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할 수 없는 비극
조 흥 제
핼러윈 축제가 서울 이태원에서 있었는데 군중들이 몰려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그들이 좁은 골목을 지나다 넘어져 156명이 죽고 150여 명이 부상당했다는 언론보도다. 그 사건을 보고 서울역 압사사건을 떠올렸다. 1960년 설날을 맞아 고향에 가려는 승객들이 문 앞에 섰다가 열리자 노도와 같이 밀려 나와 계단에서 넘어져 30여 명이 압사한 사건이다.
핼러윈(Halloween)은 매년 10월 31일, 그리스도교 축일인 만성절(萬聖節) 전날 미국 전역에서 다양한 복장을 갖춰 입고 벌이는 축제다. 우리도 미군부대가 있던 이태원에서 핼러윈 행사가 매년 열렸었다. 주최 측도 없이 희망자는 여러 가지 탈을 쓰고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면서 즐기는 것이다.
금년 핼러윈은 코로나로 3년 동안 마스크를 쓰고 꼼짝을 못하다가 해제되어 젊은이들은 핼러윈행사를 맞아 마음껏 뛰놀고자 과거 미군들이 있던 이태원으로 달려간 것이다.
사고가 난 골목은 너비 3.2m, 길이 40m의 좁고 짧은 골목이었다고 한다. 뒤에서는 밀고 앞에서는 뒤로 밀어 그 사이에 들었던 사람은 넘어져 옴짝달싹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갔다는 언론보도다. 우연일까? 우연을 가장한 살인은 아닐까?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런 유언비어가 많이 떠도는 세상이다. 세월호 사건도, 천안함 사건도 발표된 것과는 달리 사고를 가장한 기획된 사건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이번 핼러윈 사건도 그런 세력들이 조작한 사건이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세월호 사건을 교통사고로 보고, 이번 사건도 사고로 본다.
핼러윈 사건에 참가했던 연령대는 20대가 주종이고 10대와 30대는 많지 않았다고 한다. 20대면 대학생이거나 취업준비생이 많은 연령대다. 300여명이 사망하거나 다쳤으니 그 가족들의 아픔은 얼마나 클까? 현실로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가 쓰던 방, 책상에 펼쳐 놓고 나간 책, 옷걸이에 아무렇게나 걸쳐 놓은 청바지, 신던 신발……, 그렇게 해 놓고 나간 사람이 영영 돌아 올 수 없다니 믿고 싶지 않을 것이다. 통곡을 해도 돌아오지 않고, 땅을 쳐도 돌아오지 않고, 하늘을 보고 원망해도 돌아오지 않는다. 나도 여동생이 사고로 죽어서 유가족들의 심정을 잘 안다.
5‧16 혁명 무렵 우리는 대전에서 살았다. 어느 날 아침 잘 갔다 오라고 여동생과 나는 같이 집을 나와 손을 흔들면서 출근길에 올랐다. 저녁에 퇴근해 보니 도로 가에 있는 우리 집에 사람이 많다. 집에 들어서니 어머니가 땅을 치고 우셨다.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이웃집 아저씨가 ‘놀라지 말게, 자네 여동생이 죽었어.’하는 것이 아닌가. 다니던 공장에 불이 나서 소사(燒死)했다고 한다. 아침에 잘 갔다 오라고, 저녁에 보자고 손을 흔들고 출근길에 올랐는데 죽었다니 사실로 믿어지지 않았다.
거기서 먼저 떠오른 생각이 하나님이었다. 사촌 형이 예수교를 믿어 가끔 교회에 따라가 보았지만 하나님을 믿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 들어 주신다는 구절이 생각난 것이다. 방에 들어 가 책상에 엎디어 하나님께 동생을 살려 달라고 간절히 기도 드렸다. 이웃 아주머니가 그 현장에 안 가보고 뭐하느냐는 말에 일어났다.
여동생의 시신은 마당 가운데 천막에 덮여 있었다. 다른 한 사람도 같은 사고를 당했는데 그는 자녀가 있는 부인이라고 했다. 그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동네 아는 아저씨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밝은 달을 쳐다 봤더니 둥근 달 속에 열 아롭 살 먹은 꽃같이 피어 나는 여동생의 얼굴이 들어 있었다. ‘저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으니……. 머리를 쥐어 뜯어도 아프지 않고, 머리를 기둥에 땅땅 부딪어도 아프지 않았다.
동생이 입던 옷, 신고 다니던 신발, 사용하던 물건은 다 없앴다. 하지만 동생이 있던 공간은 지울 수 없었다. 길을 가다 여동생과 같은 몸매의 복장을 한 처녀를 보면 동생 같아 속으로 울기를 여러 번 했다. 결국 우리는 대전을 뜨기로 했다. 63년에 서울 영등포 문래동으로 이사 왔다. 이사 온 후 동생에 대한 기억은 다 잊었다. 환경이 바뀌면 잊게 되는 것이다.
8년 전 세월호 사건 때 안산 분향소에 문우와 함께 갔었다. 전철에서 내리니 거리에는 온통 검은 리본이 걸리고 분향소까지 가는 버스에도 검은 띠가 매어 있었다. 버스를 타려는 경향 각지에서 온 조문객들의 행렬은 길었다. 분향소에 와서 국화꽃 한 송이 들고 들어가 단에 바치고 위를 올려다 보니 앳되고, 또랑또랑한 눈망울을 한 사진이 수 없이 걸렸다. 여학생들은 머리를 갈래머리로 따서 목 앞으로 내리고, 남학생들은 넥타이를 매고 멋을 냈다. 그들은 단원고등학교 2학년생들로 제주도에 수학여행 가려다 진도에서 배가 침몰되어 함께 죽은 300명이라고 한다. 내일의 운명도 모르고 청춘의 예쁜 모습을 사진에 담아 두고자 한껏 멋을 낸 것을 보고 엄마 또래의 여인들은 흐느끼고, 언니 또래의 처녀들은 엉엉 울고, 아버지 또래의 남성들은 손수건을 눈으로 가져갔다.
이번 핼러윈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젊은이들도 마찬가지다. 나는 아직까지 가 보진 않았지만 테레비전을 보면 서울 시청앞에서 참배하던 시민들이 국화꽃을 단에 바치고 털썩 주저 않아 우는 사망자 또래의 젊은이들이 많다.
사망자 중 외국인들도 많다고 한다. 각국 정상들이 우리 대통령에게 위로의 조전(弔電)을 많이 보내온다. 국가에서는 5일까지 국가 애도의 날로 지정하여 조기(弔旗)를 게양한다.
다 키워 놓은 아들-딸을 잃은 부모의 마음, 가족의 슬픔은 말과 글로서는 표현을 못한다. 그들의 슬픔을 치료해 줄 수 있는 것은 세월과 살던 집을 바꾸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가 쓰던 방을 그대로 두면 쓰던 물건을 버린다해도 지워지지 않는다.
관계당국에선 주최측이 없어서 통제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어느 누구도 예측 못한 대형 사고다. 책임을 묻는다면 코로나가 제일 클 것이다. 앞으로는 주최측이나 주관자가 없는 행사도 이번 사건을 반면교사 삼아 재발하지 않도록 제도를 개선해 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