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서의 아픈 추억
조 흥 제
문우들이 파주 문학기행 가자고 한다. 자가용차로 회원의 안내를 받아 임진각에 갔다. 일행들은 구경하고 나는 숨이 차서 다니지 못하고 광장에 앉아서 강 쪽을 바라본다. 그전에 없던 곤돌라가 생겼다. 강을 건너서 산 위로 가지 않고 밑으로 가는 것이 다른 곳과 달랐다. 거기에 통일촌이 있는데 거기까지 가는가 보다. 강 건너서 조금만 더 가면 내가 살던 고장이었지만 지금은 남방한계선에 들어 있어 민간인이 가지 못하는 고장이 됐다.
90년대 초에 KBS에서 주최하는 열린음악회를 임진각에서 열어서 구경 갔었다. 문산에서 버스를 타고 가다 내린 곳에 철도 종단점이라는 팻말이 있었다. 거기서부터 철도 옆으로 걸어서 갔다. 임진각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이 뚜렷하게 생각난다. 한국 전쟁이 나던 날 배로 임진강을 건너 이튿날 가족을 만나 어느 집 추녀 밑에서 밥을 해 먹었는데 그 마을이 여기다. 피란 가다 전쟁이 앞서 가 다시 고향에 들어가 살다 1.4 후퇴 때 나왔다. 마지막 헤어질 때 큰누님과 어머니가 껴안고 울던 언덕이 강 건너 보이는 산 능선이다. 누님네 식구는 다 나왔으나 누님과 어린 아들은 못 나왔다. 임진각에 올때마다 건너편 능선을 보고 그때를 생각한다.
임진각 구경을 끝내고 두지리 민물고기 매운탕집으로 점심 먹으러 간다고 했다. 두지리 건너가 내 출생지다. 해방된 직후까지 살던 고향이어서 반가웠다. 지금도 작은누님이 살고 일가들이 많이 산다. 두지리는 임진각에서 강을 끼고 20여 ㎞ 상류로 올라가는 거리에 있다. 인근에 황포돛배 선착장이 있어서 유명한 고장이 됐다. 휴전 후 민간인이 못 들어가는 비무장지대였는데 김영삼 정부 때 풀려 전쟁 전에 운항되었던 황포돛배를 재현하여 관광용으로 개설했다. 황포돛배는 고랑포 여울목까지 5㎞를 갔다 돌아오는 코스다. 그 코스에는 강 양쪽에 석벽이 계속되어 아름답다. 황포돛배 구간에도 거북바위, 자장리 석벽, 호로고루성이 있다. 호로고루성은 3국 시대 때 세 나라의 축성기법이 다 들어 있는 특이한 성이다. 호로고루 성 밑은 여울목인데 거기서 배가 회전한다. 여울목은 가물 때는 걸어서도 건넌다. 1.4 후퇴 때 북에서 피란 오던 사람이 여울목으로 건넜다는 황포돛배 해설사의 증언이다. 여울목 밑에 고랑포라는 큰 마을이 있었는데 거기는 학교도 있었다. 거기서 배들이 농산물을 싣고 서울까지 가서 마포나루에서 팔고 강화에 들러 활어를 사 왔다. 해설사는 두 편의 시를 낭송했다. 고려 때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이 왔다가 지은 시다.
가을바람 솔솔 불어
물은 망망한데
머리 들어 하늘을 보니
마음만 망망 하구나
가엾은 미인은 천리에 떨어져 있는데
강가의 난초는 누구를 위해 향기로운가.
강기옥 시인이 황포돛배를 탔다가 즉석에서 지어 선장에게 주었다는 시도 낭송했다.
강물에 둥실
사랑이 실려 가면
임진나루 뱃사공아
길 떠나온 가난한 가슴에도
사랑 한 모금 담아 주렴
나루 건너 물 건너 강물로 살다가
자취도 없이 사라진
고운님 소식도 전해 주렴
호적도 없는 역사의 숨결에도
강물은 도도히 출렁이고
햇살의 파편은
조각난 역사를 아름답게 꾸며 내는데
임진나루 뱃사공아
내게도 흘려버린 사랑을 나누어 주렴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아 주렴
황포돛배 나루터에서 1㎞ 정도 하류로 내려 가면 내가 태어난 고향이다. 마을 이름은 원당리였다. 동산 너머가 임진강이고 빨래터가 있다. 그 건너에 자장리 석벽이 있는데 멀어서 잘 보지 못하다가 황포돛배를 타고 바로 앞을 지나서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붉은 기둥을 여러 개 세워 놓은 것 같고 옆으로도 줄이 쳐져 있어 아름답다. 그런 바위를 주상절리라고 하는데 그 대표적인 바위가 금강산 총석정이다.
빨래터에는 잊지 못할 아픈 사연이 있다. 여섯 살 때 엄마와 작은누나가 빨래하러 가는데 따라 갔다. 나는 그 앞에서 빨가벗고 물장구치면서 노는데 물에 담가 놓았던 할아버지 모시 두루마기를 누나가 떠내려 보냈다. 엄마는 야단치면서 찾으러 강으로 들어 가셨다. 물안개가 끼어 어머니 모습이 안 보이자 누나는 울면서 강으로 들어갔다. 나도 따라가려 했으나 물이 깊어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강가에 쪼그리고 앉아서 엄마를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다. 엄마와 누나가 물에 빠져 죽은 것 같아서 ‘물안개야 우리 엄마를 보내다오.’하면서 울었다. 기다리다 지쳐서 집에 오니 아무도 없어서 울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흥제야, 일어나 저녁 먹어라.’하는 소리에 깼더니 날은 어두워 등경 위에 등잔불이 켜지고 둥근상에 우리 식구가 다 둘러 앉아 있었다. 상에는 큰 냄비에 내가 좋아하는 숭어찌개가 들어 있었다. 죽은 줄 알았던 엄마와 누나가 살아 왔을 뿐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숭어찌개까지 있으니 그때같이 기쁜 날은 없었다. 나는 잃어버린 것이 빨래 방망이로 알았는데 모시 두루마기였다고 며칠 전 갔을 때 누님이 정정해 주었다. 끝내 두루마기를 못 건져 포기하고 가에 팔뚝만한 숭어가 팔딱거려 건져 왔다고 한다. 숭어를 잡아와서 엄마는 죄를 면하였지 그렇지 않았으면 크게 혼났을 거라고 누님이 말했다. 가난한 집에서 모시 두루마기 해 입기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근에 말승냥이가 많았다. 늑대를 거기 사람들은 말승냥이라고 했다. 날이 저물면 사방에서 우는 늑대 소리가 들려 아이들은 꼼짝을 못했다. 우리 돼지를 대문 밖 마당가에서 길렀는데 늑대에게 물려 죽었다. 나도 3살 때 늑대에게 물려 갈 뻔했다. 어느 날 밤 어머니가 나가시면서 붓글씨 쓰시는 할아버지께 옆에서 자고 있는 나를 깨면 달래 주시라고 하고 갔다. 할아버지는 귀가 절벽이셨다. 내가 깨서 보니까 엄마가 없어서 울었다. 할아버지는 달래지 않고 붓글씨만 쓰셨다. 나는 밖에 나가니 달밤이어서 엄마를 부르면서 찾아 다녔다. 얼마만에 엄마가 와서 보니 내가 없었다. 할아버지께 ‘흥제 어디 갔냐.’고 여쭈니 ‘몰라, 울더니…….’하셨다. 엄마는 동네를 뛰어 다니면서 ‘흥제야’를 크게 불렀다. 밑에 집 할머니가 ‘흥제 여기서 잔다.’고 했다. 내가 울고 다니니까 그 집 할머니가 데려다 재웠다. 그 할머니가 아니었으면 나는 늑대에게 물려갔을 지도 모른다.
어느 날인가는 마을 사람들이 우물 가에 모여 완장을 차고 가는 젊은이를 배웅했다. 일본군에 나가는 사람이라고 했다. 우리 아버지도 징용에 나오라고 하여 집을 나가 숨으셨다. 언젠가 마을 사람들이 고랑포로 몰려갔다. 해방이 되어 만세 부르러 가는 사람들이라 했다. 우리도 장단역으로 이사 갔다.
고향에서 살 때는 2차 대전 중이어서 고생은 많았지만 글 쓰는데 밑거름이 되니 전화위복이 된 느낌이다.
첫댓글 전후 고생하신 삶이 글감으로 거듭나니, 다행입니다. 문운 왕성하시기 바랍니다.