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그다 괴벨스
마그다 괴벨스
<어린시절>
나치 독일의 ‘영부인’으로 불렸던 그녀는 1901년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오스카 릿셸은 존경 받는 엔지니어였고, 어머니 아우구스테 베란트는 평범한 집안 출신의 젊은 여인이었다. 마그다의 부모는 그녀가 태어난 이듬해 결혼했고 1904년 그녀가 세살 때 이혼했다. 처음에 마그다는 어머니와 함께 살았지만 다섯 살 때 당시 퀼른에 살고 있던 아버지에게 보내진다.
마그다의 아버지는 딸을 데리고 벨기에 브뤼셀로 이주한다. 이곳에서 그녀는 엄격한 가톨릭 학교에 진학한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매우 활발하고 똑똑한’ 소녀였다고 한다.
어머니 아우구스테
마그다의 어머니는 유태인 사업가 리카르드 프리드랜더와 재혼했고, 마그다가 7살 때 딸이 있는 브뤼셀로 이주해 온다. 마그다는 친아버지, 계부 모두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많은 시간을 그들과 함께 보냈다.
그녀의 가족은 1914년까지 브뤼셀에 살았다. 그 이후에는 반강제적으로 독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독일이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벨기에를 침공하자 현지인들의 보복이 두려워 도피해야만 했던 것이다. 마그다는 쾰른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고, 그녀의 어머니는 전쟁으로 인해 사업이 망한 남편과 이혼했다.
유태인 운동가 하임 아르솔로프
이 무렵, 마그다는 두 남자를 만나게 된다. 한 명은 그녀와 동년배인 유태인 청년 하임 아르솔로프로 이 둘은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 하임과 마그다는 15년 가까이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남자는 귄터 칸트로 그는 당시 독일에서 제일가는 재벌이었다. 마그다는 하굣길에서 우연히 귄터를 만났다. 귄터 칸트는 마그다보다 20살 연상이었고 외향적으로도 매력이 없었지만 마그다에게 친절했고 그녀를 매우 아꼈다. 귄터는 곧잘 마그다의 친인척 행세를 하며 마그다를 팔 안에 안고는 학교 정문까지 데려다 주곤 했다. 귄터의 권유로 당시 계부의 성씨 프리드랜더를 쓰고 있었던 마그다는 릿셸로 성을 바꾸었고 종교도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했다.
<첫번째 결혼>
귄터 칸트의 집안은 BMW, 벤츠 등의 대주주였다.
칸트 가는 나치 정권에 협력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1년 1월 4일, 마그다는 귄터 칸트와 결혼식을 올린다. 이듬해 11월 마그다의 첫 아이인 하랄드가 태어났다.
하랄드 칸트
연회에서
여전히 젊고 아름답고, 이제는 부유한 마그다는 자유를 마음껏 즐겼다. 한 때 그녀는 미국 여행 중 만난 후버 대통령의 조카와 사랑에 빠졌지만 결혼할 마음까지는 없었다. 후버는 그녀를 따라 독일까지 와 결혼 신청을 했지만 마그다는 거절했다.
조제프 괴벨스
이 무렵 마그다는 자신의 삶을 영원토록 바꾸어 놓을 선택을 하게 된다. 마그다는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어느 세 나치 당 파티와 연설장 한 가운데 놓여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처음에는 친구의 권유로 참가했을 뿐이었지만, 점차 그녀는 나치의 프로파간다와 카리스마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나치당의 베를린 지부장이었던 조제프 괴벨스의 열정적이고 카리스마 있는 모습은 그녀를 단숨에 휘어잡았다. 마그다는 사랑에 빠졌다.
한편, 이때까지도 마그다는 고등학교 시절의 연인 하임 아르솔로프와 간혹 만났던 것으로 보인다. 마그다가 나치 간부와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르솔로프는 분노에 못 이겨 마그다를 추궁하다, 끝내 총을 들어 방아쇠를 당기고 만다. 다행히 총알은 빗나가 마그다는 목숨을 구했지만 다시는 하임 아르솔로프를 보지 않았다. 하임 아르솔로프는 훗날 시오니스트(이스라엘 건국 지지파)로 이름을 얻었고, 1933년 팔레스타인에서 암살당했다.
<괴벨스와의 재혼>
마그다와 조제프 괴벨스의 결혼식. 오른쪽 끝은 장남 하랄드.
괴벨스 부부
마그다와 괴벨스는 1930년 히틀러가 증인으로 참석한 가운데 결혼식을 올렸다. 전해지는 얘기에 따르면 마그다는 괴벨스를 몹시도 사랑해 집착으로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괴벨스를 위해 그녀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었다. 마그다는 나치 인사들의 모임과 각종 파티를 집에서 주관했고 히틀러와도 사적인 친분을 유지했다. 괴벨스와의 사이에서 마그다는 여섯 아이들(1남5녀)을 낳았다.
헬가 수잔네
힐데 트라우델
헬무트 크리스티안
홀데 카트린
헤다 요한나
하이디 엘리자베트
장남 하랄드와 장녀 헬가
히틀러는 헬가를 특히 예뻐했다고 전해진다.
갓 태어난 차녀 힐데와 함께한 가족.
그러나 괴벨스는 결혼에 충실하지 않았다. 그는 여러 명의 애인을 두었고 마그다에게 자신의 혼외정사를 묵인할 것을 요구했다. 마그다로서는 가만히 앉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괴벨스는 특히 체코 여배우에게 매료되어 그녀와 한때 결혼을 고려할 정도였다. 괴벨스의 정사 장면을 직접 목격하자 마그다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이혼을 결심하게 된다.
괴벨스 가족이 거주한 슈반베르더.
본래 유태인 부자들이 많이 살았지만 나치 정권에 의해 몰수 당했다.
그러나 독일 국민에게 ‘이상적인 가족’으로 선전되었던 괴벨스 부부의 이혼은 허용될 수 없었다. 히틀러는 마그다에게 중재안을 내놓았다. 체코 여배우를 추방시키고, 마그다의 허락 하에서만 남편이 아이들을 만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후에도 이혼을 여전히 원한다면 허용하겠다고 했다.
헬가, 하랄드, 힐데.
조제프 괴벨스는 장녀 헬가를 특히 사랑했고 집에 퇴근해 돌아오면 항상
그녀의 방부터 들렀던 것으로 전한다. 한편, 하랄드도 친아들처럼 대했다.
헬가, 힐데와 함께 한 마그다.
헬가는 어머니를 닮아 칠남매 중 가장 활달하고 명랑한 성격이었다.
슈반베르더에서 찍힌 가족 사진.
넷째 헬무트가 안고 있는 아기는 홀데.
홀데는 조용하고 수줍음을 잘 탔는데 이 때문에 괴벨스는 그녀에게 많은 신경을 썼다.
괴벨스와 6남매
히틀러와 마그다
마그다는 히틀러와 사적으로 친했고 나치와 히틀러를 공공연히 지지했다. 그러나 점차 소련과의 전쟁이 불리해지자 히틀러에 대한 믿음을 잃기 시작했다. 전쟁 막바지에 이르자 그녀는 다음과 같이 지인에게 말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성을 잃었어. 그가 듣고 싶은 말만을 하는 자들은 그를 믿는 사람뿐이야.”
마그다가 유태인 학살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취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녀가 남편 괴벨스에게 자신의 유태인 계부와 동창을 살려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전해지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마그다의 계부 리카르드 프리드랜더는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마그다의 장남인 하랄드 칸트는 독일 공군에서 근무했고, 마그다 자신도 ‘애국적인 어머니’의 모습을 선전하기 위해 적십자 간호사로 훈련 받았다. 그녀는 버스로 출퇴근할 것을 고집했다.
<최후>
최후의 순간은 갑작스레 다가왔다. 1945년 4월 소련군이 베를린으로 진군하자 괴벨스 가족은 베를린의 지하 벙커로 숨어든다. 소련군이 베를린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강간한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벙커 내에서는 소련군으로부터 받을 모독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살이 거론되었다. 많은 고위 인사들이 자살을 선택했고, 마침내 4월 30일 히틀러와 그의 부인 에바 브라운이 자살했다.
이로부터 이틀 전 마그다는 공군에 있는 자신의 장남에게 편지를 쓴다. 이 편지만이 현재 유일하게 전하는 마그다의 친필 편지이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아! 지금 우리는 6일 째 벙커에 있단다. 네 아빠, 6명의 동생들 그리고 나까지.. 모두들 국가사회주의(나치)적 삶의 명예로운 끝을 위해서 말이다……. 너는 알아야만 한다. 나는 아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기 벙커에 남기로 결정했단다. 지난 토요일에는 수상(히틀러) 각하께서 너의 동생들과 나를 도피시키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남았어.. 너는 나를 알잖니. 우리는 같은 피를 나누었어. 나는 결코 망설이지 않았단다. 내가 내 평생 알았던 모든 대단하고 아름다운 것들과 함께 우리들의 영광스러운 이상은 이제 죽었단다. 수상 각하와 국가사회주의(나치즘)가 없는 세상은 살 가치가 없어. 그래서 나는 네 동생들을 나와 함께 데려가려고 해……. 아이들은 너무나도 예쁘고 사랑스러워…… 그들은 울거나 투정하지도 않았지. 폭탄 투하로 인해 벙커 전체가 흔들리고 있단다. 큰 애들은 어린 동생들을 보살피고 있어. 그 아이들의 존재감은 축복과도 같아. 가끔 그 아이들 때문에 수상 각하는 미소를 지으시기도 하지…… 제발 내가 가장 어려운 최후의 선택을 수행할 수 있도록 신이 나와 함께 하기를.. 이제 우리에겐 마지막 선택만 남았단다. 죽음으로 수상 각하께 충성하는 것이란다. 하랄드, 나의 사랑스러운 아들.. 너에게 내가 평생을 걸쳐 알게 된 것을 말해주고 싶구나. 충성! 너 자신에게, 너의 국민에게, 너의 국가에! 우리들을 자랑스럽게 여기 거라. 그리고 항상 우리들의 모습을 기억해 다오…… “
보겐제의 괴벨스 빌라의 쓸쓸한 모습.
당시 벙커 안에 있던 건축가 알베르트 슈피어는 아이들만이라도 살려서 도망시키자고 건의했지만, 마그다는 이미 결심을 굳혔다. 1945년 5월 1일 마그다의 여섯 아이들은 모르핀을 투여 받고 깊은 잠에 빠졌다. 마그다는 아이들 한명 한명의 입 안에 청산염 캡슐을 집어넣었다. 첫째인 12살 헬가는 자는 도중 깨어나 격렬하게 저항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여섯 아이들 모두 끝내 독살되었다. 아이들의 사체는 다음날 소련군이 벙커 안으로 들어오면서 발견되었다.
아이들을 죽인 후 마그다와 조제프 괴벨스는 벙커 밖으로 나와 자살했다. 부부의 사체는 유언대로 불에 태워졌지만 연료 부족으로 미처 다 소각되지는 못했다. 괴벨스 가족의 사체는 소련군이 비밀리에 매장했다가, 1970년 화장되었다. 그들의 재는 엘베 강에 뿌려졌다. 이것이 ‘독일 제국의 영부인’이었던 여성의 최후였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마그다의 유일한 자녀인 하랄드 칸트는 1967년 이탈리아에서 비행기 사고로 죽었으며 슬하에 다섯 딸을 두었다.
첫댓글 흥미롭게 잘 봤습니다..........우리나라 친일파들은 아직까지 떵떵거리면서 잘사는모습이 오버랩되네요..왜인지 모르게..
22222222222222222222222222
정말 잘 읽었습니다.
우와,,재미있는 역사이야기..
와~푹빠져서 봤어요 재밌다 ㅋㅋ
잘 읽었습니다. 스크랩할게요.
정말 푹빠져서 봤어요. 잘 읽었습니다!
재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이런 자료 너무 좋아요~~ 감사하긔~~
정말 흥미롭게 잘봤어요 이런게시물 너무좋네요^^
자기 손으로 어떻해 자기 애들을 죽였을까..무섭다...정말 무섭다...난 울 애기 손톱도 살 다칠까봐 부들부들 떨면서 자르는데...이념과 이상에 사로 잡힌다는게 저런 걸까 ㄷㄷㄷㄷ
2222222222 애들이 제일 불쌍하네요. 무슨 잘 못이 있다구.
그러니깐 바보같은 질문이지만 히틀러랑 괴벨스는 무슨관계?이죠?
이런얘기 새롭다.. 잘읽었어요~~
모정은 위대하다고 하지만 광적인 맹신은 그 모정보다도 더 질긴 것이네요..어떻게 자기가 믿는 것들을 위해서 어린 자식들을 직접 죽일 수 있었을까????
2222222 그러게요.....
제가 알기로는 히틀러를 존경을 넘어서 (정신적)사랑하다시피 한걸로 아는데,,히틀러때문에 괴벨스 옆에서 산거라고,,ㅎ
자식은 니 소유물이 아니다
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고마워요~~잘읽을게요^^
잘 읽었어요. 하마터면 이런 재미있는 게시물을 그냥 지나칠 뻔 했네요. 그나저나 마그다 솔직히 제 독일 친구랑 많이 닮았어요. ㅎㅎ 아무래도 같은 독일 혈통이라서 그런가..
잘읽었어요 헐................................................................................................... 아이를 죽였네..
괴벨스 악마 같아요. 어렸을 적부터 소아마비를 앓고 있어서 그 열등감 같은 거에 동정이 갔는데 독일에서 선전부 장관(?)되고나선가, 영화 제작에 깊이 참여하면서 여자배우들하고 깊은 관계를 한번씩 가지거나 거부하는 여배우는 영화출연못하게 하는 거 보고 진쨔 드럽게 느껴졌어요. 이건 저 사람 과오의 십분의 일도 안되는 가벼운 거겠지만요..
얘들은 왜 죽이는지
역사는 역시..... 괴벨스 악마같은 피의 자손은 결국 대가 끊긴거군. 하랄드만 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