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1/17 순국선열의 날, 폐암 퇴치의 날, 기네스 세계기록의 날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루스벨트
2013 - 빙속 이상화, 이틀 연속 500m 세계신기록…36초36(종합) '빙속 여제' 이상화(24·서울시청)가 월드컵 시리즈에서 멈출 줄 모르는 신기록 행진을 이어갔다. 이상화는 17일(한국시간) 미국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열린 2013-2014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스피드스케이팅 월드컵 2차 대회 여자 500m 디비전A(1부리그) 2차 레이스에서 36초36 만에 결승선을 통과했다. 전날 36초57의 기록으로 세계기록을 작성한 이상화는 하루 만에 다시 자신의 기록을 0.21초나 단축했다. 이상화는 올해 1월 36초80의 기록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최근 네 차례나 세계기록을 연거푸 갈아치우며 절정의 기량을 뽐내고 있다. 이상화가 달릴 때마다 여자 500m에서는 새로운 역사가 펼쳐지고 있다. 지난해까지 이 종목 세계기록은 위징(중국)이 작성한 36초94였다. 이는 처음으로 여자 선수가 36초대에 진입한 기록이기도 했다. 이상화는 올해 들어 네 차례나 세계기록을 갈아치우며 여자부의 최고 기록을 36초30대까지 단축했다. 특히 2014 소치 동계올림픽이 열리는 이번 시즌에는 '기록의 산실'인 캐나다 캘거리와 미국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열린 월드컵 1∼2차 대회에서 네 번의 레이스 중 세 번 신기록을 작성하는 기염을 토했다. 금메달은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월드컵 포인트 400점을 쌓은 이상화는 2위 왕베이싱(중국·280점)을 멀찍이 제쳤다. 최상의 빙질을 자랑하는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이날도 헤서 리처드슨(미국)이 36초90의 개인 최고 기록을 작성하는 등 여러 선수가 선전했다. 그러나 이상화의 실력은 이를 뛰어넘기에 충분했다. 마지막 조에서 예니 볼프(독일)와 함께 달리며 아웃코스에서 출발한 이상화는 전날 자신의 최고기록(10초16)보다 100분의 7초를 줄인 10초09만에 첫 100m를 통과해 새로운 신기록의 기대감을 키웠다. 후반 400m 기록 역시 26초27로 전날(26초41)보다 크게 단축했다. 이틀 연속 역사적인 질주를 펼친 이상화는 주먹을 쥐어 보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서울=연합뉴스) 고동욱 기자 sncwook@yna.co.kr /연합뉴스 2013/11/17 06:16 http://www.yonhapnews.co.kr/sports/2013/11/17/1007000000AKR20131117006551007.HTML?template=2087
2009 - 1000원권 '청자사자유개향로' 보통우표 발행 ‘色’다른 1000원 보통우표 나왔다 지식경제부 우정사업본부는 1996년 12월부터 14년여 동안 사용해 온 1000원권 ‘석수’ 우표를 ‘청자사자유개향로’로 새롭게 디자인한 보통우표를 17일부터 전국 우체국에서 판매한다고 밝혔다. 이번 우표에는 위·변조 방지를 위해 시변각 인쇄와 미세문자를 적용했다. 우표를 비스듬히 기울여 보면 향로의 우측 배경에 시변각 잉크로 인쇄된 ‘KOREA‘라는 문자가 나타나고, 향로 아랫 부분에 ’한국우정 KOREA POST‘의 미세문자를 새겨 우표사용자와 수집가들에게 색다른 재미를 줄 것으로 기대된다. 우표 디자인 소재인 청자사자유개향로는 향을 피우는 부분인 몸체와 사자 모양의 뚜껑으로 구성됐고, 몸체는 3개의 짐승 모양을 한 다리가 떠받치고 있다. 고려청자의 전성기인 12세기에 만들어진 향로로 국보 60호로 지정돼 있으며, 이 시기 청자향로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다음 우표는 ‘연하우표’ 1종으로 12월 1일 나온다. 맹수열기자 guns@seoul.co.kr /서울신문 2009-11-17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91117500008
2006 - 대한폐암학회, 폐암퇴치10계명 발표 폐암 퇴치 10계명 대한폐암학회에서는 17일 세계폐암퇴치의 날을 맞아 30일까지 인터넷을 통해 폐암퇴치캠페인(blog.naver.com/healthy_lung)을 벌인다. 학회가 발표한 폐암 퇴치 10계명은 다음과 같다. 20061120200000000007&classcode=0103
2002 - 반달가슴곰, 지리산에서 20년 만에 첫 공식확인 오늘의 역사 (11월 17일)[2002년] 야생 반달가슴곰이 지리산에서 무인 카메라에 찍혀 서식 여부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은 17일, 지리산 일대에 설치된 무인카메라를 통해 지난 10월 초 야생 반달가슴곰을 촬영했다며 관련사진 등을 공개했다. 지리산 반달곰은 지난 2000년 11월 한 방송사 카메라에 잡혀 논란이 있었으며, 정부기관에 의해 서식사실이 공식 확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반달곰은 지난 83년 설악산에서 한 밀렵꾼에게 사살된 이후, 20년 동안 그 모습을 일반에게 감추어왔다. 이번에 촬영된 반달가슴곰은 무게가 100~120kg의 성체(成體)로, 이마와 귀밑이 넓고 얼굴이 둥근 형태이며 목의 갈기가 사자처럼 옆을 향해 나와 있었다. 지리산 방사 반달가슴곰 관리팀 한상훈(韓尙勳) 박사는 "국내외 전문가들의 검증과 인근 사육장에 대한 조사 결과 야생 반달 가슴곰이란 결론을 얻었다"고 말했다. /조선
- 손기정 (공중전화 카드)
2002 - '마라톤 영웅' 고 손기정씨 현충원 안장 17일 초겨울비가 흩뿌리는 가운데 ‘마라톤 영웅’ 고 손기정씨의 영결식이 오전 9시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대한올림픽위원회(KOC)장으로 치뤄졌다. 이날 영결식에는 1947년 보스톤마라톤 우승자 서윤복(79)씨 등 300여명의 체육계 인사와 유족들이 참가해 고인의 넋을 기렸다. 이연택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은 조사를 통해 “손씨의 업적은 민족의 가슴에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영결식을 마친 손씨의 운구행렬은 올림픽공원에서 노제를 치른 뒤, 만리동 ‘손기정 기념공원’을 거쳐 대전 국립현충원으로 향했다. 마라톤 후배 황영조씨는 손씨의 체육훈장 청룡장을 들고 영정을 뒤따랐고, 전기영(유도), 김영호(펜싱)씨 등 역대 올림픽 메달리스트 8명이 운구를 맡아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손기정 기념공원에는 고인의 모교인 양정고 재학생 50여명이 나와 교가를 부르는 등 운구행렬이 지나는 곳마다 시민들의 애도가 이어졌다. 고인의 운구는 이날 오후 2시께 장지인 현충원에 도착해 무사히 안장됐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한겨레 2002.11.17(일) 20:41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2/11/005000000200211172041109.html
2001 - 노태우-고르비 10년 만에 재회 지난 15일부터 제주에서 측근들과 휴양을 즐기던 노 전 대통령은 로약스코리아의 주선으로 지난 16일 방한한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과 이날 당시 한.소 확대정상회담이 열렸던 신라호텔 월라룸에서 만찬회동을 가졌다. 이날 만찬에는 노 전 대통령과 부인 김옥숙여사를 비롯, 노재봉 전 국무총리,정해창 전 비서실장, 김종인 전 경제수석, 최호중 전 외무부장관, 김종휘 전 외교안보수석, 김학준 전 공보수석, 공노명 초대 소련대사, 통역 등 우리측에서 10명이 참석했다. 또 러시아측에서는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과 딸 이리나, 본드르 비서실장, 메드베데프 고르비재단 고문, 블라디미르 참모와 로약스사 관계자 2명 등 7명이 참석했다. 신라호텔 로비에 미리 나와있던 노 전 대통령은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호텔현관에 도착하자 양 손을 높이 들어 환영하며 뜨겁게 포옹, 서로를 반겼다. 잠시 후 만찬장에 들어선 두 전직 대통령은 10년 전 정상회담 당시를 회고하며 다양한 화제를 놓고 환담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10년 전 한.소정상회담은 내 생애 가장 큰 보람이었다"며 "너무 반가운 마음에 정상회담 당시의 참모들을 모두 참석토록 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10년 전 정상회담은 나 스스로도 어려운 결정이었다"며 "내 개인 집에는 아직도 정상회담 당시의 제주 유채꽃 사진이 걸려있다"고 화답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18일 오전 제주도지사 주최 조찬에 참석한 뒤 곧바로 상경, 19일 청와대 예방, 고려대 인촌기념관 강연, 20일 민주당, 한나라당 방문 등의 일정을 마치고 21일 한국을 떠날 예정이다. 노 전 대통령은 3박4일의 휴양을 마치고 18일 오후 상경한다. (제주/연합뉴스) /한겨레 2001.11.17(토) 22:04
(정식발행우표가 아닙니다. ^.@)
2000 - 조지 W. 부시, 제43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 부시, 제43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 40년 만에 가장 치열했던 미국 대통령선거가 2000년 11월 17일 미 전역에서 실시됐다. 선거전부터 예측할 수 없었던 박빙의 승부는 선거결과로까지 이어졌다. 개표과정 동안에만 10여 차례나 선두가 바뀌는 등 미 선거사상 최대의 숨막히는 드라마가 연출됐다. 개표가 거의 마무리될 무렵인 이날 밤 세계언론들은 부시 후보가 고어 후보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됐다고 보도하기 시작했다. 몇몇 나라의 지도자들도 부시 후보에 축전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과 몇시간 뒤 최대 격전지인 플로리다주에서 재개표가 불가피하다는 발표가 나오자 언론들과 지도자들은 당선보도와 축전을 전면 취소하는 등 한바탕 해프닝이 벌어졌다. 개표결과 고어가 미 전역에서 19만표 차로 부시를 따돌린 것으로 집계됐지만 그가 당선되지 못한 것은 각 주에 할당된 선거인단 538명 중 270명 이상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플로리다주 대법원과 연방 대법원까지 동원돼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끝에 투표 35일만인 12월 12일 부시 후보가 미국의 제43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조선
1994 - 테니스선수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 은퇴 나브라틸로바 [Navratilova, Martina, 1956.10.18~ ] 세계 테니스사상 가장 위대했던 선수 `철의 여인`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가 1994년 11월 17일 가브리엘라 사바티니와의 경기를 끝으로 은퇴했다. 나브라틸로바는 이날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버지니아 슬림 여자선수권 단식1회전서 1990년 US오픈우승자인 사바티니에게 0-2(4-6, 2-6)로 패했다. 1973년 데뷔후 21년간 1백67개 대회 및 18개 그랜드슬램대회 우승이란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던 나브라틸로바는 이로써 화려했던 선수생활을 모두 마감했다. 체코태생으로 미국에 망명, 자유시민이 됐고 자신이 동성연애자임을 당당히 밝혀 화제에 올랐던 나브라틸로바는 경기후 열린 은퇴식에서 "웃어야 될지 울어야 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2000년 7월 16일. 나브라틸로바는 테니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조선
- Alexander Dubcek 동구 사회주위권에 개혁 개방의 바람이 불던 1989년 오늘 체코슬로바키아 국민 수 만 명이 수도 프라하를 가득 메운 채 반정부 시위를 벌인다.
1985 - 캄보디아의 군인, 대통령 론놀(Lon Nol) 사망 론놀 [Lon Nol, 1913.11.13~1985.11.17] 캄보디아의 군인, 대통령. 프레이벵 출생. 군인의 아들로 1947년 바탐방 주지사, 군참모장, 국방장관 등을 역임한 뒤, 1963년 부총리가 되었다. 1966∼1967년 총리, 1968년 펜누트 내각의 부총리 겸 국방장관, 1969년 8월 다시 총리 겸 국방장관이 되고, 군대를 배경으로 우파의 중진이 되었다. 1970년 3월 원수(元首) 노로돔 시아누크의 소련 방문 중에 쿠데타를 일으켜, 그 해 10월 공화제 이행을 선언하고, 1972년 3월 대통령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1975년 4월 급진적인 좌익무장단체인 크메르루주(Khmer Rouge)가 게릴라전을 통하여 캄보디아 전영토를 장악하자 국외로 탈출하였다. /naver
- Emiliano Zapata [역사로 보는 한주] 1983년 11월17일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이 결성됐다. 그들이 멕시코의 가장 가난한 원주민 거주지역 치아파스에서 일어나 세상을 놀라게 만든 것은 1994년 정초, 미국 주도 아래 캐나다, 멕시코가 가담한 북미자유무역지대(NAFTA) 발효 다음날부터 시작된 그들의 반정부 반세계화 무장봉기였다. 그러나 거기까지 가는 데는 예전에 그곳으로 들어간 학생운동세력과 가톨릭 그룹 등 여러 운동세력들의 10여년에 걸친 피땀이 서렸고, 그들이 그 조직을 결성하기 훨씬 전부터도 그런 저항운동의 전통은 이어져 왔다. 그 연원은 1492년 콜럼부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고 유럽의 제국주의적 약탈이 원주민 사회를 급격히 유린·파괴하기 시작한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이 조직의 이름을 멕시코 혁명 영웅 에밀리아노 사파타(1879-1919)에서 따오고, 스스로를 사파타의 이념적 후예이자 500년에 걸친 원주민 반제국주의 저항운동의 상속자로 자처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사파티스타 운동은 약 2주간에 걸친 94년 초의 무장봉기 뒤 군사력 및 테러를 동원한 전면대결방식을 버리고 언론매체를 활용한 평화적인 선전전에 주력하는 쪽으로 전략을 바꿨다. 2000년 72년만에 선거로 정권교체를 이룬 비센테 폭스 정권 역시 직접 진압을 피하는 저강도전쟁 방식을 택하고 있다. 2001년 멕시코 시티로의 사파티스타 비무장 대행진과 대표들의 의회 토론, 대학 방문 등은 그런 변화를 상징한다. 이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부사령관 마르코스(Marcos)는 조직과 함께 시대의 총아가 됐다. 대변인 역할도 맡고 있는, 복면차림에 파이프를 문 중년 나이의 수수께끼 사나이 마르코스는 아직도 그 정체가 불분명하다. 사파티스타 운동은 트로츠키스트, 아나키스트, 사회주의 등 갖가지 이념지형의 잣대를 들이대며 그들을 평가하려드는 전세계 좌파 그룹들에게도 매력적인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세계화, 신자유주의 전령사인 북미자유무역지대, 거기에 편입된 국내경제체제 등 오늘날 지구상의 주류 흐름에 반대하면서 주민 자치를 핵심가치로 삼고 있는 그들은 여전히 독특하다. 위성전화·인터넷 등 첨단기술들을 적극 활용해 멕시코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그리고 농촌뿐만 아니라 도시민들로부터도 광범한 지지를 이끌어내고 있다. ‘최초의 포스트 모던 혁명’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현재 치아파스 지역엔 독립적인 32개 사파티스타 반군 자치공동체가 자리잡고 있다. 23명의 사령관과 부사령관 1명으로 집단지도체제를 구성하고 있는 그들이 주력하는 것은 원주민 빈곤문제 해결이다. 아울러 새로운 정치문화 수립을 위한 개헌운동을 벌이면서 노동자와 농민, 학생, 교사들을 묶어냄으로써 운동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작업에 힘을 쏟고 있다. (한승동 선임기자) /한겨레 2005-11-10 오후 05:33:08 http://www.hani.co.kr/arti/BOOK/78690.html
1980 - KBS 공영체제로 기구개편 발표 [책갈피 속의 오늘]1980년 KBS 공영체제로 기구개편 발표 새로운 권력은 새로운 매체를 원한다. 노태우 정부는 민영방송 SBS를 개국했고, 김영삼 정부는 케이블TV를, 김대중 정부는 디지털 위성방송 스카이라이프를 출범시켰다.
(발췌) 중국은 요나라 시절부터 주나라 시절까지가 정신적 가치의 이상(理想) 사회였다. 그 뒤 전국시대를 거치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혼란과 전략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다. 궈모뤄(郭沫若)와 린뱌오(林彪) 등 주요 인물이 사회주의를 배반하고 공자를 숭배하는 과오를 저지렀다고 숙청되었다. 장칭(江靑)을 비롯한 4인방이 무제한적으로 정신 문화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중국 대륙을 몰고 갔다. 한편으로 공동경작 경제정책인 인민공사를 추진해 능률이 땅에 떨어지고 10억 인구가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마우쩌둥(毛澤東)은 4인방을 숙청하고 실용주의자인 등샤오핑(鄧小平)을 기용해 당의 중심 역할을 맡겨 가까스로 난국을 해소해 나아갔다. 이 때 중국은 다시 공자를 인정하게 되는데, 문화대혁명 기간에 철저히 모든 것을 파괴해 공자 사당에서 제사 지내는 의식마저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중국 당국은 한국의 성균관에 사람을 보내 공자 사당의 제사 지내는 의식을 배워 갔다. [동아시아와 보편적 가치] http://m.epochtimes.co.kr/news/view.html?section=1&style=title&page=905&category=106&no=2724
(발췌) 1964년 브라질 군사정권의 출현과 그들이 거둔 경제적 성공은 전통적으로 브라질에 대해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던 아르헨티나 軍部를 자극했다. 1966년 집권한 軍部는 개발독재를 표명하고 나섰지만, 비전 있는 지도자의 不在, 산업기반의 취약, 그리고 성장보다는 분배를 먼저 요구하는 페론주의자들의 발호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는 데는 실패했다. [나라를 내전 상태로 몰고 간 지도자들(3)-페론] 배진영 /월간조선 2002-12-27 http://monthly.chosun.com/client/reporter/writerboardread.asp?idx=81&cPage=7&wid=ironheel
- 내장산 (공중전화 카드)
1971 - 내장산 국립공원 지정 내장산 국립공원: 1971년11월 17일 지정 (국립공원) /위키백과
- Luna 17 on Moon 소련의 무인 달 탐색선 루나 17호(Luna 17)가 1970년 오늘 달에 착륙한다.
1970 - 더글러스 엥겔바트, 마우스 특허 [오늘의 경제소사/ 11월 17일] <1552> 마우스 '클릭' 없이 컴퓨터가 가능할까. 그렇지만 복잡하다. 수많은 명령어를 외우고 좌판을 두들겨 입력시켜야 컴퓨터를 돌릴 수 있다. 전문가에 버금가는 실력을 갖춰야만 활용할 수 있던 컴퓨터를 클릭만으로 가동시켜주는 장치는 '마우스'. 윈도스와 그룹웨어ㆍ워드프로세서ㆍ인터넷에서도 '최초'의 기록을 남을 남긴 엥글바트는 무엇보다도 마우스의 발명자로 기억된다. 해군의 레이더병으로 복무하며 얻었던 영감을 과학적 창의력으로 연결해 마우스를 발명한 엥글바트 덕분에 인류는 컴퓨터의 편리함을 만끽하고 있다. 컴퓨터와 마우스의 진화는 어디까지 진행될까. 권홍우편집위원 /서울경제 2009/11/16 17:09:03 http://economy.hankooki.com/lpage/economy/200911/e2009111617090297490.htm
- Brasil, 500 Cruzados (Banknote)
1959 - 브라질의 작곡가, 지휘자 빌라 로부스(Villa-Lobos, Heitor) 사망 빌라 로부스 [Villa-Lobos, Heitor, 1887.3.5~1959.11.17] 브라질의 작곡가 ·지휘자. 리우데자네이루 출생이다. 아마추어 음악가인 아버지에게 음악의 기초교육을 받고, 국립음악연구소에서 잠시 F.브라가에게 사사하였다. 1918년 D.미요를 만나 프랑스 인상파음악의 영향을 받았으며, 루빈슈타인은 그의 음악을 높이 평가하여 세상에 널리 소개하였다. 1923년 파리로 유학, 음악교육면에서도 그는 최고 책임자로 있으면서, 1945년에는 리우데자네이루에 브라질음악학원을 설립하고 브라질 각지의 관현악단과 합창단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또한 젊었을 때부터 브라질의 민속음악에 열중, 미개지의 원주민 노래와 춤곡 등을 수집하여 악보화하고, 이들 음악 속에 담겨 있는 독특한 리듬과 선율을 작곡에 채택함으로써 남국적인 향취가 풍기는 작품을 썼다. 대단한 다작가로서 오페라 ·교향곡을 비롯하여 2,000곡 이상의 작품을 남겼다. 주요작품으로는 14곡의 쇼로스(Choros:날카로운 리듬과 발라드풍 선율의 브라질 고유의 춤곡), 8곡의 《바키아나스 브라질레이라스 Bachianas Brasileiras》, 그리고 피아노곡 《야만적인 시》 등이 있다. /naver
한미상호방위조약은 1953년 10월 한 · 미 간에 상호 방위를 목적으로 체결한 동맹조약이다. /외교사료관 http://www.diplomaticarchives.go.kr/bbs/board.php?bo_table=32&wr_id=73
한미상호방위조약 1953년 10월 1일 워싱턴에서 한국과 미국 간에 체결된 조약. 정식 명칭은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이다. 한국은 1948년 정부수립 이후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과 1949년 '대한민국 정부와 미합중국 정부 간의 주한미군 군사고문단 설치에 관한 협정'을, 뒤이어 1950년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을 체결했다.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에 따라 1950년 3월 구체적인 군사원조품목이 정해졌으나, 6·25전쟁 당시 겨우 실현단계에 이르자 이를 거울삼아 실질적 군사동맹인 이 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상호방위조약은 1954년 1월 양국의 국회에서 승인되어 비준절차를 거친 다음 11월 17일 비준서가 교환되었고, 11월 18일 조약 제34호로 정식 발효되었다. 태평양지역의 평화를 위해 집단안보를 추구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전문과 본문 6개항의 본조약과 제3조와 관련한 미합중국의 양해사항이 포함된 교환의정서의 부속문서로 구성되어 있다. 전문을 보면 "본 조약의 당사국은 외부로부터의 무력공격에 대하여 방위하고자 하는 공동의 결의를 선언할 것을 희망하고 태평양지역에 있어서 효과적인 지역적 안전보장조직이 발전할 때까지 집단적 방위를 위한 노력을 공고히 할 것"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본 조약의 주요내용으로는 ① 국제적 분쟁에 대한 평화적 해결의 원칙, ② 무력공격을 방지하기 위하여 당사국의 상호협의와 자조와 상호원조 원칙에 대해 규정, ③ 당사국 일방의 영토에 대한 무력공격에 공동의 대처, ④ 주한미군의 한국주둔, ⑤ 비준절차 및 효력발생에 대한 규정, ⑥ 유효기간의 무한정성 명기 등이다. /브리태니커
1948 - 3rd UNESCO General Conference UNESCO, Lebanon-Beirut, 17 Nov-11 Dec 1948 http://www.unpi.com/projects_un_conference_stamp_listing_1949.asp
라이트풋 [Lightfoot, Gordon, 1938.11.17~ ] 고든 라이트풋(Gordon Lightfoot) 속세를 떠난 듯 관조적이면서 진지하고 중후한 음색, 지적이면서 깊은 가사 하지만 그것과는 정반대로 다분히 팝적이고 대중적인 멜로디는 심각하고 심드렁한 인상의 고든 라이트풋(Gordon Lightfoot)을 1970년대에 성공한 대표적인 포크 싱어 송라이터 중 한 명으로 임명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했다. 흡사 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연상시키는 고든 라이트풋의 외모는 왠지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카리스마를 내뿜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의 보편적이고 편한 음악을 가까이 두고 좋아했다. 1938년 11월 17일, 캐나다의 온타리오 주에서 태어난 고든 라이트풋은 1970년대 초반과 중반에 최전성기를 가진 포크 싱어 송라이터지만 그의 이름은 1960년대에 피터 폴 & 매리(Peter Paul & Mary)와 마티 로빈스(Marty Robbins) 등 동료들에게 노래를 작곡해 줄 정도로 이 분야에선 이미 명성을 얻고 있었다. 1974년에 발표한 앨범 < Sundown >에서는 음반 타이틀 트랙이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올라 그의 유일한 넘버원 싱글이 되었다. 이 노래는 2000년에 백인 래퍼 엘우드(Elwood)가 힙합으로 재탄생시켜 다시 한번 화제를 모은 바 있고 두 번째 싱글 ‘Carefree highway’도 10위를 기록하며 고든 라이트풋에게 최고의 순간을 선사했다. 소승근(gicsucks@hanmail.net) /IZM NEO MUSIC COMMUNITY 2008/05 http://izm.co.kr/artistRead.asp?artistidx=3198&bigcateidx=&width=150
1932 - 독립운동가 이회영(李會榮) 순국 이회영 [李會榮, 1867.3.17~1932.11.17] [책갈피 속의 오늘]1932년 독립운동가 이회영 순국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이 한밤에 남편은/두만강을 탈없이 건넜을까?/저리 국경 강안(江岸)을 경비하는/외투 쓴 검은 순사가/왔다-갔다-/오르명 내리명 분주히 하는데/발각도 안 되고 무사히 건넜을까?’(김동환의 시 ‘국경의 밤’에서)
- 'Imprints of Cello Fragments'
1928 - 프랑스 출신의 미국 화가, 조각가 아르망(Arman) 출생 아르망 [Arman, 1928.11.17~2005.10.22] 프랑스 출신의 미국 화가이자 조각가. 본명은 아르망 피에르 페르낭데(Armand Pierre Fernandez)로 1928년 프랑스 니스에서 태어나 니스의 국립 장식미술학교와 파리의 에콜 드 루브르에서 그림을 공부하였다. 1955~1960년까지 종이에 고무인을 어지럽게 찍은 《압인(押印)》 시리즈를 시작하였다. 《압인》 시리즈의 속편격인 《보조(步調)》 시리즈는 현실 물체에 의한 인쇄물을 모아 놓은 것이다.
1925 - 미국의 영화배우 록 허드슨(Hudson, Rock) 출생 허드슨 [Hudson, Rock, 1925.11.17~1985.10.2] 미국의 영화배우. 1925년 11월 17일 미국 일리노이 주 위네트카에서 출생하였고 본명은 로이 해롤드 쉐러 주니어(Roy Harold Scherer Jr.)이다. 매우 부끄러움이 많았던 그는 고등학교 졸업후 제2차 세계대전 중 해군에 입대하여 해군 항공기 정비병으로 복무하고 제대하였으며 이후 어릴 때부터의 꿈인 영화배우가 되기 위해 연기공부를 시작하였다. 1948년 영화 《Fighting sanaolron》의 단연으로 데뷔하였으며1952년 제임스 스튜어트와 출연한 서부극《분노의 강 Bend of the River 》으로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1956년 《자이언트 Giant》에서는 제임스 딘, 엘리자베스 테일러, 캐롤 베이커와 함께 출연하여 텍사스의 젊은 유전경영자를 연기하였으며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도 올랐으나 수상하지는 못하였다. 이후 출연한《무기여 잘있거라 A Farewell to Arms》(1957), 《이밤을 즐겁게 Pillow Talk》(1959), 《밀애 Darling Lili 》(1970)등의 영화로 한국에서도 크게 인기를 얻었다. 그는 AIDS에 걸렸음을 밝힌 최초의 유명인사였으며 1985년 10월2일 AIDS로 사망하였다. /네이버
- Auguste Rodin - Rodin's 'Burghers, Calais' - 'Age of Bronze' - 'The Cathedral'
로댕 [Rodin, Auguste, 1840.11.12~1917.11.17] 조각가 로댕 사망 1917년 11월 17일 근대조각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프랑스의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이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하급관리의 아들로 파리에서 태어난 로댕은 14세 때 국립공예실기학교에 입학, 조각가로서의 기초를 닦았다. 1857년부터 3년간 국립미술전문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했지만 낙방했다. 1864년 살롱에 처음으로 '코가 망그러진 사나이'를 출품했으나 생생한 사실적인 묘사가 심사위원들에게 거부감을 주어 낙선했다.
[책갈피 속의 오늘]1917년 오귀스트 로댕 사망 현대 서양 조각의 문을 연 오귀스트 르네 로댕.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 sec&sid1=102&oid=020&aid=0000214587
이원수 [李元壽, 1911.11.17~1981.1.24] 이원수는 내재율 중심의 현실참여적인 동시와 동요 <고향의 봄>의 노랫말을 쓴 시인이다. 1927년 마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윤석중 등과 '기쁨사' 동인이 되었다. 1930년 마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함안금융조합에 다니던 중 1935년 독서회사건으로 검거되어 1년간 옥살이를 했다. 1926년 방정환이 펴낸 <어린이>에 <고향의 봄>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고향의 봄>은 낭만적인 향토애를 자아내는 작품으로 뒤에 홍난파가 곡을 붙였다. 1940년대에는 현실에 저항하는 동시 <어머니>(1943)·<빨래>(1946) 등을 썼다. 1953년에 발표한 장편동화 <숲속의 나라>는 전래동화를 뛰어넘는 수준 높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동시집으로 <종달새>(1947)·<빨간 열매>(1964), 동화집으로 <어린이 나라>(1949)·<숲속 나라>(1953)·<파란 구슬>(1960)·<보리가 패면>(1966) 등이 있다. 고마우신 선생님상, 한국문학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대한민국 예술원상, 대한민국 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마산시 산호공원에 노래비가, 서울 어린이대공원에 문학비가 세워졌다. /브리태니커
"한 편의 시(詩)가 예술작품(藝術作品)일진대, 구태여 어떤 연령의 독자에게만 주어져야 한다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크게 보아서 시(詩)는 만인(萬人)의 것이어야 한다."
- 이원수
을사조약 강제 체결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영국·미국·러시아로부터 한국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보장받은 일본은 1905년 11월 이토 히로부미를 특명전권대사로 한국에 파견했다.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을 목적이었다. 이토는 11월 10일부터 몇 차례에 걸쳐 회유와 협박으로 고종을 압박했지만 완강히 거부당했다.
[어제의 오늘]1905년 치욕적 ‘을사늑약’ 체결 ㆍ망국의 씨앗… 일제 식민 시대 걷다 1905년 오늘 경운궁(현 덕수궁) 중명전 회의실. 일본군이 겹겹이 포위한 상황에서 강요된 어전회의가 열렸다. 고종 황제는 강압에 의한 조약 체결을 피할 목적으로 의견의 개진 없이 대신들에게 결정을 위임한 상태였다. 그러나 회의는 5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런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궐 밖에서 초조해진 이토 히로부미는 하세가와 군사령관과 헌병대장을 대동하고 일본헌병 수십명의 호위를 받으며 궐내로 들어왔다. 그리고 퇴궐하려는 한국 대신들을 한 사람씩 붙들어놓고 위협과 공갈조로 찬반을 다시 물었다. 하야시 곤스케 일본 공사는 일본의 요구를 끝까지 거부하며 통곡하는 한규설 참정대신을 별실에 가둬버렸다. 이날 조약 찬성자는 2명뿐이었다. 하지만 이토는 이를 뒤집어 6 대 2의 다수 찬성이라고 선언하고 외부대신(박제순)의 관인을 외부관저에서 가져와 찍게 했다. 치욕적인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된 순간이었다. 체결 당시 정식 명칭은 ‘한일협상조약’이었으며 모두 5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을사오조약’이라고도 불린다. 일본은 고종 황제가 구두명령으로 을사늑약을 재가했다고 주장했지만 고종은 을사늑약 체결에 대해 서명이나 옥새 날인을 거부했다. 을사늑약의 주요 내용은 조선의 외교권 박탈이었다. 외국에 있던 조선의 외교기관은 모두 폐지되고 주한공사들은 공사관에서 철수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 조약으로 인해 조선은 명목상으로는 보호국이나 사실상 일본제국의 식민지가 됐다.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0-11-16 22:14:5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011162214515&code=100100&s_code=ap005
노구치 [Noguchi, Isamu, (野口 勇), 1904.11.17∼1988.12.30] 일본계(系) 미국의 조각가·디자이너. 로스앤젤레스 출생. <이사무 노구치>라고 불린다.
몽고메리 [Montgomery, Bernard Law, 1887.11.17~1976.3.24]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 출생 2차대전에서 '사막의 여우' 롬멜 장군이 이끄는 독일 기갑부대를 꺾은 것은 영국의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이었다. 롬멜 사단에 연전연패를 당하며 사기가 땅끝까지 떨어진 부대를 추스려 이룬 결과였기에 그 공적은 더욱 빛이 났다. http://iam0101.new21.net/zbxe/?mid=study_history&category= 2444&document_srl=3094
1886 - 크로아티아의 작가, 시인 카모프(Kamov, Janko Polić) 출생 카모프 [Kamov, Janko Polić, 1886.11.17~1910.8.8] Janko Polić Kamov (17 November 1886 – 8 August 1910) was a Croatian writer and poet. He was born in Sušak, Rijeka. Rebellious by nature, he was expelled from Rijeka high school and dropped out of the school in Zagreb. Because of his participation in the demonstration against the Hungarian governor in Croatia, Khuen-Héderváry, he was sentenced to three months in prison in 1903. Headstrong and temperamental, he called himself Kamov, after Ham (or Kam) from the Old Testament, who saw his father Noah naked but unlike his siblings Shem and Japhet did not cover his nakedness, thus issuing a curse. Kamov probably saw himself as a revealer of bourgeoise hypocrisy and wrote to his brother Vladimir in 1910 - "Kamov to me is a literary program..." .........................................
루이 14세도 토목기술상의 문제로 단념하고, 나폴레옹도 홍해와 지중해의 수위 차를 10m로 너무 높게 측정하는 바람에 포기해야 했다. 프랑스가 이토록 수에즈 운하에 집착한 이유는 막강 해운대국으로 대서양에서 누리는 영국의 절대적 우위를 흔들기 위함이었다. 1854년 프랑스인 페르디낭 드 레셉스가 다시 운하 뚫기를 시도했다. ‘수에즈운하 만국회사’를 설립한 그는 주식을 프랑스와 이집트 왕 몫으로 나누고, 개통일로부터 99년간 운하를 독점 운영하는 계약을 이집트와 체결했다. 공사는 1859년 4월에 시작돼 150만명의 인력이 동원되고 수천명의 목숨이 희생된 끝에 1869년 11월 17일 개통됐다. 대서양과 인도양, 동양과 서양을 가로막았던 단절의 벽이 마침내 무너진 것이다. 영국에 기회가 찾아온 것은 개통 6년 뒤였다. 사치로 빚에 시달리던 이집트 왕 이스마일 파샤가 1875년에 주식 전량을 영국에 팔아넘긴 것이다. 1956년 이집트의 나세르가 국유화를 선언, 운하는 이집트 소유가 됐다. /조선 [어제의 오늘]1869년 수에즈운하 개통 ㆍ국제무역에 혁명을 불러온 ‘사건’ 1869년 11월17일 장장 10여년에 걸친 역사(役事)가 끝나고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수에즈 운하의 물길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집트 북동부의 수에즈 운하(길이 192㎞)가 열리면서 유럽의 무역선들은 아프리카 대륙으로 돌아가지 않고도 아시아에 다다를 수 있게 됐다. 런던~싱가포르 항로는 2만4500㎞에서 1만5027㎞로 짧아졌고 런던~뭄바이 항로도 약 1만㎞가 단축됐다. 수에즈 운하의 개통은 국제무역에 혁명을 불러온 사건”이었다. 운하를 만들어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한다는 아이디어는 기원전 파라오들이 이집트를 다스리던 시절부터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토목기술로 거대한 운하를 만든다는 것은 난망한 일이었다. 17~18세기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독일 철학자 라이프니츠도 운하를 상상했지만 기술이 없어 실현하지 못했다. ‘꿈의 프로젝트’였던 운하 건설은 프랑스인 페르디낭 드 레셉스가 ‘수에즈 해양운하회사(이하 수에즈 회사)’를 설립하고 1859년 4월 기공하면서 본격화됐다. 가장 열심이었던 것은 영국의 해양 패권을 견제하고자 했던 프랑스와 이집트였다. 이들은 주당 500프랑이던 수에즈 회사 주식의 대부분을 사들였다. 최희진기자 daisy@kyunghyang.com /경향신문 2009-11-16 18:19:1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11161819145
1861 - 캐나다의 시인 아치볼드 램프먼(Lampman, Archibald) 출생 램프먼 [Lampman, Archibald, 1861.11.17~1899.2.10] 캐나다의 시인. 캐나다 연방파의 주요시인이며, 야외의 경치와 사건들에서 느낀 감정들을 섬세하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토론토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공부했고, 1883년부터 죽을 때까지 캐나다 체신부의 공무원으로 일하며 오타와에서 살았다. 1892~93년에 오타와 출신의 시인 2명과 함께 토론토의 〈글로브 Globe〉지 주간 칼럼 〈머메이드 여관에서 At the Mermaid Inn〉를 함께 썼다. 램프먼은 도시의 기계화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여 가능한 한 시골로 달아나곤 했다. 그는 고전시의 완벽한 형식과 훌륭한 기교뿐만 아니라 워즈워스·셸리·테니슨·키츠 등 영국 낭만주의 시인들의 서정시 영향으로 오타와의 아름다움과 퀘벡의 시골 가티노의 경치를 읊은 자연시를 썼다. 사회주의자였고 정당정치와 조직화된 종교에 비판적이었으나, 이러한 급진적 사상을 반영한 것은 몇 편의 짧은 시뿐이었다. 그는 시집 〈밀레 외(外) Among the Millet and Other Poems〉(1888)와 〈대지의 서정시 Lyrics of Earth〉(1893)를 발표했다. 죽은 뒤에 친구들과 유저(遺著) 관리인 던컨 캠벨 스콧이 〈아치볼드 램프먼 시집 The Poems of Archibald Lampman〉(1900)과 〈대지의 서정시:시와 발라드 Lyrics of Earth:Poems and Ballads〉(1925)를 펴냈다. 1943년에는 시집에서 빠진 시 몇 편이 출판되었다. /브리태니커
1858 - 영국의 사회주의 개혁가 로버트 오언(Owen, Robert) 사망 오언 [Owen, Robert, 1771.5.14~1858.11.17] 영국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로 노동 조건의 개선을 위해 노력하였다. 생 시몽, F.M.푸리에 등과 비견된다. 노스웨일스 뉴타운 출생. 10대에 점원으로 출발하여 맨체스터에서 방적기 제조업자가 되었다가 뉴 래너크에서 최신 최대의 방적공장 경영주가 되었다. 산업혁명기 및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그는 노동자의 노동조건이 만족하지 못하면 노동자의 도덕적 퇴폐를 야기하게 되고 또한 생산력을 저하시킨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노동자의 처우개선을 위하여 여러 가지 실험과 노력을 시도하였다. 먼저 사람의 성격은 한편으로는 생태적인 체질의 산물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특히 발육기에 있는 어린이는 환경의 산물이라는 지론의 실증을 위하여 노동자의 자녀들을 모아 ‘성격형성학원’을 설립하였다. 이것이 일단 성공을 거두자, 그 후에 공정법의 제정에 따른 노동조건의 개선을 주장하였으며, 미국에 공상적 이상향을 만들기도 하였다. 1834년에는 ‘노동조합 대연합’ 결성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으나 이 운동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만년에는 심령술(spiritualism)에 몰두하여 대조를 이루었다. 그 사상의 기초는 산업자본가의 입장에 서서 J.벤담의 공리주의와 D.리카도의 노동가치설을 독자적으로 전개한 점과, 또한 환경 개선에 의한 인간성의 향상을 설파한 환경설이다. 그의 주저로는 《사회에 관한 새 견해 A New View of Society》(1813∼1814) 《래너크주(州)에의 보고》(1820) 《새 도덕세계의 서(書) Book of the New Moral World》(7권, 1836∼1844) 《자서전 Life of Robert Owen Written by Himself》(1857) 등이 있다. /네이버
리요테(리오테) [Lyautey, Louis-Hubert-Gonzalve, 1854.11.17~1939.7.21] 프랑스의 군인 ·식민지 행정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기병사관으로서 알제리에서 근무하였다. 1894년 베트남으로 가서, 가리에니 장군의 참모로서 판팅펑[潘廷逢] 등 유에 왕조(王朝)에 충성하는 의당군(義黨軍)을 탄압, 인도차이나의 프랑스 식민지화를 완성시켰다. 1896년 가리에니를 따라 마다가스카르섬으로 건너가 반(反)프랑스 ·반(反)그리스도교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한편, 프랑스 본국에의 동화정책(同化政策)을 수행하여, 식민지행정의 모범이 되었다. 그의 강온 양면정책은 1912년 이후 모로코 총독 시절에도 계승되어, 이슬람교 술탄과의 공동 주권 정책을 확립하는 한편, 아틀라스 산록 등에서 집요하게 계속된 민족반란을 잔혹하게 탄압하였다. 1917년 육군장관이 되었으며, 식민지행정에 유능한 군인으로서 《식민지에서의 군대의 역할》(1900) 등의 저서도 남겼다. /naver
슬라베이토프 [Slaveykov, Petko Rachev, 1827.11.17~1895.7.1] 불가리아의 작가. 근대 불가리아 문학어를 확립하고 다른 유럽 국가에서 동시대 사상을 도입해 불가리아 문학을 풍요롭게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 펫코 라체프 슬라베이코프는 17세 때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학생들을 가르치는 순회 교사가 되었다. 초기 시집인 〈오색 찬란한 꽃다발 Smesena Kitka〉(1852)·〈노래시 Pesnopoyka〉(1852)는 둘 다 서정적·애국적이었다. 그는 일상 언어를 문학 언어로 재확립함으로써(그가 1862년에 번역한 성서의 언어는 불가리아 방언에 바탕을 두고 있음) 불가리아 시가 활짝 꽃필 수 있는 길을 마련했다. 또한 그는 애국자이자 정치가로서 투르크의 압제와 그리스 정교 총주교의 정신적 지배를 노골적으로 반대한 것으로 유명한 정치 책자를 만들어 불가리아의 부흥을 구체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1863년 이스탄불로 가서 불가리아 망명자들이 발간하는 평론지에 기고하는 한편 풍자적·정치적인 정기 간행물을 편집했다. 1878년 불가리아가 해방된 뒤로는 적극적인 정치가가 되어 제헌의회 의장 겸 민주당 공동 창립자로 활동했다. 1881년에 쿠데타가 일어나자, 그때까지도 투르크의 지배를 받고 있던 플로브디프로 가서 〈네자비시모스트 Nezavisimost〉('독립')라는 신문을 편집했다. /브리태니커
1796 - 러시아 제국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Yekaterina II) 사망 예카테리나 2세 [Yekaterina II, 1729.5.2~1796.11.17] 러시아의 여황제. 프로이센 슈테틴 출생. 독일의 작은 공가(公家)에서 태어났다. 1745년, 후에 제위에 오른 표트르 3세에게 출가한 뒤 남편의 평판이 나빠지자, 1762년 즉위한 지 얼마 안되는 남편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대제(大帝)라 불렀다. 계몽주의 사상에 감명하여 볼테르 등과도 문학으로 교유하였고, 학예와 교육에 큰 관심을 쏟았다. 특히, 1767년에 소집한 사회 각층의 대표로 이루어진 법전(法典)편찬위원회에 새로운 정치원리를 해설하는 유명한 훈시를 함으로써 계몽군주로서의 평판을 얻었다. 그러나 그 법전의 편찬은 성과를 얻지 못하였고, 1773년에 일어난 푸가초프의 반란 이후 현실주의자가 되었다. 1775년의 지방행정 개혁, 1785년의 귀족 특권 인가장 등으로 법치주의의 원칙을 도입함과 동시에 귀족들과의 협력체제도 강화하였다. 만년(晩年) 특히 프랑스혁명 발발 뒤에는 반동화하여 자유사상을 탄압하기도 하였다. 외정(外政)면에서는 두 차례의 투르크와의 전쟁(러시아-투르크 전쟁)과 세 차례에 걸친 폴란드 분할 등으로 러시아의 영토를 남쪽과 서쪽으로 크게 확대하였다. 아들 파페르와 불화가 심한 반면, 손자 알렉산드르를 편애하여 자유주의 교육을 시켰으며, 음탕하고 사치스런 생활을 보냈다. 가까운 여러 총신에게 국유지와 농민을 덧붙여 하사함으로써 농노제(農奴制)를 확장하였다. /네이버
1790 - 독일의 수학자, 천문학자 아우구스트 뫼비우스(Möbius, August) 출생 뫼비우스 [Möbius, August Ferdinand, 1790.11.17~1868.9.26] 독일 수학자 뫼비우스 출생 독일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아우구스트 뫼비우스가 1790년 11월 17일 프로이센에서 태어났다. http://iam0101.new21.net/zbxe/?mid=study_history&category=2444&document_srl=3094
시체프킨 [Shchepkin, Mikhail Semenovich, 1788.11.17~1863.8.23] 농노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재능을 인정받았고, 1822년 처음으로 모스크바의 무대에 등장하였다. 이듬해 소극장의 일원이 되어 40년 동안 이 극장과 함께 지냈다. 그의 자연스러움과 소박함, 그리고 진실에 넘친 연기는 배우 예술에 새로운 사실주의의 길을 열었고, 특히 1830년대에는 《지혜의 슬픔》의 팜소프, 《검찰관》의 시장(市長) 등 러시아 연극사상 불멸의 형상(形象)을 창조하였고, 만년에는 연기에 심리적인 깊은 맛을 더하여 불세출(不世出)의 명배우로 일컬어졌다. 그는 또 고골리 ·게르첸 ·벨린스키 등 당시 문화인들과 친교를 맺었고, 극장의 계몽적 역할이나 사회적 책임에 관하여 높은 식견을 지녔으며, 그의 배우예술에 관한 뛰어난 이론은 다음 대의 연극에 큰 영향을 끼쳤다. /naver
초코노이 비테즈 [Csokonai Vitéz, Mihály, 1773.11.17~1805.1.28] 헝가리의 뛰어난 계몽주의 시인. 일찍부터 당시의 혁명적 경향에 동조했기 때문에 나폴레옹의 유럽 침략과 함께 일어난 반동의 물결 속에서 생활의 어려움을 겪었다. 데브레첸에 있는 칼뱅교 대학에서 잠시 부교수로 있다가 해고된 뒤 방랑시인이 되었다. 그의 시에서 '릴라'로 등장하는 부유한 소녀를 위해 고정직을 구하려고 노력했으나, 조그만 마을에서 안정된 직장을 구했을 때는 이미 그녀가 결혼한 뒤였다. 그는 가난한 폐병 환자가 되어 데브레첸으로 돌아갔고 자신의 시가 출판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시의 형식에 가장 큰 관심을 두었던 그는 헝가리 최초의 운율학 이론가에 속하며 압운을 이용한 서유럽의 작시법을 헝가리 시형식에 맞게 성공적으로 바꾸었다. 계몽주의 정신을 불어넣어 주는 시를 남겼으며 또한 극작가로서, 헝가리 최초의 희극적 서사시이자 가장 인기있는 작품인 〈도로탸 Dorottya〉(1804)를 썼다. /브리태니커
본델 [Vondel, Joost van den, 1587.11.17~1679.2.5] 쾰른 출생. 1621년 이래로 서정시·풍자시·애국시·종교시를 지어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최대시인이 되었다. 대표작은 풍자시 《팔라메데스 Palamedes》(1625), 서정시 《헤이스브레흐트 반 암스텔 Gijsbrecht van Amstel》(1637), 《루시페르 Lucifer》(1654) 등이다. /naver
1558 - 잉글랜드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 즉위 [역사 속의 인물] 독신주의자 英 엘리자베스 1세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는 왕이 될 처지가 아니었다. 어머니가 간통죄와 반역죄 누명을 쓰고 궁궐에서 쫓겨나자 부왕인 헨리 8세는 그녀를 홀대했고 공주의 직위마저 박탈했다. 왕위계승에서 제외된 것은 당연지사. 아버지 사후 이복형제들이 잇따라 왕이 되면서 그녀는 생명을 부지하기도 어려워 가명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인간만사 새옹지마. 이복 언니인 메리 1세가 급서하자 적절한 혈통을 구하지 못한 왕실과 대신들은 그녀를 왕으로 추대했고 25세의 나이에 화려한 대관식을 치르며 즉위했다. 그녀는 입버릇처럼 ‘국가와 결혼했다’며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 ‘처녀 여왕’으로 불렸다. 실제 일에만 열중한 그녀는 유럽의 후진국이었던 영국을 세계 최고 대국으로 발전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그녀가 독신주의를 고집한 것은 어머니가 아버지의 미움을 받아 사형당한 것과 최초의 정인인 시모어 제독이 왕의 허락 없이 공주에게 청혼했다가 처형당한 것이 큰 영향을 미쳤으리란 분석. 그녀는 연극을 무척 좋아해 직접 배우가 되기도 했다. 한 작가가 연기를 비방하자 귀를 자르고 종신형에 처하기도 했다. 1558년 오늘은 그녀가 즉위한 날이다. 최정암 편집부국장 /매일신문 2012년 11월 17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61629&yy=2012
1558 - 잉글랜드 최초의 여왕 메리1세(Mary I) 사망 메리1세 [Mary I, 1516.2.18~1558.11.17] 영국 튜더왕조의 왕(재위 1553~1558). 메리 튜더라고도 한다. 헨리 8세와 제1왕비 캐서린의 딸이다. 부왕(父王)의 종교개혁 시대에는 불우하였으나, 이복동생 에드워드 6세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열렬한 구교도로서, 즉위 이듬해에 구교의 나라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와 결혼하여, 아버지와 동생의 종교개혁 사업을 부정하고 구교 부활에 주력하였으며 많은 신교도를 처형하였다. 그 때문에 후세에 ‘피의 메리(Bloody Mary)’라고 불렸다. 대외적으로도 남편에게 협력하여 프랑스와 싸웠으나, 결과적으로는 영국이 대륙에 보유하고 있던 마지막 거점 칼레를 잃었다. /naver
- 'Maria de Medici' - 'Holy Family'
- 'Venus, Cupid and Jealousy' - 'Eleanora of Toledo and Her Son' 브론치노 [Bronzino, Agnolo, 1503.11.17~1572.11.23] 1503년 11월 17일 피렌체 근교의 몬티첼리에서 출생하였다. 라파엘로 델 가르보에게 배우고, 뒤에 폰토르모에게 사사하였다. 1523년 스승과 함께 발 데마수도원의 벽화제작에 종사하여 《피에타》와 《성(聖) 라우렌티우스의 순교》를 그리고, 30년 우르비노 후작을 섬기다가 1540년 이후 메디치가(家)의 코시모 1세를 섬겨 궁정화가로서, 메디치가의 많은 초상화를 그렸다. 원숙기의 대표작 《아들 조바니와 함께 있는 톨레도의 예리아노르의 초상》은 정밀한 사실(寫實)이 지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데다가, 그의 주관에 따라 구성된 일종의 이상주의를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 마니에리스모(manierismo) 초상화의 걸작으로 꼽힌다. 그외 마니에리스모 대표작으로 《비너스, 큐피드, 어리석음과 세월》 등이 있다. /naver
동국정운(東國正韻)은 조선 전기 세종 때 엮은 음운서(音韻書)로서 활자본으로 6권 6책이다. 국보 제71호(간송문고본, 권1 ·6)와 국보 제142호(건국대학교박물관 소장본, 완질)가 있다. 왕명으로 집현전(集賢殿) 학사 신숙주(申叔舟) ·최항(崔恒)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강희안(姜希顔) ·이현로(李賢老) ·조변안(曺變安) ·김증(金曾) 등 9명이 편찬에 착수하여 1447년(세종 29) 완성, 이듬해 간행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산실되었으나, 1940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첫째 권과 여섯째 권이 발견되었고, 1972년 강원도 강릉에서 6권 6책의 전질이 발견되었다. 1443년 훈민정음(訓民正音) 완성 후, 한국 한자음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하여 중국 명나라의 운서(韻書)인 《광운(廣韻)》 《집운(集韻)》 《홍무정운(洪武正韻)》 등을 참고로 삼아 엮었다. 내용은 모두 91운(韻), 23자모(字母)로 되어 있으며, 글자마다 국어음을 먼저 표기한 다음 그 밑에 한자를 달았는데, 엄선한 이 23자모는 그대로 훈민정음의 초성체계와 일치한다. 조선 초기의 한자음과 훈민정음 연구에 절대적 가치가 있는 자료이다. 1973년 4월 건국대학교 출판부에서 전6권을 영인(影印), 간행한 바 있다. /nav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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