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트럼펫, 김인배),
검은 상처의 부르스(섹소폰, 이봉조),
이별(섹소폰, 길옥윤),
나포리맘보(아코디온, 박춘석),
심바쿠마나(피아노, 김강섭)
과거 대중 음악을
그것도 작곡을 한다는 일은
처음부터 맘을 먹고하는 경우는
드믈었던 것 같고
학창시절부터 익히던 악기를 매개로 하여
악단에서 연주활동을 하면서
음악적 기본이 갖춰지고
자신의 음악 세계가 어느 정도 구축이 되면
자신만의 곡을 만들고 싶은
욕망에 한두 편 곡을 만들고
그러다 인기를 얻고
전문 작곡가의 길로 접어드는
경우가 많았던 것
그런 연유인지는 몰라도
과거 1970~80년대까지 작곡가들은
자신만의 악단을 구축하여
연주하면서
자신의 악기를 즐겨 사용한
이력들이 있다.
그러면서 당시 꽤 유행하던
경음악 붐을 타고
연주음반을 내기도 했었다.
그 중에서 몇 곡을 찾아 들어본다.
김인배(트럼펫) 악단 연주
석양
https://youtu.be/DDB4YXkEH2c
김인배의 뛰어난 트럼펫 연주가
청명한 가을 공기를 흔드는 것이 일품이다.
김인배는 1932년 9월 25일
평북 정주 출신으로
17살 나이로 월남,
육군 군악대를 시작으로
하우스밴드, 김호길악단 등을 거치며
트럼펫 연주자로 명성을 쌓았고
이후 작곡가로도 활약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KBS와 TBC(동양방송) 라디오
악단장을 지냈고,
1987년 대통령 문화포상,
2000년 제7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대통령표창과
2006년 제13회 대한민국연예예술상
문화훈장을 받았다.
김인배의 장남인 김대우씨는
KBS 관현악단장이며,
외손자 김필은 '슈퍼스타K' 시즌6에서
준우승한 가수로
3대가 음악인으로 활동하였다.
트럼펫 연주자로 활동을 시작,
작곡가로도 그 명성을 떨친 김인배는
남일해의 '빨간 구두 아가씨(1963)'
조애희의 '사랑해봤으면(1963)'과
'내이름은 소녀(1964)',
한명숙의 '그리운 얼굴(1963)',
박재란의 '소쩍새 우는 마을(1964)'
성재희의 보슬비 오는 거리(1965)와
'왜 그런지(1965)',
김상국의 '쥐구멍에도 볕들날 있다(1965)',
배호의 '황금의 눈(1966)',
이미자의 '밤의 정거장(1967)',
석찬의 '모닥불(1974)' 등의
히트곡을 비롯해
무려 400여 곡을 작곡하고
2,500여 곡의 편곡에 참여해 오며
한국 대중음악사에
깊은 족적을 남겼다.
평생 트럼펫을 손에서 놓지 않았을 만큼
열정적으로 음악 활동을 이어왔다.
2018년 향년 8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이봉조(섹소폰)와 그의 악단
"검은 상처의 부르스(1964)"
이봉조의 연주는
테너 색소폰의 끈적한 매력을
너무 잘 표현해 들려주고 있다.
('검은 상처의 부루-스' 관련 포스팅
https://blog.naver.com/yessoopark/220693556319)
1931년 경상남도 남해 출생
이봉조는 진주중학교 재학시절
가요작곡가 이재호(李在鎬)에게
음악을 배웠다.
1952년 한양대학교 건축공학과에
입학하였으며
테너색소폰 연주자
엄토미(嚴吐美)의 문하생이 되어
본격적인 연주법을 사사받았다.
1958년 한양대학교 졸업 후,
서울시청 토목과에 취직하였고,
이봉조악단을 조직하여
주한미군 나이트클럽에서
연주활동을 하였으며,
특히 미국의 재즈음악에 열중하였다.
가사를 쓴 번안곡
'밤안개(1962)'라는 노래를
현미에게 부르게 하여
가요작가로서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다.
1964년 MBC TV에서 주최한
전국경음악경연대회에서
이봉조악단이 대상을 받았고,
같은 해 극영화 '맨발의 청춘'으로
청룡영화상에서 음악상을 받았다.
그해 말 동양TV방송국이
개국할 때 전속악단장이 되었다.
1970년 11월
일본 동경에서 개최된
국제가요제에 참가하여
'안개(정훈희 노래)' 입상하였고,
1971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을
수상하였다.
1971년에 '너(그리스 가요제, 정훈희)'와
'사랑의 교실(동경가요제, 펄씨스터즈)',
1973년에 '나의 별(그리스 가요제, 현미)',
1974년 '좋아서 만났지요(칠레가요제, 정훈희)',
1975년 '무인도(칠레가요제, 정훈희)',
1979년 '꽃밭에서(칠레가요제, 정훈희)'로
수상하면서
국제가요제 전문작곡가로
이름을 날렸다.
또한 현미의 '보고 싶은 얼굴(1963)',
'떠날 때는 말없이(1964)'와
'몽땅 내사랑(1967)', '애인(1967)',
최희준의 '맨발의 청춘(1964)',
남일해의 '맨발로 뛰어라(1964)',
쟈니브라더스의 '수평선(1966)',
윤복희의 '웃는 얼굴 다정해도(1967)',
차중락의 '사랑의 종말(1967)'과
'철없는 아내(1967)',
최희준의 '종점(1966)'과
'팔도강산(1967)'
등 수많은 명곡을 히트시켰다.
1980년 KBS 전속악단장,
1987년 서울올림픽 문화행사
공연분야 준비자문위원을 지냈으며,
많은 연주 음반과 300여 곡의 가요곡과
수많은 번안곡(편곡)을 남겼다.
이봉조는 서울올림픽 행사를 준비하던
1987년 과로와 과음에서 연유한
심장마비로 타계한다.
길옥윤(섹소폰) 당신만을 사랑해
길옥윤은 소프라노 섹소폰을
즐겨 연주했는데
이곡의 간주에 나오는 음색이
소프라노 섹소폰으로
'전원일기'의 주제곡도
나른한 소프라노 섹소폰의 연주이다.
1927년
평안북도 영변 출생 길옥윤
(본명 최치정, 崔致禎)은
평양고보를 나와
1943년 경성치과 전문대학
(서울대학교 치과대 전신)을 다녔으나,
8.15광복 직후
박춘석, 노명석 등과 그룹
‘핫팝’을 만들어
주한미군 클럽에서
피아노와 섹소폰을 연주하면서
연주활동을 시작하였고
박춘석의 권유로
1962년 '내 사랑아'를 시작으로
작곡을 시작하였다.
1966년에는
패티김과 결혼하였으나
7년 뒤 이혼하였고
1988년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하다가 1994년
영구 귀국하였다.
서양 음악이 밀려들어올 무렵,
이를 적극 수용하면서
한국적 색깔을 가진 음악으로
바꾸어놓은 것은
가요사의
큰 업적으로 남는다.
초기 작품은
대부분 패티김을 생각하며 작곡하였고
그 패티김이 부른 '사월이 가면(1966)'.
'살짜기 옵서예(1966)',
'연인의 길(1966)',
'사랑의 세레나데(1966)',
'서울의 찬가(1966)',
'사랑하는 마리아(1969)',
'내 사랑아(1969)',
'사랑이란 두 글자(1970)',
'사랑하는 당신이(1970)','이별(1970)',
'사랑은 영원히(1974)' 등을 작곡했고
이후 헤은이와
'당신은 모르실거야(1975)',
'당신만을 사랑해(1977)',
'감수광(1977)', '제3한강교(1979)',
'새벽비(1980)', '후회(1980)',
질투(1982) 등과 최희준의
'빛과 그림자(1966)',
쟈니 리의 '내일은 해가 뜬다(사노라면, 1966)',
이숙의 '눈이 내리네(1974)', '우정(1975)',
세샘트리오의 '나성에 가면(1978)' 등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한다.
총 3,500여 곡을 작곡하였고,
이 중 '이별'은 동양의 애창곡으로 불린다.
또한 만년에는 '뱃노래' 등을 통하여
한국가요와 일본가요를 비교, 연구하였다.
1995년 암으로 타계하였는데
투병 중에도 300여 편의 곡을
작곡하는 음악사랑을 보여주었다.
박춘석
백일희
박춘석(아코디온)과 그 악단 연주
나포리 맘보
https://youtu.be/9zUxBzdkuK8
박춘석은 피아노를 전공하여
건반악기를 잘 다루었는데
아코디온 연주도 일품이다.
1930년 서울에서 출생한
박춘석(본명 박의병, 朴義秉)은
경기고등학교 졸업 후
1949년 피아노 전공으로
서울대학교 음대
기악과에 입학하였다.
자퇴하고 1950년
신흥대학교(현 경희대학교)
영문과로 편입하였다.
최초의 활동은 1949년
서울스윙밴드에 참여하면서부터였고,
1950년 9.28 서울수복 후
대학생 신분으로
12인조 악단을 결성하여
충무로 은성살롱에서
전속밴드로 활동하였다.
이후 미군 상대 클럽인
금천대회관 등의 무대에도 선다.
대학 졸업 후 악단을 재정비하여
중앙방송(현 KBS)
라디오 전속 경음악단으로 들어가
단장으로 활동하였다.
1954년 백일희가 부른
'황혼의 엘레지'란 곡을 발표하며
대중가요 작곡가로 데뷔하였고,
1955년 이곡을 자신이 직접 부르면서
음반을 내기도 했다.
가수 백일희는
박춘석의 첫사랑으로
백일희가 도미한 후
박춘석이 결혼하지 않고
혼자 지내는 빌미가 된다.
1955년
오아시스레코드사에 전속되면서
박단마가 부른 '아리랑목동',
손인호의 '비내리는 호남선' 등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26살의 젊은 나이에
주목받는 작곡가가 되었다.
당시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던 가수
패티김은
그가 만든 번안곡 '틸'과 '파드레'가
수록된 첫 독집음반을 내며
유명해졌다.
이때부터 박춘석 악단을 이끌고
당대의 팝 가수들과 호흡을
맞추었으며
영화음악에도 진출하여
최갑석의 '삼팔선의 봄',
남진의 '가슴 아프게',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 등의
영화 주제가를 만들었다.
1964년
지구레코드사로 옮기면서
트롯곡들을 만들기 시작하며
음악인생에 변화를 맞이하였다.
이때부터 가수 이미자와
인연을 맺으며
전성기를 구가하였는데
이미자와 콤비를 이뤄 발표한 곡은
'섬마을 선생님',
'흑산도 아가씨',
'황혼의 블루스', '삼백리 한려수도',
'타국에서' 등 500여 곡에 이른다.
일명 박춘석 사단으로 불린
패티김, 이미자, 남진, 나훈아,
문주란 등의 가수와 작업하며
다 열거하기도 벅찰 만큼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는데
1954년 데뷔작을 발표한 후
1994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질 때까지
그가 작곡한 곡은
무려 2,700여 곡에 이르며,
한국음악 저작권협회에만
1,152곡이 등록되어 있다.
1980년대 초
작곡가 길옥윤, 송재리 등과 함께
태양음향을 설립하였고
1988년 거성레코드사를
설립하기도 한다.
1994년 제1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1995년 옥관문화훈장을 수상하였고,
2010년 3월 16일
국내 대중가요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은관문화훈장을 추서받았다.
김강섭(피아노) 연주 '심바쿠마나'
https://youtu.be/Zp0lDNUyGOY
김강섭은 제대로 음악공부를 한
음악도 출신이다.
1932년 서울 출생 김강섭은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초등학교 때 트럼펫을 연주했다.
서울대 작곡과를 나온 뒤
1950년 무렵에
군악학교에 들어갔고
6.25 전쟁 후 미 8군 무대에서
12명의 악단을 이끌고
음악생활을 시작했다.
이 때 악단을 이끌면서
패티김, 최희준, 나훈아 등
당대 최고의 가수들을 대중가요계에
입문시키기도 했다.
1961년 KBS가 전속악단을 설립할 때
악단장을 맡은 후
95년 3월 퇴직할 때까지
34년 동안 악단장으로 근무했다.
퇴직 이후 현재까지
KBS 객원 지휘자로
근무하고 있고
1985년
'가요무대' 시작 때부터
1995년 정년퇴임 때까지
가요무대를 이끌었다.
또한 KBS 음악프로인
'열린 음악회' 출범의
산파역도 담당했다.
그는 김상국의 '불나비(1965)',
김상희의 '코스모스 피어있는 길(1967)'과
'빨간 선인장(1968)',
유리 씨스터즈의 '꿈나무(1971)',
문정선의 '나의 노래(1971)'와
'꽃이야기(1973)',
나훈아의 '힌구름 가는 길(1972)',
이용복의 '그 얼굴에 햇살을(1972)' 등의
히트곡을 남겨
작곡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특히 200여 곡의 히트곡과
'달려라 백마', '팔도 사나이'
등의 군가를 작곡하기도 했으며
가요사의 뒷얘기도 많이 알고 있어
우리나라 대중 음악사의
산증인으로 꼽힌다.
1997년 제24회 한국방송대상
개인부문 음악상과
2005년 제12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연주인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