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인과율 과 성경말씀과 연결점이 어떻게해서 가능하다고 할 수있읍니까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이 질문자체에 대하여 저는 겸허하게 동의합니다.
이미 성경말씀을 믿어 지닌 인류는 10억명을 넘어서고 있고, 종교적인 진리어라는 인침이 된 상황이
무려 수천년을 이어 존속하고 있는 성경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어찌 감히 인과율이라는 12 인연법을 연결하여
이를 견해로 피력할 수 있는가의 상당한 의문점을 가지시고 반문하신것으로 압니다.
이는 거대한 진리라는 벽에 꾸정물 뿌리는 행동이 아닌가 라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어서
여기므로 아주 진중하고 신중하게 의견을 구체화하여 어떻게 연결되어지는지에 대한 필요충분한
명제롤 지니고 의견을 제시한다해도 , 자못 표현하면 심대한 왜곡현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읍니다,
그러므로 저변에 이러한 성경의 연구의견을 제시해도 여지없이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스스로 고백한
사실이 있을 정도로 스스로 우려스러움도 있으므로 이러한 귀하의 질문에 대하여 충분하 동의 하는것입니다.
그러므로 귀하의 반론을 겸허히 수용하고자 합니다. 주의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지구는 돕니다 와 같은 코페니쿠스의 지동설을 주장하는 것처럼 변함이 없는
진리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이 진리에 대한 인과율은 이미 예수님께서는 성경말씀에 이미 인과률과 O 률을 12 진의 삼세 의 (12곱하기3) 36의 십진으로 .O의 표상점인 영률을 이미 말씀해 해 놓으셨음이 발견한 입장이기 때문입니다ㅑ
어느 학자가 카더라 하는 학설이나 , 본인의 어떠한 사고방식이나 논리를 의존한 것이 아닌까닭이라는 사실은
분명하게 말 할 수 있읍니다.
성경말씀이나 불경말씀에 대하여 저는 어느 학설이나 새로운 제시를 하는 내용도 절대 믿지 않읍니다.
왜 그러한가? 학자들의 어떠한 체성에 대하여 의견을 내 놓는 것은 명예심의 발로가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인데
직관자의 가장 사고인식은 색계에 들어서야 하기 때문에 명예욕을 지닌 자 들의 학설을 믿지 않으며 대부분 틀려서 3 분 5 기의 평기(平氣) 과기(過氣) 조화(調和) 세부분의 5 력을 참구하는 15 의 통일작용맥락의 기존정명함을 객관성으로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삼세라 함은 욕계와 색계 무색계 의 공간계의 단계를 함축한 경지를 말합니다.
색계에 들어서야 최소한 욕심을 여의는 입장에서 직관이 들어서는 빛 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는
확실한 전제를 나는 믿고 있기에 그러합니다.
성경말씀을 기록한 모든 선지자들은 전부 색계의 빛의 영역에 들어서서 무욕으로 직관한 내용임과
같은 의미입니다ㅑ.
셩경의 기본 말씀은 5 경에 기준하여 3분5기 형식으로 정밀하게 짜 놓은 신의 말씀이라 3분5기는 15 수입니다, 십과 오 의 불가분한 물질세계의 중을 담당하는 5 가 오경이라는 것도 함에 믿어의심치 않는것을 성경말씀에 발견한 까닭이기도 합니다. 물질계의 만물의 영장인자가 하나님의 계율을 기본적으로 지켜내야 하는 도리를 오경이라 하고 5 황파라 이름합니다.
이러한 연유가 있으므로 전문가의 학문을 행하는 학설이나 주관적 논리는 스스로 믿지 않읍니다.
그러므로 불경이나 성경이나 항상 한 귀절 귀절 경전의 말씀을 공부하면서 연구하고 토의해나가는 구체적인
방법을 택해서 서로 대화하고 토론해야 모든 진리의 말씀은 점점 문자의 한계점을 초월한 이면의 말씀을
아무런 곡해없이 발전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로 성경말씀에 대하여 다른 방향으로 주어진 어떠한 점을 견해로 하여 피력한다 하여도
성경말씀을 인용하여 탐독의 집중에서 나오는 어떠한 소식점을 드러나게 해서 보인다 라는 것에는
지인께서는 동의하셔야 합니다.
기준이 성경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곳에서 발췌하거나 주관적인 것이 아닌 성경말씀의 탐독 결과치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이것은 견해는 발전입니다. (발전이란 의미는 전진이라는 말과는 서로 개념이 다릅니다, 전진은 다만 앞으로 나가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만 발전은 전진의 모습에 굴신의 ( 구부리고 펴는) 象(상) 을 발전이라 하는 것임, 구체화한다면 장애물을 극복시키면서 나아가는 것을 발전이라 합니다, 자연계의 운동은 단조로운 전지는 없고 단지 발전만이 있는 것이므로 이것을 동정운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성경말씀을 참구하고 공부함에 있어서 말씀을 대면할때에는 읽는 방법을 있읍니다.
이러한 의미를 소개 한다면
세번을 정독하고 그리고 일곱번을 생각하며 생각하고 사색하는 방법으로 일관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방법은 3 세 양중인과설이라 할 수 있는 초기불교경전의 중아함경에 나오는 보리도차제문의 도리를 펴는 것을 말 함인데 3세 가 되는 삼계의 범주를 설정하고 빛 7 운동으로 21 의 직관을 할 수 있는 학습방법을 확고하게 펼쳐 보인 3 세 양중인과설을 합리적인 이치로서 완전하게 믿는 까닭입니다.
쉽게 말한다면 아이를 낳은 산모는 3,7 일을 지나야 아이도 완전한 인간으로 결정되고, 산모도 다시 완전한
건강을 되 칮는 이치와 같읍니다.," 세번 탐독하고 일곱법을 사색한다" 진리경을 대면하는 제 자세는 늘 일관합니다"
이 직관이라 하는것은 보는 그대로를 인지하는 작업이 아니고 사실 그자체를 바르게 다 보는상태를 직관이라 하고 이 직관은 성경말씀을 기록하신 모든 선지자들이 영감을 직접 보고 행한 기록인데 이를 직관으로 행하신다
하는 것입니다.
지인의 질문에 대하여 그 답을 올려야 함으로 3 세양중인과설의 12 인연법과 요한계시록 8장 6절 부터
일곱 천사와 나팔에 대하여 비교하여 소개 해 보기로 합니다.
12 인연의 삼세양중인과설
무명 行(행) 식(識) 명색(暝色) (육처)六處,觸(촉),受(수)愛(애)取) 有(유), 생 노병사
1 2 3 4 5 6 7 8 9 10 11 12
삼계를 인간의 태생과 노병사의 12 주기를 가지고 12 진을 논하는 것이 보리도차제문인데
중아함경에 나옵니다.
1의 무명은 어리석음을 말합니다 밝지 못하고 어두운상태에서 무엇을 ( 2 를) 행 하는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쉽게 예를 든다면 모르고 저지르는 행위가 큰게 인과보를 지닌다 하는 것입니다.
밝은 이치로 계율을 지켜 밝음으로 보면 될 일을 그냥 어두워서 행위를 하여 타자에게 해를 입히는 경우의
과보는 크다는 것을 의미함이 무명인데, 술이 취해서 갑자기 성격이 내부에서 화를 이겨내지 못하고
무단히 도로에 걸어가는 행인들에게 막 칼을 휘들러 죽게 한다거나, 심지어는 컴컴한 밤길에 길이 아닌 것을
무엇을 구하고자 워카를 신고 막 돌아다니다가 무수한 벌레나 생명류를 발로 밟아 죽이게 하는 등의
모르고 행한 행동으로 타 생명을 해치는 등의 밝지못하여 이루어지는과보는 크다함이니 보리도차제문에서는
이를2 의 行 으로 이루어짐인데 이를 업보라 합니다.
결국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업을 지니게되는 상태인 1,과2 에 습성화 되다가 죽는다 이 말입니다. 이를 전제합니다.
이는 내가 사람을 죽여서는 아니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감정이 서서 죽이는 것과는 그 업보의 차이가
납니다, 왜냐하면 알면서도 죽였으면 언젠가는 뉘위치는 것, 돌이킴은 항상 다시 찾아오게 되어있읍니다,
하지만 모르고 막 죽이는 것은 돌이킬 수 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식과 가치의 비중차이는 차이가 난다 할 수 있읍니다. 이르 무명이라 하고
보편적인 무명은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무명이 옵니다.
그런데 어제 비가 왔지만 오늘은 비가 안오므로 어제 비는 금방 잊어버립니다, 그렇지않읍니까?
그런데도 어제오는 비는 잊었으나 잊지 않는 무엇이 있읍니다, 이를 識(식: 아는 그 무엇) 이라 합니다
이를 불교용어로서는 아라야식이라 합니다, 아라야는 쌓는다는 뜻입니다.
희말라야 하며는 이 단어중에 라야라는 타밀어는 쌓은것이라는 의미인데 그리고 희마 는 힌눈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아라야를 식이라 함인데 어제 비가 온것은 잠재적으로 아뢰야식으로 쌓여 마음에 내장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같음으로 오는 여래이고 여호아 선인데, 히말라야라는 것은 흰눈이 차곡 차곡 쌓인다는 뜻을 이름으로 한 것입니다.
쌓는다, 사건된 행을 (1,2) 차곡 차곡 쌓는다라는 것을 아라야 식이라 말하는 3 번의 식입니다.
1,2는 이미 업보를 지니고 죽었다 칩시다. 죽었으나 그 행위의 사건 의 과보는 식으로 쌓여지는데
누가 쌓여지는가 , 이를 예수께서는 귀신이 들었다 하는 것으로 말씀하시고 있읍니다. 부처님 말씀도 필요없읍니다.
<마태복음 8장 28절 부터 32절까지 탐독하시기 바랍니다>
식에 의하여 다시 사람으로 입태 되어지지 않으면 죽은 다음 무덤에서도 나오는 것입니다.(8장 32절 첫구절)
그런데 만약 다시 입태를 한다 합시다 이 귀신이.... (귀신이라 함은 떠도는 입장의 구천에서 맴 돌며 몸을
받지 못하는 신세에 놓인 識(식)으로서 펼쳐보이는 힘을 찾지못하여 구하고자하는 의지가 떠도는 영) 혹은
뱃속에 들어가 입태되어 5 주가 지나면 명색이 (희미하게 어둡지만 어떤 윤곽을 지니게 됨) 있는데
육처라 (4) ,눈,코,귀, 입 등 육근이 고기에 붙어 살점으로보이지 시작합니다 (자궁속)
그리고 스스로 감촉의 감각을 지니고 어머니 뱃속에서 잘 놉니다.
그런데 이 뱃속에 태아가 자랄때 이를 밴 어머는 태교를 해야 한다하지만 절대로 잘 못된 이야기입니다.
태아에 놓인 아이는 절대로 외부의 말과 느낌 소통 감촉등을 일절 할 수 가 없읍니다.
오히려 뱃속에 아이를 밴 여자가 갑자기 똑똑해지거나 , 어떤 정신적인 변화가 일어난다거나
갑자기 집안이 잘 플린다거나 어렵게 된다거나 하는 작용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무명 행 이 식 의 삼위지로서 어떤 비중으로든지간에 기운이 들어와서 이 인연을 받은 자가 바뀐다는 것입니다.
예수나 부처는 순수한 영으로만 입태하여서 그와 같음의 성스러운 태기를 느끼는 것 같은 것을 말합니다.
태아에게 다른 외부의 어느누구도 영향을 끼칠 수 는 없다 라고 할 수 있읍니다.
- 초기불교의 강연자 동국대 김성철 교수 의 강연중에서-
육근이 (5) 생기므로 촉이 (오온신경줄) 이 생기고 受(수: 7) 를 받아들입니다, 어머니 자궁에서 나옵니다.
나오자 마자 가 아닌 5 일 즈음 지나면 눈과 코 귀 입 혀 촉 의 등이 감각을 찾아 외부와 교통하게
되는데 8 의 愛 라 취사선택 등을 인지하면서 9) 의 욕심, 욕망등을 발현하는 나이가 됨에 따라 (12에서15세)
하나의 존재위치를 자각하게 되어 10의 성인출발을 인지합니다, 이렇게 3 에서 9까지 의 7 단계에서
나머지 생노병사 의 10,11,12 진법을 진행하며 발전하게 되는 생명의 삶의 과정을 소개 해 보았읍니다.
1과2 는 3
3에서9까지 3
10에서12까지 3 은 3양중인과설 을 의미함인데
1과2는 전생이고
3과9의 7단계는 현생이고
10-12는 다시 죽음으로 이르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리피트(반복) 함인데 . 생명현상은 수륜입니다, (水輪) 입니다.
물은 동그랗지요, O 으로 모양을 하고 O 으로 굴러가는 빛 운동을 한다 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무시무종이므로 (시작과 끝이 없으므로) 1,2 의 무명 행은 시작이며 끝이기도 한 것이니
늘 반복 리필합니다.
이를 요한계시록 8장의 7 절을 실례로 들어 보기로 합니다.
"첮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나팔을 분다는 것은 빛의 7 운동의 발생은 항상 소리를 동반함인데 팔방의 소리로서
진행합니다) 피 섞인 우박과 ( 물은 물 그 자체에 이미 불(火)이 섞여 물을 만드므로 우박은 불으로 변한 빛의 운동이니 火는 적색이므로 피 색이 됩니다. ) 불이 땅에 던졌읍니다. 그러자 땅의 삼분지 일이 불타고, 모든
나무의 삼분의 일과 풀들이 다 나버렸읍니다." 빛의 운동에서 3분지를 항상 멸하고 새롭게 일어나는 것을
반복하면서 O 운동을 합니다.
두번째 8장 8절도 매 한가지 이고 12절 까지 4 번에 거처 3분지1 이 불타므로 12 인연의 삼분위가 멸하고
동시에 다시생기는 변화로 굴러간다 하는 것을 표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12 진은 셰계의 시간에 의한 자연이치를 의미하고
삼계의 욕계 색계 무색계는 공간을 표상하는 자연이치를 말함에
12 곱하기 3 의 등비로 모든 빛 의 7 이 행하여 세상의 법칙을 심판하는 것을 상징하고 있읍니다.
본인 견해에 대하여 참고하고 연구해볼 의미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개진 되어져도 이미 예수님의 성스러운 말씀에는 다 함축되어 함께 굴러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성경말씀에 대한 뜻을 새기고자 하는 것이니 예수님의 말씀을 부정하지 않는 이상 ㅡ 이를
참고하여 성경말씀이 좀더 폭이 넓게 올바름으로 지향하는 것은 아닌지를 검토해보는 것이 도리어
그냥 무조건 고정적인 진리의 범주선상을 침범한다는 이유로만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깨어나라사니는 열린 마음은 아니다 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1,2 는 3
3-9는 3
10-12는 3 으로서 늘 3분지1 은 빛 7 일 멸망시키면서 다시 동시에 새로운말씀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 4장 1절 " 그 후에 나는 하늘로 통하는 문이 내 앞에 열리는 것을 보았읍니다.
그리고 내가 처음들었던 그 음성, 나팔 소리와 같은 그 음성이 다시 돌려왔읍니다,"이리로 올라오너라,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네게 보여주겠다."
우리들이 항상 마주하는 달력을보면 1주일로 단위로 맥락을 행하고 있읍니다.
단 일주일로 천지창조가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계속 리피드 하고 반복 반복 일주일을 경계하며
살아가야 하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 달력입니다.
삼분위교라 무엇이든 사물의 운동인 빛 운동은 3/1일을 늘 반복 교체하며 새로운 나팔을 분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시고 검토 궁리 하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성인들께서 말씀하신 교칙입니다.
모든 만물은 12 진법은 어디에도 모두 다 적용된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도 말씀하신바가 있읍니다.
여기에서 또 하나의 다른 일면을 이해를 돕기로 하고 소개해 보겠읍니다.
황극책수 라는 것을 공부함에 있어서 數(수) 의 원리와 오행의 원래개념을 이해 하지 못하면
아이러니한 이야기이지만 천지창조의 기원적 측면 지수화풍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함께 연결되어
져서 서로 고리를 이룬다면 이에 대하여 구체화 해서 공부하는 접근을 시도해야 합니다.
그렇지요?
그러므로 사설이 깁니다.
아주 아주 옛날 에 중국의 사마천의 이야기로 돌아가보기로 합니다.
황제가 모든 백성들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동쪽에 있는 치우 라는 아주 엄청나게 강한 왕이 있었는데 머리는 쇠로 이루어지 온 몸은 강력한 주석의 몸을 지닌체
불을 운영하는 자 로서 먹는 것도 쇠나 돌 모래 자갈등을 먹으면서 아주 횡횡한 세력을 펼쳤는데
황제가 동쪽이 아닌 다른 삼남지방은 다 다스려도 이 치우라는 왕만 정복을 하지 못했던 터였읍니다.
이에 황제는 다른 제후국가 들과 영합하여 치우 를 토벌하기위하여 전장에 나갈때 마다
치우는 불과 물을 이용하여 온 주변에 안개를 피고 연기를 자욱하게 하여 치우자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게 연막전술로 전략을 세우고 대 들기때문에 적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던터.
황제는 천지신명에게 제례(祭禮) 하고 정신을 가다듬은 다음 지혜를 모우며 만든 것이 하나 있었읍니다.
(제례라는 것은 주변 사물의 모든 널려있는것을 가지런히 정돈하여 정신을 수습하는 일련의 마음가짐을
깨끗하게 해서 잡념이 들어오지 않게 한다는 의미가 있읍니다. 원래 주변을 정리 정돈을 잘 하지 않고
너절하게 여기 저기 흩어져 놓은 것을 보며 생활하게 되면 여러가지 잡기를 정신에 들어가서 산만하게
되면 정신은 들 뜨는 것입니다.이를 火 기운이 난잡하게 정신줄에 들어온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 부터 현자는 항상 주변 정돈을 말씀하게 하였고 정리정돈을
분명하게 하고 몸 자체의 태도스스로를 예의법으로 다스렸다 하는 내적인 정화운동을 제레 의 의미에 포함
되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읍니다, 예경에 나옵니다)
그 당시 황제가 무엇을 만들었는가 하며는 지남차(指南車) 를 만들었는데 지남차라하며는 수례에다 사람이 손가락으로가르키는 인형을 세었는데 그 인형의 안에는 자석을 넣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수레차를 만들어 끌고 다니는 수례를 지남차라 함인데, 그런고로 안개중이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전쟁터에서도 지남차가 가르키는 곳에는 자석의 힘이 항상 남쪽을 정확하게 가르키므로 사방의 안개중에 목표가 어디에 있는지를 항상 알게 된
것입니다
, 치우는 머리자체가 쇠로 되어있고 온통 불을 이용하여 조화를 부리면서 또한 몸이 주석이며 쇠이마를 가진 자 이므로 자석이 그곳을 향하게
되는 것이므로 안개가 자욱해도 스스로 치우가 어디에 있는지를 눈으로 잘 안보이지만 알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치우를 생포해서 전쟁에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상하고 통일이 안되어 마구니 짓을 하는 치우에게 기독교의 창세기 말씀처럼 노아에게방주를 만들때 계시를 해 준것과
같은 이치로서 물의 기원에서 출발한 물의 생명에 대하여 큰 물길로 타락한 생명들을 멸함을 행하시는 같은 의미를
지혜로 받아들이는바 가. 황제의 노아방주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삶을 향하여 가는 이정은 항상 계시를 해 주게 됩니다, 이것이 성경의 말씀이다 이 이야기 입니다.
이로서 황제는 치우를 물로서 불을 공략하는 방법으로 지남차를 (물의 기원 생명의 수륜) 만들어 멸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읍니다
왜 음양 오행이 왜 생겼는가를 자기장 (火 의 방향) 으로 설명해준 내용입니다. (빛의 운동을 제시함)
항상 자기장은 남쪽을 가르키는 것이고 상반되는 방향을 가르키는 나침판의 바늘을 보게되면
동북쪽에서 자석의 침을 살펴보면 남쪽으로 향하고.
서북쪽에서 자석의 힘을 살펴보아도 남쪽으로 향하고
어디서 자석의 침을 보아도 항상 남쪽과 북쪽의 수직선상으로 침이 고정됨을 본 것인데
그러므로 午火 9 를 알겠고, 子水 1 의 동시적 위치를 발견한 것입니다.
상수 와 오행의 개념을 최초로 발견하는
순간입니다. 지금 현재의 문명 과학 전반적인 것도 이 수화의 1 과 9 로서 모든 수열과 통계 물리력
음양오행의 문자개념만 다르지 이치는 다 통용된다는 사실이 이를 증거하는 것과 같읍니다.
불 화의 9 는 3,,3, 3 의 삼분위교를 구축합니다. 3의 거듭반복이라.....
발전의 기원은 수 와 화의 개념과 방향 그리고 속성을 파악하여 상수가 동시에 드러난다 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천지창조도 그것이요 수륜으로 모든 만세상 물질계를 심판함에 빛 7 을 사용하신다라는
것은 모든 성인들의 말씀에도 일치한다는 사실입니다.
수와 오행을 발견하는 그 지혜는 황제 였던 것인데. 복희씨 선천괘로서 이어받는 지혜를 말합니다.
주역의 기원인 복희선천팔괘는 바로 기초개념인 것이므로 이를 소개하며 병행하여 진리의 추구를 목적하기 위하여
모든 성인들께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직접 서로 탐구하는 소개글로 진행시킨바가 있는 것입니다.
적도근처에는 석유가 많이 매장되어 있고 조금 떨어진 것은 가스층이 발달되어지는 지질현상을 우리는
지금도 목격할 수 있읍니다.
이러한 모든 근거는 그 상수와 오행의 기원을 살펴보아야 이해가 시작되고 기본개념을 이해하게 될때 공부를 할 수 있음과 같이
종교적이거나 진리를 탐구하는 공부를 할때에는 그 이치의 기원을 반드시 이해하지 않으면 공부는 항상
도로 아미타불입니다.
다시 반복합니다.
지금 질문하신분은 분명하고 기독교의 성경말씀을 믿음으로 봉행하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말씀 을 전제해야 함인데 ..
사실 기독교의 종교인 수는 거의 10 억이 넘어서는 인구입니다.
오로지 성경말씀을 믿고 두터이 하며 그 진리의 가치를 믿어지니는 분들의 세력이나 단체가
이미 수천년에 걸쳐 이루어진 과정이 주어졌다 이 말씀입니다.
그런데다 가 인연법이라는 생소한 타 종교개념으로 발전한 명제를 주장하고 이를 부연하여 설명한다면, 이거 제가 아예 깨주발 나는 발언 아니겠읍니까?
그러므로 모든 것은 또한 신중하고 모든 여건을 고려해서 조신하고 조심하면서 실제가 그렇게 맞다고 하여
소개를 한다 하여도 아주 진중하고 심각하게 일례를 들어가면서 이치에 맞게끔 이야기 하는 것이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러한 인연법의 소개내용도
이미 예수께서 발싸 모두 다 말씀하신 것임에도 그 이해하는 범주가 예수님 생존당시의 백성들의 비젼
고착화에 의하여 감지하지못했을 뿐이라는 이 사실 부터 규명하여 먼저 이해시켜야 할 일이아니겠읍니까?
성명말씀의 경전, 불경말씀의 경전, 전부경, 주역의 경전등은 전부 소상하게 다 원전 그대로의
말씀을 공부해나가면서 자연하게 이해되는 과정을 함축해야 가능하다 할 것입니다.
오히려 부작용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라 할 지라도 우선 언제나 의문부터 시작할 명제 일 것입니다.
성경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준하여 이치에 맞게끔 말씀을 직접적으로 인용하는것을 기준하여
문자와 어휘의 개혁만 해 나가는것을 동반하여 추구하게 된다 하더라도 이미 다 자연스러운 이해관계로
12 인연법이 다 적용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인정하지 말라고 해도 인정하게 되는
그날이 입증되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아멘-
이것을 시도해야 하는 것이므로 경전공부를 하는 것으로 하는 수많은 세월이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옳지 않다고 항변해도 달갑게 수용하고 그러한 견해도 틀린 견해는아니다라는 것에 더욱주의를 기를 것입니다.
옳고 그름의 양면을 떠나는 예수님의 진정한 사람의 메세지를 대면한다며는 말입니다.
스스로 영적으로 대면하는 과정에서 이를 수용여부가 일어날 일이지 언어와 문자로서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거듭 주장하며.
너무 곡해하시지는 말고. 저런 견해도 있구나 정도로 심층 참고할만한 게제 여부를
판단하는 쪽으로 본인글을 읽은분이라도 이런 일면도 있다라고 여기시며 짐작하시기
바랍니다. 더이상 더 이하도 아닙니다.
급한 용무차 몇일 게세를 쉬었읍니다. 다음에 계속하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