그는 눈 한번 깜박하 지 않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내였다. 태어날 때부터 비정한 사람이 있기 마련인데 메이슨이 그런 범주에 속했다. 하지만 일이 순간적으로 벌어지는 통에 그녀는 더 이상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가르침을 받 았던 대로 행동했다. 그녀의 스승은 탁월했다. 여전히 서 있는 쪽은 케이시오, 쓰러진 쪽은 메이 슨이었다. 그녀는 너무 쉽고 바르고 간단한 결말에 놀란 나머지, 잭의 패거 리 중에서 가장 어린 제스로가 총을 겨누는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 만 제스로가 총을 뽑자마자, 케이시 왼쪽에서 라이플이 발사되었다. 제스로 는 오른손에 총을 맞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짝패들이 일제히 무기를 들고 보복에 나섰다. 케이시는 얼른 땅바닥을 구르며 총을 발사했다. 게다가 조금 전 그녀의 생 명을 구한 미지의 라이플까지 가세하여 연발 사격을 퍼붓는 통에 살롱 앞을 장악했던 잭의 패거리들이 도망가기 시작했다. 놈들이 퇴각하는 중에 간간이 되쏘는 총알은 사정거리에 미치지 못했다. 케이시는 그 라이플의 주인이 누 구인지, 어디에 숨어 있는지조차 짐작하지 못했다. 아마 이 읍 주민 중 한 사람이 여성을 괴롭히는 제드 일당에게 분개한 나머지 행동에 나선 모양이 었다. 총탄을 피하는 것도 좋지만, 너풀거리는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대로에 계 속 누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미지의 라이플 사수가 후방을 맡은 틈을 타, 재빨리 일어나 바넷 살롱 쪽으로 달려갔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숨을 돌리려는 찰나, 그녀를 죽일 듯 노려보는 데미안과 눈이 마주쳤다. 그야말로 여우를 피하려다 사자를 만난 꼴이었다. 지금은 안 돼요. 데미안이 살기 등등한 표정으로 비난을 퍼부으려 하자, 케이시가 먼저 선수 를 쳤다. 마침 그들 옆 창문이 적의 포화로 요란하게 흔들렸다. 데미안은 그녀의 말 에 동의하고 창가로 가서 라이플을 쏘아댔다. 케이시는 정신을 가다듬고 밖 의 동정을 살폈다. 갈비뼈가 부러진 엘로이 벤처가 민첩하게 행동하지 못하 고 데미안의 총에 무릎을 맞았다. 그는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몸을 꺾었다. 캔디맨은 살롱 계단 위에 대자로 뻗어 있었다. 죽은 게 확실하다. 그녀와 결투했던 메이슨은 여전히 길거리에 쓰러져 있었다. 정말 죽었을까? 설령 그 렇다 해도,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나머지는 살롱 안으로 침입을 시도하는 중이었고, 최소한 한 명은 문 뒤에서 총을 쏘고 있었다. 이 상황을 당신이 기억을 회복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까? 데미안이 총을 쏘는 사이에 물었다. 처음부터 기억을 잃지 않았어요. 그가 코웃음을 쳤다. 그럼, 무슨 마음을 먹고 이런 짓을 벌였소? 내가 도전을 피할 사람처럼 보여요? 나는 이곳에서 당신이 나타나기를 기 다리며 시간을 죽이는 동안 잭에게 정보를 빼내려고 했어요. 남자들이란 관 심을 보이는 여자들에게 허풍을 떨기 마련이잖아요. 하지만 내 드레스 차림 이 그다지 유혹적이지 않았나봐요. 정말 녀석들이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리라 생각했단 말이오? 데미안이 험악한 시선으로 그녀를 째려봤다. 케이시의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당신이 잭과 대질했던 첫날, 그들은 나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어요. 당 신은 그들의 자금 공급원을 체포하겠다고 엄포를 놓았고, 모든 시선은 당신 에게만 맞춰졌다구요. 나는 그저 우연히 당신 옆에 붙어 있던 조무래기에 불 과했어요. 그래서 그들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리라 생각했죠. 그리고 정말 그 랬어요, 처음에는. 그 다음 일은 당신 상상에 맡기겠어요. 잭은 내가 비밀을 캐려던 걸 알아차리고 펄쩍펄쩍 뛰며 화를 냈어요. 데미안은 더 이상 언급을 회피했다. 하지만 창 밖으로 총을 두어 방 더 쏜 다음에 그녀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아무튼 저기..., 당신 드레스 차림이 굉장히 아름답소. 이번에 케이시는 마음껏 코웃음을 쳤다. 흥! 그런 말은 서커스 광대에게나 해요. 지금 뭐라고 했소? 아니, 남이 기껏 칭찬을 해줬더니 고마워하기는커녕 면 박이나 주기야? 그게 아니에요. 당신이 칭찬해줬다고 면박을 주는 게 아니라, 내가 형편없 는 머저리 같은 기분이 들어 그런 거예요. 참, 예비 탄약 있어요? 케이시는 마지막 탄약을 장전하며 물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살롱 뒤쪽에서 탄약 한 상자가 공급되었다. 얼굴이 하 얗게 질린 요리사가 그녀에게 바치는 찬사였다. 그리고 데미안이 그녀의 원 래 권총을 던져줬다. 이제 여분의 화력과 탄약까지 확보하자, 케이시의 마음 이 든든해지고 이 위기를 승리로 이끌 자신이 생겼다. 우리 중 한 사람은 살롱 뒷문으로 빠져나가서 적의 후방을 공격해야 해요. 놈들이 눈치채기 전에요. 케이시는 말을 하며 손가방에 여분의 권총과 탄약을 넣고 가방을 어깨에 둘렀다. 우리 중 한 사람이라니? 당신이 나서겠다? 관둬. 나는 눈에 흙이 들어가는 한이 있어도 당신을 눈 밖에 내놓지 않겠소. 그런데 망할 놈의 보안관은 꼭 필요할 때 어디 처박혀 있는 거야? 때맞춰 낚시를 갔겠죠. 하지만 이런 불공평한 총싸움 한두 번 본 것도 아 닐 테고, 보안관들 여기 있다 해도 저놈들에게 합세할 공산이 높아요. 그러 니 차라리 없는 편이 나아요. 그 얘기는 나중으로 미룹시다. 왜요? 패거리 중 한 명이 지금 막 살롱 옆 골목으로 돌아갔거든. 아무래도 놈들 이 철수하는 것 같소. 케이시는 다시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정황을 살폈다. 그리고 시험 삼아 총을 함 방 쐈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딱 한 사람만 봤어요? 케이시의 콧잔등에 주름이 생겼다. 뒷모습을 겨우 봤을 정도요. 그러니까 나머지 두 사람은 이미 도망갔을 거 요. 케이시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신은 나를 혼자 밖으로 내보내지 않겠다고 했으니, 우리가 함께 뒷문을 통해 마구간으로 가서 그들을 일망타진하는 게 어때요?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요. 어서 갑시다. 마구간은 한 블록 반 너머에 있었다. 으슥한 뒷골목도 아닌 주택가를 살그 머니 빠져 나가려니 피치 못하게 울타리를 뛰어넘어야 했다. 데미안은 별 무 리 없이 장애물을 뛰어넘었다. 하지만 케이시는 거추장스러운 드레스 때문에 데미안의 도움을 받다 장애물을 넘었다. 데미안의 논리에 의하면 드레스를 걸친 여성은 숙녀다운 대접을 받아야 한다나. 케이시는 질린 나머지 두 번 다시 불평하지 않았다. 힘들게 마을로 돌아와서 그녀가 결투 중인 것을 발견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남자의 행동치고는 참으로 황당했다. 케이시는 일단 참았다가 나중에 호 되게 쏘아주리라 마음먹었다. 옷차림이 한 인간의 능력이나 자질을 규정할 수 없었다. 케이시야말로 그 점을 증명하기 위해 가출한 몸이 아니던가? 아무튼 마구간이 저만큼 보였다. 그 뒷문 주변을 말이 뛰노는 곳이었고 가 장자리에 울타리가 쳐 있었지만, 총알이 빗발치는 가운데 앞문을 정면 돌파 하는 것보다 훨씬 잠입하기 쉬웠다. 잭과 페이슬리 형제가 이미 도착했다면 곧 총격전이 전개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곳이 그들의 최종 목적지니까. 하지 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안에서 마구간 주인은 평화롭게 마사에 건초 를 깔고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마구간 주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치고 지나치 게 몸이 굳어 있었다. 케이시와 데미안은 총을 겨냥하고 발사할 준비를 갖췄 다. 한 발짝 더 떼었을까? 케이시는 데미안의 팔을 잡고 발걸음을 말리려고 했 지만 그가 훨씬 앞에 서 있었다. 위기를 직감한 그녀는 소리를 지를 겨를도 없이 몸을 던져, 두 사람은 땅바닥을 굴렀다. 그와 동시에 총알이 그들 곁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마구간 주인은 비명을 지르며 활짝 열린 앞문으로 달아났다. 데미안이 왼쪽 으로 구르며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헛방질을 한 반면, 케이시는 오른쪽으로 몸을 굴렸다. 불행히도 바닥에 누운 그녀 눈에 잭의 신코가 들어왔다. 잭은 케이시의 목에 총구를 겨누며 위협했다. 총을 버려! 잭의 명령은 그녀의 본능과 대치되었지만, 목숨을 구하기 위한 방편으로 어 쩔 수 없이 그 말에 복종했다. 잭은 작달만한 몸집과 어울리지 않는 센 힘을 과시하며 케이시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물러서라, 루트리지. 그렇지 않으면 당장 이년 숨통을 끊어놓겠다. 잭은 큰 소리로 데미안에게 경고했다. 우리는 이년을 인질로 삼아 데려가겠다. 네가 따라오면, 이년이 죽는다는 사실을 명심해! 데미안은 그들을 노려보며 케이시를 피해 잭을 쏘아 맞히는 방법을 간구했 다. 하지만 케이시가 표적보다 키가 큰데다, 문제의 그 표적이 그녀를 방패 막이로 삼아 몸을 숨겼으므로 방법이 없었다. 케이시는 데미안에게 총을 쏠 기회를 주기 위해 몸을 숙이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페이슬리 형제가 데미 안에게 총을 겨누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케이시의 목숨을 담보로 잡고 있는 한, 데미안이 꼼짝도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무기를 버리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 고 정말 데미안은 손에 권총을 쥐고도 이빨 빠진 사자처럼 맥을 못 췄다. 케이시는 잭의 말에 태워졌다. 등뒤에 걸터앉은 잭이 여전히 그녀에게 총구 를 겨눴다. 그야말로 절대절명의 위기 상황이었다. 잭이 그녀를 인질로서 소 용없다고 생각하고 방아쇠를 당기게 될 때는 언제일까? |
첫댓글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